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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i / 허성환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과 아내의 손이 닿은 공간에 땀이 찼다. 우리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방사선사가 화면을 띄웠다. 우선 아기 크기를 재볼 건데요. 여기 하얗게 보이는 게 위에서 본 머리뼈예요. 좀 더 내려오면……. 심장 뛰는 거 보이세요? 이쪽 아래가 배 부분이고요. 까맣게 보이는 게 위장이에요. 여기 보시면 양수를 먹기 때문에 위 안이 이렇게 차 있습니다. 여기가 머리고… 이게 뒤통수, 요게 정수리, 이 안에 하얀 거 보이시나요? 이게 코뼈 부분인데요. 뼈를 확인하는 이유는 이 주수에 코뼈가 안 보이는 아기들이 다운증후군이나 염색체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확인하는 거예요. 같은 의미로 목뼈 뒤에 투명한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기의 척추뼈 일부가 불완전하게 닫혀서 척추가 노출되는 선천성 기형으로 개방성 이분 척추거나 폐쇄성 이분 척추인지 보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배뇨장애, 하지마비 같은 증상이 올 수 있거든요. 목뼈가 굽지 않고 반듯하네요. 크기도 주차에 딱 알맞은 크기고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흑백으로 입체초음파 화면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고 아내는 방사선실에 누워서 배를 내밀고 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은 상태에서 더 꽉 잡았다. 어젯밤 아내가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임신한 지 12주차라서 이제는 초음파를 함께 봐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몇 번이나 혼자서 산부인과를 다녀왔던 것일까. 나는 오늘에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의 볼록 나온 배를 쳐다보니 생명을 몸에 품고 외로웠을 시간들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연차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포장용기를 대량으로 발주하는 매장에서 일했다. 한 명이 쉬게 되면 업무강도는 살인적으로 늘어난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사장은 최근 나의 근태와 업무속도를 운운했다. 이어 세계 경제의 불안도 호소했다. ‘빌어먹을 회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라고 0.5초 동안 뇌 속에 생각이 머물렀다가 입으로 내뱉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내가 아무리 꽉 막힌 사람이라도 아기에 관한 거는 연차를 허용한다, 라고 아주 선심 쓰듯이 사장이 말했다. 아침이 밝자 곧장 아내와 산부인과를 찾았다.

방사선사가 미소 짓고 설명을 이었다. 보세요. 아기 옆모습 너무 예쁘죠? 손 올리고 있네요. 동그란 거 이게 손이에요. 귀엽죠? 어머, 움직이네요! 이제 쭉 내려오면 허벅지, 대퇴부 다리. 다시 쭉 올라가면 팔, 팔꿈치까지 잘 보이죠? 팔다리 잘 움직인다! 다리 일부러 접었다 폈다 하죠? 좋아요. 몸무게는 42g 되고요. 5.86㎝입니다. 주수에 맞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자기야, 여기 와봐.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소설을 쓰겠다고 말했다. 아기를 가졌다는 말과 동시에. 그러니까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여주면서 ‘나, 아기 가졌어.’가 아니라 ‘나 소설을 쓰려 해.’라고 말한 것이다. 쉽게 무언가 선언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생필품 하나를 구매해도 의논하고 골랐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선뜻 카트에 담지 않았다. 고심하고 또 고심한 뒤 선택했고 그것도 계산대 가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곤 다시 돌려놓기도 했다. 나는 아내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만약 미술을 하겠다거나 바리스타 자격증이라도 따려 한다면 통장잔고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겠다는 아내의 말은 머릿속에서 탄생한 언어를 활자로 옮기겠다는 뜻이 전부였다.

