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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솔롱고스 / 정한조

 

오프닝 (오후 / 실외)

(자막)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한다.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뜻이다.’

(화면이 밝아지며)

완만한 경사의 산길. 멀리 바트(주인공 / 남)와 수렝(바트의 할아버지)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오트공텡게르 산 앞의 어워 (오후 / 실외)


웅장한 오트공텡게르 산 아래에 있는 어워[*한국의 성황당 같은 곳]에서 바트와 수렝이 접시에 담은 물을 뿌린다. 그런 뒤, 경건하게 기도한다.


2. 초원 + 차 안 (오후 / 실내 · 실외)


수렝이 모는 차가 초원을 달린다. 옆에는 바트가 타고 있다. 산을 돌아서 나가자 멀리 무지개가 보인다. 바트는 무지개를 망연히 바라본다.


3.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넓은 초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허름한 게르[*몽골의 전통 가옥 / 텐트형 주택] 한 채. 바트와 수렝이 사는 게르이다.


4. 바트의 게르 안 (저녁 / 실내)


바트가 보츠[*몽골식 만두]를 만들고 있다.

(Cut to)

바트와 수렝이 보츠를 먹고 있다.

바트 내일 진학 상담이 있어요.

수렝은 고개만 끄덕인다.

바트 이번 상담은 교육청에 보고하는 거래요.
수렝 (보츠를 먹으며, 무뚝뚝하게) 달라진 거 없다고 해.
바트 네.


5. 바트의 게르 밖 (새벽 / 실외)


새벽 이른 시각. 바트가 게르 밖으로 나온다. 바트와 수렝은 양 50여 마리와 염소 30여 마리를 키우고 있다. 바트는 가축들을 몰며 넓게 펼쳐진 초원으로 향한다.


6. 초원 (오전 / 실외)


초원에서 양들과 염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다. 바트는 작은 바위에 앉아 있다. 도시락통에 담아 온 보츠를 먹으며 파란색 하늘과 맞닿은 먼 지평선을 바라본다.


7.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바트가 게르 밖에서 세수하고 있다. 멀리 아미나(바트의 여자 친구)가 오토바이를 몰며 온다.

아미나 가자, 늦었어.

바트는 세수를 마치고 얼굴을 닦는다.

바트 바로 나올게.

바트는 게르 안으로 들어간다. 곧 가방을 메고 나온다. 아미나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탄다.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게르를 벗어나 초원을 가로질러 간다.


8. 눔루크의 전경 (오후 / 실외)


가난한 몽골 촌마을의 모습. 오래된 건물 몇 채와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집과 허름한 게르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9. 눔루크 고등학교 앞 (오후 / 실외)


바트와 아미나가 탄 오토바이가 도로를 타고 오다가 학교 건물 앞에 선다. 낡을 대로 낡은 3층짜리 건물로, 초중고등학교가 한 건물에 다 있다. 두 사람은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서둘러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10. 눔루크 고등학교 안 – 바트의 교실 (오후 / 실내)


학교 안은 외관만큼이나 낡았다. 낮인데도 복도는 어두컴컴하다. 한 교실이 보인다. 교실에는 남녀 학생 30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바트가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다.


11. 눔루크 고등학교 교무실 (오후 / 실내)


바트는 엥크에체첵(진학 상담 교사 / 여)과 상담 중이다.

엥크에 내년에 나가려는 거지?
바트 네. 졸업하자마자 바로 가려고요.
엥크에 한국은 모든 게 비싸.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
바트 할아버지가 가축들도 빨리 파시려고 해요.
엥크에 (살짝 놀라며) 그럼 뭐 하신데?
바트 도시에서 아무 일이나 하신대요. 계속 그거 알아보고 계세요.

엥크에체첵은 서류에 무언가를 적는다.

엥크에 나라에서야 선진국에 가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근데, 유학 가서 반은 공 부 안 해. 일하고 돈 벌려고만 하지.
바트 (살짝 웃으며) 저는 공부도 하고 돈도 벌 거예요.
엥크에 너야 똑똑하고 성실하니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바트 부모님도 한국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엥크에체첵은 말없이 바트를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 서류에 무언가를 적는다.

엥크에 ......그래,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공부해야 해.

엥크에체첵은 서류를 정리한다.

엥크에 좋아. 일단 그렇게 보고하고......여기서 대학 안 간다고 공부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바트 네...... 선생님, 우리 학교에서 한국 대학으로 몇 명이나 가나요?
엥크에 지금까지 열세 명 상담했어. 대단하지 않니? 이 조그만 데서도 열세 명이나 가려고 해.
바트 한국이 좋잖아요.
엥크에 ......글쎄. 몽골 인구 30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나 한국에 살아. 몽골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외국이야, 한국이.

엥크에체첵은 잠시 바트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엥크에 ......근데, 한국에 사는 몽골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

바트는 말이 없다. 엥크에체첵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서류철을 책상에 넣는다.
엥크에 요즘 한국 대학 심사가 까다로워져서 다 받아주지는 않을 거야.
바트 떠날 때까지 공부 열심히 할게요.
엥크에 너는 가게 될 거야. 도움 될 만한 얘기가 있으면 알려줄게.
바트 고맙습니다.


12. 눔루크 고등학교 쉼터 (오후 / 실외)


바트는 친구들과 군것질하면서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다. 바트는 K-팝을 듣는 중이다.

바트 (한 학생을 보며) 바투르, 이리 와 봐. 세븐틴 신곡이야.

바투르가 다가온다. 두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세븐틴의 공연을 본다. 둘 다 가볍게 율동을 섞어가며 어설픈 한국어로 따라 부른다.

바투르 노래 괜찮은데?
바트 노래뿐만 아니야. 춤추는 거 봐. 한 사람도 어긋나지 않아.
바투르 요즘은 얘네들이 제일 잘나가는 거 같아.
바트 최고지.

다른 학생 한 명도 다가와 같이 스마트폰을 본다. 세 사람은 흥겨운 모습으로 세븐틴의 공연에 몰입한다.


13. 바트의 게르 밖 (저녁 / 실외)


바트는 게르 밖에 있는 우리에 양들과 염소들을 천천히 몰아넣는다. 우리 문을 잠그고 게르로 향한다.


14. 바트의 게르 안 (저녁 + 밤 / 실내)


게르 안에서 수렝이 육포를 뜯고 있다. 바트가 수태차를 따라 수렝에게 건넨다.

수렝 울란바타르는 안 된단다. 청소 일 말이야.
바트 (자신도 수태차를 따라 마시며) 그래요?
수렝 젊은 사람을 쓸 건 가봐. 아무래도 울란바타르는 힘들겠어.
바트 삼촌이 알아봐 주시는 건요?
수렝 기다려 봐야지. 이젠 일만 하게 해주면 아무 데로나 갈 거야.

