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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가로묘지 주식회사 / 황수아

 

  <인물 소개>

가로: 가로묘지 주식회사의 운영자
세로: 가로의 동생, 묘지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순댓국: 가로묘지 만기된 전세입자(남)
립스틱: 가로묘지 만기된 전세입자(여)
에스그룹연구원: 가로묘지 새로운 전세입자. 청담동 고시원에서 강 건너온 남자.
청담동: 가로묘지 새로운 전세입자. 청담동 고시원에서 강 건너온 여자.
약혼녀: 에스그룹연구원의 약혼녀
경찰

 


어두운 무대. 공동묘지를 연상케 하는 비석들.

사람의 비명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 흙에 파묻히지 않은 관이 일제히 누워 있다.

초록빛 미명, 미명이 점점 보라색으로 변하며

바람 소리 더욱 거세어진다.

실루엣 장면

관 뚜껑이 열리고 사람1, 밖으로 나간다.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또 하나의 관 뚜껑이 열리고 사람2, 관에 앉아 기지개를 크게 편다. 다시 관으로 들어간다.

또 하나의 관 뚜껑이 열리고 사람3, 일어나 앉아 화장을 한다.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간다.

또 하나의 관뚜껑이 열리고 사람4, 흐느끼며 운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간다.

미명이 거두어지고 주홍빛 해가 떠오른 따스한 아침. 가로, 무대로 들어오며 손가락으로 관의 개수를 센다. 세로, 뒤따라 들어오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다. 무대 앞쪽에 놓여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앉는다.

가로: 들었어?

세로: 뭘?

가로: 강 건너 말이야.

세로: 불이라도 났어?

가로: 관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말이야.

세로: 관값이 오르긴 뭘 올라. 이런 싸구려 관짝이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가로: 그래 맞다. 관값이 아니고 관이 놓여있는 땅이 오른 거지.

세로: 제발 그런 거 좀 신경 쓰지 마.

가로: 야. 우리는 비즈니스를 하는 거야. 매일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세로: 강 건너 관값이 오른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린 어차피 강에서 한…참 떨어져 있잖아.

가로: 왜 상관이 없냐.

세로: 그러니까 형이 말해봐. 무슨 상관이 있는지.

가로: (속삭이듯) 곧 사람들이 강을 건널 거야.

세로: 강을 뭐 한두 번 건너? 매일 일하러 강을 건너잖아.

가로: 아니! 그게 아니라 관에서 쫓겨난 사람들 말이야.

세로: 관에서 쫓겨나다니.

가로: 관 임대료를 내지 못해서 말이야.

세로: 그런데 왜 강을 건너?

가로: 보면 모르겠냐. 더 싼 관을 찾아오는 거지. 그게 바로 (관들을 가리킨다.)

세로: 우리 관들이라고?

가로: 당연하지. 강을 건너 북쪽으로 전진하다 보면 강 위에 살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그 사람들은 더 위로 또 그 사람들은 더 위로 점점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거지.

세로: (속삭이듯) 여기도 충분히 비싼 거 아냐?

가로: 이 정도는 껌인 사람들이 있다고. 강남 고시원 임대료가 얼만지 알고나 있냐?

세로: 짐작은 가. (사이) 근데 형은 무슨 생각이야?

가로: 내보내야지.

세로: 노노. 그건 아니 될 말씀이야.

가로: 왜 안 돼?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로: 인간적으로.

가로: 인간적으로? 언제부터 인간 타령이냐.

세로: 그러다가 관이 진짜 관이 되면 어쩌려고.

가로: 잊었냐? 우리가 아파트에 살 때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억 안 나? 그 빨간 딱지 말이야. 개처럼 쫓겨났지. 나는 그때 결심했지. 다시는 우리 걸 빼앗기지 않겠다고. 너 다시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세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래? 제발 헛꿈 꾸지 말자. 현실에 만족하자고.

가로: 다시 들어갈 수 있어. 서울에 아파트만 하나 생기면 우리는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세로: 형. 형의 패기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난 너무 부담스러워.

가로: 형이 그랬잖아. 너 배고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기억나?

세로: …

가로: 너 글 쓰는데 그럴듯한 서재도 하나 있어야지. 응?

세로: 저 사람들 입장도 생각해보라고.

청담동, 이민 가방을 들고 등장한다.

청담동: 저… 여기가 가로묘지 주식회사가 맞나요?

가로: 맞아요. 어떻게 오셨죠?

청담동: 관을 하나 임차하고 싶어서요.

가로: (속삭이며 세로에게) 거봐. 내 촉이 딱 맞아떨어지지?

세로: (다른 곳을 본다.)

청담동: 관이 있나요?

가로: 어제 만기된 관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청담동: 제가 좀 급해서요. 보시다시피. (가방을 가리킨다.)

가로: 저런. 어디서 오셨죠?

청담동: (말을 피하며) 임대료는 얼마나?

가로: (양쪽 검지 손가락을 세워 11자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청담동: 아…

가로: 오늘 계약하고 가시렵니까?

청담동: 바로 입주하죠. 샤워실은 어디에 있나요?

가로: 샤워실은 없고요.

청담동: 샤워실이 없어요?

가로: 화장실은 있습죠. 저기. 저 나무 뒤쪽으로요.

청담동: 샤워실이 없으면… 샤워는 어떻게…

가로: 샤워실이 있는 곳에서 살다 오셨나요?

청담동: 네.

가로: 좋은 곳에서 사셨나 보네.

청담동: (헛기침)

가로: 화장실에 세면대가 있어요. 거기서도 웬만해서 씻을 수 있죠.

청담동: 하지만… 샤워실이 없는 건 곤란해요.