방사선사가 검은 부분 속에서 하얀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머리와 몸의 비율이 거의 1 대 1이에요. 2등신이라 머리가 크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 전혀 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얼굴을 이렇게 또 움직이네요. 지금 코뼈 잘 보이세요? 손이 아까는 나란히 있었잖아요? 지금은 위치를 바꿔서 한 손은 여기 있고 다른 한 손은 여기 있네요. 나는 방사선사의 설명을 듣고도 아기의 모습이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생겨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아내는 자신의 배 속에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확실한 것은 나의 씨앗으로 인간의 형태가 분주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산부인과를 다녀온 다음 날은 추위 같은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뉴스에서는 여태껏 없었던 무서운 한파, 강추위라고 전했지만, 내 몸은 오히려 뜨거워졌다. 나는 밤마다 아내의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잠들었다. 그러면 체력이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덕분에 새벽 일찍 방산시장으로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짐수레에 배달포장용기를 천 개씩 싣고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를 누볐다. 바비큐, 반찬, 국물, 실링용기, 일식용 포장용기가 이백 개씩 포개져서 한 번에 천 개 내지는 이천 개까지 옮겼다. 빙판을 피해가며 배달용기, 포장용기가 필요한 매장으로 부지런히 제품을 날랐다. 아내가 점심시간에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 뭐 해? 하고 물으면 나는 목장갑으로 화면을 잠시 터치하고 한쪽만 꽂은 이어폰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지금 투명 도시락 2200개와 위생스푼 1200개, 24온즈 아이스 컵 600개를 옮기고 있어! 방산시장에는 손수레를 끌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이 반인데, 나는 데시벨이 꽤 높은 남자여서 때때로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가 어젯밤 펜을 들었다.

그래서 뭘 쓸 건데?

아내는 의자에 대해서 쓴다고 했다. 의자? 무슨 의자? 당신이 앉을 의자. 설마 내 일터에 대해서 적는 건가. 사십대 더벅머리 남자가 하루 만에 그만둔 곳. 막노동 현장에서 제법 굴렀다는 양반이 오전에 일하더니 오후에 바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잠시 쉴 의자는 없습니까. 손수레에 족발집 테이크아웃, 전자레인지 전용 뼈해장국 용기 4600개의 포장용기를 싣고 이동하던 나와 마주친 남자가 물었다.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의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나는 의자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의자에 잠시 앉아서 쉴 시간을 주지 않으니 의자가 있어봤자 무의미했다. 하루에 적게는 28만 개, 많게는 42만 개까지 포장용기를 배달해야 하는데 창고에서 물량을 꺼내서 옮기는 작업이 주된 일과였다. 포장용기가 진열된 1층은 손님들이 용기의 사이즈나 감촉, 재질을 알기 위해 마련된 전시용 매장이었고 2층이 가건물을 올려서 발주, 회계 등의 서류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사무직 직원이 두 명에서 세 명 있었다. 두 명에서 세 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무리 사무직 직원이라도 화장실이 다 부서지기 직전의 가벽에 판자를 덧대어 만든 재래식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 명 정도는 들어왔다가 나갔다, 를 반복하는 것 같아서였다. 오직 2층 사무직들만 의자가 있었고 나머지는 매장과 창고만 오가기 때문에 의자가 없었다. 의자가 없기 때문에 출근 시 지하철에 서 있게 되면 체력은 더 빨리 고갈된다. 오전에 출근하면 근무테이블이 내려오는데 방산시장 곳곳의 지하창고로 이동해서 오후에 배송할 목록대로 필요한 용기를 찾아서 옮기고 배송을 위한 포장을 했다. 피곤해서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려 하면 의자가 없으니 당연히 테이블도 없어서 용기가 쌓인 박스를 두 개나 세 개 정도 포개서 그 위를 테이블처럼 썼다. 현장 직원들은 그 행동을 비참하거나 부당하다는 생각보다 박스로 테이블을 만들었으니 머리가 좋다, 현명하다, 역시 사람은 도구를 써야 해,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사선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뇌 촉수가 있는 공간이고 양쪽으로 물이 많이 차 있는지 확인할게요. 머리 살짝 뒤쪽을 보시면 땅콩 모양으로 뇌가 잘 발달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아주 잘 형성되고 있어요. 이게 눈의 수정체고…… 지금은 아기가 눈을 뜬 게 아니고요. 원래 렌즈가 이렇게 보여요. 이게 정면, 이마, 코 위치. 아시겠어요? 그중에서 코와 입은 세모난 게 코인 거 보이실까요? 저희가 입 부분을 보는 것은 언청이라고 해서 입술 갈라졌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건데요. 초음파로는 확인이 어려워 나중에 태어났을 때 확인한답니다.

자기야, 일어나.

