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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물고기 하품 / 박정효

  화장실은 1인 분의 정글이다. 칫솔을 물고 소변을 보면서, 벌거벗은 나는 생각했다.

  어젯밤 TV에서는 아마존 밀림의 생태를 특별 다큐멘터리로 방영했다. 모든 훈화가 그렇듯, 풍족했던 과거와 무참한 오늘, 위태할 내일에의 보고였다. 먹이사슬로 얽힌 물과 나무의 공간에서 가장 치열한 것은 인간이었다. 공기가 있는 모든 곳에서 인간은 네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싸웠고, 아마존은 칠백오만 제곱킬로미터의 전쟁터였다. 숱한 콜럼버스 떼가 옷을 내밀며 무리를 밀어냈지만 정글에는 여전히 벌거벗은 사람들이 살았다. 사냥, 축제, 성인식.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들이 다리 사이로 희뿌연 연기를 달고 일렁였다. 정글 밖의 모자이크는 당자의 수치심이 아니라 우리의 음란함 때문에 입힌 것이었다.

  지하 단칸방 화장실 벽면에도 거울이 붙어있었다. 부족이 장신구를 덜렁이며 춤추던 화면보다 세 배는 큰 크기였다. 입에 하얀 거품을 문 남자 하나가 거울에 손을 맞대고 오줌줄기를 조였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서울 하늘 아래, 알몸이 떳떳한 공간은 이곳뿐이었다. 지킬 것 없는 1인용 정글에서 소변을 다 털어낸 몸에는 아무것도 걸린 것이 없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오래전 주머니를 벗어난 문장이 셔츠 등판에 눌어붙어있었다. 제기랄, 방금까지 냄비받침이었던 포켓북 표지가 쩍 소리를 내며 다리미에서 떨어졌다. 심이 박힌 목덜미를 움켜잡고 손목을 들썩였다. 등판에 바람이 들어 은빛선문이 넘실거렸다. 흰 배경에 숨어 보이지 않던 가는 선들은, 가을 밤바다에 몸을 감춘 갈치 떼의 지느러미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락스를 물에 풀었다. 알싸한 밤꽃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후비는 기억은 파도가 사라진 늙은 바다의 냄새 같기도, 수초가 엉킨 강가의 냄새 같기도 했다. 쪼르륵 따라낸 두 숟갈의 위력으로 물에 잠겨가는 갈치들이 살아서 내는 냄새는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벌거벗은 내 안에서 쏟아진 향을 이 냄새에 비유하던 여자 친구는 락스를 풀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는지 알 수 없었다. 셔츠가 락스물에 완전히 잠겼을 때 쯤 나는 샤워를 시작했다.

  "도시가 나라의 꽃이면, 촌은 나라의 줄기인거야."

  품앗이 때문에 시작한 낫질이 고돼질 때 쯤, 막걸리를 들고 두렁에 선 내게 아저씨가 잊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수명이 짧은 나비, 벌 떼나 꽃에 모여들지, 맹수는 나무 위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법이다. 아무리 예쁜 꽃도 혼자 공중에 매달린 건 없어. 다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으니까 꼿꼿이 고개 들고 있는 거야. 네가 촌에 있다고 기죽을 건 하나 없다는 얘기다."

  아저씨는 아버지의 고향 후배였다. 개울 건너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한 시절에 자랐다는 아저씨는, 아버지가 틈만 나면 나의 본으로 꼽는 사람이었다. 사람 구실을 시작하기 무섭게 낫을 들고 소꼴을 벴던 아버지와 달리, 아저씨는 지방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곧바로 상경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삶의 터전인 곳이 아저씨에게는 부모님 남아 계신 고향이 된 것이다. 날 적에 개울 하나였던 둘의 차이는 자랄수록 강이 되고 바다가 됐다. 마을에서 김 씨로 통하는 아버지는 물론, 마을 모두가 그를 이박사라고 부르는 것도 수평선 어디쯤의 일이었다. 아저씨와는 명절에 마을 어귀에서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많이 컸네,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 와야지, 정도가 고작인 대화는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면서 금세 끝이 났다. 아저씨의 출생부터 출세까지의 전기는 마을에 파다했던 풍문이 전부였지만, 그만하면 세종대왕 한 번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존경하는 인물로 참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다. 분명 세뇌가 아닌 선택이었다.

  "구석이라는 말은 왜 촌에만 붙는지 몰라. 산으로 들로 다 트여서 여긴 막다른 곳도 없는데. 산이야 넘으면 그만, 강은 건너면 그만인 걸, 63층 건물은 어떻게 넘는다니. 담벼락 하나 마주치면 돌아나올 밖에는 길도 없어요. 서울? 난 다신 안돌아간다."

  아저씨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서울로 간 지 15년만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저씨는 자가용이 아닌 트럭을 타고 마을로 들어섰다. 잠든 아이를 무릎에 앉힌 아주머니는 울고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아저씨는 인사에 대꾸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마을 입구의 효자비 앞에 앉아서 곰방대를 빨던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15년을 쩌렁했던 아저씨의 성공기가 쉬쉬, 웬만한 금기설화보다 못한 이야기가 된 것은 아저씨가 도착하고 한 시간이 채 못돼서 부터였다. 나는 모든 것이 궁금했으나 농한기를 맞은 동네는 고요했다. 개울 너머로 올라가는 트럭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봄이 되자 아저씨는 꽃 농사를 시작했다. 미꾸라지와 우렁이, 오리를 풀어 벼를 키우거나 소 돼지소리가 고작이던 동네에서는 꽤 신선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신기]와 [신끼]는 서로 달라서, 누구 하나 아저씨의 결정을 선견지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사업하던 놈이라고 와선 제 아버지가 평생을 일군 논밭의 지력이나 바닥내고 있다고, 조상의 업을 가업으로 이어 온 사람들은 말했다. 블루오션이나 틈새사업은 서울에서나 유용한 얘기였다.

  하지만 다음 해 가을, 아저씨는 국화로 큰 수확을 올렸다. 작은 화분도 만들고, 국화차 같은 것도 만들어 판다고 했다. 꽃은 송이가 아닐 때 더 비싼 모양이었다. 수억 원의 돈을 벌었다는 아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분 떨어진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나갔다. 개울 건너 산꼭대기에는 버튼 하나면 창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신식 비닐하우스가 세워졌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간이 숙소도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아저씨를 부르는 말은 도로 이박사였다. 이박사 아저씨는 아홉 시에 출근했다가 여섯 시에 퇴근했다. 꼭 지켜진 시각이었다. 터전인 아버지는 살고, 일터인 아저씨는 일했다. 둘에게 고향에서의 일이었다.

