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빈집 / 강이나
<당선작>
빈집 / 강이나
그녀가 공 씨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은 남편의 실직 때문이었다. 남편은 얼마 전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원하던 직급에 막 닿았을 때 회사의 강권에 의한 퇴직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상실감은 더 컸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회사를 그만둔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남편이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한 곳에 적을 두고 앞만 보고 달린 20년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치킨집이나 하자, 라고 덜컥 나서는 것보다는 퇴직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차분하게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남편은 직장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고처리업무부서에서 일했던 그는 종종 그날 처리한 사고나 특별하다 싶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조한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회사에 얼마만큼의 이익을 안겨줬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회사가 지급해야 될 돈이 이것보다 몇 배는 되었을 거야.”
그녀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보험 계약자는 피해를 본 거잖아.”
“당신이 손해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사실 남편의 월급 덕분에 누구보다 큰 혜택을 본 것은 그녀였다. 가계부를 쓸 필요도 없었고 하나를 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필요도 없는 삶이었다. 아들 역시 이른 나이에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자리를 잡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풍족함의 크기에 비례한 결핍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제 차라리 ‘치킨집이라도 할까?’하고 말해주기를 바랄 정도로 시간이 지났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을 알아보는 것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종일 같이 있어도 나누는 대화라고는 한두 마디나 될까. 남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책만 들여다보았다. 자잘한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책자, 크기보다 두께가 더 두꺼운 보험약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녀는 남편이 읽고 있는 것을 뒤에서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귀의 장해’ 부분을 읽고 있었다. 청력을 잃었을 때, 심한 장해와 약간의 장해를 입었을 때, 귓바퀴의 절반 이상이 결손되었을 때, 귓바퀴가 결손되었으나 기능에는 문제가 없고 추상장해로 평가될 때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사람의 작은 일부분인 귀를 이토록 자잘하게 자르고 쪼개서 분류할 수도 있구나. 그녀는 자신의 귓불을 한번 만져본 뒤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회사를 그만 둔 남편에게 보험약관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다시 돌아갈 생각이야?”
그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잔인한 말처럼 느껴져서 에둘러 물었다.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남편이 입을 꾹 다물수록 그녀는 점점 더 힘이 들었다. 남편의 침묵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그의 침묵은 조용하지 않았다. 말 못 하는 아기가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욕구를 표현하는 것처럼 남편은 뭔가를 요구하며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전에 끝낸 육아를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버거웠다.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아이같이 굴지 말고 무슨 말이든 좀 해 보라는 의미로, 더 이상 당신하고는 상관도 없는 그런 책자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의미로 소리쳤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침묵을 피해 집을 나섰다. 하지만 막상 거리로 나서자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동네를 걸어 다녔고 마트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민자치센터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게시판에 붙은 ‘사랑의 도시락 배달’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공고를 보자마자 주민자치센터 안으로 들어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자원봉사는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자원봉사자가 하는 일은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도시락에 담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자원봉사자의 몫이었다. 격일마다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만 나와서 돕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매일매일 음식을 만들고 도시락을 쌌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들고 배달을 나갔다.
비석마을로 가는 오르막과 공 씨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 공 씨의 방 그리고 항상 조용하게 앉아 벽을 보는 공 씨, 이 모든 것이 좋았다. 공 씨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공 씨가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그가 다 읽은 책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종종 남편에게 공 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꼭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단 말이야. 이상하지?”
