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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다섯 개의 물의 장면 / 이정은

 

1

11월, 시침은 어디로 가고 없을까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어요
물 없는 화병에서 꽃대는 올라오고
하얀 꽃잎은 향기를 뿜은 듯 버성기네요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 하잖아요
빈 화병에 물을 줍니다
찰랑찰랑 아파트 지하 수면실로 타고 내려가요
보일러 아저씨 잠이 깨요
달력 한 장 젖어요

2

양수리 두물머리
검푸른 물의 흐름이 엉켜있어요
마른 장작 타는 체취,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한잔이 나의 독주이기를
같이 했던 시간들은 윤슬처럼 흩어집니다
물의 카페에서 멀어질 때까지

3

어쩌지, 양수가 흘러내려
생명 다한 꺼져가는 촛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아 굳어버린 촛농들을
무덤 삼아 수그러드는
작은 호흡
물의 끝은 여기까지
인큐베이터 안이 추워

4

어느 시인과 사랑을 했어요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

5

구피의 유영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구피의 번식력이 안방을 휘젓고 있죠
앉아 있을 장소조차 없이 불어난 구피 종자들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

물의 장면, 되돌이표를 그려 넣을까요
 


*주. 김종삼의 시 <民間人>에서 가져왔으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당선소감>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새벽 문을 엽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나요. 구두를 벗어요. 기다란 소파로 올라와요. 꼼지락거려도 되겠지요. 다리를 주욱 펴요. 소파는 크림색인데요.

  발가락은 무슨 색일까요? 보이지 않는 색일지도 몰라요. 보이는 것이 실재하는 건 아닐 거예요.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슬픔에서 나오길 바란다고 해요.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 입안에선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슬픔 대신 Coffee Tea Drink Flower Gift Shop를 먹어요. 바구니에 담아요.

  안에는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어요. 누가 넣었냐고요. 슬픔을 좋아하는 당신이잖아요. 잊었군요. 여기 동명리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망각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문을 열어 두신 것처럼요.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뉴스N제주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행하는 문우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동생,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한 어린이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길러주셨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새벽 문을 엽니다.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 교육문예창작회 회원


 

  <심사평>

 

  

‘해체’와 ‘일원’을 지향하는 작품들

  한 20년 전만 해도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분들은 대개 20대 안팎이었다. 그런데 상당수가 50대 이상인 것을 발견한 우리 심사 위원 일동은 구시대의 가치관에 의한 작품들뿐이면 어찌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 대부분이 의외로 해체적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테마 면에서는 ‘일원(一元)과 다원(多元)’, 구성 면에서는 ‘인과와 해체’, 표현 면에서는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반응’에 고루 초점을 맞추되 유기적(有機的)’인 작품을 뽑기로 합의했다. 어느 한 쪽에만 맞춘 작품들은 잘 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들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관과 시학을 마련할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기준으로 살펴본 결과 황현자씨의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생선 장수인 엄마에 대한 추억을 제재로 삼은 작품으로, 이런 제재를 택할 경우 흔히 그리움이나 효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끊겼다 다시 이어지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상반된 욕망을 드러내 상당히 입체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목을 끈 것은 김용천씨의 작품이다. 「탁란 청춘」은 취업을 위해 여기 저기 자기 소개서를 써 내고 기다리다가 우리 사회가 뱁새 둥우리에 알을 낳아 대신 부화시키고, 둥지까지 뺏는다는 뻐꾸기 사회라는 걸 깨닫고 절망스러워 거리로 뛰쳐나가는 젊은이를 화자로 내세운 작품이고, 「꿀벌 나라」는 어느 일벌이 꿀 따는 사람 하나가 등장했다며 다 뺏기기 전에 나눠 갖자고 제안 하자 계층 별로 분열을 일으켜 애벌레들이 다른 벌레들의 먹이 감이 되었는 데도 못 보는 모습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나정욱씨의 「다족류의 인간들에게」와 「랭보의 행보」는 화자 자신도 해체적임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서는 다리가 열한 개인 사람과 열두 개인 사람들이 싸우는 걸 못마땅해 하지만, 자신도 아침에는 열두 개였다가 저녁에는 열한 개라며 그 까닭을 알려 줄 사람이 없느냐고 절망한다. 그리고 뒤의 작품에서는 ‘시는 인생을 닮았고’, 그래서 앞뒤가 없다면서 ‘행보’라는 단어를 읽다가 ‘랭보’가 생각났다는, 말장난(fun)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정은씨의 「다섯 개의 물의 장면」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결혼식 부케나 장례식 때 관을 장식하는 ‘카라꽃 조화’를 11년씩이나 기르면서 … 생화가 아니라 조화다 … ‘빈 화병’에 물을 주고, 그 물이 흘러내려 지하 보일러실 아저씨의 잠을 깨우고, 자궁의 ‘양수’로 이어 가는 줄거리 역시 해체적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 쪽으로 지향하고, 상상과 환상과 무의식적 본능과 의지와 비판을 한 작품에 담기 위해 연작시 형식을 취하는 점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데 기여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부탁드린다. 현대 사회에서 ‘일원’은 낡은 느낌이 들고, ‘해체’는 혼란스러워 절망을 가중시킬 뿐이다. 삶도 작품도 ‘통합ㆍ조절’ 쪽으로 지향하는 게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니 참고하시기 빈다.

심사위원 : 윤석산, 홍창국, 현달환, 강정림, 이은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