  "도시가 꿀을 내는 꽃이면, 촌은 꽃을 여물게 하는 줄기다. 촌에 있다고 기죽을 건 없어."

  서울에서 쌓인 눈을 싣고 온 날부터 아저씨는 얘기했다. 지폐 몇 장을 노잣돈삼아 쥐어주며 서울행을 부추기는 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나는, 꿈이 뭐니 하고 물으면 서울 가는 거요 했다. 그러면 아저씨는 또 꽃과 줄기 타령을 늘어놨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줄기의 공간에서 꽃을 키우는 아저씨를 위한 말이었다.

  일요일 오전 아홉시. 이중철문은 열려있었다. 셋방살이들의 생체리듬이 어떻든 간에, 아침 일곱 시면 높은 소리로 영어 테이프를 트는 주인집 아들이 아프지 않은 날에는 당연한 일정이었다. 2층과 3층 사이의 이중철문은 주인집 현관문을 마주보고 있었고, 대리석이 깔린 공터를 지나서 열개의 계단 위에는 옥탑이 있었다. 주인은 내가 지날 때마다 이중철문은 자신의 집 보안장치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주인집 현관문은 늘 단단히 잠겨있었기 때문에, 이중철문은 공터의 감자상자를 보호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삐거덕- 목적 없는 이중철문의 막중한 임무에 내가 있다는 것은 주인의 입만 빼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세를 든 다음날 세워진 이중철문은, 오전 일곱 시부터 오후 열시 사이, 문이 열려있는 시간에만 내 출입을 허가한다는 뜻이었다. 철컥- 매일 아침, 정글을 벗어난 내 첫 목적지는 언제나 옥탑이었다. 올해 초, 지하에 세를 들며 덤으로 얹힌 방이었다. 옥상입구에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덧발라 세운 옥탑은 방이라기보다 통로 정도가 더 어울렸다. 건물과 옥상 사이에 얹혀서, 건너편 아파트에서 내려 보면 건물에 붙은 작은 굴뚝처럼 존재감 없는 공간이었다.

  "잘 잤어? 나, 나무 심는 꿈을 꿨어. 무지 큰 소나무였는데, 그 뒤에 네가 서있더라고. 너 내일 면접 합격할 것 같아!"

  여자 친구의 아침인사는 힘이 넘쳤다. 지하에서부터 울린 휴대폰은 옥탑에서 더 선명히 들렸다. 조급히 울리는 전화를 손에 들고서, 옥탑에 와서야 통화 버튼을 누르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코미디언이 사람을 죽인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다. 여자 친구는 한참을 웃었다. 전화 건너의 웃음소리는 계이름 '솔'에 가까웠다. 일주일 전, 싸움도 관계도 그만 끝내자던 '시'음계는 또 자체조율 된 모양이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다 잔거야. 하긴, 개꿈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무튼 넌 너무 복잡해서 탈이야."

  여자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나는 머리에 지구를 이고 사는 사람이었다. 아는 게 많아서 탈이라고 했고, 너무 잡다해서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는데, 여자 친구는 그런 나와 유난히 말이 잘 통했다. 나는 옥탑에서, 여자 친구는 고시원에서. 지구를 나란히 나눠든 우리는 자주 싸웠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 때문에 싸우기도 했고, 각종 사건의 처벌정도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우리의 싸움은 너무 멀어서 우리의 것이 아닌 적이 많았다. 가소롭고 애처로운 일이었다. 싸움은 이럴 거면 싸움도 관계도 그만 끝내자는 발악이 있어야 끝이 났다.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일주일 후에 걸려오는 첫 인사는 잘잤어? 였다. 시가 솔로 바뀌는 시간이자 여자 친구가 공부에 몰두 가능한 상한선이었다. 그럼 나는 자다 깬 목소리로 일주일의 생활은 빼버리고 전 날의 꿈 얘기를 했다. 꿈은 우리가 지구 밖에서 꺼낼 수 있는 궁극의 화제였다.

  "하여튼 내 꿈만 믿어봐. 이번엔 느낌이 좋으니까. 그 지긋한 옥탑도 탈출하게 될 테니."

  통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 친구는 확신했다. 오늘의 꿈은 휴전의 뜻 이상인 것 같았다. 꿈이 어찌나 생생하든지 눈을 떴는데도 또렷한 거야, 전화를 받으러 오는 길에 마주친 주인집 내외는 종종 이야기 했다. 꿈자리가 뒤숭숭할 때면 전화를 넣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간밤에 얼마나 팔딱이며 살아있었느냐에 아침행보를 정하곤 했다. 돼지를 품에 안거나 똥을 뒤집어 쓴 사람이 많을수록 복권가게는 복작였다. 맛있게 베어 문 복숭아 한 입에 딸 부잣집 임부는 마음 졸였고, 떡볶이 한 접시에 팔려가는 것도 있었다. 옥탑을 탈출하게 될 것이라는 여자 친구의 꿈은 어젯밤의 얘기인지, 앞으로 어느 날의 얘기인 지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은 서서 갖는 것이든, 누워서 꾸는 것이든 결과에 대한 기대로 사람을 흥분시키거나 절망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장마철 옥탑은 마르지 않은 옷이 들러붙은 것처럼 묵직했다. 다니는 내내 허리를 굽혀야 할 만큼 낮은 천장이 오늘따라 더 내려앉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양팔을 벌리고 누우면 손끝과 발끝이 벽에 닿는 옥탑을 큰 횡재라고 여겼다. 무작정 상경한 나의 유일한 밥벌이, 과외가 주수입인 사정을 듣고서 추가로 내어준 호의여서 더 그랬다.

