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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러브레터 / 권희진

 

결국 여기로 왔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으나 막상 여기 16층에 와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가만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그걸 집 밖에서 해본 적은 없다. 집이 아닌 곳에서 정지해 있으면 사람에 치이고 차에 치이고 무언가에 자꾸 치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 16층에는 흐름이 없다. 바람이 있고 소음이 있지만 딱히 흐름이랄 것은 없다. 낮 시간대에는 사람들이 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사적인 전화를 하다 가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가 목적을 다하면 다시 자신들의 층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그런 곳에 나는 무엇 때문에 왔나, 라고 물으면 흡연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연애 통화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생각할 장소가 필요했다. 생각이란 일에 그럴 만한 장소가 필요한가 물으면 또 그렇지는 않지만 구태여 나는 여기로 왔다. 나는 여기에서 한 노인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한참 생각하다보니 문득 서태지가 떠올랐다. 가수 서태지 말고 서태지와 목소리가 비슷했던 30대 후반의 아저씨 말이다. 그 아저씨는 예전에 살던 동네의 비디오가게 사장님으로, 내 친구의 삼촌이었는데 내가 조카의 친구라고 해서 서비스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깍듯했다.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깍듯하게 돈을 받았다. 만화책 반납이 늦어지면 집으로 전화해 나의 어머니에게 책을 반납하라는 내용과 함께 연체 금액을 깍듯하게 알렸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때 좀 혼났다. 그 사장님은 잘 지낼까. 친구로부터 삼촌이 가게를 곧 정리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만화책을 왕창 빌려서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반납하지 않았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언제고 집으로 전화가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끝내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때 빌려온 만화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집에 놀러왔던 누군가가 훔쳐가고 해서 소수만 남아 있다. 나도 이제는 그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가끔 거울을 보면 그의 입 주변에 거뭇하게 남아있던 수염 자국이 나에게도 보여서 기분이 묘해진다.

그건 그렇고 여기 16층은 조금 이상한 곳이다. 맥락 없이 서태지 사장님 같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든다는 면에서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여기엔 어떤 기운들이 있는 게 분명하다. 높은 곳에 혼자 올라왔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고독의 흔적이랄까. 여기는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도 없는 시시한 옥상인데도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곳을 드나들며 그런 흔적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그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밤새 잠가두었던 문을 새벽 6시에 열어두는 일을 했다. 그것 말고도 재떨이 통에 쌓인 담배꽁초를 비운 다음 가래침을 닦아냈으며 가끔 시간이 남으면 어설픈 화단에 질서 없이 자라난 잡초를 뽑거나 바닥을 쓸기도 했다. 그리고 자정이 되면 다시 문을 잠갔다. 옥상 열쇠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 중 나에게만 있는 특별 권한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죽은 노인을 발견하기 전까진 나는 그런 일들을 성실히 해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서 그 죽은 노인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밑단이 터져서 솜이 삐져나온 낡은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장면을 계속 떠올리다 보면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애인과 통화로 싸우면서 소리를 지르던 남자나 청소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도 바닥에 꽁초를 그대로 던져버리던 사람들,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빨개진 채로 흐느끼던 여자까지, 여기에서 마주쳤던 모든 사람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들은 왜 여기에 왔던 것일까. 왜 하필 여기여야 했을까.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여기에 올라왔던 노인을 이해해보기 위해 반복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이것을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왜 여기에 올라왔던가.

