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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숲에서 깨다 / 하채연

 

등을 받치고 잠들었던 나무기둥에서

새벽이슬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방에 울울창창하게 뻗은 녹음들

현시를 잊은 채 창공에 닿아 빛나고

꿈결처럼 말을 거는 선선한 바람에

나는 나무들이 지어놓은 미몽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새소리로 엮어놓은 문패를 열고 들어가자

억겁의 땅으로부터 솟은 나이테의 내력이

기둥을 키우며 나의 발목에 작고 푸른 원주를 새기고

육신과 나무, 나무와 육신 사이를 비집고 난 샛길 사이로

와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울렁이는 향수가 지천에 빛난다

목피들이 전생을 벗겨내는 소리가 알싸한 그 길목에선

곤줄박이 한 마리가 잎새 한 장을 전해준다

해독할 수 없는 이끼들의 필체로 쓰인 문장들

지워지지 않을 나의 태곳적 이름을 발설하고 있다

무한한 혈맥으로 엮인 나무 그늘 속

편안히 누워 흙이 된 이름들을 짚어본다

끝없이 이어져 불거진 이 뿌리들은 나를 이어주는 끈이었을까

억겁의 계절을 지나도 숨 쉬는 숲은

태양과 달을 이고 은빛 땀을 대지로 흘려보내고

나는 한 장의 연서를 쥐고 숲에서 깬다

뒤돌아보면 푸른 절경이 등허리에 축축하다




  <당선소감>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 타고 가는 기분"


  돌아가신 할머니가 잘 영근 알밤 무리를 쌓아올리고 있는 꿈을 꾼 날, 고향에 가는 길에 당선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으로부터 이어진 긴 강, 시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고 긴 언어의 숲에서 제 나무 하나 찾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누군가 놓고간 전언을 받아든 기분이었습니다.

  무 소중해 조심히 받아들고 한참을 곱씹었습니다. 시 한 편이 너무 무거워 쩔쩔매던 밤들, 설익은 마음 탓에 쓰기를 주저했던 순간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쭈뼛쭈뼛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우리들일지라도 질기고 질긴 젖줄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도 잊지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가끔 세상이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볼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반짝하는 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착각이나 일렁임 같은 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그려 시 한 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 나라고, 너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개, 고양이, 동물, 숲, 나무, 풀잎 늘 사랑합니다.

  늘 친구처럼 손잡고 시 이야기하는 엄마, 가족들 항상 고맙고 감사해요. 제겐 고마운 스승들이 많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아흔 아홉개의 빛으로 빛나는 선생님, 동국대학교 선생님들, 박형준 선생님 부끄럽고 부족한 제 시 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곳에서 응원해주시는 지인들께도 두손 모아 감사를 전합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어도 시쓰는 우리라서 너무 행복해.

  동국대학교 시분과 영원하길!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직도, 혹은 영원히 모를 시에게. 뜨고 다시 떠도 뜰 눈이 너무 많네요. 용기를 갖고 더 정진하겠습니다.



  ● 현재 동국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심사평>


  "사물 바라보는 시선 깊고 메시지 견고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은 작가가 보여준 농익은 작품에 놀랍고 신선함을 느꼈다."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당선작을 '숲에서 깨다'로 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전하는 메시지가 견고하다고 호평하며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올해 시 부문 응모작 총 1천423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30편의 시 중 6편을 다시 추려 평가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최종 심사에는 '곱슬의 방향', '가위 ', '호출신호, 창백하고 푸른 플라스틱', '걸리버여행기' , '구석의 깊이-비의 팔랭프세스트' 등 다양한 작품이 올라왔다.

  올해 출품된 작품들은 주제에 있어 차별성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등 애도가 짙고 다소 어두운 주제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비롯해 실업, 경기침체 등 사회·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또 20~30대 젊은 응모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아쉬운 점도 지적됐다. 젊은 문학도들의 출품작들이 최근 유행하는 시의 경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심사위원들은 주로 생경하고 낯선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시를 비학적으로 전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줘 시 읽기가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하채연 당선자의 '숲에서 깨다'는 시의 짜임새를 갖추면서도 시인만의 깊은 세계관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선사했다.

  새벽의 숲을 열어 재치는 해맑은 생각들이 긍정적으로 명랑하게 펼쳐있고, 숲에 존재하는 한 작은 개인이 우주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며 이미지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당선작을 포함해 응모된 작품 상당수가 어느 하나 크게 뒤처지는 것 없이 모두 고르게 작품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