가로: 추가 요금을 내시면 물을 끼얹을 수 있는 특수 바가지를 빌려드립니다. 바가지 바닥에 이렇게 구멍이 여러 개 나있어서 물을 푸면 밑으로 샤워기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청담동: 얼마나?

가로: 물이 가랑비처럼 줄줄 떨어집니다. 기분이라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청담동; 아니. 추가 요금 얼마나요.

가로: 검지로 숫자 1을 만든다.

청담동: (고개를 끄덕인다.)

가로: (세로에게) 11호에 가서 짐 빼라고 그래.

세로: 다짜고짜?

가로: 당연하지. 일주일 전이 만기였어.

세로, 망설인다.

가로: 아 빨리. (세로의 등을 두 손으로 민다.)

세로, 관 11호 앞으로 간다.

청담동: 좋아요.

가로: 네? 아. 바가지요!

청담동: 아뇨. 관이요. 물론 바가지 포함.

가로: 네. 그럼 바로 계약하시는 거죠?

청담동: 지금 당장 입주하고 싶은데요.

가로: 뭐 안 될 건 없죠.

청담동: 입주 청소도 연결해 주시나요?

가로: 입주청소요?

청담동: 지저분한 것은 질색이라서요.

가로: 그건 따로 알아보셔야 할 텐데. 뭐. 추가 요금을 내시면 제가 해드릴 순 있습니다만.

청담동: 얼만데요?

가로: (검지로 숫자 1을 만들며) 한 장 더.

청담동: 좋아요.

가로: 쿨하시네요.

청담동: 아직 준비가 덜 됐나요?

가로: 잠시만요.

세로, 관 11호가 열려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인과 대화 중이다.

가로: 아직 안 됐어?

립스틱: (가로에게 온다. 불만 섞인 듯) 아니 그렇게 칼같이 나가라 그러면 어떡해요.

가로: 어쩔 수가 없어요. 이렇게 새로운 고객이 계시고 우리도 장사를 해야 하는 거니까요.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잖아요.

립스틱: 딱 일주일만 시간을 줘요.

가로: 안 돼요.

립스틱: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말고.

청담동: (헛기침을 한다)

가로: (청담동을 보며) 저분도 지금 당장 지낼 곳이 없으시다고요.

립스틱: 아 인간적으로 그러는 거 아니잖아. 내가 여기 사 년이나 살았는데. 이제 와서 임대료를 세 장이나 더 올려 받으면 어떡해요. 나더러 어딜 가라고.

가로: 아니 지금 시세를 봐요. 저 여자분은 특수 바가지랑 입주 청소까지 여유롭게 추가하셨다고요. (립스틱의 등에 손을 얹고 속삭이듯) 위로 가세요. 위로. 거기 관세가 4년 전 여기 가격하고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내가 전화 한 통 해드려요? 어쩌겠어요. 우리도 힘들어요. 빚내서 이 장사 시작한 건데 돈을 안 받을 순 없잖아요.

립스틱: 아 얼마나 더 위로! 충분히 위로 왔어! (흐느끼기 시작한다.)

가로: 세로야 짐 좀 빼오렴.

세로, 립스틱을 위로하듯 에스코트해서 관11로 간다.

가로: 곧 입주하시면 될 듯 합니다.

청담동: 관간 소음은 없나요?

가로: 그게 사실 아파트보다 좋다면 좋은 점인데 수직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수평으로 흩어져있으니 뭐 크게 노래를 부르거나 누가 일부러 팔꿈치로 관을 찍지 않는 이상 울리지는 시끄럽지 않을 거예요.

청담동: 제가 좀 예민해서요.

가로: 아 그러시군요. 혹시 그 전에는 어디 사셨나요?

청담동: …

가로: 혹시 강…남?

청담동: 청담동에 있는 고시원에 살았어요.

가로: 처…청담동? 그것도 고시원! 그래서 여유가 있으셨구나.

청담동: (도도하게) 뭐…

가로: 거기 임대료가 거의

청담동: 많이 올랐죠.

가로: 그래서 샤워 시설을 말씀하셨군요. 혹시 유학파이신가요?

청담동: (활짝 웃으며) 어머. 그래 보여요?

가로: 관은 처음?

청담동: 뭐. 혼자 사는데 굳이 고시원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해서요. 여윳돈으로 투자나 하자 싶었구요.

가로: 생각보다 괜찮으실 거예요. 우리가 한 가지 자부심을 느끼는 거라면, 다른 묘지보다 관 크기가 약 20프로 크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 가지고 계신 그 가방 정도도 같이 입실할 수 있다는 사실!

청담동: 음, 뭐. 좋네요.

세로가 립스틱을 데리고 나간다.

가로: 어. 이제 준비가 됐나 보군요. 그럼 제가 빛의 속도로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가로, 테이블 밑에서 빗자루 쓰레바퀴 물걸레 세제 등을 챙겨 관11로 간다. 관 안에 집어넣고 관 문을 닫고 들어간다. 청담동,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관 주변을 구경하며 돌아다닌다. 그때 에스그룹 연구원, 들어온다.

에스그룹연구원: 당신은?

청담동: 당신은?

에스그룹연구원: 안녕하세요?

청담동: 아…네.

에스그룹연구원: 어떻게 여길?

청담동: 당신은 어떻게 여길?

에스그룹연구원: (헛기침하며)

청담동: (헛기침 한다.)

에스그룹연구원: 그럼 볼일 보시죠.

청담동: 네. 볼일 보세요.

에스그룹연구원: 담당자가?

청담동: 잠깐 청소중이라…

에스그룹연구원: 아. 그럼 기다려야겠군요.

그 때 세로 들어온다.

세로: 어떻게 오셨어요?

에스그룹연구원: (여자 눈치를 보며 세로에게만 속삭이듯) 관을 찾고 있습니다.

