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매미 울음소리 / 김동숙
<당선작>
매미 울음소리 / 김동숙
초인종이 연거푸 울렸다. 나는 소파 쿠션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주르륵 땀이 흘렀다. 501호도 대단했다. 그 정도했으면 돌아갈 줄 알았다.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걸로는 능히 목련아파트 금메달감이었다. 저러다 인터폰 고장 내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지만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501호는 포기하지 않고 현관문에 입을 바짝 들이대고 살살 달랬다.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아니까 문 좀 열어봐.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어찌나 죽는 시늉을 하는지 내막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애간장이 녹는다 했을 터였다.
“현석엄마가 이러면 내가 정말 서운하다.”
501호의 능청에 결국 소파에서 일어났다. 동네 시끄러워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단지가 작은데다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두고 지내는 여름이라 작은 소리도 멀리까지 퍼졌다. 아파트단지 내 여자들이 소리를 죽이고 무슨 일인가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현관문을 열어주고는 얼굴도 내다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501호는 요란하게 신발을 벗고 뒤따라 들어왔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머리카락까지 듬성해져 털 뽑힌 장닭 꼴이었다. 501호는 길게 누워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혀부터 찼다.
“쯔쯔, 아예 관을 짜줄까. 그 속에 들어가 다리 쭉 뻗고 누워있게. 사람이 그깟 일로 초죽음이 되가지고는.”
나는 못들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상대하기가 싫었다. 아랑곳없이 501호는 선풍기 앞에 엉덩이를 철퍼덕 깔고 앉았다. 너야 나를 상종하기 싫든 좋든, 무시하든 말든 그런 투였다. 돌아가는 선풍기 목을 따라 501호의 땀내가 훅 풍겨왔다.
“갑갑하게 굴지 말고 내 말대로 해보자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면 뭐가 검은 돌이고 뭐가 흰 돌인지 답이 나올 거 아냐. 현석아빠 말이 맞나, 새댁 말이 맞나.”이게 무슨 애들 수학문제 푸는 거냐고 소리 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분을 못 견딘 입술만 절로 실룩거렸다. 어쩌다가 저 여자 위층에 살게 됐는지, 어쩌다가 저 여자랑 안면을 트고 어울려 지냈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잘못되고 나서야 뉘우치는 게 후회였다. 발 넓고, 입심 좋고, 숨기는 구석 없이 시원시원하다는 건 형님아우 할 때 이야기였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501호 됨됨이가 제대로 보였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 무슨 일이고 참견 잘하는 푼수에다가 입이 싼 주접이었다. 상황에 따라 약이 독이 되고 독이 약이 될 수 있다는 걸 나이 마흔 넘어 제대로 배웠다고 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쓰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아파트단지 내 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와 수군덕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망할 여편네. 그간에 쌓인 정만 아니었다면 그 얄팍한 입을 당장 일어나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501호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사람 봐가며 말을 가릴 줄 몰랐던 내 잘못이 컸다. 앞집 새댁이 달라졌다고 먼저 하소연을 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언제부터인가 새댁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토라지거나 외면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만나면 인사도 잘하고 깍듯하게 굴었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찜찜한 생각에 여러 날 동안 새댁의 행동을 곱씹어 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반찬 담은 접시를 들고 초인종을 누르거나 단지 내에서라도 마주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신랑 흉 따위의 자잘한 일까지 새살거리던 새댁이었다. 그러던 새댁이 멀리서 날 발견하면 주춤하거나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면 묻는 말에 대답만 할뿐 전처럼 살갑게 굴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 오해겠지. 맘이 편하질 않아서 그러겠지. 처음에는 단순하게 받아들였지만 몇 주가 지나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슬슬 피한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새댁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나. 속 시원히, 이건 이래서 잘못됐고 저건 저래서 서운하다, 이야기 못할 사이였던가. 다른 사이도 아니고 우리가. 섭섭하기도 섭섭했지만 정말 답답했던 건 새댁이 틀어진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근래에 새댁하고 나누었던 말이나 행동을 곰곰이 되새겨보았지만 딱히 집히는 구석이 없었다. 나이 차이로 치면 막내 동생뻘이라 붙들고 따지기도 우스웠다. 삼복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새댁이 좋아하는 오징어 초무침이랑 파전을 만들어 몇 번 날라다 주어도 배탈이 났다며 접시 채 되돌려 보냈다. 주는 사람 입장만 무참할 뿐이었다. 혼자 속앓이를 하다 501호에게 털어놓았다. 아파트 입주 때부터 터 잡고 살아온 501호는 자타가 인정하는 목련아파트 소식통이었다.어느새 선풍기를 통째로 껴안은 501호는 턱 끝을 치켜들었다.
