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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내가 만든 사례에 대하여 / 최유안

 

  1. 인터뷰

  비가 오는 금요일 저녁 을지로입구역은 퇴근하는 사람들과 쇼핑백을 든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나는 출구로 가는 통로에 서서 휴대폰의 메일 목록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습한 날씨에 더위를 먹은 건지 휴대폰이 자주 버벅댔다. 한참만에 학과 공지 메일에서 찾아낸 논문 마감일은 지금으로부터 네 달 후였다. 나는 날짜를 역산해 인터뷰 횟수를 가늠했다. 미리 계획한 두 번의 인터뷰 후에도 인터뷰이들과 시간만 잘 맞으면 두어 번 추가 인터뷰가 가능할 것 같았다. 사례 정리와 논문 작성을 번갈아 진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촉박할 정도도 아니었다. 관건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논문의 결론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 적절한 사례를 발굴해내는 거였다.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들어 방향을 더듬었다. 출입구 안쪽으로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깊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바깥을 향해 걸었다. 몸 깊숙이 심장 뛰는 소리가 둔중하게 들려왔다.

  출구는 유난히 번잡스러웠다. 빗물을 머금은 눅진한 여름 공기 입자들이 한데 숨을 죽이고 있다가 사람들을 하나씩 삼켰다. 도시로 섞여 들어가던 사람들이 순서대로 옅은 숨을 토해냈다. 온 나라가 찜기 안에 들어있는 것 같은 한국의 장마. 에어컨 냉기가 사라지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안경 렌즈가 삽시간에 부옇게 변했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가방 입구를 열고 안쪽을 뒤적거렸다. 안경집이 깊숙이 처박혔는지 손에 걸리지 않았고 등에는 금방 땀이 솟았다.

  하필 안경집이었고 하필 난민 기구에 가는 길이었던 탓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때 내 기억 속에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했고 한 장소의 사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바람이나 냄새를 동반하기도 했다. 아주 흐릿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나는 기억의 늪 위로 떠오르려는 것들의 실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실체를 마주하기 전에 알아차려지기 마련이고, 그게 두려움이나 공포라면 반응속도는 훨씬 빠르니까. 나는 내가 지도교수의 메일을 받은 후 이 주 만에 인터뷰 약속을 잡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그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텐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나가 사람들의 무리로 뒤섞여 버렸다.

  난민기구를 찾은 건 학위 논문에 쓸 인터뷰를 최신 것으로 수정하라는 지도교수의 조언 때문이었다.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의 저명한 노학자인 내 지도교수는 내후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고, 퇴직 즉시 학계에서 손을 떼고 유엔난민기구 본부의 의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로 계약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논문을 끌어오던 몇몇 학생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던 부채감을 덜어내는 의식을 치렀다. 나는 ‘우선 연락 대상’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인터뷰를 중도에 포기하고 일언반구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5년이 넘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학위 과정을 방치한 것이 지도교수에게는 몹시 의뭉스럽게 느껴졌을 터였다. 그는 내게 보낸 메일의 말미에 용기의 의미에 대해 썼다.

  용기란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품고 가는 것이라네.

  그 문장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나는 다시 인터뷰를 해볼 용기를 냈다. 마침 또 한 번의 임시직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고 다시 구직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천천히 나를 찾아들고 있었다. 수료와 졸업은 종이 한 장 차이였지만 그것은 구직시장에서 나를 평가하는 중요한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증발해버린 6년의 공백을 일거에 메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학위 논문이었고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지도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론 내게는 난민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남아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일말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돕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 모든 이유들이 넝쿨처럼 단단하고 질퍽하게 뒤엉켜 나를 옭아맸다. 나는 며칠 동안 고민한 후에 지도교수에게 답장을 썼다. 난민캠프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물리적인 시간과 경제적 여건상 제약이 있으니 한국에 있는 난민기구 사무소에서 심층 사례를 연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도교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의 동의를 받은 후에 나는 난민기구의 한국 대표부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무턱대고 부탁할 수는 없었으므로 지도교수의 이름을 대고 학회 섭외를 약속했다. 지도교수가 한국 시장에서 정평이 난 인물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거대한 빌딩의 한 층은 각종 국제기구의 한국 대표부들이 모여 있었다. 난민 기구는 왼쪽 복도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른 사무실을 살폈다. 다양한 국제기구의 명칭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명칭도 있었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것도 있었다. 복도 끝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나는 일부러 조금 천천히 걸었다. 걸으며 숨을 골랐다. 철제 자재에 반사되어 비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잠깐 서서 옷차림을 확인했다.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다 사무실 서너 개를 이어 만든 단출한 크기의 유리문 앞에 섰다. <국제난민기구>. 나는 팻말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안쪽을 훔쳐보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현관은 불투명 유리였다.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안젤리나 졸리가 작고 마른 여자 아이와 눈을 맞추는 장면이 찍힌 천연색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통유리로 된 현관문의 상단 한쪽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큰 포스터였다. 그제야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빌딩 현관, 엘리베이터, 층별 게시판, 심지어 지하철역에서도 같은 포스터를 스쳐 지났다는 사실. 웃고 있는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혼했다더니 심적으로 힘들었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과연 홍보물에 광고 효과라는 게 있긴 한 걸까. 혹시 다른 사람들도 홍보물 속 모델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영화는 안 찍나’ 라든지, ‘몰라보게 살이 빠졌네’ 라든지. 나는 혀를 끌끌 가볍게 차며 포스터를 훑었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포스터 오른쪽 하단이었다. ‘난민을 위해 모금하세요!’ 문장 옆,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희미한 흰색 글씨로 사진이 찍힌 장소가 적혀있었다.

  - 레스보스 섬, 그리스.

  내 뇌파는 놀랄 만큼 반사적으로 안젤리나 졸리의 뒤를 따르는 난민들과 언론사 카메라를 그려냈다. 카메라들 뒤로 난민캠프의 하얀 텐트들, 그 뒤쪽에 자원봉사단원들의 숙소, 숙소 왼쪽으로 운동장만한 크기의 물류 창고가 차례대로 그려졌다. 활짝 열린 낡은 철제문 안쪽으로 방금 도착한 구호품 트럭이 물품들을 사정없이 쏟아내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편안한 청바지 차림의 앳된 여자가 나를 보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 전화 주셨던 분 맞으시죠?”

  나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내게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난민 기구 직원 이해정입니다.”

  “손영은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해정은 내가 보고 있던 포스터로 고개를 돌렸다.

  “한국 대사는 정우성이거든요? 엊그제 왔다갔는데!”

  밝고 생기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확인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어리고 가냘팠다. 청바지와 면 티셔츠, 질끈 묶은 머리, 젊음과 열정의 냄새. 그녀의 차림새와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내게 조직의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나는 입술을 옆으로 당겨 웃으며 눈앞의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5년 전의 나, 당당하게 캠프 문을 박차고 나오던 그때의 내가 언뜻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사무실 안쪽 벽에는 다른 종류의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있었다.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온 눈빛으로 표현하는 안젤리나 졸리, 뼈가 앙상한 아이를 품에 안은 안젤리나 졸리, 호흡기를 찬 난민 아이를 격려하는 안젤리나 졸리.

  본부나 국가 대표부 차원에서 유명 배우나 엔터테이너를 홍보대사로 기용하는 건 불문율이었다. 홍보대사들이 하는 일은 대동소이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일 년에 한두 번 난민 캠프에서 난민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인터뷰에 응해주는 것이었다. 포스터는 그들의 캠프 첫 방문에 찍힌 사진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고통을 경험하기 마련이었고 그 표정은 늘 첫 번째 방문에서 가장 잘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인간들을 향한 무한의 애정과 연민. 홍보팀은 바로 그 표정을 경이로울 정도로 잘 잡아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포스터나 영상은 전 세계 난민 대표부로 옮겨졌고 각국 대중의 눈에 띌만한 곳으로 배달되었다. 포스터로, 티비나 인터넷 광고로, 다큐멘터리로. 나는 줄줄이 걸린 포스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봤다. 그러나 유심히 봤던 건 다름 아닌 오른쪽 하단의 흰 글씨였다.

  이해정은 나를 회의실로 안내하며 충고했다.

  “예민한 질문은 피해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이해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몸집에 비해 크고 거친 손바닥을 비비며 주저했다.

  “사실 얼마 전 방송국 보도 때문에 내부가 좀 시끄러워요. 구조대원들이 구조는 뒷전이고 언론에 보낼 사진만 찍어댔다느니······.”

  “걱정 마세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난민 구호에 대한 국가별 공조가 주 내용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에 대한 긴장은 풀지 않았다.

  “아이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불필요한 질문도 삼가주시고요.”

  “네. 그러죠.”

  이해정은 뭔가 다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그맣게 입을 열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참, 하반기 한국개발학회 포럼에 롤랑 교수님 섭외하는 거요······.”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나를 따라 객쩍게 웃었다.

  “걱정하지마세요. 사례 인터뷰는 제가 부탁한 건데요. 섭외는 그때 약속했던 거고요.”

  나는 이해정을 조금 더 다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연민과 책임감, 거물급 인사를 섭외하는 데에서 오는 부담감. 그건 바로 잊고 있던 여러 해 전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언제 저녁이나 한 끼 하자고 말했다. 내게 그런 오지랖은 없는 편이었는데 아마 이해정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건성이었든 진심이었든 그녀는 밝게 웃었다. 그때 마침 아이들 셋이 회의실로 들어왔으므로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는 이해정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처음에 나는 아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무하마드라고 소개했고 나는 그 이름을 들으며 세상에 무하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 생각했다. 다른 두 아이의 이름은 들으면서 잊어버렸는데, 그건 무하마드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내 얼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필요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인터뷰 질문지를 넘겨보았다.

  나는 먼저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한국 생활에 대해 물었다. 친한 친구들은 없는지,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 서툰 한국어였지만 아이들은 밝았다. 학교 안팎의 생활에 대체로 만족했다.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이 한국에 적응해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논문이 잘 풀려갈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 논문의 주제가 난민 구호의 국제 공조체제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말을 뱉고 난 후에 세 아이가 모두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구호’, ‘공조’, ‘체제’가 아이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한글 단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진 내가 다시 ‘기구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천천히 풀어 말했다.

  “어려운 건 아니네요.”

  누군가 말했다.

  “어렵지는 않고 여러분들 입이 좀 아프겠죠.”

  내 말에 그들은 아이들답게 키득거렸다. 상황을 대하는 나 역시 진중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5년 전 레스보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맑았고 스스럼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진지했지만 유쾌했고 가끔 감동적일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난민 보트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전쟁의 참상에 대해 들을 때는 두려웠고 난민 보트에 올라 지중해를 거쳐 리비아 해안에서 겪은 일을 들을 때는 눈앞이 아찔했으며 난민기구에서 파견한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는 장면에서는 몇 번이나 눈물이 나올 뻔했다.