  나는 이곳에서 다섯 무리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나에서 다섯 명까지 무리는 다양했고, 통증을 호소하는 과목도 다양했다. 대학에서는 수학을 공부했지만 졸업까지는 한계선 이상의 영어점수가 필요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소위 말하는 언론고시를 준비했는데, 그때는 한국어실력이 지원요건이었다. 조건은 목표를 바꿀 때마다 새롭게 불어났고, 그 모든 것은 필수였다. 그렇게 5년을 최종면접까지만 들락거린 나는, 해를 거듭할수록 아르바이트인 과외의 과목과 비율을 늘려갔다. 전공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전과목선생님이 그때 붙은 나의 새 이름이었다. 나라에서는 나처럼 일정 명 수 이상을 가르치는 것은 직업으로 분류해주었다. 정식 직업으로 갖기 위해서는 신고가 필수였지만 치레는 생략하기로 했다. 나라에서는 필요한 일이었지만 내겐 필요 없는 일이어서였다. 죽었다 깨나도 이 일은 아르바이트였고, 나는 이력서에 경력사항으로 올릴 것이 아직은 없었다. 비밀일 뿐 불법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연고 없는 서울에서, 내 수업일정표는 비교적 빨리 채워졌다. 명문대학을 7학기 만에 졸업했다는 것과, 일주일에 한 번은 강남으로 고3학생의 과외수업을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의 시간표가 완성된 것은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 3개월 만이었다. 공짜인 줄 알았던 옥탑의 배려가 주인집 두 아이의 과외비 대신임을 안 것도 그때쯤이었다. 터울이 커서 아이 중 하나는 다섯 무리에 들지 못하는 어린 나이었지만 그마저도 꽤 합리적인 거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중문이 열리는 일곱 시에 출근해서 닫히는 열 시에 퇴근했다. 팔자에도 없던 알파벳 송을 가르치고,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하는 방주인일지언정, 주거지와 일터가 뒤섞였던 때에 비하면 실로 천국의 조건이었다. 이박사 아저씨가 일하는 고향에서도, 내가 머무는 서울에서도 공간의 의미는 마찬가지였다.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어야 했다.

  차는 이제 막 논산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 경고음에 브레이크를 밟았던 발은 띵동, 소리로 안도하듯 엑셀을 파고들었다. 잠잠했던 빗줄기가 거세진 아침, 장마는 갈수록 제멋대로였다. 안전거리 이상으로 떨어진 차들은 앞 유리를 부딪치는 빗줄기에 사방으로 일렁이며 사라졌다. 물이 잔뜩 쏟아진 사인펜그림 같은 날씨였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잃은 게 없나 와서 확인해 봐라."

  전화를 건 것은 아버지였다. 잔뜩 취기가 올라 알아듣기 힘든 단어의 조합이었다. 고향집 근처에는 분명 파출소가 있었다. 사라졌다한들 숫자 세 개면 닿을 거리에 전문가가 즐비한 치안국가였다. 십분 내 출동이면 될 것을, 서울지하까지로 날아든 사건의뢰는 꽤 당황스러웠지만, 일주일 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한 것도 아버지였음을 상기하자니 그리 생소한 일도 아니었다. 태풍 때문에 집 앞 나무가 전부 기울었다, 스님이 지나다 나를 보곤 이 집을 떠나야 산다더라, 전화가 와선 아무 말 없이 끊던데 집나간 네 누이 같다, 술에 꼬인 발음은 매주 들어도 난해했다. 보고 싶다, 보다 절박한 말들이 그보다 효험 없이 지나는 주말들이었다.

  비에 섞인 와이퍼소리가 전부인 길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꼼짝없이 앞으로만 달려야하는 운전자에겐 괴로운 소외였다. 누나의 편의대로라면 CD는 콘솔박스에 있어야 했다. 뚜껑을 열고 손가락에 걸린 CD 한 장을 차에 밀어 넣었다.

  이 바닥은 지긋지긋하다며 홀연히 떠난 누나에게 나는 그 바닥이 어떤 바닥인지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올는지도 삼켜두었다. 누나가 남기고 간 것은 가져가기가 무거웠던 이 차와 가져갈 필요가 없어진 자형이 다였다. 치열한 공방을 넌더리라 표현하더니, 누나가 사라질 준비를 마치는 데에는 이혼을 하고 한 달이 걸렸다. 넌더리의 딱 십이분의 일 길이였다. 아무리 바빠도 여권 갱신은 하루도 미룬 적 없던 누나는 차를 가져다주고 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도 여권을 들고 있었다. 어머, 나 여권 빠트리고 온 거 아니니, 제일 중요한 걸. 새벽에 길에 서서, 가방 깊이 넣어 두었던 걸 굳이 꺼내 확인시켜주는 누나에게, 양손에 달린 조카들 것은 없이, 누나 것뿐인 건 알고 있느냐고 물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것은 다만, 누나의 자존심이자 같은 자궁에서 밀려나와 30년을 부비고 살아온 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휴대폰은 없앨 거야. 내가 연락할게, 급하면 메일하고."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내겐 말을 아끼고 떠난 누나는 6개월에 한 번씩, 메일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배경은 없고 얼굴만 동동 뜬 사진이었다. 동봉된 글은 날로 또박또박해지는 보고 싶어요, 놀러 오세요, 의 글씨스캔본이 전부였다. 시간과 장소는 빠진 무책임한 초대였다. 가끔 섞여있는 I love You는 이 바닥에서도 영어 학원을 다닐 때 썼던 말 이여서, 그곳의 말인지 빌려 쓰는 이곳에서의 말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 날 멀어진 택시가 인천공항으로 갔는지 김포공항으로 갔는지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완주IC를 지날 때쯤 비는 그쳤다. 한참 긴박했던 와이퍼는 차 지붕에 고였다가 흐르는 빗물을 조용히 쓸어냈다. 한 시간을 더 달려서 닿은 광한루는 주말이면 온갖 사투리가 들어차는 곳이었다. 남에겐 관광차를 몰고와 그네를 뛸 곳이 도착 15분 전의 동네 표식으로 읽히는 일은 괜히 우쭐한 기분을 들게 했다. 서울에서는 감히 느껴보지 못한 포만이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차 한 대면 꽉 들어차는 두둑은 너무 단조로워서 낭패인 미로였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은 폭이 좁아서 무조건 일방통행인 논두렁을 빙빙 돌다가 오던 대로 왔는데 집이 사라졌다며 전화를 하곤 했다. 마을회관 지나 은행나무에서 좌측, 주황색 지붕 옆 파란 지붕에서 우회전, 논 따라 오다가 수수밭 중간 다리 건너서. 사진같이 정교한 약도를 아무리 읊어도 그들은 보이는 게 풀이고 땅이라며, 현대 과학도 짚어낼 수 없는 집에 산다고 불평했다. 서울에서 고만고만한 간판만 보고 다니다가 머리가 돌 뻔했던 십여 년 전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알만한 투정이었다.