“이 아파트에서야 내 말 한마디면 다 오케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부탁하는데 수위 아저씨가 안 된다 하겠어.”
너는, 이라고 튀어나오는 막말을 간신히 삼켰다.
“……진창을 만들어놓고 이제 나보고 뒷설거지까지 해라.”
“미안해, 동상. 내가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나도 잘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할 일없는 여편네들이 괜한 입질을 해가지고…….”
501호의 흐릿한 뒷말을 매미 울음소리가 덮었다. 시내 변두리의 오래된 아파트답게 조경수들이 제법 굵었고, 그 무성한 가지마다 매미들이 붙어서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폭염주의보를 동반한 불볕이 펄펄 끓는 대장간 화덕이라면 매미 울음소리는 그 열기를 부채질하는 풀무였다. 가득이나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아파트 주민들은 밤낮 없는 매미 울음소리에 짜증을 냈다. 살충제를 뿌리자는 주민들도 있었고 매미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조경수를 죄다 베어버리자는 황당한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푸념을 아는지 모르는지 징글징글 울어대던 건 매미들만이 아니었다. 단지 내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더위에 지치지도 않고 입방아를 찧었다. 여자들의 수군덕질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입방아에 오른 대상이 바로 내 남편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더 이상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501호는 왈칵 성을 냈다. 무릎을 세우는 폼이 베란다 너머로 쫓아나갈 기세였다.
“매미들이 지랄이 났나!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매미들까지 발악이네.”
으이그!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리액자가 파편을 튀기며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501호는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그래도 입은 살아가지고 내빼면서도 잊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리 미워도 옷 좀 다려 입혀 내보내라. 그 옷 꼴이 뭐냐. 현석아빠야 선비 중에 선비인데 그게 말이나 되냐고. 현석아빠가 어떤 사람인데.”
그것도 위로랍시고. 병 주고 약 주고.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긴 뭘 안다고 끝까지 입을 놀리는지. 저 능구렁이 같은 혓바닥으로 새댁을 얼렀겠지. 떠벌리기 좋아하는 저 주둥이에 절대 들어가선 안 될 말까지 털어놓게 했겠지. 가는 사람 뒤통수 따갑게 현관문을 힘껏 닫아걸었다.
501호가 혹 떼려고 왔다가 오히려 혼만 나고 간 뒤 휴지통에 유리조각부터 주워 담았다. 유리액자를 부수려던 건 아닌데 아까워서 속이 쓰렸다. 제일 큰 유리조각을 집어 드는데 유리액자에 끼어져 있던 사진이 너덜너덜 매달려왔다. 현석이 초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현석이가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니 오래 전 사진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현석이 볼 살은 토실하고, 나나 남편도 풋풋해 보였다. 이 사진을 찍을 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입학식이라고 미장원에서 머리도 하고 코트도 새로 사 입었는데. 모처럼 젊고 예쁜 시절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마음이 상해버린 나는 사진을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사진 속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비위가 뒤틀렸다.”
사십 줄에 들어서면서 부쩍 머리가 벗겨진 남편은 앞집 새댁을 보면 마누라 앞에서도 표정관리를 못했다. 나긋나긋한 새댁의 목소리만 들려도 엉덩이를 들썩였고 하늘거리는 새댁의 치맛자락만 보아도 입이 벌어졌다. 새댁이 겉절이라도 보내온 날이면 눈꼴시게 굴었다. 무친 손이 야들야들하니까 배추까지 아삭아삭하네. 아줌마야, 나이 들어 뱃살만 늘리지 말고 음식솜씨도 늘어봐라. 정 안되면 젊은 새댁에게 좀 배우던지. 내가 노려보는 것도 모르고 시부렁댔다. 새댁을 막내여동생처럼 예뻐했었기에 무시하고 넘겼지만 지나와서 떠올려 보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내 눈을 피해 새댁의 하얀 목덜미와 가는 허리까지 슬쩍슬쩍 훔쳐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는 질투가 났어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는 새댁과 관련된 모든 일이 너그럽게 보아졌고 살붙이처럼 마냥 다독여주고 싶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해 나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나와 어울릴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앞집 새댁에게 정이 갔다.
