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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무덤이 조금씩 / 위수정

 

  베티 스미스. 1877-1916. 비석 양쪽 끝에는 작은 새가 마주보는 모양으로 음각되어 있었다. 아랫부분은 이끼가 피어올라 얼룩이 심했고 표면은 오랜 시간 마모되어 글자가 희미했다. 비석 중앙에는 여자의 얼굴이 각인되어 있었다. 살짝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귀 앞으로 늘어뜨린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길고 오뚝한 콧날에 눈이 갔다. 마모가 심한 다른 부분에 비해 유독 여자의 얼굴이 조각된 부분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름 밑에는 ‘배우’라고 적혀 있었고 이어서 ‘드루리 레인의 작은 보석’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진욱과 나는 이 ‘작은 보석’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체구가 작았던 거 아닐까. 진욱이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니야. 조연 배우였을 거야. 그래서 ‘작은 보석’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한 게 분명해. 내 말에 진욱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지만 그것이 동의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몇 미터 아래에 베티 스미스라는 생소한 이름의 배우가 묻혀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뭔가가 남아 있을까? 머리카락이라든가 손톱 같은. 나는 딛고 있는 오른쪽 발을 떼고 좀 더 뒤로 물러섰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한국의 공동묘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묘비들의 간격도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삐뚤삐뚤하게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돋아난 잡풀들과 사람의 손을 한 번도 타지 않은 듯 가지가 제멋대로 자란 오래된 나무들이 무성했다.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비석들이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앞뒤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엉망인 것들도 많았다. 입장료를 받아서 어디에 쓰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안쪽의 묘지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숲 속에 버려진 공동묘지가 있다면 이런 분위기일 거라고 진욱에게 말하자 그는 그래도 너무 깔끔하고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보다는 훨씬 낫다고 했다. 진욱의 말에 나는 싱긋 웃었는데, 그가 조금 전에 보았던 마르크스의 묘지를 떠올리며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진욱이 마르크스의 묘지를 보기 위해 이곳을 일정에 포함시켰고 나는 하이게이트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입장료를 받는 것도 입구에 마르크스의 묘지를 프린트해서 광고 해 놓은 것도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육중한 비석 위에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보란 듯이 올려져 있는 묘비를 보고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진욱은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나는 좀 억울했다. 진욱의 기분이 나쁜 것은 나의 웃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웃어버린 것을 이해할 만큼 자신도 실망했기 때문일 텐데. 황금빛으로 덮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는 문구도 어딘지 유치해 보였다. 어린 백인 커플이 묘비 아래에 장미꽃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이미 그곳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꽃들이 꽤 있었는데도 왠지 쓸쓸한 느낌이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묘를 볼 수 없는 게 다행이라고 내가 농담을 던지자 진욱도 굳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욱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으면 좀 더 나았을 거라고 했다. 춥고 스산하면 그나마 좀 어울릴 것 같다고. 나는 웃었고 진욱은 내 손을 잡았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그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8월이었지만 런던의 여름은 서울에 비해 무척 선선했다. 우리는 여기까지 찾아온 노고와 입장료가 아까워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진욱은 유독 사진 찍는 걸 꺼려서 내가 카메라를 꺼내들면 먼저 앞서 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내가 찍은 사진에는 주로 그의 뒷모습만 담겨 있었다. 청바지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힘없는 걸음걸이, 뒷덜미에 띄엄띄엄 자라나는 흰머리와 어깨뼈가 도드라진 마른 등이 새삼스러웠다.


  나무가 우거질수록 인적은 드물어졌고 축축한 흙냄새와 풀 향기가 짙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둥치가 커다란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체를 묻은 곳에는 식물들이 더 잘 자란다고 했었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고 걷느라 땀이 났던 등이 서늘해져 소름이 돋았다. 여기 문 닫을 때 다 돼가는 거 같아. 내가 말했지만 진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욱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벗어나 잡풀이 무성한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베티 스미스의 묘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묘지에 각인된 여자의 얼굴이, 나중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눈길을 끌었다.


  진욱은 가방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어 비석 앞 무성한 수풀 위에 깔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간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새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새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진욱은 바닥에 깐 점퍼 위에 앉았다. 나는 이만 나가자고 했지만 진욱은 지금 너무 피곤하다며 잠깐만 쉬자고 했다. 내가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여기에 이러고 있어도 돼? 내가 물었다. 왜 누가 안 된대? 아니, 땅 속에 죽은 사람들이 있잖아. 내가 작게 말하자 그는 웃으며 너무 옛날에 죽은 사람들이라 이제 흙이나 똑같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는 일 년 새 얼굴이 핼쑥해져서 원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진욱의 손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너도 누워봐. 달라.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가 잠시 뒤에 그의 옆에 누웠다. 허벅지를 누르고 있던 그의 머리를 치우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의 말대로 앉아 있을 때와는 풍경이 무척 다르게 보였다. 들꽃들이 우리를 감싸주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과 햇빛이 닿은 초록의 이파리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등에 닿는 흙바닥의 서늘한 기운도 싫지 않았다. 앉아서는 도통 찾을 수 없던 새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 비석 앞에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이 모여 애도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비통한 표정의 하객들과 관 위에 뿌려지는 흙. 백 년 전의 장례식이 있던 날,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고개를 숙였고 레이스 장갑을 낀 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그들이 슬픔에 찬 표정으로 보고 있는 비석 앞에 우리는 지금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날이 오늘과 겹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청바지에 셔츠 차림의 아시아 커플이 어느 날 당신의 묘지에서 쉬어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녀의 관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장례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내일의 계획을 말하며 사야 할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늘 장례식은 벌써 오래전 일 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며 서로를 껴안고.


  자살 아니었을까? 누군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겠지?


  병이었을 확률이 높지 않겠어? 그 당시 저 나이면 아주 젊은 것도 아니었을 테고.


  조연만 맡은 인생을 비관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살해당했을지도.


  우리는 백 년 전 죽은 여배우에 대해 건성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러다 진욱이 한동안 말이 없어 살펴보니 잠이 들어 있었다. 여독이 겹친 데다 가끔씩 얼굴에 닿는 기분 좋은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강했을 때 진욱은 바닥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투병을 시작한 이후로는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종종 잠을 설쳤다. 일 년 남짓한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를 바로 깨우기가 뭣해서 잠깐만 쉬게 두기로 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렇게 우는 새도 있었나? 시간이 지나면 관리인이 우리를 내쫓을 텐데. 이제 그만 진욱을 깨워야지. 그런데 내 눈 앞에 새가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온통 검은데 머리 부분만 사파이어처럼 차갑고 쨍한 파란색 털로 덮여 있었다. 새는 작고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간혹 부리를 벌려 또로로로 소리를 냈는데 그럴 때마다 새의 붉은 혓바닥이 빠르게 떨렸다. 새가 웃었다. 새가 웃을 수도 있나?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새는 또로로로 소리를 내며 하늘을 바라보며 또 웃었다. 한다는 생각이 죄다 병신 같군. 새는 매끄러운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어? 새가 말도 할 줄 아네? 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you belong to here. 새는 이제 영어로 말했다. 나는 새의 파란 깃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이 부시도록 차갑고 깊은 파란색.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 나의 손가락이 새의 보드랍고 작은 머리에 닿으려 했다. you don't belong to here. 그 작은 머리에 그 새파란 깃털에 닿은 것 같았는데. 분명히 닿았는데, 진욱이 내 이름을 불렀다. 몸을 일으켜 보니 눈앞에는 중년의 백인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새를 찾아보았다. 꿈이 아닌 것만 같아서.


  남자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묵직한 수동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우리 자는 모습을 찍었대. 그리고 깰 때까지 기다렸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지. 셔터 소리에 내가 먼저 깼으니까. 바닥에 깔았던 옷을 털어 접으며 진욱은 내게 띄엄띄엄 말했다. 남자는 50대 후반쯤으로 보였고 팔을 걷어 올린 자주색 셔츠가 잘 어울렸다. 그는 어리둥절한 내 표정 때문인지 몇 번이나 사과했다. 자신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름이 뭐에요? 생각나는 영어가 그것밖에 없어서 대뜸 물어보았다.


  자신을 헨리라고 소개한 남자는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연한 푸른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음울해보였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짐짓 놀란 어조로 말했다. 어쩌지? 폐장 시간이 훨씬 지났어.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진욱이 헨리가 운전하는 낡은 아이보리 색 미니의 좁은 뒷좌석에 앉아 작게 말했다. 이게 말이 돼? 나 말이야, 거기서 잠이 든다는 게. 나는 저녁노을이 내려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헨리는 우리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진욱은 그 제안에 크게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헨리는 필름을 인화하는 데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니 원한다면 바로 보여줄 수도 있다고 했다. 결과물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시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는 며칠 후면 서울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의 사진이 런던의 갤러리에서 전시가 되는지의 여부는 어차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잠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낡은 미니를 타고 런던 시내 드라이브를 해보고 싶었다.


  헨리가 사는 헤머스미스는 런던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동네로 템스 강에 인접해 있었다. 우리가 묵고 있는 첼시와도 멀지 않다는 헨리의 말에 진욱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아담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로 차를 몰았다. 번화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늑함과 고요함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이층 석조 건물이었는데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었다. 집집마다 불이 하나 둘씩 켜져 있었고 도로는 널찍하고 깨끗했다.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이 간혹 보였고 행인은 거의 없었다. 낯선 사람이 다니면 금방 눈에 띌 것 같았다. 게다가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이런 동네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걸까? 내가 진욱에게 물었다.


  영국 사람들이 살겠지. 영어만 쓰는. 그래서 말인데, 다 같이 있을 땐 영어로 말하자. 그게 예의잖아.


