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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물미장 / 류현승


 객주 문학관에 들어섰다.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많은 식솔이 먹고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었기에 논바닥이라야 함지박만 했다. 가족에게 목숨 줄과 같기에 아버지는 문전옥답으로 여기며 농사를 지었다. 살얼음이 녹기도 전에 못자리를 하고 나서부터 논으로 가는 날이 잦아졌다. 안방보다는 산골짜기가 편한지, 아버지가 논에 가지 않는 날은 밥에 뉘같이 드물었다. 

 아버지의 지게는 유난스레 높았다. 짐을 많이 싣기 위해, 지겟가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까막서리 양쪽으로 다른 막대를 덧대 묶어 높이를 더했다. 그러고는 누렇게 익은 나락을 지게 위에 쌓아올렸다. 우기가 감도는 날이면 베어놓은 나락이 비에 젖을세라 꼭두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집과 논을 오갔다. 멀리서 보면,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나락볏가리가 공중에 뜬 채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다 보니, 밤마다 빨갱이들이 와서 괴롭혔다. 자칫 자식에게 해를 입힐까봐 아버지는 집을 버리고 큰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리하여 애써 개간한 논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산모퉁이 몇 개를 돌고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논에 닿을 수 있었다. 가는 길은 오르막이라서 숨이 턱에 닿아 입에서 단내가 났고, 오는 길은 내리막이라서 산짐승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후르르 뛰어 내려왔다. 빈 몸으로 다니기에도 힘든 길이었다. 그런 길에서 나락을 지고 후들후들 다리를 떨던 아버지가 잠시 쉴 때는 지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작대기로 받쳐 놓았다. 

 아버지는 분답잖게 봄비가 오는 날이면 창고 앞에서 지게 만들기에 열중했다. 끌과 자귀로 뚝딱뚝딱 나무를 다듬는 소리가 늦잠 자는 내게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겟가지 두 개를 바로 세워 놓고 중앙에 세장을 붙여 몸체를 맞댔다. 정으로 지게 목발에 구멍을 뚫은 다음, 짚을 물에 축여 꼽꼽해지면 나무망치로 토닥토닥 두드려 등석을 엮어 붙였다. 어깨에 메는 미끈은 긴 머리를 땋듯 정성스레 땋아 지게에 달았다. 

 지게를 손보고 나면 아버지는 지겟작대기를 만들었다. 위쪽이 가위처럼 벌어진 나무를 골라 아버지의 키에 맞게 잘랐다. 겉을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송곳처럼 뾰족한 쇠를 끝 부분에 박았다. 아버지는 빈 지게를 진 채 작대기로 땅을 몇 번 짚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대기 끝에는 쇠가 들어가도록 둥글게 말아놓은 놀구멍이 없다. 슴베가 잘 들어가게 하는 괴구멍도 파지 않는다. 작대기 끝에 쇠를 박으면 그것이 물미장이다. 호미나 낫에는 힘을 받도록 테두리를 감싸주는 신쇠가 있지만 물미장에는 아무런 치장도 없다. 오직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묵묵하게 삶을 지탱하는 내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농사일밖에 몰랐다. 땀에 젖은 베적삼에 논 갈고 밭을 갈았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지 우직하게 일만 하였다. 밤이면 끙끙 앓아도 날이 밝으면 들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오직 땅만 아는 샌님처럼 땅 한 뙈기 늘이는 일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다. 그런 아버지는 일을 놓으면 밥숟가락을 놓는 것과 같다고 여기셨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날 때 작대기는 요긴했다. 촉이 땅에 쏙 들어가라고 아버지는 작대기에 힘주어 꽂았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작대기를 짚고 한 손으로는 지게 목발을 잡고 무릎을 천천히 세웠다. 비탈진 길에서는 작대기로 지탱하며 한 발 두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아파도 묵묵히 버틴 아버지에게 지게와 작대기는 한 몸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길도 아닌 비탈 섶을 넘나들었다. 촉이 박힌 작대기로 땅을 짚으며 산속의 적요를 발걸음으로 사각사각 깨워가던 길. 아버지의 발바닥에 굳은살을 덧대게 한 그 길엔 이제 울울창창 숲이 우거져 있으리라. 산골짜기 하나를 길게 차지했던 논은 주인의 부재를 알까. 여름이면 어김없이 하얀 벼꽃을 피우는지 궁금하다. 

