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 / 오다정

 

달력 뒷장을 읽는다

무심한 세월이 쓰고 간

투명한 글씨 위 아버지

長江 한 줄기 그리셨다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

가보지 못한 세월 너머로

進進, 언덕으로 포구로

그 어디 너머로 進進

화면 가득 띄우고도 모자라

반 토막만 남겨진 배


돛대도 물결도 반 토막이

된 자리, 아버지 또 그리신다

정직한 삼각형

한· 두· 세· 네

넘어보자 했으나 넘지 못했던

능선 뾰족뾰족 이어진다


빨갛고 검은 日歷의 뒷면

연습 없어 미리 살지 못한 세월로

열 두 척 반, 배 떠간다

아버지, 그려내신 한 장 그림

소실의 문자 빼곡히 박힌

발음되지 않는 국어책 같다




  <당선소감>


   글자들에 세상을 구겨넣던 나… 오늘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노래를 듣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따라도 불러 봅니다. 그러다가 잠잠히 그저 듣기만 합니다. 세상에 노래는 얼마나 많던가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의 순정을 다해 노래해 왔던걸까요. 그들의 노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노래는 왜 이렇게도 못생겼을까요? 그런데도 거기 누군가는 제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좀 귀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못생긴 노래에 담은 지극한 순정함과 곡진함을 당신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외로움에 지쳐 저의 노래들이 시들기 전에 말입니다

  다르게 말 할 줄 몰라서, 다른 말을 배우지 못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자들에 죽어라고 나의 세상들을 구겨 넣고 앉았었던 저를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못생긴 노래를 힘을 다해 부르고 앉은 저를, 저의 지난 날들을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저의 기억이 혹여 당신의 기억인 걸까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빚을 쓰는 것이라고만 믿어 왔던 제가 떠나 온 자리는 너무 먼 곳이어서 이젠 처음 빚을 냈던 자리로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제가 절 무너뜨렸던 걸까요?

  보세요, 정신의 가장 차가운 바닥에 나를 쓰러뜨렸던 당신, 몇 번이고 꺾이면서도 무릎을 털며 일어서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주저앉히곤 했던 당신, 삼엄한 당신, 다정한 당신, 그리고 우스운 당신, 오늘은 저를 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가족이 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아버지 어머니, 형부 양웅식 큰언니 김종민, 영원한 마음속의 은사, 민해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 지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었던 미선언니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연옥, 용옥, 향선. 모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밝은 눈으로 늙은 미래를 축복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열심을 다해 노래부르리라 다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 1965년 경기도 포천 출생
  ● 송곡여고 졸업, 국민대 시창작과정 수료
  ● 현 동두천시 거주, 분식점 운영
 

 

  <심사평>


  은유·상징 적절히 조율된 수작… 앞으로 좋은 시인 되리라 확신


  오다정씨의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은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시다.

  이 분의 시에는 우선 어려운 말이 없다. 시에 어려운 말을 쓰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런데 본심에 올라온 시가 대개 그러한 시였다. 시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삶을 노래하자는 것이므로 문장이 헛갈리거나 하면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누가 끙끙거려가면서까지 시를 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을 건 다 있다. 행과 행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사유의 도약은 읽는 사람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당선작은 은유와 상징, 환상, 그리고 우리네 생활이 적절히 조율된 수작이라 할 만하다. 가령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에서 연과 연 사이의 바다를 보라! 게다가 '반 토막만 남겨진 배'는 우리를 금세 이 세상 저편으로 싣고 가지 않는가. 더불어 '굽이굽이' , '進進', '뾰족뾰족' 등등 적절히 배치한 리듬은 시의 맛을 크게 살려준다. 이만한 '언어'와 '사유'라면 당선작으로 충분했다. 최근 회자되는 장광설의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상쾌한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최인숙씨의 '무지개' 와 허영둘씨의 '고요를 잘 살펴보면' 등이었다. 모두 잘 짜여진 작품들로 읽혔으나 굳이 단점을 들라면 너무 기성품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서툴지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새롭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아쉽게 내려놓게 됐다. 이 분들 역시 훗날 좋은 시인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 안도현, 장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