씹어 먹는 기능과 말하는 기능 모두에 심한 장해를 남긴 때에는 보험금 지급률 100%, 씹어 먹는 기능 또는 말하는 기능에 심한 장해를 남긴 때에는 보험금 지급률 80%, 말하는 기능에 심한 장해를 남긴 때라 함은 구순음, 치설음, 구개음, 후두음 중 3개 이상의 발음을 할 수 없게 된 경우를 말한다. 그는 보험약관에서 ‘입의 장해’에 대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가 해결한 많은 사고처리 중에서 씹는 기능과 말하는 기능 모두에 심한 장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사고 형태에조차 이렇게 철저하고 정확한 사고처리 방책이 나와 있다는 게 좋았다. 보험약관만 있으면 어떤 사고를 당해도 안전할 것 같았다. 그는 가끔 보험약관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누군가 봤다면 보험약관이 아니라 성서라고 생각했을 포즈로. 아내가 아침식사를 차리고 그를 불렀다. 그는 여전히 보험약관에 손을 올려놓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자주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여보, 밥. 식사하라고!”
아내가 다시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중요한 일을 방해받은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어제 먹던 게 남아서 데웠어. 버릴 순 없잖아.”
그는 찌개 냄비에 젓가락을 넣어 푹 익은 채소를 건져내 입안에 넣었다. 질긴 채소는 한참을 씹어야 했다. 그는 오래오래 저작을 한 다음 꿀꺽 소리를 내면서 삼켰다. 퇴직을 한 뒤로 그는 많이 먹지 않았다. 신체활동이 적어서인지 입맛도 없었고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소화가 안 돼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는 아픈 것보다는 고픈 쪽을 택하는 성격이었다.
“다 먹은 거야?”
그가 밥을 반도 먹지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아내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내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그는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자꾸 밥을 남겨?”
“소화가 안 돼.”
“안 움직이니까 그렇지. 운동이라도 해.”
그는 아내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밥을 마저 먹었다.
“당신을 키우고 싶진 않아. 당신은 내 자식이 아니잖아.”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던 아내가 말했다. 그는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어 아내를 향해 “뭐라고 했어?”하고 물었다. 아내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귀에 쟁쟁 울렸다. 밥을 남겼다고 투정을 부리다니, 그는 아내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그는 귀를 막듯이 손바닥으로 한쪽 턱을 받치고 다시 보험약관을 읽었다.
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무중력 환경에서의 장시간 체류, 식량결핍, 수분결핍, 상세불명의 결핍. 그는 읽기를 멈추고 상세불명의 결핍에 대해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그 말이 자신과 관련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직을 한 몸이었다. 그날 그러니까 퇴직을 하던 날, 빌딩을 걸어 나올 때 그는 벗은 몸으로 쫓겨난 기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는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말을 반복했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을 손으로 짓뭉갰다. 부하직원들이 그에게 안겨준 꽃다발 속 생화들은 시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급속하게 시들고 있었다. 시들어 죽는 것이나 내 손에 죽는 것이나! 그는 이미 죽은 꽃들을 다시 죽이면서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한 송이 한 송이를 꽉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요즘도 그는 종종 그 말을 되뇌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는 지금 자신이 상세불명의 결핍 상태라고 생각했다. 보험금도 지급받지 못하는 상태.
아내가 외출 준비를 하고 방에서 나왔다. 아내는 도시락 배달 자원봉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도시락을 배달 받는 사람 중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신 방에 책이 많아. 제목만 봐서는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라고, 자신이 읽어본 책은 한 권도 없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도 읽어본 적 없는 책들일 거야. 그는 아내의 말에서 어떤 의도를 느꼈다. 책이라고는 보험약관밖에 안 읽는 당신하고는 다른 사람이야, 라는 말을 뼈처럼 숨겨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딴 말 따위에는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먹는 기능은 되고 말하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면 지급률 80퍼센트군!”
말을 하지 않는 그 사람이 마치 보험이라도 들어놓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는 고의적인 것이라면 보험금 미지급 사유에 해당하겠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아내는 그런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내의 외출 시간이 평소보다 일렀다.
“오늘은 김치를 담가야 하거든.”
아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을 했다.
“김장김치 질릴 때가 됐잖아.”
