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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비단길 / 김경나

  노인이 냄새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끄응, 노인이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화장실의 깊은 악취가 바람을 타고 내가 있는 곳까지 흘러 들어왔다. 가슴이 땀에 푹 젖은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차가 오고 있니."

  문을 반쯤 열어두고 있으면서도 노인은 자꾸 내게 물었다. 땀에 젖은 흰 머리카락이 이마에 내려와 들러붙었다. 바람이 또 불어왔다. 사주 봐드립니다. 빈 사과 박스를 뜯어 쓴 글자가 바람에 쓰러져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빈 공터 옆 수돗가에 앉아 메밀 국수를 끓이던 나는 고개를 들고 국도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길엔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는 길이 보였다. 논과 밭으로 이어진 국도변은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노인과 내가 있는 곳은 폐업한 자동차공업사 안이었다. 노인이 이곳을 사거나 임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나가다 텅 비어 찾아든 것이다.

  쌀이 떨어진 지가 꽤 되었다. 국수에서 옅은 진흙 색깔 물이 우러났다. 나는 국수가 익었는지 한 가닥을 잡아 끊어 먹어보았다. 잘 익었다. 씻어낸 국수를 양은냄비에 담고 찬물에 담가둔 병두유를 국수 위에 부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콩국수였다. 지팡이를 든 노인이 검은자위 없는 눈을 불안하게 뜨며 화장실을 나왔다. 변비 때문인지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나는 손님들에게 맛보이려고 잘라 놓은 수박에서 한 점을 떼어 노인의 국수 안에 넣었다.

  "곧 장마인데 너는 걱정도 안 되느냐. 장마가 지면 손님들은 찾질 않는다."

  "손님도 안 오는데 수박을 팔라고요?"

  나는 삐딱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남자 앞에서는 더 그랬는데, 그 버릇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곧 큰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수박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노인은 공업사 마당에 수박을 쌓아놓고 길을 지나는 손님에게 팔았다. 그것으로 수박점도 치곤 했다. 하지만 노인의 신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가끔씩 정신은 딴 곳에 있었다. 며칠 전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 과부라는가 하면 아들이 대학 입시에 붙겠느냐고 묻는 손님에게 곧 죽을 운이니 큰 굿을 하라는 말도 했다. 주역, 당사주, 명리학 같은 점들이 있는데 누가 수박점을 보러 올까. 그래도 간혹 나같은 사람이 있긴 했다. 이곳에 처음 온 날 노인에게 점을 쳤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던 손님도 너를 보면 도망치겠구나. 분을 바르거라."

  눈 먼 노인은 앞을 다 보는 듯 이야기했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북어처럼 꾸덕꾸덕 마른 걸레를 주며 먼지를 뒤집어쓴 수박들을 닦으라고 했다. 기울고 있는 해이지만 아직 따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노인의 그림자는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 같은 그림자를 나는 애써 외면했다.

  노인이 수돗가에 빈 그릇을 내려놓고 앉았다.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 호스에 머리를 갖다 댔다. 그러더니 물 수압이 낮다며 투덜거렸다. 차가 오느냐고 노인이 금방이라도 물을 것 같아 나는 국도 길을 바라보았다. 앉아 있던 노인이 일어나더니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지팡이로 퉁퉁 두드려보고는 천천히 들어갔다. 변기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변기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노인이 한손으로 변기 밸브를 내리자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기분이 좋은지 아 시원하다, 라고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설거지 그릇들을 그대로 둔 채 쌓여 있는 수박들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나도 모르게 노인을 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 오고 있느냐, 또 내게 물을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검은 선까지 읽어야 한다. 눈이 있으니 넌 그것까지 봐야 해."

  머리에 묻은 물을 화장실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노인이 말했다. 능구렁이에다 순 사기꾼이라고 한 번은 내가 쏘아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노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끄응, 소리가 또 들려왔다. 나는 골라놓은 수박 위에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선을 들여다보았다. 노인은 점칠 때 하우스 수박이 아닌 노지 수박을 꼭 썼다. 수박 속에 박혀 있는 검은 씨들을 점자 읽듯 손으로 더듬어가며 손님의 사주를 읽곤 했다.

