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빨간 열매 / 이유리
<당선작>
빨간 열매 / 이유리
아버지는 자기를 화장하고 나면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워낙 자주 하는 사람이었어서 나는 무심코 그럴게요 하고 대답했었고 잠깐 이거 이상해,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의 유골함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버스 안에는 화장터 앞 정류장에서 함께 탔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울었거나 울고 있거나 울 것처럼 보였고 그들에 비하면 나는 도시락 가방을 안고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이대로 나들이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게 날씨가 아주 좋았고 바람도 선선한 데다 집에서 가까운 공원과 그 앞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떠올리자 배까지 고픈 것 같았다. 나는 원래 내리려고 했던 정거장에서 한 정거장 더 가서 공원 앞에 내리기로 마음먹고 노선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때 뒷자리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해 내 기분은 다시 망쳐졌고 나는 공원에 가지 않았다.
유골함을 찾아낸 건 그 뒤로 계절이 두 번은 더 바뀌고 나서의 일이었는데 나는 찬장 깊숙한 곳에 있던 그것을 미숫가루라고 생각하고 한 스푼 듬뿍 떠서 흠흠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그 찬장은 원래 저장식품을 넣어 두는 용도로 쓰이는 그런 평범한 찬장이었는데 대체 그게 왜 거기 들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먹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고 뚜껑을 대강 닫아 싱크대 위에 놔두었다. 그런데 이게 또 그다지 좋은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 가스레인지 후드 아래에 서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 유골함이 눈에 몹시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느 한가한 아침에 나는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옥으로 된 것인 줄 알았던 유골함이 실은 옥처럼 보이도록 가공된 플라스틱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허무맹랑한 부탁이 기억나서 뭐 들어줘 볼까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하고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생전에도 그런 황당한 소리를 자주 하는 사람이었는데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더욱 심해져서 가끔은 그냥 나를 괴롭히려고 저러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갑자기 방게볶음이 먹고 싶다고 서해안엘 보내질 않나 <아침마당>에 왜 이금희가 안 나오느냐며 KBS에 가서 물어보고 오라고 시키기도 했고 텔레비전에서 옛 일본식 건물을 그대로 따라 만든 술집을 보고는 밤에 몰래 가서 불을 지르고 오라고 한 적도 있다. 거기다 대고 내가 잡혀가면 누가 아버지를 돌봐,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가는 주제에, 하고 볼멘소리로 대꾸하니 아버지는 휙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돌아누워선 반나절이 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그런데 말이야, 파프리카 말이야, 빨간 파프리카랑 노란 파프리카의 차이가 뭐냐, 하고 내게 물었고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비눗물 묻은 손으로 휴대폰 검색을 해서 알려 주었다, 빨간색은 골다공증에 좋고 노란색은 고혈압에 좋다는 것을.
물론 나도 매일 좋은 얼굴만을 할 수는 없어서 가끔은 짜증을 내는 적도 있었는데 한번은 금붕어를 열 마리만 사오라며 이불 밑에서 꼬깃꼬깃 접은 이만 원을 꺼내 쥐여 주기에 군소리를 하기도 싫어 잠자코 이천 원짜리 금붕어를 열 마리 사다 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걸 들고선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고는 한참 나오지 않기에 무얼 하나 슬쩍 들어가 보았더니 욕조에 물을 받아 금붕어를 풀어선 한 마리씩 손바닥 위에 건져 놓고 주무르고 쓰다듬으며 들여다보고 있는 거였다. 아버지 미쳤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버지가 맨숭맨숭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물고기들은 사람 손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는 게 정말인지 궁금해서 그런다. 나는 화장실 문지방 위에 선 채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정말 가지가지 하셔! 가지가지!
그런데 아버지도 호락호락한 인간은 결코 아니라 내가 짜증을 낼 때마다 내미는 이를테면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곤 했다. 그건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던 어느 여름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무릎까지 오는 어린이용 풀에서, 아버지는 성인용 풀에서 각각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미적지근한 어린이 풀이 금세 지루해진 나는 성인 풀 쪽에 갔다가 미끄러져 빠지고 말았고 마침 평일 오전의 수영장에는 나와 아버지밖에 없었다.