세로: 아. 관이요? 보시다시피 지금 풀 부킹상태라.

에스그룹연구원: 전혀 없습니까? 직장이 멀어져서 더는 북쪽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청담동: (남자를 본다.)

세로: 요즘 관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에스그룹연구원: 시내에 있는 고시원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 이렇게 작은 관에서라도 마음 편히 지내자 마음먹었죠. 믿을지 모르시겠지만 사실 4년 전 제가 지금 가진 돈으로 아파트도 살 수 있었답니다.

세로: 잘 알죠.

에스그룹연구원: 벼락을 맞은 기분입니다.

세로: 아. (남자의 행색을 살피며) 직장은 어디로 다니시나요?

에스그룹연구원: 에스 그룹에 다녀요. 연구원이죠.

세로: 그럼 여기서 차로 한시간은 가야 할텐데.

에스그룹연구원: 한시간에 감사하죠. 아. 여기 주차장은 있죠?

세로: 있긴 있죠. 추가비용이 있지만.

에스그룹연구원: 얼마나 하죠?

그때, 가로 청소를 마치고 관에서 나온다. 땀범벅이다. 청소도구를 나른다.

가로: 누구시냐?

세로: 관을 구하신다고

청담동: (남자를 쳐다본다.)

에스그룹연구원: (여자의 눈을 피한다.)

청담동: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가로에게 건넨다.) 모두 열 세장이구요.

가로: 여기 계약서에 사인 좀.

청담동: (도도하게 사인을 한다.) 전 바로 입주하면 되나요?

가로: 네. 물론이죠.

청담동: (가방을 가지고 관으로 간다. 가방을 넣은 뒤 몸을 넣는다.) 반가웠어요. 아저씨. 또다시 이웃사촌이네요. (관 뚜껑을 닫는다.)

가로: 편히 쉬세요.

에스그룹연구원: (다시 헛기침)

가로: 아시는 사이?

에스그룹연구원: 고시원 옆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또 여기서 만나네요.

가로: 아. 그럼 사장님도 청담동 고시원 출신?

에스그룹연구원: 사장님이라니. 어색하네요. 네. 맞습니다. 청담동 고시원에서 왔습니다.

가로: 전세를 원하시고요?

에스그룹연구원: 네.

가로: 지금 풀 부킹이긴한데.

에스그룹연구원: 벌써 세군데 돌다가 온 건데.

가로: 있긴 있죠. 만기된 관이.

에스그룹연구원: 입주 가능합니까?

가로: 살펴보죠. (세로에게) 13호 관에 가서 오늘 짐 빼야 한다고 말해.

세로: 형. 그래도 13호는.

가로: 만기된지 벌써 닷새나 지났다고. 우리가 자선사업가는 아니잖아.

세로: (가로와 에스그룹연구원을 번갈아 쳐다보다 관 13호로 간다.)

에스그룹연구원: 감사합니다.

가로: 시세는 알고 오셨죠?

에스그룹연구원: 대충은 아는데…

가로: 정확히는 모르시고요?

에스그룹연구원: 얼마나 하지요?

가로: (헛기침을 한번 한다. 한 손으로 숫자 1을 다른 한 손으로 숫자 2를 가리킨다,)

에스그룹연구원: 스물 한 장?

가로: (크게 웃으며) 장난도 잘치셔라. 아휴.

에스그룹연구원: (여전히 놀란 눈. 놀란 목소리) 그럼 얼마?

가로: 아. 열두 장 열두 장이죠. 내가 사기꾼입니까?

에스그룹연구원: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행이군요. 난 또 스물 한 장을 부르는 줄. 스무장이 전 재산이라서요.

가로: (뒤로 돌아 아쉬운 표정) 아 그러십니까. 저는 양심적으로 거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장을 더 추가하시면 관을 조금 더 양지바르고 통풍 잘 되는 곳으로 옮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관들이 막지 않아 통풍이 잘되고 겨울에 좀 더 따뜻하죠. 전기요가 필요 없을 정도라니까요.

에스그룹연구원: 위치를 옮기는 게 가능합니까?

가로: 가능하고 말고요. 그게 또 관만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에스그룹연구원: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 때, 13호 관에서 나와 세로와 이야기하던 순댓국, 가로에게 다가온다.

순댓국: 어이. 가로. 이렇게 매몰차게 하는 법이 어디 있나. 내 돈 구해본다고 했잖아. 대출이 갑자기 막혀서 방법이 없었어.

가로: 그걸 말이라고 해요? 대출이 막히긴 뭘 막혀. 진짜 뻥을 칠걸 쳐야지. 은행들에서 관 대여료는 대출비중을 늘린다고 연일 뉴스에 나오구만. 어디서 구라야. 구라는.

순댓국: 나는 안돼. 나는 대출이 안된다고.

가로: 영감님은 왜 안돼요?

순댓국: 그것도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되는거지. 은행에서 나한테 신용을 줄 수 없대.

가로: 왜요? 직장 있잖아요.

순댓국: 나 직장 짤렸어. 이제 아파트에서 경비 안쓴대. 원격조정 cctv가 있어서 경비 필요 없대. 난들 어쩌겠어.

가로: 그럼 더더욱 안돼요. 나도 뭘 믿고 대여를 해줍니까.

순댓국: 이봐. 우리 쌓인 정이 있잖아. 같이 먹은 순댓국이 몇그릇이야? 그중에 반은 내가 샀어.

가로: 누가 사주래요? 괜히 허세만 넘쳐서는.

순댓국: 저 피도 안마른 것이. (주먹을 불끈 쥐다가 다시 온순해지며) 나 좀 봐줘. 당장 노숙자 되라는거야?

세로: 형. 좀 안되겠어? 영감님 연세도 많으신데.

순댓국: (세로와 가로를 번갈아 쳐다본다.)