속눈썹이 까맣고 웃을 때 한쪽 뺨에 볼우물이 살짝 패는 새댁이 목련아파트로 이사 온 건 작년 봄이었다. 그날이 기억에 또렷한 건 목련꽃 때문이었다.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단지 내 목련꽃이 밤사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흐드러진 하얀 꽃잎에 기분이 들뜬 나는 이불을 내다 털면서 혼잣말을 했다. 좋은 사람이 오려나 보다. 부담 없이 차 한 잔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목을 길게 빼고 이삿짐 트럭에서 내리는 세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다리차를 타고 602호로 올라간 깔끔한 세간처럼 말쑥한 새댁내외는 이삿짐을 들여놓은 뒤 인사를 왔다. 새댁이 내민 접시에 팥시루떡이 소복했다. 새댁의 마음씀씀이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후덕했다. 위아래 집 정도가 아니라 같은 라인 삼십 집과 수위 아저씨와 청소부 아줌마에게까지 떡을 돌렸다. 떡을 받아든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새댁 칭찬을 했다. 역에서 멀고 한적한 동네라 이사도 뜸했지만 옛날과 달리 이사 떡까지 돌리는 집이 드물었다. 누구라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새댁은 나보다 십년 이상은 어려 보였다. 그러나 막상 말문을 트고 보니 새댁의 나이는 의외로 많았다. 서른이나 되었을까 짐작했던 새댁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가랑가랑하고 아가씨처럼 늘 옷매무새가 단정하기도 했지만 새댁이 나이에 비해 훨씬 앳돼 보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결혼 칠년 차인 새댁에겐 아직 아이가 없었다. 육아와 살림에 찌든 사람 입장에서는 신혼을 오래 즐기니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속마음은 탔다. 만혼이 추세라 나이는 아직 젊다 해도 결혼햇수가 주는 중압감이 컸다. 시댁의 성화에 새댁은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불임클리닉을 다니고 있었다.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인공수정이 수월한 건 아니었다. 병원에 다니며 들이는 시간과 비용과 공도 컸지만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공수정 결과가 음성으로 나온 날이면 새댁은 상심한 나머지 자리에 누웠다. 한동안은 우울증이 심해져 병원치료까지 받았다. 옆에서 보기 정말 딱했다. 새댁이 의지 삼아 찾아오면 나는 달리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그저 새댁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수위실에 가기 전, 501호에게 슬쩍 운을 떼었다. 남편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가릴 건 가려야겠다고. 501호가 바로 따라나서겠다는 걸 무슨 좋은 구경났냐고 핀잔을 주었다. 좋은 구경이라는 말에 군침을 삼키던 501호는 내 시퍼런 서슬 앞에 달아오른 호기심을 누르느라 입맛을 다셨다. 어둠 속 501호의 찐득한 시선을 느끼며 나는 수위실로 내려갔다. 창문을 두드리자 졸고 있던 수위아저씨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선잠이 깬 수위아저씨는 벽에 붙은 시계부터 보았다. 시계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뜨악한 표정의 수위아저씨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재빨리 사정을 말했다.
“601호에요. 낮에 부탁드렸던.”
“아, 601호.”
영문 모르는 수위아저씨까지 덩달아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선반 위에는 낮에 수위실에 넣어준 플라스틱 통이 깨끗이 비워져있었다. 얼음을 가득 띄운 냉커피는 효과가 있었다. 수위아저씨는 묵직해 보이는 열쇠꾸러미를 들고 선뜻 앞장을 섰다. 나는 오가는 사람이 없나 주위를 살폈다. 열대야를 피해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몸을 낮추고 꽁지발로 뒤따라가 보니 수위아저씨는 관리실문을 열쇠로 따고 있었다. 관리실문을 열자 닫힌 공간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멈칫거리던 수위아저씨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가 형광등 스위치에 손을 뻗었다.
“아저씨, 저 잠깐만요.”
나는 준비해간 손전등을 켰다.
“한밤에 관리실 불이 켜져 있으면 이상하게들 여겨서.”
수위아저씨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싶었는지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를 켜고 디지털녹화기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내가 내려진 블라인드를 확인하는 동안 수위아저씨는 녹화 파일 검색까지 해두었다.