나는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순간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수영장 천장에 끼워진 네모난 유리 귀퉁이마다 빗물이 마른 흙먼지가 더께더께 덮여 있던 모양이나 락스 냄새가 나는 물이 내 몸의 모든 구멍으로 침입해 내 피를 굴복시키고 나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나 바닥을 밟는 익숙한 감각을 찾아 온 신경을 집중하고 간절하게 물 아래로 뻗었던 막막한 발바닥 그런 것들을 전부 선명하게 기억한다. 게다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나는 마치 물에 빠진 나인 동시에 수영장 천장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나인 것처럼 관찰자의 시선으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바라볼 수도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역시 또렷해서 빨간 땡땡이 무늬 수영모를 쓴 못생긴 여자아이가 서서히 익사해 가는 것을 스노볼을 들여다보듯 환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날의 일에 관해 단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나를 구해 주는 장면이었다. 그건 그 일에 대해 아버지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빠지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헤엄쳐 와 나를 건져 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비장의 무기가 바로 그거였다. 아버지는 내가 짜증을 부리거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때마다 이날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말랑한 내 어린 몸이 얼마나 유연하게 자기의 목에 들러붙었는지, 숨을 쉬겠다고 제 아비의 머리를 짓누르던 힘이 얼마나 셌는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꼭 마지막에는 그때 내가 없었다면 넌 빠져 죽었을 거다 하고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아버지가 되어서 딸을 구해 준 게 뭐 그리 유세냐고 되받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으면 입이 탁 막히고 온몸이 묵직해져서 결국 코코넛 워터라는 것을 사러 새벽에 편의점에 가거나 제조 회사에 전화를 걸어 선풍기의 날개는 왜 왼쪽으로만 도는지 묻고는 했었다.
이제 아버지는 죽고 없지만 싱크대 위에 동그마니 올라앉은 유골함을 볼 때마다 나는 꼭 그때와 같은 기분이 되었는데 그건 살아 있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아서 나는 유골함을 베란다에 갖다 놓으며 언제 양재동 갈 일이 있으면 화훼단지에 들르지 뭐, 하고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이상하게도 나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는 대강 화장까지 한 채 양재동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고 버스 안에서 잠깐 졸다 깨고 나서야 아, 걸려들었다, 하고 깨달았다.
결국 그날은 검은 흙 한 봉지와 빼빼 마른 나무 한 그루를 사서 돌아왔는데 흙이야 그렇다쳐도 이 나무는 도타운 잎만 몇 개 달랑달랑 달려 볼수록 볼품없는 녀석이었다. 화훼단지 안의 만만한 가게 앞에서 기웃기웃 들여다보고 있으니 뚱뚱한 주인아저씨가 나와 뭘 찾습니까 물었는데 아버지 유골에 심으려면 뭐가 좋을까요 할 수는 없어 우물거리자 아저씨가 그럼 이거, 하고 비닐 화분에 담긴 비슬비슬한 나무 하나를 권한 것이었다. 무슨 이름도 있었지만 듣는 순간 잊고 말았고 오천 원이라길래 오천 원을 건네주고 돌아 나오니 그만이었다.
집에 와서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유골함을 가져왔다. 안에 든 것을 쏟아 내고 달군 송곳으로 바닥에 물빠짐 구멍을 뚫은 뒤 흙과 섞어 담았다. 아버지의 유골은 아주 조금이었고 그다지 곱게 갈리지 않아 중간중간 손톱만 한 크기의 뭉툭한 뼛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게 끔찍하게 만지기 싫은 동시에 손끝으로 한번 궁굴려 보고 싶기도 했는데 결국 후자의 마음이 이겨 그중 가장 커다란 조각을 집어 도록도록 굴리다가 빛에 비춰 보기도 하고 이 뼈는 아버지의 어디였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저녁이 다 되어서야 흙과 뼛가루를 섞어 화분, 이라고 이제는 부르지만 원래는 유골함이었던 그것에 나무를 심는 일이 끝났고 보통 식물을 새로 심고 나면 그러듯이 물을 듬뿍 준 뒤에 베란다에 비스듬히 서서 화분 밑으로 스르르 흘러나오는 흙탕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뜨거운 물로 손까지 씻고 나니 매우 피곤해져서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나는 이미 화분에 대한 것을 까맣게 잊었고 이후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동안 처음에 보잘것없던 나무는 혼자 무럭무럭 자라 우듬지에서 반드르르한 연둣빛 가죽 같은 새잎이 올라오고 줄기도 굵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을 때 갑자기 베란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물.