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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바닷가에 고양이 의자가 있었다 / 이근자

  철쿵. 모정이 대문을 툭 밀어서 닫는 소리가 들렸다. 문간에 서서 걸쇠가 맞물리는 진동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당으로 내려서는 남편과 달리, 저 철문이 닫힌 지금쯤 모정은 현관 앞에까지 다가왔을 것이다. 거실을 서성이던 여자는 닌자가 어둠에 스며들듯 문간방으로 숨어들었다. 곧 현관문마저 제 손으로 따고 들어온 모정이 자목련 봉오리가 새겨진 거실 테이블 위에 열쇠꾸러미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크고 작은 열쇠 여섯 개가 엉키고 부딪치며 내려앉는 소리였다. 여자는 저 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딸아이 뒤를 밟아야겠다는 얄궂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

  하지만 여자가 잠자는 병에서 깨어난 첫날에 그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여자는 흰색 바둑알처럼 명료한 각성시간이 지속되자 남편과 모정을 불러 축하파티라도 벌이고 싶었다. 거실 벽에 매달린 화이트보드엔 둘의 휴대폰 번호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다 그들을 수없이 실망시켰던 첫날 중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네 시가 되어 학교에서 돌아온 모정이 깨어 있는 여자를 보자 뛰듯이 다가와 다정하게 껴안았다. 여자가 차려준 간식을 먹으며 선생님과 친구들 얘기를 조잘조잘 쏟아냈다. 여자는 정애, 영민이라는 모정 친구들의 키가 얼마인지 얼굴 모양은 동그란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모정에게, 지난번과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시키기 싫어서였다. 여자는 모정에게 학원을 하루 쉬고 엄마와 분갈이나 하자고 권할까 갈등했다. 모정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오늘 땡땡이 칠까? 모정의 물음에 여자는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는 어느 때부터인가 모정과 남편의 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워나갔다.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이나 무책임한 일탈이 그들의 생활을 흐트러뜨릴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여자가 놀란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모정이 가방을 매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뭔가를 지우고 다시 쓴 다음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아쉬운 듯 머뭇거리며 현관을 나가는 모정을 배웅한 뒤 거실로 돌아온 여자는 화이트보드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호루라기 열쇠 휴대폰/ 엄마 모정이 학원 갔다 올게요/ 쑥 미나리 두부

  혹시 여자가 외출할 때를 대비해 써 놓은 첫째 줄, 호루라기에 붉은 동그라미를 여러 개 둘러놓은 것도, 장 봐 올 반찬거리를 써놓은 줄도 한 시간 전에 본 그대로였다. 다만 모정이 중학교 갔다 올게요, 줄에서 ‘중학교’가 ‘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학원은 독서실이기도 했다가 시내나 친구 집으로 바뀌기도 했다. 학원으로 바꿔 쓴 모정의 심리를 다 짚어내기도 전에 온몸에 소름이 쏴아 돋았다. 모정이 방금 손잡고 얘기한 여자는 누구인가. 자신은 딸아이와 얼마나 먼 시공의 아가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가. 여자가 잠을 잔 6년8개월24일의 간극이 안개 낀 로렐라이 언덕의 노랫소리보다 아득할지도, 아니 빙산을 수킬로미터나 갈라놓는다는 북극의 크레바스보다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 인식이 불명료할 경우 눈에 보이는 물질로부터 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지.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여자는 필기도구를 챙겨들고 모정의 방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2학년 4반 26번, 수학문제지 67쪽 2문제 틀림, 일기장, 한빛입시학원/ 느티나무침대, 곰 인형, 장미꽃이불에 묻은 생리혈/ 화이트칼라 5단 서랍장에 든 속옷, 바지 혹은 치마들, 여자의 키만한 겨울 코트

  혹시 모정이 포옹이라도 하려 이불을 들춘다면 외출 차림인 것이 들통날 것이다. 여자는 이불깃을 온몸에 돌돌 말고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은 채 소리로만 모정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 서랍장을 여닫는 마찰음, 후루루룩 국물 마시는 소리에 이어 사이드테이블에서 열쇠를 집어든 모정이 여자의 방문을 열었다. “아직 태평양이야? 엄마, 모정이 간다이.”

  엄마가 잠에서 못 깨어나는 건 바다 때문이야. 엄마는 먼 바다 깊은 곳에서 잠을 자거든. 모정에게 엄마의 기면(嗜眠)증이 표류와 같다는 말을 했던가? 어느 날부터 모정은 엄마의 잠이 동해쯤인지, 하와이 근해인지 농담처럼 묻곤 했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여자는 이불 밑에 숨겨두었던 선글라스와 선캡을 꺼내 쓰고 모정이 뒤를 밟았다. 간다이? 말끝에 전라도 사투리가 남아 있던 사람은 미스 최였다. 잠수 이전의 메모리 무더기에서 여자는 미스 최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렸다. 미스 최가 아직 남편의 가구점에 근무하는가.

  모정이 골목을 돌아나갔다. 모정을 놓칠세라 골목을 뛰어나가 삼거리 경희슈퍼 앞에서 중학교 방향으로 난 내리막길에 들어서서야 여자는 자신이 깨금발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며칠 만에 눈뜬 시간이 새벽이나 한밤중인 적이 많았다. 살금살금 걸레질을 하고 누렇게 마른 나물을 다듬어 된장국을 끓이면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쓴 습관 탓이리라. 발꿈치를 들고 걷는 걸음걸이는 남의 눈에 쉽게 띌 것이었다.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은 것도 어색했다. 몸이 뒤뚱대는 느낌 때문에 얼음 위를 걷듯 발을 끌었다. 혹시 모정이 돌아볼까 건물 그늘에 붙다시피 따라갔지만 모정은 또래 아이 몇을 지나치며 손을 흔들었고 길가에 나와선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등 앞만 보고 걸어가 입시학원이라 적힌 건물로 들어갔다. 여자는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학원은 밤 아홉시가 되어야 수업을 마친다고 했다.