“날짜가 맞나 모르겠네.”
모니터에 뜬 파일의 녹화 날짜를 살펴보니 틀림없었다. 새댁이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간다던 날이었다. 나는 만 원짜리 두 장을 얼른 쥐어드렸다. 경비 월급이 박해서인지 배춧잎 한두 장이면 성가신 부탁에도 군말이 없었다. 눈치 빠른 수위아저씨가 자리를 비켜주자 녹화 파일을 클릭했다. 501호가 뾰족한 수라고 거들기 전부터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덮어놓고 새댁 말만 믿을 수도 무턱대고 남편만 의심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남편이었다.
엘리베이터 사건을 따지고 들었을 때 남편은 콧방귀를 뀌었다.
“할 일없는 여편네들이 하는 짓거리란.”
“웃어. 내가 남부끄러워서 밖엘 나가지 못하는데. 뒤에서 껴안기만 한 거야, 가슴까지 만진 거야?”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남편은 되레 버럭 화를 냈다.
“새댁이 없던 일을 있었다고 했겠어. 새댁이 미치지 않고서야 왜 없던 일을 있었다고 했겠냐고.”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나이 먹으면서 강짜만 늘어가지고.”
남편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 나는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래, 나 늙은 년이다. 그래서 새댁만 보면 좋아서 내 앞이고 현석이 앞이고 헤헤거렸어? 젊은 년이 좋아서 그 짓했냐고.”
과거에 쌓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사정없이 남편의 옆구리를 꼬집고 할퀴었다.
“아악! 이게 왜 이래!”
손톱이 날카로웠는지 남편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뜯겨진 살갗을 들여다보던 남편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내가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 여겼는지 남편은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휴……, 비가 왔어. 비가 온 건 확실해. 회식 끝나고 내가 택시 타려는데 김대리가 어디서 구했는지 우산을 갖다 주더라고…….”
마지막 한 방울을 쥐어짜듯 남편은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미끄러졌을 거야.”
“그래서?”
“뭘 그래서야. 술 취했는데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해!”
악에 바친 남편의 굵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베란다를 넘어갔다.
“조용히 해! 동네 자랑이야!”
종주먹을 들이대긴 했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는 남편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501호 말대로 선비 중에 선비는 아니어도 남편이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는 게 탈이라면 탈이었지만 그렇다고 술 먹고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고를 친 적도 없었다. 문상을 구실로 불미스런 외박도 여러 번 했지만 여자문제로 대놓고 속 썩인 적은 더군다나 없었다. 아무리 새댁에게 흑심이 있다 해도 다른 곳도 아니고 문 열고 나가면 바로 맞닥뜨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빠르게 돌리던 모니터 화면을 정지시켰다. 화면 안으로 남편이 들어오고 있었다. 몇 올 되지도 않는 머리는 헝클어지고 걸음걸이부터가 갈지자였다. 모르는 남자였다면 나부터라도 겁을 집어먹었을 몰골이었다. 바지 꼴 봐라. 삼복에 다리미질이 얼마나 고역인데! 술자리를 전전하는 동안 구겨졌을 후줄근한 양복바지를 보자 손톱에 힘이 들어갔다. 치미는 욕지기를 누르고 다시 플레이버튼을 클릭하자 뒤이어 새댁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새댁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남편은 길게 내밀고 있던 우산부터 옆으로 비켜들었다. 얼굴은 불콰했지만 몸을 추스르는 걸 보니 취중이라도 정신은 있던 모양이었다. 새댁은 남편에게 더 이상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양쪽 팔을 엇갈려 팔뚝을 감싸 안은 새댁은 골똘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간밤에 꾼 꿈이 좋았다며 벙글거렸었는데. 가족 없이 자라 정이 그리워선지 꼭 친언니처럼 느껴져요. 동생처럼 응석을 부리던 새댁이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서로에게 못할 짓이었다. 잘 해결해보려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서로의 감정만 상해갔다. 양심에 걸릴 것 전혀 없다는 남편의 당당함에 용기를 내어 새댁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해가 있으면 오해만 풀면 되겠지. 그러면 새댁도, 제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었네요, 할 줄 알았다. 단지 내 소문이 왁자하게 퍼진 걸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변명은 새댁에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제가 똑똑히 기억하거든요.”