  헨리는 장미 덩굴과 나무 몇 그루가 있는 작은 공원 옆의 이층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외관이 검은 벽돌로 장식된 정사각형의 단순한 형태였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창으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헨리에게 가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려 헨리에게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했더니 그는 그곳을 공동 정원이라고 알려 주었다. 진욱은 더 짙어진 노을 때문인지 눈을 찡그린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방금 뭔가 본 것 같아.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으나 거기엔 덩굴 사이로 보이는 비어있는 벤치와 조금 더 멀리에 있는 작은 연못과 연못 중앙에 솟아 있는 분수대가 전부였다. 나는 분수대를 좀 더 잘 보기위해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보았다. 물고기를 안고 있는 천사 모양의 분수대였는데 물고기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물이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예쁘네. 곧 어두워지겠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진욱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봤어? 너도 봤지? 어디로 갔지?



  헨리가 현관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헨리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파란 눈의 남자였다. 헨리의 눈이 연한 파란색인데 비해 그의 눈은 무척 짙고 깊은 파란색이었다. 피부도 까무잡잡했다. 집 안에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고소한 버터 향과 실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남의 집 냄새.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아내가 나올 것 같아 기다렸지만 다른 발소리는 결국 들리지 않았다. 헨리는 우리에게 조슈아를 소개시켜 주었다. 헨리의 파트너라고 했다. 우리는 오, 그렇군요. 반가워요. 하며 지나치게 과장된 감탄사를 섞어가며 인사했다. 예정에 없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조슈아는 급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우리에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돌아서서는 왠지 이마를 찌푸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헨리는 개의치 않고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다. 실내는 생각보다 아담했다. 거실에는 회색의 패브릭 소파가 있었고 커다란 창에는 하얀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테이블 위 꽃병에 가득 담긴 보랏빛 수국이 거실을 한층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헨리는 잠깐 실례한다며 자리를 비웠다.


  남겨진 우리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내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좀 더 예쁜 모양의 운동화를 신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운동화가 내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갈까? 진욱이 침묵을 깼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집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어쩌면 헨리의 차에 올라탔을 때부터. 아니 헨리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벽지나 소파는 새것 같았으나 창틀이나 가구들은 오래되어 보였다. 나는 낡은 책장 앞에 섰다. 거기에는 책과 장식품, 액자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여자는 초록색 투피스에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말아 올린 붉은 머리와 커다란 눈이 아름다웠는데,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분노로 가득 차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바로 옆에는 팔짱을 낀 채 역시나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소년이 서 있었다. 반바지를 입어 탄탄하고 곧게 뻗은 다리가 한참 성장하는 소년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외모에 무심해 보였고 그 아무렇지 않은 포즈가 더 매력적이었다. 아무도 웃고 있지 않은 빛바랜 그 사진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어 나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헨리가 한 손에는 와인, 다른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내 전 아내와 아들이에요. 나는 오, 그래요? 하고 또다시 과장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어느새 진욱도 다가와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는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헨리는 거실 창을 열었다. 실내로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고 얇은 레이스 커튼이 가볍게 붕 떠올라 공중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했다. 시늉만 하는 줄 알았는데 진욱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고 말았다. 진욱의 팔은 크게 흔들렸고 와인이 흘러 진욱의 바지를 적셨다. 나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헨리가 잠깐 기다리라며 급히 부엌으로 향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진욱이 짜증을 누르며 말했다. 와인은 금방 바지에 스며들었다. 헨리가 물에 적신 작은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수건으로 진욱의 바지를 문질렀다. 수건에 붉은 와인이 묻어 나왔지만 얼룩은 더 넓게 번졌다. 헨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닦을수록 망쳐버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닦지 않을 수도 없었다. 괜찮으면 내 바지를 빌려줄까요? 헨리가 물었다. 진욱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헨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다시 자리를 떴다. 진욱이 내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부엌으로 가버렸다. 잠시 뒤에 부엌에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집을 바라보았다. 이층 창의 커튼 뒤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사라졌다. 저 집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식탁 위에는 따뜻하게 익힌 야채, 버터와 허브를 올려 구워낸 통감자와 쇠고기가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었다. 미리 묻는다는 걸 깜빡했는데, 혹시 채식주의자는 아니겠지요? 조슈아가 설마하는 눈빛으로 우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진욱을 바라보았다. 그럴리가요. 굳이 말하자면 육식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그의 대답에 모두가 웃었다. 조슈아의 웃음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보였다. 그러나 진욱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소화를 잘 시키지 못했다. 그는 일 년 전에 위 수술을 받았다. 회복이 느린 편이라 아직도 하루에 두 번 약을 먹어야 했고 음식도 조심해야 했다. 우리가 연애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 술도 고기도 즐겼었는데 이제는 너무 먼 옛날처럼 여겨졌다. 삼 년도 채 안 되었을 뿐인데. 그건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 떠올리는 과거처럼 생생하기는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같았다. 그는 버릇처럼 다 나으면, 이라고 곧잘 말했지만 다시는 전과 같이 술과 고기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잘 닦인 은색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고기를 썰자 붉은 핏기가 배어나왔다. 군침이 돌아서 귀밑이 뻐근했다. 그러나 너무 급해 보이지 않도록 속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천천히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우리는 그의 음식 솜씨를 칭찬했다. 아마 맛이 없었더라도 똑같이 말했겠지만 그의 음식 솜씨는 분명 좋은 편에 속했다. 헨리는 스파클링 워터와 와인을 잔에 따라주었다. 유리잔이 많은 식탁은 우아해 보였다. 서울 집 식탁에는 컵이 하나일 때도 있었다. 귀찮아서, 아니면 별 생각 없이 같은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삼십 분 후 잔에 또 물을 따라 진욱에게 건넸다. 그러면 진욱은 약봉지를 뜯고. 결혼 후 이삼 개월 정도였던가. 그가 건강하다고 믿었던 그때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그가 입을 댄 컵에서는 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숨을 참게 되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나요?


  조슈아가 물었다. 여전히 그는 탐색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신혼여행이에요. 진욱이 대답했다. 정말? 조슈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헨리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그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첫날밤에 우리는 이십오만 원짜리 다금바리 회를 먹었고 진욱은 체해서 호텔방 화장실에서 밤새 토했다. 나는 그들이 신혼여행에 대해 뭔가 물어 볼까봐 계속 음식을 입안에 넣었다. 내일은 에든버러로 떠나요. 아내가 전부터 꼭 가보고 싶어했거든요. 진욱이 말했다. 진욱의 얼굴은 취기가 올라 불그스름했다. 그의 접시 위에 고기는 반 정도 남아 있었고 감자는 거의 다 먹었다. 오늘 진욱은 과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제지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 베티 스미스라는 여배우를 아나요?


  나의 물음에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베티 스미스? 헨리가 되물었다. 아니, 아까 하이게이트에서 못 봤어요? 우리가 누워 있던 그 자리가 바로 그녀의 묘지였는데. 헨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배우는 들어본 것 같은데 하이게이트에 있는 오래된 베티는 처음 들어보는데. 오래된 베티, 라는 말에 남자들이 웃었다. 연극배우였겠죠. 그때는 영화가 없었으니까. 드루리 레인의 작은 보석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작은 보석이라고. 왜 작다고 했을까요? 나 역시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진데 나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녀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베티 스미스라는 영화배우가 있어? 조슈아가 헨리에게 물었다. 자기, 베티 데이비스랑 헷갈린 거 아니야? 그래, 맞아. 베티 데이비스였지. 미안. 헨리는 조슈아의 얼굴에 그의 긴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댔고 조슈아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놓았다. 헨리의 시선이 나와 부딪혔고 포크의 뾰족한 끝부분이 접시에 닿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조연 배우였을지도. 작은 보석이라고 한 건. 헨리가 말했다.


 


  부엌에 있는 문을 통하면 아담한 뒤뜰이 나왔다. 우리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넷이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다. 누구와도 마주보지 않아도 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우리 앞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부옇게 빛나는 식물들 그리고 주위를 감싼 어둠과 간혹 스치는 바람이 전부였다. 헨리는 어떤 사진을 찍나요?


  이번 전시 주제는 잠이에요. 그래서 주로 잠든 것들만 찍고 있어요. 무엇보다 솔직한 것에 매혹됐어요. 표정이라든가 자세라든가 하는 그 모든, 어쩔 수 없이 솔직한 것들에.


  아, 저는 좀 부끄럽네요. 나의 잠든 모습을 그가 보았다는 생각에 귓불이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나는 무척 좋았는데 당신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요.


  저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진욱이 끼어들었다.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몸무게가 많이 줄었어요. 원래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진욱은 앙상한 팔을 습관적으로 쓸어내리며 바닥을 보고 말했다. 물론 지금은 회복중이고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테지만. 나는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내가 자는 사진도 찍었다니까요. 나 몰래.


  조슈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헨리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나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둘은 어떤 자세로 잠이 들까.


  진욱이 잔기침을 했다. 그제야 내가 진욱의 약을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실 좀 갔다가 약 가져올게. 조슈아는 따뜻한 물을 좀 더 가져오겠다며 나와 함께 실내로 들어왔다. 내가 가방을 열어 약을 찾는 사이 그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남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조슈아가 작게 물었다. 약물중독이에요. 그리고 저 사람은 사실 내 남편이 아니에요. 난 그저 간병인일 뿐.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비밀. 조슈아의 짙은 눈이 더 진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진욱의 위장약을 그에게 대신 건네주고 화장실을 찾아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가 알려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 이층과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을 보았다. 조슈아가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는 헨리의 작업실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층으로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올라갔다.