에스그룹연구원: (일부러 멀찍이로 걸어간다.)

가로: 전세금이 있는데 왜 노숙자가 돼요. (손에 침을 묻혀 방금 에스그룹 연구원에게 받은 돈 중 일부를 봉투에 넣는다.) 자자. 전세금. 이거 가져가서 좀 더 알맞은 방을 구해보아요.

순댓국: 이것 봐. 제발 부탁이야. 이것 봐 제발 좀.

가로: (속삭이듯) 관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것 모르겠어요? 오늘만 해도 청담동 유학파 아가씨에 에스그룹연구원까지 이 관을 찾았다고요. 이곳에 영감님 자리는 없습니다. 올라가세요. 더 높이.

순댓국: (하늘을 보며) 올라가긴 어딜 올라가란 말이야? 응?

립스틱,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가로, 순댓국을 잡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립스틱, 가로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자 관 뒤에 몸을 숨긴다.

무대에 남은 세로와 에스그룹연구원, 어색하다.

에스그룹연구원: 살기 참 팍팍해졌습니다.

세로: 네. 그렇습니다.

에스그룹연구원: 그래도 이렇게 힘들 때 이 일이 대목이라서 한결 나으시겠어요.

세로: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형이랑 나는. (잠시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저희 친형이거든요. 여튼 형이랑 나는 빚이 많아요. 형이 좀 비인간적으로 해도 이해는 합니다. 저보다 훨씬 현실적이에요. 우리가 뭐, 돈이라도 잔뜩 벌었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도 이 관에서 생활해요. 관1호 관2호는 우리 집이에요. 한때는 아파트에 살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에스그룹연구원: 아.

세로: 형도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노력하는 거죠. 글 나부랭이나 끄적이는 나보다 훨씬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에스그룹연구원: 작가신가요?

세로: 작가는요 무슨. 혼자 시간 날 때마다 끄적거리고 혼자만 읽는걸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인간이죠.

에스그룹연구원: 그래도 뭔가를 쓴다는 게 대단하시네요.

세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에스그룹연구원: 저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걸요.

세로: 좋은 회사에 다니고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이 부럽습니다.

에스그룹연구원: 인정이요? 글쎄요. 그런 단어는 영 어색하네요. 한 번도 내가 인정받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답니다. 저도 한때는 뭔가를 창조하는 걸 꿈꿨습니다. 그것이 한낱 푼돈으로 정산된다는 걸 알기 전에는요.

세로: 푼돈이라?

에스그룹연구원: 빨리 편하게 눕고 싶네요. 관을 정말 오래 찾아다녔어요.

세로: 관이 처음이신가요?

에스그룹연구원: 청담동에 있던 고시원에서… (속삭이듯) 아까 말했죠. 그 여자 분과 같은 고시원에서 살다가 고시원 임대료가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이렇게 강을 건너 묘지를 찾아왔어요. 관은 처음이에요. 어차피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에 잠만 자면 되는데 고시원은 사치였어요. 잘됐죠 뭐.

세로: 낙천주의자시네요. 난 답답해 죽겠는데.

에스그룹연구원: 어차피 언젠가 내가 갈 곳도 이곳이다 마음먹으니까 편하더라고요.

세로: 어차피 갈 곳이 이곳이다. 저도 항상 그 생각 합니다. 관이 은근히 잠이 잘 오거든요. 뒤척일 공간도 없으니 그냥 세상만사 잊고 잠을 잡니다. 그러다 문득.

에스그룹연구원: 문득?

세로: 그냥 이렇게 가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순간 흠칫 놀라며) 아. 그냥 누구나 왜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울적할 때 새벽에 일어날 때 말입니다. 그냥 모두 등지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에스그룹연구원: …

세로: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우울한 말을

에스그룹연구원: 아닙니다.

세로: (머리를 긁적인다.)

에스그룹연구원: 사실 말이죠.

세로: 네.

에스그룹연구원: 사실.

세로: 네?

에스그룹연구원: 저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확실한데 사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매일 그런 기분이 들어요.

세로: (무언가 대답하려 한다.)

가로, 들어온다.

가로: 저 영감탱이 진짜 집요하네. (에스그룹연구원을 잊고 있다 그를 보며) 아. 계약서 사인하시고 바로 입주 하시죠. 아까 말씀드렸듯 열 두장입니다. 아. 통풍좋은 곳으로 콜?

에스그룹연구원: 그러죠.

가로: 그럼 한 장 더!

에스그룹연구원: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센다. 남자에게 건넨다.)

가로: (서류를 내밀며) 여기. 사인.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 장 넘기며) 또 여기 사인 (또 한 장 넘기며) 여기 사인. 됐습니다.

에스그룹연구원: 이제 들어가면 될까요?

가로: 네. 들어가면 되고. 짐은 그게 다인가요?

에스그룹연구원: (크로스백을 메며) 이게 답니다.

가로: 요즘 미니멀리즘이 유행인가보죠?

에스그룹연구원: (웃는다.) 미니멀리즘이라. 이 관만 하겠습니까.

가로: (웃음 참는다.) 세로야. 관을 옮길 거야. 여기 앞쪽으로

세로: 앞쪽으로?

가로: 우리 관 앞쪽으로 옮기자고.

가로와 세로, 관을 들고 끙끙거리며 무대 가장 앞쪽으로 옮긴다.

에스그룹연구원. 무대 한쪽으로 가서 담배를 피운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바라본다.

립스틱과 순댓국, 관 뒤에 숨어서 세 명을 바라본다.

가로: 자. 준비됐습니다.

에스그룹연구원: (담배를 끄고 크게 한숨을 쉰 뒤, 관에 몸을 누인다.) 감사합니다.