  "생긴 모양으로 사주를 읽고 있구나. 갈라보기 전에는 그 안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야. 안을 봐야 한다. 수박 속은… 끄응, 그 사람의 살아온 길이니까. 물론 사주를 잘 타고 난 사람도 있다."

  나는 못들은 척 노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박은 그저 먹을만 하지만 어떤 것은 끄응, 쉰내를 풍긴다. 속은 괜찮은데 껍질이 두꺼운 것도 있어. 꼭지가 떨어진 것도 있고 백태가 낀 듯 허옇게 보이는 먹지 못할 것도 있다."

  수박을 반으로 갈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촘촘하게 씨가 박혀 있었다. 씨들은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처럼도 보였다.

  "씨가 없는 수박이 나올 때는 끄응, 그 사람이 곧 죽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게 좋다. 가만있어야 해. 자칫 다칠 수가 있다. 죽으려고 하는 자는 물귀신처럼 상대를 끌어가지."

  나는 크고 겉모양새가 좋아 보이는 사람들보다는 어딘가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나 같은 사람들을 더 자주 보아왔다. 내 가족들이 그랬다. 팔려고 내놓은 수박처럼 국도변에 모여 있으면 아무도 사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꼭지조차 잃어버리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한 수박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려보았다. 수박에도 마음이 있겠지.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차가 와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샛길에서 차가 한 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이 피어나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 있던 노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끄이익. 낡은 봉고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졌다. 볼이 부어 보이고 얼굴빛이 좋지 않은 사내였다.

  "수박이 달고 맛있다오."

  가늘게 몸을 떨며 노인이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이 공업사 노인이 임대한 거 아니면 창고 하나 씁시다. 다 같은 처지 아니오."

  갑작스런 말에 노인이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벌써 반 정도 남은 쌀 포대를 수박들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사내가 봉고차 안에 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힘이 드는지 식은땀을 흘렸다. 다 떨어진 침낭과 가방 몇 개뿐인 데도 그랬다. 사내가 창고 안에서 나온 것은 한참 뒤였다. 간판을 든 사내는 낡은 의자를 가져와 그것을 발판 삼아 봉고차 위로 올라갔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성인용품'. 노인은 사내가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봉고차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노인이 알고 있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바람에 화장실 문이 텅, 하고 닫혔다. 다행히 노인은 그 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이 나올 듯하다 다시 들어갔다. 노인이 또 몸을 떨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나는지 중심을 잃을 것 같던 노인이 내가 있는 수돗가 쪽으로 위태롭게 걸어왔다. 땀에 젖은 노인이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겁이 덜컥 났다. 노인의 말문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소정아."

  붙잡힌 손목을 노인의 손에서 빼냈다.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버지였다.

  "네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노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질 않았던가. 내 마음속 같은 어둠이 수돗가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만나게 되면 갑자기 나는 기운이 빠졌다. 신기가 들어온다며 노인이 아버지 목소리를 곧잘 내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붙잡아두고 싶어 노인이 아버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같이 살지 않아 나는 아버지 목소리도 몰랐다. 그래도 노인의 목소리가 싫지 않아 나는 그대로 듣곤 했을 뿐이었다.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다시 내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림자를 거울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일까. 거울 같은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너무 들여다보아 거울 안에 들어 있던 내가 떠나버린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내 자신은 이미 떠나고 없고, 거울에 비친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인 것 같았다.