어쩌다 여기 16층에 오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아마도 열 살쯤. 나는 그때 두통이 심했다. 두통 때문에 자주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는데 어린 놈이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느냐고 보는 어른들마다 꼭 한소리를 했다. 아픈 것도 힘든데 괜히 그런 말까지 들으면 짜증이 나서 원래 편두통이 심해요, 라고 대꾸했고, 그러면 네가 편두통이라는 말은 어떻게 아느냐고 되레 무안을 줬다. 그러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알더라. 가만 생각해보면 나의 어머니가 편두통, 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머리가 아픈 것을 편두통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열 살 때의 나처럼 항상 머리가 아픈 사람이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모와 대화하면서 자신이 예술적인 기질이 있어서 두통이 심하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이었지,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예술, 이라는 말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엄마는 예술 하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더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서 숙제나 하라며 야단을 맞았다. 나는 그게 왜 쓸데없는 말인지도 모르겠고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알 수 없어서 서러운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던 일이 기억난다. 그 뒤로는 어머니 앞에서 예술, 이라는 말은 잘 꺼내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어머니는 머리가 아플 일이 많은 사람이긴 했다. 나의 아버지는 일 년 중 집에 머무는 날보다 밖으로 나도는 날이 더 많았고 그 때문에 어머니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니네 아빠가 없으니까 내가 잠을 잘 수가 있니. 어머니는 그 말을 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어른인데 왜 혼자서 잠을 못 자는가. 나는 그게 궁금했지만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누군가의 생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끔하게 차려입고 요리를 했다. 식사가 끝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고 나는 아버지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아버지의 지갑에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지폐를 꺼내 티셔츠 속에 숨겨두곤 했다. 내가 열세 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의 집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돈을 훔치고 있던 걸 알아채서 내가 보기 싫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것들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우는 날도 많았다. 소리도 없이 수도가 터진 것처럼 눈물만 계속해서 흘렸다. 하도 울어서 저러다 편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 날도 있었다. 유독 심하게 우는 날에는 어머니의 앞에서 일부러 아픈 척을 했다. 어떤 때에는 배가 아파서 계속 설사가 나온다고 했고 또 다른 날에는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잠시 울음을 멈추고 구급약 상자에서 게보린을 꺼내 알약을 네 등분 한 다음 그중 한 조각을 나에게 주고는 다시 우는 일에 집중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식의 아픔보다 자신의 슬픔이 더 중요한 사람 같았다.

어머니의 보통날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으니 매일같이 머리가 아픈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는 어머니의 미간만 봐도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침대에 드러누워 아프다 아파 죽겠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어머니의 방 문지방을 밟고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엄마 괜찮아? 라고 묻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구급약 상자에 게보린을 채워놓는 일조차 잊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약을 줄 수도 없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서 나만 알고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 진짜 아프면 유체이탈하면 돼. 내가 알려줄게.

어머니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네가 그런 말을 어떻게 아니?

그런 말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가 뭐가 중요할까. 오로지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나아지는 일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고통도 잊은 것처럼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설명했다. 나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는 다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나가. 문지방 밟지 말고. 복 나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편두통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금니가 심하게 썩어서 그 통증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는 것이다. 편두통마저 없어지고 나니 나는 어머니와 더더욱 닮은 구석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게 좀 서운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아픈 얼굴을 덜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나도 집에 잘 들어가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대신에 할머니와 둘이 사는 친구네 집에 가거나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친구네 집을 떠돌며 지냈다. 남의 집에서 지내는 일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이 아닌 다른 곳에는 자유가 있었다. 집에서는 낮잠을 잘 수도 없고 묻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는데 남의 집에서는 큰 소리를 내며 웃어도 되고 늦게까지 자다 일어나도 혼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끔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는 내게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마지막에는 남자같이 굵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어색했다. 소리를 내던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 울 줄 아는 사람이었나. 여태껏 어떻게 참고 지냈던 거지. 그러나 그런 것들이 딱히 궁금하지는 않아서 어머니한테 묻지는 않았다. 다만 멀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맨날 머리가 아프지.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아는 것이 많았다. 오토바이를 타는 법도 알고 담배 피우는 법도 알았다. 이런 걸 하면 집에서 혼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몰래 하면 괜찮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등에 매달려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좋아했지만 술이나 담배는 같이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양심에 걸렸다. 그런 걸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해도 친구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이 새끼, 은근 착하다니깐. 오히려 그렇게 칭찬을 해줬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같이 어울렸다. 처음에는 셋이 놀았는데 나중에는 일곱 명까지 늘어났다. 야, 가족이 별거냐 우리가 가족이지.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의 집에 드나들고 같이 먹고 같이 잤다. 나중에 결혼을 못 하더라도 이 친구들만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간혹 자신의 집에 못 오게 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러면 우린 가장 자유로운 순일의 집으로 갔다. 순일은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았다. 언제부터 할머니와 살게 된 것이냐 물은 적이 있는데 순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더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순일의 집은 아늑한 맛이 있었다. 좁고 낡은 집인데도 항상 따뜻해서 그런지 그곳에 있으면 노곤해졌다. 너무 오래돼서 누렇게 때가 낀 벽지마저도 포근하게 느껴졌달까. 그리고 무엇보다 냄새가 좋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누룽지 향이 났는데 나는 그게 순일의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라고 믿었다. 마땅히 먹을 게 없어서 이거라도 간식으로 먹으라며 누룽지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손에서 언제나 그 냄새를 맡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도독 씹으면서 방바닥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봤다. 순서를 기다리며 만화책을 돌려보고 누군가는 졸고 있고 누군가는 여자 친구와 전화를 하고 또 누군가는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장면들을 떠올리면 어디선가 숭늉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다.