가로는 에스그룹연구원의 짐을 관에 넣어주고 세로는 관 뚜껑을 덮는다. 관 뒤에서 순댓국, 무대 앞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립스틱이 순댓국을 말린다.

세로: 형 소원대로 되니까 좋아?

가로: 내 소원?

세로: 임대료 올려 받길 원했잖아.

가로: 그랬지.

세로: 형은 운도 좋아.

가로: 운?

세로: 운!

가로: 이건 예측이고 노력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고.

세로: 자. 다음엔 어느 관 짐을 빼라고 해?

가로: (장부를 뒤지며) 어디보자.

세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놔야지.

가로: 좋은 자세구나. 하긴 너도 이 묘지의 주식이 있으니 노력해야 할 거야.

세로: 맞아. 우리는 빚도 사이좋게 나눠가졌지.

가로: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하자!

세로: 관이 하나 바뀔 때마다 임대료를 한 장씩 올려 받기로 한 거야?

가로: 일분이라도 먼저 임대받는 게 이득이란다. 이것도 저 사람들 노력의 결과야.

세로: 노력의 결과? 저 두 사람은 같은 고시원에 살다가 같은 날 쫓겨나 이리로 왔어.

가로: 한 사람은 밥을 먹고 출발했고 한사람은 밥을 건너뛰었겠지. 그렇게 누구는 먼저 도착했고 누구는 그 다음 도착했어. 그게 바로 노력의 결과란다.

그 때 순댓국, 튀어 나온다.

순댓국: 그렇지.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고작 몇분 차이로 임대료를 올려 받는다? 먼저 온 사람이 한발 늦게 온 사람보다 한 장이나 싸다 이거군.

가로: 아 영감님 이거 무단침입인 것 아시죠? 저 경찰 부릅니다.

순댓국: 어 불러봐. 나도 자네를 부당이득취득으로 고발할 테니까..

가로: 나 참. 여기 자유민주주의 사회고 자본주의 사횝니다. 내가 뭐 없는 관을 가짜로 빌려주길 했어요. 기존 세입자에게 돈을 안 내어주길 했어요. 할 거 다했구만, 뭐 부당 이득?

순댓국: 나한테 얻어먹은 순댓국 다 토해내. (가로의 목을 조른다.)

세로, 순댓국을 제지한다. 가로, 숨을 헉헉대고 순댓국은 뒤로 넘어진다. 그때 립스틱, 튀어 나온다.

립스틱: 부당이득 맞죠! 어? 솔직히 상식적으로다가! 우리한테는 일곱장 달라고하더니 강남에서 왔다고 하니까 열 한장 열 두장?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심하지. 진짜 심해. 이깟 관짝 하나를 빌려주면서 그 가격을 부르다니. 다음 사람한테는 열 다섯장 받으시려고?

가로: 왜. 그러면 안돼요? 그리고 이깟 관짝 하나? 당신들은 이깟 관짝 하나라도 빌릴 돈은 있고? 사람들이 말이야. 행동력이 능력이 되는 세상입니다. 먼저 움직이는자가 승자라구요. 그리고 각자의 능력에 맞춰 사는 겁니다. 어쩌겠어요. 이게 시세인데.

순댓국: 시세라니. 시세라니.

가로: 시세 맞아요.

세로: 형! 일단 이분들 진정시키고.

가로: 사람들이 파는 게 시세지. 찾는 사람이 많으면 시세도 높아지는거야.

순댓국: 아니. 이건 분명히 잘못된 거야. 난 아주 배운 놈은 아니지만 허튼 짓 안하고 열심히 일했어. 내가 아파트를 바랐어 고시원을 바랐어. 그냥 내 몸 하나 누일 관 하나였다고. 관 하나!

립스틱: (울며) 나도!

가로: 왜 여기서 인생 하소연을 하지? 세로: 자자. 진정들 하시구요.

가로: (심호흡 하며) 오늘 입주한 분들도 계신데 이러지 마시죠. 나갑시다. 내가 커피 한잔씩 사 드릴테니까. 일단 나가요들.

립스틱: (얼굴에 마스카라가 번져있다.) 싫어요.

순댓국: 우리는 어쩌라는 말이야.

가로: 자. 사람이 배부르면 마음도 바뀌어. 일단 뭐부터 먹고. 자자. 나가시죠.

순댓국: 누구 마음대로!

가로는 억지로 립스틱과 순댓국을 잡아끈다. 뒤돌아 세로를 쳐다보며 얼굴 찌푸린다.

순댓국: 개새끼

립스틱: 철면피.

가로: 가요 가.

약혼녀, 들어선다. 멈칫거린다.

순댓국: (약혼녀를 보며) 어라. 손님이 끊이질 않네.

가로: 내 그랬죠. 계속 손님이 든다는 건 우리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중거라니까?

립스틱: (약혼녀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대며) 바가지 쓰러 왔어요?

가로, 순댓국과 립스틱을 억지로 무대 밖으로 민다.

가로: 좀 소란스러울 때 오셨네요. 날씨도 쌀쌀한데 따뜻한 차 한잔? (세로를 보며) 세로야 따뜻한 레몬차 한잔 드려라. 나 갔다올게.

순댓국, 립스틱 또다시 방해하려 무대로 얼굴을 내민다. 가로, 급히 둘을 밀며 퇴장한다.

약혼녀: (한동안 말없이 묘지를 둘러보며 서 있는다.)

세로: 임대…하러 오신거죠?

약혼녀: (머뭇거리며) 일단 한번 둘러볼게요.

세로: 아. 네. 차 한잔 드릴까요?

약혼녀: 아뇨. 괜찮아요.

약혼녀, 관과 관 사이를 걷는다. 관들을 꼼꼼히 둘러본다.