  노인의 몸 떨림이 다행히 잦아들었다. 더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표정 없이 쭈그리고 앉아 그릇들을 찬물에 씻었다. 흘러나오는 물에 엉덩이 부근이 젖어들었다. 몸이 추웠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랬다. 노인이 휘청거리며 수도 호스를 잡아 또 머리에 갖다 대고 있었다. 얼굴이 다시 피어났다. 노인이 웃자 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 나는 노인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는 어딘가 정신 나간 짓을 해도 나이 많은 노인은 아버지처럼 나를 버리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겠지. 나에게 있어 노인이란 뜻은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라는 뜻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었다. 왜 세상의 아버지들은 젊은 것일까. 죽어서까지도 힘이 센 존재는 내 아버지뿐인 듯 했다. 노인은 음메에에에, 우는 하얀 양같이 나를 가끔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노인과 있으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한 여자처럼 노인을 무작정 믿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착한 여자란 말이 싫었다. 착한 여자란 말이 나는 꼭 기다리는 여자라는 뜻 같았다. 그래서 나쁜 여자가 되는 게 더 좋았다. 나쁜 여자란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어쩐지 흑과 백 같아서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다만 떠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나 자신에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친하지도 않은 노인과 왜 이곳에 있는지 그런 의문이 일어났다. 그날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쯤에 가 있을까. 가지 못한 목적지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날 나는 화장실이 급했었다.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고 말았다. 헤드라이트를 켠 버스가 묵은 트림 소리를 내며 사라져갔고, 그 순간 바람을 타고 낯익은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고향의 풀냄새였다. 마음 깊은 불안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풀숲 한가운데 있는 화장실은 다 죽어가는 듯 쿰쿰한 냄새를 풍겼다. 삐걱이는 문을 열었다. 독한 기운이 눈으로 파고 들어왔다. 문이 닫히지 않아 나는 열어둔 채 변기에 쭈그리고 앉았다. 구석에 한 뭉치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오돌토돌한 느낌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은 점자였다. 누가 점자책을 찢어 화장실 종이로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일까.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국도변은 불빛 한 점 없었다. 고장난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대나무가 보였다. 하늘로 뻗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내 잠이 깼으니 사주나 보고 가."

  수박점 치는 노인이었다. 고향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는 맹인 점쟁이였다. 발밑에서 딸각, 하는 소리가 났다. 돌이 내는 소리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소리가 나는 돌을 바닥에 깔아둔 것일까. 막차가 올 때까지 한두 시간 기다리느니 점을 볼까.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사주는 점쟁이의 기가 맑은 아침에 보는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아픈 게 아홉수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수박점은 어떻게 치는 것일까. 이제 서른을 넘어선 지금 나는 대나무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세상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점을 보려고 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기운을 드러내 보이고 답까지 준다는 말인가. 나를 세상에 내놓은 어머니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수박을 한 통 들고 와."

  수박 값은 따로 내야 한다고 했다. 조금 전에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공업사 앞으로 수박들이 만들어낸 듯한 작은 산이 보였다. 모양이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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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 안은 어두웠다. 그 안에 또 작은 방이 하나 있는 게 보였다. 정자체로 쓴 글씨 종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수박 씨로 당신의 운명을 점칩니다.'

  나는 전등 스위치를 켰다. 좁은 방 안에서 예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기다렸다. 솜이 터져 나온 방석 위에 앉았다. 나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다. 불에 그슬려 끝이 오그라든 플라스틱 큰 쟁반이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딘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라곤 방 안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수박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조용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싸고 흔한 음식처럼 어려서 질리게 먹었던 것이다. 답을 보기 위해선 그러나 참아야 했다. 근방에서는 그래도 유명한 노인이었다. 문득 노인이 띠와 태어난 시를 물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 같았다. 노인은 점자책도 보면서 신기로 수박점도 친다고 했다. 점자책을 펼친 노인이 또 헛기침을 했다.

  "무엇이 궁금해 왔니."

  노인은 반말이었다. 어두운 방안 때문에 나도 모르게 더 긴장이 되어 목소리가 잠겼다. 하지만 신기를 보고 싶어 말을 아끼는 것도 있었다. 노인이 내 수박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직 반으로 가르지도 않았는데 살아온 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노인이 수박을 반으로 갈랐다. 씨들 사이로 붉은 속살이 길을 내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약간의 백태가 있는 창백한 인생, 손수건으로 닦아내어도 또 다시 젖던 어머니의 인생 그리고 내 인생….

  "다른 여자가 있어."

  나는 참고 있던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 말은 오래 전에 어느 점집에서 어머니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처럼 노인의 말을 믿는 척 하며 믿지 않았다. 사랑은 거대한 도시처럼 나를 집어들어 삼키곤 했다. 왜 나는 혼자가 되어 부메랑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차를 타보니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가족도 고향도 잊은 채 지내오질 않았던가. 얼굴이 바람에 쓸리듯 시렸다. 고향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일까.

  "사막으로 가고 있군."