  여자는 훗 웃었다. 탐정놀이 첫날, 모정의 동선이 짧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인 내일이 기다려졌다. 여자는 뒤돌아서 오르막을 오르며 내리막 끝을 돌아보았다. 절대 욕심내지 말자 다짐해도 모정의 학교 앞 벚나무가 가득 심어진 그 담을 돌아 가구점까지 걸어보고 싶은 미련이 남았다. 지금쯤 학교 앞길엔 훌훌, 벚꽃이 날릴 텐데.

  바깥 걸음이 피곤했던지 모정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여자는 잠이 들었다. 여자의 잠은 너무나 겹이 많아 며칠 혹은 몇 생애 이전의 시간 층이 현재의 기억과 소망들에 섞여들었다. 수억t의 수압 같은 꿈을 가르고 쫘르르 열쇠 내려앉는 소리, 저 소리의 희미한 징후를 잡아채 미행을 결심한 순간이 진짜 깨어난 시점이라고, 여자는 단정했다. 이렇게 정리된 생각도 잠의 일부였다. 여자는 잠 속에서 생각하는 방식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 그곳엔 뚜렷한 장면들만이 구성이 느슨한 영화처럼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모정의 것만 추려냈다.

  임신 팔 개월째 진눈깨비가 날리는 날 여자는 뱃속 아기가 공주라는 걸 알았다. 가구디자이너인 여자와 남편은 원목으로 아기 침대와 흔들의자를 만든 후 색을 고르던 참이었다. 여자아이일 경우 침대에는 분홍색을, 흔들의자에는 녹색을 칠할 예정이었다. 페인트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여자가 바람이 잘 통하는 문간에 앉아있는 동안 남편은 색을 내느라 작업장을 여러 번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아이보리 톤이 도드라진 분홍색. 여자가 남편에게 요구한 침대 난간 색깔이었다. 남편의 시색용 막대기가 경계가 불분명한 분홍 터치로 가득 찼을 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수입가구에서 이미 샘플을 보았던 흔들의자의 색은 쉽게 결정이 났다. 둥글게 굽은 의자 다리엔 짙은 녹색을 칠하고 몸체는 연두색, 아이의 시선이 닿는 손잡이엔 보색인 빨강을 칠하기로 했다. 노랑 포인트를 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모정의 나이 네 살이 되던 때 여자는 아이 키높이에 맞는 책상을 만들었다. 그때 여자는 일주일씩 잠을 못 자 새빨간 눈동자를 가리려 선글라스를 끼고 작업장에 출근했다. 불면이 깊어지자 무섭게 살이 빠졌다. 망치 손잡이 굵기밖에 안 되는 얇은 팔뚝으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고 망치질을 해 꼬마책상 세트를 완성했다. 모정이 그곳에 앉아 간식을 먹고 뚝딱뚝딱 블록도 끼우고 영어를 배우는 걸 보며 여자의 잠은 불면에서 기면으로 옮겨갔다.

  여자의 수면주기는 해와 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은하의 외계별과 닿아있는 것일까. 수면제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성제도 여자의 잠을 조절하지 못했다. 기면이 심각한 정도에 다다르기 직전 여자는 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로 모정의 침대를 만들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혼자 잠들지 않으려는 모정과 그 침대에 함께 누워 책을 읽었다. 얕은 난간을 두른 침대에서 잠이 든 여자는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못하기 일쑤였다. 갈수록 잠꼬대와 몸부림이 심해져 소리까지 격리된 문간방으로 이동했다.

  툭 잘린 의식 안으로 모정의 방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 벽면에 놓인 느티나무 침대에는 여자가 새로 꺼내놓은 보라색 이불과 곰 인형이 놓여있었다. 유명상표가 붙은 주니어 옷장과 서랍장. 남편은 더 이상 가구를 만들지 않는 것인가. 서랍장에 든 옷은 평상복 하나도 세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모두 아빠가 골라준 것들일까. 책상 위에 시선이 꽂혔다. 모정은 2학년 남녀 합반이었고 유격수라는 수학문제지를 푸는 중이며 도데의 별을 읽고 있었다.

  눈에 익은 일기장을 책꽂이에서 뽑아 펼쳤다. 아이는 일기장에 엄마가 체체파리에 물렸다고 써놓았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기억했다. 여자의 잠이 바닷속 깊이 침잠하기 전이었다. 수면 가까이 헤엄치는 물고기 등 위로 햇빛이 투과돼 보일만치 잠이 얕았다. 여자는 모정과 어울려 노는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고 체험학습을 떠나는 날 아침이면 억지로라도 눈을 떠 김밥을 싸주던 때였다. 그러다 자신을 어디로 싣고 가는지 모르는 고래 등 같은 잠에 납작 엎드려서도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 읽고 남편에게 몇 시에 귀가하느냐고 전화를 걸던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미안한 마음이 분열적으로 엇갈리던 시기였다. 이후 체념과 함께 여자는 해일이나 태풍을 감지할 수 없는 깜깜한 암흑에 갇혔다. 여자가 잠의 바다에서 발광(發光)하는 물고기밖에 볼 수 없었고, 물속으로 구부러진 손을 들이밀던 빛살 따위 완전히 잊어버렸던 때, 모정의 일기는 멈춰 있었다. 여자의 잠 속에서 재구성되는 나쁜 기억은 생시보다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잠결에도 여자의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토요일 아침, 여자는 다른 엄마들이 등교 준비를 위해 일어나는 시간에 깨어났다. 두부를 졸이고 된장을 끓여 상을 차리고 운동화를 털어놓아도, 모정은 조금도 망설이지 ●고 ‘학원’을 ‘중학교’로 바꿔 썼다. 그냥 학교도 아닌 ‘중’학교!