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며 컵에 찬물을 반만 떠다가 화분에 갖다 부었고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잎을 천천히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아버지는 그 뒤로 쑥쑥 자라 화분을 두 번이나 큰 것으로 바꾸어 주어야 했고 물도 한 컵으로는 모자랄 만큼 많이 마셨다. 자랄수록 잎이 무성해지고 줄기가 굵어져 이제는 한 그루 나무로 손색없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잔가지나 시든 잎은 좀 쳐내면 더 보기 좋으련만 말만 꺼내도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피우는 통에 할 수 없이 수북하니 멋대로 자라도록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작고 예쁜 묘목으로 살걸 하고 가끔 후회하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대체로 항상 기분이 좋았고 필요로 하는 건 물과 빛밖에 없었기에 생전의 아버지보단 훨씬 편리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예전과 다름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보는 것인지 보진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인지 아무튼 텔레비전 앞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서는 <한국 미식 여행>이라는 방송을 하루 종일 본다든가 뿌리에 벌레가 있는 것 같다며 뽑아서 좀 보아 달라고 한 적도 있었고 손톱에 흙이 끼이는 게 싫어 나중에, 했더니 잊지도 않았는지 또 그 수영장 사건을 들먹였다. 예전에 말이다, 내가 인간이었을 적에 말이다, 네가 수영장에서, 땡땡이 무늬 수영복을 입고, 아 알겠어 알겠다고요, 결국 비닐장갑을 끼고 아버지를 쑥 뽑아서 뿌리를 훑어보았는데 물론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프랑스어로 된 소설이나 잡문을 번역하는 일을 하는데 말하자면 프리랜서라 항상 집에서 일을 했고 그나마 일거리가 드문드문이어서 아예 놀고먹는 날도 많았다. 최근 번역하고 있는 건 <사과>라는 무명작가의 소설이었는데 자기가 사과라고 믿는 어느 프랑스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그 여자는 태어나 스스로 사고할 수 있을 때부터 자신을 사과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걸어다니는 대신 굴러다녔고 화장을 하는 대신 껍질에 광을 냈고 음식은 오로지 맑은 물만 마시고 살았다. 어느 날 그 여자는 거리에서 바로 짜낸 과일주스를 파는 노점을 보고 그 끔찍한 광경에 그만 기절하고 마는데 깨어나 보니 넘어지면서 받은 충격으로 반으로 짝 갈라진 채 병원 침대 두 개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씨방과 씨앗을 훤히 드러낸 자기 모습에 수치스러운 것도 잠시, 곧 여자는 극도의 정신적 혼란에 빠지고 만다. 몸이 갈라진 순간에 마치 정신도 반으로 나누어져 버린 것 같아서 그녀의 의도와 의식과 의지가 대체 이쪽 조각에 있는 것인지, 저쪽 조각에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길이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정성스러운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자는 점점 썩어 들어갔고 나중에는 병원 침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임종의 순간 의사에게 무어라고 중얼거렸지만 의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되묻는 참에 여자는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여자의 마지막 대사는 아무렇게나 나열된 알파벳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의사는 아마도 그건 사과의 언어였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나는 여기까지 번역해 놓고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피식 웃었는데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과의 언어라니, 아버지는 나무가 되었어도 창문 열어라, 콜라 사와라 말만 잘하는데.
더 이상 아버지를 간병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나는 시간이 많아졌고 작업 속도도 빨라져서 예전보다 약간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번역비를 받을 때마다 나는 원피스를 한 벌 사거나 소갈비거리를 사와 재우거나 했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에게도 입을 싹 씻기가 좀 민망해서 화분에 꽂는 노란 식물 영양제를 사다가 꽂아 주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마시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즐거워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라면 아기일 때를 말하는 것일까 씨앗일 때를 말하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나도 반으로 짝 갈라질 것처럼 혼란스러워져서 그만두었고 나와 아버지는 한동안 그렇게 잘 지냈다.
해가 바뀌어 나는 깡똥한 단발머리였던 것이 어깨쯤까지 오는 중단발이 되었고 아버지는 하모니카만 하던 키가 바이올린만큼 자랐다. 그쯤 되자 나는 나무가 된 아버지와 사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아버지도 나무로 사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우리는 물론 가끔 투닥투닥 말싸움을 할 때도 있고 저거, 확 베어 버릴까, 하고 생각하는 적도 있었지만 보통은 사이좋게 지냈다.