아내는 주말에 기절한 듯이 자고 있다가 일어난 내게 다짜고짜 바보냐고, 벙어리냐고 물었다. 왜 의자를 달라고 말하지 못하냐고. 나는 꼭 의자가 있어야 하냐고 되물었고 아내는 세상의 모든 노동자는 의자가 있다고 했다. 의자가 없는 회사나 직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자신도 계약직으로 시청에 근무를 했었어도 의자가 있었고 식당이나 편의점에 아르바이트를 해도 의자가 있지 않느냐고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거의 울먹이듯이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의자가 없어도 된다고 했다. 앉아서 쉴 시간이 없다고. 그 시간에 물건을 더 날라야 한다고 했다. 사장이 거래처에 다녀와서 현장 직원들에게 힘들면 사무실에서 간식도 먹어가면서 일해요, 라고 했지만, 2층의 간식 바구니는 늘 비어 있었다. 직원들끼리 나무 합판 위에 믹스커피나 초코파이 등을 놓고 먹으면서 아, 언제 그만두지. 아, 내일은 나오지 말아야지, 하는 말들을 중얼거리듯이 혼잣말하다가 다시 창고로 이동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 일을 하기 전엔 택배 상하차를 했고 그 전에는 택배 배송 보조 업무를 맡았다. 모두 서서 일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우체국에서 새벽에 배송하는 계약직으로 일할 때에도 오토바이를 탔지 의자에 앉았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던 적이 없으므로 의자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누워 있는 아내 옆에 보조의자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고 있다. 어쩐지 너무 편하고 아늑했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랗고 작은 의자였지만 아내와 함께 있으니 너무 평안했다.

필요한 거 없어? 프린터가 있어야 하나? A4용지는?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내의 뒤에서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스토리를 봐버리면 당황해할까봐서. 아내는 나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퇴근하면서 목공소에 들렀다. 목공소 사장은 여긴 나무를 주문받아서 제작을 하는 곳이지 자재를 취급하는 곳은 아니라고 했다. 목자재상을 소개받았다. 명함에 새겨진 주소지를 보니 거리가 멀어서 휴일 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방사선사가 검은 화면을 가리켰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제 24주차죠? 아기 볼게요. 아내와 내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제 아기 심장 뛰는 소리 들어볼게요. 콩닥콩닥, 잘 들리죠? 이제 아기 심장 구조 볼 건데요. 심장만 확대해서 따로 볼게요. 심장은 좌심방 좌심실, 우심방 우심실 구조고 심실 사이에 하얀 게 판막이라고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막이 막혀요. 제일 많이 생기는 심장병이 심실중벽결손이라고 해서 벽 사이에 결손, 그러니까 구멍이 생기는 건데 이 주수에서는 초음파로는 보이지 않아서 정확도가 낮지만, 현재 보이는 상태로는 안전한 거 같네요. 아기는 여전히 잘 자라고 있어요. 여기 보이시는 이게 무릎이에요. 다리 보시면 다리 접어서 두 다리 모으고 있어요. 이건 종아리 정면이에요. 무릎, 발. 같이 모으고 있습니다. 살짝 움직이죠. 지금? 발 받치고 있는 거 보여요? 여기가 발뒤꿈치. 잘 안 보이니까 화면 잠깐 돌릴게요. 보세요. 이제는 손을 올리고 있죠? 아, 방금 입 벌렸죠? 움직이죠? 요거는 조금 못 알아보실 텐데 귀 달려 있어서 귀 확인했거든요. 양쪽 귀 모두 태어나면 청력검사 따로 하니까 그때 하시면 돼요.

휴일이 되자 곧장 나는 목공소에 들렀다.

나무가 필요합니다.

어디에 쓸 건데? 공사 현장이야? 아니면 뭐 셀프로 인테리어 하려고 그래?

아내가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겠네. 뭐라는 거야.

이건 뭡니까?

태고합판이야.

이건요?

정제다루끼.

이건?

폼다루끼, 옆에 투바이, 저건 오비끼.

종이가 되는 나무는 없습니까?

목재소 사장은 종이로 만들 나무는 없다고 했다. 나는 나무 냄새가 나는 목재소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사장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작은 앉은뱅이 나무 의자에 눈길이 갔다. 가만히 보니 그 의자는 반찬과 밥을 올려 먹을 때는 작은 식탁이면서 닦아서 앉으면 의자가 되는 아주 신비한 나무였다. 손님들에게 팔고 남은 나무 조각을 못질해서 덕지덕지 붙였는지 조악해 보였으나 쓰임은 다양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가 원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물어보려 했다. 아내에게 다가가려다 멈췄다. 아내의 어깨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방해가 될까봐 아내의 발치 뒤에서 전기장판을 켜고 잠들었다.