  세 아이는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모두 전쟁 중에 죽었거나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과 주변 사람들 때문에 한국까지 오게 됐다는 점이었다. 한 아이는 한국에서 일하던 형이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비행기 표를 구했고, 다른 한 아이는 공식적으로는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아동지원사업인 입양 사업의 절차를 밟아 한국에 오게 됐다고 했다. 무하마드는 머뭇거렸고 나는 나의 질문이 의도치 않게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춰내고 있다면 힘들게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첫날 무하마드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에 그가 겪은 경험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힘들게 재회한 경위, 아버지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살았던 폴란드 시내의 창문 없는 비좁은 아파트와 유럽 곳곳에서 매일 벌어지던 반 난민 시위에 대한 소문들, 한국에 가야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꺼낸 비상금,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엉겨 붙어 쪽잠을 청해야했던 인천공항 송환 대기실에서의 이주일,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가에 대하여.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각각의 사례별로 논문과의 연계 가능성을 꼼꼼하게 계산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형과 함께 사는 첫 번째 사례는 국제 공조보다 사례자 개인의 노력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경우였고, 두 번째 사례는 한국 정부와 국제기구 간 공조체제보다 국제기구 일방이 추진한 입양 제안이 도드라지는 사례였으므로 두 사례보다는 무하마드의 사례가 합당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에게 한국을 선택한 이유와 난민캠프에서부터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게 하고, 내가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국제기구와 개별정부의 공조 사례를 발굴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였다.

  한 시간 후, 인터뷰의 끝자락에 나는 다음 번 면담 날짜를 제안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인 덕에 무리 없이 인터뷰 날짜가 맞춰졌다. 무하마드는 머뭇거렸다. 두 아이가 아랍어로 재잘거리며 회의실을 빠져 나갈 때까지 그는 미동이 없었다. 손바닥을 바지에 대고 두어 번 쓸어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남은 건가 싶었다.

  “무하마드도 8월까지는 괜찮은 거지?”

  그는 내 질문을 묘하게 피하며 아래로 몸을 굽혔다. 신발 끈이 풀려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도 그가 신은 운동화로 향했다. 하얀 천에 하얀 가죽의 브랜드 로고가 덧입혀진 유독 하얗고 반들거리는 운동화였다.

  “운동화 예쁘네.”

  그는 나를 올려보며 웃었다. 강렬하고 섬뜩한데다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표정이었다. 나는 긴장된 순간을 모면해보려 시큰둥하게 웃었다. 무하마드가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입술 근육을 잔뜩 오므리며 비죽였다.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 웃음이 생각나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나는 애써 나를 위로했다.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이 쓰는 표정 언어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에는 정도가 더할 수도 있는 거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두 번째 인터뷰에서 물어봐야 할 것들을 메모했다. 오늘의 인터뷰가 사례자 각각의 현재 상황을 들어볼 기회로 활용되었다면, 다음 인터뷰에서는 논문의 주제에 조금 더 적합한 내용을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첩 한쪽에 무하마드의 이름을 썼다. 순간 무하마드의 섬뜩한 웃음이 떠올라 나의 결심을 방해했지만 나는 용기를 내 무하마드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넣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어차피 그와의 인연은 끝날 테고 내게 주어진 기회는 겨우 네 번 뿐이지 않은가. 나는 무하마드에게 질문할 거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간략하게 메모했다.

  - 한국으로 올 때까지의 과정

  - 한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었을 때 외교부의 대응

  - 난민캠프에서 한국 정부는 국제기구 매뉴얼에 맞춰 협력하였는가

  - 한국을 선택한 동기

  나는 조금 후 세 번째 질문을 지우고, 무하마드가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은 후에 외교부와 국제기구 간 협력 과정에 대한 질문은 간추려 이해정에게 따로 묻는 편이 좋겠다고 적었다.


  2. 아술

  일주일 뒤, 나는 인터뷰이들과 다시 만났다. 아이들이 들려준 그리스의 난민 캠프는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일순간 일터와 학교가 폭파되고 집과 가족을 잃고 일상이 무너진 그들에게 삶은 이미 지옥이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급진 무장 세력이 난민 보트에 휩쓸려 들어왔다는 소문과 유명한 브로커들이 사실 인신매매단이라는 소문은 그때쯤 레스보스 봉사단에 있던 나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소요사태와 총기 난사는 잠잠하다 싶으면 일어났고 늘 부족하던 구호품은 도난당하기 일쑤였으며 아이든 어른이든 여성은 늘 극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부모의 보호가 없었던 무하마드의 누나는 쉽게 남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어떤 형은 무하마드에게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쥐어 주며 나가서 먹고 오면 용돈을 주겠다고 얼렀고,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는 자기 아들을 데려와 무하마드와 놀게 해놓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닫아두고 일을 치렀다고 했다. 한참을 놀다 들어오면 누나는 매번 텐트 구석에 처박혀 울고 있었다. 무하마드는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누나를 떠올리는 동안 감정이 격앙된 무하마드는 이윽고 후회와 원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울먹였다.

  “누나가 죽던 날마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날 무하마드가 친구와 해변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텐트는 화염에 휩싸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 무하마드는 텐트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연민도 동정도 아닌, 지난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누나와 남자는 텐트 안에 갇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누나는 나체였고 남자는 하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텐트에는 발화의 원인이 된 촛불만 덩그러니 바닥을 굴러다녔다.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지만 무하마드는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보았다. 남자의 팔 한 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유품은 희생자의 유일한 가족인 무하마드에게 전달되었고, 무하마드는 난민 캠프에서 아동난민보호소로 옮겨졌다. 그 사이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와 연락이 닿았다. 그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은 가족은 아버지뿐이었고 유럽연합 내 국가에 정착한 난민의 직계가족은 난민캠프에 혼자 머물 수 있는 근거를 박탈당했다. 그는 떠나야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그는 숨을 골랐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논문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 간단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폴란드-그리스 아동난민 협조체계, 유럽연합 상임위 국가별 공조 시스템

  나는 떨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어갔다는 그의 누나를 상상하는 동안 심장이 미치도록 쿵쾅 뛰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나는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든 써내려갔다. 메모장 위의 글씨는 차츰 알 수 없는 수식처럼 변해갔다.

  “계속 이야기 할까요?”

  무하마드가 말했다. 나는 무하마드와 아이들을 번갈아 봤다. 침울한 공기가 회의실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만나기로 한 곳은 폴란드의 국경도시였다. 거의 매일 난민 반대시위가 열리는 곳이었다. 난민캠프에서 출발한 버스가 멈추고 무하마드가 내리자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무하마드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협처럼 느껴졌고, 무하마드는 브로커가 시킨 대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으슥한 곳, 한적한 곳,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세 시간 후에 그는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에는 버려진 쓰레기들처럼 난민들과 노숙자들이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역 앞 시계탑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자신의 아버지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마르고 까맣게 변해버린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혼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신을 찾아온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을 만난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의 이름을 바꾸는 거였다. 그가 처음 바꾼 이름은 ‘페터’였다. 완벽한 기독교식 이름이었다. 이제 완전한 기독교식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래야 완벽하게 유럽에 적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잠깐만, 무하마드.”

  나는 무하마드의 이야기를 중지시켰다. 놀랍도록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혹시 무하마드가 네 본명이니?”

  그는 주저했다.

  “아니에요. 한국에 들어오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썼어요.”

  나는 무하마드를 바라봤다. 그는 실없이 웃었다.

  “하마터면 한국에 들어올 때 신분 위조로 난민 신청을 포기해야 할 뻔했어요.”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혀끝에 질문이 감돌았지만 입술은 떼어지지 않았다. 무하마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네가 지낸 캠프 위치가 그리스 레스보스 섬이 아니었니?”

  나는 무하마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는 슬픈 눈이었지만 그의 얇고 건조한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스였던 건 맞아요. 정확한 섬의 이름은 모르겠어요.”

  나는 그날 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른 두 아이에게 질문지의 남은 질문을 모두 던졌지만 아이들의 대답 중에 어떤 것도 또렷하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다른 아이들이 내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 두 아이의 옆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아술.

  나는 아직 준비해온 양의 반도 끝내지 않은 채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지도교수의 충고처럼 주어진 상황을 품고 가는 것이 용기라면 내게 주어진 상황은 대체 어디까지 흘러갈 것인가. 내가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아술과의 재회를 예상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후의 일정을 취소하고 택시를 불렀다. 그날 저녁 식사를 제안했던 이해정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 번 더 내 손목을 끌었지만 나는 식욕을 완전히 잃은 후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 오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쥐어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해정이 면담비를 주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오늘 저 대신 아이들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이해정이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는 것 같아 나는 택시를 불렀다며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오는 길에 아이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말없이 복도로 몸을 틀었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도 어둠은 쉬이 들어앉지 않았다. 무더위 속에 어둠을 잃은 밤거리는 온통 회색이었다. 나는 빌딩 앞 시멘트 계단에 주저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파묻었다. 조각난 기억이 하나로 맞춰지면서 강렬한 이미지로 내 앞을 관통해 지나갔다. 어린 아술의 얼굴이 또렷해지자 비로소 무하마드와 아술이 겹쳐보였다. 모든 계획이 일순간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리길 기도했다.

  택시는 한참 만에 나타났다. 장마철 습한 날씨며 교통 체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택시 기사는 대꾸 없는 나를 백미러로 흘겨보더니 입을 닫고 조용히 라디오를 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택시는 성수대교 남단을 막 빠져나가고 있었다. 늦은 밤 잘 정비된 올림픽대로를 통과하는 차들이 뿜는 빛으로 거리는 반짝였다. 그때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뉴스는 이탈리아를 향해 가던 난민보트가 뒤집혀 15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열차로 가는 난민들의 통로가 막혔다는 소식도 뒤를 이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들으려고 스피커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기울이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라디오를 끄며 불만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 나라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못 구하는 판국에 이런 뉴스는 왜 전하나 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에 잠긴 한강을 바라봤다. 강변에는 여름 밤 축제가 한창이었고 어디선가 힘차고 영롱한 소녀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비트가 빠르고 시원한 댄스곡이 흘러나왔다. 빛을 내며 어디론가 향해가던 자동차들과 밤의 공기 사이로 퍼져가던 비트 빠른 댄스곡과 라일라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아술의 울음소리가 묘하게 겹친 한강의 야경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봤다.


  3. 레스보스

  라일라와 아술의 이야기를 하려면 5년 전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난민캠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나는 그때 논문 자격시험을 막 통과한 후 논문 예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학교는 예비 학위자들의 자원봉사나 인턴 프로그램 참가를 적극적으로 독려했으므로 나는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난민기구의 자원봉사단에 소속되어 난민 구조와 생활을 돕기로 했다.

  날카롭게 코끝을 지나는 늦겨울의 차디찬 공기, 캠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무표정한 사람들, 그 앞을 어줍게 서성대던 나. 그것이 캠프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캠프의 난민들은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도망쳐 유럽으로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수적으로는 열등했다. 나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내전 상황과 간단한 생활수칙을 미리 교육받고 실전에 투입되었다.