아내는 도시락 반찬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문득 그는 조금 전에 먹었던 찌개, 어제 먹던 것이 남아서 데워서 내놓았다는, 버리기 아까워 버리듯이 내놓았던 찌개가 떠올랐다. 그는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내를 쏘아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그의 눈길을 느낀 아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버렸다. 찌개에 대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가 신발을 신는 소리에 그는 슬쩍 얼굴을 들어 아내를 훑어보았다.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기에는 걸리적거리겠다 싶은 옷차림이었다. 종아리 중간 부분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폭이 넓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커트를 입고 배달 봉사를 하다니. 목에 두른 스카프도 너무 치렁치렁해서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갈 때나 어울릴만해 보였다. 그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썼다.
“나, 가!”
아내가 나가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자동잠금장치 소리가 들렸다. 나간 건 아내인데 오히려 그가 밖으로 쫓겨난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봉사를 하러 나가는 것뿐인데 그는 그것 때문에 속이 들끓었고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도시락을 배달해 주는 대상은 ‘비석마을’에 사는 독거노인들이었다. 공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비석마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번연히 도시에 존재하면서도 도시의 동네다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동네였다. 한때 공동묘지였던 마을에 사람이 하나 둘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집과 무덤이 공존하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은 마을이었다. 무덤을 깎아 집을 지은 뒤에도 무덤 옆에 있던 비석들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대문 옆에 비석이 서 있는 집이 많았다. 그녀는 대문 옆에 서 있는 비석을 한참 동안 보고 서 있었다. 주인의 이름이 적힌 문패가 아닌 죽은 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골목에 늘어선 비슷한 집들 중에서 공 씨의 집을 찾느라 헤매기도 했지만 비석 앞에서 또 한동안 머뭇거리느라 막상 공 씨 앞에 도시락을 펼쳐놓았을 땐 밥도 국도 다 식어버린 뒤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배고프시죠? 그녀는 급히 도시락을 펼쳤다.
그때 공 씨가 아픕니다, 라고 말했다. 난데없는 말에 그녀는 도시락을 펼치다 말고 불안한 눈빛으로 공 씨를 살폈다. 아프다고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늦게 온 자신 때문에 끼니때를 놓친 공 씨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공 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멍한 눈으로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공 씨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제야 고픕니다, 라는 말을 아픕니다, 로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시락을 펼쳐 공 씨 앞에 내 놓았다. 강낭콩이 들어간 흰밥, 감자와 고기를 넣은 맑은 국, 달걀 물을 입힌 흰 살 생선전 몇 점, 버섯을 넣은 채소볶음 그리고 무와 배추김치. 공 씨는 한동안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긴장된 마음으로 공 씨를 바라보았다. 아픕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공 씨가 숟가락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공 씨를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 공 씨는 아픕니다, 라고 말했다. 공 씨는 숟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떠먹기 시작했다.
살집이라고는 없는 마르고 검은 손, 공 씨의 손은 마치 기름칠을 해 놓은 가죽 같았다. 숟가락을 쥐자 가죽 밖으로 툭툭 핏줄이 불거졌다. 공 씨는 손에 힘을 꽉 주고 숟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반찬들을 제대로 뜨지 못해 흘리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도 공 씨의 숟가락질은 집요했다. 긴 시간을 들여 밥과 반찬을 떠서 입 안에 넣는 작업이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공 씨 앞에 떨어지는 음식도 늘어났다. 공 씨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다른 음식을 입 안에 넣었다. 살집 없이 쑥 들어가 있던 볼이 불룩해지는 것을 보며 그녀가 젓가락으로 생선전을 집어 공 씨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공 씨는 그녀가 올려주는 반찬을 잘 받아먹었다. 생선전이 이토록 맛난 음식이었나. 그녀는 공 씨의 모습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밥과 국, 생선전과 채소볶음 그리고 무김치와 배추김치 모두 그녀를 포함한 자원봉사자들이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한 음식들이었다. 이 음식들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녀는 한 번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간조차 보지 않았다. 그런데 입이 미어지게 먹고 있는 공 씨를 보자 갑자기 이 평범한 음식이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한 음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공 씨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면서 슬쩍 집어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공 씨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지? 그녀는 음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주민자치센터에서 보여준 서류에서 공 씨의 인적 사항을 확인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공 씨는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늙어보였다. 백 살이 넘었다고 해도, 이백 살이 넘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늙어보였다. 