아내가 하혈한 날, 산부인과에 데려다주느라 지각했더니 막내의 입이 비죽 나와 있었다. 나는 뒤늦게 합류해서 사장의 브리핑을 들었다. 에어컨 설치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설치기사를 부르지 않았으니 현장 직원들이 합심해서 에어컨 설치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현장 직원이라고 해봤자 나와 막내가 전부였다. 이따금 세 명이 된 적도 있지만 잠깐뿐이었다. 사장은 에어컨이 여름엔 비싸고 겨울에 구입해야 가장 싸다고 말했다. 우린 에어컨 설치를 해본 적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막내의 말로는 내가 나무를 사러 가느라 토요일 바쁜 날, 휴무를 써서 사장이 화가 잔뜩 나서 설치기사를 부르지 않는 것에 한몫했다고 했다. 사장이 완전히 자릴 떠나자 막내가 곧장 휴대폰으로 사장이 지시한 상황 사진을 찍었다. 노동청에 신고해야지. 해도 해도 너무하네. 쇳덩어리 이거 사장이 와서 한번 옮겨보라 하세요. 이거 옮기다가 허리 다 나가요. 그럼 우리 내일 출근 못해요. 다칠 확률도 높고요. 아무튼 나는 장갑을 꼈다. 안 되나? 나는 어떻게든 해볼 작정이었다. 그러기엔 2층 가벽 옆에 튀어나온 난간으로 올라가서 임시로 공간을 만들어 실외기를 달아야 했다. 작업을 하려면 녹슬고 부식이 일어난 철제 다리를 올라야 해서 추락의 위험도 있었다.

어떻게든 하면 하죠. 그런데 이거 하나 하고 나면 몸이 퍼져서 다음 일을 못해요. 이거 끝내면 바로 퇴근시켜주는 거 아니잖아요. 설치기사 일을 대신 하는 건데 이거 했다고 그만큼 보수를 주거나 그 반이라도 주는 거 아니잖아요.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매장 안까지 들렸는지 매장 문을 열고 사장이 나왔다. 야, 너는 직원이고 나는 사장이야. 사장이 근무시간에 일을 시키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어?

이곳과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야, 인마, 에어컨을 다 같이 시원하게 쐬기 위해서 내가 돈 들여서 샀고 그걸 설치하는 건데 이게 상관없는 일이야? 난 직원들의 복리후생을 생각했다고.

복리후생요? 에어컨은 원래 있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사실 에어컨은 우리랑 상관이 없어요. 솔직히 저희는 사무실에 가서 쉬는 시간이 없잖아요. 내년 여름까지 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게다가 우리는 의자도 없잖아요. 앉아서 쉬는 것 자체가 없는데.

나는 막내를 말렸다. 괜히 나에게 불똥이 튀면 생활비와 월세 마련하기가 힘들어진다. 국가에서 임신바우처로 산부인과 진료비를 지원해주고 있지만, 나와 아내의 삶은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리가 작업해야 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니 막내와 나의 옷은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막내의 말대로 우린 에어컨을 쐴 시간이 없었다. 에어컨 작업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서 끝났고 그 시간 동안 밀린 발주대로 제품을 창고에서 이동하고 포장, 발송해야 했다. 모든 일과를 끝마치니 밤 11시 47분이 되어서야 겨우 매장으로 돌아왔다. 사장을 보니 의자에 앉아서 한가로이 발톱을 깎고 있었다. 수고했어, 하는 말도 없었다. 막내와 나는 밖으로 나와서 투덜거렸다.

이 쓰레기 같은 회사 엿 같아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막내가 목장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잠시 후, 그것도 다 돈이라고 생각했는지 주섬주섬 주웠다. 막내와 함께 설치된 에어컨 쪽을 보고 있는데 가로등 아래에 나무판자가 보였다.

저게 뭐지? 내가 가리켰고 막내가 그곳을 바라봤다.

나무잖아요.

나무?

네, 우리가 티 테이블로 쓰던 나무판자요.

저게 왜 여기 있어?

사장이 에어컨과 가벽 사이에 끼울 합판 살 돈을 아끼려고 저걸 찾아서 넣은 거 같은데요?

결국 저기에 안 맞아서 떨어졌구나.

그렇죠. 제가 버리고 올게요.

잠시만, 그거 내가 가져갈게.

왜요?

나무가 필요해.

나는 나무판자를 들고 퇴근했다.

아내에게 상처투성이고 측면이 마모된, 여기저기 못 박힌 흔적이 수두룩한 나무를 내밀었다. 혹시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야?