  캠프에 도착한 첫날부터 한 달 동안 내가 맡은 임무는 구호 물품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에서 보낸 이천여 개의 물품을 정리해서 텐트에 넣는 작업을 마치면 저녁 즈음 다시 물품이 도착하는 식이었다. 나는 그때 막 물품을 분류하는 방법을 배워 업무가 아직 손에 익지 않았던 데다가 구조선이 곧 들어올 거라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어 마음이 다급한 상태였다. 삼일 전 새벽 락까에 공습이 있었던 덕에 오늘 들어올 난민수가 족히 몇 백 명은 될 거라는데 솔직히 그 수가 가늠되지 않았다. 아무튼 캠프 본부 뒤쪽에 세워진 운동장만한 넓이의 임시 창고 바닥에 널린 신발과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나는 오전 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다.

  분류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지루해보였지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어오는 몇 천개의 구호품을 적재적소에 전달하도록 분류하는 건 실로 능력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재주를 필요로 했다. 분류의 핵심은 속도였고, 속도보다 중요한 건 감각이었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상해 동마다 구호품을 나누어주고 우리 쪽에 필요하지 않을 것은 남겨서 다른 캠프에 다시 기부했다.

  팀에서 일 년 넘게 근무한 중국계 미국인 시니어 린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오전 내내 헤매고만 있었을지 모른다. 팀장은 대강의 업무 지시를 내리고 비상 운영회의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구호품으로 쌓인 거대한 산들을 떠다니며 애만 끓고 있었다. 모두 자기 작업에 충실해보여 도대체 도움을 구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린이 내게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 지 물었다. 낮고 작은 코, 둥근 얼굴, 베이징 시내의 어느 거리에서나 보일 법한 얼굴. 그녀가 다가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생김과 이질적일 정도로 완벽한 문법으로 구사되는 그녀의 미국식 영어 억양 때문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구호품들을 바라보며 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쉬워 보이는 일이 가장 어렵죠. 모두가 다 할 줄 안다고 착각하니까.”

  린은 말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언제 쉬워 보인댔나?

  묘하게 압도된 느낌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뿐이었다. 린은 상냥하지 않았지만 친절했고 강단 있는 태도로 내게 일하는 법을 알려줬다. 일을 하는 중간 중간 그녀는 내게 논문의 주제와 논리의 방향과 난민 캠프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물었다. 간간이 서로의 문장을 잘못 이해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구사하는 깨끗한 미국 영어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내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린은 구호품 박스 위에 적힌 발송지 스티커의 ‘스위스’, ‘일본’, ‘미국’라고 적힌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품팀에서는 국제구호의 사례를 엄청나게 많이 발견할 수 있죠.”

  나는 스위스에서 온 구호품 박스를 열어젖히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잘되고 있는 건 줄 알았으면 주제를 바꿔야 할까 봐요.”

  “‘레스보스는 정말 레즈비언을 낳는 섬인가.’ 이런 걸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웃어대며 말했다.

  “레스보스에 정말 게이는 없는가.”

  그러자 린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조심해요. 아무래도 내가 세운 가설의 검증 가능성이 훨씬 높을 테니까.”

  우리는 웃으며 일본, 미국, 벨기에에서 도착한 물품을 박스에서 꺼냈고, A동, B동, C동, D동으로 구분한 목적지에 따라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물품을 정리해 넣었다. A동에는 남성과 대가족이 주로 기거했고 B동은 아동과 소단위 가족, D동은 환자들의 숙소였다.

  우리가 분류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 소리 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팀장이 급하게 창고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치지 않았다면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도 모를 뻔했다.

  “비상 구조선까지 떴어!”

  우리는 창고에서 물품 작업을 하던 팀을 반으로 나눴다. 그 중 몇 명은 구조대로 우선 파견 시키자고 했다. 린을 비롯해 물품 작업을 비교적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시니어 몇 명이 창고에 남고, 나를 비롯한 신규 봉사자들이 우선적으로 구조선에 들어가기로 했다. 남은 물량은 오후에 돌아와 처리하기로 했다. 나는 미리 교육받은 대로 구명조끼와 헬멧, 그 밖의 안전장치를 꼼꼼하게 착용한 후 가장 마지막에 뜬 구조선에 올랐다.

  2월의 지중해에 이는 혹독한 추위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지자마자 구조선은 출발했다. 먼저 출발한 헬기가 바다 한가운데 떠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조해야 하는 보트는 시리아에서 출발해 그리스로 오려던 40명 정원의 난민보트였다. 그 안에는 정원의 배가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항해를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무보트에 오른 사람들은 지난 락까 공습 때 집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해안의 날씨에 취약한 도시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은 평범한 회사원을 가장으로 둔 4인 가족이었으므로 고무보트를 띄워 겨울 해안을 건너는 것이 살인 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점점 검게 변하는 지중해의 심해를 건너며 고무보트에 올랐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바람에 떠밀려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겨울 바다는 성난 파도를 거칠게 내몰았고 가끔 지중해 반대편에 보이는 파도의 높이는 거대한 구조선을 덮치고도 남을 만큼 위협적으로 보였다. 배가 심하게 흔들릴 때마다 파도의 포말이 선창을 덮었다.

  라일라와 아술은 그날 내가 구조선에서 처음 목격한 아이들이었다. 두 아이는 고무보트 한쪽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라일라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술은 라일라의 왼손을 잡은 채 서서 울고 있었다. 정지된 화면에 갇힌 것처럼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일라의 몸은 보트와 바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채 흔들거렸다. 머리는 완전히 풀어헤쳐지고 얼굴은 핏기 없이 굳어있었다. 나는 라일라가 새벽 내내 물보라를 맞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동상에 걸려 걸음 떼는 것조차 힘겨울 수도 있었다. 나는 구조선에서 내려와 고무보트에 올랐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쥐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나에게는 구호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 책임과 의무가 있다. 입술이 사정없이 떨려왔고 고무보트 때문에 온몸이 흔들거렸다. 아직 바다 안개가 걷히지 않았고 아이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보트 안쪽의 상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시야가 선명해질 때까지 아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라일라는 죽은 채 한쪽 몸을 보트에 걸친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입을 약간 벌리고 보트에 몸을 기댄 채 숨져 있었다. 순간 다리가 풀린 나는 미끈거리는 고무보트 위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기울어진 보트에 물이 차오르는 중이었다. 어떻게 아이들을 구해 구조선에 태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조선 위에서 굳은 엄마의 사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라일라의 눈빛만 기억난다.

  고무보트가 전복되던 그날 새벽의 상황은 나중에 전해 들었다. 아이들만은 보트에 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바다로 뛰어내려 필사적으로 고무보트를 붙잡고 있었다던 아술과 라일라의 어머니, 그녀의 처참했던 최후에 대해. 나는 구조선 위에 서서 보슬비가 내리는 리비아 해안을 바라봤다. 태평양만큼 넓거나 깊지 않지만 무겁고 은밀한 아픔을 간직한 채 두 대륙을 가르며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를.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나는 캠프에 오기 전 아이들의 사연을 라일라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날 두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난민캠프로 오는 고무보트에 올랐던 이유는 폴란드로 먼저 간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들의 여정을 도왔던 브로커는 아버지의 친한 친구였고 그가 그의 가족을 폴란드에 전부 이주시켰던 이력이 있었으므로 가족은 모두 무사히 폴란드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락까 공습 이전에 이미 도주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일자리를 찾아야했던 아버지가 우선 폴란드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이미 며칠 전 공습으로 아술의 초등학교가 폭파되었고 아버지의 직장은 문을 닫았지만 공습이 매번 같은 간격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으므로 며칠 사이에 일이 터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가고 아버지가 폴란드로 떠난 바로 그날 저녁에 락까에 공습이 있었다. 공습의 표적이었던 반정부 시위대 본부 근처에 있는 아이들의 집은 그날 자정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폭발음에 놀란 사람들이 하나둘 집밖으로 나와 사태를 살폈고, 청년들 몇몇은 시위대를 저지하려던 정부군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하기도 했다. 아술은 폭격 파편이 날아와 갑자기 깨진 유리창 때문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울고 있었고, 그 사이 라일라를 깨워 짐을 대강 꾸려뒀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먼 여행을 해야 해.


  4. 라일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많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라일라 만큼의 정성을 쏟지 않았다. 내가 구조대원으로 일하며 처음 만난 아이들이라 나에게는 각별했다. 죽은 어머니의 손을 붙든 라일라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 너무 깊이 각인된 탓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캠프는 어디까지나 임시 거처일 뿐이었고 아이들은 결국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걸 도우려면 아이들의 친부가 필요했다. 폴란드에 있다는 아이들의 아버지와 연락을 하기 위해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전문 브로커들을 통해 수소문했고 폴란드에 있는 친구들에게 부탁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폴란드 난민 거처에는 아미르 무하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40대 후반의 남자가 넘쳐났고 그나마도 자리를 잡은 대다수는 사회로 진출한 상태였다. 일단 사회로 나가면 난민 출신이라는 것이 흠이 될까 염려한 사람들이 신분을 세탁하거나 위조하기 마련이었다. 그를 찾을 가능성은 차츰 희박해졌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의 아버지를 찾는 것이 무의미한 노력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무하마드 찾기는 그저 기계적인 나의 오전 일과로 자리 잡아갔다. 그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전후 상황을 세세히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다만 아버지 쪽에서 아이들을 찾으려면 난민 등록을 마치고 캠프의 생활에 충실해야하지 않겠냐고 조언해주는 게 전부였다. 어쩌면 내 역할은 두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풀죽은 두 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 나는 일하는 틈틈이 라일라를 찾아가 보살폈다. 캠프에 들어와 며칠을 울기만 하던 꼬마 아술은 다행히 차츰 회복이 되어갔고 어느새 친해진 캠프의 또래 친구들과 틈만 나면 공을 차러나갔다. 라일라는 주로 텐트 안에서 책을 읽거나 캠프를 산책했다. 캠프 주변은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일라는 늘 주변을 두어 바퀴 돌고 오는 것으로 산책을 마쳤다. 전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던 라일라는 산책을 할 때도 책을 꼭 옆에 끼고 다녔다. 불행하게도 생존이 유일한 목적인 캠프에서 라일라의 지적 면모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라일라가 책을 들고 다닐 때마다 유난스럽다는 눈빛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눈빛을 느끼는 날이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다고 라일라는 말했다. 이대로 캠프에서의 시간이 쌓여 이십대가 되어버리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있는 할인 마트 캐셔뿐일 거란 말이 부쩍 늘었을 때야 나는 라일라의 고민이 꽤나 실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라일라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필요한 것이 없는지 꼼꼼히 챙겼다. 아침마다 폴란드에 관련된 인터넷 영어 뉴스를 프린트 해 라일라에게 전해주고, 가끔 구호품으로 들어오는 아랍어 소설을 챙겨뒀다 전하기도 했다. 책을 구해주거나 읽을거리를 가져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내 마음속에 늘 가시처럼 걸려있던 것은 안경이었다. 라일라는 상당한 고도근시였고, 라일라가 소지한 유일한 안경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지중해 바다에 떨어져 지금쯤 에게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안경은 구하기 쉽지 않았다. 구호품목에 포함된 물건이 아니었고 생활 제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난민 캠프 근처에는 라일라에게 딱 맞는 안경을 구할 만 한 안경점이 없었다. 나는 늘 안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날 밤을 기억하는 건 아마도 수면에 비친 달빛 때문인 것 같다. 달빛이 아니라 지중해를 떠돌던 보트의 방향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라일라를 떠올릴 때면 달빛은 그녀의 메타포처럼 늘 등장했다. 그러니 그날도 내 기억 속에는 달빛의 밤으로 남아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리 챙겨둔 간식거리를 들고 라일라의 텐트를 찾았고 우리는 저녁 무렵 우리만의 산책 코스에서 비밀스러운 회동을 계획했다. 굳이 비밀일 필요도 없었는데 우리는 늘 비밀 의식을 치러내듯 캠프 주변을 조심히 돌았다. 우리의 산책은 늘 우리가 ‘달빛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은 언덕에서 끝났다.