성한 이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밥과 반찬을 입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리다가 삼켜버리는 것도 다 성치 않은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저렇게 씹지도 않고 삼키면 속이 편할 리 없을 텐데. 그 순간, 어쩌면 고픈 것과 아픈 것은 동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공 씨의 집에만 배달을 간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몇 군데를 정해두고, 한 집에 도시락을 전한 뒤 곧장 다른 집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동무도 해 드리고 집안일도 해 드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외롭게 지내는 분이잖아요. 그녀는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 씨만 외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그가 더 외로움을 탄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배달하는 집을 줄여 공 씨 집에서 더 오래 머물렀고 나중에는 공 씨 집에만 배달을 갔다. 그녀는 공 씨의 식사를 돕고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커피를 타 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공 씨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혹은 그녀가 호감을 표시하는 걸로 착각할까봐 눈치를 살폈지만 이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 씨는 그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방안에 있는 책들을 뒤적이며 공 씨에게 말했다.
“책에서 읽은 것들을 말해 주세요. 이렇게 책을 많이 읽었다면 말해 줄 게 많겠죠?”
공 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질문했다. 전에는 어떤 말들을 했나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요?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왜 혼자 사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내가 누군지 아는지, 내가 왜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대답이 적힌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공 씨 곁에 앉아 벽을 바라보았다.
한줄기 햇살이 벽에 긴 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온 주황색 햇살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빛줄기를 바라보다가 빛의 선 위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의 손등에 한 줄기 밝은 부분이 생겨났다. 그녀는 손등을 보고 있다가 불현듯 뭔가를 낚아채듯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물속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을 때처럼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손을 폈다가 움켜쥐고 또 손을 폈다 움켜쥐면서 빛을 잡아채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곧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공 씨였나? 그건 침묵, 그것 때문이었다. 공 씨가 하는 말은 아픕니다, 라는 말 뿐이었다.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남편과 같았지만 공 씨의 침묵은 남편의 그것과는 달랐다. 말도 하는 사람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듯이 침묵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 씨의 침묵은 고요했다. 남편의 꾹 다문 입은 많은 말을 한꺼번에 다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것처럼 보였다면 공 씨의 말없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공 씨의 말없음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하루를 쭉 늘어놓고 보면 그녀가 공 씨를 전적으로 케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공 씨에게 기대고 있었다.
공 씨는 종일 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벽에는 사각형이 겹쳐진 채 이어진 무늬가 새겨진 벽지뿐이었다. 저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뭔가가 숨어 있는 것일까? 공 씨는 종일 저 사각형을 보면서 무엇을 찾는 것일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지를 응시했다. 한참 동안 노려보자 눈이 시큰하게 아파왔고 눈물이 고였다. 젖은 눈으로 공 씨를 보았다. 공 씨의 눈동자가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어쩌면 공 씨는 벽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벽을 읽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음으로 대화를 하듯이 글자 없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그녀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앉았다. 공 씨의 독서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앉아 진심을 다해 말했다.
“다 읽고 나면 무슨 내용인지 얘기해 주세요.”
그녀는 공 씨가 읽은 것들을 알고 싶었다. 남편이 읽고 있는 보험약관에는 나오지 않는, 삶을 사고事故가 아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진짜’ 방법들이 공 씨의 책에는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그의 독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내가 집을 나서자마자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입은 옷에 외투만 걸쳐도 되었지만 그는 양복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맸다. 그 위에 출근할 때 입던 외투를 걸치고 아내를 뒤쫓아 나갔다. 아내가 주민자치센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그는 주민자치센터 맞은편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었다. 아침부터 문을 연 곳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떡볶이나 튀김 등을 파는 분식집이 다였고 그마저도 앉아서 먹을 만한 테이블은 달랑 하나밖에 없었다.