아내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아기 보니까 생각이 많아지죠? 머리는 좌우로 직경을 확인하는데 주수에 맞춰서 크고 있습니다. 이제 아기 길이는 15.48㎝에 몸무게는 592g이네요. 좋아요. 노는 건 좀 어땠어요? 아가 태동이 잘 느껴져야 해요. 지금은 보시면 아, 하고 하품을 하거든요? 입을 아 벌린 게 보이죠? 이게 혀고 위에 코뼈도 이렇게 잘 보이고 있고. 괜찮네요. 입이 움직이죠? 그러면서 양수도 먹고 하니까요. 매일 태동은 잘 느껴보셔야 해요. 요렇게 보시면 여기가 아기 배고 이 안에 이게 위가 보이는 거예요. 양수를 잘 삼키고 있어서 위도 확인이 되는 거고. 여전히 건강하네요!

다시 방산시장.

사장의 브리핑을 들으니 일이 더 늘어났다. 오전에 창고에서 포장용기 4만8000개를 이동해야 했는데 위생 젓가락, 수저, 종이빨대, 포장지가 겹쳐지면서 어마어마하게 무게가 나가게 되었다. 포장지 마흔 박스를 넘게 옮기고 허리가 아파서 잠시 박스더미에 앉았다. 드디어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 2분 정도 되려나? 단 한 번도 완충된 적 없다. 막내가 한숨을 쉬었다.

형, 사람은 로봇이 아니에요. 업무강도를 높이면 다음 날 효율이 더 안 나와요. 딱 이거 여기서 여기로 옮기는 데 한 시간 걸리니까. 아홉 시간이면 다 옮기겠지, 하고 일을 주면 안 된다고요.

갑자기 왜 그래? 오늘은 그렇게 빡세지도 않은데.

이거 끝나고 창고 정리하래요.

아, 또 허리 나가겠네.

그래도 그나마 제가 버티는 게, 사장님이 직원 한 명 더 뽑는다고 했으니까.

알바몬에 공고 내렸던데?

진짜요? 아……. 우리가 열심히 일했더니 사람 더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것 같아요. 미치겠네. 진짜. 아니, 이럴 거면 택배 상하차 하지. 월급으로 따지면 여기가 더 적은데.

막내와 나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로 들어갈 때,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혼잡한 지하창고는 먼지와 습기로 퀴퀴했다. 분명히 일주일 전에 창고를 정리했던 것 같은데 정리한 창고의 물건을 모두 다른 창고로 다 옮기라는 지시였다. 이 창고라는 것이 물건이 몇십 개 있는 게 아니라 몇백, 아니 몇천 개가 넘는 것들로 개당 19㎏의 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박스를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온몸에 전달됐다. 박스를 손수레로 옮기면서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 몸속에 있는 아기도 생각했다. 박스를 움켜쥘 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코너를 돌거나 박스더미가 쌓인 복도를 지날 때, 박스의 양쪽 측면을 신생아 받들 듯이 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할 수 있는 구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복도를 지나며 19㎏의 박스를 들지만 림보 자세로 지나가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작업을 시작하면 몸이 절대 식지 않는다. 물건의 무게는 택배가 허용하는 기준에 맞춰져서 20㎏이 조금 안 되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무조건 19㎏ 이상의 박스를 든다는 것이었다. 배송을 위해 트럭에 실을 때에는 트럭에 적힌 적재량을 무조건 넘겨서 보냈다.

나와 막내는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다가 이마에 맺힌 땀을 장갑으로 닦았다. 사장님, 왜 이러냐? 왜 옮긴 걸 또 옮기라는 거야?

형, 진짜 몰라요? 사장님이 이 창고를 비우는 것도 더 싼 창고로 옮기려고 하는 거예요. 더 허름하고 낡은 곳이잖아요. 여기가 면적은 넓은데 월세를 훨씬 싸게 받거든요.

그래도 우리가 옮기면서 드는 노동은? 그 시간에 손님들에게 상품 보내야 하지 않아?

그래서 예전에 이삿짐 업체도 써봤는데 오백만 원 불렀어요. 이백에 해준다는 업체 불렀는데 아침에 이십 분 하고 다 도망갔어요.

그럼 오백만 원치 옮기는 일을 우리에게 전담한 거네?

그렇죠.