  라일라는 유독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날 산책하는 내내 그랬다. 나는 괜히 중언부언 두서없는 이야기를 해댔는데, 그러다 달빛의 언덕에 닿았을 때 라일라가 문득 물었다.

  “언니, 안경 쓴 거 처음 봐요.”

  아, 안경이 이상했던 거로구나.

  “그러면 지금까지 안경을 안 썼는데 어떻게 보였어요?”

  나는 잠깐 생각하다 라일라에게 안경을 건넸다.

  “한 번 써 봐.”

  그러자 라일라가 웃으며 안경을 손으로 밀어냈다.

  “아니에요.”

  나는 안경을 다시 건네며 말했다.

  “써 봐, 잘 보일 거야.”

  내 안경을 건네받아 콧등에 걸친 라일라는 박수를 쳐가며 과장된 소리로 웃었다. 나는 잘 맞지도 않는 내 안경을 쓰고 빵 한쪽을 입에 담고 오물거리는 라일라를 물끄러미 봤다. 그제야 라일라가 애초에 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뒤늦게 알아챘다. 라일라는 내가 자신에게 그 안경을 줄 의도였다고 착각했던 거였다. 나는 라일라가 민망하지 않도록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마음속으로는 빠르게 계산했다. 그 안경은 비상용 안경이었고, 봉사기간을 마칠 때까지 4개월 남짓이 남았고, 안경은 제네바나 한국에 가서 얼마든지 살 수 있으며, 일회용 렌즈도 한 박스나 남아 있었다. 나는 환히 웃었다. 비상용 안경쯤이야 라일라에게 선물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너무 계산적인가 반성하며 라일라의 어깨를 다독였다. 셈하는 내 마음을 라일라가 읽지 않았길 바랐다.

  “안경도 생겼으니까 공부 더 열심히 해야 해.”

  나와 라일라의 시력이 같았을 리도 없거니와, 내 경우 왼쪽과 오른쪽 시력이 완전히 달랐으므로 안경이 제 눈에 완벽하게 맞지 않았을 텐데도 라일라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그 시기를 견디게 해준 것은 그 웃음뿐이었던 것 같을 정도로 여전히 기억나는 환한 웃음.

  ‘달빛의 언덕’은 평지보다 조금 높고 너른 둔덕일 뿐이었지만, 나는 캠프 너머 멀리 지중해가 언뜻 내려다보이는 그곳을 좋아했다. 달이 차올랐다. 빛이 충만한 보름달이었다. 라일라는 레스보스 섬 너머 지중해 위에 뜬 달을 멀리 내다봤다. 문득 라일라가 말했다.

  “달에는 빛이 없어요.”

  “저 달빛은 뭔데?”

  “어떤 책에서 봤는데요. 달의 빛은 태양에 반사되어 나온대요.”

  나는 태양에 반사되어 나온 달빛을 바라봤다.

  “그래서 육안으로 태양의 빛은 볼 수 없어도 달의 빛은 볼 수 있대요.”

  라일라가 나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언니에게는 따뜻한 빛이 흘러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달빛을 바라봤다. 라일라가 정말 궁금했을 법한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는 왜 여기에서 살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한국에는 이상한 사람도 없고, 전쟁도 없고, 언니 가족들도 있고.”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해? 일본인 아저씨도 있잖아.”

  나는 얼마 전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의료봉사단에 합류한 유키 씨를 흉내 내며 어깨를 앞뒤로 흔들었다. 내과의인 유키 씨가 청진기를 들고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일 때마다 하는 동작이었다. 라일라가 피식 웃어버렸고, 결국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한국에 가보고 싶어?”

  내가 묻자 라일라는 머뭇거렸다.

  “아버지를 찾을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아요.”

  나는 달빛에 비친 라일라를 바라봤다. 나는 라일라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때 저편에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둠 속 희미한 실루엣은 물류팀장과 린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나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둠 속에 발걸음을 멈춘 그들이 잠시 멈칫했다. 뭔가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애써 이상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라일라는 서먹했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라일라를 붙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그냥 앉아 있어도 돼.”

  라일라는 그들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 사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 팀장과 린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여기 잠깐만 앉아있다 갈까?”

  팀장이 이야기하며 내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린도 팀장의 옆에 앉았다. 나는 그들과 라일라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일라는 숨죽인 채 달빛을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한 차례 지났다. 문득 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오래 근무할 생각은 아니죠?”

  린이 내게 물었다. 라일라에게까지 충분히 잘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어쩌면 일부러 라일라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묻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나는 라일라를 바라봤다. 라일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었다. 그 후에 팀장이 우리에게 무언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여서 귀담을 필요는 없었다. 팀장 손에 들려진 무전기에 파란 빛이 깜빡이면서 대화는 중단됐다. A동 쪽에 갑자기 싸움이 났으니 제재하는 걸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소리였다. 팀장이 한숨을 쉬며 무전기에 승낙 신호를 보냈다.

  “가자. 정말 바람 잘 날이 없구나, 하싼 그 녀석!”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주저하던 라일라가 먼저 길을 나섰다. 린이 서둘러 라일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잘 가서 쉬어요.”

  라일라는 멋쩍게 웃으며 빠르게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등 돌린 라일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린이 거세게 내 손목을 붙들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린을 바라봤다. 린은 분명히 고개를 저으며 붙든 손목에 힘을 줬다.

  더 이상은 안 돼.

  린의 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5. 하싼

  남성들이 많은 A동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중에서도 하싼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단원들 사이에서 하싼의 별명은 ‘원탑’이었다. 소매치기 같은 건 예삿일이었고 요즘에는 폭행, 절도, 강간미수까지 차츰 강도를 높여가 그렇지 않아도 봉사단 내부에서 고민이 컸다. 애초에 하싼은 별로 문제적 인물이 아니었다. 캠프에는 별 것 아닌 말싸움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하싼은 그런 일을 주동하는 조무래기에 불과했다.

  그런 하싼이 변하게 된 정확한 계기는 누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몇 달 전 하싼이 경찰서에 다녀온 후부터였다고 추측되곤 했다. 내 기억에 그때 하싼은 B동의 텐트에 간식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마침 그곳에 있던 열일곱의 아프리카 출신 여자애를 강간하려던 죄로 신고되어 경찰에 이송되었다. 나는 그 사건의 전말을 꽤나 세밀하게 전해 들었다. 라일라 텐트의 바로 옆 텐트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에서 하싼은 자신이 강간까지는 할 생각이 아니었노라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했다. 그때 한 경찰이 하싼에게 시비를 걸었던가 보다. 화가 난 하싼이 경찰을 때렸다. 그는 공무집행방해죄로 정말로 처벌을 받을 뻔했다. 그가 경찰에게서 들었던 말이 ‘너 같은 새끼들이 한다는 짓이 역시 그렇지’였던가, ‘니네 나라로 돌아가’였던가.

  경찰서에 다녀온 후 하싼의 범죄 행각은 간식이나 옷가지를 훔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시도하는가 하면 점심 배급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사람들의 돈을 훔쳐 밖에 나가기 일쑤였다. 그때 즈음 하싼이 거느리는 패거리가 생겨났고 그는 차츰 거물급으로 성장했다. 아니, 하싼의 범행 동기가 치졸하고 범행 수법이 단순했으므로 괴물로 변해갔다는 말이 맞겠다. 정작 캠프에 들어오기 전 하싼이 모범생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건 하싼의 친구를 통해서였는데, 나와 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으며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이유와 사정이 어찌되었든 하싼은 차츰 ‘범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현장으로 가며 우리가 들은 소식은 엊그제 캠프에 들어온 새로운 사람들을 하싼이 건드렸다는 것뿐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사람들이 벌써 여럿 모여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섯 살쯤 되는 어린 아이를 안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그 앞으로 한 남자가 하싼의 패거리에게서 맞고 있었다. 하싼은 우리를 보더니 크게 침을 끓여 바닥에 뱉었다. 누구도 하싼을 멈추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한 번 대줬어야지.

  남자는 피투성이였다. 입술이 찢겨나가고 흙으로 온 몸이 뒤덮여있었다. 흙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리가 이들을 처벌하는 건 규칙에서 어긋나는 행위였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제지할 수 없었고, 이것은 우리가 어디까지나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라는 대명제하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린은 그 자리에서 경찰을 불렀다. 하싼이 린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웃어대며 말했다.

  “걔네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는 줄 알아?”

  하싼은 매뉴얼대로 그리스 경찰에 이송되었다.

  나는 경찰차에 억지로 호송되는 하싼을 바라봤다. 하싼이 입은 티셔츠 오른쪽 팔이 나풀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나풀거리는 장면이 확연하게 보였다. 내전 중에 거리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져 한쪽 팔이 떨어져나갔다고 했다. 하싼은 난민캠프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깨어난 하싼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고 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싼의 가족들은 그때까지도 시리아에 남아 있었고 어린 여동생은 폭파된 집에서 잿더미로 변한 채 꺼내졌다고 했다.

  나는 경찰차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얼마 안가 그가 다시 난민캠프로 들어올 거라는 건 하싼도 우리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 정부에게 난민캠프는 골칫덩어리였다. 난민들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 그저 한 곳에 모여 있어주는 거였다. 일이 터져도 그 안에서 해결되면 그리스 경찰은 캠프를 건드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들의 관할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그 사이 난민캠프는 유서 깊은 고대 유적지 그리스의 한쪽 땅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었다. 새로운 폭력이 탄생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해져갔다. 세상이 그곳에서 종말을 고했고 다시 해가 뜨면 종말 속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의 뒷모습이 현장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6. 경고

  다음 날 아침부터 물품 팀은 지난밤 들어온 구호물품을 정신없이 정리했다. 지난해 여름, 초강력 허리케인으로 거주 지역을 완전히 잃어버리다시피 했던 미국 남동부 지역의 사람들이 보내온 옷가지와 신발, 장난감과 비상식량들로 창고는 넘쳐났다.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를 더 잘 아는 법이다. 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구호품들을 분류했다. 갓난아이부터 1세, 영아, 육아, 십대까지 성장기의 사람들에게 전달될 구호품을 차례로 구분해 넣었고, 한쪽에는 성인용 물품을 키와 사이즈로 분류했다. 구호품을 실은 박스가 쉴 새 없이 들어와 내 앞에 들어찼다.