수렝은 다 뜯은 육포를 바구니에 넣는다. 바구니를 구석에 갖다 놓고 돌아와 수태차를 마신다.

수렝 ......선생은 뭐래?
바트 특별한 건 없었어요. 학비 걱정을 제일 많이 하시더라고요.
수렝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 줄 거니까.
바트 할아버지 이야기도 하고, 한국에 부모님이-

바트의 입에서 부모라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수렝은 그의 뺨을 후려친다.

수렝 (화난 목소리) 그것들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바트는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인다.

수렝 너 내다 버리고 간 것들이야. 생각하지도 말라고. 알았어!
바트 ......네.
수렝 (강한 어조) 너는 혼자야. 강해져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바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수태차만 마신다.

(Cut to)

밤. 바트는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한다. 살짝 고개를 돌려 수렝을 본다. 수렝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바트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침상 옆 틈에서 사진 액자 하나를 꺼낸다. 스마트폰 불빛으로 비춰본다. 바트가 7살 때 나담 축제[*몽골의 국민 축제]에서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델[*몽골의 전통 복장]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세 사람. 바트는 한동안 사진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15. 바트의 게르 밖 (밤 / 실외)


어둠이 내린 초원. 바트의 게르도 어둠에 파묻혀 있다. 하늘에 가득한 별과 커다란 둥근 달이 게르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16. 눔루크 중앙로 (오전 / 실외)


바트와 수렝이 탄 차가 눔루크 중앙로로 천천히 들어온다. 어느 창고형 건물 앞에 선다.


17. 캐시미어 공장 밖 (오전 / 실외)


바트와 수렝이 차 안에서 커다란 비닐 포대 세 덩어리를 꺼낸다. 안에는 염소 털이 가득 들어 있다. 두 사람은 비닐 포대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18. 캐시미어 공장 안 (오전 / 실내)


건물 안은 염소 털이 든 비닐 포대들로 가득하다. 상인들이 포대들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몇몇 상인들은 염소 털을 살펴보거나 무게를 재며 유목민들과 흥정하고 있다.

(Cut to)

한쪽에서 수렝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옆에 바트가 있다. 수렝의 표정이 좋지 않다.

수렝 말도 안 돼.
상인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요즘 들어오는 게 너무 많아서 감당 못 할 정도래요.
수렝 (기가 찬다는 듯) 하-
상인 그거라도 받으세요. 단골이니까 그나마 드리는 거예요.
수렝 그럼 얼마가 되나?
상인 17만 투그릭[*몽골의 화폐 단위]이요.

수렝은 잠시 생각한다.

수렝 알았어.
상인 생각 잘하셨어요.

상인은 금고에서 만 투그릭짜리 지폐를 꺼내 세어본 뒤, 수렝에게 건넨다. 수렝은 돈을 받고는, 아무 말 없이 건물 밖으로 나간다.


19. 캐시미어 공장 밖 (오전 / 실외)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트가 묻는다.

바트 지난번에는 40만 투그릭 넘게 줬잖아요.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젓는다. 두 사람은 차로 향한다.

수렝 (힘없는 말투) 쟤들 말이 맞아. 이게 돈 된다고 하니까 다 염소 키우는 거 야. 그러니 가격이 떨어지지. 멍청한 사람들.
바트 그래도 너무 해요.
수렝 (받은 돈을 확인하며, 허탈한 웃음) 후훗-. 우리가 새벽부터 일어나 염소 키 우며 번 돈이 이거다.

수렝은 돈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 오르길(수렝의 친구 / 남)이 부른다.

오르길 수렝!

오르길은 급히 길을 건너온다.

수렝 여긴 웬일인가?
바트 안녕하세요?
오르길 면사무소에 일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수렝 무슨 일 있나?
오르길 큰 손녀가 아기를 낳았어.
수렝 오, 그래? 축하하네.
오르길 사람들 불러다 한턱내려고.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 돼?
수렝 당연히 가야지.
오르길 바트, 너도 와라.
바트 네.
오르길 난 다시 가볼게. 서둘러야 해서. 그때 이야기하세.

오르길은 급히 길을 건너간다. 수렝은 오르길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이 말한다.

수렝 이 촌구석에서 애만 잔뜩 낳아서 뭐 하나......(바트에게) 가서 보드카나 한 병 사 와라.

수렝은 주머니에서 만 투그릭을 꺼내 바트에게 준다.


20. 눔루크 이곳저곳의 모습 (오후 / 실외)


인적이 드문 눔루크 곳곳의 모습. 황량하고 삭막한 느낌이다. 간간이 거센 대지의 바람이 불어온다.


21. 눔루크 고등학교 안 – 바트의 교실 (오후 / 실내)


쉬는 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고 있다.


22. 눔루크 고등학교 앞 (오후 / 실외)


바트가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다. 잠시 뒤, 아미나가 오토바이를 몰며 온다. 오토바이는 바트 앞에서 멈춘다.

아미나 잠깐 마트에 들렀다 가자. 엄마가 부탁한 게 있어.
바트 오케이

바트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탄다.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는 출발한다.


23. 눔루크의 어느 마트 (오후 / 실내)


바트와 아미나는 김치 진열대로 향한다. 진열대에는 엉성한 포장의 중국제 김치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아미나는 김치들을 살핀다.

바트 김치볶음밥 해주시겠대?
아미나 아니. 오늘은 김치찌개.
바트 김치찌개는 너무 매워.
아미나 우리 엄마가 하면 하나도 안 매워. 먹고 갈래?
바트 아니야. 오늘은 할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셔.
아미나 그럼 다음에 와. 김치두루치기도 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바트 김치두루치기는 뭐야?
아미나 그게......(살짝 웃으며) 나중에 보면 알아. 설명이 복잡해.

아미나는 김치 하나를 고른다.

바트 김치로 하는 요리가 많은가 봐?
아미나 무지 많대.
바트 그걸 다 할 줄 아셔?
아미나 엄마가 한국에서 요리 하나는 확실히 배워왔잖아.
바트 나중에 김치두루치기 먹을래.
아미나 그래......근데 몽골에서 파는 김치는 다 중국 거여서 맛이 잘 안 난대. 김치 는 한국 게 최고잖아.

두 사람은 계산대로 향한다. 아미나는 계산대에 김치를 올려놓는다.

아미나 (바트를 보며) 넌 뭐 안 사?


24.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멀리 초원을 가로지르며 바트와 아미나가 탄 오토바이가 다가온다. 오토바이는 바트의 게르 앞에 선다. 바트가 뒷좌석에서 내린다.

