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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당선소감>

 

   "미래의 나, 미래의 詩에게 이젠 씩씩하게 걸어갈 것"


  나는 늘 어딘가 엉성한 아이였다. 단체 줄넘기를 하면 꼭 줄에 걸리는 아이, 큐브를 맞추는 데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아이, 대답이 느리고 말을 자주 더듬는 아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반드시 긴장해서 실수하는 아이. 자주 망신을 당했다. 내가 엉성한 존재라서 세계도 나를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자의식과 수치심이 비례했다.

  수치심은 내가 느끼는 숱한 감정들의 형이다.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 같은 동생들을 데리고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그런 수치심과 거리를 두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수치심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사랑을 사랑해서, 세계를 사랑해서, 사람을 사랑해서, 시를 사랑해서 나는 엉성하게나마 살아 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더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 그것마저 사랑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시는 그 사랑에 대한 고백이자 답변이었다.

  내 엉성한 발걸음과 어울리는 이상한 길을 끝없이 내어주는 시에게 고맙다. 그 길에 첫걸음을 내딛게 해 주신 한양여대 권혁웅 교수님, 장석남 교수님, 양연주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상한 길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려 주신 이영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못생긴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이 더 멀리 나아가도록 힘을 보태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모든 용기의 근원이 되는 수정, 세리, 재아, 지은, 소정, 민경, 효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고맙다. 혜정, 선우에게도 고맙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 준 연수에게 고맙다. 무한한 지지 속 연대감을 알게 해 준 한양여대 동기들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수기 씨, 고동진 씨, 그리고 동생들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래전 누군가는 내가 머문 자리마다 꼭 흔적을 남긴다며 긴 꼬리 인간이라 놀려댔다. 흔적은 영혼의 때, 꼬리는 거추장스러운 그림자 같은 것이다. 내게는 그런 것이 성가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제는 뒷모습 보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다.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 미래의 나, 미래의 시에게로.

 

● 1997년 안양 출생. 
●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퉁치면서 눙치고, 貫하면서 通하는 시적 패기 높이 평가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입국 심사대에 올라온 본심 대상작 열 분 중 네 분이 남았다. ‘폭우’(외)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감각적 묘사와 시적 통찰이 빛났으나 예견 가능한 시적 구도가 아쉬웠다. ‘팝콘꽃’(외)은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상처 혹은 폭력을 겨냥한 팝콘처럼 튀는 비유적 상상이 매력적이었다. 튀려는 시적 욕망을 조금만 더 제어했으면 싶었다. ‘덫’(외)은 언어를 어떻게 마르고 잇고 매듭짓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어의 압침들이 꽂힐 언어 이전이나 언어 너머의 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졸업반’(외)을 내려놓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편들은 시가 노래와 만나는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듬감이 좋았고 시의 완성도도 높았다.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기시감이었다.

  ‘럭키슈퍼’(외)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 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관(貫)하면서 통(通)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문재, 정끝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