  나는 옷 무덤 위 옷가지 사이에 끼워진 카드를 한 장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 내 손바닥 정도 크기의 카드는 예쁜 반짝이 스티커로 봉해졌는데, 스티커를 뜯고 내용물을 꺼내니 아이가 그렸을 법한 고래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나왔다. 나는 카드를 열었다. 카드 안쪽에는 알 수 없는 글씨가 삐뚤빼뚤 적혀있었다.

  “스페인어야.”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팀장이었다.

  “가끔 이런 카드들이 전해져. 힘내라, 응원한다. 이런 거지 뭐.”

  순간 카드에 그림을 입히는 귀여운 여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조그맣게 웃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라니.

  “잠깐 나 좀 볼까?”

  나는 팀장을 따라 나섰다. 팀장의 얼굴이 굳어있어 자연스레 긴장이 됐다. 팀장은 나를 창고 뒤편에 데려갔고, 자리를 잡은 후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곤 내게도 권했다.

  “안 피워요.”

  팀장은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담배 연기가 바람에 섞여 빠르게 사라졌다.

  “저, 그게 말이야.”

  팀장은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어제 린과의 대화에서 벌써 기류의 뒤틀림을 느꼈으므로 직설적으로 묻기로 했다.

  “잘못된 거였나요?”

  팀장은 매사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이끄는 팀원이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근조근 얘기했다. 사실상 내가 지금 하는 일의 목적은 특정 수혜자의 생활을 직접 돕는 일이라기보다는 수혜자 일반에 구호품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 레스보스는 수많은 눈들이 봉사단원들을 한 명 한 명 지켜보고 있는 곳이라는 것,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 아이에게 정성을 쏟는 일이 굉장히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 구호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얼굴은 차츰 경직됐다. 나는 팀장을 쏘아봤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물건을 팔기 위해 서비스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팀장은 넉넉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팀장은 말을 멈췄다. 우리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한동안 팀장은 말없이 담배 연기만 뱉어냈다. 그는 할 말을 신중히 골랐다.

  “내가 꼭 네 나이였을 때 말이야. 정성을 다해 보살폈어. 흑인이었지. 그때는 중동보다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많았거든. 그 아이가 단원 숙소로 몰래 들어와 팀원들 소지품마저 다 털어 도망친 밤에야 비로소 내가 한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 알겠더군.”

  팀장은 내게 그것을 ‘배신’이라고 설명했다.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 그 이상의 관계로 얽히면 모두가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고. 요컨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것, 그게 난민 구호의 첫 번째 자세라고 그는 나에게 훈계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젯밤 린의 표정을 기억해냈다. 나는 팀장과 서먹하게 인사를 한 후에 곧장 창고로 들어갔다. 린은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모르는 척 구호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뛰다시피 걸어가 린의 앞에 섰다.

  “뭐가 잘못된 거죠?”

  린은 태평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라일라가 당신한테 못할 짓이라도 했나요?”

  흥분한 내 앞에서 린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라일라가 누구죠? 아, 어제 같이 있던 그 여자애?”

  내 몸 안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무심한 척 드러나는 린의 냉정함은 그녀가 팀장에게 훈수를 둔 걸 시미치 떼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었다. 지독하도록 완벽한 문법으로 빚어진 린의 영어 문장이 내 귀를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갔다.

  “여긴 프로의 세계예요. 지켜야 할 매뉴얼이라는 게 있죠.”

  린이 말했다. 나는 조그맣게 눈을 떴다.

  “산책 한 번 했어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한 번이 아니었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

  린은 시간을 들여 마지막 말을 뱉었다.

  “경고만 하는 거예요. 선을 넘지 않게.”

  그 말이 너무나 거슬렸다. 선을 넘지 않게. 가만 두면 내가 라일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는 소린가. 더 기이한 건 그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린과의 첫 대화였다.

  ‘레즈비언은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된 단어다.’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지금에 와 라일라를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가. 라일라를 만나면서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하나. 그런 감정 따윈 없었다고 해명을 해야 하는 건가. 대체 어떤 의도였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욱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좋아요, 그럼 매뉴얼대로 하면 되겠네요.”

  린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내가 악을 쓰듯 큰 소리로 린에게 말했던 그 말을 아직 또렷이 기억한다.

  “‘보호자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린이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대로 멈춰 섰다. 린은 눈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린을 등지고 창고를 뛰쳐나왔다. 물론 홧김에 나온 말이었지만 나는 창고에서 나온 뒤 한참 서성였다. 이대로 창고에 들어간다면 더 끔찍한 상황을 마주할 것만 같았다. 자존심과 억울함이 동시에 나를 짓눌렀다.

  그때 본부 사무실이 눈앞에 들어왔다. ‘안 될 건 또 뭐야’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당시의 내 행동과 말을 비웃는다면 나도 뭔가 미리 방어막 같은 걸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알량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 어떤 게 더 우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데스크에 앉아있던 담당직원 앞에 섰다.

  “입양절차를 좀 알고 싶어요.”

  국제이주기구에서 파견된 직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본인이 하시게요?”

  나는 굳은 채 서서 더듬거렸다.

  “그냥 조금 궁금했을 뿐이에요.”

  직원은 조항을 살펴봐야겠지만 우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삼십대 초반인데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고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거나 경제력이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입양 자격에서 어긋나는 건 사실이라고 일러주었다. 무엇보다 국제법에 우선해 한국 국내의 입양 관련 법률이 어떤지 알아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 직원은 약간의 의심과 적의가 담긴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적당히 해요. 그쪽은 논문에 넣을 사례나 잘 관찰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제야 그의 뒤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나를 향한 불만과 조롱의 눈빛을 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단지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캠프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물품 팀에 배치했던 이유 또한 깨달았다. 국제 사회에서 보내져 하루에 수백 개씩 쏟아지는 구호품들은 난민기구에서 구호 공조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낼 만한 가장 그럴 듯한 사례였다. 나는 그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뒤돌아서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학위와 경력이 내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내가 힘들여 난민에 대한 논문을 쓴다고 한들 그것이 인간으로서 그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전에는 미처 몰랐다는 듯 여기까지 와버렸다. 아무리 되새겨보아도 라일라에 대한 나의 배려는 사사로운 것일 수 없었다. 라일라를 대하는 내 마음은 논문과는 하등 상관없는 진심이었다. 단원이라는 직함의 저들은 난민들과 함께 앉아 밥 한 끼 먹는 걸 두려워하는 소심한 치들이었다. 그들에게 진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 여기 버려지는 사람들의 아픔을 알기는 아는 건가. 난민들에게 도사리는 위험과 두려움을 이해할 생각은 있는 건가. 나는 사무실을 나오면서 난민 구호 공조 매뉴얼에서 읽었던 여성 자립 지원프로그램 실험 사례를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정말 말로만 이루어지는 구호성(口號性) 구호(救護) 공조 매뉴얼!


  7. 한국행

  나는 이주일 후에 퇴소 처리를 했다. 그 이주일 동안 나는 거의 창고 밖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에 대한 환멸, 상처 난 자존심, 소각된 열정, 그리고 논문에 대한 욕망.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더는 레스보스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곳만 아니면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에서 좀 멀어졌다가 다른 방법으로 논문을 마무리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선 좀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이 길로 가는 게 맞을지, 단원들과 난민을 대하는 내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 건지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원래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지만 한국행 항공권을 끊었다. 지도교수에게는 무슨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변명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가급적 조용히 한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다음에 대한 생각은 한국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곳에 두고 갈 라일라, 그 아이뿐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라일라를 불러냈다. 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물론 라일라에게는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캠프에서 나가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나는 라일라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라일라에게는 제네바의 학교에 일이 생겼다고 둘러댔다. 라일라는 신기할 정도로 침착했다.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딱히 슬퍼하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수록 민망해지는 건 나였다. 나는 라일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찾는 것만큼은 잊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라일라를 잊은 건 아닐 거라고 했다.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겠다고 했다. 라일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보슬거리며 내리던 비는 어느새 굵고 거칠게 쏟아졌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그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한국에 가서 방법을 꼭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지난 몇 해 동안 이 분야에 쏟은 내 노력과 진심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 간 내전이 주변국가와 국제 사회의 무력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난민들은 매년 수천 명씩 불어났다.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는 연일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와, 값싼 노동력을 수입할 목적으로 난민을 유입하는 거라며 정부에 대항하는 인권 단체들, 난민세와 난민 폭동에 진저리가 났다는 시민들을 다룬 뉴스가 터져 나왔다. 유럽연합의 강요에 못 이겨 난민을 받아들이다 국민들의 원성이 잦아지자 슬그머니 국경을 봉쇄해버리는 국가들이 속속 늘어났는데 폴란드도 그 중 하나였다.

  한국에 돌아온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집을 얻고 가족을 만나고 한국 생활에 안착하기 위해 행정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몇 개월의 시간이 거침없이 흘렀다. 겨우 얻은 작은 원룸은 혼자 살기에도 비좁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직장을 찾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한국 사회도 다방면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매일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도처에서 일어났고 위협적인 상황은 어디서나 발생 했으며 국가는 반세기 넘게 전시 상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로운 경험과 감정들이 쌓여가며 캠프에 대한 기억의 밀도는 빠르게 묽어져갔다. 월세나 은행 이자, 카드 값이나 가족 행사 같은 소소한 난제들이 내 앞에 산적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닿을 수 있는 곳에 놓고 온 삶보다 훨씬 규칙적이고 끈질기게 나를 흔들어댔다. 나는 나 자신을 ‘월세난민’으로 치부하며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변모해갔다. 그토록 절박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기억의 세계에서마저 익사당하는 현실, 나로서도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가끔 라일라가 생각날 때면 나는 라일라를 입양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대던 나의 한때의 충동을 아프게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일라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했다면 나의 그 돌이킬 수 없는 치기와 감상이 라일라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캠프의 봉사단원들과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적어도 여전히 그곳에 있지 않는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답이 없는 시간 속에 파묻혀 나는 깊이 침잠했다. 차라리 그들에게서 내가 완전히 잊히길 바란 적도 있었다.

  라일라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라일라와 아술이 폴란드에 있는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길, 그들 가족이 함께 폴란드 어느 시골마을에서 평온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기를 빌었다. 마음의 다른 한 켠에서는 아이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끈덕지게 꼬리를 물었다. 그곳은 죽음이 무력한 곳, 죽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타인의 죽음을 가벼이 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평범으로서의 악에 익숙해져 버리는 곳이었다. 나는 내가 아이들을 버려두고 도피했다는 자책감으로부터 사실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린과 연락이 닿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린에게 그때 정말 미안했었다는 메일을 남겼다. 진심이었다. 메일을 쓰며 그때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또 반성했다. 린은 비교적 빨리 내 메일을 수신했다. 그런데도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린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린이 아직 나에게 앙금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나는 그녀에게 잠깐 지나갔던 이름 모를 봉사단원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린에게서 메일이 왔다. 나는 린의 이름으로 발송된 메일을 보며 약간 긴장했다. 조금 후에는 다행스러운 마음에 가벼운 한숨이 조금 새어나왔다. 린은 나를 잊지 않았구나. 어쩐지 으쓱해졌다. 린이 구사하는 완벽한 영어 문장도 조금 그리워졌다. 냉철하고 합리적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린의 영문법을 마주할 생각에 마음이 조금 들떴다. 적어도 린의 메일을 열어보기 전 내 마음은 그랬다.