세로: (난처해하며) 저…

약혼녀: 관을 좀 볼 수 있을까요? 구조는 어떤지. 그런 걸 좀 보고 싶은데…

세로: 네. 가능합니다. 여기. 1호와 2호는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약혼녀: 아. 그런가요.

세로: (관 1호로 걸어간다. 관 뚜껑을 잡는다,)

약혼녀: 아. 잠시만요. 잠시 후에 보죠.

세로: 네?

약혼녀: 먼저. 뭐 좀 여쭤볼게요.

세로: 뭘?

약혼녀: 어떤 남자를 찾고 있어요. 입주자 중에.

세로: 남자요?

약혼녀: 키는 180센티 정도 되고 나이는 삼십쯤. 안경 끼고 퍽 잘 생긴.

세로: 사람이 워낙 많으니. 그거 가지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약혼녀: 오늘 왔을 거예요. 오늘.

세로: 아! 한분 계시죠. 남자 분. 혹시 에스그룹 다니는?

약혼녀: 맞아요. 그렇게 말했을거예요. 분명.

세로: 아는 분인가요?

약혼녀: 네.

세로: 방금 입주하셨는데.

약혼녀: 어디죠?

세로: 네?

약혼녀: 몇호나구요.

세로: 그건 개인 정보 때문에…전화를 해서 직접 물어보심이?

약혼녀: 아… 그건.

세로: 임대는 하러 오신거 아니시구요?

약혼녀: 아. 임대…

세로: …

약혼녀: 사실…

세로: …

약혼녀: 결혼하려던 사람인데 연락이 되질 않았어요.

세로: 무슨 다툼이라도?

약혼녀: 그런 건 없었어요. 다만.

세로: 다만?

약혼녀: 현실적인 문제가 몇 개 있었을 뿐.

세로: 연락이 되지 않는데 여기 입주한 건 어찌 아셨나요?

약혼녀: (대답하기 난처한 듯 무대에서 등을 진다.) 모두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 그 사람을 쫓는 사람이 있어요.

세로: 도통 무슨 얘긴지.

약혼녀: (뒤돌았을 때 눈물 범벅이다.) 좀 도와주세요. (휘청거린다.)

세로: (약혼녀를 부축한다.)

약혼녀: 경찰이 동원되었어요.

세로: 경찰이?

약혼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그이를 만날 수 있게요.

세로: 그 말만 듣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네. 저 그분과 잠시 얘기 나눴는데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어요. 하지만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경찰이 찾는 거겠죠?

약혼녀: 네. 물론 맞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세로: 사람을 죽였나요?

약혼녀: 아뇨.

세로: 누가 다쳤나요? 뺑소니 사고 같은거?

약혼녀: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가로, 급히 달려온다.

가로: 야. 저 인간들 미쳤다. 미쳤어. 경찰에 전화해. 당장.

그때 무대 뒤쪽에서 순댓국과 립스틱, 피켓을 들고 나온다. 피켓에는 “돈 액수로 사람 고르는 악덕업주 고발한다”와 “도덕 정신 어디 갔냐 생명 위에 돈이 있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립스틱: 돈 액수로 사람 고르는 악덕업주 고발한다

순댓국: 도덕 정신 어디 갔냐 생명 위에 돈이 있냐

두 사람은 일관되게 피켓에 적힌 문구를 외치며 가로 앞으로 전진한다.

가로: 영업방해죄로 신고할 거야. (휴대폰을 꺼낸다.)

립스틱: (가로에게 다가가서 휴대폰을 빼앗는다.) 누가 누구를 고발한다고 그래. 자고 있는데 이 엄동설한에 사람 길거리로 쫓아내놓고.

순댓국: (립스틱에게서 가로의 휴대폰을 받는다.) 죄라 그러는데 너도 그거 신 앞에 죄 아니냐? 사람 얼어 죽으라고 등 떠미는 거지.

립스틱: 맞어. 맞어.

가로: 여기 자본주의 사회야. 내가 내 관 가지고 내 돈 받겠다는데 왜들 그래?

립스틱: 조물주 위에 묘지주라더니. 진짜 이거야말로 갑질이지. 내가 sns에 올릴 거야. 아니 국민청원에 올려보지. (휴대폰으로 뭔가를 찍는다.)

가로: 진짜 정신들이 나갔나.(립스틱의 휴대폰을 빼앗는다.)

립스틱: 어. 무섭기는 한가보지?

가로: 엄동설한에 얼어죽긴.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갈 데가 왜 없어. 맨날 힘들다 그러고 세상 탓만 하지. 누군 그런 시절 없었는지 알아? 나도 멘탈 탈탈 털리던 시절이 있었어. 그런데 이렇게 바로서기 한 거라고. 당신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봐. 있는 사람 탓만 하지 말고.

세로: 형. 일단 이분들 진정시키자.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든 거처를 마련해드리면 되잖아.

가로: 아니. 나는 그리 못해. 이거 영업방해죄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립스틱: 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도 생각이 있다고. 내 휴대폰 내놔.

가로: (립스틱의 손을 뿌리치며 립스틱의 휴대폰으로 신고하려 한다.)

순댓국: 아니 저 인간이. 남의 휴대폰을 왜 뺏어가. 정정당당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저 비열한 놈이.

가로: 당신은 내꺼 안 뺏었어?

세로: (순댓국을 말린다.)

순댓국: 너도 한패라 이거지.

가로와 순댓국의 몸싸움, 그를 말리는 세로와 엉겨 붙은 립스틱까지 난장판이 되어 한바탕 몸싸움이 난다. 그 와중에 약혼녀, 매우 건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무대 뒤에서 경찰, 등장.

경찰: 무슨 일이죠?

립스틱, 경찰을 보고 먼저 화들짝 놀라 뒷걸음친다.

약혼녀 깜짝 놀라 뒤돈다.