몸집이 커지자 아버지는 베란다에만 지내는 것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 공기를 쐬어 주고 풍경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 주었더니 까치도 보고 비둘기도 보고 방충망에 붙은 노린재도 보고 하며 좋아했지만 그것도 곧 싫증을 내게 되고 말았다. 그러더니 어느 볕 좋은 봄에 드디어 앓는 소리로 유진아, 나가자, 나가고 싶다, 해서 화분에서 뽑아 달라는 거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라 그냥 밖에를 나가고 싶단다. 끙차, 소리 내며 화분을 통째 끌어안고 들어 보았더니 생각보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달랑달랑 안고 다닐 정도의 무게도 아니라서 나는 아버지, 이거 무거워서 안 되겠는데, 하며 내려놓아 버렸고 아버지는 실망해 잎사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도 없길래 나는 마침 청소기를 돌리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청소기를 마저 돌리러 갔고 가는 김에 빨래도 했다. 베란다에 서서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말했다. 예전에 말이다, 기억나냐, 너 여섯 살 때, 물에 빠진 네가, 너만 살자고 글쎄 그 어린 게 내 머리를 물에다.
다음날 나는 동네 잡화점에 가서 적당한 크기의 캐리어를 하나 사 가지고 왔다. 캐리어라고 부르기는 좀 민망하고 사실 구루마, 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모양을 한 그것은 플라스틱 판때기에 바퀴와 손잡이를 달아 놓은 단순한 물건이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그걸 사온 걸 보자 줄기까지 파르르 떨며 좋아했다. 거기에 아버지를 태우고 꼭 유모차를 끄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밖으로 나가자 울퉁불퉁한 바닥에서는 조금 힘들었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산책시킬 수는 있었다. 공원으로 가자, 아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자, 영화관에도 가고 싶다, 아버지는 잎을 서로 비벼대며 즐겁게 소리쳤고 나는 행여나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을까봐 조용히, 좀 작게 말해, 소곤거리며 구루마를 밀었는데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여기 말하는 화분이 있다며 나사, 국정원, 아니면 <세상에 이런 일이> 취재진 따위가 몰려와 난리법석을 떨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아버지의 주문대로 공원에도 갔고 버스 정류장에 한참 앉아서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을 구경한 뒤 영화관에 가서 요즘엔 무슨 영화가 개봉했는지 보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공원을 지나서 왔는데 이 루트는 나와 아버지의 산책로로 정해지게 되었다. 나는 이틀에 한 번, 늦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꼭 아버지를 구루마에 태우고 산책을 나가 정해진 코스를 돌고 돌아왔다.
가끔은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장을 봐다가 구루마에 함께 싣고 오기도 했고 그러다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쫄딱 맞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더욱 푸르러져서 잎들이 마치 얇은 에메랄드 조각처럼 반짝반짝 빛나곤 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구루마에 아버지를 태우고 슬슬 밀어 공원에 갔는데 내가 항상 앉아 쉬곤 하던 벤치에 어떤 남자가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달랑 들어 그 옆의 벤치에 앉히고 나도 앉아 무릎을 툭툭 치면서 돌아가는 길에는 샌드위치를 사 가야지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소곤거렸다. 유진아, 저거 봐라, 저걸 봐.