“서서 먹으면 돼요. 아무거나 골라서 먹고 개수만큼 계산하면 됩니다.”
앞치마를 두른 주인여자가 테이블에 앉는 그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앉아서 먹으면 안 됩니까?”
그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손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저러니 이런 작은 구멍가게나 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전문가를 불러 친절특강을 실시했다. 교육이 끝나면 모두가 일어나서 구호를 외쳤다. “옳은 말이라도 친절하게 하지 않으면 틀린 말만 못하다. 작지만 강력한 힘! 친절의 힘!” 그는 주인여자에게 친절교육에서 배웠던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여기에 골라 담으면 됩니다.”
주인여자가 비닐 팩을 씌운 플라스틱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접시에 튀김이든 떡볶이든 먹을 만큼 담아서 먹은 뒤 계산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먹을 것도 직접 담고 먹은 양도 직접 다 외워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주인여자는 음식만 만들면 되는 주인 위주의 시스템. 그는 이 가게의 무례한 운영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주인여자의 말투도 거슬렸다. 그는 모든 것에 조금씩 화가 났다.
떡볶이와 튀김을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고추장 양념이 묻은 튀김과 기름기가 묻은 떡볶이를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주인여자가 떡볶이를 뒤적이면서 그를 훑어보았다. 그는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바빠서 이제야 겨우 분식으로 아침을 해결하는 직장인으로 보이겠지. 그는 튀김을 베어 먹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주민자치센터 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나왔다. 아내의 손에 도시락으로 보이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놓쳐서도 안 되지만 눈치를 챌 만큼 바짝 붙어서도 안 된다.
그는 언제쯤 분식집을 나서는 것이 좋을지 세심하게 고려했다. 아내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 서넛이 주민자치센터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아내는 큰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는 아내가 방향을 꺾는 것까지 지켜본 뒤 분식집을 나섰다. 아내가 비석마을로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비석마을이라면 그도 아는 곳이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고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내는 천천히 걸었다. 초등학교 건물을 지나 4, 5층짜리 빌라들이 쭉 늘어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르막의 경사가 심해서 올라가는 차들이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아내가 미용실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주먹으로 가볍게 무릎을 몇 번 치고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미용실 유리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잠깐 머리를 매만진 아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이 끝났다 싶었을 때 아내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급히 아내가 사라진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오르막의 끝에서 기역 자로 길이 꺾였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골목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골목 초입에 섰을 때 아내가 바로 지척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숨겼다.
그는 바짝 긴장하고 다시 아내의 뒤를 밟았다. 골목을 걸어가던 아내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아내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살금살금 아내가 들어간 집 앞으로 다가갔다. 비석이었다. 아내는 문 옆에 세워진 비석을 보고 서 있었나 보았다. 이 마을이 비석마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집 앞에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보니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문패 앞에서는 안 그런데 왜 비석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게 될까?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돼서 그래. 그는 그때 아내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런 한창 나이에 주변으로 밀려나다니, 그는 허공에 대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가 그의 말에 반박해 줬으면 했다. 당신 아직 젊어, 뭐든지 시작할 수 있는 나이야. 이 정도의 말이라면 힘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가? 그렇지! 우리 참 오래 살았지?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의 아내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그는 문에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골목 끝에 몸을 숨기고 아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내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도시락을 먹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그는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어 쪼그려 앉았다. 다리에 쥐가 났다. 그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아내가 들어간 집을 지켜보았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주먹으로 문을 쾅쾅 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다시 숨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쥐가 난 다리를 주물렀다. 한참이 지난 뒤 아내가 나올 때까지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의 얼굴은 더운 열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내가 그 집에서 나온 시간은 평소에 아내가 귀가하던 시간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까지 이 한 집에만 도시락 배달을 한 것인가. 