  다른 사람도 아닌 노인에게서 들으니 쓸쓸함이 더 밀려왔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수박의 씨들을 점자 읽듯이 짚어나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마음속에 떠올렸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노인의 말 때문이었을까. 내 가슴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노인의 검은자위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수박 씨 두 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싶었다. 나는 반으로 갈라진 수박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씨 안에 선인장이 보이고 노인의 눈에서 모래 같은 점자가 보였다. 점자 같은 모래언덕이 사막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무실 안 창문에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어두운 구름뿐이었다. 별과 달이 보이지 않았다. 비단길로 향하다가 왜 이곳으로 흘러들었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나 자신도 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서른 둘을 짊어진 내가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서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었으므로 이제 나가야 했다. 곧 버스가 올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유열(幽咽)한 인생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어쩌면 누군가 내가 떠도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도 같았다. 버리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줄 보금자리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아침부터 물이 나온다고 했으니 우선 수돗가에 있는 물로 쌀을 씻어라."

  어느새 노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집에 가야 해요."

  "집이 어딨다구. 화장실을 깨끗이 해놓아라."

  "가야 한다니까요."

  "넌 운명이 나와 얽혀 있으니 어디로 갈 생각은 말아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나. 지금 나간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바람이 휘잉 소리를 내며 나를 밀어냈다. 어쩌면 이제 내가 어머니를 어딘가에 버려두고 있었다.

  "씨앗은 땅에 뱉어야지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느냐. 나와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뜬 별과 달도 나를 버리고 떠난 것 같았다. 나의 떠돎은 종착역이 있을까. 나는 지쳐 있었고 배가 고팠다. 나는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넌 운명이 나와 얽혀 있으니 어디로 갈 생각은 말아라.' 노인이 했던 말이 나에게는 너를 버리지 않으마, 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버스가 내게서 떠나고 있었다.

  "차가 오고 있니."

  수돗가에 앉은 노인이 또 내게 물었다. 귀찮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석 달째 나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아니 내가 어쩌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노인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버스가 두어 대 지나갔다.

  사내가 창고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고장난 물세차기 앞에서 멈췄다. 그것은 가동되지 않는 고물이었다.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연장통을 들고 나왔다. 이제 창고를 치우는 것도 잊고 물세차기를 고치겠다는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손전등을 비추어 주거라."

  노인이 말했다. 어둠이 자동차공업사를 감쌌다. 나는 컴컴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물건들은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손전등을 켰다. 빛이 나의 턱을 타고 쭉 올라왔다. 거울 속의 나는 나쁜 여자였다. 손전등을 끄자 거울 속의 나는 사라졌다. 몇 분도 안 되어 사내가 물세차기를 고쳤다. 국도 길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한 장씩 뜯어져 있던 화장실 안 점자 종이가 바람을 타고 공업사 마당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누구의 인생이 바람에 날아가다 떨어져 마당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일까. 손가락으로 볼록한 부분을 더듬었다. 꿈인 듯 다시 눈앞으로 사막이 보였다. 낙타들이 네 다리로 사막을 읽어나가며 터덜터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뱀과 선인장도 있지만 나는 사막에 살고 있는 것들 중에서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인 사구가 마음에 들었다. 사막의 점자였다. 사구는 곰보자국이 있는 노인의 얼굴 같기도 하고 송송 뚫린 내 가슴 속 같기도 했다. 바람이 내 얼굴과 가슴을 휩쓸었다. 어느 순간 잠잠해지면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고요는 계절처럼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모래들이 깊은 곳 안으로 들어와 욕망처럼 나를 흔들었다.

  손전등으로 국도변을 비추어보았다. 다시 턱을 향하여 손전등을 올려보았다.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껐다. 탁, 하고 켜자 국도변 샛길 풀들이 놀란 듯 더 불쑥 자라났다. 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톱만한 불빛이 하늘거리며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반딧불이였다. 뒤를 돌아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가스버너 위에서 라면이 끓었다. 양이 많아 보이게 하려고 뚜껑을 일부러 열지 않은 채 면이 불기만을 기다렸다. 가스버너 불을 껐다. 하지만 라면에 넣을 계란도 파도 없었다. 어제는 호박을 따려다가 밭주인한테 모진 욕을 들었다. 오죽하면 뭔가를 넣고 싶은 마음에 풀이라도 뜯어서 넣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나마 사내가 준 쌀로 밥을 반 냄비 해놓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노인이 나오고 있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어디 있는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봉고차 있는 곳을 흘낏 나는 바라보았다.