새댁은 얼굴을 붉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람이 힘들 때는 별일 아닌 일도 좀 크게 보이고.”
“저도 비가 왔던 건 기억해요. 제가 얼마나 똑똑히 기억하는지 들어보시겠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그날 병원에 갔고요. 집으로 그냥 돌아오기에는 울적해서 친구하고 밥을 먹었어요. 밤늦게 집에 오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고요. 그러고 보니 우산 색깔도 기억나네요. 짙은 초록색이었을 거예요. 좀 더 밝은 색 우산을 사려는데 남은 게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짙은 초록색 우산을 사들고 저 밑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걸어오다가…….”
새댁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남편 얼굴 마주보기 힘들 것 같아서 놀이터 벤치에 한참 앉아있었어요. 엘리베이터 탔는데 아저씨가 먼저 타 계셨어요. 아저씨가 술 많이 취하셨더라고요. 그날 있었던 일은 다른 날보다 기억이 더 또렷한데 그걸 구분 못하겠어요. 미끄러진 건지 의도적으로 그런 건지 여자들이 느낌으로 안다는 걸 앞집 언니도 잘 아시잖아요.”
눈물범벅이 된 새댁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앙칼지게 대들었다. 한동안 날 외면하던 이유를 조심스레 털어놓았을 때와는 너무 달랐다. 앞집 언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새댁은 501호의 교묘한 유도 질문에 넘어갔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근사근하던 새댁이 날을 세워 나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피해자인 여자로서 자신을 방어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했다. 우리 남편을 뭐로 보는 거야! 안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고함을 꾹 눌러 참았다. 그때만 해도 새댁의 감정만 풀어진다면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순진한 생각을 품었다.
창문까지 닫아둔 관리실은 찜통이 따로 없었다. 부릅뜬 눈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화질이 나빠 남편 말대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는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는 동안 화면 속의 새댁은 작동 버튼 바로 앞에 남편은 조금 떨어진 뒤쪽에 서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은 정지된 양 흘러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새댁이 먼저 내리고 남편이 뒤따라 내렸다.뭐람! 맥이 빠졌다.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던 짧은 시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을 뿐이었다. 눈에 띄는 거라고는 남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상체가 유독 앞으로 쏠렸다는 거였다. 그럼,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미끄러진 건가. 그러나 그 이상은 화면이 비춰지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니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조차 이제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다음에는 엘리베이터의 빈공간만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했었는데. 화면을 다시 앞으로 돌리던 나는 스틸버튼을 클릭했다. 우산이 없었다. 새댁이 편의점에서 샀다던 짙은 초록색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새댁을 핸드폰으로 불러내기 전에 한참을 망설였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정을 가진 다 큰 성인들이었다. 내심 서로 불쾌하고 찜찜한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가슴에 묻어두고 잊은 듯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와 새댁 단둘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이 동네에서 살아가고, 살면서 현석이 결혼도 시켜야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소문이 돌고 돌면서 새끼를 치는 동안 나만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는지 기가 찼다. 요만큼도 내색하지 않던 여자들이 모여서 신나게 짓씹었을 걸 생각하면 수치스럽고 만정이 떨어졌다. 슈퍼주인도 내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같이 몰려다니던 여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괘씸해서 귀띔해주리라 마음먹었단다.
마침 슈퍼에는 슈퍼주인과 나밖에 없었다.
“현석엄마, 그 소문 사실이야?”
지갑을 열던 내 손이 멈칫했다.
“무슨 소문?”
“현석아빠가……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되나.”
“현석아빠가 뭘!”
나도 모르게 억양이 높아졌다.
“여자들이 쑥덕거리는데 현석엄마가 모르는 것 같아서.”
슈퍼주인은 잠시 주춤했다.
“현석아빠가 앞집새댁…… 성폭행했다고 소문이 났더라고.”
“뭐, 성폭행!”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슈퍼주인은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재빠르게 눈알을 굴리면서 번복할 말을 찾았다.
“그러니까 술 먹고 뒤에서 껴안았다고.”
“술 먹고 뒤에서 껴안으면 성폭행이야? 제대로나 알고 말해. 그리고 누가 그래? 누가 남의 집 가정파탄 시키려고 생사람 잡는 소릴 하냐고. 누군지 말해. 그 년 아가리를 찢어놓을 테니까!”