그제서야 남자의 옆에 아버지와 비슷한 크기의 화분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동글동글하고 건강한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티가 나는 멋진 나무라 나도 아버지도 와, 감탄하며 힐끔힐끔 쳐다보았는데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쏙 집어넣고는 비닐 포장지를 와드득 구겨서 약간 떨어진 쓰레기통에 던졌다. 구겨진 비닐은 아주 깨끗하고 단정한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쏘옥 들어갔다. 나는 누군가가 쓰레기를 던지는 것을 보고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생각한 것이 우스워서 슬쩍 미소를 지었고 남자는 벤치 아래로 허리를 숙였는데 거기에는 내 것과 똑같은 초록색 구루마가 접힌 채 놓여 있었다. 남자는 그걸 착착 펴서 거기에 화분을 올려놓고는 내가 그랬듯이 구루마를 달달달 소리 내어 밀면서 공원을 나갔다. 나와 아버지는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그렇게 몇십 분을 앉아 있다가 그날은 버스정류장도 영화관도 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는데 남자는 그날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고 마지막 조각을 먹은 뒤 포장지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날과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한 번에 골인시키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었고 남자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선 일어나서 떨어진 포장지를 주우러 가는 것을 보자 나는 왠지 기뻐졌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남자의 화분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아버지가 참 무지하게 좋죠, 날씨가, 하고 말을 걸었을 때 깜짝 놀랐으며 남자의 화분이 네에, 그렇네요, 하고 얌전한 여자의 목소리로 대답해 왔을 때는 컥 하고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을 만큼 더 놀랐다. 놀란 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한쪽 볼에 불룩하게 샌드위치를 넣은 채로 나처럼 아버지와 자기의 화분을 번갈아서 바라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설명을 요구한다는 듯이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죄송해요, 우리 아버지가, 하고 말하긴 했지만 그 말로 모든 설명이 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남자는 그렇군요, 하고 대답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니 남자가 우리 어머니거든요, 하면서 자기의 화분을 눈짓해 보였고 나는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꼭 마술사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 어딘가에서 비닐에 싸인 새 샌드위치를 짜잔 꺼내서 내게 보이며 먹을 테냐고 물었는데 마침 그건 내가 좋아하는 연어 샌드위치라서 나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볼을 불룩불룩하며 그걸 모두 먹었다.
그 뒤로 우리는 거의 매일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고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이 P 무엇인데 그냥 P라고 불러 주었으면 한다는 것과 삽화를 그리는 게 취미이자 직업인데 그 삽화는 주로 동화책이나 유아잡지에 실린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담배는 멘솔을, 커피는 연한 라떼를 선호하며 강아지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P의 어머니를 만나면 꽤나 수다스러워져서 이것저것 신나게 떠들었고 가끔 아버지의 철 지난 농담이 통하면 P의 어머니는 까르르 웃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묘한 표정을 교환하곤 했다. 나는 그 둘이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도록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자는 둥 P를 꼬여 내어 오래오래 산책을 했고 돌아오면 아버지는 벌써 왔느냐고 부루퉁했으며 P의 어머니는 새잎의 가장자리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느 날 P가 자기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하여 나는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했다. 그날 나는 새 원피스를 입었고 P에게는 달콤한 포트와인을 한 병, P의 어머니에게는 흙에 한번 묻어 놓기만 하면 십 년을 간다는 독일제 고체 비료를 준비했다. 그날은 아버지도 멋을 부리고 싶어 해서 내가 전정가위를 들고 덤벼도 얌전히 있기에 시원시원하게 가지를 쳐내 아주 단정하고 깔끔한 모양이 되어 우리는 P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주는 P의 뒤로 맛있는 냄새가 나는 훈김이 훅 끼쳐 와 나는 들어가기도 전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P의 집은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로 베란다가 딸린 조그만 거실에 더 조그만 침실이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나는 첫눈에 P의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손님이 온다고 해서 급하게 정돈한 티가 나긴 하지만 그다지 깨끗하게 닦이지 않은 방구석이나 드문드문 손자국이 난 유리창,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는 장판 같은 것이 좋았고 그렇다고 얘기하자 P는 부끄러워했다.
P는 직접 만든 몇 가지 요리를 사 인 식탁에 차려냈고 나와 P, 아버지와 P의 어머니가 각각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네 개의 와인잔에 내가 사 온 포트와인과 미네랄워터를 각각 두 잔씩 채운 뒤 와인은 내게 건네고, 물은 아버지에게 부어 주며 P는 이게 바로 부어라 마셔라가 아니겠느냐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했는데 아버지는 줄기를 꼬부리고 껄껄 웃었다. 나는 차려진 음식을 잔뜩 먹었고 P는 어딘가에서 그럼 이것도, 또 저것도, 하며 맛있는 음식을 자꾸자꾸 가져와 접시를 채웠다. 마침내 모든 냄비가 다 텅 비고 나자 P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 담배가 떨어졌네, 하고 말했고 나는 P가 같이 사러 가자고 하기도 전에 이미 현관에 서서 신발 뒤축을 구기고 있었다.