  "라면이 불었지 않니."

  노인이 큼큼, 냄새를 몇 번 맡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사내가 봉고차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붙들고 있었다. 속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내는 화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했던지 걸음을 늦추었다. 첫인상도 어딘가 장이나 간 쪽의 건강이 안 좋아보였다. 죽을 끓여줄 걸 그랬나 싶었다. 얼굴은 호랑이도 잡아먹게 생겼는데 어찌된 일인지 몸은 부실했다. 그때였다. 젓가락을 든 노인이 젓가락을 놓치는 것이었다. 노인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진동으로 눈까지 뒤집혔다.

  "소정아."

  "라면이나 먹어요."

  나는 퉁을 주었다. 노인은 나와 있을 때만 신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가 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하나 찾아 꺼내왔다. 사내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뜸이 덜 든 뜨거운 밥을 몇 수저 퍼서 물에 섞어 버너 위에 올렸다. 끓다가 언제 불이 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맨밥보다야 나았다. 사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거나 딱히 가야할 이유도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에게 죽 그릇을 들이밀어 주었다.

  "고맙소."

  사내가 말했다.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하는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갑자기 생각난 듯 또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 비운 그릇들을 치우려는데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모처럼 배불리 밥을 먹은 날이었다. 노인은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옆 수돗가에 앉아서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했다.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 왔는지 사내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를 지나친 사내가 노인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밥을 잘 먹었다는 감사 표시인가? 생각보다는 예의가 있는 사내였다. 비디오 같았다. 하긴, 사내가 줄 것은 이것 밖에 없을 것이었다.

  별이 뜬 밤이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노인은 일찍 잠이 들었다. 노인이 낮에 비디오 제목을 내게 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헛기침만 연방 할 게 뻔했다. 정작 그 비디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나였다. 소리를 줄이고 전등을 껐다. 볼륨을 더 줄였다.

  화면은 차 안이었다. 남녀가 그 안에서 서로 진한 애무를 하고 있었다. 불 꺼진 사무실 창문 밖에서 별이 나를 향해 눈웃음을 치는 것 같았다. 화면이 차 밖을 비추었다. 어? 나도 모르게 그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보이는 비디오 화면도 공간이 세차장이었다. 물론 화면 속 세차장은 지금 내가 있는 곳보다 현대식이고 깨끗했다. 공간이 세차장이라서 그런지 화면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화면 속 여자가 차안의 등을 켰다. 그러자 화면 속의 남자가 말했다.

  '전등 꺼.'

  '너무 어둡잖아.'

  물세차기 소음이 여자와 남자의 말을 삼켰다. 큰 소음이 났다. 비디오 속 남자가 여자를 깊숙이 누르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들고 죽은 닭처럼 있어. 남자가 또 말했다.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걸레들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누가 무엇이 흔들리는지 모를 정신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몸 또한 젖어들었고 그때 노인이 몸을 뒤척였다. 볼륨을 더 줄였다. 국도 길에 널려 있는 돌처럼 지내왔던 나였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니 갑자기 술 마신듯 몸이 달아올랐다.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공업사 뒤 ㄹ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악취가 풍겼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깊고 아득한 웅덩이 같았다. 따뜻한 몸만큼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있을까. 몸과 몸이 포개지면 많은 것들이 흔들리면서 일렁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만큼 사람을 붙잡아두는 것이 있을까. 나는 어쩌면 그 사랑이 두려워 더 멀리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변기 안으로 몸을 깊숙이 숙이고 아아아, 메아리 소리를 내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대답하는 것도 같았다. 몸이 또 달아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술기운이 빠지듯 충동도 서서히 가라앉겠지. 가라앉는다는 생각이 또 나를 서글프게 했다.