나는 순일과 고등학교가 달라서 점차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굳이 시간을 내서 순일의 집에 찾아갔다. 순일은 학교에서 새로운 애들과 가까워졌는데 그 애들은 약간 거칠었다. 그래도 나는 순일의 친구들이니까, 하고 종종 같이 놀았다. 그 애들은 중학교 친구들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았다. 오토바이를 타는 건 기본이었고 가끔 훔치기도 했다. 나는 순일에게 우리는 그런 애들과 어울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순일은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 애들은 착해.

그래?

그래, 순일은 착하니까, 착한 애가 착하다고 하는 애들은 착한 거겠지, 했다. 나는 순일과 그 애들을 주말에만 만났다. 만나면 주로 피시방에 가거나 노래방에 갔다. 아니면 오토바이를 빌려서 세 명씩 매달려 골목을 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일은 즐거웠다.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높이는 일도 재미있었는데 그보다도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점점 더 빠르고 위험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너도 해야지?

순일의 친구들은 나에게도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난 아직 앤데, 아직 돈을 벌 필요도 없는데 무슨 기술을 배우라는 걸까. 알고 보니 그 애들이 말하는 기술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돈이 되는 기술이 아니라 무언가를 훔치는 일을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거 훔쳐서 돈도 안 되는데 왜 해?

그러자 그 애들은 내가 순진하다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순일을 쳐다봤다. 순일은 난감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째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 그게 뭐 대수라고, 하고 생각해 버렸다.

내가 그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더 단호한 말로 그 애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순일을 말렸다면 지금까지도 나는 순일의 집을 드나들며 함께 만화책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기술이라는 것을 익히면서 우리는 점점 대범하게 우리 것이 아닌 것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훔쳐 타다가 길가에 버려두거나 편의점에서 술과 먹을 것들을 훔쳤다. 한번은 고깃집에서 16인분의 고기를 먹고 차례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도망친 적도 있다. 너무 자주 훔쳤던 죄일까, 너무 많이 몰려다닌 탓일까. 우리는 고깃집 먹튀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나는 고깃집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도 모두 했다. 털어놓았다, 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털어놓고 빨리 그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나와 순일과 순일의 친구들은 모두 소년보호재판을 받아야 했다. 나의 어머니는 변호사를 선임했고 그 때문에 소년원은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단기 보호관찰 처분만을 받았는데 순일은 변호사가 없어서 소년원에 갔다. 판사는 나에게 학생의 본분을 잊지 말고 성실히 살라고 했다. 그 후에 나는 전학을 한 번 했고 그 뒤로는 학교를 가는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방 밖으로는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나는 차라리 그게 편했다. 소년원에 가있는 순일이 그리울 때는 유체이탈을 해서 순일의 집에 놀러 가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순일의 방에 드러누워 할머니가 주는 간식을 먹으며 만화책을 봤는데 가끔은 그게 너무도 생생해서 내가 진짜로 그곳에 다녀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즈음 중학교 친구를 통해 순일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순일은 소년원에서 나온 후에 공부는 그만두고 정비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곳에서 진짜 기술을 배워 왔다고 했다. 순일의 집에 두고 온 나의 만화책들을 돌려달라는 핑계를 대며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순일은 내 만화책들을 버렸을까 아니면 종종 꺼내서 읽어볼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도 물어볼 친구가 없었다.