봄밤이었고 공기에서 라일락 향기가 났다. P는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 라일락이 심어져 있지만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그렇군요, 한 뒤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대로 아파트 단지 정문에 있는 편의점까지 걸어가 담배를 샀고 돌아 나오는 길에도 이렇게 말이 없으려나 생각했는데 집에 다 와 갈 즈음 P가 라일락 나무라도 찾는 것인지 괜히 화단 쪽을 힐끔거리며 입으로는 우리 만나 볼래요 하고 말했고 나는 그럴까요, 그래요, 했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이 일을 얘기하자 아버지는 거 잘됐구나 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려 야 유진아 요즘 날씨 너무 좋지 않냐, 하고 말했고 나는 아버지도 어젯밤 우리가 나간 사이 P의 어머니에게 P와 비슷한 말을 했구나 그리고 P의 어머니도 나와 비슷한 대답을 했구나 하고 눈치챘다.
P와 나는 둘 다 그다지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P의 집에서 보냈다. P의 집에는 P가 사용하는 그림 도구들이 잔뜩 있었고 나는 그걸로 낙서를 하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하면서 P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색깔이 말랑하고 촉촉해서 꼭 P와 같은 따뜻한 그림들이 흰 종이에 사르르 생겨나는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P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말없이 그림만 그리다가 갑자기 배고프네, 혹은 어깨가 뻣뻣해, 하고 툭 말했는데 그러고 나면 우리는 밥을 해 먹거나 밖에 나가 짧게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아버지와 P의 어머니도 우리와 비슷했는데 그들은 줄기를 한껏 구부려 서로를 향해 기우뚱 기울어진 채로 낮에는 햇빛을 쬐고 밤에는 잎을 늘어뜨리며 하루를 보냈다. 나는 가끔 곁눈질로 아버지의 두껍고 가장자리가 삐죽삐죽한 잎사귀가 P 어머니의 동그랗고 작은 잎사귀를 애정이 가득한 동작으로 쓰다듬는 것을 보았고 속으로 아이고 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하고 생각하며 민망해하곤 했다.
P와 내가 수다스러워지는 건 주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시간이었다. P의 침실 천장에는 흐릿하고 오래된 야광별이 몇 개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 별들을 P만큼이나 사랑했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수영장에 빠졌던 것과 아버지가 지금도 그 이야기를 우려먹는다는 것을 말해 주자 P는 이불을 걷어차며 웃었다. P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해 달라고 조르자 P는 뭘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자기가 여덟 살 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백화점에서 로봇을 사 달라고 떼를 쓰자 화가 난 어머니가 장난감 코너의 점원 아줌마에게 P를 데려가서는 그렇게 로봇이 좋으면 이 아줌마를 엄마로 삼으라고 하곤 그대로 혼자 집에 가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P는 그럼 그러지 뭐, 하고 아줌마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줌마네 집에 가서 저녁도 얻어먹고 만화영화도 보고 잠까지 잘 잔 뒤에 다음날 아줌마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자기도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고 했고 나는 뱃가죽이 가려울 때까지 웃었다. 그러다가 졸음이 올 때쯤 눈을 감으면 베란다에서 아버지와 P의 어머니가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밤의 공기를 한 겹씩 거쳐 우리가 누워 있는 방까지 흘러 들어오는 그 소리는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나를 잠재워 나는 아주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가면 아버지는 P의 어머니와 가지와 잎을 서로 얽은 채 내게 잘 잤냐, 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고 어제 떠 놓은 미지근한 수돗물을 반 컵씩 부어 주는 것으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P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향해 완전히 기울어진 데다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떼어낼 수가 없을 만큼 가지가 친친 얽혀 한 그루의 나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버지와 P 어머니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자면 나와 P도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인간인 데다 나는 아버지를 P는 어머니를 닮았으니 결국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가고 있는 셈이었고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저녁, P는 거실에 길게 누워 내가 번역한 <사과>를 읽고 있었고 나는 입이 심심해 생라면이라도 부숴 먹자고 할까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얘들아 이리 좀 와 보거라, 하고 말해 P와 나는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뒤 베란다로 나갔다.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래? 삐딱하게 말하자 P가 나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고 아버지는 못 들은 척 근엄한 목소리를 지어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결혼할 생각이다. P를 곁눈질하니 P도 웃음을 참고 있기에 나는 안심하고 깔깔 웃었다. P가 내 옆구리를 아프게 찌르며 웃지 마, 하고 안 웃었던 척 금세 정색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웃고 싶은 만큼 웃었고 그러고 나서 근데 갑자기 왜? 라고 묻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가 생길 거야.