저 안에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아내의 말대로라면 말을 하지 않는 독거노인이 있을 텐데. 도대체 아내는 저 안에서 뭘 했단 말인가. 아내는 들어갔을 때처럼 문을 열고 나왔을 때도 문 옆에 서 있는 비석을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서 있었다. 마치 가까운 사람이 죽어서 묻힌 무덤에 다니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는 골목길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빈 도시락 통이 아내의 다리를 퉁퉁 쳤다. 아내를 따라가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안에 누가 있는 거야? 그는 돌아서서 아내가 나왔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공 씨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도시락에 들어갈 음식 조리만 할 뿐 더는 배달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도시락을 들고 빈방에 갔다. 그리고 그 방에 앉아 공 씨를 생각했다. 공 씨를 위해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고 공 씨가 했던 것처럼 벽의 무늬를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공 씨를 떠올리면 지상에 젊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백 살도 더 된, 이백 살도 넘은 듯한 공 씨에게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기대고 있던 하나의 세계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공 씨가 살았던 집은 곧 철거될 거라고 했다. 마을 전체가 재개발되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말을 주민자치센터에서 들어 알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공 씨의 집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빈방에 앉아 점심을 먹고 공 씨의 책들을 정리해 박스에 담았다. 이것이 마지막 상자였다. 공 씨가 죽은 뒤 집주인은 사람을 불러 공 씨의 물건을 일괄 처리해버리려고 했다. 그녀는 집주인에게 책만큼은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집주인은 빠른 시간 안에 치운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다른 물건들이 다 빠져나간 방에는 책만 남았다.
그녀는 날마다 빈방에 들러 책을 정리했다. 한 권 한 권 펼쳐볼 때마다 공 씨가 읽지 않은 책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그시 눌린 흔적과 접힌 자국, 곳곳에 묻은 손때, 그리고 밑줄과 메모들. 그녀는 깨끗한 책들을 박스에 담아 구립도서관과 마을 도서관에 보냈다. 그리고 낡았지만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문밖에 내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가서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남은 책들, 그녀는 마지막 책들을 작은 박스에 담고 겉면에 그녀의 집 주소를 적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책정리가 다 끝난 뒤 그녀는 빈방을 나섰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면 이 빈방과 이 마을은 사라지고 없으리라…. 그녀는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빈 도시락 통이 다리를 퉁퉁 칠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내가 골목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 그 집 앞에 닿았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아내를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망설인 뒤였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거침없이 발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곧 멈칫했다. 문은 대문이자 현관문이었고 동시에 방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을 벗을 수 있는 작은 공간 위로 바로 방이 이어지는 구조였다. 그는 뜻밖의 구조에 당황하며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남의 집 대문을 들어서는 것과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여 방안을 살폈다. 빈방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사람이야. 책이 정말 많아.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다니 대단하지 않아? 하고 아내가 말했는데 책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마음속을 표류하고 있던 타인의 집이라는, 남의 방이라는 생각은 점점 희미해졌고 대신 아내가 머물렀던 집이 여기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방 한쪽에 눈에 익은 스카프가 보였다. 아내의 것이었다. 아내가 여기에 머물렀던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도대체 여기서 종일 뭘 한 것일까?’ 그는 아내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는 아무도 없는 빈방이라는 사실에, 어떤 남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남자’와 ‘아내’와의 관계. 누군가 있을 줄 알았던 방이 빈방이었음을 확인한 순간, 그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안도감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는 보험약관을 옆에 내려놓았다. 목을 압박하는 넥타이도 풀어서 보험약관 위에 올려두었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꽉 붙잡고 있던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것 같은 허전함도 밀려들었다. 처음 보험회사에 들어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한동안 낯선 사람들 앞에 보험 팸플릿을 꺼내놓지 못했다. 앞에 앉은 사람은 뻔히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데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그게 아니라는 듯 딴청을 피웠다.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당신에게 좋은 것을 알려드리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짐해도 끝내 팸플릿을 펼치지 못한 채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지구 밖으로 밀려날까봐 무서웠다. 