나는 제대를 한 직후부터 일을 시작했다. 대학은 가지 못했다. 공부는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수능을 세 번이나 보고 나서야 깨달았고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첫 직장은 해외 화장품을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나는 구매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분석을 한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자료를 분석할 수 있도록 수치들을 엑셀로 보기 좋게 정리하는 단순 업무였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편한 일이었지만 6개월짜리 계약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그리 편하진 않았다. 운이 좋다면 6개월을 더 연장할 수도 있다고 해서 열심히 했다.

나는 거기에서 안 과장을 만났다. 안 과장은 나보다 열 살 위였는데 나는 그녀를 안이라 불렀다. 우리는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가령 내가 농구를 좋아한다고 하면 유명 선수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의 특기가 무엇인지까지 줄줄 읊는 식이었다. 만화책이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잖아,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아는 게 많은데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여자였다. 내가 유체이탈을 했었던 기억에 대해 얘기했을 때도 쓸데없는 말이라거나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무안을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더 신이 나서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너는 참 아는 게 많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그런 말은 안에게서 처음 들어봤다. 우리는 만난 지 한 달 만에 그녀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내가 집을 나올 때 나의 어머니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가끔씩 어머니의 집을 찾을 때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돌아왔다. 나의 아버지가 방문할 때처럼 옷을 차려입거나 요리를 하지는 않았다. 난 그런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나의 가족은 어머니가 아니라 안이었으니까.

안과 나는 그녀의 일곱 평짜리 원룸에서 지냈다. 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나 하나가 들어간다고 해도 집이 더 좁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같이 했다. 출퇴근도 같이 하고 요리도 같이 했다. 청소를 하는 날엔 역할 분담을 해서 나는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를 했고 안은 빨래를 했다. 우리는 샤워도 같이 했다. 안은 나를 닦아주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남을 닦아주는 일이 재미있을 게 뭐가 있느냐 물으면 그냥 웃기만 했다.

안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하루에 담배를 딱 열다섯 개비만 피웠는데 자신만의 규칙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엑셀 시트에 숫자를 채우듯이 자신이 태운 담배 개수로 나와 만나는 날을 계산했다. 나는 가끔 그녀의 계산이 의심스러웠다. 담뱃값을 아끼기 위해 그녀의 담배를 자주 피웠고 어떤 때는 나 때문에 담배가 부족한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만나는 11개월의 시간 동안 4500개를 피웠을 수도 있고 4600개를 피웠을 수도 있다.

안은 나를 다양한 곳에 데리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야경을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옥탑이었다. 그곳에 처음 가던 날 우리는 대학로에서 감자탕을 먹고 산책을 했다. 산책을 하면서 소화를 시킨 후에는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구석에 숨어있는 노포로 갔다. 우리는 바깥에 간이 테이블을 깔아놓고 소주를 마셨다. 안주로는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고기에서 돼지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는 그녀에게 이거 먹지 마 냄새나, 라고 했고 그녀는 술에 취하면 괜찮다고 했다. 나는 냄새를 참다가 다른 안주를 추가로 더 주문했다. 붉은색의 안주였는데 매콤했던가, 달콤했던가. 어쩌면 시큼했을지도 모를 그 안주를 눈앞에 두고 나는 술이 올라서 얼굴이 벌게졌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일어났다. 그리고 또 걸었다. 언덕이 많은 동네였다. 그녀는 방향을 여러 번 바꾸면서 계속 올라갔는데 나는 중반까지는 길을 외워보려고 했으나 어느 지점부터는 아예 포기했다. 안은 이런 길을 어떻게 알고 가는 걸까. 이제는 더 이상 못 가겠다, 할 정도로 지쳤을 때 그녀가 지금부터는 조용히 해야 한다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한 주택이었는데 경사길과 옥탑이 이어져 있어서 누구든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누가 살아? 살지도 몰라. 그럼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몰래 들어가면 괜찮아, 그러니까 조용히 해. 우리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살며시 들어갔다. 옥탑방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동안 대화 없이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높은 데 올라오면 뭔가를 다 이해하게 돼. 신기하지?