  이층에는 좁은 복도와 문이 두 개 있었다. 나는 숨죽여 첫 번째 문을 열어 보았다. 손잡이를 돌릴 때 삐걱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곳은 침실이었다. 중앙에 올리브 색 이불과 하얀 베개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침대가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남자 둘이 쓰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깔끔했다. 방에는 은은한 향기까지 감돌았다. 스탠드 불빛이 방을 부드럽게 밝혀 주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손으로 이불을 쓸어 보았다. 베개 냄새를 맡아 보았다. 스킨 같기도 하고 세제 같기도 한 희미한 향기가 났다. 다른 쪽의 베개에도 비슷한 냄새가 났다. 어떤 것이 헨리의 것일까. 그는 조슈아의 몸을 안으며 전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을까. 널찍하고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 이런 침대에서 자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의 방에서 잘 모르는 사람의 침대에서 잘 모르는 사람의 베개를 베고. 진욱은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렸다. 수술 후 최근까지도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다. 자주 세탁을 해도 베개와 이불에서 금방 냄새가 났다. 해가 쨍하게 들어오는 곳에서 빨래를 말리고 싶었다.


  침대 맞은편의 전신 거울에 내가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즈를 취해 보았다. 짧은 커트머리와 낡은 청바지. 갈색도 검은색도 아닌 어두운 눈동자. 내 눈동자가 파란색이거나 아니면 에메랄드빛이거나 아니 그렇게 예쁜 색이 아니더라도 좀 더 밝기만 했어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내 삶도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문득 거실 사진에서 본 여자의 화난 눈빛이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랐다. 마치 내가 직접 눈앞에서 찍은 것처럼. 나는 거울 속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그러다 침대 위의 쿠션을 집어서 옷 속에 쑤셔 넣었다. 배가 터질 듯이 솟아올랐다. 거울 앞에 서서 마치 아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천천히, 소중하다는 듯,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문득 평생 임산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영영 낳지 않고. 그게 어쩌면 나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거기에는 새것처럼 단정하게 접힌 하얀 수건이 걸려 있었다. 칫솔 두 개와 면도기가 각각 다른 컵에 들어 있었고 수도꼭지 손잡이는 구식이었으나 청동 빛깔이라 예뻤다. 욕실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타원형의 욕조 옆에는 향초와 목욕 용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리 집에는 욕조가 없었다. 욕실은 습해서 곰팡이가 금방 피어올라 일주일에 한 번씩 락스로 청소를 해야 했다. 락스 냄새를 맡으면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어 바닥이며 변기를 벅벅 문질렀고 어금니를 꼭 깨물게 되었다. 허리를 펴고 거울을 보면 미간에 주름이 잡힌 지친 표정의 내가 있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을 못 찾아서 부득이하게 이곳을 써야할 만큼 급했다는 변명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울까. 나는 급히 욕실 문을 잠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나는 유리가 붙어 있는 수납장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예상대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향수와 향초들, 수건, 비누, 구급상자와 약병들. 그리고 지우개만한 상자가 있었다. 그것은 면도날이 들어 있는 상자였다. 상자에서 칼 하나를 꺼내 얇은 종이를 벗겨내자 예리하고 반짝이는 칼날이 드러났다. 손목을 그어버릴까. 내가 오늘의 주연이 되어볼까. 이렇게 가볍고 작은 무기라니. 나의 살은 부드럽고, 단단한 칼날은 금방 내 손목을 파고들겠지. 처음에는 서늘하다가 뒤이어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깊고 예리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질 테고. 이렇게 깨끗한 욕실을 검붉고 비린내 나는 피로 가득 채우게 되겠지. 그러면 그 피는 누가 치우지? 내 피를 닦으면서 땀을 흘릴 거야. 욕을 할지도 몰라. 그래도 하루가 지나면 이곳은 지금과 다름없이 깨끗한 비누 향을 풍기겠지. 면도날을 보고만 있는데도 손목이 아린 기분이었다. 날을 불빛에 비추어 자세히 살폈다. 흠이라곤 없는 예리한 금속. 이걸 삼켜볼까. 삼킬 때 목구멍으로 피가 가득 차오를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칼날이 식도에 깊게 박히는 통증이 생생하게 상상이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나려 했다. 참기가 힘들어서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빨개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베티 스미스를 떠올렸다. 베티의 곱슬머리, 베티의 눈동자, 45도 각도로 왼쪽을 바라보는 베티, 주인공의 대사를 외우는 베티, 뒤에 서 있는 베티, 퇴근하는 베티, 내가 모르는 베티. 나는 면도날을 제자리에 두고 약병을 살펴보았다. 진통제를 하나 꺼내어 먹었다. 수돗물이 달았다.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왔는데 헨리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희미하게 웃었다. 아, 미안해요. 난 손을 씻으려고 했는데.


  헨리는 당황하는 내게 손을 저으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쿠션을 넣어 불룩한 배를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뜨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쿠션을 빼서 헨리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 따뜻하네요.


  난 서울에서 임부복 모델로 일하고 있어요.


  나의 말에 헨리가 흥미를 보였다. 영국 여자들은 임부복을 따로 사 입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보통은 헐렁한 셔츠나 운동복을 입는다며 신기해했다. 당신 아내도 그랬나요?


  그때는 너무 오래전이라, 보통은 원피스를 입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들이 무척 잘생겼던데. 지금 그 앤 몇 살이에요?


  죽었어요. 열네 살 때.


  그가 너무 평온한 표정으로 말해서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살했어요. 불같은 기질을 타고났거든. 제 엄마를 꼭 닮아서.


  난 배가 불러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배에 보형물을 차고 임부복을 입으면 진짜로 임산부가 된 기분이 들어요. 곧 아이가 나올 것처럼. 끔찍하죠?


  나는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침실에 공허하게 떠다녔다. 이제 그만 내려가 봐야겠어요.


  그래요, 난 옷 좀 갈아입고 작업실에서 인화를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는 흐릿하게 부유하는 헨리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주황빛 조명에 볼에 하얗게 돋아난 수염이 보였다.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다. 내 얼굴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대고 부비고 싶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감싸 안고 깔깔거리며 웃을 수도 있을 텐데.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하루만.


  나는 한국어로 말했다. 헨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변하는 그의 눈빛을 응시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하루만 재워줘요. 내가 마음에 들면 그 다음, 그 다음날도 계속. 나는 지금 너무 집에 가고 싶은데, 영영 그리워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국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데. 안 되겠죠?


  헨리는 무슨 말인지 물었다.


  노래가사예요.


  한국말은 그냥 말해도 마치 노래하는 듯 들린다며 아름답다고 했다.


  정말 우리의 자는 모습을 찍었나요?


  내가 방을 나오다 돌아보고 물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인화해 봐야 알겠어요.

  ?

  좁은 미니 뒷좌석에 앉아 인영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는 인영의 눈에는 반짝 생기가 돌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영의 그 눈빛이 불편했다. 나는 한여름 스러져가는 오후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생전 처음 오는 곳인데도 그 냄새는 너무 익숙했다. 아련하면서도 불안한 냄새. 저 멀리로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장미꽃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꽃 덤불이 살짝 흔들렸다. 그 사이로 누런 빛깔의 자그마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봤지? 인영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풀린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굽힌 허리로 팬티 윗부분이 보였다. 헨리를 바라보자 그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인영은 회사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 누런 빛깔의 고양이였다. 새끼도 아니고 성묘도 아닌 어중간한 크기였다. 인영의 회사 창고에 들어와 있었고 장마철인데다가 계속 울어대서 그냥 두고 올 수 없었다고 했다. 다른 동료들은 집에 애완견이 있거나 알레르기가 있거나 고양이를 끔찍하게 여기는 부모가 있거나 해서 자기가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며 함께 있으면 덜 심심하고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인영은 그 고양이를 베티라고 불렀다. 인영은 베티를 무척 예뻐했다. 마치 아기 다루듯이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인영이 출근한 동안 밥을 주고 똥오줌을 치우는 것은 내 몫이었다. 공중에 털이 날려 수시로 청소기를 돌렸다. 주말이 되면 인영은 하루 종일 베티만 불러댔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찬물로 샤워를 했다. 저녁이 되었고 베티의 이름을 부르며 인영이 돌아왔다. 눈 깜짝할 새였어. 하루 종일 찾아다녔어. 이 모든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아서 이상했다.


  일주일 후 인영은 베티의 사료와 밥그릇을 내다 버렸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무렵 간혹 밤중에 발정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베티 아닌가? 인영이 물었다. 아직 살아 있겠어? 내가 대답하자 인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잔인해?


  내가 일부러 내보낸 걸 안다는 말인지, 죽었을 거라는 의미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나는 인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잔인하다고? 내가?