  수수밭이 가까워져오자 틈을 벌려 놓은 창으로 소똥냄새가 밀려들어왔다. 어머니가 계실 목장에서 나는 냄새였다. 장마철이면 냄새는 이렇게 소를 먹이기 위해 키우는 수수밭 너머까지 건너왔다. 비 때문에 제 구역에서 벗어나거나 멀어진 바닥 탓이었다. 어머니는 벽이 없는 곳에서 젖소를 길렀다. 흙 위에 쇠기둥을 두르고 지붕을 얹어 만든 개방식축사였다. 산 중턱에서 소의 발바닥을 받치던 흙은 비가 오면 거세진 물줄기에 쓸려 경계로 둘린 철조망을 벗어나곤 했다. 장마 때처럼 산비탈을 타고 흐르는 물이 많은 날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밀려난 바닥은 소가 뒤꽁무니에서 아무렇게나 내지른 똥과 그 똥이 발효되라고 뿌리는 톱밥까지가 함께였다. 해가 쨍쨍한 날에는 거름을 만들고 냄새를 삭이던 것들도 빗줄기에 한데 뒤엉켜서는 어떠한 구실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밀리고 밀려서 산 밑, 폭우에 폭삭 쓰러진 수수밭으로 모이는 게 유일한 흐름이었고, 동선을 따라 냄새는 퍼졌다.

  시골냄새 난다. 창문 닫아, 삼촌. 조카 녀석은 콧속으로 스미는 이것들을 시골냄새라고 표현했다. 외가에 오면 맡는 할머니네 냄새이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코를 부여잡은 아이를 품에 안고 누나가 했던 얘기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냄새를 몸에 발라야했다. 논에선 두엄냄새가 났고, 돼지우리에선 돼지내, 우사의 소똥냄새와, 양계장의 계분도. 오로지 사는 것에만 목적을 둔 순수한 무리를, 사람들이 저들의 복잡한 목적에 맞춰 가둬두느라 나는 냄새였다. 냄새는 저마다 정체가 있었으나 코끝에선 그저 똥내였다. 수백 대 일, 수천 대 일. 그 속에 한데 섞여 한낱-으로 증발해버린 시골냄새 밖에서의 설움이 스쳐가고 있었다.

  아버지 생일만 기억하고 있는 번호잠금장치는 단 번에 열렸다. 몇 해 전,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올린 이래로 변함없는 고집이었다. 이제껏 받은 전화 중에 가장 우습다고 생각했던 도둑타령은 이제와 보니 제법 그럴 듯 해 보였다. 나쁜 짓도 진보가 필요한 때에, 요란법석 창을 깨고 철창을 뜯는 건 구식이었다. 며칠씩 현미경을 들고 잠복해서는, 주인이 누르는 숫자들을 집 벽에 새겨두었다가, 네 자리수가 먼저 완성된 집부터 열고 들어간다는 요즘 세상에, 동네 모든 집이 다 아는 번호는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10월 10일은 한 번 알면 잊기도 어려운 숫자였다.

  설 이후 6개월 만에 들른 집은 불편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숙과 자취를 전전하고 있는 뜨내기에게 집은 사치였다. 귀가를 연례행사로 삼은 마당에, 이렇게 불쑥 예고없이 온 일은 공간이나 사람 모두에게 낯선 기록이었다. 불현듯 며칠 전 자취방을 다녀간 어머니가 떠올랐다. 구색은 자취였지만 끼니는 모두 밖에서 해결했다. 그 밖에 빨래방, 목욕탕, 미용실, 열 걸음 안에 닿는 혜택들은 지갑하나면 모두 해결돼서 지하 자취방의 목적은 잠이 전부였다. 쌀을 가져와 봐야 그대로였고 김치며 나물은 쉽게 썩어나갔다. 생색도 보람도 찾을 수 없는 모성애 때문에, 내 방에 온 김에 이모네 잠시 들르셨던 어머니는 이제, 이모네 갈 일이 있을 때에야 내 방을 둘러보고 내려갔다. 그마저도 따분해서 새로 이사를 했을 때 정도였다. 아들이 사는 모양새나 겨우 파악하고 간 어머니는 지하방을 고층 오피스텔 원룸으로, 전과목선생님을 인기강사쯤으로 마을에 전했다. 아들의 기를 위해서였다. 그나마 원래 것에 보태 만든 어머니는, 아주 헛것이나 만드는 아버지보다는 당당했다.



  오후 네 시, 집은 비어있었다. 거실과 안방을 훑고 옥탑보다 더 주인 행세 못할 내 방으로 건너가 책장을 뒤졌다. 다 채우지 못한 앨범 몇 권이 버티지 못해 쓰러졌다. 둔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자리,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도 가물거려 잃었다한들 티도 안 날 자리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곳만큼은 내가 확인해야 할 공간이라고 소리쳤다. 수일 뒤까지 정확한 피해신고를 해야 하는데, 누락되면 네 책임이라는 협박과, 부모가 강도를 당했다는데 아들놈이 이따위라는 한탄도 터졌다. 좀도둑이 언제 강도로 돌변했는지는 아버지만 알 일이었다.