바트 그럼 일요일에 가는 거다.
아미나 따로 준비할 건 없지?
바트 물만 갖고 가면 돼.
아미나 오케이. 일요일에 봐.

아미나가 오토바이를 몰며 떠난다. 바트는 게르 안으로 들어간다.


25. 바트의 게르 안 (저녁 / 실내)


바트가 한국 컵라면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TV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하고 있다. 바트는 배우들이 말하는 한국어 대사를 어설프게 따라 한다.

바트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너한테 그런 감정 느낀......느낀, 느낀......느낀 적 없어......혼자 설치지 마, 설치지, 설치지......그 러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26. 초원 (오전 / 실외)


바트가 양들과 염소들을 몰며 초원 위를 천천히 지나간다. 멀리 무지개가 떠 있다. 바트는 잠시 서서 무지개를 바라본다.


27. 오르길의 게르 (오후 / 실내 + 실외)


초원에 있는 오르길의 게르에서 손녀의 출산 기념 잔치가 열린다. 게르 안팎은 바트와 수렝 그리고 열댓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게르 밖에서 남자 몇몇이 양 한 마리를 잡는다.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뜨기 시작한다.

(Cut to)

게르 안에서 오르길의 손녀가 아기를 안고 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환한 얼굴로 덕담을 주고받는다. 바트와 수렝도 있다.

(Cut to)

게르 밖에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허르헉[*양고기찜 요리]과 술을 마시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남자1 그래서, 아직도 비자 못 받은 거야?
남자2 네. 저도 답답해 미치겠어요.
여자1 한국 비자 받기 점점 힘들어지는 거 같아.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어.
남자1 다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야. 관광 가서 도망가지를 않나, 체류 기간 끝났는 데도 그냥 눌어붙지 않나. 한국에 몽골인 불법 체류자들 천지래.
남자3 범죄도 많이 저지른다면서요? 몽골인이 외국인 범죄율 1위래요.
남자1 자업자득이야.
남자2 다른 업자를 알아보려고 해요. 한국 대사관하고 직접 연결된 사람이 있대요.
여자1 브로커들 다 믿지 마. 사기꾼들 많아. 돈만 날릴 수 있어.
남자3 좀 느긋하게 기다려 보는 건 어때? 한국이 코로나 때 외국인들이 많이 빠져 나가서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남자2 ......그런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몽골에서 대학이라도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 같은 사람들, 그냥 탁 보고 안 받아주려는 거 같아요.
여자2 아는 친구가 그러는데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비자 장사로 뒷돈 엄청 번대 요. 오빠 말대로 대사관과 연결되면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여자1 야, 야, 관둬. 게네들이 문제가 아니야. 게네들은 나중에 튀면 그만이야. 중 간에서 장난치는 애들이 문제지
남자4 (빈정거리는 투로) 이것저것 안되면 그냥 관광 비자로 나가서 깔아뭉개.
남자2 불법 체류하라고요?
남자4 몽골 사람들이 계속 그러면 그거 막으려고 비자 잘 주겠지. 한국이 별거야? 우리가 길들이기 나름이야.
여자2 (웃음) 큭-. 괜찮은 방법이다.
남자1 에휴......그렇게 한국에 가고 싶냐? 이러다 나중에는 한국의 한 주로 편입시 켜달라고 할까 봐 겁난다.

(Cut to)

게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술에 취해 기분이 고조돼 있다. 한 남자가 게르 안에서 마두금[*몽골의 전통악기]을 들고나온다. 사람들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운다.

바트는 허르헉을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게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말 우리로 향한다.


28. 말 우리 앞 (오후 / 실외)


바트는 우리 앞에서 말들을 보고 있다. 잠시 뒤, 어뜨(오르길의 친척 / 남)가 다가온다.

어뜨 바트!

바트가 뒤돌아본다.

어뜨 난 어뜨라고 해. (살짝 웃으며) 아기의 삼촌.
바트 안녕하세요?
어뜨 수렝 할아버지한테 네가 한국으로 유학 간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왔거든.
바트 (반가운 표정) 아, 그래요?
어뜨 한국에 참 많이도 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 얘기야.

바트는 빙긋 웃는다.

어뜨 한국에서 뭘 공부하려고?
바트 경영학이요.
어뜨 돈 벌고 싶구나?
바트 (웃으며) 네......
어뜨 돈은 졸업하고 벌고, 대학 다닐 때는 공부해.
바트 공부도 열심히 할 거예요.
어뜨 ......처음에는 다 그런데, 다니다 보면 공부는 팽개치고 일하고 돈 벌려고만 해.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야. 공부는 공부대로 못하고.
바트 그러면 할아버지가 죽일 거예요.

어뜨는 웃는다. 주머니에서 한국 담배를 꺼낸다.

어뜨 담배 피울래?

바트는 고개를 젓는다.

어뜨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한국애들이 이런 건 잘 만들어.
바트 한국에서 공부하니까 어때요?
어뜨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고. 간단하게 얘기하기는 어려워.
바트 한국은요?
어뜨 그것도 마찬가지야......선진국이니까 배울 건 많아.
바트 몽골에 완전히 돌아온 거예요?
어뜨 응.
바트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었어요? 몽골보다 좋잖아요.
어뜨 몽골 사람 중에 다시 돌아올 생각 하고 한국 가는 사람 별로 없어.
바트 체류 비자 때문에 그래요?
어뜨 그렇지. 확실한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거 잡기가 쉽지 않아. 잡는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바트 왜요?
어뜨 좋은 일자리는 다 한국 사람 차지지. 너도 알잖아. 몽골 사람들은 대부분 한 국 사람들이 안 하는 일을 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고. 그런 곳이 부침이 많아.
바트 장사나 사업해야겠네요.
어뜨 (고개를 젓고는) 몽골 사람들이 한국에서 할만한 게 별로 없어. 게다가 차별 도 심해.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아.
바트 몽골 사람들을 많이 무시한다면서요?
어뜨 무시? 무시라기보다는 관심이 없어.
바트 (혼잣말하듯)......한국에 사는 몽골인들은 다 어떻게 사는 걸까?
어뜨 (빙긋 웃으며) 한국에 살아 보면 알아. 별의별 방법으로 몽골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머리 굴리니까.

그때 게르 쪽에서 한 중년 남자가 어뜨를 부른다.

남자 어뜨, 이거 마저 먹자!
어뜨 네. 곧 갈게요!

어뜨는 중년 남자를 쳐다보며

어뜨 그래도 가족과 같이 있으니까 좋아. 원래는 내가 한국으로 다 부르려고 했 거든. 잘 안된 거지만, 그래도 지금 같이 있으니까......

바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춘다.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하는 초원만 망연히 바라본다.