무엇을 이해한다는 걸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나의 계약이 끝나던 마지막 날에 안과 이별했다. 그녀 덕분에 계약을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 연장 때에는 힘을 써주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목수일도 배워보고 배달일도 해보았으나 둘 다 내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목수일을 배울 때 무거운 자재를 운반하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수술을 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고시원에서 나와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무릎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는 배달일을 시작했고 또다시 넘어지는 사고 때문에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에 같은 부상을 입었다. 복도 지지리도 없는 새끼. 어머니는 입원한 나를 보면서 불쌍해했다. 의사는 제대로 재활을 하지 않으면 달리기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기술이 없으면 몸이라도 성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이제 뭐가 남았나. 당시엔 약간 절망했고 그래서 나를 써주겠다는 곳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이곳에 오게 됐다.

나는 이 건물에서 2교대로 경비일을 했다. 오십 대 후반의 소장은 주간에 근무했고 나는 야간 시간대를 맡았다. 가끔 소장에게 볼일이 생기면 내가 주간 근무를 맡기도 했다. 청소를 해주는 용역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주차와 보안만 담당하면 됐다. 나는 근무시간 중 세 번 순찰을 돌았다. 오후 8시에 출근해서 한 번, 자정에 한 번, 그리고 새벽 6시에 마지막 순찰을 했다. 제일 중요한 업무는 자정 순찰이었다. 각 층을 돌면서 사무실의 문이 열려있지는 않은지, 소등은 되어있는지 같은 것들을 확인했다. 그렇게 16층까지 순찰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옥상은 사실 16층에서도 계단을 한 번 더 올라야 하는 17층이었지만 나는 그냥 16층이라고 불렀다. 엘리베이터의 가장 높은 숫자인 16층 버튼을 매일 누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자정의 16층은 적막했다. 적막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에 올라오면 눈으로만 슬쩍 둘러본 다음 옥상문을 잠근 후 내려갔고, 가끔은 담배를 한 대 태우기도 했다. 옥상 순찰까지 마치면 나는 숙직실로 내려가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다.

나는 이 일에 만족했다. 몸을 쓸 일이 많지 않아서 무릎에 무리도 가지 않았고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원룸을 구해 어머니의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삼십년 만의 진짜 독립이었다. 나는 집에 짐을 많이 두지 않았다. 나중에 돈을 더 모으면 그때는 대출도 받고 해서 조금 더 큰 집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집에서는 가구도 들이고 꾸미는 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운동도 시작했다. 걷기만 해도 재활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퇴근을 하고 집에 갈 때는 반드시 걸어서 갔다. 집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그런 일상들의 반복이었다. 매일 같은 곳을 지나서 어제 봤던 것 같은 사람을 다시 마주치는 일이, 매일 같은 높이를 올랐다가 내려오는 일이, 그런 반복들이 비로소 사회인이 됐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느낌이었다.

여기 16층에서 죽은 그 노인은 내가 자주 마주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던 3년 내내 노인을 알고 지냈다. 알고 지냈다, 라고는 했지만 실은 나는 그의 이름이나 나이조차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에게는 가족과 집과 직업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가끔 내가 일하는 이 건물에 들러 박스나 폐지를 주워갔고 때로는 유리병을 훔쳐가기도 했다. 여기는 수거 업체가 따로 있으니 가져가면 안 된다고도 해봤지만 초라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차마 더 냉정해지기가 힘들었다. 여든 아니면 아흔쯤 됐으려나.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서 먼지와 때로 뭉쳐져 있었다. 그의 치아도 성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 때문에 발음이 새고 침이 자주 흘렀다. 그러면 나는 침, 침이요, 하고 침이 흐르는 것을 알려주었다.