슈퍼주인은 내 팔을 붙들었다. 내가 흥분하면 말해준 자기 입장만 곤란하다는 거였다. 진정시키는 슈퍼주인을 힘껏 뿌리치고 나는 그 길로 501호로 달려갔다. 말이 새나갔다면 나 아니면 새댁, 새댁 아니면 501호밖에 없었다. 조심성 많은 새댁이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돌아다녔을 리는 만무했다. 501호의 유도질문에 새댁이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기겁을 했다. 익히 그 가벼운 입놀림을 알고 있던 나는 501호에게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걱정 붙들어 매라며 온갖 염려까지 해주던 말간 혀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었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로 501호로 뛰어 들어갔다. 형님아우 따위의 예의도 도리도 안중에 없었다. 501호와 한참을 뒤엉켰다 떨어지고 보니 손아귀에 한 뭉치의 머리카락이 뽑혀져 있었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신발 끄는 소리도 울릴 만큼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매미들만이 가로등에 붙어서 울고 있었다. 새댁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관리실의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새댁이 몸을 사리고 걸음을 돌릴까 형광등은 계속 꺼두었다. 어둠 속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정지화면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전등을 새댁에게 비추었다.“잘 봐봐.”
관리실에 들어서면서부터 훌쩍거리던 새댁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정지화면 속의 새댁은 양쪽 팔을 엇갈려 팔뚝을 감싸 안고 골똘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새댁의 핸드백은 너무 작았고 새댁의 양손 어디에도 우산은 들려있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들을 사람 있으면 다 들을 수 있게.
“분명 기억한다고 했지. 그날 비가 온 거 기억한다고. 기억이 또렷하다고. 그런데 우산이 없잖아. 편의점에서 사들고 왔다던 우산은 어디에 있어? 이때까지 새댁하고 쌓인 정을 생각해서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날 새댁 정신없었던 거 아니야. 미끄러져서 좀 부딪힌 거하고 뒤에서 덮친 거하고 구분도 못할 만큼 경황없었던 것 아니냐고. 우울증 때문에 정신병원 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잖아.”
정신과 치료를 들먹이자 울먹이던 새댁의 어깨가 흠칫했다. 젖어있던 새댁의 눈망울이 빠르게 말라가면서 가는 실핏줄이 섰다. 나는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끝까지 몰아쳤다.“새댁이 불임 때문에 힘들다는 건 알아. 이번엔 기대도 많이 했는데 또 글렀으니 속도 상했겠지. 그렇다고 멀쩡한 남의 집 가장을 치한으로 몰아서야 되겠어. 우울증이 심해지면 없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며. 말이 좋아 우울증이지. 그게 바로 정신병이잖아. 어때, 내 말이 틀려!”
손전등이 비추고 있던 새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원인을 불안정한 자신의 정신상태 탓으로 돌리는데 질렸는지 새댁의 벌어진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나이만 먹었지 아직 아가씨 태를 못 벗은 새댁이었다. 한줌 허리의 새댁이 두꺼워진 뱃살만큼 거칠 것 없는 중년 아줌마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새댁은 도망치듯 자리를 뜨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의자가 나뒹구는 순간 새댁의 몸이 휘청거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501호가 관리실 한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고 걸어가는 새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 안 가득 생피가 고였다. 비릿하고 구역질이 났다. 나라는 여자도 결국, 별 수 없는 인간이었다. 높아진 언성을 쫓아 관리실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501호의 그림자를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몸은 무거운데 잠이 오질 않았다. 누가 보아도 내가 이긴 싸움이었다. 새댁이 말문이 막혀 쫓겨 가는 걸 501호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개운하지가 않았다. 욱하는 마음에 새댁을 정신병자로 몰았지만 새댁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새댁 말대로 편의점에서 우산을 산 게 분명하다면 대체 우산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머리가 지근거렸다.드르렁!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잠에 곯아떨어진 남편이었다. 사지를 쭉 뻗고 코까지 고는 남편의 모습에 심기가 거슬렸다.
“마누라는 싸움질을 시켜놓고 편하게 잠이 오냐!”
자는 남편의 뒤통수를 향해 으름장을 놓아도 성에 차지 않았다. 남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잠자리 밖으로 밀려나가면서도 남편은 세상없이 잠을 잤다. 무던하다 못해 둔한 남편이 어떻게 그런 구설수에 휘말렸는지. 기가 차 피식 웃음만 나왔다. 어쩜 눈치껏 약삭빠르지 못해 괜한 오해를 산건지도 몰랐다.