29. 초원 (오전 / 실외)


젊은이들이 탄 승용차 한 대가 초원 위를 달린다. 차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곧 뒷좌석의 남녀 두 명이 몸을 양쪽 창문으로 쭉 내밀며 괴성을 지른다. 두 사람의 손에는 보드카가 들려 있다. 그 상태로 차는 빠르게 초원을 달려간다.


30.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멀리 아미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 곧 게르에 도착한다. 아미나가 밖에서 큰 소리로 부른다.

아미나 바트! 바트!

잠시 뒤, 바트가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온다. 곧바로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탄다.

바트 가자.

오토바이가 탁 트인 초원 속으로 달려 나간다.


31. 초원 (오후 / 실외)


바트와 아미나가 탄 오토바이가 초원을 시원스럽게 가로지르며 달린다.


32. 하르노르 호수 (오후 / 실외)


황갈색 모래사막과 푸른색 호수가 함께 있는 독특한 풍경의 하르노르 호수. 아름답고 신비롭다.
바트는 호수 한쪽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시를 하고 있다. 아미나는 근처 초원에서 풀과 꽃을 따고 있다.

(Cut to)

바트와 아미나가 호숫가에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놓고, 물고기를 꼬치에 꽂아 굽고 있다. 물고기가 다 익어 꼬치에서 빼낸다. 두 사람은 살점을 조금씩 뜯어먹는다.

아미나 한국 가는 거 확실하게 결정된 거야?
바트 응. 보고서 올렸대. 우리 학교에서 나까지 열여섯 명,
아미나 정말?
바트 같이 가자니까. 부모님께 다시 말해 봐.
아미나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하나마나라니까.
바트 내가 직접 말해 볼게.
아미나 됐어. 그럼 아예 너 만나지도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잘 모르겠어. 이젠 가라고 해도 내가 가기 싫어.
바트 왜?
아미나 ......여기가 편해. 복잡하게 사는 거 싫어.
바트 봐, 그렇게 축축 처지는 거야. 이런 데 살아서 그래.
아미나 그런 거 아니야. 외국에 사는 거 무섭고 자신 없어. 그동안은 이모 때문에 반대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나를 정말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라 는 생각이 들어.
바트 이모와 너를 왜 자꾸 비교해? 너도 한국 사람이 돈 준다면 몸 팔 거야?
아미나 (버럭) 야!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아미나 (조심스럽게)......한국 가면 정말 부모님 찾아갈 거야?
바트 당연하지.
아미나 바보.
바트 내가?
아미나 포기라는 걸 모르는 거 같아.
바트 야, 포기할 게 따로 있지. 가족을 어떻게 포기해?
아미나 가족 떠나고, 몽골 떠나 도망간 사람을 악착같이 찾아가서 뭐 해?
바트 도망가기는 어디로 도망가? 한국에 있는데.
아미나 내 말은......몽골에서 보냈던 자기 생활을 떠났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찾아도 소용없어.
바트 왜?
아미나 자기 생활을 떠났으면 너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야.
바트 그럴 리 없어. 뭔가 말 못 할 안 좋은 일에 얽혀 들어갔거나, 한동안 연락을 안 하는 게 나아서 그런 걸 거야.
아미나 그래서 6년간 연락이 없는 거라고?

아미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미나 일 저지르고 감방에 있는 사람도 어떻게든 몽골에 연락해. 빚지고 도망다니 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근데, 연락 안 하는 사람은 딱 정해져 있어.
바트 딴 살림 차린 거라고? 그 소리 지겨워.
아미나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니까.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아미나 ......더는 그 얘기 하지 말자. 남의 가족 얘기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아. 내 생 각은 네가 부모나 형제도 없이 고리타분한 할아버지하고만 살아서......너무 외로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나라면 그러지 않거든.
바트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아미나 두 사람 인생 잘 살아라. 나는 내 인생 잘 살게. 이럴 거야.
바트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해. 나한테 했던 말 들도. 부모님이 나를 버릴 리 없어.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고.

아미나는 더는 말을 안 하고, 하르노르 호수를 바라보며 음료수만 마신다.

(Cut to)

바트와 아미나가 모래사막 위를 걷고 있다. 둘 다 지친 모습. 얼마를 더 가자 바트가 걸음을 멈춘다.

바트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바트와 아미나는 모래사막에서 내려다보이는 하르노르 호수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는다.

아미나 ......여기는 언제 봐도 예뻐.
바트 무지개가 떠 있으면 진짜 끝내줄 텐데.

호수에서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바트 아~ 시원하다.
아미나 ......근데 바트야, 몽골 사람들이 왜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가 뜨는 나라]라 고 했을까?
바트 글쎄......화려해서 그런가? 잘 살잖아.
아미나 오래전부터 솔롱고스라고 하지 않았니? 아빠가 그러시는데, 전에는 우리가 훨씬 잘 살았대. 한국이 전쟁 때문에 다 부서졌었잖아.
바트 그럼 왜 그런 걸까?
아미나 넌 한국에 유학 간다는 애가 그런 것도 모르니?
바트 (기가 찬다는 듯) 참-. 넌 러시아가 왜 러시아고, 미국이 왜 미국인지 알아?
아미나 ......내 생각은 그냥 한국 사람들이 갖다 붙인 말 같아. 몽골어 ‘솔롱고’가 무지개니까. 멋있어 보이잖아? 무지개가 뜨는 나라.
바트 그럴 수도 있어. 역사 선생님이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
아미나 선생님은 뭐래?
바트 몰라. 기억 안 나.
아미나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참-.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아미나 ......한국으로 유학 가면 몽골하고도 끝이네.
바트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아미나 ......그렇게 될까?
바트 돈 왕창 벌 거니까 걱정하지 마. 돈만 있으면 한국만 한 나라도 없대.
아미나 돈, 돈, 돈......요즘 몽골 사람들 만나면 다 돈 얘기야. 입에 붙었어.
바트 너는 부자 되기 싫어?
아미나 누가 싫대? 너무 밝히니까 그렇지.
바트 기다려. 한국 부자들이 사는 강남에 살 거니까.
아미나 (빈정거리는 투로) 부럽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미나 근데, 참 신기해.
바트 뭐가?
아미나 꽉 막힌 거 같은 할아버지가 너 유학 보내주려는 게.
바트 여기 생활에 질릴 대로 질려서 그래.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는 거잖아. 평생 을 그렇게 사셨는데.
아미나 그 말이 아니라......아들하고 며느리가 한국에 가서 연락도 안 하는데......
바트 할아버지는 부모님을 아예 지워 버렸어.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아미나 ......가만 보면, 네 할아버지나 부모님이나 정말 독한 거 같아. 너는 그렇지 않은데.
바트 나? (슬쩍 웃으며) 나도 만만치 않아.
아미나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하듯)......너는 착해. 착하기만 해. 그게 문제야......