노인도 나처럼 반복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긴 했다. 그는 지하철역 앞에서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요즘에도 저런 걸 파나, 하는 생각이 드는 낡은 대나무 빗자루로 열심히 쓸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한번은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라고 물었더니 사람이 일을 해야지, 라고 했다. 그러면 그런 거 말고 돈이 되는 일을 하면 낫지 않겠냐고 했더니 노인이 멋쩍게 웃었다.

누가 나를 돈 주고는 안 쓰지.

노인은 바닥을 쓸다가 할 일이 없어지면 전단지를 나눠주는 할머니들 곁에 서 있다가 사람들이 바닥에 버리고 가는 전단지를 다시 주워 모아 할머니들에게 도로 주었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이걸 다시 주면 일이 안 끝난다며 짜증을 냈다.

노인의 일상은 그런 식이었다. 내가 어쩌다 주간 근무를 맡게 되면 내가 상주하는 건물 뒤쪽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음료수를 얻어먹고 폐지를 주워갔다. 소장님은 무서워서 내가 올 수가 없어. 노인이 나를 두고 착한 청년이라며 치켜세우면 난 그렇게 착하지 않다고, 나중에 소장님이 알면 혼나니까 너무 자주 오시지 말라고 했다.

노인은 말도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 라며 나를 잡아두고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그 전염병이 사실은 저기 어떤 나라의 테러였다는 이야기나 이집트 피라미드 안은 비어있는 게 아니라 좁은 통로로만 되어 있어서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아세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노인은 살다보면 자동으로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이 주임은 종교가 있는가?

언젠가 노인은 믿는 종교가 있느냐 물어서 없다고 했더니 자신은 눈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냐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쪽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어서 웬만한 건 신만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혼을 하셨다고요? 라고 물었고 노인은 아니, 죽었다 살아났다고, 라고 했다.

임사 체험이란 말도 몰러?

노인이 저쪽에 한번 다녀왔다던 그날 어느 건물의 비상계단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더니 자꾸 누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노인은 겁이 나서 공중에서 있는 힘껏 허우적대면서 염불을 외웠고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고 했다. 어, 나도 그런 적 있는데, 라고 하려다가 말이 길어지겠구나 싶어서 그냥 신기하네요, 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노인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 여기 계단에서 자도 되는가?

나는 그때 안 된다고 했었다. 그게 나의 본분이었고 나는 그걸 성실하게 해내고 싶었다. 어리석은 정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걸 오래전에 배웠으니까. 나의 단호한 거절에 노인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쉼터 같은 게 있지 않나요, 라고 그에게 물었고 그래서 노인은 뭐라고 했었지? 자신 같은 사람한테는 그런 복지가 없다고 했던가, 자격이 없다고 했던가.

노인이 죽은 채로 발견된 그날은 수도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혹한이 몰아닥친 날이었다. 새벽 6시에 기상한 나는 수도가 얼어서 터진 것을 보고 나서야 전날 밤에 수도를 살짝 열어놓으라고 했던 소장의 말이 떠올랐다. 큰일이었다. 우선 곧 출근을 할 사람들을 위해 정문부터 개방을 해놓고 조치를 할 생각이었다. 나는 정문을 열어놓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16층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출근하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문까지만 열어놓으면 오전에 할 일은 거의 마친 셈이었다. 나는 16층에 내려서 계단을 천천히 밟고 올라갔다. 추워서 그런지 무릎이 평소보다 더 시큰거렸다. 스물네 개의 계단을 모두 오른 다음 나는 열쇠로 문을 따고 옥상문을 열었다. 저게 뭐지? 난 검은 물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밑창이 닳은 노인의 운동화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그게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간단하게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원래도 밤에 옥상문을 잠갔었는지 문을 잠그기 전에 옥상을 살펴보진 않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서 그게 원래 내가 하는 일이긴 한데 하필 그날은 너무 추워서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그분하고 친분이 있었던 거네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경찰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형식상 여쭤보는 거예요. 그게 저희 일이에요.