 


  헨리의 동네는 적막하고 평화로웠다. 매달 생활비와 예상치 못한 지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의 공기였다. 오래된 미니는 그저 그의 취향일 뿐 경제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로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가 들고 있는 핫셀블라드 중형 카메라가 증명해 주었다. 그가 사는 곳은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 동네였다. 집의 모양이나 가지고 있는 차, 기르는 동물들, 심지어 작은 조명이나 비누 하나까지도 주인의 취향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우리가 묵고 있는 첼시의 한인 민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영은 굳이 헨리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인영은 영어가 서툴렀고 나는 그 사이에서 더 피곤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녀가 나서서 헨리의 집에 가자고 하기를 어느 정도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약간 불쾌하기도 했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쾌함과 궁금증이 몰래 찍힌 사진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인영은 어린 커플이 장미꽃 한 송이를 마르크스의 비석 위에 놓는 것을 보고 웃었다. 인영은 예의 없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엉뚱한 말로 상대를 당황시키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간혹 주의를 주었으나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의 이 년이나 미뤄진 신혼여행이었다. 인영은 결혼 직후에 제주도 출장을 따라왔다. 출장을 미루고 신혼여행을 바로 갈 계획이었는데 인영이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함께 가도 되는지 물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출장 뒤로 미루었다. 회사 일정을 마친 후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자연산 숭어회를 두고 마주 앉아서 그녀는 마치 신혼여행을 온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나 임신했어. 인영은 숭어회를 입에 넣고 계속해서 씹었다. 그래서 그런가 비리네. 그녀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당장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인영은 결혼 전에도 한번 임신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며 중절 수술을 했고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때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인영은 빈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나는 술잔을 빼앗았다. 그날 밤 우리는 다투었다. 인영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했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인영을 설득하려 했지만 내가 싫다면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결국 함께 병원으로 갔다. 신혼여행은 취소되었고 인영은 내게 정관수술을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 후로 인영은 피임약을 꼬박꼬박 챙겨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후 나는 정관수술이 아닌 위 절제술을 받았고 회사를 휴직했다. 금방 복직할 줄 알았는데 회복이 더뎌져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인영은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하고 친구가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에 취직했다. 나는 괜찮아. 첫 출근에서 돌아와 희미한 술 냄새를 풍기며 인영이 말했다. 사람들이 괜찮아. 학교에서 보던 속만 배배 꼬인 애들 보다 훨씬 나아. 진작 돈이나 벌 걸. 인영은 정말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았다. 삶의 가속도가 붙어야할 순간에 혼자 딱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인영은 헨리에게 문법에 맞지도 않는 영어를 계속해서 건넸다.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구는 모습이 그녀답지 않았다. 여행을 와서 영어로 말하는 게 어색하다며 대부분 내게 대신 시켰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나는 그녀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인영은 거실의 작은 액자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우리의 발자국이 혹시라도 거실 카펫에 얼룩을 남기지는 않았나 조심스러웠다. 나는 인영의 옆에 가서 귀엣말로 작게 속삭였다. 나 좀 피곤해. 머리도 아프고. 그러나 인영은 내 말을 무시하고 말없이 액자를 손에 들었다. 헨리가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가장 큰 액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이 찍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손에 들린 하얀 꽃다발이 인상적이었다. 조슈아예요, 십대 때. 나는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남자 옆에 앉아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년이 조슈아란 말이었다. 영어를 쓰면 감탄사가 쉽게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잘생겼었군요. 그런데 옆의 남자는 누구죠? 사촌 형. 조슈아의 첫사랑.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름답죠? 나는 무척 아름답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맛을 보려던 것뿐이었는데 인영은 내 바지에 와인을 쏟았고 헨리가 가져온 수건으로 계속 바지를 문지르는 바람에 얼룩은 더 번졌다. 나는 흉하게 얼룩진 수건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헨리는 수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고 내게 괜찮은지 물었다. 안 그래도 빨아야 할 바지에요. 미안해요. 싱크대에서 야채를 씻고 있던 조슈아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 나는 괜스레 더 무안해졌다. 그의 커다란 손에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탄탄한 어깨의 굴곡이 얇은 셔츠에 드러나 있었고 팔 근육이 돋보였다. 반면에 헨리의 어깨선은 부드러웠다. 금빛 털로 무성한 피부는 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둘은 잘 어울렸다. 둘이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볼에 키스하는 모습이 우리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빨리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이 아가씨가 날 안 놔주네. 헨리가 장난스레 조슈아의 엉덩이를 쳤다. 세팅 정도는 자기가 해줘야지, 뻔뻔한 아저씨야. 나와 헨리는 함께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제일 컸고 조슈아는 웃지 않았다.


  예의상 음식을 많이 남길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많이 씹고 천천히 먹었다. 그러나 고기는 생각보다 질겼고 너무 덜 익혀서 피 냄새가 역했다. 바싹 익힌 삼겹살에 쌈장이나 생마늘을 곁들여 먹고 싶었다. 이제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버터에 구운 스테이크와 치즈를 뿌린 샐러드는 먹을수록 느끼해서 자꾸 와인에 손이 갔다. 인영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 먹고는 있지만 즐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은 어떻게 만났어요?


  인영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잠깐이지만 침묵이 흘렀다. 인영도 분명 눈치를 챘을 텐데 일부러 모르는 척 궁금한 눈빛을 바꾸지 않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었어요. 헨리가 쥔 나이프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언제부터요? 인영이 재차 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영은 계속 그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의 목덜미가 불그스름해진 것이 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혹시 베티 스미스라는 배우를 아나요? 내가 일부러 끼어들어 화제를 바꾸었다. 누구요? 헨리가 되물었다. 베티 스미스라고. 아까 우리가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가 그녀의 비석 아래였는데. 아, 그 베티. 잘 알죠. 헨리가 술잔을 들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베티 스미스는 사실 배우가 아니었어요. 물론 드루리 레인 같은 유명 극장에서 연기를 할 기회도 없었지. 헨리의 말에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베티 스미스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작았어. 비정상적으로. 헨리는 손을 들더니 식탁 높이에서 멈췄다. 우리의 시선은 그의 손으로 쏠렸다. 그건 그녀의 유언이었어요. 헨리의 어조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비석에 거짓말을 쓰기도 하나요? 인영이 음식을 삼키고 물었다. 비석에 진실만을 적는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뒤뜰에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수술 후 처음 피우는 담배였다. 회사에서 돌아온 인영에게 종종 담배 냄새가 났지만 내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공중에 내뱉을 때엔 건강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곧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워져 결국 얼마 피우지 못하고 꺼버렸다. 인영은 옆에서 불콰한 얼굴로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헨리가 내 안색을 살피더니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위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인영에게 약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담배를 비벼 끄는 인영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인영은 웃지 않을 때면 기분이 안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조슈아가 런던은 여름에도 밤기운이 차니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겠다며 인영을 따라 들어갔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간혹 온몸의 피가 발바닥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면서 기운이 쭉 빠져버릴 때가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지. 화를 내고 싶었는데 누구에게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입안으로 웅얼거리며 욕을 내뱉었다. 혼자 오랫동안 누워 지내며 몸무게가 빠지는 대신 욕이 늘었다.


  헨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혹시 노란 고양이 못 봤어요? 내가 물었다. 노랗고 컸는데. 고양이고. 나는 더 이상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자꾸 같은 단어만 반복했다. 헨리는 이 동네에 고양이는 앞집에 사는 검은 고양이뿐이라고 했다. 게다가 집 밖에 나오는 일은 없다고 했다. 길에 사는 고양이 같던데. 내가 말하자 아마 그건 고양이가 아니라 여우일거라고 했다. 여우? 그래요. 이 동네엔 여우가 살거든. 그래서 고양이가 없지. 아마 뭔가 노란 동물을 봤다면 그건 여우였을 거요. 하지만 작았거든요. 나는 손을 들어 크기를 가늠해 보여주었다. 여우도 크지 않아요.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고양이처럼 보였겠지.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우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간혹 우리 집 담장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해요. 사람들이 공동정원에 고기를 갖다 놓기도 하고. 아주 깜찍한 녀석이지. 한국엔 여우가 없나보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물원에나 가야 있을까. 그런데 그 여우는 이름이 있나요?


  헨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말이 없었다. 눈가의 깊은 주름이 커다란 그의 눈과 잘 어울렸다. 아까 그 누런 털은 베티였다. 그러나 런던까지 날아왔을 리가 없잖아. 왜 그 순간 베티를 떠올리고 심지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을까.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뼈와 얇은 피부만이 만져지는 건조한 감촉이었다. 이 모든 것이 태생의 문제이지 나의 의지와는 너무나 무관하지 않은가. 나는 술 담배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예민한 성격도 아닌데. 위장병도 유전인 것인가. 수술 후 한두 달 새 15키로가 빠졌다. 한두 달이 지났지만 마치 십년은 지난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지금은 56킬로그램으로 2키로가 늘었다. 키가 더 자라거나 줄지 않은 건 다행인가. 동네 마트에 치약을 사러 가다가 보았던, 내장이 터진 채 길가에 죽어 있던 고양이는 베티가 아니었다. 짧은 순간,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위장 끝이 찌릿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신호.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원 구석으로 걸어갔다. 허리를 펴기 힘들었다. 인영은 약을 가지러 가서 왜 안 오는 것일까. 왜 아직도. 위장이 뒤틀렸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손을 들어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저리가. 오지 마. 그러나 입에서는 말 대신 조금 전에 먹었던 덜 익힌 고기와 붉은 와인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피처럼. 시큼한 냄새가 훅 끼쳤다. 목구멍이 아렸다. 이제는 익숙한 통증이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배를 갈라서 위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일어서서 한 손으로 콧물을 훔쳤다. 뒤 돌아서 그들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베티는 죽었어. 내가 본 건 아니지만. 그건 여우였지. 좀 더 자세히 볼 걸. 오늘은 이 집 담을 넘어오지 않을까. 하늘에 달은 보이지 않았고 달빛만 희미하게 구름을 비추었다.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눈동자만 살아 있었다. 어쩌면 죽은 건 베티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때려보았다. 찬물로 세수를 했다. 다리가 굽은 채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이 천천히 지나가는 마른 고양이를 집요하게 눈으로 쫓았다. 저걸 삶아 먹으면 약이 될 텐데. 어디 잡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길가에 머리가 으깨진 채 죽어 있는 고양이는 베티가 아니었나?


 


  헨리는 인화를 하러 작업실로 내려갔고 조슈아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정원 구석에 구토를 해놨으니 아마 더러워서 그런 걸 거라 짐작했다. 소파에 앉자 조슈아가 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흠칫 놀라서 반사적으로 손을 피했다. 아, 미안해요. 얼굴에 물기가 묻어 있어서. 조슈아는 본인도 놀랐다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민망한 표정이었다. 나는 네가 게이라서 피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과를 할 타이밍조차 놓치고 말아 차가 맛있다는 말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는 낡은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렸고 잠시 뒤 음악이 흘러나왔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소파에 몸을 기대니 다시 몸에 온기가 돌았다.