  매트가 드러난 침대 위, 유행이 지나 이제는 못 입는 옷이 전부인 옷장에도 기별을 넣었다. 볼품없는 살림살이에, 동정으로 두고 간 것이 있지는 않을지 챙겨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과 제일 멀리에 놓인 책상은 이 방이 가진 마지막 가구였다. 책상 서랍에는 말라비틀어진 물감이며, 조카들이 두고 간 크레파스와 색종이 몇 장이 기댈 곳 없이 구르고 있었다. 위에 얹힌 두 개의 서랍을 휘젓다가 마지막 남은 서랍을 잡았다. 드르륵-을 예상하고 당겼던 힘이 탁탁-하고 애를 먹였다. 손끝에서 덜컹이는 세 번째 서랍은 두 번째 서랍만 자꾸 밀어냈다. 떠밀린 서랍을 마저 뽑아 의자 위에 올리고, 이 빠진 서랍장에서 마지막 것을 끌어냈다. 그제야 마지막 서랍은 더위에 늘어진 동물의 혀 마냥 쭉 뻗어 나왔다. 속내를 숨겼던 혀 위에는 가지런히 놓인 칼이 보였다. 무쇠식칼부터 과도까지. 주방에서 건너온 칼은 총 다섯 자루였다. 넣고 빼기 수월하도록 칼자루가 서랍의 바깥쪽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무뎌졌거나 다시 세워지길 반복한 날은 안쪽을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낯선 집안의 눈에 익은 풍경은, 수년 전 누나와 내가 생각해냈던 위장술, 집에 싸움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망할 연놈들,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아버지는 잡히는 족족, 오래 잡아두지 못하고 던지기 시작했다. 장에 다녀오는 날이면 있는 풍경이었다. 벽에 붙은 표적은 아까부터 그대로였지만 한 번을 명중시키지 못한 아버지는 분에 겨워 소리쳤다. 벽으로 몰린 어머니는 물건이 날아올 때는 몸을 바싹 웅크리고, 소리가 날아올 때는 아버지를 향해 두 손을 비볐다. 공수교대는 꿈도 못 꿀 싸움이었다.

  "이 연놈들은 어디 갔어, 아버지가 오셨는데! 교육 참 잘 시킨다. 이년아!"

  아버지는 자신을 뺀 모두가 연놈인 찰나에도 가장이라는 사실은 꼭 기억했다. 그만큼 절실히 우리를 찾는 때도 없어 반가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누나와 나를 방에 넣고 문부터 잠그라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문틈에 어른거리는 네 개의 눈은 신기루쯤으로 생각했는지 아버지의 재촉에도 잘못했어요, 말고는 말이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재떨이에 맞고 컵에 맞아서도 소리 한 번 않는 어머니를 독립투사만큼 존경하거나 끔찍해했다. 어머니에겐 자식을 지우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집어들 수 있는 무게가 동이 나면 아버지는 달려가 주먹질을 시작했다. 신기루 같은 눈앞에서였다. 고문 탓인지 시선 탓인지 물은 적은 없었지만, 매를 맞던 어머니는 이내 맨발로 집을 뛰쳐나갔다.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때부터였다. 뛰쳐나간 어머니의 뒤로는 신을 신은 아버지가 쫓아나갔다. 아버지는 꼭 돌아올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터였지만, 신을 챙겨 신는 건 아버지였다. 멀리, 빨리, 더 멀리. 누나와 나는 마음을 졸이며 앞선 걸음을 응원했다. 물론 그 발로는 그른 여행길이었다. 나간 지 십 분이 못돼 머리채가 잡혀 돌아온 어머니는 돈이 생겨 마신 술 때문에 맞고 또 맞았다. 신을 두고 떠나려 했던 어머니의 고집은, 아버지가 장에 물건을 내가는 날, 문 앞에 미리 신발을 챙겨둬 봐도 꺾이지 않는 일이었다.

=  그렇지 않은 날에 어머니는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가로등 없는 두둑 아래 숨어 있다가 운이 좋아 잡히지 않은 날, 밤을 보내는 곳이었다. 가보처럼 내려온 옛날식부엌은 흙 위에 지붕만 얹은 바깥이었다. 어머니가 몰래 신을 가지고 갈 것이 두려웠던 나는 새벽에 어머니를 찾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우리 방까지는 기척이 닿지 않아서 떠난다고 해도 배웅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엄마 어디가, 아니 안가. 맨발로 군불을 지피던 어머니는 흙에 누워 나를 배 위에 올리고 등을 도닥였다. 둘 다 잠이 들지 못하는 밤이면 날이 밝도록 되풀이되는 대화였다.

  책상 서랍에 칼을 넣어두는 일은 누나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신문을 감아 서랍 깊숙이 들인 칼 위에는 공책과 필통, 누나의 속옷이 쌓였다. 위치를 찾는다 해도 아버지가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것이어야 했다. 해가 지나, 누나가 챙겨 입는 속옷이 두 가지가 되었을 때 위장은 더 튼튼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것은 나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방패였다. 칼과의 숨바꼭질은 어머니가 다시 안방에서 자는 날까지 계속됐다. 어머니에게도 철저히 비밀인 놀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칼이 더 간절한 건 어머니였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끝내 믿을 수 없었다. 칼을 찾아 주방을 뒤적이던 어머니는 우리의 비밀이 끝날 때까지 콩나물무침과 달걀부침을 상에 올렸다. 칼이 필요하지 않은 음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동안 아버지는 칼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칼을 손에 쥔 적도, 찾으려 부엌에 들어선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직접 보거나 겪은 독립투사와 신기루만 알 수 있는 가능의 위험성이었다. 칼이 책상서랍을 차지한 진짜 이유는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에 있었다. 잠재는 위험했고, 가능의 횡포는 사실보다 두려운 공포였다. 농후한 가능성 앞에 어머니가 위장에 동참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후로 5년. 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된 어머니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시작했다.

  거실에 난 창을 열자 바람을 타고 민트 향이 밀려왔다. 동네에서 시골냄새를 가장 많이 만드는 어머니가 마을길을 따라 심은 허브였다. 산중턱의 냄새는 다리 건너 집들까지 닿은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언제라도 침범 가능한 냄새를 수백 포기의 향기로 덮고 싶어 했다. 마을에 축사를 허락한 이웃에 대한 사과문이자 평생을 묻혀 산 똥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민트는 못 본 새 무릎만큼 자라 비가그친 바람에 한들댔다. 비닐하우스에 갇힌 수억 원 어치의 국화보다 살아있는 향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기약 없는 초대장을 보내는 조카에게 새로운 시골냄새를 선물하고픈 순간이었다.

  내가 집에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컴퓨터 속에 누나의 주소는 어디로 나와 있냐고 물었다. 나라로 시작해 번지수로 끝나는 문장을 대라는 것이었다. 나는 꼬부랑글씨는 누나의 유학시절 이름이고 뒤에 붙은 숫자는 누나의 생일이라고 몇 번을 써보였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이해하지 않았다. 받는 이곳이 있으면 보내는 저곳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어머니의 말은 반박할 수 없는 진리였다. 누나가 컴퓨터 안으로 살러 간 것이 아닌 이상 어머니생각은 그랬다. 부모가 촌로라고, 눈 살살 속여 가며 숨어있는 자식이나 숨겨주는 자식이나 진작부터 필요 없었다고 고함치는 아버지에 비하면 얌전한 투정이었다.