한참 뒤에 경찰에게 들은 바로는 노인이 비상계단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씨씨티비에 찍혔는데 그 뒤로 나오는 장면은 없었다고 했다. 아마도 계단을 순찰하는 나를 피해 옥상까지 올라가 숨어 있다가 내가 내려가면 다시 계단으로 나올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노인은 천장도 없고 이불도 없는 거기 16층에서 내가 문을 열어주길 바라며 밤새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조사를 받고 나와 바로 집에 가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민원실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히터 바람이 후끈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이 풀려 잠이 쏟아졌다. 난 이 와중에도 잠이 오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앉은 채로 졸았다. 그때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었는지 휴대폰을 쥐고 있으면서도 전화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잤다. 그러고 보면 난 어릴 때에도 집보다는 밖에서 더 잘 잤다. 밤에는 신경증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던 어머니 때문에 못 잤고 낮에는 낮잠을 자면 어머니에게 혼이 났기 때문에 못 잤다.

그래서 어머니의 눈을 피해 낮에는 놀이터에서도 자고 피아노 학원에서도 잤다. 나중에는 아파트 주차장 구석에서도 잤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를 찾으러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집에서 낮잠을 자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몇몇은 노느라 시간이 없다고 했고 나머지는 잘 때도 있고 안 잘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낮잠 자면 혼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왜 혼나?, 라고 답해서 의아했었다. 그때 나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대담하게도 침대에 누워버린 것이다. 깊이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오래 자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의식을 완전히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갑자기 낌새가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내가 방 한쪽 귀퉁이에 서서 침대를 마주보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여전히 내가 누워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두 발을 확인했는데 분명 멀쩡히 서 있었다. 그게 나의 첫 번째 유체이탈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착각도 아니고 꿈도 아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이쪽과 저쪽에서 동시에 느끼며 침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어쩐지 몸이 가볍지 않았다. 마치 수중의 움직임처럼 의지보다 몸이 한 템포씩 느리게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여전히 상황 판단이 되지 않은 채로, 약간은 겁도 나고 또 신기해하면서 얼마간 멍하니 있었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나를 깨우지는 않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됐더라. 어머니는 몸을 돌려 다시 조심스럽게 방 밖을 나선다. 나는 입술을 움직여 엄마, 나 자는 거 아니야, 잠깐 생각하는 거야, 라고 소리를 내고 싶지만 역시나 의지와는 다르게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는 느릿하게 거실로 나가고 있다. 그러다 불현듯 어머니가 구석에 서 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너 여기서 뭐해? 나? 그래, 너. 그 순간 내 두 발을 지지하고 있던 바닥이 사라지면서 몸이 순식간에 추락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를 허공에 차면서 잠에서 깼다. 나 뭐하고 있었지? 여긴 어딘가. 경찰서인가, 16층인가 아니면 아홉 살의 내 방인가. 낮잠은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무얼 하던 중이었는지,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잊히도록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가.

그래, 나는 여기 16층에서 여전히 노인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시간을 계산할 담배마저도 전부 태워버려서 이곳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점점 굳어가는 무릎 관절의 느낌만으로 짐작할 뿐이다. 계속 이렇게 앉아있으면 관절이고 근육이고 전부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결국엔 불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전에 일본에는 그런 식으로 불상이 되려는 수련법이 있다고 들었다. 스스로 미라가 되기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아있는 채로 말라 죽어가는 일이라던데 그걸 즉신불이라고 했던가. 가만, 난 그 말을 어떻게 알지. 어머니랑 같이 봤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가 아니면 서태지 사장님 가게에서 빌렸던 만화책에서 봤던가. 둘 다 아니라면 노인의 말처럼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알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찰로부터 노인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다는 통보를 받은 뒤에도 일을 계속했다. 사건 직후에 사람들은 옥상 대신 1층으로 내려가 담배를 피웠지만 한 달 정도 지나자 그들은 노인의 죽음을 기억에서 삭제한 것처럼 다시 옥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꽁초와 빈 담뱃갑과 가래침을 치웠다. 그것들을 아무리 치워도 노인이 쓰러져있던 잔상은 치워지지 않아서 결국 경비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직업도 없이 어머니의 집에도 가지 않고 나의 집에서만 머물렀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더라도 받지 않았다. 부모로서나 자식으로서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우리 모자는 이러다가 영영 멀어져서 언젠간 그 노인처럼 홀로 남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의 어머니는 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 조금 겁이 난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 왜 왔느냐고 물으면 죽기 위해서도 아니고 애도를 하기 위함도 아니다. 높은 곳에 올라오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던 안의 말처럼 나는 무언가를 이해해보기 위해 여기 16층에 올라와있다. 결국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를 잠식하는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의 태도를 가지고 노인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계속한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의식은 몸으로부터 빠져나와 기억들을 역행하고 있다. 옥상문을 열고 나가 스물네 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간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어머니가 이불을 덮어주던 그날로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쪽에 있는 것인가 저쪽에 있는 것인가. 저쪽보다는 이쪽에 있고 싶다. 나는 노인이 했던 것처럼 염불을 중얼거리다 눈을 뜬다. 그리고 다시 이쪽 16층에 돌아와 있는 나를 바라본다. (끝)