  바다에 똑같은 그물을 자꾸 던져 넣는 어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라고 반듯하게 쓴 모정의 글씨가 여자를 향해 던진 낚싯바늘처럼 보였다. 모정이 여자에게서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은 무얼까. 대신할 것이 없는 허전한 위안, 그리움이라는 글자만 그득한 빈 시간들, 원망을 삼켜 늘 서걱대는 왼쪽 가슴 아래. 가느다란 낚싯바늘에 매달아 건네고 싶은 여자의 소망도 모정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중학교라고 쓴 아래에 잡채 재료를 적었다. 쇠고기 채 썰어 300g, 옛날당면과 야채. 막 젓가락질을 배운 모정이 잡채만큼은 손으로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커다란 접시를 제 앞으로 당겨 배가 부른 후에야 상 중앙으로 밀어 다른 이가 먹도록 허락했다. 입이 짧아 음식에 욕심 내지 않던 모정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문득 제 앞섶에 묻은 잡채가닥을 떼어먹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그 모양을 구경하려 자주 잡채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남편은 으르렁 곰돌이야 잡채 먹어, 라며 한동안 모정을 놀렸다.

  그 밥상에 함께 앉았던 남편은 어디에 있을까? 느닷없이 치솟는 눈물을 삼키며 거울 앞에 가 앉았다. 모정과의 간극에 아이의 시공간이 느껴진다면 남편은 어떨까.

  바싹 마른 칫솔, 녹슨 면도기, 바닥이 보이는 남성용 로션/ 체육복 한 벌과 파자마, 구멍 난 양말, 목과 소매 깃이 늘어진 셔츠들/ 자목련 테이블

  여자는 잠깐씩 깨어있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화분을 꺼내 씻었다. 담 너머로 노랑빨강 꽃잎을 업어가던 바람결을 눈으로 쫓던 여자가, 대문간을 하염없이 서성이던 날 찾아낸 일이 꽃씨를 심는 일이었다. 아이의 책상 위에 식목일 숙제로 받아온 채송화 씨앗이 첫 파종이었다. 야생화들은 씨앗만 뿌려놓으면 몇 달을 손보지 않아도 제각각의 생명력을 뽐내듯 작고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그저께 인터넷으로 주문한 씨앗이 도착했다. 화단엔 새싹과 봄꽃이 가득했다. 담 아래 음지엔 파설초(破雪草)라 불리는 노루귀가 두툼히 내려앉은 낙엽을 피해 삐딱하게 대를 뻗고 자랐다. 연필심만 한 꽃대에 탐스러운 꽃망울이 매달려 있었다. 여자는 인터넷에서 본 사진을 떠올렸다. 겨우내 켜켜이 쌓인 잔설을 동그랗게 녹이며 돋아나 작가의 사진에서 살아난 푸르고 흰 자태의 노루귀.

  여자는 사진에서보다 더 예쁘고 귀한 분홍노루귀 주변의 낙엽을 걷어내며 상상했다. 이곳이 자신의 좁고 그늘진 마당가가 아니라 봄볕이 따스하게 든 산기슭 바위틈이라고. 여자는 붉은 등산모를 쓰고 화질이 좋은 수동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바위의 경사에 따라 삐딱한 자세로 쭈그려 앉은 채 지름 1.5㎝의 경이로운 꽃송이에 감탄하며 앵글을 당긴다. 탁 트인 산등성이를 넘어온 차가운 바람조차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여자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부토와 거름을 섞은 밑흙을 화분바닥에 깔고 분홍노루귀를 한 삽 떠 넣었다. 흙을 채워 꼭꼭 누른 뒤 마른 낙엽을 부수어 흙 위에 덮었다. 솜털이 저리 많은 노루귀는 분명 추위를 많이 타는 식물일 것이다. 노랑제비꽃은 무리 지어 피어나니 넓은 사금파리 항아리가 제격이었다. 곧 화단이 빈 만큼 흙갈이를 끝낸 화분이 마당에 가득했다. 새 장소에서 몇 날 며칠 동안 비와 바람을 견딘 꽃들은 가구점으로 옮겨 갔다.

  여자는 사실 원목을 다듬고 싶었다. 집 안에 작은 작업실을 들이겠다는 여자의 제안을 남편은 반대했다. 전기톱만 위험한 공구가 아니라 작은 조각도라도 치명적인 무기일 수 있다고 했다. 티끌만 한 사고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집 안에 들어앉은 여자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씨앗을 뿌리고 잡채까지 만드느라 오후 세 시가 지났는데도 모정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점심을 주지는 않을 텐데.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학원으로 곧바로 간 것인가. 벌청소라도 받는 것일까. 꾸덕꾸덕 마르고 있던 잡채를 데워 먹고 난 여자는 모정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동안의 일을 다 고백하고서라도 모정이 보고 싶었다. 어, 엄마다. 수화기를 입에 대기 전 멀리서 들리는 들뜬 딸아이의 목소리에 여자는 감동했다.