그래, 오해다. 뙤약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로 잠시 피어오르는 신기루다. 생애 마지막으로 울다 사그라질 매미들의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다. 이십년 가까이 살 섞고 살아온 정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고, 구겨진 체면이 분해서라도 그렇다고 믿어야 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못 찾아도 그만이었다. 놀이터라도 둘러보고 와야 맘이 놓일 것 같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놓은 옷가지를 끌어당겼다.
가로등불빛에 어룽진 놀이터는 이른 새벽인데도 제법 밝았다. 새댁이 한참을 앉아있었다던 벤치 주변부터 뒤졌다. 벤치 위로 드리운 무성한 나뭇가지는 소낙비를 피하기에 넉넉했다. 새댁이 우산을 접고 잠시 마음을 달래기에 놀이터 벤치는 충분히 고즈넉했다. 나는 눈에 띄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수풀 사이를 쑤셨다. 무성한 잔디 사이사이 숨어 있던 모기들이 살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맨살의 다리가 따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모기들이 살을 뜯도록 내버려두었다. 모기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댁이 정신을 추스르기 전에 우산을 찾아야 했다. 새댁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찾아 나올 수도 있었다. 관리실을 나갈 때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봐선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겠지만.급하게 수풀을 헤집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긴 작대기에 발부리가 걸렸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리를 들여다보았다. 돌멩이에 짓찧은 정강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쯤이야. 이를 악물었다. 손을 뻗어 발에 걸렸던 작대기부터 집어 들었다. 짙은 초록색 우산이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니 우산살 하나 부러진 것 없이 말짱했다. 새댁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다가 흘린 우산이 틀림없었다. 수풀에 가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먼저 찾아냈으니 천만다행이다.
우산 숨길 곳을 찾아 서성이는 동안 동쪽 하늘에서 붉은 기운이 번져 올라오고 있었다. 해의 기운을 느낀 매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단지 내 모든 매미들이 일제히 나를 지목해 울어대는 것만 같았다.
“그 입 닥치지 못해!”
매미들을 향해 정강이를 짓찧었던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미치지도 못한 돌멩이는 나무 밑둥치에 툭 떨어졌다. 맥이 빠진 나는 잔디 위에 퍼질러 앉아 어린애처럼 훌쩍거렸다. 그악스런 매미 울음소리를 돌멩이 따위로 막을 순 없었다.
날이 밝기 무섭게 새댁과 내가 결판을 냈다는 소문이 아파트 단지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우울증이 무섭긴 무섭구나. 새댁에게 쏟아졌던 동정의 눈길들이 꺼림칙한 경계의 시선으로 변했다. 새로운 입질거리가 생긴 501호는 단지 내 사람들을 붙들고 신이 나서 떠벌렸다. 새댁 속눈썹이 까만 게 음기가 강해보였다는 둥 한쪽 볼우물이 있는 여자들이 원래 색을 밝힌다는 둥 너무 색을 밝혀 애가 들어서지 않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둥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들을 지껄이고 다녔다. 내가 있는 자리면 부러 더욱 큰소리로 새댁을 음해했다.
“원래 요래 눈을 내리깔고 다니는 여자들이 뒤로 사람 잡는다니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찡긋했다. 그렇지. 내 말이 맞지. 내가 이렇게 떠들어주니까 속 시원하지! 동의를 구하는 눈짓이었다. 나는 그따위 근거도 없는 헛소리 집어 치우라고 화를 내는 대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기세가 오른 501호는 나의 환심을 되사려고 새댁을 더욱 깎아내렸다. 새댁이 허술하고 음탕한 여자가 되면 될수록 남편은 무고하고 결백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602호 현관문이나 엘리베이터 여닫히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나마 새댁이 숨기고 싶어 하던 천애고아로 자랐다는 비밀만은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나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다만 더위가 물러가고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단지 내 상가 부동산 유리창에 602호 전세 매물광고가 나붙었다.