아버지의 말에 내가 상상한 것은 아기처럼 생긴 뿌리를 땅에서 뽑으면 울음을 터뜨린다는 만드라고라라든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나오는 베이비 그루트 같은 모습이라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사실 그래, 이상한 걸로 따지면 아버지도 이상하긴 하지, 하고 그제서야 생각하며 낄낄거렸지만 아버지가 말한 그 ‘아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P가 무성한 가지를 살살 헤치자 작고 둥근 뿔 모양으로 단단히 말려 있는 그것은 분명 꽃봉오리였다. P 어머니가 수줍은 목소리로 모레쯤이면 필 것 같다, 하고 소곤거렸고 나와 P는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어쨌든 축하드려요. P가 떨떠름하게 말했고 그 표정이 우스워서 또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웃었다.
P와 나는 그것에 대해 좀 의논을 했고 다음날 둘이 화훼단지에 가서 거기서 제일 커다랗고 근사한 화분을 사 와 아버지와 P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뽑아다가 한데 옮겨 심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예쁜 원피스를, P는 정장을 차려입고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케이크에 초를 켜고 샴페인을 마셨는데 이건 결혼식이 아니라 생일이잖아, 하고 아버지가 부루퉁해하든 말든 나는 재미있었고 한 번씩 기분이 묘해질 때면 이게 자식의 마음일까,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는 척을 해서 모두를 웃겼다.
그날 자리에 누웠을 때 이제 우린 남매가 된 거네 하고 말하자 P가 그럼 남매끼리는 절대 안 하는 짓 한번 해 보자며 살살 꼬시는 바람에 야광별도 부끄러워서 떨어질 만큼, 실제로는 벽을 치는 바람에 떨어진 거였지만, 어쨌든 그런 밤을 보냈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꽃은 밤사이 화알짝 피어나 분홍색 화심에 잔뜩 묻은 노란 꽃가루의 비리고 달콤한 향기가 온 집 안에 가득했다.
꽃이 시들자 그 자리에는 빨갛고 작은 열매가 맺혔다.
아버지와 P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는 거의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가끔 둘 중 하나가 혼자 킥킥 웃거나 파르르 떨거나 하는 걸 보니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 뜻이 통하는 것 같았다. 이제 한 그루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로 가을이 깊어졌고 열매는 점점 자라나서 처음엔 작은 단추만 하던 게 하루가 다르게 꼭꼭 영글어 알사탕만 했다가 찹쌀떡만 해지고 껍데기도 반들반들 윤이 나게 무르익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 볼록, 볼록 하며 움직이는 적도 있었는데 손끝으로 조심조심 쓰다듬으면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제법 귀여웠다. 나는 매일 열매를 들여다보며 이젠 익었나 언제 다 익을까 콕콕 찔러도 보고 말을 걸어도 보며 기다렸다. 꼭지 주변이 검붉게 물들고 크기도 제법 커져 둥글게 웅크린 새끼 토끼만 해진 어느 저녁, 드디어 태어난다, 태어나, 하는 P 어머니의 외침이 들려 나와 P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열매가 표면을 바르르 떨며 가지에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더니 잠깐 사이에 어어, 할 새도 없이 톡 하고 가볍게 떨어져 또로로 굴러가는 것이었다. 꼼짝없이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갈 뻔한 고 녀석을 P가 잽싸게 손을 뻗어 잡았다. 따뜻하다. P가 말했다.
내가 손을 내밀자 P가 갓 태어난 열매를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P의 말대로 정말 따뜻했고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주제에 어쩐지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볼에 마구 비비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P에게 열매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이제 이걸 어떻게 하지. P가 손바닥 위에서 열매를 데굴데굴 어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열매가 어서어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저 녀석이 태어나면 어떻게 할지는 전혀 생각해 본 바가 없어 나도 콧잔등을 찡그리고 P와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열매는 P의 손바닥 위에서 잠시 뒹굴더니 잠잠해진 것이 잠이 든 것 같기도 해서 P는 조심스레 열매를 식탁으로 가져가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나와 P는 열매를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앉아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의논했다. 이대로 두면 금세 썩어 버릴 테고, 갓 태어난 녀석을 흙에 묻어 화분에 심어 버리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P 어머니에게 물으니 천하태평한 목소리로 니들 동생이니 니들이 알아서 하렴,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놈을 꼬집고 쓰다듬으면서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한다, 고민했는데 결국 P가 일어나더니 서랍에서 과도를 가져와 말했다. 우리 그냥 반으로 나눠서 먹어 버리자.
