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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간이역에 사는 사람들 / 서호식

 

발이 많아서 천천히 멀리가도 지치지 않는
통일호는 어디나 서며
누구나 내려주고 아무나 태웠다

완행열차를 통일호라고 이름 지은 것은
통일은 더디 와도 된다는 걸까

자정을 깨워
간이역마다 지친 잠들이 내리고
서울 역에도
부스스한 다음날이 내렸다

간이역은 가난하고 고루한 기차만 서는 곳인지
작고 더딘 사람만 내리는 역인지

내리고 싶지 않은 기차는 제 몸뚱이를
철로 위에 길게 널어두고
바람만 달려 보내기도 한다

사라진 간이역이 골목 모퉁이에 문을 열었다
驛시
지치고 느린 사람들이 가쁜 걸음으로 들러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
엉킨 혀로 돌아가는 작고 헤진 역

역장 아줌마와 연착 된 하루를 풀고 간다


 

 

  <당선소감>

 

   “내가 쓴 시, 다른 사람이 읽어도 시가 맞는지 궁금”


기분 좋은 날에는 아내 몰래 빨래를 한다
손으로 치대는 느낌이 어지간히 좋다
제 몸을 줄여 더러움을 씻어내는 비누를 보며
잘못해놓고 참회하고
죄 지으면서 고해하고
삼천 번씩 엎어지면 면죄 받는 겉치레 말고
비누 한 장만 있으면
회개 되고
사면되는
면죄부 대신 세탁비누를 팔고
덜 세탁 된 죄는 성직자들이
비비고 치대고 탈탈 털어
바지랑대 높이 널어 두면 새사람이 되는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내어 주고
나를 줄여 다른 삶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다들 시 쓰는 일이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라고들 하지만
나에게 시는
즐거움이고 희열이기도 하다
시를 쓸 때만큼
세상을 잊고
나를 잊고
깊은 고뇌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
오로지 시만 존재 하는 시간이다

주제를 정하고
시어를 모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이 만이 느낄 수 있는 극치의 특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상 모든 것들이 주제가 되고
시가 될 때
세상은 얼마나 더 말랑말랑해지고
조곤조곤해질까

당선의 영광을 주신 현대경제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 좋은 세상을 써보고자 한다

● 논산 출생 현 익산 거주
● 시암문화원 원장 겸 별빛 정원 대표


 

  <심사평>

 

  

  감정을 언어로 잘 형상화한 작품들

  친절하게도 신문사에서 직접 전달해준 응모작 전부를 읽었다. 그야말로 산더미 응모. 어떻게 저걸 다 읽나? 처음엔 그랬는데 하룻저녁 읽고 하룻저녁 고민하고 나서 심사평을 쓰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산문 투의 문장들이 많았고 사실이나 생각을 생경하고도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들이 많았다. 오히려 시적인 문장을 제대로 갖춘 작품을 찾기가 힘들었다.

  문제는 시의 소재인 감정의 형상화다. 감정이란 모양도 소리도 촉각도 향기도 없는 투명하고도 무정형인 그 무엇이다. 그것을 어떻게 언어로 형상화해서 읽는 이에게 잘 전달하느냐가 시의 관건인데 애당초 거기서부터 발걸음이 빗나가 있었던 것이다.

  하기는 시라는 장르가 지극히 주관적인 문장이라서 누가 심사를 보았느냐에 따라 근본부터 달라질 수 있겠다. 말하자면 나태주가 심사를 맡음으로 이미 읽지 않은 작품 더미 가운데에서 선정될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작품이 세 작품이다.

  서호식 씨의 「간이역에 사는 사람들」 외 4편. 정운균 씨의 「레시피」 외 4편. 박마리아 씨의 「비릿한 엄마 냄새」 외 4편.

  첫 번째 작품 「간이역에 사는 사람들」 외 4편을 낸 서호석 작가는 시적인 공력이 만만치 않은 분으로 전편의 수준이 고르고 독립적으로 완성되어 있어 신뢰가 갔다. 시적 대상을 직시하면서 짐짓 흥분이나 격앙이 아닌 차분한 대응으로 맞서는 유연성에 대해서도 호감이 갔다.

  두 번째 작품 정운균 씨의 「레시피」 외 4편은 매우 신선하고도 젊은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이었다. 얼핏 보면 문장이 덜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작가의 특성이라 하겠다. 문장이 툭, 끊어지는 그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나고 감정의 선이 바짝 긴장한다.

  세 번째 작품 박마리아 씨의 「비릿한 엄마 냄새」 외 4편은 시적 대상을 다루는 솜씨가 섬세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살가운 정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어투 또한 정갈하고 맑아서 시를 읽는 사람 마음을 자연의 한복판이나 인생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 준다.

  하지만 세 번째 작품은 몇 가지 사소한 흠결이 있어 아쉽게도 이번 당선작에서 제외됐다.

  응모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두루 좋은 글을 많이 읽었음을 감사한다. 

심사위원 : 나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