  영은에게

  메일 줘서 고마워요. 큰일을 겪은 후에 종종 당신을 생각했는데 연락이 되어서 기뻤어요.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요! 학위를 끝내지 않았다는 건 아쉽군요. 난 레스보스에서 이 년 동안 근무한 후 얼마 전에 스페인으로 옮겼어요. 여기서는 물류 팀이 아니라 행정 일을 돕고 있어요. 하는 일은 이전과 비슷하지만 유럽연합 대부분의 국가에서 난민 신청절차가 조금 더 까다로워져서 요즘은 서류 작업하는 일이 만만치 않네요.

  우선 당신이 이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식을 전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당신이 떠난 후 캠프에는 많은 일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성폭행 사건이 많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B동 텐트에서 사건이 많이 터졌죠. 우리도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통제가 쉬운 일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고 있었어요. 라일라도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보호자가 없으면 사고에 노출되기가 더 쉽죠. 그날도 라일라가 혼자 있는 텐트에 남자들 여럿이 들어왔다 나갔었던 거 같아요. 마지막 남자는 A동 텐트의 싸움꾼 하싼이었어요. 기억나요? 맨날 싸움만 하던 싸움쟁이. 라일라가 반항을 하니까 안쪽에서 자물쇠를 완전히 채웠던가 봐요. 그날 저녁 8시쯤에 텐트에 붙은 불이 커지고 나서야 신고가 들어왔어요. 우리가 출동했을 때는 이미 텐트 안쪽이 모두 타버린 후였고요.

  발화의 원인은 촛불이 분명했는데, 이상한 건 텐트 안쪽에 있는 사람들의 탈출 시도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우리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검증을 의뢰했죠. 그리스 경찰 말은 아마 죽음을 염두에 둔 누군가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거였는데··· 섣부른 결론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일라의 유품은 영어판 오디세우스와 아랍어로 된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였는데 불에 타서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불에 그을러진 안경이 있었는데, 안경은 라일라의 동생에게 전달되었다고 들었어요.

  참, 라일라의 동생은 아버지를 찾아 폴란드로 들어갔다고 해요. 나도 그 후에 들은 소식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이 소식에 당신이 많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랍니다.

  린


  8. 내가 만든 사례

  아술이 개별 심층 면접 대상으로서 이용 가치가 있을 거라는 건 지도교수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내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만 아술과의 거리를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그가 정의한 용기의 의미에 대해 나는 여러 번 되뇌었다. ‘용기란 주어진 상황을 품고 가는 것이다’.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속삭였다.

  많아야 네 번이야, 바보처럼 굴지 마.

  다짐이 무색하게 다음 주로 계획된 세 번째 인터뷰가 다가올수록 나는 통제력을 잃어갔다. 꿈속에서 화염에 휩싸여가는 라일라를 목격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기도 했고, 거리를 지나다닐 때 아술과 비슷한 사람이 없는지 신경 쓰며 걸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앞에 나타난 아술이 나를 채근할 것이 두려웠다. ‘당신도 결국 우리를 버리고 가버렸어’ 라든지, ‘당신도 결국 비슷한 사람이었어’ 라든지.

  나는 묽어진 기억의 언저리를 더듬거렸다. 건너온 시간들에 대해, 그때 내가 왜 곧장 돌아갈 수 없었는지에 대해, 내가 돌아와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지에 대해 말해 줘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술이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그때 내 상황을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문장들을 다듬어가며 연습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지하게 변명거리를 만들었다.

  다시 만난 아술은 지난번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오히려 긴장한 건 내 쪽인 것 같았다. 나는 아술을 보며 여러 차례 감정의 선을 넘을 뻔했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레스보스 섬이나 난민캠프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아술을 객관화시키는데 도움이 됐다.

  세 번째 인터뷰는 송환대기실 이야기로 시작했다. 한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는 과정은 세 명 다 비슷했지만 외교부 직원들과 진행한 인터뷰의 결과는 달랐다. 이미 첫 번째 인터뷰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한국에 형제가 있거나 한국 가정에 입양되는 경우와 아술의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아술이 서울의 난민기구를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반복해 물었다. 국가 간 공조나 협력이 드러나는 부분은 심혈을 기울여 질문했다. 아술의 기억은 다행스럽게도 점차 내가 만들어둔 논문의 얼개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들어왔다. 자발적으로 지원 국가를 선택한 난민의 경우 정부와 국제 기구간 협력의 근거를 강화시키고, 난민의 생활 만족도 역시 높일 수 있다는 논리의 흐름에 아술의 사례는 잘 들어맞았다. 이 경우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 차원에서는 국제 사회에 약속한 공조 비율을 늘릴 수 있고, 국제 사회 측면에서는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을 지역적으로 배분할 수 있었다. 지도 교수의 말대로 내가 조금만 거리를 유지하면 아술은 완벽한 사례 연구 대상임이 분명했다.

  아술은 한국에 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만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논문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그 질문을 일단 덮어두었다. 확실히 인터뷰는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하위 가설로 둔 몇 개 소챕터의 검증을 강화시킬 사례로 인터뷰 내용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난민 구호에 있어 국가 간 갈등 시 협력방안, 국제 구호 매뉴얼 중 국가 협력 항목의 수정 가능성까지 건드릴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물론 소챕터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려면 결국 난민 캠프의 구체적 사례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네 번째 인터뷰부터 조심스럽게 레스보스 섬을 끄집어냈다. 아술이 예상보다 담담한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레스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술은 개인적인 체험담을 이야기해 주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가 겪은 상황의 원인이나 결과가 빚어진 정황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이론의 추상성은 아술의 사례를 통해 구체성을 얻어갔다. 나는 난민 구호에 있어 국가 간 갈등과 협력이라는 대전제 하에, 여러 가지 소가설에 대한 결론을 확보했다. 국제 구호 매뉴얼에 국가 간 협력 방안의 항목을 만들어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지도교수로부터 소논문으로 계획해 하반기 유엔 서밋에 제출해 보는 게 좋겠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위 논문 예심이 두 달 앞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받자 기분이 묘하게 들뜨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라일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피한 것일 수도 있었다. 논문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 라일라를 통해 드러나게 될 내 자신의 가증스러움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아술과 따로 만날 용기를 선뜻 내지 못했다.

  다섯 번째 인터뷰에서 아술은 하싼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아술의 상대편에 앉았다. 아술은 침착했다.

  “하싼은 나쁜 놈이었요, 정말 개새끼였죠. 누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었거든요. 하싼을 처음 만났던 건 우리가 캠프에 들어간 날이었어요. 그날 우리는 거의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어요. 밤새 겨울비가 내렸고 우리는 겨우 얇은 점퍼만 하나씩 입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캠프도 사람들도 무서웠어요. A동과 B동의 갈림길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어요. 그때 우리가 만난 사람이 하싼 형이었어요. 하싼은 우리를 발견하고 캠프에 오늘 들어왔냐고 물었죠. 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어요.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거든요. 형은 우리를 부축해 B동 우리 텐트에 데려다줬어요. 형이 나를 업었고 라일라는 우리 뒤를 따라왔어요. B동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서둘러 각자의 텐트로 들어가 버렸어요. 형이 저한테 저 사람들 조심해야 해, 하고 말해 줬어요. 저는 그 형이 좋은 사람이란 걸 그때 알았죠. 형은 우리를 쉬게 해놓고 담요를 가져다 줬어요. 왼팔 한가득 담요와 간식거리를 챙겨다 줬죠. 그 형은 오른팔이 없었거든요. 그때 담요를 가져다주면서 형이 저한테 그랬어요. ‘엄마 생각나면 형한테 와’ 라고요. 젠장. 나쁜 새끼. 형은 밤이 되면 우리 텐트에 찾아왔어요. ‘꼬맹이 엄마 보고 싶을까봐 형이 왔지’ 그러면서 말이에요. 좋은 꿈 꿔라, 하고 매일 밤 말해준 사람. 그 사람도 하싼이었어요.”

  나는 하싼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매일 밤 사건 사고를 터트리던 문제아. 희붐한 연기 사이로 경찰차에 오르는 ‘하싼’이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날의 달빛, 그날의 저녁, 그날의 라일라.

  모든 것이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술을 바라봤다. 아술의 어깨가 떨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술은 우수에 잠긴 검고 깊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술의 눈은 빛났다. 캠프의 달빛처럼.

  나는 그리스 경찰과 난민 캠프 지원단의 공조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사례를 논문에 넣기로 했다. 맞다. 나는 그 모든 사례를 어떻게 한 번이라도 써먹어볼 요량이었다.

  몇 번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이 내 생각도 조금씩 유연해져갔다. 처음의 적대감과 긴장은 희미해지고 차츰 아술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죄책감과 함께 마음속에 들어섰다. 하싼의 이야기는 계시 같은 것이었다. 하싼의 마지막을 듣고 돌아온 저녁, 나는 아술에 대한 나의 마음을 굳혔다. 아술은 어쩌면 기댈 곳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술이 내 삶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술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 나에게 남은 과제였다는 것을 나 스스로 깨달았다. 아술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끌어안아 줘야 할 사람은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다음에 있을 마지막 인터뷰가 끝나면 아술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술이 한국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진심이었다.

 

  9. 마지막 인터뷰

  우리는 가을의 초입에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지막 인터뷰의 주제는 ‘나’로 정했다. 그동안 진행된 인터뷰가 난민의 고통, 한국에 오기까지의 상황, 난민 캠프의 실상처럼 난민 자체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난민으로서의 정체성만 부여받았다. 인간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그들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물론 논문을 위해 불필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행복의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논문의 결론에 인간으로서 난민의 행복 추구권을 주장하며 그 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인터뷰는 결론을 위한 근거였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이 뭘까요?”

  내가 묻자 아이들이 곰곰이 생각했다. 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일상이요. 밤에 잠 잘 때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것. 맛있는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 친구들과 쇼핑센터에 가서 마음껏 물건을 고를 수 있는 것.”

  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조언이네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

  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거요. 요즘 집에서 한국 엄마 아빠가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라고 해서······.”

  첫 번째 아이가 두 번째 아이의 대답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난 형이 자꾸 난민은 등록금 안내도 되는 대학에 가라는데.”