우리는 월급이 이백만 원이 조금 안 됐다. 그런 우리는 계속 짐을 날랐다. 지하창고와 지상창고에 마구잡이로 제품들을 구겨 넣어놔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비정상적으로 좁았다. 도시락, 국물용, 샌드위치 포장용기들이 꽉 차 있었다. 박스를 나르면 무조건 허리에 무리가 왔고 어깨에 저릿한 통증이 왔다. 일을 하면 할수록 파스를 더 구매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걸핏하면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박스 모서리에 찔리거나 부딪쳤다. 어쩔 수 없이 질긴 옷을 입어야 했다. 쉽게 뜯어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재질의 작업복. 색상은 컬러풀할 필요가 없으며 단색이 좋다. 장갑도 쉽게 해지지 않고 도톰한 것으로 손가락이 다치지 않게. 한 구역이 끝나면 다른 구역에서 테이크아웃 종이용기, 무광 천연펄프, 도시락용 사각용기, 온갖 용기들을 나르고 또 날랐다. 반팔 티셔츠가 흠뻑 젖고 나니 낮 12시 3분이 되었다.

와, 드디어 점심시간이네?

네, 형, 식사 맛있게 하고 오세요. 내 뒤를 따라 짐을 나르던 막내가 말했다. 막내와 나는 점심시간을 빌미로 어딘가로 흩어졌다. 둘 다 점심시간에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 방산시장의 인파 속에 몸을 숨긴다. 그러고는 십 분 거리의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다. 아내가 점심때 무얼 먹었냐고 물어보면 그 근처의 식당들 이름을 둘러대며 언젠가 슬쩍 봤던 메뉴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살면서 이랬던 적이 없으나 아내가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아내가 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어딘가에 앉기 위해서 식당 의자도 충분히 괜찮았지만, 편의점 간이 의자에 아주 조용히 숨죽이며 앉았다. 우물우물, 쩝쩝, 꾸역꾸역 식사를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방산시장으로 돌아와 손수레를 끌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남편에서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이유가 전부였다.

식사를 마치고 방산시장으로 돌아왔다. 창고의 박스는 옮기고 옮겨도 끝이 없었다. 막막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막내와 내가 2인 1조로 박스더미를 운반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달팽이처럼 늦게 흘렀다. 마치 기계라도 된 것처럼 반복된 동작으로 짐을 나르다가 내가 어쩌다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됐고, 어쩌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잡생각에 빠졌다. 실수로 박스를 놓아버렸다. 악, 하고 막내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박스의 모서리가 막내의 중지를 찍어버린 것이다. 장갑을 벗으니 손가락이 검게 멍들어 있었다.

막내는 응급처치를 하고 처음으로 정시퇴근을 했고 나는 혼자 남아서 마무리를 하느라 밤 10시 37분에 퇴근했다.

집에 오니 아내는 여전히 책상머리에 붙어서 글을 쓰느라 씨름 중이었다. 아내는 작은 책상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다. 아내는 연애 때도 작은 책상과 작은 화장대, 그리고 작은 싱글침대를 썼다. 나는 좁은 방에 살며 좁은 화장실과 좁은 현관을 썼다. 늘 좁은 창문으로 밖을 쳐다봐서 내 시야는 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좁은 곳에 사는 남자와 작은 곳에 사는 여자가 만나면 좁고 작아져서 삶은 더 비참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되도록 빨리 헤어지려 했다. 그러나 아내의 의견은 달랐다. 좁은 곳과 작은 곳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고 공간과 공간이 합쳐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혼자 사는 3평과 혼자 사는 4평이 합쳐지면 7평이 끝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있으면 14평처럼 쓸 수 있다고 했다. 아내의 판단에 나는 아내를 열렬히 껴안고 사랑했다. 그 결과, 나의 씨앗이 아내의 몸에 들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질문했다. 내일도 산부인과 가는 날이지?

까먹지 않았네? 아내가 잠시 나를 향해 뒤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작았던 자궁이 아기를 품어서 이렇게나 커졌어요. 좁았던 자궁경부도 아기가 나올 때를 대비해서 넓어지고 있어요. 와, 이제 아기가 엄청 커졌어요! 지금 자라 있는 것도 28주 크기에 맞춰서 자라 있거든요? 지금 아기가 양손을 막 올려서 얼굴을 가리면서 안 보여주고 있는데 앞쪽으로 마디마디 보이는 게 손가락이거든요? 뼈마디까지 선명하죠! 이건 눈이고 눈은 감고 있으니까 길쭉하게 선이 그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고요. 안쪽으로 동그라미 작은 동그라미가 눈동잔데 여기까지 확인이 되는 거고. 아기가 손으로 자기 얼굴 만지고 머리 만지고 하면서 잘 놀고 있어요. 주수에 맞게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네요!