 

  <당선소감>

 

   고독, 죄책감, 두려움… 그래도 계속 걸어가보자

 결국엔 혼자가 될 것이라는 예감에 길을 걷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덜컥 겁이 들 때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일상에서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은 예상보다 더 버겁다. 그러면 나는 뭘 했더라, 돌이켜보면 최근 몇 년은 글을 썼다. 누구나 다 하는 말이겠지만 재주도 없고 끈기도 부족한데 그래도 그 일에만은 흥미를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평생 혼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막상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나니 고마운 사람들이 먼저 생각났다는 것이다. 아, 그렇지 나한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선 나의 가족에게 감사를 전한다. 좋은 사람이 아닌데도 꾸준히 곁을 지켜준 친구들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이름을 다 쓰지 못해 조금 미안하지만 당신들이라면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거라 믿는다.) 나의 글을 읽어준 많은 이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직접 전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혼자 걷는 사람들의 고독함을 안다. 그들이 느낄 죄책감과 두려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니까. 밤에 쓰다 보니 너무 감상적인 소감이 된 것 같아 아침이 되면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게 내 진심이다.

● 1985년 천안 출생


 

  <심사평>

  

 고달프지만 아직 남아 있는 생에 대한 러브 레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

  본심에서 만난 응모작 열 편을 보면서 좋은 소설이란 ‘인물’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헤디 라머가 읽어준 것은’은 안정된 문장과, 누수와 연락 없는 딸의 문제를 가진 영서라는 노인의 일상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지만, 12층 여자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부족해 보이며 폭력으로 끝난다는 점이 아쉬웠다. ‘기수어’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캐릭터, 공간, 상징, 반전 등 소설의 거의 모든 면에서 뛰어나 보인 응모작이었다. 그러나 기교가 앞선 만큼 소설의 기본이자 진실인 인물들을 놓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 이사와 금혜는 사라져 버렸으며 아이를 가진 부모는 철거를 한 달 앞둔 사무실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에게 이 결말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러브 레터’는 얼핏 유서처럼 시작하는 성장소설이다. 자신이 한때 일한 건물의 16층 옥상으로 올라온 나는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한 노인 때문에. 소설이 끝나갈 즈음 독자는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자신이 책임지거나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 한때를 보낸 사람들과 아픈 시간에 대한 러브 레터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만난 사람들, 그들과 함께한 시간 덕분에 성장하고 삶을 지탱해 나가기도 한다. 작가는 독자를 놓치지 않으며 그 지점을 담담하고 여유와 재치 있는 진술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는 이유가 있고 필연적으로 이야기에 작동한다. 고달프지만 아직 남아 있는 생에 대한 러브 레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가 아닐까.

 새해 첫날, 16층에서 보내는 이 ‘러브 레터’의 진심이 독자에게 뜨겁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앞둔 모든 응모자께도 응원의 레터를 보내드린다.

심사위원 : 최수철, 조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