두 사람은 더는 말을 않고, 하르노르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만 바라본다.


33. 초원 (오후 / 실외)


초원에 비가 쏟아져 내린다. 한바탕 쏟아진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강렬한 햇발이 내리쬔다.


34. 초원의 어느 길 (오후 / 실외)


한 가족이 탄 차가 웅덩이에 빠져 꼼짝 못 하고 있다. 바트가 양들과 염소들을 몰고 나오다 그 모습을 본다. 그곳으로 다가가 가족을 돕는다.


35. 바트의 게르 안 (오후 / 실내)


바트가 문을 열고 게르 안으로 들어간다. 수렝이 옷을 차려입고 앉아 있다.

수렝 왜 이렇게 늦었어?
바트 차 한 대가 빠져서 도와주고 왔어요.
수렝 나랑 빨리 병원에 가보자. 네 고모부가 돌아가실 거 같다.

바트는 서둘러 옷장으로 간다.


36. 눔루크 병원 밖 (오후 / 실내)


눔루크 중앙로로 수렝이 모는 차가 들어온다. 차는 3층짜리 허름한 병원 앞에 선다. 바트와 수렝은 차에서 내린다.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37. 눔루크 병원 병실 (오후 / 실내)


병상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년의 남자가 누워 있다. 눈을 감고 얕은 숨을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트와 수렝은 그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38. 차 안 (오후 / 실내)


게르로 돌아가는 길. 바트와 수렝의 표정은 무겁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잠시 뒤, 수렝이 입을 연다.

수렝 (혼자 중얼거리듯)......빨리 여기서 떠나. 어떻게든 떠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고모부처럼 돼. 평생 가축이나 치고, 간신히 끼니나 때우며 살다가 저렇게 죽는 거야. 해보 고 싶은 것도 못 해보고......고생만 하고......저렇게 죽는 거 야......


39. 눔루크에서 초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오후 / 실외)


수렝이 모는 차가 눔루크를 빠져나와 초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선다. 근처에 차들이 늘어서 있다. 수렝은 차를 멈춘다. 초원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바트와 수렝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바트 한국 사람들이에요.
수렝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저 사람들한테는 구경거리야.

수렝은 다시 차를 몰고 초원 안으로 들어간다. 바트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계속 바라본다. 한 남자가 신고 있는 나이키 운동화에 눈이 간다. 한동안 그 운동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40. 눔루크 고등학교 교무실 (오전 / 실내)


진학 상담 교사인 엥크에체첵이 울찌(한몽 교류협회 몽골지부 소장 / 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엥크에 한국에 있는 부모와 만나게 해준다는 거죠?
울찌 네. 자브항[*눔루크가 속한 도道]에서는 처음 선발하는 겁니다.
엥크에 자브항에서 몇 명이 가게 되나요?
울찌 올리아스타이[*자브항의 중심 도시]에서 3명, 읍과 면에서 각각 1명씩 8명을 선발할 거예요.
엥크에 그럼 전부 몇 명이 가죠?
울찌 몽골 전체에서 한 30명 갈 거 같아요. 자브항은 처음이어서 많이 배정됐어 요.
엥크에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울찌 우리 협회에서 하는 일은 별거 없어요. 공항에 모여 한국으로 가고, 한국에 도착하면 부모가 데리고 가요. 출발하는 날 공항에 다시 모여 돌아오고요.
엥크에 일정은 각자가 알아서 짜야겠네요.
울찌 부모하고 시간을 보내게 하는 행사니까요.

엥크에체첵은 고개를 끄덕인다.

울찌 눔루크에서 추천해주실 학생이 있나요?
엥크에 꼭 부모와 연락이 되는 학생이어야 하나요?

울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엥크에체첵을 쳐다본다.


41. 눔루크 고등학교 자료실 (오전 / 실외)


엥크에체첵과 울찌가 바트의 서류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엥크에 바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간 거예요. 돈 번다고요. 처음 2년간은 연락도 하 고 돈도 부치고 그랬나 봐요. 그러다 소식을 끊었어요.
울찌 종종 있는 일이죠.
엥크에 바트가 부모를 잊지 못해요. 형제도 없이 할아버지하고 둘이 외롭게 생활해 서 더 그런 거 같아요.
울찌 외로움만큼 큰 상처도 없잖아요.
엥크에 커가면서 나아질 줄 알았어요. 근데 바트는 상처가 더 커지는 거 같아요.
울찌 상처가 집착으로 변하기도 하죠. 그게 무서운 거예요.
엥크에 그래서 걱정이에요.
울찌 한국으로 유학 가려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엥크에 그게 클 거예요.
울찌 딱하네......

울찌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류에 붙은 바트의 사진을 바라본다.

엥크에 바트의 부모를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요?
울찌 선생님이 추천하신다면 선발할 수는 있어요. 그보다 부모를 찾는 게 일이에 요. 하지만 그것도 어렵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엥크에 바트를 만나고 싶은지가 문제겠죠. 부모가 아직 부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 는 일이 고요.
울찌 네. 이런 경우......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가거든요.
엥크에 저도 이게 올바른 일인지 고민해 봐야 해요.
울찌 일단 제게 두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42. 눔루크 고등학교 이곳저곳의 모습 (오후 / 실내 + 실외)


눔루크 고등학교 이곳저곳이 화면에 비친다. 교실에서 바트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43. 눔루크 고등학교 교정 (오후 / 실외)


엥크에체첵과 수렝이 교정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수렝 (싸늘한 말투) 쓸데없는 일을 하셨네요.
엥크에 폐가 됐다면 죄송해요.
수렝 그것들이 아직 한국에 있네요. 지금쯤이면 다시 몽골로 기어들어 와 어디 숨어 사는 줄 알았는데.
엥크에 엄마는 서울에 살고, 아빠는 지방에 있대요.
수렝 두 사람도 바트가 보고 싶대요?
엥크에 네.
수렝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닐 겁니다.
엥크에 그럼요?
수렝 협회라는 데가 한국 정부에서 하는 거죠?
엥크에 네.
수렝 이런 일을 거절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고, 자기들한테 불이익이 올 까봐 그런 거겠죠.
엥크에 그렇지는 않아요. 일 때문에 시간을 못 내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거 절하기도 한 대요.

수렝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한다. 그러다 피식 웃는다.

수렝 (혼잣말을 하듯)......그것들이 영리하네......
엥크에 네?
수렝 마음 단단히 먹은 거예요.

엥크에체첵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는다.

수렝 선생님도 잘 아시죠? 두 사람이 바트 버렸다는 거.
엥크에 ......네.
수렝 두 사람한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도요.

엥크엥은 고개만 끄덕인다.