  “엄마?” “……” “여보세요, 엄마!” “으응, 모정아. 어디니?” “학교. 우리 축제 기간이야, 엄마. 이제 일어났어?” “아니, 왜?” “그럼, 학교에 올 수 있어? 친구들이 내가 최고래. 내가 만든 모형…… 안되겠다.” “갈게. 교실로 가면 돼?” “응? …… 안 돼, 오지 마! 여기 시끄러워. 완전 야단이야. 그리고 나 이따 시내 갈 거야. 친구랑 약속 있어.” “엄마 금방 갈 수 있는데…….” “나 지금 가봐야 해 엄마, 집에서 봐.”

  모정과의 연결공간이 닫히고 있었다. 잠깐만! 바닷물을 가르기라도 할 듯 여자가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축제? 가벼운 장난질인 탐정놀이 때문에 모정이 축제에 가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했다. 아니다. 모정의 약속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여자는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서 탐정 포즈를 으쓱 취해보곤 집을 나섰다.

  어제는 모정을 따라가느라 경희슈퍼가 새로 지은 옆의 큰 건물에 가려 부러진 몽니처럼 조그마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여자는 이혼녀인 경희슈퍼 주인이 아직 카운터에 앉았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지나쳤다. 몸무게가 불었지만 눈썰미 좋은 주인이 자신을 알아채면 금세 모정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모정은 화이트보드에 쓰인 찬거리를 사거나 군것질을 하러 경희슈퍼에 들락거렸다.



  산동네 같았던 골목이 명동 뒷길만큼이나 번성했다. 낯익었던 그대로 남아준 길거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의 예상대로 학교 앞길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중학교와 초등학교 담을 따라 이열종대로 마주 선 벚나무 길엔 하얀 꽃잎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이 모두 모정의 친구처럼 보여 정겨웠다. 중학생 아이들의 들썩이는 생기가 행복한 꿈결인 양 여자를 들뜨게 만들었다.

  여자는 굳게 잠긴 2학년 4반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다 강당으로 갔다. 강당에 아이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자는 작품보다 이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곤 뜻하지 않게 로봇과 집 모형 앞에서 모정의 이름을 발견하곤 소리없는 대소를 터뜨렸다. 모정이 이과(理科)로 컸구나. 여자는 건축과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의견에 밀려 미대로 진학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기억했다. 로봇과 집 모형 옆엔 프리지아 꽃다발과 장미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 꽃 한 송이 없는 작품이 거의 전부였다. 모정을 좋아한다는 전교부회장이 프리지아 다발을 붙였을 거라고 여자는 멋대로 상상했다. 아닌 척하지만 모정도 그 애를 좋아했다. 그렇지? 라고 물으면 제 감정을 숨기려 펄쩍 뛸 나이의 모정. 여자는 사탕꽃을 모정의 이름 옆에 붙였다.

  여자는 강당 밖에 나와 학부모들이 떡볶이나 어묵 등을 만들어 파는 간이매점을 지켜보았다. 모정이 음료수라도 사 먹으러 들르면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벌써 시내에 나간 건 아니겠지. 작품 철수는 만든 본인이 직접 한다고 했으니 모정이 아직 교정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운동장 곳곳엔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알록달록한 전시부스나 체험공간이 십여 개 흩어져 있었다. 페이스페인팅을 그려주는 부스 앞에는 팔뚝을 걷은 아이 몇이 줄을 서 있었고 다트판을 향해 철심이 꽂힌 화살을 날리는 아이도 있었다. 농구코트엔 여자애들이 공을 따라 뛰어다니고 있었다.

  남학생 몇이 농구코트를 흘깃거리며 저희들끼리 키득대고 있었다. 혹시 모정이 섞였을까 농구코트를 살피던 여자는 수돗가 옆 코너로 눈길을 돌렸다. 대부분의 부스에 안내자 혼자 앉았거나 두세 명의 아이만 서성이고 있는 것에 비해 수돗가 옆 공간엔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과 학부모까지 그득 둘러서 있었다. 그 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지만 와와, 정기적으로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여자도 무리들 틈에 슬며서 끼어들었다. 합판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 그 안에 들이민 얼굴로 물풍선을 던지는 코너였다. 합판에 못을 박아 놓아 던지기만 하면 풍선은 뻥 소리가 나며 터져 얼굴로 물이 끼얹혔다. 물풍선을 맞은 아이나 던진 아이나 뒤끝 없이 웃는 모양이 천상 축제였다. 구경을 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시야에 강당 쪽으로 씩씩하게 뛰어가는 아이 하나가 모정처럼 보였다. 여자는 아이가 고개를 돌려 옆 얼굴이 보일 때까지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모정이 아니었다.

  “모원아, 여기야.” 의외로 모정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여미며 몇 걸음 떨어져 섰다. 모정이 모원이라 부른 꼬맹이에게 로봇자동차와 꽃다발을 안기고 둘은 나란히 교문을 나섰다. 여자는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당황했다. 모정이 방문을 열어 엄마가 없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경희슈퍼 앞에까지 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한 여자가 막 모정 앞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모원아, 아이스크림 먹을래? 모정이 꼬맹이에게 물었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원? 아이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집까지 뜀박질을 했다. 호루라기와 열쇠, 휴대폰은 원래 놔두던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선캡과 선글라스는 이불 밑에 던져 넣었다. 누워 있으려니 심장이 튀어나올 듯 퉁탕거렸다. 익사보단 심장마비가 낫구나, 여자는 이불을 여며 잡고 키득키득 웃었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 새 여자는 탐정놀이 시작한 일을 잘했다고 변덕스럽게 생각했다.