  심각해진 아이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모두 웃었다. 나는 아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술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나는 아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아술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캠프로 돌아가려고 해요.”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한참동안 말없이 아술을 바라봤다. 물론 나는 인터뷰 후에 아술에게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뿐 아니라 다른 어떤 종류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에 잠겼다. 아술의 다짐이 얼마 전부터 유독 말이 없었던 아술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가 싶었다. 무엇보다 아술의 결심에 내가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하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생각했다. 5년이라는 시간은 열세 살이던 그를 열여덟 성인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방해할 권리도 책임도 없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수없이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헤엄쳐 지나갔다. 그가 난민 캠프를 찾아가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하며 아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 그를 내버려둘 셈이니. 라일라라면 아술을 내버려뒀겠니. 아술이 가버리고 나면 넌 행복 하겠니. 나는 던져뒀던 가방을 다시 들춰 멨다. 아술이 센터의 보호소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제야 문득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아술은 내 인터뷰에 마다않고 응해줬던 걸까. 돌이켜보니 그때까지 한 번도 나는 아술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임시 거처로 만들어진 보호소 한 편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그는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술은 마치 내가 찾아올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문간에 기대 짐을 정리하는 그를 지켜봤다. 방의 입구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흰 바탕에 하얀 로고가 새겨진 그의 운동화가 놓여있었다. 그제야 번뜩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캠프를 나오던 마지막 날 아침 내가 아술을 위해 따로 준비해뒀던, 아술이 그토록 원했다던 하얀 로고의 운동화 한 켤레.

  운동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술은 내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아술을 다시 만난 첫날 본 아술의 운동화를 기억해냈다. 그날 그 운동화는 내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구나. 나는 무기력하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가방을 뒤적였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건 작은 천에 싸여있는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와 내게 내밀었다. 작고 투명한, 둥근 플라스틱 통 한쪽 끝부분이 천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나는 그게 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안경, 라일라의 안경,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그것. 나는 하얀 천의 매듭을 풀지도 않은 채 그것을 오래 들여다봤다. 아술은 말없이 그런 나를 기다려주었다.

  “누나는 매일 의식처럼 안경을 닦고 앉아 책을 읽었어요. 곧 아빠를 만나면 유럽 시민이 될 테니까,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래서 캠프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 거라고 했어요.”

  아술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서 당신을 찾고 싶다고 했어요. 찾아서 그 안경이 매일 밤 알려줬던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는 결코 버려지거나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술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라일라와의 마지막 저녁을 생각하고 있었다. 안전한 한국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면 돌아와 널 꼭 데려가겠다고, 그곳에는 위험한 사람들도, 폭동도 없다고……. 혹여 널 데려갈 수 없게 된다면 반드시 아빠를 만나도록 도와주겠다고,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난 논문을 위해서만 이곳에 머물렀던 게 아니라고……. 그 장면에서 나는 라일라의 손을 꼭 붙들고 스스로 다짐을 거듭하고 있었다. 빗속의 라일라는 떠나는 나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그 장면의 마지막은 라일라의 표정이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무경계의 웃음. 기억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마지막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침묵을 깨고 아술이 말했다.

  “내일 저녁에 시리아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나는 아술을 바라봤다. 나에게는 아술의 선택을 저지할 자격이 없었다. 5년 전 내가 아이들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자격은 이미 상실되고 없었다.

  “미안해······.”

  마음 한 구석이 시려왔다. 그 마음의 근원을 무어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아술이 밝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돌아갈 마음을 굳혔던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에요. 난민 캠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깨달았죠. 이제 내가 그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도요.”

  아술은 다시 밝게 웃었다. 가슴 한쪽에서 강한 통증이 연달아 퍼졌다.

  “아니야 아술,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논문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친구들을 도우러 갈 거예요.”

  “아술!”

  지독히도 깊고 검은 늪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은 감정의 숲 안으로,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섬뜩하게 도사리는 내 이기심 안으로. 아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아술, 네가 이렇게 난민 캠프로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말 대신 한참이 지난 후에 나는 이런 말을 꺼냈다.

  “한국에서 계속 사는 건 어떻겠니. 한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술의 뒤로 보름달이 차올랐다. 아주 크고, 밝은 적갈색의 보름달이었다.

  “혹시 달빛이 태양의 빛에서 반사되어 나온다는 걸 알고 있나요?”

  아술이 물으며 달빛을 향해 섰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눈을 감았다.

  “모든 행성이 태양처럼 빛날 필요는 없어요. 태양은 달을 통해 달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수성이나 목성을 통해 그것들의 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하는 빛이 되기도 하죠. 사람은 모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봐요. 상황은 시선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해요.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죠. 그런 상황이 주어지면 곧 죽을 것 같이 힘들지만 그 상황을 견디게 하는 게 때로는 하나의 물건, 한 사람, 하나의 희망일 수 있어요.”

  아술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낮게 읊조렸다.

  “그 희망이 라일라에게는 안경이었어요. 당신에게는 논문이었겠지만…….”

  라일라에 대한 속죄, 아술에 대한 미안함. 뒤섞인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내 안에 차올랐다. 나는 한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감은 눈 바깥으로 무언가 번뜩이며 지나갔다.

 

10. 그래도 남는 것

  눈을 뜨고 창문 덮개를 살짝 밀어 올렸다. 인천까지 남은 비행시간은 이제 겨우 이십 분 남짓이었다. 내 대각선으로는 일등석으로 가는 가림막이 보인다. 그 안에는 내 지도교수인 게르하르트 롤랑이 있다. 창문 밖으로 공사 중인 건물들과 고속도로를 맹렬히 지나는 차들이 보인다. 하늘에서 보는 한국은 내게 늘 그런 식으로 다가온다. 무언가에 늘 분주하고 그 밖의 것에는 지독히도 무심하다. 인천에 도착하면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고 내 세션 발표는 내일 오후 3시, 4세션의 세 번째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올해 한국개발학회는 롤랑 교수에게 20주년 개발학회포럼의 기조연설을 부탁했다. 롤랑은 유엔난민기구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단상에 올라 한국 개발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기조연설을 수락하며 롤랑은 내 이야기를 개발학회에 꺼냈다. 자신이 기른 제자가 이번에 좋은 연구 논문을 냈다고, 한국 정부와 개발학회에 도움이 될 연구 결과일 테니 발표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그는 정중히 부탁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학회는 논문 발표 후 약간의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나를 위해 한국행 항공권을 보내왔다. 발표자를 위한 한국 학회의 관습 같은 거라고 했다. 금의환향하는 느낌이랄까, 무언가 대접받는 건 어색했지만 분명히 조금은 흥분이 되었다.

  졸업식 후 몇 개월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흘렀다. 내가 쓴 학위논문에 아술은 국제 공조체제의 성공적인 사례로 소개되었다. 논문에는 아술이 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캠프 생활을 마치고 폴란드를 거쳐 자립할 때까지의 일화가 상세히 쓰였고, 아술의 자발적 선택을 받아들인 한국 정부가 난민 기구와 공조해 난민 보호소에 아술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는 중요한 인터뷰이로서 아술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적었다.

  학위 논문 샘플본을 받아든 지도 교수는 내 논문의 객관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논문을 계획했던 6년 전 난민 캠프에서 보내온 사례 조사 결과에 비하면 지금의 FGI 인터뷰 방식이 공조 사례의 긍정적 측면을 잘 드러내는데다, 국제 협력을 통해 공조 매뉴얼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차원의 논리적 안정성이 돋보인다는 거였다. 지도교수는 자신의 퇴임식을 곁들인 학위 논문 시상식에 나를 학생 대표로 추천했다. 졸업식 후에 나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유엔난민기구에서 연구 결과와 사례를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가끔 시리아에서는 내전 소식이 들려왔다. 시리아 난민들이 리비아 해안에서 빠져 죽었다는 토막 뉴스, 이라크, 요르단, 리비아, 그리스, 스페인에 계속해서 난민 캠프가 세워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술의 얼굴을 찾아 꼼꼼하게 뉴스나 신문 지면을 살피곤 했다. 아술은 어디에든 있었다. 폭격을 맞은 마을에서 울고 있는 아이, 시리아에서 도망치다 부상당한 아이, 난민 캠프 뒤에서 한가로이 축구공을 차며 노는 아이…… 봉사단원들의 구김살 없는 웃음과 일상적인 몸짓에도 그의 모습은 겹쳐보였다. 하지만 모든 연상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아술의 뼈아픈 한 마디로 매듭지어지곤 했다.

  그 희망이 당신에게는 논문이었겠지만…….

  인천공항 여객 터미널의 도착층에는 국제회의 스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쪽으로 개발학회 국제포럼의 엠블럼이 붙은 부스도 보였다. 한국개발학회 20주년 기념인 이번 포럼의 규모를 면면에 과시하는 모양새였다. 스텝 중 하나가 피켓 쪽으로 다가오는 우리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후 지도교수와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곤 나를 향해 서서 기조연설자인 롤랑 교수에게는 준비된 차량이 있고 일반 발표자들에게는 광화문의 호텔까지 갈 수 있는 리무진 티켓을 증정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던 롤랑 교수가 그녀에게 우리는 일행이니 함께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스텝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아주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이윽고 롤랑 교수와 나를 준비된 차량으로 안내했다. 대기 중이던 검은 그랜저는 우리를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가 영종도를 통과해 서울 방면으로 달렸다. 교수는 60년대 말 자신이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을 내게 들려주며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만큼이나 인권신장을 강조했다. 앞으로 전문가로서 학계 활동을 하며 갖춰야 할 기본기에 대해서도 그는 따뜻하고 자상하게 조언했다. 그 사이 여의도와 마포대교를 지나 차는 어느새 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프런트 직원은 롤랑과 내 이름을 확인하고 방 키를 건네며 내일 포럼 후에 있을 만찬의 참석 여부를 물었다. 롤랑 교수는 내일 만찬이 가벼운 식사 자리일 테고 몇 개월 만에 들어 온 한국이니 친구를 만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만찬에 참석하겠다고 대답했다. 열다섯 개국이 참석하는 이번 포럼은 학계에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대해 항상 강조해온 사람은 사실 롤랑 교수가 아니었던가. 롤랑 교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방 안에 들어왔다.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고급호텔 비즈니스룸에는 왼쪽에 크고 푹신한 침대가, 침대 옆 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는 환영 다과와 한국 전통 기하문양을 자수로 넣은 명함집이 반듯하게 포장되어 놓여있었다. 나는 짐을 풀고 커다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방음이 잘 되는 듯 바깥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 소리만 호텔 방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낙엽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샤워실에 들어가 천천히 몸을 씻었고 밖으로 나와 비행기에서 못 잔 잠을 조금 더 청했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바깥이 어둑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아직 기내식이 소화되지 않은 듯 속이 더부룩했다. 우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일 행사를 치를 회의장과 소연회장은 2층에 모여 있었고, 1층에는 로비가 있었다. 명동으로 가는 후문은 지하 1층이었는데 그쪽으로 가려면 1층에서 내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가 싶었다. 나는 2층을 눌렀다. 소화도 시킬 겸 회의장을 둘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멀리 리허설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좇아 복도를 걸어갔다. 은은한 빛이 따뜻하게 감돌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회의장 곳곳을 훑었다. 단상에 선 사회자와 뒤쪽의 엔지니어가 프리젠테이션과 대사의 순서를 맞추는 중이었다. 의자와 책상이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그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녔다. 멍하니 서있다가는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나는 얼른 회의장을 한 번 더 살피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때 반대쪽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나를 보고 웃으며 걸어오는 이해정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나는 이해정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이해정은 여전히 밝고 생기 있었다.