  포르노 비디오는 '순간'이 지나면 그 뒤부터는 지루해졌다. 예전에 이런 비디오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화면 속 모습도 어쩐지 슬펐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비디오 속 남녀는 어찌나 남을 속일 줄 모르던지 그들은 마치 지겨운 직장에 출근한 사람들 같았다. 몸을 섞으며 나오는 남녀의 신음은 삶의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바뀌었었다. 지금 화면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남녀 주인공도 어쩐지 내 귀에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이 들려왔다. 아직도 내 몸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약도 아니었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슬픈 비명을 듣고 있을 사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밤은 길었고 눈이 감기지 않았다. 별처럼 사내들을 하나씩 헤아리며 잠이 들고 싶었다. 잠이 깊이 들지 않아 자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또 잠들었다. 비디오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비몽사몽 상태에서 눈을 뜨니 비디오는 꺼져 있었다. 신음소리는 꿈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아직 아침은 아니었다. 별들도 잠든 새벽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인이 검은자위 없는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여명이 노인과 나를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노인도 깊이 잠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노인은 늘 같은 눈이었다. 그래서 변함이 없었다. 화면을 보지 못해 소리만 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 한 켠이 시렸다. 노인은 거울 앞에 앉아 더러운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창문이 닫혀서인지 방안은 퀴퀴한 냄새도 나고 더웠다. 노인이 입을 달싹거렸다.

  "내 마음을 아니?"

  나는 듣고도 안 들은 척 했다. 죽어서야 나는 몸이 따뜻해질 것 같았다. 다른 죽은 이들은 차갑게 식어 있는데 나는 죽어서야 따뜻해지는 운명인 모양이었다.

  "왜 사막인 거냐. 그곳은 그저 모래뿐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환상일 뿐이야."

  "고향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화장실은 더러웠고 풀들은 내 몸을 베기라도 할 듯 나보다 더 독해져 있질 않았던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사막일까. 누군가 붙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울고 싶었지만 누군가 저 세상 밖에서 또 울고 있을 테고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죽으면 차가워지는 것일까.

  '다 비웠으니 뜨거워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노인에게 묻고 싶었다. 수박 한 통을 낙타에 싣고 모래언덕을 더듬어가는 내 모습이 안 그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점자를 더듬으며 사막 한가운데로 가고 싶었다. 그 끝이 있을까. 어쩌면 나는 바람에 날려 온 마당에 떨어진 한 장의 점자처럼 내 생을 어딘가에서 버리게 될 것이다. 내 몸에도 점자가 있었다. 수박처럼 여자의 몸에도 씨가 있고 검은 선이 있는데 여자뿐 아니라 사람은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읽지 못하는 서로를 그렇게라도 더듬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두려워한 사랑도 나를 붙잡아두지 못했다. 그 사랑도 물처럼 나에게서 흘러갔을 뿐이었다. 그 순간 작고 하얀 양 같은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몸집은 하룻밤 사이에 더 작아져 내가 품에 안아야 할 것 같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노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내게서 그걸 기대했는지 노인이 몸을 떨고 있었다. 흔해빠진 영화 대사같이 아득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힘이 셌다. 운명은 내게 어디론가 흘러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디오 속의 남녀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귀가 밝은 노인은 내가 옷 벗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노인은 몇 배의 귀와 마음으로 세상을 다 보고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이 몸을 움찔했다. 내 몸을 더듬어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노인의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왔다. 얼굴에서부터 방향을 잡아가도록 해주고 싶었다. 노인의 손이 따뜻했다. 신기가 들어와 몸을 떠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늘게 떨었다. 나는 노인의 흘러내린 흰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나는 이대로 죽고 싶었다.

  '내 목을 부러뜨려주겠어요?'

  노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나보다 아주 오래 산 노인의 손에서 죽으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노인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름답다' 라는 말은 얼마나 추상적이던가. 나도 모르게 다시 노인의 손을 잡았다. 노인은 점자를 더듬듯 내 인생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지친 감은 눈과 마른 입술, 내 깊지 않은 쇄골을 더듬어 살아온 깊이가 얼마쯤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내 몸의 점자를 읽어주었으면 싶었다. 몸에도 중심점이 있었다. 몸에는 무수한 선들이 뻗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키우기 나름이었다. 어떤 이들은 제 몸을 키워 별이 되고 우주가 되었다. 노인이 아이처럼 울었다.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노인도 나처럼 세상이 두려운 것 같았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의 바람이 손으로 더듬듯 나를 읽고 있었다. 바람이 노인처럼 머뭇거렸지만 수줍어하며 나를 읽고 있는 시간 문득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곧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앞으로 더 혼자가 되겠지. 옷을 입은 나는 공업사 밖에 나와 있었다. 사내가 세운 간판은 아직도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사내는 밤새 슬픈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봉고차로 가 조용히 열린 차 안을 바라보았다. 볼이 불룩한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잠들어 있었다. 얇은 군용담요 하나만 몸에 덮었다. 사내는 고향이 있을까. 말이 없는 사내라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사내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언가에 떠밀리듯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날이 오겠지. 봉고차 안에는 사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보자 놀란 닭이 벼슬을 더 세웠다. 어디서 온 닭일까.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논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근처의 닭 농장에서 떨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그 순간 닭이 날갯짓을 하며 TV 위로 올라갔다. 닭을 보고 놀랄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디오는 저 혼자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이 봉고차 안을 조금씩 채웠다. 사내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올 것이란 걸 알기에 별이 더 깊이 잠들어 있는 게 아닐까. 별이 잠들어 있을 때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사막을 지나갔다. 나처럼 결핍되고 아픈 사람들이 가는 슬프고 아름다운 비단길.