  인영은 지하에서 올라왔다. 헨리가 작업실을 구경시켜 주었다고 했다. 인영은 내가 토한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괜찮아? 아 유 오케이? 인영이 무심하게 물었다. 이제 괜찮아. 조슈아가 함께 있어서 우리는 영어로 말했다. 오늘 너무 많이 먹었어. 인영이 마치 엄마처럼 말했다. 내게 영어로 말하는 인영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보이니? 인영에게 묻고 싶었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 내가 아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싶었다. 재즈를 좋아하세요? 인영이 조슈아에게 물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까딱하고 긍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좋아해요. 인영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녀는 음악을 듣지 않았다. 연애할 때에도 재즈라고는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한두 번 함께 들었을까. 그녀는 색소폰과 트럼펫도 구분하지 못했다. 인영은 조슈아에게 다가가 앨범 재킷을 받아 들었다. 디지 길레스피. 오, 이게 디지 길레스피군요. 맞아 너무 오랜만에 들어 잊고 있었어요. 이 음악 제목이 뭐였더라?


  튀니지의 밤.


  조슈아가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아니지만 어쩐지 오늘은 듣고 싶었어요. 괜찮나요?


  조슈아에게서는 유난히 영국식 억양이 도드라졌다. 그 억양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는 자주 시계를 흘끔거렸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인영은 눈치 없이 웃으며 마치 영어책을 읽는 고등학생처럼 말했다. 좀 더 톤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유심히 그녀의 낯빛과 시선과 동작을 살폈다. 취한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어쩌면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점은 여행 온 후로 가장 들뜬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내 할아버지가 튀니지 출신이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내가.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보기 좋아요. 나는 진심이었는데 그는 습관처럼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에게는 젊고 튼튼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반면 기름기라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내 피부. 조슈아는 확실히 백인이라 하기엔 검고 아랍 쪽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이 너무 파랬다. 좋은 점만 물려받았군요. 가 영어로 뭐지? 당신이 통역 좀 해봐. 내가 그랬다고. 응? 인영이 조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도 그녀처럼 미소를 띤 채 속삭였다. 그만 좀 웃어. 미친년 같아.



  헨리는 우리에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애초에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어떤 몰골로 찍혔을지는 뻔했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볼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필름 현상은 끝났으니 한 시간 정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나는 빨리 떠나고 싶었다.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자 정말로 몸이 점점 다운되었다. 그러게 왜 술까지 마셨어. 인영이 툭 내뱉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먼저 숙소로 돌아가라고 할까봐 겁이 났다. 혼자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곳에 인영이 홀로 있는 것이 싫었다. 사진을 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헨리는 정 그렇다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며 일단 전화번호를 받아 놓았다. 혹시 못 만나게 된다면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헨리가 내미는 노트에 이메일 주소와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알파벳과 번지수를 엉뚱하게 적은 것을 인영은 눈치재지 못했을 것이다.


  인영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헨리가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사양했다. 인영은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웃지 않는 인영의 입술은 아래로 쳐져 우울해 보였다.


  조슈아와 간단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걸으면서 자꾸 뒤돌아보았다. 장미 덤불 사이로 혹시 뭔가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헨리, 하고 부르는 인영의 목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울렸다. 당신은 조슈아를 정말 사랑하나요?


  인영의 질문에 헨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 자꾸 왜 그래? 무례하게. 인영은 내 말을 무시하고 헨리에게 영어로 이 사람이 저보고 무례하대요, 그런가요? 하고 말했다.


  헨리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래요, 당신 남편 말이 맞아요. 좀 무례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얘긴데, 당신은 어딘지 내 전 아내와 비슷한 면이 있어. 인영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고. 헨리는 나를 바라보며 농담처럼 말했고 내가 웃기를 기대하는 듯해서 웃어 주었다. 괜히 웃었다고 금방 후회했다.


  이제 겨우 아홉 시가 되었을 뿐인데 거리는 너무 적막하기만 했다. 헨리의 동네를 빠져나와 큰 도로 쪽으로 걸어 나오니 작은 펍 앞에 젊은이들이 선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도로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자동차 불빛에 눈이 시렸다. 조슈아는 계란을 못 깨요. 헨리가 입을 열었다. 계란을 깰 때마다 그 안에서 죽은 병아리가 나올까봐 겁이 난대요. 그래서 언제나 나를 부르지. 계란 좀 깨달라고 말이지.


  그가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나는 헨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택시가 기다린단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손을 생각보다 세게 잡아서 나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영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인영은 그를 가볍게 안고 볼에 키스를 했다.


  택시 안에서 인영은 등을 기댄 채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에 돌아가면 베티를 찾아보자. 백미러로 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누굴 찾자고? 인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티. 우리가 잃어버린 고양이. 아니면 비슷한 고양이라도. 인영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했다. 걘 베티가 아니라 베키였어.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네가 버린 거고.


  숙소에 도착해서 생각보다 택시비가 비싸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게 기분 나빴다. 거실에서는 배낭여행을 온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함께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내일 스케줄을 확인했다. 에든버러로 가는 열차 시간을 인영에게 알려주고 알람을 맞추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인영의 손을 잡았다. 헨리 말이야. 아들까지 있는 남자가 이젠 아들 같은 남자랑 살고. 그런데 그 집에 있을 땐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더라. 되게 멀고 이상한 곳에 갔다 온 기분이야. 인영은 내 말에 별 반응이 없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가까운데 내일 일찍이라도 다시 가볼까? 그런데 집이 어딘지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인영과 섹스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잠에 빠져드는 순간 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꼭 가야 돼?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잠 속으로 깊이 끌려 내려가면서 나는 인영에게 말했다. 안 가도 돼. 집으로 그냥 돌아갈까? 그런데 인영아, 나도 무서운 게 있어. 복도엔 언제나 나 혼자야. 무거운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릴 때마다 그 안에 시체가 있을 것만 같아. 피가 흥건하거나 내장이 드러나 있거나 딱딱하게 굳은 채로 거품을 물고 있거나. 그건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노인이나 아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베티일 수도 있지. 나도 무서워. 문이 열릴 때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안 일어나겠지? 점점 낫겠지? 그러나 단 한 단어도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전력질주를 할 수 있을까.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도 또 다시 뛸 수 있을까? 허리도 펴지 못하는 노인이 고양이를 바라보는 끈질긴 시선을 나는 깊이 이해했다.

  ?

  어둠 속에서 여우가 정원 구석의 토사물을 먹고 있었다. 나는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러 먹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여우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여자는 불안해 보였고 남자는 아파 보였다. 헨리는 내게 전화해서 배낭여행을 온 아시아 커플과 함께 귀가할 테니 저녁을 부탁한다고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어요?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잊지 않았어. 헨리의 한마디에 희한하게 화가 가라앉았다. 어떻게 아는 사람들인데?


  베티 묘비 아래에서 자고 있더라고. 내가 몰래 사진을 찍다가 들켰어.


  헨리의 사진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예쁘게 찍히길 바라는 사람들은 헨리의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본 순간 헨리가 왜 사진을 찍었는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인종과는 무관하게 묘한 구석이 있었다. 둘은 영어가 서툴렀는데 우리와 함께 있을 때면 둘이 말할 때에도 영어를 썼다. 우리를 배려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모든 대화가 어딘지 연극적으로 느껴졌다.


  헨리는 최근 들어 자주 하이게이트에 갔다. 죽음은 조금씩 움직인다, 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준비 중이었다. 헨리의 죽은 가족들부터 그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있는 이들의 묘비들을 다니며 작업을 했는데 하이게이트에는 할아버지의 연인이었던 베티 스미스의 묘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유난히 키가 작아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보석’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키는 작았지만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 데스데모나 역으로 꽤 유명했다고 헨리의 할아버지는 어린 헨리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신의 과거사를 말해 주었다. 둘의 관계는 베티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는데, 자살로 판명이 났으나 할아버지는 헨리에게 그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하며 이건 둘 만의 비밀로 하자며 베티 스미스의 무덤 앞에서 손가락을 걸었다고 했다. 그때 헨리의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헨리는 그때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아직도 간혹 그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고백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빛과 그 차갑고 섬뜩했던 미소가.


  어쩌면 그건 모두 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베티 스미스라는 여자도 아예 모르는 사람일지도 몰라. 아버지는 처음 듣는 이름이랬거든.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까. 나는 헨리에게 그 말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들었다. 그건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뒤에는 언제나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었다. 헨리가 생각하는 죽음의 끝에는 항상 데이빗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자 나의 어릴 적 친구였던.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면 헨리는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음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면 마치 자신이 살해했거나 살해에 분명히 가담한 것 같은 확신이 든다고. 베티 스미스든 할아버지든 아니면 셰익스피어든. 그게 누구건 간에. 그래서 모든 죽음은 결국 타살이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누가 죽이겠지. 물론 그게 신은 아니고. 하며 웃곤 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전시의 주제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헨리가 그동안 품고 있었던 어떤 침묵의 시간들을 정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사이에 놓인 데이빗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게 무엇이든 환영이었다. 아니, 걷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빛깔을 입힐 수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살기로 했을 때 헨리는 아내와 살던 집을 정리했다. 말이 아내와 살던 집이지 실상은 헨리 혼자 살던 아파트였다. 그의 아내는 브라이튼에 있는 요양원에서 생활한 지 십 년이 넘었고 우리는 간혹 함께 그녀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술을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실 수 있을까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고 이제는 멍하게 티비를 보거나 카드놀이를 하며 늙어가고 있었다. 독설을 거침없이 날리던 쾌활하고 아름다웠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예전에 보았던 사람이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버렸다.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기억 속의 여자와 요양원의 여자는 그냥 다른 사람. 그래서 나는 가장 마음에 드는 내 어릴 적 사진을 꺼내놓고 자주 거울을 보며 비교해 보았다. 나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까봐.