수렝 그래도 만나게 해주고 싶으세요?
엥크에 바트가 너무 간절해 보여서 그래요. 늘 그게 안타까웠어요. 그건 어르신이 더 잘 아시잖아요.

수렝은 생각에 잠긴다. 잠시 뒤

수렝 그렇게 하죠. 유학 가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도 좋을 거 같으니까요. (걸음을 멈추고, 엥크에체첵을 쳐다보며)......사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으로 보 내려 하시는 거죠?

엥크에체첵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수렝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트한테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렝은 인사를 하고 교문을 향해 걸어간다. 엥크에체첵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44. 눔루크 면사무소 앞 (오후 / 실외)


바트가 눔루크 면사무소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하다. 면사무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간다.


45. 눔루크 면사무소 안 (오후 / 실내)


면사무소에 들어간 바트는 두리번거리다 앞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묻는다.

바트 안녕하세요? 울찌 소장님 어디 계세요? 울란바타르에서 파견 나오신 분이 요.
직원 (몸을 돌려 사무실 구석을 가리키며) 저기. 파란색 넥타이 매신 분.
바트 고맙습니다.

바트는 울찌에게 다가간다.

바트 안녕하세요?
울찌 (무슨 일을 하다가 바트를 올려다보며) ......바트?
바트 네.
울찌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라.

바트는 의자에 앉는다. 한껏 들뜬 표정이다. 울찌는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는다.

울찌 얘기는 다 들었지?
바트 네.
울찌 7월 15일에 떠날 거야. 너는 일정이 조금 달라. 공항에 모여 떠나는 건 같 은데, 도착해서 나와 이틀은 같이 있어야 해. 아빠가 7월 17일부터 시간이 난다고 하셨거든.
바트 다른 학생들은요?
울찌 모두 공항에서 부모들이 데리고 가.

바트는 고개만 끄덕인다.

울찌 아빠하고 있다가 엄마한테 가고, 엄마하고 있다가 인천공항으로 오면 돼.
바트 두 분이 왜 따로 살고 있대요? 헤어진 건가요?
울찌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바트 두 분도 제가 오는 걸 좋아하나요?
울찌 응......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멈춘다. 그러다

울찌 아, 협회에서 왕복 비행기 표와 하루에 한국 돈 5만 원이 지원될 거야. 열흘 간 있을 거니까 50만 원이지.
바트 고맙습니다.
울찌 다른 건 차근차근 알려줄게.
바트 ......근데, 아빠와 만나기 전까지는 뭐하죠?
울찌 글쎄......나하고 서울 구경할까?

그 말에 바트는 환하게 웃는다.


46. 바트의 게르 안 (밤 / 실내)


수렝은 자기 위해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바트는 침상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는 모습이다. 그러다 어렵사리 입을 연다.

바트 ......할아버지가 허락해주신 거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수렝은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긴다.

바트 별일 없을 거예요. 선생님이 유학 가기 전에 미리 한국 구경하는 거라고 생 각하랬어요.

수렝은 여전히 말이 없다. 곧 침상으로 누워 이불을 덮는다. 바트는 수렝을 잠시 지켜보다가 불을 끈다.

(Cut to)

바트는 침상에 누워 스마트폰 불빛으로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비춰보고 있다. 사진을 보다가 다시 침상 옆 틈 사이에 끼워 넣는다. 바트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천정만 바라본다.


47. 초원 (오전 / 실외)


바트가 양들과 염소들을 몰며 간다. 멀리 어뜨가 오토바이를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며 가는 것을 본다. 어뜨를 부른다.

바트 형!

어뜨는 바트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바트 어디 가세요?
어뜨 응. 어머니 심부름.
바트 (신이 난 모습) 저 한국 가요.
어뜨 (놀라며) 벌써 유학 가는 거야?
바트 아니요. 어느 협회에서 하는 행사에 뽑혔어요. 한국에 있는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열흘간 있다가 와요.
어뜨 잘됐네! 언제 가?
바트 방학하자마자요.
어뜨 서울에 가니?
바트 서울에도 가고 지방도 가고요.
어뜨 재밌게 놀다 와. 미리 계획을 좀 짜야 할 거야.
바트 무슨 계획요?
어뜨 한국에 있는 몽골 사람들이 대부분 바빠. 거의 종일 일하거든. 그 시간 다 빼고 계속 같이 있어 주기 힘들어. 혼자 있을 때 할 일들을 생각해 보라는 거야.
바트 ......뭐 하죠? 친구나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뜨 협회 사람하고 상의해봐. 내가 그런 행사를 좀 아는데, 부모 만난다고 가서 TV나 보고 오는 애도 있어.
바트 네.
어뜨 그리고......아무 생각 없이 가야 해.
바트 아무 생각 없이요?
어뜨 (말없이 바트를 쳐다보다가) ......뭔가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도 커. 차라리 아 무 기대도 하지 마. 그럼 실망도 없으니까.
바트 알았어요.
어뜨 난 가볼게. 서둘러야 해서.
바트 네.

어뜨는 다시 오토바이를 몰며 떠난다.


48. 아미나의 게르 안 (저녁 / 실내)


바트와 아미나와 난디아(아미나의 엄마)가 과자를 먹으며 한국 영화를 보고 있다.

아미나 쟤는 처음 보는데? 신인인가 봐.
바트 드라마에는 많이 나왔어.
아미나 한국 여자들은 다 예쁜데, 다 똑같이 생겼어.
난디아 다 뜯어고쳐서 그래. 한국 여자들을 보면 성형에 목숨 건 거 같아. 얼굴만 하는 게 아니야. 몸까지 성형해.
바트 어떻게요?
난디아 다이어트는 기본이고......맨 아래 갈비뼈까지 잘라 버리는 애들도 있어.
바트 (놀라며) 왜요?
난디아 허리 잘록해지라고.
바트 미쳤다.
아미나 한국에서는 성형하라고 나라에서 돈도 준다면서요?
난디아 (웃으며) 누가 그래? 그런 거 없어.
바트 못생긴 여자들은 기죽어서 못 살 거 같아요.
난디아 안 그래. 배우들이나 저렇지, 못생긴 애들 천지야. 여자는 몽골 여자가 더 예뻐. 늘씬하고. 한국은 남자들이 잘생기고 멋있어.
아미나 (놀리듯) 바트 너 어떡하니?
난디아 바트 정도면 중간 이상은 가.
바트 정말이요?
난디아 (잠시 바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근데......

난디아는 바트를 보며 슬쩍 웃는다.


49. 눔루크 고등학교 컴퓨터실 (오후 / 실내)


바트가 컴퓨터로 서울 관광 홍보 자료를 보고 있다. 경복궁, 창덕궁, 시청, 홍대 앞, 월드컵 경기장, 롯데타워, 한강 같은 곳을 흥미롭게 살핀다. 그때 한 남학생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더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다.