  '차가 오고 있니.'

  끊어질 듯 가늘고 약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인이 마당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말리고 있는 수박 씨앗들이 보였다. 나는 씨앗들을 손에 한움큼 쥐었다. 바깥 공기가 시원했다. 멀리서 라이트를 켜고 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가 출렁일 때마다 라이트 불빛도 따라서 움직였다. 노인의 신기가 내 몸 안으로까지 옮겨 들어온 모양이었다.

  '자동차공업사 주인이 와요.'

  '네가 그걸 아니?'

  마치 노인이 내 옆에서 묻는 것 같았다. 아침이 희미한 웃음을 안개처럼 지어보였다. 노인이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노인도 차 소리를 듣고 차가 오는 쪽을 보고 있겠지. 정말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노인일까. 차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강하게 쏘며 다가왔다.

  국도변으로 걸어 나갔다. 첫 버스는 언제 올까. 비척거리며 버스정류장을 지나쳤다. 인연은 고무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질겨서 길도 한없이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기억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싶어 걸어가다 보면 다시 인연이길 불러주며 무언가가 나를 기다렸다. 다시 만나게 된 인연처럼 바람이 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수박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인연이라면 노인도 사내도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겠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 대답해줄 수 있다면…. 나는 더 부드러워진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음메에에 양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점자가 있는 모래 언덕을 향해 나는 나아가고 있었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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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삼자갈등 상투적 결말 파괴… 요술처럼 주제 확장 즐거워

e-style="text-align: justify;" style="margin: 1px auto 30px; line-height: 1.6; text-align: justify;">  최종심에 올라온 열 한 편의 작품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선보이면서도 일정한 완성도를 성취하고 있었다. 많이 써 본 솜씨에 숙련의 기미들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적 구성 측면에서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소설은 이야기를 뼈대로 이루어지지만,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 소설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 그것을 바탕으로 직조해내는 플롯,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주제 등이 개연성있게 조화될 때 소설이 완성된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최종적으로 검토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오금숙의 '날개'는 이상의 '날개'를 깔끔하게 패러디한 작품이나, 원본을 넘어서는 자기만의 세계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영서의 '오버행 구간'은 취업난, 루저 등을 소재로 하여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으나 문제를 구조적인 틀 속에서 읽어내는 시각이 부족했다.

  박경서의 '안드로메다'는 공들여 쓴 매끈한 작품이지만 구태의연한 소재와 자의식 과잉의 문체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졌다. 김의경의 '웰컴 투 더 바우하우스'는 현실의 한 지점을 생동감있게 포착한 점은 흥미로우나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고 주제를 향해 이야기를 수렴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비단길'은 국도변에서 만난 세 인물의 갈등 관계를 통해 우리 생의 유랑과도 같은 본질을 한 켜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역량이 뛰어나고, 이야기속에 숨길 것과 드러낼 것을 적절히 엮어가며 끝까지 긴장을 유지시키는 능력도 돋보였다. 삼자 갈등에서 항용 예견하게 되는 상투적 결말을 파괴하면서 제시되는 클라이맥스의 의외성이 요술처럼 주제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보는 일도 즐거웠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문장이나 표현 장치에서 디테일에 좀더 신경썼으면 하는 점이다.

심사위원 : 임철우, 김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