  나 괜찮아요? 거울을 보며 내가 물으면 헨리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며 볼에 입을 맞추거나 따스한 손길로 등을 쓸어내리며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어떻게든 내가 먼저 흉해지고 있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나는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난 당신처럼 멋있게 늙을 자신이 없는데. 그건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헨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한 말이었다. 헨리는 내 의도를 알고 있었을 테지만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헨리는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런던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브라이튼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와 함께 가고 싶은지 여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고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이 집은 내 부모님의 집인데 몇 달 후에는 비워주기로 되어 있었다. 헨리는 한 달 전에 은퇴를 했고 브라이튼으로 내려가서 살겠다고 했다. 나는 헨리가 그곳에서 경제적으로 심하게 쪼들리지 않으면서 작업은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런던에서 수십 년간 사진 기자로 일했지만 아내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때때로 전시를 하느라 모아둔 재산이 거의 없었다. 전시가 얼마나 주목을 받는지 사진이 얼마나 팔리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나는 이번 전시를 위해 능력 있는 큐레이터를 섭외했고 갤러리 예약부터 에이전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미리 확보해두었다. 최선을 다해 헨리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울 작정이었다.


  헨리는 브라이튼에 가면 평생 관광객들만 찍을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브라이튼에 가기도 전에 갑자기 관광객을 초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우리의 기념일이었다. 함께 산 지 오늘로 3년째 되는 날이어서 식당도 보름 전에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헨리는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냉동된 고기를 해동시키고 남은 야채를 죄다 꺼내어 샐러드를 준비했다. 다행히 엊그제 과일과 치즈를 사다 놓은 것이 있었고 따지 않은 와인이 있었다. 헨리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니. 관광객은 브라이튼에 가서 찍는 거 아니었어요? 물을 세게 틀어 야채를 씻으며 작게 물었다. 나는 짜증을 숨기지 못했는데 헨리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천천히 테이블 세팅을 했다. 이번 작업에 쓸 거야.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남자가 한 손에 붉게 얼룩진 수건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남자는 더러워진 수건을 쭈삣거리며 내밀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눈 밑이 푸르스름했고 긴 셔츠를 입었는데도 너무 말라서 옷에 감추어진 뼈대가 눈에 보였다. 만져보지 않아도 살이라곤 없는 마른 몸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어요? 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뭐든 다 잘 먹는다고 했다. 잘 먹는 게 거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그리고 혼자 큰 소리로 웃었다. 헨리도 따라 웃어주었다.


  헨리는 일부러 작업을 하러 가지 않고 있었다. 도와주겠다는 것은 핑계였다. 헨리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 왔을 때에는 일부러 작업을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필름 카메라만 고집했는데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을 찍었을 때에는 식사를 하고 후식까지 천천히 챙겨 먹고 뒷정리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궁금하면서도 설레는 시간을 가능한 지연시키고 싶다고 했다. 내가 샤워를 하러 가거나 잘 준비를 할 때쯤 헨리는 작업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새벽까지 인화를 했다. 오늘도 그런 날과 비슷했으나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직접 모델을 초대까지 해 놓고 일부러 미적거리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었다. 사진을 인화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필름을 내 놓으라고 할까봐 걱정되는 걸까. 몰래 찍은 게 들켜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데리고는 왔는데 막상 닥치니 보여주기 싫어진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밋밋한 느낌의 사진일지 몰라도 나는 헨리의 작품을 좋아했다. 빛의 흐름이나 피사체의 위치, 그리고 순간적 포즈를 섬세하게 캐치해내는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과장되지 않게 미묘한 부분에서 인물의 감정을 포착해냈다. 인물뿐만이 아니라 사물에게서조차 그런 감정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저들은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기는 미디엄으로 구웠음에도 너무 오래 냉동되어 있어 질겼고 시즈닝을 충분히 하지 못해 간이 겉돌았다. 야채도 싱싱하지 않아 힘이 없었다. 갑자기 준비하느라 음식이 부실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둘은 맛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그들은 열심히 먹었다. 허기가 진 탓도 있겠지만 예의상 그러는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헨리는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신경 쓰며 일부러 천천히 쉬운 단어로 말을 건넸다. 작업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가량 걸릴 거라는 헨리의 말에 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와인 맛이 좋아요. 남자가 말했다.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남자가 와인을 홀짝여도 여자는 제지하지 않았다. 여자는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듯 매번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런던은 마음에 드시나요? 내가 대화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말을 꺼냈다. 우린 신혼여행 중이에요. 남자가 대답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흥미가 생겼다. 둘은 신혼부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 축하해요. 그런데 왜 런던으로 여행지를 택했나요? 아내가 에든버러에 가고 싶어했어요. 폭풍의 언덕을 좋아했거든요. 남자가 수줍게 말했다. 여자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런데 왜 에든버러에?


  의아해하는 내게 헨리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마 영화를 에든버러에서 찍었을 거야. 언덕이 많고 바람도 많이 불죠. 좋은 선택이에요.


  예전에 좋아했어요. 예전에.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의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요크로 가야 진짜 폭풍의 언덕과 관련된 곳을 볼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헨리의 눈치가 보여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남자가 말했다. 요크보다 왠지 에든버러가 끌린다고 했어요. 그때 아내는. 기억나?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보일 듯 말듯 고개를 까딱하고는 계속해서 음식을 먹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둘은 어디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나요? 남자의 갑작스런 질문에 헨리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결혼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연히 허니문도 없었죠.


  아, 미안해요. 여자가 낯을 붉히며 대신 사과했다. 그래도 함께 여행을 간 적은 있지 않나요? 남자가 재차 묻자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헨리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 우리가 함께 갔었던 여행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 아까 거기서 새 한 마리 못 봤어요? 여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질문을 던졌다. 새? 헨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만 파란색 깃털이 나 있는 새였는데, 이렇게 부드럽게 울고. 여자는 새 소리를 흉내냈다. 혀를 가늘게 떨며 진동하는 소리를 내다가, 이것보다 좀 더 낮고 부드러운데. 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파란 깃털이었어요. 마치 조슈아의 눈동자처럼 진한데 좀 더 밝은.


  미안해요. 그런 새소리는 들은 것 같은데 머리만 파란 새는 못 봤어요. 헨리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여자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말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남자가 여자에게 짧게 말을 던졌는데 여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까만 커트 머리에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 그리고 좁은 어깨와 쉽게 붉어지는 얼굴을 한 여자는 인형 같았다. 예쁘지는 않은. 그런 인형이 가게에 진열되어 있다면 분명 내 눈을 끌었을 것이다. 가격이 괜찮다면 살 것도 같았다. 헨리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살 테고 헨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하지만 인형의 눈동자는 저렇게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겠지. 여자는 자신의 눈빛이 얼마나 솔직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정원으로 나가 후식을 먹었다. 습도가 높은 날이라 가로등 불빛이 유독 부옇게 빛났다. 헨리는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여자가 사진에 대해 물었다. 헨리는 그동안 찍어왔던 작품들 그리고 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죽음이나 무덤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묘비나 납골당, 죽은 이들의 흔적을 찾아다닌다는 언급도 없었다. 여자는 좀 부끄럽다고 했다. 남자는 얌전히 듣고 있었으나 종종 탐탁지 않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자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헨리는 아마 처음부터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래서 설득해서 집에 데려오기까지 했는지도 몰랐다. 헨리는 내가 발가벗고 자는 사진도 찍었어요. 물론 허락도 맡지 않았죠. 그런데 허락을 했다 해도 잠이 들면 포즈를 취할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에요. 나는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저도 복수를 해줬죠. 헨리가 변기에 앉아 졸고 있는 사진을 몰래 찍었거든요. 여자는 사진이 궁금하다고 했고 남자는 마지못해 조금 웃어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약을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회복하는 중이에요. 남자가 이마에 난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작은 수술을 받았거든요. 별 거 아닌데. 여자는 한숨을 쉬듯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헨리를 남자와 남겨두고 여자를 따라 실내로 들어왔다. 나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남편은 많이 안 좋은가요?


  네. 아마 평생 저렇게 지낼걸요, 마치 병에 중독된 것처럼. 여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허니문이 아니에요. 허니문의 반대. 그런 여행을 의미하는 말이 있나요? 여자는 손을 좀 씻고 오겠다며 대신 전해달라고 약을 건넸다. 아마 나보다 오래 살 걸요. 사실 남편도 아니에요. 여자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묘한 웃음과 함께 남기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부엌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단은 오래 되어 발을 디디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이층까지 나무로 되어 있어 사람 발소리는 쉽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층을 걷는 발소리를 분명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거실로 들어와 화장실로 가보았다. 스위치가 켜져 있지 않았다. 여자가 이층으로 올라간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우선 뜨거운 물을 준비해서 약과 함께 정원으로 가지고 나갔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정원 한쪽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헨리는 몇 발 떨어져 그를 따라갔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지만 헨리는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보고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정원 구석에 서 있는 모과나무 둥치에 손을 대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심하게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걸 어떻게 치우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헨리가 그에게 다가가는 걸 내가 팔을 잡고 못 가게 막았다. 한참을 앉았다 일어섰다 하다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괜찮은지 물었으나 그는 입을 가린 채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마치 심하게 한바탕 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실내로 들어갔다. 우리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여자가 이층에 있어요. 내가 작게 말했다. 헨리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에 있다고? 나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화장실에 간다고 했는데 이층으로 올라갔어. 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기억에 남을 기념일이에요. 내 말에 헨리가 조용히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내가 올라가볼게. 남자는 한참이 지나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따뜻한 허브티를 준비했다. 여자는 도대체 위층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알 수 없다지만 위험한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는 부모님의 음반 컬렉션에서 엘피판 몇 장을 꺼냈다. 낡은 엘피판의 먼지를 손으로 닦아내자 부모님의 따스한 포옹이 문득 그리워졌다.