  “네. 저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어요.”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밝게 웃었다.

  “정말 잘 되었네요. 정규직 TO가 거의 없었을 텐데 정말 대단해요.”

  이해정은 스텝 명찰을 차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포럼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주 반가웠다고 그녀는 말했다.

  “졸업 축하드려요.”

  “덕분이에요.”

  우리는 회의장에서 나와 복도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최근 내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공부에 관심이 있는지 그녀는 내게 학위 과정 전반과 학교 분위기에 대해서도 물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나의 학위 논문으로, 인터뷰가 있었던 작년으로, 논문 사례였던 아이들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나는 아술의 소식이 궁금해 아이들의 근황을 물었지만 이해정은 나의 질문을 한국에 남은 아이들 소식으로만 알아듣고 잘 지낼 거라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해정이 지나가던 스텝과 눈인사를 나누더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아술의 소식은 알아요. 선생님 알고 계세요?”

  나는 이해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시리아에 간 것까지는 알아요.”

  “선생님 모르시는구나. 그러셨을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 끝난 후로는 연락하기 힘드셨을 테니까.”

  몇 달 전 들었다는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해정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그런 상황들이 너무 많이 발생하니까요. 이해정이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해정은 가볍게 말했다. 아술은 그리스 난민 캠프의 봉사단원 숙소에서 총격으로 사망했어요. 그날 봉사단원이 여섯 명이나 사살 당했는데 희생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해요. 마치 잡담을 나누듯,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듯,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안타깝긴 하지만 내 일은 아니란 태도로 이해정은 말했다. 내 눈은 줄곧 소연회장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이 아찔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민기구의 홈페이지에 가시면 애도의 뜻으로 인터넷 조문소가 마련되어 있어요. 이해정은 그렇게 말했다. 아술은 마지막까지 숙소를 지킨 봉사 단원이었고 피격당한 그의 품에는 갓 태어난 예멘 출신의 남자아이가 아술의 손을 잡은 채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조용히 한마디만 뱉었다.

  “그렇군요.”

  우리는 몇 가지 형식적인 인사를 조금 더 나누다 헤어졌다. 나는 발표 준비를 마무리해야했고, 그녀는 리허설 준비를 마저 마쳐야했다. 나는 저녁 먹는 것을 잊고 그대로 방에 돌아와 예행연습을 두어 번 했다. 예행연습을 하다가 간간히 멈춰 숨을 골랐다. 나도 모르게 턱, 턱, 숨이 막혀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뜩해지곤 했다.


*

  다행히 발표는 순조롭게 끝났다. 준비된 말을 마치며 나는 청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명에 눈이 부셔 청중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청중석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앉아서 마지막까지 발표를 들으며 자리를 지켰다. 다른 발표자들의 발표를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연구 아이디어를 메모장 한쪽에 적고, 세션 후 이어지는 만찬에서 발표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골라냈다.

  폐회 후에는 이십 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달고 바삭한 디저트를 우선 먹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연회장 한가운데 사람들에 둘러싸인 롤랑 교수가 보였다. 나는 뷔페식으로 마련된 음식들을 향해 걸었다. 걸으며 한쪽에 진열된 음식을 훑었다. 한 입 거리로 만들어진 구운 관자, 작게 썰린 파니니, 딤섬, 판나코다, 과일 타르트, 마카롱. 깔끔하고 세련되게 담긴 형형색색의 음식이 눈길을 끌었다. 음식 진열의 끝에 디저트들이 모여 있었고 그 옆에는 직원 한 명이 작은 와인잔에 와인과 샴페인을 따르고 있었다.

  진열대 끝에 있던 크렘 브륄레를 막 개인 접시에 덜어내며 나는 다시 롤랑 교수가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멀리 롤랑 교수가 나를 발견하고 손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묵례했다. 그는 내게 손짓했다. 그쪽으로 건너오라는 뜻이었다. 롤랑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롤랑이 사람들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접시를 놓고 화이트 와인이 담긴 와인잔을 손에 쥔 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롤랑은 한쪽 손을 크게 젖히며 나를 반겼다. 롤랑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틈을 벌려 내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롤랑은 간단히 내 소개를 했고 나는 그들과 명함을 주고받았다.

  “오늘 발표하신 내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명함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싱가폴 재무청 소속이었다. 그가 발표했던 내용도 떠올리려고 노력해봤다. 방글라데시 의료사업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 베트남 무상 원조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난민 구호의 국제 공조라는 연구 주제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대표 사례자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잘 적응해가는 어린 친구가 대견해보이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친구가 한국에서 잘 생활해 나가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례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발표자가 말했다. 호주 원조국 국장이었다.

  “난민 문제는 최근 국제 사회가 주목한다는 차원에서 상당히 시의성 있는 주제죠. 그런 의미에서 연구하신 사례는 국제 협력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롤랑 교수님도 칭찬이 대단하시더군요. 연구 아이디어를 실제 상황에 적용해 개진하는데 거침이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참석한 열다섯 개 국가를 차례로 돌면서 사례를 발표하시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호주에 한 번 오세요.”

  나는 수줍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한국은 제외해야겠군요. 열네 개 국.”

  그의 농담을 들은 사람들이 웃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 후의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아술은 아직 한국에 있나요? 어떻게 지내나요?”

  나는 롤랑을 바라봤다. 롤랑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여유롭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싱가폴 재무청 과장, 호주 원조국 국장, 유럽의회 원조위원회 위원, 대만 국립대학 교수. 나는 그들의 직함을 떠올렸다. 목이 심하게 말라 나는 들고 있던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입술을 다신 후 천천히 말했다.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잠시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준 고마운 곳이라면서요.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년 봄 정도면 한국에 다시 들어올 겁니다.”

  대만 국립대학 정치경제학과 조교수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네요. 결말까지 완벽해요. 시종일관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나는 작게 ‘그렇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잘한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술은 죽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아술이 죽었노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 아술의 죽음을 알리고, 그가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까지 내가 만든 사례가 실패한 사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모든 것이 너무 멀리 흘러와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례는 벌써 사람들 안에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나 스스로 사례의 결말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현실에서 아술은 죽었지만 내가 만든 사례 안에서 그는 불멸의 지위를 얻었다고, 그렇게 내가 만든 사례가 굳혀져야 한다고 나는 내 자신에게 항변하고 읍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레스보스가, 라일라가, 아술이 점점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는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술을 몇 잔이나 거푸 마셨지만 허물어진 마음의 중심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나는 뛰듯이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가 찬 공기를 마주하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신물이 올라왔다.

  나는 호텔 벽에 손을 기대고 먹었던 것들을 모조리 게워 내기 시작했다. 먹은 것들을 다 토해내고 미끈한 위액만 쏟아지는데도 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구역질 때문인지 안쪽에서 강하게 통증이 일었다. 위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호텔 벽을 붙들고 주저앉았다. 옷과 스타킹이 내 눈물과 토사물로 젖어갔다. 두려웠다. 남겨진 사례로부터 나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앉아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윽고 눈물이 멈췄을 때 몸속 깊이 지독한 오한이 찾아들었다. 나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멀리서 무언가 나를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멀리 호텔 경사면 사이에 둥근 달이 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아술의 뒤로 차오르던 보름달이 되살아났고, 곧이어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예언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봐요. 상황은 시선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해요······.”

 아술은 그날 밤 달을 보며 희망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하던 희망이 지금 나에게는 참담한 절망의 사례가 되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사례 안에서, 이제는 아술이 아닌, 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사례가 되어 있었다. 벽을 손으로 짚었지만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주저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호텔 경사면 사이에 떠 있던 달이 사라졌다. 태양의 빛에서 반사되어 나온다는 빛마저 스러진 시간, 누군가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당선소감>


   글과 세상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겠습니다


  세 살 때 오른쪽 발목이 자전거 바퀴에 말려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평생 발을 쓰지 못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그 순간이 제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쓰는 삶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후 언제 어디서든 어느 형태로든 소설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 동안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소설을 짓는 동안 소설이 저를 짓는다는 사실, 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글을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

  부족한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정과 애정으로 채워나가겠습니다. 아버지, 엄마, 동생들, 투병 중인 고모, 친척들, 친구들 사랑합니다. 장정희 선생님, 고등학교 문예부를 기억하는 건 꿈을 잃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어요. 소행성B612 문우님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맙습니다. 박상우 선생님, 소설을 쓰는 기술보다 인간과 인생을 중시하시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우연히 발목의 상처가 없어진 걸 발견했습니다. 새살이 돋아 상처를 이겨내도록 몰랐다니 놀라웠습니다. 글 쓰며 살겠다 다짐한 순간의 기억이 무뎌지고 쓰는 순간이 오롯해질 때까지 조용히 글과 세상에 스며들어 가겠습니다. 고통과 근심이 따르겠지만 배우는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쓰겠습니다. 인간과 인생을 탐구하며, 늘 질문하며 작가로 행복한 삶을 살겠습니다.




  ● 1984년 광주 출생.
  ● 전남대 독어독문학과.
  ●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연구원.


 

  <심사평>


  찬찬한 화법으로 곡진한 문제제기 훌륭”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7편이었다. 4편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였고 3편이 ‘밑도 끝도 있는 이야기’였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라는 표현이 소설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서사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소설답지 않다는 평을 받을 수 없다. 소설을 포함해 예술은 생물처럼 변하는 개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질서 자체에 혐의를 두기 때문이다. 질서 사회에서는 질서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억압일 수 있다. 그래서 질서의 세 축인 시간, 공간, 인간을 왜곡하고 이탈한다. 이는 얼핏 혼돈처럼 보이지만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질서를 지킨 작품과 거부한 작품별로 그것을 이루어 낸 솜씨에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연자 씨’는 세계와 현상을 독특한 감성으로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낱낱하고 집요해서 읽는 내내 무서울 정도였다. 다 읽고 났을 때 그려지는 인상이 문장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에 버금간다면 분명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실러캔스 또는 속도에 관한 농담’에서는 통 큰 패기가 느껴졌다. 3억5000만 년이라는 시간과 더불어 아무리 먼 장소와 관계의 거리까지도 한 번에 건너뛰려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성공적인 사태와 문장으로 조직되었더라면 정말 통쾌한 소설이 될 뻔했다.

  ‘내가 만든 사례에 대하여’는 잘 읽히고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거니챌 수 있을 만큼 짜임새가 눈에 익었다. 찬찬한 화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양심 선언하듯 난민의 현실과 그 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 난민의 사례를 연구하는 학자의 소회를 밝힌다. 세계인이 함께 생각하고 고민할 문제를 곡진한 방식을 빌려 제기하는 소설이, 오랜만인 듯 반가웠던 것은 물론 작가의 훌륭한 이야기 솜씨 덕분이었다. 


 

심사위원 : 구효서,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