세로, 가로를 일으켜 세운다.

가로와 순댓국, 경찰을 보고 일어나 매무새를 급히 정돈한다.

경찰: 무슨 소란이냐고 물었습니다.

립스틱: 그게…

순댓국: (립스틱을 본다.)

립스틱: (순댓국을 본다.)

순댓국: 튀어!

립스틱: (순댓국의 옷자락을 잡고 무대 반대쪽으로 급히 뛰어나간다.)

경찰: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 건가요?

가로: 아. 저 그게요.

세로: 형이 신고했어?

가로: 아니야. 나 안 했어. 저 인간들이 내 휴대폰 뺏고 저렇게 던져놔서 번호도 못 눌렀다고. (무대 한쪽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온다.)

세로: (경찰에게) 잠시 그냥 좀 다툼이 있었습니다.

경찰: 일단 제 용무부터 말씀드리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가로: 사람이요?

경찰: 키는 한 180센티 정도 되는 남자고. 30대 중반 정도. 입주자 중에 혹시?

약혼녀: (헛기침을 하며 가로에게 다가온다.) 잠시 얘기 좀.

약혼녀, 가로를 끌어 무대 한 켠으로 간다.

세로: 보시다시피 관이 정말 많아서요. 입주자가 한두명이 아닌데 그 정보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네요.

경찰: 좀 불안해 보인다거나 그런 사람이 혹시 없었나요?

세로: 글쎄요. 딱히 그런 느낌의 사람은 기억에 없습니다.

가로: (약혼녀와 함께 경찰 쪽으로 다가온다.) 일단은 개인신상정보를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어서요. 왜 그러십니까?

경찰: 중요한 사건의 용의자라서요.

가로: 네? (약혼녀를 쳐다본다.)

세로: 영장 같은 거 있으십니까?

경찰: 영장 발부 전이지만 일단은 시민으로서 협조하셔야 할 텐데요.

세로: 글쎄요. 저희도 뭐 서류없이 마냥 협조하기가 그래서요.

가로: (세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지금 말씀하신 걸로는 잘 모르겠고요. 저희도 그런 사람이 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찰: (의심스러운 눈치로 관들을 살핀다. 가로에게 명함을 건넨다.)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특징의 사람이 기억나면 바로 연락하십시오. (뒤돌아 있는 약혼녀를 의심스러운 듯 계속 바라본다.)

가로: 네. 네. 그러시죠.

경찰, 한동안 둘러보다가 나간다.

가로; 찾는 사람이 아까 그 사람 맞지? 그 남자 손님.

약혼녀: 감사해요. 제가 그 사람 데리고 나갈게요.

가로: 괜한 데 말려들기는 싫지만 그러면 안 되죠. 오늘 입주하고 계약서까지 다 썼는데. 그렇게 나가면 안 되죠. 제가 뭐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제가 괜히 숨겨준 줄 압니까?

세로: 무슨 일인지 조금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돕든지 할 것 아닙니까.

약혼녀: 그 사람…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가로: 친한 사이?

세로: 결혼할 사이셨대.

약혼녀: 저와 같은 연구실에 있었죠. 우리는 화학자예요. (사이) 그 사람은 천재랍니다. 늘 지구오염을 종식시킬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회사에서 물론 이 프로젝트를 지원해줬지만 인생을 바쳐 특수 수소를 활용한 에너지의 분자식과 기술 초안이 나왔죠.

가로: 아아. 머리 아프고 일단 그래서 이 사람이 뭘 했다는 거요? 사람이라도 죽였습니까?

약혼녀: 아니요. 그 사람은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걸요.

가로: 그래서 그 에너지 뭐시기를 만들었는데 뭐요?

약혼녀: 그건 그 사람이 일생을 바쳐 주도적으로 만든 거예요. 그런데 회사에서 잘렸죠.

가로: 아니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선 왜 회사에서 잘렸다는 거죠?

약혼녀: 그 사람이. 그 기술을 다른 회사에 팔았어요. 졸지에 산업스파이가 됐죠.

세로: 산업스파이?

가로: 완전 범죄자네!

약혼녀: 제가 자수시킬 테니까. 제발 제가 데려가게 해줘요.

가로: 아 몰라 몰라. 복잡한 거 딱 질색. 보증금 돌려줄 테니까 빨리 데리고 나가요.

약혼녀: 그 사람은 그냥 너무 가난했던 거예요.

가로: 세상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답니다.

약혼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죄밖에 없어요. 열심히 일해서 봉급을 모으고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고.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가로: 그래서 사기를 쳐요? 아니 도둑질인가?

약혼녀: 회사에서는 기대 이하의 너무 저렴한 인센티브로 후려쳤어요. 처음엔 단순히 화가 났던 거예요. 그 사람 소원이 집 하나 갖는 것 뿐이었어요.

가로: 그래서 기술을 팔았다?

세로: 엄밀히 말하면 그분이 개발한 거니까. 사실 도의적으로는 나는 이해가 가는데 형?

가로: 아니지. 이유야 어찌됐건! 해명의 여지가 없다 이건. 뭐 우리가 이런 얘기 계속 들을 이유가 없지 않나?

약혼녀: (억울한 듯) 어느 날 갑자기 돈이 생겼다고 말하더군요. 자기는 그 돈으로 아파트를 살 거라고 했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는 결혼식 날짜를 잡았어요. 결혼식 전에 먼저 아파트부터 샀어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큰 실수가 될 줄은 몰랐어요. 결혼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아파트 가격은 매일 올랐어요. 그리고 단 몇 달 만에. 따라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죠. 그 사람의 그 소중한 돈으로는 겨우 고시원 보증금 정도로 가치가 떨어졌어요. 서울은 커녕 우리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때 연락이 끊겼어요. 그 사람은 저와 일방적인 파혼을 했고 잠적했어요. 전 처음에 그 사람 마음이 변한 줄 알았죠. 그러다가 경찰에서 저에게 연락이 왔고, 저도 그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 고시원을 찾아갔지만 이미 거기도 보증금이 올라서 그 사람은 떠난 뒤였죠. 그리고 수소문한 끝에 이곳에 오게 된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이제 그 돈으로는 관 하나를 빌리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게. 막상 여기 오니 더 어이가 없고. 믿기지 않네요.