  여자가 먼저 내려왔고 나를 발견한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떼었다. 그런데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왜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런데 내 표정의 변화를 감지한 그녀가 오히려 순식간에 싸늘한 얼굴로 바뀌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남자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세수를 했는지 얼굴 주위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자리를 권했고 물방울이 옷으로 떨어질 것 같아 손을 내밀었는데 그가 화들짝 놀라서 나도 함께 놀랐다. 그 바람에 화가 가라앉고 내심 좀 우스워졌다. 여자는 왜 아직도 약을 먹지 않았는지 물으며 약봉지를 뜯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말없이 약을 삼켰고 여자의 괜찮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누구도 그가 괜찮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이마를 한번 짚어 보았을 뿐 크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후로 둘은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우리는 음악을 한두 곡 함께 들었고 음악이 흐르고 있는 동안은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남자의 눈 밑은 이제 푸르다 못해 거무죽죽했다. 그들과 함께 있은 지 채 세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랫동안 함께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다리를 뻗고 있는 그들의 발을 보았다. 남자의 검은 운동화와 여자의 회색 운동화는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지만 왠지 잘 어울렸다. 마치 한 사람의 운동화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고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기에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며 남자가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들이 빨리 떠나주길 바랐는데 막상 가겠다고 하니 이상하게 아쉬웠다. 괜찮다면 손님방에서 자고 가도 된다고 즉흥적으로 말해버렸는데 남자는 고맙지만 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반면 여자의 눈빛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 남자의 거절이 고마워졌다. 내가 지하로 헨리를 부르러 갔을 때 헨리는 작업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떠났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예상치 못한 손님을 치르느라 신경을 쓴 탓일 것이었다. 나는 두통약을 먹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실의 침구가 흐트러져 있었다. 여자는 여기서 무엇을 한 걸까. 헨리와 둘이 얼마나 있었더라? 나는 방의 불을 다 켜고 침대 위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검은 머리칼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들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는데 종종 바뀌던 눈빛만 떠오를 뿐 전체적인 얼굴이 금방 그려지지 않았다. 좁은 어깨와 커트머리. 입술에 자주 침을 바르던 버릇. 남자를 바라보는 무감한 시선. 그녀가 몰래 우리 침실에 들어왔다는 것이 불쾌하면서도 이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싸늘하게 변했던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나의 화까지 가라앉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커튼을 내렸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통약만 먹고 내려가서 뒷정리를 할 생각이었는데 다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옷을 벗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베티 스미스. 그들이 발음했던 것을 따라 말해 보았다. 왜 그들은 하필 그 아래에 몸을 눕혔을까. 거기서 섹스라도 할 생각이었을까. 나는 공상을 펼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헨리는 옆에 없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고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운을 걸치고 커피를 만들어 지하로 내려갔다. 헨리는 선 채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눈이 충혈 되어 있고 수염이 조금 자란 것을 제외하면 크게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이 끝까지 사진을 보고 가겠다고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내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며 헨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진은 보내 줄 생각이야. 그가 말했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


  나는 그가 보고 있던 사진 앞에 가서 섰다. 콘트라스트를 다르게 해서 여러 장 인화한 사진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헨리가 찍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식의 작품은 그의 작업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헨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촬영을 했다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대략 어떤 느낌일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사진을 앞에 놓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상상했던 느낌과는 무척 다른 작품이었다.


  중심이 되는 피사체는 다 무너져가는 베티 스미스의 묘비였다. 그리고 어제 본 남녀가 머리를 가까이 대고 누워 있었다. 정확하게 어깨 부근까지만 나오도록 찍은 사진이었다. 눈을 감은 남자는 죽은 사람 같았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섬뜩할 정도로 물기라고는 없는 표정이었다.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를 꽉 물고 죽은 사람 같았다. 남자가 마치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 죽어버린 사람 같았다면 여자는 죽은 지 어느 정도 지난 사람 같았다. 놀라운 것은 여자가 눈을 아주 약간 뜬 채로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주 약간 눈을 뜬 채로, 눈동자가 보이는 채로. 어디를 응시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탄식 비슷한 것을 내뱉은 것은 둘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베티 스미스 때문이었다.


  비석 중앙에 새겨진 베티 스미스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둘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봤어요? 내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위치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는데 둘이 잠든 모습이 너무도 정적이고 무채색에 가까워 오히려 주위의 푸른 이파리나 나뭇가지, 야생화들 그리고 햇살의 생동감이 돋보였다.


  이 사진은 빼고 주는 게 어때요? 헨리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사진에서는 묘비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새를 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까마귀였다. 나는 어제 여자가 어떤 새에 대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 새는 파랗다고 했었는데. 내 눈동자처럼.


  생각보다 사진을 많이 찍었네요. 그러니까 들키지. 나는 헨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하면서 다시 처음 사진을 들어 보았다. 루페를 가져다 대고 베티 스미스의 얼굴을 자세히 확대해 보았다. 분명히 눈동자랄 것도 없는 조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선을 떼고 거리를 조금 두고 보면 역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몸서리를 치며 헨리의 허리를 안았다. 차마 그에게 기분이 나쁜 사진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당신 작품 중에 이런 느낌은 처음인데, 왜 저렇게 찍은 거예요?


  저 장면을 보는 순간 저렇게 찍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알다시피 나머지는 빛의 장난이지.


  헨리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처음엔 몰래 몇 장만 찍고 도망쳤어. 그러다 다시 돌아갔지. 그리고 기다렸어. 그들이 깨어나길. 그러면서 계속 찍었지.


  헨리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모델이래.


  무슨 모델?


  헨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느릿하게 대답했다. 글쎄, 뭐라더라. 누드모델은 아니었는데. 하며 웃었다. 헨리가 대답하기 싫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무슨 모델? 나는 재차 물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헨리에게 대답을 듣고 싶기도 했다. 저렇게 자는 사람을 알아.


  어떻게요?


  저렇게 눈을 조금 뜬 채로 자는 사람.


  나는 그게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알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한 점은 그게 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출근 준비를 했고 비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헨리는 나를 회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비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퇴근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닌데 왠지 이런 일상이 얼마 뒤에는 사라질 것만 같은 아쉬움이 들어서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그곳에서 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크게 멀지 않은 거리니 떨어져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얼마 안 가 헤어지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헨리 역시 말은 하지 않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는 오후가 되어 잠시 그쳤다가 저녁이 되자 더 세차게 내렸다. 그러나 헨리는 오지 않았다. 혹시 차가 막혀서 늦는가 싶어 이십 분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그의 미니는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는데 집은 비어 있었다.


  헨리는 열 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어디 갔었냐는 물음에 그저 좀 돌아다녔다고 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내일은 토요일이니 어제 하지 못한 기념일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크게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나 역시 가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그냥 조르고 싶었다. 그는 내 머리에 키스를 해주며 그러자고 했다.


  그는 내가 만들어준 파스타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가 밥 먹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하며 거실로 나와 버렸다. 체리 먹을래? 잠시 뒤에 헨리가 부엌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먹겠다고 밝게 대답했다. 냉장고 여닫는 소리가 났고 곧 싱크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물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보니 헨리가 물속에 손을 담근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헨리 곁에 다가가 물을 잠갔다. 그리고 찬 물에 너무 오래 담그고 있어서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꺼내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의 손이 따뜻해 질 때까지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서로 기댄 채 쳇 베이커를 들었다.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꺼려지는 음악. 어제 그들도 부끄러워하며 말했던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첼시에 갔었어. 헨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그들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그들이 아니라 그녀 아니고?


  내 말에 헨리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하루 종일 기다렸어. 전화가 오기를. 그러다가 오후엔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해서 다 찾아다녔어. 그냥 한번만 더 보고 싶었거든. 정말로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건 변명일지도 몰라요. 그건 끌림이었을 거야. 이해돼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커플이었으니까.


  만나면 사진을 주려했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진은 챙기지도 않았더라고. 헨리는 헛헛하게 웃었다. 매혹당한 게 아니라고, 끌린 것도 아니고 그저 아파 보여서, 지쳐 보여서 안쓰러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었는데 헨리는 결국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엘피판을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는 책장 앞에 서서 액자를 들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데이빗을 닮았어. 데이빗이라는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웬만해서 그가 먼저 꺼내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상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성별도 나이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성격도. 그런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나봐.


  헨리는 일주일이 넘도록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고 나는 안도했다.


  전시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헨리는 작지만 탄탄한 에이전시와 계약이 되었다. 최상의 조건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앞으로도 전시는 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작품 판매도 꽤 되어서 우리는 기분 좋게 축하주를 나누었다.


  죽은 사람들이 다양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내 나이 정도면 평균적인 거겠지만.


  헨리는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작품 제목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었고 괄호 안에는 생몰연도와 헨리와의 관계가 적혀 있는 식이었다. 친구의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이라든가 사촌의 닥스훈트, 고모할머니의 첫사랑 같은 제목을 보면서 슬쩍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와 멀리 떨어진 죽음일수록 슬픔도 덜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묘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든 그것이 묘비라는 것만으로도 목덜미를 차가운 손으로 쓱 쓰다듬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비록 내가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나 심지어 동물이라고 해도 결국 미소는 지워졌다. 관객들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죽음은 불시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우리를 비탄에 빠지게 한다. 병마에 잠식당해 천천히 죽어가는 이를 겪게 함으로서 우리를 무기력으로 밀어 넣는다. 헨리는 전시 준비 마지막까지 사인(死因)을 넣을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빼기로 했는데 생몰연도로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편이 더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왜 죽었는가 보다는 죽음 그 자체가 더 중요했기에. 베티 스미스의 묘비를 담은 작품은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아무도 사지 않았다.


 


  주말엔 해변을 다니면서 함께 모델을 찾아봐요.