남학생 신났네~

남학생은 바트의 목덜미를 꼬집듯 쥐었다가 놓고는 지나간다. 바트는 몸을 움츠리면서 익살맞게 웃는다.


50. 초원의 나무 아래 (오후 / 실외)


양들과 염소들이 한군데 모여 풀을 뜯어 먹고 있다. 바트는 근처 나무 아래로 가 앉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어플 하나를 연다. 한국어 회화 어플이다. 어플을 보면서 한국어를 더듬더듬 읽는다.

바트 ......여기서 시청......까지 얼마나......걸리나요.....지하철 선릉......역 정거장이 어디 에 있습니까......그 식당은......몇 시까지 문을 열죠......좀 큰 사이즈로......주세 요......


51. 눔루크 중앙로 (오후 / 실외)


수렝이 모는 차가 중앙로로 들어온다. 어느 식당 앞에 선다. 수렝과 바트가 차에서 내린다. 수렝은 곧장 식당으로 들어가고, 바트는 차 뒤로 가 뒷문을 연다. 안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52. 식당 안 (오후 / 실내)


식당 주인이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양고기를 살핀다. 양고기는 부위 별로 나뉘어 여러 개의 비닐에 들어 있다.

주인 고기들이 좋네요.
수렝 그런 말만 하지 말고 가격이나 제대로 쳐 줘.
주인 (고기를 계속 살피다) 잘해드릴게요. 무게 먼저 재보고요.
수렝 밥 먹고 갈 거야. 호쇼르로 줘.

바트와 수렝은 식당 테이블로 가서 앉는다. 바트가 잔에 수태차를 따라 수렝 앞에 놓는다. 자기도 한 잔 따른다. 수렝은 한 모금 마시고는,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여 있는 돈을 꺼낸다.

수렝 (바트에게 돈을 건네며) 이거 받아라.

바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수렝 옷이나 사.
바트 괜찮아요. 협회에서 줄 거예요.
수렝 그건 가서 얘기고. 갈 때 입고 갈 옷. 그 꼴로 가려고?

바트는 머뭇거리다가, 돈을 받는다.

바트 고맙습니다.
수렝 얼마 안 남았으니까 준비 착실히 해. 특히 여권이나 서류 같은 건 잘 챙겨 야 해.
바트 네.

수렝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트를 쳐다본다. 바트는 그 시선을 피해 손에 쥔 돈만 만지작거린다.


53. 눔루크의 어느 옷 가게 (오후 / 실내)


바트와 아미나가 옷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아담한 크기의 가게지만, 옷과 신발과 각종 액세서리로 꽉 들어차 있다.

아미나 우리 엄마와 너희 할아버지가 뭔가 통했나 보다.
바트 큭큭-.
아미나 뭘 살 거야.
바트 티셔츠와 바지 몇 개하고, 신발.
아미나 좋은 거 딱 하나만 사. 싸구려 여러 개보다 좋은 거 하나가 훨씬 나아.
바트 갈아입을 것도 사야 하니까.
아미나 한국에서 부모님이 사주지 않겠어?
바트 그럴까?

두 사람은 남자 티셔츠와 남방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간다. 옷들을 살펴본다.

아미나 어떤 게 좋아?

바트는 티셔츠에 눈이 간다. 그러자

아미나 폼 나려면 남방이 나아. 엄마 말 못 들었어? 한국 남자들, 다 멋쟁이라잖아.

아미나는 하늘색 남방 하나를 집어 보여준다.

아미나 이거 어때?
바트 난 무늬 있는 게 좋아.

두 사람은 다른 남방들을 살펴본다. 바트가 체크무늬 남방을 가리키며 말한다.

바트 이거 괜찮다.
아미나 고급스러워 보여.

두 사람은 옆으로 이동한다. 구석에 챙모자들이 걸려 있다.

아미나 모자도 써야겠지?
바트 한국 남자들, 이런 모자 잘 안 써.
아미나 그러니까 써야지. 패션은 튀고 봐야 해.

모자가 걸려 있는 곳 옆에는 신발들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신발들을 살펴본다.

아미나 어떤 신발 살 거야?
바트 나이키.
아미나 그런 건 울란바타르에 가야 해.
바트 진짜 살 돈이 어딨어. 짝퉁.

신발들을 살펴보던 바트는 짝퉁 나이키 신발 하나를 발견한다.

바트 이거야.

바트는 나이키 신발을 신어 본다.

바트 어때?
아니마 (몇 발자국 뒤로 가서 보더니) 가까이서 보면 누가 봐도 짝퉁인데......멀리서 보면 모를 거야.

아미나는 바트를 보며 슬쩍 웃는다.


54. 눔루크의 호림트 강 (오후 / 실외)


바트와 아미나가 강변 벤치에 앉아 빵과 음료수를 먹고 있다. 바트 옆에는 옷과 신발이 담긴 커다란 비닐백이 놓여 있다.

바트 다와 아저씨 차 타고 가기로 했어.
아미나 울란바타르에서는?
바트 큰아버지 집에서 잘 거야.
아미나 울란바타르에서 더 놀다 가.
바트 시시해. 서울에 갈 건데 뭐.
아미나 내 선물 꼭 사와야 해.
바트 걱정하지 마. 한국이 여기보다 종류도 많고 더 싸대.
아미나 화장품은 한국 게 진짜 좋아.
바트 ......부모님이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

아미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아미나 ......나는 엥크에체첵 선생님하고 네 할아버지가 왜 부모를 만나게 해주려는 지 궁금해.
바트 내가 자주 얘기하니까.
아미나 네 부모님은 왜 너를 만나겠다고 했는지도 궁금하고.
바트 미안해서 그랬겠지.
아미나 두 분이 같이 살고는 있대?
바트 몰라.

아미나는 말이 없다. 그러다

아미나 ......암튼 해피 엔딩으로 되기를 바랄게.
바트 페이스북에 재밌는 사진 올릴 거니까 들어와서 봐.
아미나 (살짝 놀라며) 부모님하고 만나는 거?
바트 그걸 왜 올려. 그냥 노는 거.

바트와 아미나는 빵을 다 먹는다.

바트 가자.

바트가 가방을 챙기려고 하자 아미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가방을 연다. 그 안에서 작은 보드카 한 병을 꺼낸다.

바트 술이야?
아미나 오늘 같은 날은 마셔야지.
바트 관둬.

아미나는 술병의 마개를 딴다.

아미나 (바트를 보며) 무지개가 뜨는 나라로 가는 바트를 위해!
바트 술 마시면-.

아미나는 바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모금 꿀꺽 마신다.