  “엄마, 모원이 왔어요.” 그래, 이 방에 누워 모정의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이 났다. 모정이 가끔 데리고 와 놀던 동생이었다. 동생? 여자는 어떤 동생일까 자세히 알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모원이 방문을 조금 열고 인사를 했다. 금세, 누나 옷 갈아입고 어쩌고 하는 말이 들리더니 안녕히 계세요, 라고 바뀐 모원의 인사말이 현관으로 멀어질 때 여자는 벌떡 일어나 선캡을 꺼내 썼다. 현관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소년처럼 긴 다리가 돋보이는 바지 차림의 모정이 큰길에서 친구들 무리에 합류했다. 모정에게 손을 흔든 모원은 저 혼자 길을 꺾어 대로변 인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손에는 여자가 모정의 작품에 붙여주었던 사탕 하나를 쥐고 있었다. 여자는 모정이 친구들과 버스에 오르는 정류장을 지나쳐 꼬맹이 뒤를 따랐다. 모원이라고 했지. 모정과 이름을 나눠 가진 너는 누구니?

  모원은 문구점에 들러 뽑기통을 흔들어보고 손바닥만 한 전자오락기에 잠시 한눈을 팔았지만 곧바로 페인트 가게를 지나 사거리로 향했다. 가구점? 모원이 향하는 곳이 가구점이란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여자의 가슴이 뛰었다. 꼬맹이를 앞질러 길을 건너고 흩날리는 봄볕을 가르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여자는 낯익은 거리까지 모원 뒤를 따랐다.

  소형 가구점 네 개가 나란히 들었던 사거리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신호를 지킬 필요도 없이 분식점과 단위농협으로 건너다니던 소로는 넓어져, 보고만 있어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차량의 왕래가 많아졌다. 그에 맞춰 가구점 또한 웅장한 모습으로 거리를 덮칠 듯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중저가 브랜드 매장과 수입가구가 들어찬 10층 건물 두 채. 브랜드 매장이 있는 자리는 옛날에 작업장으로 쓰던 공터였다. 여자는 먼저 가구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소형 가구점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어느 매장이 남편의 가구점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두 매장 가구들 사이사이에 여자의 마당에서 옮겨온 야생화 화분이 장식되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당연히 그곳의 일원인 듯 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등 뒤에서 모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빠? 여자는 지나가는 행인인 척 몸을 돌려 그들을 지나쳤다.

  “우리 모원이. 누나 학교는 잘 갔다 왔어?” “응, 사탕 먹을래.” “그래, 사탕이 진짜 크다! 누나가 줬어?”

  여자는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고, 아이를 안아 올리고 있는 탓에 머리가 숙여지긴 했지만 옛 가구점 자리에 선 남자는 남편이 분명했다. 훤칠한 키며 커다랗고 선한 분빛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남편도 가로수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선 여자를 알아본 것일까? 여자는 그제야 자신의 탐정놀이가 얼마나 비겁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여자는 뒤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수만 리 바다 아래 암흑이 들어찬 문간방에 들어가 누웠다. 열어 놓은 방문 밖엔 자목련 테이블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모정이 열쇠를 내려놓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테이블이었다.

  아직 아이가 없던 신혼이었다. 가구점 진열장엔 여자와 남편이 핸드-메이드한 가구가 절반 이상 채워져 있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원탁 테두리에 도넛 모양 홈을 파 그 안에 목련 봉오리를 새겼다. 완전히 입을 다문 목련, 반쯤 핀 목련, 활짝 핀 목련꽃 여섯 송이가 탐스럽게 새겨졌다. 실제 목련에 근사(近似)한 밀키화이트 색을 만들어 꽃에 발랐다. 흐린 날의 노을 색과 검정으로 바탕색을 바꿔도 꽃 색은 여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블랙-레드를 꽃봉오리 위에 들이부었다. 다시 그 위에 밀키그린을 스치듯 덧입히자 예쁜 자목련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문제는 몇 번이나 색을 덧입히는 바람에, 유리를 얹으면 돌출된 꽃잎에 걸려 그 유리가 덜컹덜컹 논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깊이를 주어 음양각으로 새겨 진열하자 작품 다섯 점이 금방 팔려 나갔다. 실패한 첫 번째 테이블을 집에 들이고 자축을 벌이던 시기 어디쯤에서 모정이 태어났다.

  여자가 자는 동안 자목련 테이블이 가장자리부터 뜯어지며 세모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갈라졌다. 여자가 잠자는 병에 걸린 것은 목련꽃 색을 섞듯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눈물이 나는 것도, 억울한 일도 아닌데 여자는 숨을 헐떡였다. 길을 걷는 것도 아닌데 또다시 길거리에 주저앉을까봐 두려워 이렇게 헐떡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추잎이 엉덩이에 깔려 짓뭉개지고 고등어 핏물이 바짓단을 적셔도 피할 수 없었던 발작적인 탈력(脫力)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갑작스레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을 줄 모르고 달려오던, 배달원 오토바이가 부러뜨리고 지나간 새끼발가락. 숨이 차고 낌새가 있으면 호루라기를 불어. 달려갈게. 여자가 발가락 깁스를 풀고부터 외출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모르고 남편은 몇 번이나 반복해 다짐을 받았다. 그랬던 남편이었다.