그는 퇴직을 한 뒤 아내에게 보험영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입을 다물어버린 나날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어둠이 내려 방안이 캄캄해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섰다. 신발을 신으려던 그때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올 땐 미처 보지 못한 것이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 쪽으로 상자를 옮기자 그 위에 커다랗게 적힌 글자가 보였다. 아내의 글씨체로 적힌 글자는 자신의 집 주소였다. 허리를 굽혀 박스를 열었다. 책이었다. 닳고 닳아 글자조차 보이지 않는 책, 너덜너덜하게 표지가 찢어진 책, 음식국물이 흘러 지저분하게 변색된 책. 그런 책들이 대여섯 권 남짓 들어있었다. 왜 이런 책을…, 왜 우리 집 주소를 여기에…. 그 순간 그의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무엇을 봉하고 싶었는지, 아무도 배달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왜 집 주소를 적어놓은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읽지 않을 책,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내용,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택배. 그 상자가 꼭 그와 아내의 모습 같았다.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예정된 결말이라고 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늙고 낡을 수밖에 없는 이치, 마침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빈집에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결말. 하지만 낡은 표지를 펼칠 때, 이미 다 읽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책장을 다시 넘길 때, 어쩌면 그 순간 예정된 결말이 아니라 ‘새롭지 않은 시작’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지점에 밑줄이 그어진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때는 알지 못했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동안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방에 놓아둔 보험약관과 넥타이를 가져와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 놓은 뒤 빈집을 나섰다.
<당선소감>
"천 번만 골똘히 생각하면 막혔던 것이 저절로 풀립니다."
어느 작가의 강연회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글을 쓸 때 막히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작가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강연은 까맣게 잊히고 그 하나의 문장이 머리에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소설이 막힐 때마다 그 문장을 되뇌었고, 이제 그만 고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그 문장을 되뇌었습니다.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길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많이 생각하는 건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취의 순간은 너무나 멀고 험난해서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올까 싶은 마음에 좌절하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이지만 그래도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 건 분명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천 번, 그 이상 골똘히 생각하면서 쓰겠습니다.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많은 얼굴이 떠오릅니다. 누구보다 크게 기뻐해 주신 부모님, 두 분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마음 써 준 가족들과 여러 가지로 도움 준 문우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소설의 길을 안내해 준 박상우 선생님, 새롭게 소설 쓰기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박영숙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소식을 듣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본명 강희숙
● 1972년 경남 고성 출생
● 동아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
● 프리랜서 라디오 방송 작가
<심사평>
"인물·공간 절묘한 대비로 삶의 의미 질문 던져"
예심을 통해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여덟 편이었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의 윤독을 거쳐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타인의 반경’ ‘첫 번째 눈과 사라진 발자국’ ‘웃어라 고래’ ‘빈집’ 등 4편이었다.
‘타인의 반경’은 설정은 좋으나 문장과 대화가 거칠다는 점이, ‘첫 번째 눈과 사라진 발자국’은 밀도 있는 치밀함과 흡인력에도 불구하고 작위성과 왜곡된 인물들의 기원까지 깊이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웃어라 고래’는 고래의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재희를 중심에 놓고 재희뿐만 아니라 재희와 같은 장애를 지닌 재희의 엄마까지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는 큰 덩치의 소유자, 재희 이모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문제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진구가 등장하는 후반부로 갈수록 갑자기 이야기가 풀린다는 점이었다. 결국 본심 심사위원들은 이견 없이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빈집’은 삶이 무엇인가를 인물과 공간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보험회사에서 퇴직한 남편과 말 없이 보여주는 공 씨의 삶의 태도, 그런 공 씨가 사는 비석마을로 알려진 아미동이라는 부산의 공간적 특수성을 활용해 주제 의식을 부각했다는 점도 후한 점수를 얻는 데 한몫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시길 빈다.
심사위원 : 김탁환, 이상섭, 이미욱, 강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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