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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당선소감>

 

   "도망치긴 싫었다…버티다보니 해볼 만했다"


  ‘쓰고 싶은 시와 쓸 수 있는 시가 서로 달랐다. 당선된 시편은 그동안의 기록이다.’

  고등학교 시절,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작성한 당선 소감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늘 그런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던 내게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준 이가 있었다. 존경하는 동료인 그의 말을 들은 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앞으로의 다짐은, 나를 버리지 않기 그리고 밀어내지 않기, 견뎌보기, 내버려 두기다. 이렇게 여기자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나는 내가 해볼 만한 것 같다!

  때론 삶이 극도로 평범해 어떠한 사건이라도 각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한참을 골몰해야 했다. 다 쓰기 전까지는 집에 갈 수 없는 기분. 집이면서도 그랬다. 집인데 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건지. 집이 진짜 있기는 한 건지. 그럴 때는 일단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나한테 모질게 굴던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헤아렸다. 우는 게 싫고 부끄러운 것도 싫어서 울고불고하다가 이를 갈았다. 팔뚝을 깨물어 남은 잇자국을 만지면서 내 이야기를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박규현은 그냥 박규현이므로.

  나를 늘 응원해준 가족, 친구 그리고 서울과기대 교수님들과 아낌없이 지도해주시는 나희덕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내 시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최선의 최선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

 

● 1996년 서울 출생 
● 서울 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심사위원 : 황지우, 손택수, 김이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