  어머니는 혼자 남은 자형을 천하의 호래자식이라며 경멸했다. 갈필 못 잡고 가족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 놈이라고. 남자가 배포 없이 끌려 다니며 남에게 퍼주느라 가여운 것들만 타지로 내몰렸다고 가슴을 쳤다. 하지만 누나의 원대로 남이 된 마당에, 남으로는 한 달도 살아보지 않고 급하게 떠날 이유는 누나에게 없어보였다. 우리 가족을 형태로 지킨 것은 아버지일까 생각했다가, 지긋한 바닥과는 아무런 의무관계 없던 유학시절이 제일 행복했다는 누나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형 밑으로 호적 정리가 되던 날, 누나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하지만 다시 자형에게서 떨어졌을 누나의 이름 석 자는 서글펐다. 위장술만 믿고서, 머리가 큰 뒤로는 밖이 편했던 나와 누나는 비겁했지만 이혼만 하지 않으면 가족이라 믿는 어머니는 비참했다. 나는 어머니가 빨리 누나가 떠난 다른 이유를 찾길 바랐다.

  돌잡이 사진은 아직도 거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새긴 메달과 상장 몇 개가 양 날개였다. 돌을 맞은 아이는 실타래를 들어 침을 묻히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시선은 늘어진 실타래에 반쯤 걸린 연필이었고, 오른쪽에 선 아버지는 만 원짜리를 아이의 다른 손에 들려주고 있다. 내가 무엇을 잡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불분명한 증거 때문에, 증언 말고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연필을 잡았다는 목격을 한 차례도 번복한 적이 없었다. 태몽은 자꾸 바뀌어 온갖 맹수가 오갔지만 돌잡이는 한결같아서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진을 슥 넘겨본 어머니는 그래서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 했고 그러니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배우지 못한 게 평생 한이 되어서라는 마무리는 협박처럼 들렸다.

=  아버지는 태어난 후 가진 직업이 농민밖에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결혼 후 내놓은 아버지는 더 이상 직업 없이 업으로만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한은 늘 어머니에게서만 들렸다. 칼을 숨긴 날 부엌바닥에서였다. 아무리 풀어내도 풀리지 않는지 아버지는 자주 밭을 갈듯 집안을 뒤집었다. 주체는 있으나 소유는 알 수 없는 아버지의 한은 어머니의 입에서 마를 날이 없었다.

  먼저 기숙사로 들어간 누나의 속옷이 빠지면서 칼은 필통 밑, 신문 아래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 탓에 한 층 옅어진 위장은 혼자 남은 사춘기 중학생에게 더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칼자루를 손에 들고 바들바들 떨던 나는 다음날 손목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고작이었지만, 셈하자면 애꿎은 필통만 꺼내고 서랍을 닫은 날은 훨씬 더 많았다. 정작 본인은 모를 배우지 못한 한과 그 억지로 끼워 맞춘 한이 평생의 한인 싸움터에서 나는 여전히 신기루가 되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벤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을 박은 나는 연필을 쥐고 사춘기를 견뎠다. 나를 살게 한 연필은 어머니가 주장하는 돌잡이의 수긍이 아니라 아버지 삶에 대한 부정이 옳았다.

  "꿈이 뭐니?"

  "서울로 갈 거예요, 가서 성공할거예요."

  "성공은 장소에 따라 오는 게 아니야. 사람에 따라 오는 거지. 선생님 생각에 꿈은 어디를 갈지가 아니라 무엇이 될 지라는 대답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다시 발표해 볼래."

  "그냥 그게 꿈이에요. 멀리 벗어나는 거요. 그러면 성공할 수 있어요."

  장래희망 발표가 있던 날, 선생님은 내 가방에 편지 한 통을 넣어주셨다. 곧장 어머니께 전하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편지가 무거웠던 나는 빈 논으로 들어서서 쌀알을 털고 남은 짚단 위로 올라갔다. 어머니께로 시작하는 선생님의 글자들은 어느 때보다 정갈했다. 나의 서울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시골 혐오증에 대한 걱정의 말이었다. 그 탓에 성공의 정의도 그릇된 것 같아 우려된다는 말은 너무 뜬금없어 우스울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가치가 바로 확립되지 않으면 지금의 월등한 성적도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자신도 더 신경 쓸 것을 약속했다. 성실한 줄만 알았던 나의 발언에 적잖게 놀랐다는 글씨는, 집에서 지도해주시면 어린 마음에 가졌던 생각은 금세 바뀔 수 있을 거라며 마무리됐다. 뭣 모르는 참견,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날이 다 저물도록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수밭을 지나쳐 되돌아 나오는 길, 십 수 년 전 잘게 찢긴 편지가 흘러간 수로에는 장맛비가 넘실대고 있었다. 출렁이는 시골길 운전은 언제나 짜릿했다. 이박사 아저씨가 자가용을 타고 나갔다가 트럭을 타고 돌아온 흙길은 사방이 뚫린 요충지가 맞았다. 제 것을 지키느라 저를 가둔, 서울의 무수한 담벼락은 동네 꼬마들도 우습다며 낙서장으로 만드는 헛것이었다. 직진이 유용해서 아쉬울 것 없는 요새를 버리고 떠난 나는, 지금 땅 위에 권리 하나가 없어서, 땅 밑에 살면서 굴뚝에서 산타클로스를 기다렸다. 나의 희망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였다.

  서울은 밤에 더 빛나는 도시였다. 굳이 밝힌 곳만 반짝이는 서울의 밤은 모두가 동경하는 여인의 S라인처럼 완벽했다. 쪽지하나 남기지 않은 남원 집에서 가지고 올 것은 없었다. 차는 갈 때와 올 때 모든 것이 그대로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잃을 내 것이 아주 없으면 그만이었다. 잊지 않고 챙겨갔던 이사용 박스에는 서랍에서 빼낸 칼만 뒹굴었다. 지금껏 가져오지 않은 것들은 어차피 영영 남겨둘 것들이었고, 완벽한 이사는 처음 떠날 때 진작 이룬 일이었다.