하얀 목련꽃의 환영을 받으며 사다리차를 타고 602호로 올라갔던 세간이 이삿짐 트럭으로 차곡차곡 되들어가고 있었다. 새댁은 보이지 않고 새댁의 신랑 혼자 인부 서넛이 이삿짐 꾸리는 걸 거들고 있었다. 추분도 지나 매미들은 땅속으로 숨어들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는 제법 차가웠다. 새댁의 신랑은 가는 비 정도는 무시하고 싶은지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았다. 좁은 코에 걸친 뿔테 안경에 빗방울이 맺혔다. 이삿짐 트럭이 출발하자 새댁의 신랑은 뿔테 안경을 쓰윽 치켜 올리고는 하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젖은 아스팔트를 천천히 달려 아파트 단지 밖으로 사라지는 하얀색 승용차의 뒷모습을 베란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모퉁이를 돌며 뒷바퀴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렸다. 정강이의 상처도 아물어가고, 새댁과의 씁쓸한 인연도 끝이 났다. 힘겨운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들어서려는데 뒷덜미가 서늘했다. 돌아보니 열려진 베란다 창고 문 사이로 우산이 비죽 나와 있었다. 짙은 초록색 우산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렸다. 누가 볼까 얼른 짙은 초록색 우산을 욱여넣고, 베란다 창고 문을 굳게 걸어 닫았다. 괜찮아, 괜찮아. 새댁에게 했던 말을 어느새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큰 갈망, 생애 치열한 도전의 결실"
“저에게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핸드폰을 붙들고 울부짖었습니다. 지나친 갈망이 낳은 환청이라 의심할 만큼 당신은 제 생애 치열한 도전이었습니다.
디딤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하며 조금씩 자라나는 학생들을 생각하며 깨달았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우직하게 부딪쳐온 삶의 모든 순간들. 제겐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작가의 길.유학을 권유한 미군부대 상관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응답에 미국 대사관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건장한 청년의 꿈.
미스꼬시 백화점 샹들리에 아래에서 백화점 사장이 되겠다고 결심한 피난살이 단발머리 소녀의 꿈.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꿈이 오늘의 저예요.
글에 몰두한 십 년 가까운 세월, 어느새 아이들에게 도서관이란 놀이터와 책이란 친구도 생겼네요.
이제 세상을 너희들의 놀이터와 친구로 삼으렴.
마지막으로 스승, 조동선선생님. 글쓰기에 지쳐 포기하려했을 때,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호되게 꾸짖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당대의 문제와 맞닿은 소설을 쓰라하신 선생님의 가르침.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산 아래 들탑에서 새봄을 기다리며-
● 1969년 서울 출생
● 서울시립대 수학과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사소한 소재의 소설화 발군의 솜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12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붉은 달’ ‘어떤 커밍아웃’ ‘매미 울음소리’ 3편이었다. 이 3편은 서로 개성이 다르고 소설을 만드는 솜씨며 매력도 달라서, 나로 하여금 어느 한 편에 쉽게 기울지 못하게 하였다.
‘붉은 달’은 한땀한땀 수를 놓아가듯 꼼꼼하게 엮어가는 사실적 문장이며 묘사력이 돋보여서 오래 나의 눈길을 끌었지만, 주인공의 살인에 대한 필연성이나 진정성의 결여가 아쉬웠다. ‘어떤 커밍아웃’은 소설인가 혹은 논문인가 하고 머리를 기웃거릴 만큼 실험적인 작품이다. 주제며 문체 또한 그만큼 새롭고 산뜻하였지만, 커밍아웃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육화시키지 못한 채 끝내 상식적인 시각에서 머문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매미 울음소리’는 일종의 세태소설 범주로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다. 소재며 전개되는 이야기 또한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친숙하고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큰 무리 없이 마무리 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듯 일상에서 대할 수 있는 친숙하고 사소한 소재를 소설로 만드는 솜씨는 거의 발군이다. 걸죽하면서도 맛깔진 문체며 능청스럽기까지 한 이야기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작가가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작품 자체로는 자칫 가
십적이고 꽁트적이어서 무게가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매미 울음소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살려, 앞으로 우리 문단에 커다란 기둥이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 송기원
'좋은 글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비단길 / 김경나 (1) | 2020.04.12 |
---|---|
[2011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바닷가에 고양이 의자가 있었다 / 이근자 (1) | 2020.04.09 |
[2011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피쉬테라피 / 김경락 (0) | 2020.04.07 |
[2011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 / 차현지 (0) | 2020.04.06 |
[2011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냄새 / 최백순 (0) | 2020.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