나는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했고 P가 열매의 껍데기에 과도를 살짝 갖다 대자마자 잘 익은 그놈은 반으로 쩍 갈라졌는데 새빨간 속살이 꽤나 맛있어 보였다. 나와 P는 각자 한 조각씩을 들고 하나, 둘, 셋에 입에 쏙 집어넣었다. 몰캉몰캉 향긋한 맛에 달콤한 과즙이 풍부해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맛있다, 하는 표정을 교환하며 턱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꿀꺽 삼키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으깨진 과육의 느낌이 간지러웠고 곧이어 고 빨간 살점이 위장에 퐁당 떨어져 부드럽게 녹아 가는 것까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영업이 끝난 놀이동산처럼 보이는 곳을 뛰어다니며 끝없이 끝없이 굴러가는 빨간 공을 쫓아다니는 꿈이었다. 결국 공을 잡아 주머니에 넣은 순간 잠에서 깼고 아침에 이 꿈 이야기를 하자 P는 어어 그거 태몽 아냐 혹시, 하고 말해서 나는 그런가, 했다.
<당선소감>
"여기에서 저기로"
운전 중 적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면 룸미러로 보이는 뒤쪽 도로의 풍경이 생경할 때가 있습니다. 방금까지 나는 저기에 있었고, 이제 여기에 있으며, 곧 신호가 바뀌면 이곳에서도 떠날 테지요. 그 비슷한 모습으로 생 역시 어찌어찌 움직여 결국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글쓰기는 끈기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제가 유일하게 몇십 년을 계속해온 일입니다. 매번 즐겁지는 않았지만 매번 열심을 다하긴 했습니다. 응원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나조차 나를 믿지 않을 때에도 나를 믿어준 부모님과 동생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마음을 밟고서야 불붙은 이 길을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지름길을 일러주는 대신 신발끈을 매어주신 조성기 선생님, 조경란 선생님을 비롯한 스승들과 임승훈 선배, 숭실대학교 친구들, ‘백작’ 사람들과 인선이, 그리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세계에서 나를 찾아내 손을 잡아준 석기와 작은 비단 고양이 온유에게 영원한 사랑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니 허리가 꼿꼿해집니다. 텅 빈 하얀 화면을 독대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지만,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괴롭기에 나아가야겠습니다. 나아가며, 사월에는 두릅을 먹고 시월에는 대하를 먹는 정도로만 나를 돌보아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 1990년생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회사원
<심사평>
"능청스러우면서도 낯선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
본심에 올라온 열 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이야기임에도 동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작품답게 비슷한 배음을 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구호’는 이 시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책감과 방관자 의식을 노조책임자의 투신과 아내의 출산을 통해 밀도 있는 서사로 직조해내고 있다. 나무랄 데 없는 안정적 문장과 구성이 돋보였으나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동시대 상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선물 상자라는 미스터리한 소재를 중추로 삼아 주인공의 짧은 베를린 여행기를 다루고 있다. 풍부한 해석을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적 장면이 다수 등장하지만 작품 속으로 잘 수렴되지 않다보니 설정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 후보로 경합한 ‘아무도 모르는 일’과 ‘빨간 열매’ 두 작품은 기질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은 안정된 문장과 구성, 현대적이면서도 문제적인 캐릭터의 제시, 의미심장한 사회적 함의 등을 고루 갖춘 ‘잘 빚은 항아리’에 가깝다면 ‘빨간 열매’는 능청스러우면서도 낯선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각 작품의 장단점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빨간 열매’ 쪽으로 수월하게 마음이 모아졌다.
‘빨간 열매’에서 화자는 오랫동안 병든 아버지의 부양에 시달렸지만, 이에 대한 괴로움이나 갈등,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죄의식, 의무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는 심술맞고도 괴팍하게 유별나고 무용한 일을 해줄 것을 지시하고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화자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능청스러우면서도 유쾌하게 아버지를 돌본다. 후반부에서 이야기는 사랑과 연애로 선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사적 완결성이나 균형에 대한 의심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설이 시종일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왔다는 것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들뜬 사랑의 기척을 벽에 붙은 야광 스티커에 슬쩍 빗댈 줄 아는 재치, 쓰레기조차 단정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을 그려내는 부분처럼 빛나는 장면이 많은 소설이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아쉽게 후일을 기약하게 된 분들의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 성석제,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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