  오후 열한 시, 이중철문은 웬일로 열려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털며 들어선 빌라입구에서, 지하보다 옥탑이 당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철문을 지나 휴대폰 빛 하나로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어둠을 만나면 꺼내드는 휴대폰은 머리에 눌어붙은 경험의 딱지였다. 세상에나, 놀라라. 문소리에 소리를 쳤다가 내 얼굴을 보자 안도를 내쉰 것은 주인아줌마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집주인은 방주인인 내게 물었다. 두고 온 게 있어서 라는 모면은 아무것도 손에 들지 못한 내게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냐는 질문에 아줌마는 옥상에 놓인 고추장 핑계를 댔다. 그릇도 숟가락도 없는 손이 무색한 대답이었다. 빈손만 빤히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아, 미안해요, 하고 아줌마는 사과를 했다. 아이들 학습능력을 확인하거나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을 때 쓰는 높임말이었다. 그게, 정말 미안해요. 그때 엉거주춤 뒤로 감췄던 반대편 손이 내민 것은 다 망가져버린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아휴 이놈의 자식은 그러게, 내일 같이 와서 사과하고 드리자했더니 엄마가, 지금, 얼른, 하면서 어찌나 떼를 쓰던지."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꺼내야할지 고민했다는 말이었다. 밤 열한 시, 내가 옥탑에 올 줄 알고 일부러 기다리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놀라서 묻던 첫인사가 무척 의아해졌다.

  어젯밤 고추장을 푸러 옥탑을 지났던 아줌마는, 문제집 틈새, 제일 안쪽에 꽂힌 윤동주란 이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고 했다. 밤사이 시나 몇 수 읽어볼까 생각이 들었고 책은 그대로 고추장에 깔려 주인집으로 내려갔다. 분명히 말하지만 빌려간 것이었다. 허락 없이.

  하지만 아이들을 재우고 책을 펼친 아줌마는 곧바로 아차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 윤동주의 시집 표지를 본따서 만든 나의 포트폴리오였다. 내일 있을 출판사 면접을 위해 꼬박 보름을 쏟아서 완성한 별놈의 짓이었고,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들 중 고심 끝에 택한 디자인이었다. 단번에 알아차린 아줌마는 날이 밝는 대로 가짜 시집을 옥탑에 가져다둬야지 계획했었다. 빠른 판단력은 폐를 싫어하는 천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침 일곱 시, 영어 비디오를 보던 막내 녀석이 엄마가 어젯밤부터 애지중지하는 그것을 탐내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안돼, 엄마거야, 하고 식탁 옆 전자레인지 위에 놓인 포트폴리오는 내게 얼마나 중요할지 알아서 더 조심스러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안 된다면 더 하고야 마는, 좋은 것은 제가 다 가져야하는 아들은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식탁의자에 올라섰다. 그 후로 한 시간. 내 보름의 시간을 다시 발견한 곳은 거실에 있는 금붕어 어항에서였다.

  금붕어는 막내의 보물 1호라고 했다. 먹이를 챙기는 것부터 어항 청소까지 제 손이 닿아야 울지 않았다. 검은 금붕어를 특히 좋아하고 점박이와 빨간 금붕어는 그 다음이었다. 아이는 뭐든 좋은 것, 신기한 것이 있으면 어항에부터 가져갔다. 제가 가지고 놀던 블록장난감도 넣고, 먹던 비스킷도 금붕어와 함께 나눴다. 한 번은 할머니가 사준 어린이 음료수를 부어 소동을 피운 적도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가 보여주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책 한 권은 굉장한 탐이 됐을 것이라고 아줌마는 추측했다. 놀라서 소리를 치고 책을 꺼내들자 답답했던 금붕어는 꼬리를 흔들며 어항을 누볐고, 아이는 주눅이 들어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의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따끔하게 꾸짖고 큰 애를 시켜 가져온 드라이어로 책을 말리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뜸했던 어항 청소 탓에 바람을 타고 냄새가 진동한 어려운 작업이었다. 물비린내가 넘치는 집은 너무 생생해서 말을 듣는 내내 나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뜨거운 바람에 찌글찌글 울고, 호빵처럼 불어난 종이더미는 다리미로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미안해요, 로 말을 마친 아줌마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내가 고추장을 몰래 가져가다가 깼다면 상상 못했을 얼굴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꾸가 없자 아줌마는 슬금슬금 문으로 다가가 순식간에 옥탑을 빠져나갔다. 별것이라고 생색은, 문소리에 묻힌 말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냄비받침이 되고 말까봐, 방이 아닌 일터에서 마무리 작업을 한 것이 시발이었다. 제대로 펼쳐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종이 뭉치에는 제대로 남은 문장 하나가 없었다. 물속에서 끊기고 흩어졌을 말들과, 물속에서도 여전히 붙어있던 셔츠 등판 위의 글자가 하수구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통로를 공간으로 여겼던 내게는 고향 밖에서의 일이었다.

  휴대폰 화면은 계단을 내려오는 데도 유일한 빛이 되었다. 상자에서 떨어진 감자 몇 알이 발에 치였다. 닫힌 현관문 안에 사는 막내는 내게 한 번도 금붕어에 대해 소개한 적이 없었다. 알파벳 송을 부르며 피쉬라는 단어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어, 고래. 아이가 흥미를 가질 단어들을 덧붙여 가르치다가 영어로 금이 골드거든, 물고기는 피쉬고. 그래서 금물고기, 금붕어는 골드피쉬라고 해. 재미있지, 하고 물어도 눈만 끔뻑였다. 차라리 빨래 중에 아이가 락스를 가져가서 쏟았다는, 그래서 글자가 홀랑 사라졌다는 얘기가 어쩌다 걸린 상황에서는 더 극적일 뻔했다. 망가진 합죽선처럼 부푼 포트폴리오에 대해 설명하다가, 취직에 성공하면 선생님 일은 더 이상 안 할 거요, 선생님? 했던 말은 무심결에 터진 것 같았다. 아이가 원체 선생님을 좋아해서. 아니, 비싼 과외를 좋은 값에 한다고 엄마들 말이 자자해서. 그나저나 이게 이렇게 돼서 일이 어려울까. 얼른 취직이 돼야할 텐데. 얼버무리는 얼굴은 달아올라있었다. 현미경으로도 열 수 없는 이중철문을 뚫은 도둑질은 고향의 것보다 악랄했다. 껍데기는 두고 속만 빼간 일도 그랬다. 며칠 전 포트폴리오 속 글자들을 직접 목격한 어머니를 참고인으로 부를까 하다가, 피고를 정하지 못해 그만두었다. 도둑은 갖은 게 많아 훔칠 게 많은 곳에서 더 극성이었고, 어차피 의심이란 일방적인 것이었다.