  여자는 잠자려 노력했다. 기억을 분류해야 했다. 남편의 부재와 모정의 잦은 외박. 임신을 고백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던 최. 여자는 자신이 모든 정황을 알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스 최, 나 따위는 잊고 잘 살아. 남편 대신 자신을 업고 뛰던 최에게 여자가 해줄 수 있는 덕담은 그것뿐이었다. 여자는 절대 남편과 최가 엮였을 리 없다고, 뻔한 결말까지 부정하지 않았던가.

  조용조용 아이를 달래던 노랫소리, 또닥또닥 도마질 소리와 집 안에 스며들던 햇살 향기, 어느 낮이었다. 빛을 등지고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던 그림자 곁으로 날을 세우고 달려들던 빛살, 느릿느릿 몸을 굴려 빛살을 비끼는 사이 그림자는 어느덧 평온한 어둠만 남긴 채 사라지고 난 후였다. 또 한 번은 그랬다. 잠에서 막 깨어나던 중이었을까. 대나무 돗자리가 뜨거워 방바닥으로 굴러 누운 참이었다. 샤워기 물줄기가 목욕탕 타일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실려왔다. 누구세요…… 잠시 수면 위로 부상했던 의식이 태풍에 밀려 먼 바다로 떠내려갔다. 누구인가요? 화다닥, 혼절에서 깨어나듯 여자가 정신을 차렸을 땐 거실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진 물방울과 목욕탕에서 풍겨오는 비누 향이 집 안을 떠돌고 있었다. 여자는 목욕탕의 축축한 습기가 암호라도 되는 듯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곳은 여자와 다른 누군가가 공유하는 복층시간이 존재하는 바닷가이며 자신 이외의 거주자와 맞닥뜨릴 기회였는데, 거울처럼 깨끗이 닦인 거실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말라가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그것은 달큰한 비누 향이었을까, 비린 갯내였을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모두가 최였다고? 생존에 대한 슬픔이, 부끄러움보다 분노가 여자를 뒤흔들었다. 자목련테이블에서 눈을 돌려 휙 돌아눕자 벨벳커튼이 시커먼 바다뱀처럼 출렁댔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주름마다 먼지가 낀 두꺼운 커튼을 확, 잡아 뜯었다. 먼지뭉치가 풀썩풀썩 얼굴로 날아들었다. 창문 또한 뜯어낼 듯 열어젖혔다. 쏟아져 들어온 달빛에 심해의 오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죽은 물범의 늘어진 몸뚱이같이 낡고 냄새 나는 이불, 빈 조개 무덤처럼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약 뭉치, 썩은 해초처럼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머리카락 덩이들.

  여자는 누군가를 쫓아가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확인해야 했다. 작업실과 남편, 모정까지 도둑질해간 이가 정말 최인지 알아야 했다. 그렇다면 빼앗아 오면 그뿐일 것이었다. 여자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최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옛날 미스 최도 장부 정리를 하느라 늦게 퇴근하곤 했다.

  “다른 사람은?” “내실에, 저녁 먹어요. 올라가시면…….” 최는 두 팔을 화살표처럼 안쪽으로 든 채 여자를 안내하려 계단 입구로 몸을 돌렸다. 단발머리 최의 뒷모습은 체념과 긴장으로 엉거주춤 경직되어 있었다. 여자가 제자리에 꼿꼿이 서 꼼짝도 하지 않자 최는 다가와 말없이 여자의 어깨너머를 가만히 쳐다보고 섰다. 최는 예전과 똑같이 조용하고 당당했다. 수수한 듯 고급스러운 최의 옷차림은 가구의 일부처럼 그곳에 어울렸다. 여자는 돌아섰다.

  최가 따라 나왔다. 집으로 가는 직선로를 두고 학교로 우회하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만약 최도 이곳을 떠나면 여자와 마찬가지로 벚꽃 길을 그리워할 것인지 궁금했다. 모원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으니 여자와 비슷한 추억을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다. 여자가 잠바다로 간 이후 모정의 손을 잡고 거닌 이 길을 여자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도 있었다. 슬픈 불순물 없는 명징한 기쁨으로.

  최와 여자는 공평한가? 먹먹한 슬픔이 몰려왔다. 순간, 여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최가 여자를 업고 대로까지 뛰었다. 옛날과 똑같았다.

  “형님…….” 최의 말문이 트였다. 숨이 차 헉헉대면서도 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모님……, 언니…… 저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요. 깨어나세요. 일어나요! 저는 갈 데가 많아요. 지방에 분점이 있어요. 베트남에도 사람이 필요하고요. 언제든 깨어나시면…… 저는 갈 데가 많아요. 우리 모원이만……. 헉헉.”

  여자는 이제야 최와 자신이 조금 공평해졌다고 생각했다. 모정과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떨면서 보냈던가. 여자는 택시에서 내리자 몸을 곧추세워 똑바로 걸었다.

  “그래요 미스 최. 내가 결정할게.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줘.”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는 최의 얼굴 앞에 대문을 쾅 닫았다.