하객은 양가 부모님과 근처에 사는 친척 몇 분, 친한 친구 한두 명이 보태져서 열 명 남짓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다 합쳐서 아홉 명이었다는 것이다. 주례도 없고 뷔페도 없이 스몰웨딩이라는 명목하에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입은 우리의 사진 한 장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혼을 증명했다.

반차를 쓰고 출근하니 막내의 손가락에 괴사가 왔다. 젠장, 막내가 처음 뱉은 말이자 오후 내내 한 말의 전부였다.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내 손이 저러지 않아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울먹이는 막내에게 커피를 사줬지만, 막내는 입에 대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형, 제가 총대 멜게요. 제가 사장님에게 잘못된 것들 말하고 때려치울게요. 형도 도망가요. 다른 곳에 가요. 어딜 가도 여기보단 좋을 거예요. 거래처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래요. 어? 또 사람 바뀌었네?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나는 여기에 남겠다고 했다. 새 직장을 구하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 치자. 나는 그 일주일의 급여도 중요해. 그런데 요즘 일이 쉽게 구해져? 한 달이나 두 달 동안 구직활동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난 여기서 버틸게. 함께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막내는 박스더미에 걸터앉아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는 고졸이고 토익 점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자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나는 막내가 그만둬도 일주일이나 늦어도 한 달 뒤에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했다.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막내와 나에게 사장은 요즘 경기가 어려워졌다며 퇴근 전 브리핑에서 여기서 어쩌면 한 사람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먼지투성이가 된 몸으로 아내를 껴안았다. 샤워하고 돌아와서 아내의 볼록한 배를 매만졌다. 온기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무한대로 뿜어져 나왔다. 할 수 있어. 내가 다짐했다. 아내는 아기가 발길질도 하고 기지개도 켜면서 이따금 우리에게 잘 살아 있다며 신호를 보낸다고 했다.

보란 듯이 막내가 결근한 날, 나는 미친 물량을 소화해야 했다. 1분 1초도 쉴 수 없었다. 철제 사다리를 세워 새 박스를 안으로 구겨 넣고 제품을 꺼낸 흔적이 있는 개봉된 박스를 앞으로 내 뺐다. 그 중간에 제품 박스를 넣었더니 5분 14초가 걸렸다. 시간을 체크하는 것은 단순 노동 한 번의 시간을 계산하고 비정상적인 작업량을 원할 경우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한 2시간 일했을까? 겨우 47분 지났다. 며칠 심한 노동에 시달려 누적된 통증으로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어깨까지 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정형외과에 입원해야 할 것 같아서 목장갑을 벗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사장에게 보고하고 일부러 방산시장 종합상가 화장실로 갔다. 배변이 마렵지도 않은데 공용 화장실 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았다. 사실은 이것이 아내에게 말 못한 내 전용 의자였다. 방산시장의 많은 노동자들은 나와 같은 비밀 의자에 앉아서 가족사진을 본다. 나도 비밀 의자에 앉아서 흑백으로 된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본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잘 자라고 있었다. 이 아기가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되면 나의 직업을 친구나 선생님께 뭐라고 설명할까.

어렸을 적에 선생님이 가정통신문에 아버지의 직업을 적어 오라고 하면 나는 꼭 ‘자영업자’라고 적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나를 불러 자영업자인 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시냐며 되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또는 ‘그냥 인테리어업요’ 중에서 선생님의 표정이 서늘하면 전자, 온화하면 후자를 골랐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나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둘러댔다. 내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사람에게 ‘노가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아버지도 의자가 없는 곳에서 일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사랑한 만큼 반드시 피임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좁은 집의 작은 침대에서 틈만 나면 사랑을 나눴고 한겨울 반지하 7평짜리 집에서 서로의 온기를 더했다. 전기장판은 자주 고장 났지만, 서로의 손을 꽉 잡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내를…….

어디야? 어디서 뺑이치는 거야?