가로: 엥? 그럼 아까 있다고 했던 돈이?

약혼녀: 사실 저도 그 사람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자수하고 다시 일어서면 되는 건데.

세로: 한마디로 인생의 모든 것을 팔았는데 관짝 하나를 빌릴 수 있게 된 거네요.

가로: 어이. 관짝 하나라니! 우리 자산을 그렇게 하대하지 마라.

약혼녀: 막상 이 현실을 접하면 너무 황당하죠. 그이에게 전하고 싶어요.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힘을 내보라고.

세로: 일단 그분하고 말씀 나눠 보시죠.

약혼녀: 몇호실인가요.

가로: 그분이 좀 양지바른 쪽으로 옮겨 달라 그래서 우리가 쓰는 1, 2호실 앞에 0호실 쪽으로 옮겼습니다.

약혼녀: (무대 가장 앞쪽 관으로 걸어간다.) 여기요?

가로: 네. 그 관입니다. (세로에게 속삭이듯) 넌 진짜 오지랖이야.

세로: 미안해.

약혼녀, 비명소리 들린다.

가로: 왜 그래요. 뭔데 그래요?

세로: (급히 약혼녀에게 달려간다.)

0호 관 바깥으로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다.

약혼녀: (놀라 뒤로 나자빠진다.)

가로: (피를 밟아 관 옆으로 넘어지며 몸에 피가 묻는다) 야 이게 무슨 일이냐. 뚜껑 열어봐. 뚜껑.

약혼녀: 열지 마요. 열지 마. 못 보겠어요.

세로: (관 뚜껑을 조심스레 연다. 놀라 뒤로 넘어진다.)

가로: 경찰! 경찰 불러. (정신없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다.) 사람이… 죽…

약혼녀: 끊어요.

세로: 네?

약혼녀: 아니라고요.

세로: 아무도 없어.

세로: (전화를 끊는다.) 그럼 그 피는 뭐야?

가로: 몰라

약혼녀: (주위를 둘러본다.) 제발 살아있기를.

무대 점점 어두워진다.


 

 

  <당선소감>

 

   힘겹게 헤쳐나가는 삶에 진정한 극적 요소 있더라

  연극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납니다. 스무 살 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본 연극은 시종일관 긴장감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입되는 경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뒤 저는 희곡을 쓰고 싶었습니다. 대학로에서 매주 주말마다 연극을 봤습니다. 국내외의 고전극, 현대 창작극, 사회 풍자극, 코믹극 등 여러 장르의 연극을 보면서 극적인 사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활 속에서 연극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돈을 벌 궁리를 하고, 아이를 교육하고 살 집을 옮겨 다니면서 연극이 아닌, 그저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 날 때 커피숍에 앉아 틈틈이 몇 편의 희곡을 썼습니다. 그 과정 속에 느낀 것은 진정한 극적 요소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과 힘겹게 헤쳐나가는 생활 속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가로묘지 주식회사’는 최근 몇 년 동안 저와 저의 친구들이 겪은 어려움을 담은 작품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세상은 하나의 무대인 것 같습니다. 극적인 사건은 현실 속에 늘 존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좋은 희곡은 무엇일까’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지겠지만 삶의 기저에서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큰 감사인사 올리며, 늘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극작가는 20년 넘게 저의 꿈이었습니다. 이 시작을 씨앗으로 희곡 창작에 꽃 피우자는 결심을, 지면을 빌려 스스로에게 약속해봅니다.

 

● 1980년 서울 출생. 
●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동대학원 졸업. 
● 시인


 

  <심사평>

 

  

  棺을 임차해 살라는 기발한 설정, 단연 돋보여

  110편 희곡 응모작은 오늘의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어둡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상을 담고 있다. 올해는 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질병, 실업, 집값 폭등으로 인한 주거불안, 빈곤, 노인문제, 폭력, 온라인 여론조작 등 사회문제를 보여주며, 그로 인한 인간관계와 삶의 황폐화, 불안, 탐욕, 위선, 불신이 전반에 스며있어 시대를 걱정하게 한다.

  본심에는 ‘가로묘지 주식회사’, ‘엄청나게 사랑하고 마음 속 깊이 증오한’, ‘그 남자의 공중부양’이 올랐다. ‘엄청나게~’는 치매 사실을 거부하는 엄마와 그녀를 돌보는 딸 사이에 펼쳐지는 애증의 관계가 생생하지만 상투적인 사건 전개와 신파적 감정이 아쉬웠다. ‘그 남자의~’는 회사 야유회에서 보물찾기를 하다 절벽에서 떨어져 매달린 비정규직 직원을 구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의 풍경에 주목하게 했지만 전형적인 캐릭터와 피상적인 주제 의식이 아쉬웠다. ‘가로묘지 주식회사’는 가파른 집값 상승이 야기한 문제들과 현실을 비판한 사회풍자극이다. 집값 폭등의 연쇄효과로 임대비용이 올라 무주택 세입자들이 고시원세도 감당하지 못해 관을 임대해 산다는 기발하고 참신한 설정으로 주거문제와 삶의 연계성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의 독창성과 흥미로운 극전개방식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애매한 결말은 극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트린다. 이 지점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작가의 많은 장점이 부족한 부분을 상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심사위원 : 임선옥, 오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