  최는 여자에게 형님이나 사모님, 언니 중에 무엇으로 불릴지 선택하라고 한다. 그리고 여자가 원하면 다시는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되는 먼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최만큼이나 여자도 자신이 깨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둔 게 있다. 지금은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곳에는 최와 모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이 왜 최를 따라 내실로 올라가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최는 착한 여자처럼 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최는 여자의 것 전부를 훔친 나쁜 여자였다. 언제든 떠날 수 있어요……. 자신이 한 말대로 모든 것을 순순히 버릴 수 있다면 최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주저앉은 여자를 업고 뛰던 최의 따스한 체온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최는 정말 천사일까. 자신이 대여했던 6년여의 시간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모원까지 곁들여. 최는 남편과 모정, 모원까지 공유하자고 여자에게 제안한 걸까. 여자는 착한 체하는 최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모정의 열쇠를 들고 집을 나섰다. 새벽이었다.

  딱 한 번만 초인종을 눌렀다. 자신이 다시 올 것을 예상하고 최가 기다리고 있다면 한 번의 차임벨도 지옥의 천둥처럼 위협적으로 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최는 나오지 않았다. 잠든 것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모정의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매장을 왼편에 두고 실내통로를 따라 걷는 동안 촘촘하게 설치된 센서 등이 동시에 두 개씩 커졌다. 세심한 남편의 마음이 뭉클 다가왔다. 자신이 아닌 최를 배려하느라 움직였을 남편의 마음 조각들. 간질거리던 발바닥에서부터 해일처럼 일어난 질투심을 누르느라 여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엘리베이터와 현관 벨을 누르는 여자의 손길이 거칠었다. 문을 열어주러 나온다면 남편의 따귀라도 올려붙일 기세였다. 하지만 몇 번 더 벨을 울려도 마중 나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렇게 흥분한 상태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이 차라리 고마웠다. 그래도 한구석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여자는 내실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어딘가에서 신선한 톱밥 냄새가 여자를 인도했다. 건물 전체에 배인 새 가구의 화공약품 냄새를 비집고 어디에서 이 향기가 나는 것일까.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이 이 냄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실감했다.

  몇 개의 층계를 내려왔을까. 향나무 냄새에 섞여 솔향이 진하게 풍겨 나오는 문 앞에 섰다. 손잡이가 잠겨 있었다. 열쇠꾸러미를 뒤졌다. 망설이지 않았던 여자의 손놀림대로 열쇠는 꼭 맞았고 문이 열렸다. 불을 켜자 대형 환풍기가 천장을 꽉 채워 매달린 작업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 왔다. 창문 가까이엔 염료나 페인트가 색색별로 갖춰 놓였고 입구 쪽엔 작업 중인 원목이 흩어져 있었다.

  소품을 훑어보던 여자는 깜짝 놀랐다. 자목련 테이블이었다. 여자가 만들었던 테이블과 색이나 크기가 달랐지만 분명 비슷하게 흉내 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목련이었다. 네모 판에 새긴 자목련, 길쭉한 판에 새긴 백목련, 둥근 판에 새긴 백합, 장미, 교과서 크기만 한 해바라기까지. 누가 여자를 따라 음양각으로 꽃을 새긴단 말인가. 거기다 꽃을 벗어나 고양이 의자까지. 형상을 단순화시켰지만 굽실하고 게으르게 늘여놓은 곡선으로 보아 고양이를 표현한 것이 분명한 의자들이었다. 검은 고양이, 발톱을 세운 고양이, 낮잠 자는 고양이 등. 가구의 추상화라 할 만큼 모서리 처리가 독특한 문양도 눈에 띄었다. 고양이 꼬리를 표현한 것들이었다.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최구나!

  최가 자신을 따라했구나. 여자가 잠을 자는 동안 최는 아이들과 남편을 돌보고 가구점을 확장하고 여자를 보듬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안한 간극을 여기서 메우고 있었구나. 오래된 나뭇결에 스며든 불그스름한 얼룩이 최의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여자를 흉내 내어 나무를 깎은 최의 지난 세월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울컥, 여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은 또한 최의 바다이기도 하구나. 문득 여자의 속을 가득 채운 검은 해류가 쿨렁, 작업실로 흘러들어 밝고 환한 아지랑이에 섞여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닷가는 많은 것의 시작이자 종말 또 다른 출발지였다. 여자는 작업대 앞으로 가 조각도를 집어 들었다. 얼마 동안이나 고양이의 부드러운 곡선에 몰두했던가.

  두런두런한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다. 여자는 곧바로 이곳을 떠나야 할지 잠시 더 머물러도 될지를 가늠했다. 우선 환풍기를 모두 껐다. 망치도 멀찌감치 밀쳐놓고 사포로만 마무리를 했다. 욕심대로라면 똑같은 판을 하나 더 깎아 나지막한 장식장 문으로 꾸미고 싶었다. 고양이 꼬리를 치켜 올려 손잡이로 쓰려면 엉덩이를 더 아래쪽에 파묻어야 할 것이다. 백과사전만 한 크기의 나무판에 실눈을 뜬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졸린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에게도 매혹적인 잠이 몰려왔다. 고양이 솜털처럼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들면 곧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가야 했다.

  마음과 달리 여자는 4인용 고양이 벤치에 몸을 뉘었다. 여자는 졸고 있는 고양이판을 마주볼 수 있게 작업대 위에 세웠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그곳에서 유럽의 문명이 시작되었듯 여자는 자신의 의식이 최의 바닷가에서 새 출발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 잠만 자고 나면 최가 원하는 호칭으로 불러줄 것이다. 또한 모원이라는 꼬맹이가 모정의 동생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햇볕이 여자의 몸을 담요처럼 드리워 덮고 있었지만 봄의 한기가 몰려올 때쯤이었다.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몇 번째지?” “아홉 번째요.” 남편과 최의 숨죽인 목소리였다.