  나는 그에게 런던에 남겠다는 말을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레 서로 그렇게 알아듣고 있었다. 기분 나쁜 예감이 스며들 때면 의식적으로 털어버리려 애썼다.


  헨리는 브라이튼에 적당한 아파트를 찾았고 계약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간 김에 아내 면회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평일이라 나는 출근을 해야 했는데 그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사진이랑 필름이야. 헨리가 내게 말했다. 수신지에 서울, 코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양진욱. 이게 누구 이름이에요? 아마 남자 이름이겠지.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되물었다. 영이라고 했지. 영. 웃기는 이름이지. 우리가 발음을 잘 못해서 그렇게 부르라고 했었잖아. 맞아. 영.


  나는 사진을 꺼내어 다시 한 번 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갔겠죠. 이메일은 보내봤어요?


  주소가 잘못된 것 같아. 잘 지내고 있겠지. 살아 있다면.


  농담인줄 알았는데 헨리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 가까운 것 같기도 했고 또 한없이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자 사진이 더 이상 무섭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베티스미스의 시선도 처음과 달리 애틋한 느낌이었다.


  당신이 직접 보내지 왜 나한테?


  내가 기차 시간이 촉박해서.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겼다. 그는 내게 손을 한번 들어 보이고 집을 나섰다. 근처 마트에 갈 때에도 멀리 출장을 갈 때에도 항상 헨리는 그렇게 인사를 했다. 헨리는 오늘 저녁에는 집에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왠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슴 한쪽이 아렸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들어 보이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알까. 그게 진짜 마지막이라는 걸.


  나는 봉투를 챙겨 출근을 했다. 집 근처 우체국은 그냥 지나쳤다. 회사 바로 옆에도 우체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회사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서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나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동료 하나가 봉투에 대해 물었다. 서울, 코리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지? 그 옆의 여자 동료가 일본 옆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일본은 섬이고 그 옆에 대륙 끝에 붙어 있어.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


  아니, 헨리가 아는 사람이야. 사실, 아는 사람도 아니지만. 나는 사진을 꺼내어 보내주려다 말았다. 동료를 먼저 보낸 후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천천히 우체국으로 향했다. 날씨는 청명했고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낙엽이 후두둑 떨어졌다. 곧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서울의 날씨를 검색해 보았다. 서울의 현재 시간은 밤 10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기온은 3도였다. 그쪽도 이젠 춥겠군. 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우체국 앞 벤치에 앉아 무언가 보내려고 오는 사람들을 잠깐 동안 구경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담배를 세 대나 피웠다. 나는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우체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가기 싫은 마음이 뒤섞여서 싸우게 내버려 두었다. 가능하다면 우체국 문을 닫을 때까지 이대로 사람들이나 구경하며 앉아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이미 십오 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한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근처 쓰레기통을 찾아 갔다. 거기에 담배꽁초가 담긴 종이컵을 버렸다. 그리고 봉투를 사 등분으로 찢어 던져 넣었다. 죄책감은 없었고 어쩌면 헨리가 내게 심부름을 시킨 이유가 이것 아니었을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헨리는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헨리가 이사를 가던 날 나는 함께 가서 정리를 도와주었다. 일부러 짐은 꼭 필요한 것만 옮겨 놓았다. 하늘은 흐렸고 기온도 낮은데다가 라디에이터는 잘 작동되지 않았다. 헨리는 내 뒤에서 나를 안고 누웠다. 내가 그보다 몸집이 더 큰데 뒤에서 그가 안아주면 내 몸이 그의 품에 폭 감싸이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 거리니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신하게 지내요. 내가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헨리는 너나 잘하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집은 알아보고 있어? 헨리가 물었다. 런던 알잖아요. 집은 썩었는데 집세는 세계 최고지. 친구들한테 부탁해놨어요.


  길어야 이 개월 정도. 해머스미스의 집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거기에서의 삼 년은 곧 헨리와의 삶이었다. 우리의 물건들, 침대와 식기.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들. 지금은 떼를 쓰듯 그의 물건을 내어주지 않고 움켜쥐고 있지만 몇 개월 후에는 이곳으로 옮겨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 집은 없어지는 게 나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들이라도 계속 살아서 존재하는 게 나을까? 헨리에게 물어보려다가 불쑥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여행가요.


  어디로?


  일본 어때요? 회사 사람들이 그러는데 봄에 벚꽃이 엄청나대요. 관광객도 어마어마하고. 그리고 한국도 가깝다던데.


  헨리는 대답이 없었다. 거기에 가면 우리도 관광객이잖아요. 거기에서 내 사진을 찍어줘요. 관광객처럼.


  헨리는 낮게 웃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말로 가겠다는 대답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홀로 출근을 했고 종종 동료들과 식사를 했으며 게이 친구들과 바에 갔다. 간혹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 음악은 듣지 않았다. 디지 길레스피도 쳇 베이커도. 가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기는 했지만.


  헨리가 오기로 되어 있는 주말 저녁이었다. 어쩌면 이 집에서 함께 지낼 마지막 주말인지도 몰랐다. 나는 좋은 재료로 장을 봐서 식사를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렸다. 환기를 시킬 겸 문들을 열어 놓고 뒤뜰 의자에 앉아 잠깐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담 위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했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곧 그게 여우의 눈동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름 이후로 처음 보는 여우였다. 앞발에 까만 무늬와 자그마한 몸집이 항상 동네에서 보던 그 여우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안녕, 이라고 말했지만 여우는 앞발을 하나 든 채 경계를 하며 눈치를 살폈다. 여우는 담을 내려와 천천히 정원을 배회했다. 아마도 음식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언뜻 보니 젖이 늘어져 있었다. 너 여자였구나. 엄마가 된 모양이네. 내가 말하자 여우는 역시 또 앞발을 든 채 멈춰서 나를 바라보았다. 날도 추운데 새끼들은 어쩌고. 나는 여우를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전에 봤을 때보다 야윈 몸통이 안쓰러워 집 안으로 들어가 생고기를 몇 점 꺼내왔다. 내가 다시 나왔을 때 여우는 가고 없었다. 나는 여우를 불러 보려고 했는데 뭐라고 불러야할지 난감했다. 여우야, 여우야. 해보았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베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여우에게 베티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베티라고 몇 번을 불러 보았다. 다시 돌아와.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나는 베티를 부르면서 여윈 암여우를, 하이게이트의 베티 스미스를, 그리고 한국의 커플을, 마지막으로 헨리를 떠올렸다.


  헨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당선소감>


   당선 소식에 눈물… 종착지 없는 어둠 앞에 불안과 설렘


  당선 소식을 듣고 아주 조금 울었는데, 그건 환한 기쁨과 깊은 쓸쓸함이 뒤섞인 낯선 감정이었습니다. 쓸쓸함이 드러날까 봐, 기쁜 소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감정이니까, 하루 종일 웃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밝게 웃기만 하는 내게 문득문득 고요한 내가 손가락을 들어 등을 콕콕 찔렀는데 모르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인내로 지켜봐 주신 소중한 부모님, 오빠, 언니, 동생, 가족에게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오랜 시간 멀리 돌아온 저를 따스하게 맞아 주시고 격려해 주신 장영우 선생님을 비롯한 동국대 국문과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mon ramona, 고마운 형래 오빠, 함께할 지희, paroxysm 친구들, 희원 오빠, 현정, 성혜, 정현 언니, 예지 그리고 귀여운 대학원 동료들. 아화.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마음으로 새깁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만의 사막을 찾아 끝없이 홀로 되어야 하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손잡고 갈 수 없는 길. 종착지 없는 그 어둠이 불안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설렙니다. 앞서 그 길을 걷고 계신 황종연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 길을 정확하고 견고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장욱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 길을 섬세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셨습니다. 두 분은 제게 곧 문학입니다.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 1977년 부산 출생.

  ● 동국대 국문학부 졸업.

  ● 동국대 국문과 석사과정 수료.


 

  <심사평>


  천천히 죽어가는 인생과 사랑의 숙명, 섬세하게 풀어내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6편이었다. 그중 중편소설이라는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작품은 세 편 정도. 단편소설로 다룰 만한 단선적 이야기를 중편으로 쓰면, 이야기가 늘어지거나 불필요한 정보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짝눈’은 성형수술 후 발생한 의료 사고를 다뤘다. 흥미로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가족 서사로 다뤄진 점이 아쉬웠다. ‘히작을 그리다’는 감정 과잉과 사변적인 장광설이 낡은 방식으로 비쳐졌다. ‘워킹 홀리데이’는 주제를 향한 구심력과 소설적 건축이 없는 소박한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  

 ‘네 번의 식사’에는 한 여성의 병적인 인생 여정이 펼쳐진다.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서야 과거의 상처와 고통의 집요함을 드라마틱하게 폭로하지만, 거기까지 따라가게 만들 만한 이야기의 힘과 설득력이 부족하다. ‘코스터’는 자매의 성장기 혹은 편력기라고 말해질 만한 청춘 서사다. 자신은 부동자세로 있는데도 세계가 움직인다는 인식이 이 난삽한 소설을 끝까지 받쳐 준다. 

 그러나 서사적 맥락이 약하고 사유가 지나치게 표피적이라는 단점을 보완할 만큼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선작은 ‘무덤이 조금씩’이다. 존재의 파장이 조금씩 부딪치며 균열이 생기고 무력해지고 소멸되고 결국 무너지는 현상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소소하고 우연한 만남의 이야기지만 결국은 그 뒤에 작동하는 거대한 죽음에 대한 사유다. 천천히 죽어가는 인생과 그 사이에 출몰하는 사랑의 숙명을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고통스럽지만 차분하게 그려 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수상한 긴장감과 문체에서 기량을 엿보게 된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관광객이란 렌즈로 바라보게 되는 슬픈 세상. 그 상상에 기꺼이 설득됐다. 큰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구효서,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