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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당선소감>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 나올 때까지 정진” 삶 속 어둠이 시 자양분 돼 스승과 가족·문우들에 감사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새벽녘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막장으로 가던 바퀴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주말에는 사과밭에 농약을 치던 그의 젖은 등이 선연합니다. 노동의 무게로 아버지의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성실이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평범한 나에게 시를 붙잡고 있게 했습니다.

  살면서 어둠이 나를 늘 따라다닌다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았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었으니까요. 어둠을 끄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천연염색은 여러 번의 색 입힘이 필요합니다. 고운 색을 얻으려면 먼저 불순물을 걸러내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저는 겨우 초벌염색을 통과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공을 들여야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더 정진하며 늘 남은 염색을 생각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둠에 있는 나에게 빛을 주는 존재라 여깁니다. 빛을 좇아가려고만 했던 저에게 빛이 찾아오게끔 길을 만들어준 존재였습니다. 평소에 많은 시를 읽어주시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가족과 문우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서툰 저에게 고마운 빚을 남겨준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1969년 경북 문경 출생 
● 문경고등학교 졸업 
●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시 창작교실


 

  <심사평>

 

  

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 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 <꽃누르미-그들의 압화> 외 4편, 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외 6편, 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 <어떤 필기체> 외 4편, 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외 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 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 장석남, 나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