  “이번엔 짝문을 만들려나 봐요.” “응?” “엉덩이 부분을 밀어 넣다 말았잖아요. 손잡이로. 크기가 똑같은 판을 옆에 둔 것도 그렇고요.” 잠시 그들의 대화가 멈췄다.

  “이젠 당신이 나보다 이 사람을 더 잘 아는군.” 이마를 어루만지는 남편의 손길이 여자의 생각을 방해했다.

  “내실 문을 열어놓고 나갈 걸 그랬어. 너무 늦게 돌아오는군…… 당신.”

  여자는 벌떡 일어나 무엇이 아홉 번이고 이곳은 어디인지 소리쳐 묻고 싶었다. 그럼 이곳이 최의 작업실이 아닌 자신의 것이란 말일까. 한 번에 깎지 못해 뜯긴 듯 거친 칼자국은 분명 초보자의 솜씨였다. 겨우 아홉 번 들러 여기 작품을 다 완성할 수는 없었다. 아홉 달이면 몰라도. 그렇다면 이곳 작업실도 복층시간대의 공간일까. 기억을 퍼 올리려 애쓰는 의식과 달리 감정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여자는 치욕의 너울에 둘러싸인 이 잠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을 잔 이후 처음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 아래로 더 아래로 수면 깊이 내려가려 애썼다. 이렇게 도망가는 것이, 처음일까? ……

  “차에 시동 걸까요.” “아니, 내실로 갑시다.” 여자는 남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남편이 안아올리는 여자의 몸은 허깨비처럼 가볍게 들렸다.

  “열 번을 넘기게 할 수는 없어……, 그렇지 않겠소?” “그게 더 상처가…… 그래요. 준비할게요.” 이러지 말아요. 멈추지 않던 울음이 남편에게 안긴 안도감 때문에 잦아든 것인가. 아니면 여자의 의식이 이곳을 떠나는 것에 성공한 것일까. 여자의 항변은 자꾸 끝이 짧아졌다. 이러지 말아요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던 것처럼 집에 데려다 놔요. 바다에 데려다…… 고양이 의자를…….


<당선소감>

   "돌아가고팠던 꿈의 문 앞에서"

  저에겐 한번쯤 돌아가 보고 싶은 꿈속의 장면이 있습니다. 시리즈 드라마처럼 똑같은 주인공과 연속된 이야기가 있는 꿈이지요. 일 년이나 지나 꾼 시리즈 2회차의 꿈속에서 저는 단박에 지난번 꿈의 내용과 장면을 기억해냈습니다. 어제 본 드라마처럼요. 꿈속의 주인공은 실제의 저보다 더 잘생겼고 행복한 사람인 것도 알아차렸지요. 또다시 몇 개월이 지나 꾼 꿈에서 저는 꿈속 주인공의 행보와 사고를 따라가며 그녀의 감정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제 꿈의 시리즈는 3회로 종결되었지만 그 꿈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알 수 없는 열망과 그리움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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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특이한 소재로 가족문제 짚어

  올해도 예년처럼 많은 응모작이 들어왔다. 예심을 거치고 올라온 20여 편의 후보작을 놓고 숙독을 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설의 본령인 서사(敍事)의 중요성보다는 미세한 감정의 묘사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며, 에로스나 심리적인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미궁을 헤매는 듯한 문장, 상투적인 비유, 토막토막 끊어놓는 짧은 문장을 간결한 문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이 태반이었다.

  무릇 문장은 한마디로 사간의심(辭簡意深), 즉 말은 간결해도 뜻은 깊은 맵짠 글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함축적이면서도 산뜻하거나 내면을 파헤쳐내는 개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바닷가에 고양이의자가 있었다’, ‘入堂頌’, ‘밴다이어그램 속 교집합을 닮음’, ‘우아한 미래’ 등을 두고 몇 번을 더 읽고 토론을 했다. ‘바닷가에 고양이가 있었다’는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 침묵의 심해로 빠져드는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슬픔으로 엮어내고 있다. 사념적인 작품으로 ‘入堂頌’은 신앙의 문제가 선연하게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일까, 계속되는 갈등을 잘 그려내고 있었음에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밴다이어그램 속 교집합을 닮음’은 줄곧 이야기의 주제가 어디로 지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생명의 존엄함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등장인물 중 새엄마의 삶과 의식을 조명하려 했는지 모호하게 처리하여 어설픈 해피엔딩으로 결말 짓는 것이 너무 작위적이었다. 그리고 ‘우아한 미래’에서 다문화 가정의 갈등의 깊이가 옅게 느껴지는 것은 문체의 단순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 작가는 좀 더 세련된 문장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병행하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바닷가에 고양이의자가 있었다’는 ‘잠자는 병’, 즉 기면증을 앓고 있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어서 한 여인의 가족에 대한 애정과 소원화(疏遠化)의 문제를 사실과 환상의 혼돈, 그리고 무겁고 어두운 물의 상상력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잠과 꿈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깊은 바다로 가라앉아 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삶의 슬픈,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딸아이의 이름을 ‘모정’이라고 설정한 것도 다분히 상징적이다. 다시 말해 모정의 뒤를 밟거나 모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여자’의 심리상태야말로 ‘母情’, 곧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이 가족으로부터 점점 소외(疏外)되는 현상의 추이(推移)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결말부의 미숙한 처리가 감동에까지 이르게 하지 못한 원인이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응모자들의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명형대, 김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