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당선소감>

 

   "기억과 기록…오래 써나갈 것"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쓰는 것이 시일까, 내가 시를 쓸 자격이 있을까? 경향신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울먹이는 제가 선뜻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게 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 하찮아 보일 때, 사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싶을 때 쓰였습니다.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 그런데도 살아보겠다고 꿈틀대는 욕망이 시 속에서만 비로소 쓸모를 찾았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더 어두운 생각을 톺아보고 그보다 어두운 곳에 있을 존재에 기대어 썼습니다. 그랬던 시가 살면서 가장 빛나는 자리로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을 것 같은 두려움에 꿈속에서도 문장을 중얼거립니다. 좋은 시란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으로 덤벼봐도 된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속으로 마음껏 몸을 던져도 된다고, 길을 잃은 곳에서 더 길을 잃기 위해 난장을 부려도 된다는 목소리였습니다.


  함께 시를 써나간 김미라 언니, 양송이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오래 들어왔던 시 수업이 갑작스럽게 폐강한 후 임시저장이란 이름의 작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쓰고 서로의 것을 읽었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에 모니터 화면 너머로 표정을 나누고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낭독을 들으며 저는 써나갈 힘을 가까스로 얻었습니다. 어느 우스갯소리가 기억나네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Ctrl+S만 차리면 산다”고요. 계속, 습관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저장한다는 임시저장이란 기능처럼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 돌아보아야 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시에 저장하며, 오래 써나가겠습니다.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혼불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 1991년생


 

  <심사평>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줘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 능동과 ‘살아지는’ 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박준, 김행숙,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