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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핑고 /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당신의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이 자리에 제가 앉아도 괜찮은가요?"/미안해요 여기/당신이 앉았던 자리인가요//접혀 있는 페이지는/당신이 읽던 페이지였고//아무렴 어떤 가요 슬픈 페이지를 넘기면/또 다른 슬픔이 펼쳐지는 걸요//유리창은 햇빛을 쏟아내더니/이내 비구름을 몰고 오네요//책 귀퉁이가 닳도록/당신이 읽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바라보는 일 밖에 할 줄 몰라서/다가가는 일도 제겐 큰 용기가 필요했지요//당신은 잠시 자리를 비운 걸요/이 자리엔 누구나 앉아도 괜찮습니다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었습니다. 삐걱삐걱 의자가 소리를 내면 제 뼈들도 뚜둑뚜둑 화답을 합니다. 그렇게 저도, 의자도 함께 낡아가겠지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출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겠습니다.생애 처음으로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이신 김윤배,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제게 피와 살을 주신 황의열·강신해님, 정숙광·선정선, 늘 저와 함께하는 김영형·김수민, 문전성시 최지온·서미숙·금희숙·김혜숙·염형기·박양미님, 문장강화 김산 선생님, 조재일님,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파피루스 김혜정·김율관·이해민님, 시와 찻잔 김희광 선생님과 문우님들, 용산도서관 이승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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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 확장된 미학 눈길
이번 응모작들은 일상성에 노출된 실업, 가족, 반려, 생태 등을 소재로 한 사회적 문제에서부터 코로나19를 반영하듯 감염과 질병 등에 주목하며 삶의 보편적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이 가운데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는 다채로운 경향의 시편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층위를 건드리는 시편들을 통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의 자리를 살펴보았다.여기서 모던한 시적 상상력으로 고유한 사물을 새롭게 견인하면서 긴장감 있게 구현하고 있는, 1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또한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은유의 한계를 유연하고 감각적인 발상으로 작동시키면서 시어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의 특질을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평균화된 시작에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러나 예심 작품들 중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묘사들과 관념어들이 오히려 번뜩이는 상상력에 균열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황정현씨의 '핑고'와 강현주씨의 '고양이' 등 두 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려놓았다.이 두 작품 모두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존재의 모순을 해체하여 시적 언어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와 확장된 미학을 끝까지 선보인 '핑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정연하지 않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핑고'는 담담한 어조로 '빙산'의 푸른 내부를 응시하면서 '무덤 속 얼음'이 '흙을 밀어 올리는' 생명의 신생과 사멸에의 '언어적 밀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신예로서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끝까지 입을 모았던 후보작 역시 공교롭게도 '빙하'의 '너울거리는' 생명에의 내부조직을 '강렬한 축문'으로 읽어내는 냉담한 시선과 사물을 여과하는 치열한 시적 안목을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최종심에서 거쳤다.

심사위원 : 문태준, 권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