  열두 시가 지나도록 어머니의 전화는 없었다. 손맛 좋다고 평이 났던 어머니는 요즘, 밥을 한 것을 잊고 또 밥을 짓는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사라진 밥 한 공기, 칼 몇 자루로 나를 감지하기엔 어머니의 건망은 꽤 유난스러워져 있었다. 내가 1층에 닿았을 때쯤 이중철문은 쇳소리를 지르며 닫혔다. 나는 빌라입구 갈림길에서의 선택을 후회했다.

  지하방 문을 열며 건 여자 친구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면접 전날이면 잊지 않던 응원메시지도 아직은 감감이었다. 축축해진 옷을 벗어들고 들어선 화장실에는 락스물에 담가둔 셔츠가 새하얀 천뭉치가 돼있었다. 하얗게 변해버리기는 예감이 좋다던 여자 친구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화를 들고 통화버튼과 종료버튼을 번갈아가며 눌렀다. 여자 친구가 전화를 켰을 때 문자로 도착할 부재중전화의 개수, 내가 졸인 애간장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다섯 번 정도를 채우고 나서 전화기는 방구석에 던져졌다.

  온 하루가 허망해져 고단한 몸이 하품을 밀어냈다. 그 끝에 돋은 눈물은 고이지도 흐르지도 못할 만큼 작았다. 내내 입을 뻐끔거리는 금붕어도 하품을 할까. 어릴 적,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입 벌리는 금붕어를 볼 때마다 근처의 모든 불을 꺼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 탓에 나를 만난 금붕어는 낮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었다. 먹이를 먹을 때도, 수초를 헤치면서도 뻐끔거리는 게 일인 금붕어야 하품을 한다고 해도 정확한 의미는 저들만 알 일이었다. 그것은 무수한 하품 속에 녹아갔다는 모두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금붕어 두어 마리를 사다가 정글에 풀고서, 주인집 막내와 현장학습을 해볼까 계획하다가, 그러려면 취소했던 수업들부터 다시 잡아야지 생각했다. 한두 그룹을 더 늘리는 일은 아이들을 통하는 게 나았다. 친구가 많은 준성이와 형제가 많은 채영이를 선두로 전화를 돌릴 순위가 정해졌다.

  비와 섞인 바람이 천장에 닿아 반쯤 드러난 창을 흔들었다. 공기를 떠도는 실체와는 관계없이 내 체감에 따라 요란하거나 잔잔한 기별이었다. 다음 기별이 닿기 전, 바람이 지난 자리는 늘 고요했다. 쓸렸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의 것만 고스란히 남아서였다. 두 번째 하품을 몰아낸 나는 평소버릇대로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을 엄지손톱으로 뜯으며 잠이 들었다. 꿈도 아쉬울 것 없는 단잠이 밀려오고 있었다. <끝>

  ●에드워드 불워 리턴(19세기 영국의 소설가이자 정치가) 作, 연극 '리슐리외(Richelieu)' 대사 인용


  <당선소감>

   "사람사는 얘기들으면 글쓰고 싶었어요"

  신문사에 원고를 내는 날, 연평도 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난리통에 원고를 안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괜히 슬퍼서 오래 기억될 것 같았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리는 눈을 보고는 핑 하고 눈물이 돌아서 울었습니다. 지금껏 맞이한 겨울 중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이어서 영영 잊을 수 없는 날이 됐습니다.

  소설을 처음 배울 때 ‘허구’라는 판서를 그대로 공책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알게 되면서는 그 말을 고쳐 놓고 싶은 욕심이 자꾸 들었습니다. 삶을 보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소설이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 둔 주인공의 얼굴이 수십 입니다. 제게 소설은 현실이고 삶이었습니다.

  우선 제 현실에 꿈같은 날개를 달아 주신 박상우, 하성란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를 있게 한 부모님, 동생들과 가족들 사랑합니다. 늘 빛이 되어 준 싼타, 얄리들과 샹해친구들, 지구방위대, 단어와 싸우는 고독한 시간이 외롭지 않았던 것은 당신들 덕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매년 대한민국 안과 밖에 사는 문청들은 씁니다. 다해 봤자 고작 10여석 남짓한 자리를 두고 수년을 쓰고 또 씁니다. 많지 않은 나이에 덜컥 받아 든 무게가 두렵지만 앞으로 쓸 수 있는 날이 많은 젊은 날이라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 1983년 서울 출생.
  ● 덕성여대 회계학과 졸업.
  

  <심사평>

  "작가의 미래적 가능성’에 높은 점수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2편이었다. 예년에 비해 응모작의 수가 많았기 때문인지 예심 통과작의 수준도 전년에 비해 많이 향상됐다. 본심 논의를 통해 일차적으로 〈외면의 시대〉 〈분재, 섬 소사나무〉 〈물고기 하품〉 〈닭〉 〈신도시개발구역〉 〈송하주〉를 골랐다. 그것을 놓고 다시 논의를 해 〈물고기 하품〉과 〈송하주〉가 최종 심사 대상이 됐다. 심사과정에서 〈신도시개발구역〉 〈닭〉도 가능성을 인정받았으나 작품의 소품적 구성과 사적 영역의 지나친 부각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물고기 하품〉과 〈송하주〉는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작품의 현재적 완성도와 작가의 미래적 가능성을 놓고 고심하게 만들었다. 완성도는 〈송하주〉가 낫지만 미래적 가능성은 〈물고기 하품〉 쪽에 있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뜻을 같이했다. 결국 지나치게 모범답안적인 〈송하주〉보다 〈물고기 하품〉의 미래적 가능성을 열어 주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 〈물고기 하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물고기 하품〉은 ‘나 / 세상’ ‘촌 / 서울’의 대립구도 속에서 열정을 잃지 않고 삶을 견뎌 내는 다난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갈등과 대립에 대한 선명한 해석의지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미래적 가능성의 단초로 읽혔다. 소설적 입심에 튼실한 문체가 보강되면 좋은 작가가 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 박상우, 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