 가끔 작대기가 사립 안에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그것으로 마당에 금을 그었다. 반대차기나 땅따먹기를 할 때 몸을 구부리지 않고 금을 그을 수 있었다. 물미장으로 그은 금은 밟아도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뒷밭에 독사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김을 매다가도 촉이 박힌 작대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창처럼 뾰족한 물미장에게 죽임을 당한 독사는 개울가에 있는 가시나무에 연 꼬리처럼 걸리기도 했다.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리고, 죽음을 배우는 데도 그만큼 걸린다고 한다. 사람은 늙어야 사방이 보인다는 성인의 말이 있듯,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나서야 아버지를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었다. 노부모의 장남이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여러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마을에서는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농사꾼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전에 평범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소낙비 지나가듯 가버리는 것이고 보면, 아무리 바동거려도 살림에 주름이 펴지지 않으면 다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 않았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었을 것이며, 친구들이 요사스런 자리에서 장단에 맞춰 가무를 즐길 때면 왜 휩싸이고 싶지 않았으랴. 약주를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처럼 취생몽사로 적당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삼불주의 三不主義를 지켰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뿌리쳤을 것이다. 

 철부지 때는 지게를 지고 다니는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내 삶에 있어 이러한 기억의 화첩은 비밀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면서 힘든 일에 부닥쳐도 옛 그림을 떠올리며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물미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연필심 같은 촉으로 기억을 다시 쓴다. 아득한 풍경이 연막처럼 퍼지다가 복통처럼 가슴을 내리누른다. 아버지의 삶이 납덩이같이 머릿속에 남아 무거운 공기를 타고 서서히 퍼진다. 평평한 일상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벼랑에서 피운 삶. 비탈길을 오르고 아찔한 낭떠러지 옆을 조심스레 걸어온 아버지의 삶이 전시관 유리 안에 박제 되어 있다.

 오늘 아버지의 삶을 다시 읽는다. 그 시절의 화첩을 몇 장 넘기다가 덮는데, 마음의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꾸다 만 꿈처럼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당선소감>


 꿈에 아버지가 아무 말씀 없이 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편찮으신 어머니의 손을 잡는 순간에 깨어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선통보를 받았습니다. 순간 꿈에 본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성탄절에 날아온 선물이었습니다. 

 수필은 하얀 공간을 메우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채우면서 내면의 아픔을 숨기고 싶었지만, 펜은 자꾸만 즐겁던 일보다 아픔을 후볐습니다.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썼습니다. 수필은 내게 있어 내면의 허물을 한 겹씩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더 깊은 사색의 길로 떠나야겠습니다.

 그동안 채찍질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머리를 맞대고 긴 시간 함께한 문우님과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딸에게 빚을 졌습니다. 

 졸작을 선정해 주신 심사 위원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큰 문학의 장을 열어주신 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눈부시게 솟는 해처럼 병신년 새해에도 빛나는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심사평>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수필은 150명의 작품으로 총 332편이었다. 한 편의 수필을 위해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공을 들여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예년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글들이 많았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담아 두었다가 자신의 기억을 역사화 하면서 풀어 쓴 수필은 새로운 감동이 된다. 단순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문학과 삶이 자유롭게 교차할 수 있다면 좋은 수필이다. 응모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류현승의 〈물미장〉을 뽑았다. 객주문학관에서 발견한 물미장을 통해 평생 지게 짐을 진 아버지를 연상함으로써 물미장의 존재를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승화시킨 점이 돋보였으며 문장의 구성 또한 자유로운 점이 뛰어났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문학이 삶의 물미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깝게 탈락했지만 김형만의 〈점촌〉도 오래 들고 있었던 글이다. 독짓고 옹기 굽던 점촌이 없어지고 어머니 떠나신 장독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져 있는 글의 소재가 좋았다. 현대와 과거를 좀 더 섬세하게 엮었다면 더욱 완성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조이섭의 〈널밥〉, 최재선의 〈못의 미학〉, 윤희순의 〈도래샘〉, 박일천의 〈바람꽃〉 역시 잘 쓰여진 글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가면>,<시금치 판 돈>,<부부>,<청국장 냄새>,<제사>,<푸른꽃>,<가방>,<할매매운탕>,<섬진강 패랭이꽃>,<절구에 얽힌 내력> 등의 작품에서 보여 준 가족의 소중함은 수필이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에 남는 글이었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조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