사장이었다. 나는 황급히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고 나왔다. 내 옆 칸에서 절름발이 비니루 상회 남자가 딸과 통화하면서 나왔다. 그 옆 칸에서 외팔이 지업사 사장이 아들에게 카톡을 보내면서 나왔다. 목형, 아크릴, 금박, 한지, 철물, 정밀 직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화장실 변기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키스탄 남자는 소변을 누면서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시 산부인과.

아내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방사선사의 표정에 활짝 꽃이 피었다. 와, 축하드려요! 드디어 만삭이네요. 곧 출산이 다가오는데 기분 어떠세요? 떨리죠? 네, 하지만 아기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행복을 준대요. 어머, 아기가 웃네요. 미소가 확인되죠? 아빠가 옆에 있는 걸 아나봐요. 방사선사가 우릴 보며 미소 지었다. 나와 아내가 함께 웃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우리의 온기가 더해졌다. 땀이 찼다. 땀의 온도는 아내가 하필이면 나를 만나서, 아내의 눈가에 자주 맺혔던 눈물의 온도와 같았다.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길에 아내는 이제 막 초고를 다 썼다고 했다. 나는 아내가 쓴 미완의 글을 읽기 위해 아내의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소설이 아닌

아주 작고 귀여운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당선소감>

 

   기다리는 이 있음에, 기대하는 이 덕분에

어떤 여자를 알게 됐다. 그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요. 성환씨의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네? 누가요?
암튼 있어요.
에이, 없잖아요. 아무도 제 소설을 기대하지 않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청탁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청탁이 꼭 와야만 독자들이 소설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나요?
독자요? 제가 독자란 게 있나요? 네.
어디예요?
그건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그 여자와 결혼했다.

엄마, 아빠가 신작소설 언제 나오냐고 물으셔.
곧.

내가 아내에게 대답했다.

● 1986년 출생


 

  <심사평>

  

  왜 소설을 읽는가, 그 오래된 질문에 정답이 있다면…

  예심·본심 통합으로 진행된 올해 심사에서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아홉 편이었다.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고 저마다 개성이 분명하여 심사위원들을 기쁜 한편 곤혹스럽게 한 그 작품들 가운데 끝까지 논의된 것은 다음 세 편이다.

 ‘개와 개인’은 엄마를 일찍 여읜 이십대 화자가 엄마 역할을 하던 할머니의 입원 이후 어린 동생을 돌보는 일까지 떠맡고 그 와중에 반려견마저 병으로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다. 이 상실감 가득한 서사를 작가는 시종 담백한 문장으로 기술한다.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이 결국 세상에 ‘같은 문제’란 없고 ‘고작 개 한 마리’의 죽음이 가진 무게를 측량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음을 독자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확인시켜주는 필력이 미덥다. 다만 무난하게 잘 쓰인 소설임에도 그 무난함이 여타 응모작들을 압도할 만한 장점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좌초Stranding’는 존재론적 고독에서 죽음으로 해방되는 한 노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야기의 집이면서 사유의 집이고 동시에 언어의 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존재론적 각성에 대한 묵직한 통찰, 유려하고 기품 있는 문장들이 이 작가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강지희 평론가는 “죽음 앞에서 삶의 시간을 팽창시켰다가 인간 너머의 기원으로 수축해 들어가는 팽팽한 힘이 지닌 서사적 무늬가 아름다워 눈을 떼기 어려운 작품”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일부 번역투 문장들의 어색함과 백과사전식 정보의 조합이 주는 익숙함은 이 작품이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i’의 화자는 하루에 수십만개씩 포장용기를 옮기는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이다. 그는 임신한 아내가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하자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한다. 이 서사에는 어떤 미학적 새로움도 독자적인 스타일도 재기도 패기도 없다. 그러나 그 이상 값진 것이 있다.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혹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작품이라는 것.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나 사랑이거나 배려라고 할 수도 있을, 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 어딘가에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그것을 이 작품은 화자의 정직한 목소리를 통해 점점 가시화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소설 초고에서 극대화한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다른 많은 미덕보다도 그 점에 매료되었다. 하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설은 어쩌면 물성을 가진 의자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종일 앉을 새도 없고 앉을 데도 없이 서서 일하는 누군가에게 잠깐 앉아 쉴 의자를 마련해주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축하드린다. 새해 아침 이 따뜻한 소설이 심사위원들에게 그러했듯 독자들의 마음에도 온기를 전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낙선했으나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과 역량을 보여주신 다른 응모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올린다.

심사위원 : 정지아, 김미월, 김인숙, 강지희,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