아미나 (바트에게 술병을 들이밀며) 자 받아-.

바트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술병을 받아든다. 잠시 술병을 보기만 하다가, 아미나처럼 한 모금 꿀꺽 마신다. 곧바로 인상을 찌푸린다. 바트는 술병을 아미나에게 건넨다.

아미나 잘 다녀와~ (빙긋 웃으며) 화장품 잊지 말고.

아미나는 다시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 나서 바트에게 술병을 건넨다. 바트는 이번에는 거침없이 한 모금 들이킨다.


55. 초원 (밤 / 실외)


초원의 밤하늘에 은하수가 흐른다.


56. 바트의 게르 밖 (오전 / 실외)


바트의 게르 앞에 트럭이 서 있다. 운전석에는 다와(수렝의 먼 친척 / 남)가 앉아 있다. 바트가 가방을 트럭 안에 싣는다. 그러고 나서 수렝에게 다가간다.

바트 할아버지, 잘 갔다 올게요. 건강히 지내세요.

수렝은 말없이 떠나라는 손짓만 한다. 바트는 수렝에게 인사하고 트럭으로 향한다. 수렝도 트럭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차 안에 있는 다와에게 말한다.

수렝 고맙네.
다와 별말씀을요. 가는 길에 같이 가는 건데요 뭘.
수렝 사흘쯤 걸리나?
다와 요즘은 길이 나서 이틀이면 가요.
수렝 떠나게.

바트와 다와는 수렝을 보며 인사한다. 다와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57. 울란바타르로 가는 길 (오전 / 실외)


바트와 다와가 탄 트럭이 눔루크를 완전히 빠져나와 울란바타르로 향하는 도로로 들어선다. 도로는 탁 트인 초원을 가로지르며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멀리 무지개가 보인다. 바트는 트럭 안에서 무지개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58. 울란바타르로 가는 길의 여러 모습 (오전 + 오후 / 실외)


바트와 다와가 탄 트럭이 초원과 산과 강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59. 울란바타르 (저녁 / 실외)


트럭이 울란바타르 톨게이트를 지난다.

(Cut to)

트럭이 울란바타르의 중심부인 수흐바타르 광장을 지난다.

(Cut to)

울란바타르 외곽에 있는 게르촌. 허름한 게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촌이다. 그곳으로 트럭이 올라온다. 트럭은 어느 게르 앞에 선다.


60. 가나의 게르 안 (저녁 / 실내)


게르 안에 바트와 가나(바트의 큰아버지)와 졸(바트의 큰어머니)이 함께 있다. 테이블 위에는 보드카와 몽골 전통 약재가 놓여 있다.

가나 보드카는 아빠 드리고, 약은 엄마 드려.
바트 네.
가나 한국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보다 거칠어. 몽골 사람들 무시하고. 될 수 있으 면 혼자 움직이지는 마.
바트 조심할게요.
졸 좀 여유 있게 와서 여기 좀 있다가 가지 그랬어. 아주 어렸을 때 오고 처음 이지?
가나 (웃으며) 지금 여기가 눈에 들어오겠어? 일찍 자.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니 까.


61. 가나의 게르 밖 (밤 / 실외)


바트는 게르 밖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게르촌의 모습을 보고 있다. 작은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가나가 바트의 모습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온다.

가나 (옆에 앉으며) 잠이 안 오지?

바트는 멋쩍은 듯 웃는다.

가나 엄마 아빠하고는 약속 다 잡아 놓았어?
바트 소장님이 연락은 해 놨대요. 가서 시간을 정할 거 같아요. 아빠를 먼저 만나 요.
가나 두 사람도 바쁠 텐데.
바트 종일 같이 있지는 못해요.
가나 계획을 잘 짜 봐.
바트 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바트 ......큰아버지한테도 연락 없었죠? 부모님이요.
가나 4년 전에 딱 한 번 연락이 왔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친족 보증이 필요해서 그런 거였어. 그 뒤로는 연락 없었어.
바트 찾아서 연락해 볼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가나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하지.
바트 근데 왜 안 하셨어요?
가나 마음 떠난 사람한테 연락해서 뭐 해?
바트 그래도요. 가족이잖아요.
가나 가족도 등 돌리면 남남이야. 네 엄마나 아빠를 찾아도 아마 겉도는 이야기 만 하다가 끝날 거야.
바트 만약 먼저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가나 마찬가지겠지. 나도 두 사람을 떠났으니까......

가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가나 ......바트야, 너도 이제 열여덟 살이야. 네 인생을 살 나이가 됐어......그럼 이 것도 알아야 해. 다른 사람도 그 사람만의 인생이 있어.

바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나를 쳐다본다.

가나 엄마나 아빠나 자기 인생을 사는 거야......두 사람의 인생을 이해해줘.
바트 부모님이 왜 연락을 끊으셨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가나 많은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이유를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니?
바트 ......부모님하고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요?

가나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가나 ......글쎄, 그건 내가 알 수 없지. 세 사람은 세 사람만의 인생이 있을 테니 까......

바트와 가나는 더는 말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게르 촌의 밤 풍경만 멍하니 바라본다.


62. 울란바타르 신 국제공항 (오전 / 실외)


가나가 모는 차가 공항 출국 청사 앞으로 들어온다. 차가 없는 빈 곳에서 멈춘다. 곧 바트가 내려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낸다. 운전석에 있는 가나에게 다가간다.

바트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나 즐겁게 지내다 와. 한국에서 출발할 때 문자 주고.
바트 네. 고맙습니다.

바트가 인사를 하자 가나는 손을 들어 보인다.
바트는 가방을 끌고 청사 입구로 향한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다. 챙모자를 쓰고, 세련된 격자무늬의 남방과 베이지색 바지 그리고 짝퉁 나이키 신발을 신고 있다. 바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청사 안으로 들어간다.


63. 인천공항 (오후 / 실외)


인천공항의 활기찬 모습.

(Cut to)

몽골 항공(MIAT)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한다.


64. 인천공항 주차장 (오후 / 실외)


바트는 주차된 어느 승용차 트렁크에 가방을 싣는다. 트렁크를 닫고 차 앞 좌석으로 탄다. 잠시 뒤, 차는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온다.


65. 차 안 (오후 / 실내)


울찌가 운전하고, 바트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 바트는 약간 멍한 표정이다.

울찌 (빙긋 웃으며) 어질어질하지?
바트 공항도 엄청 크고, 정신 하나도 없었어요.
울찌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래. 모든 일이 몽골보다 몇 배는 빨라. 사람들도 바쁘 게 살고, 성질도 급하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바트 애들은 잘 돌아가겠죠?
울찌 부모들이 한국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잘 알 거야.

바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바트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울찌 바로 복지센터로 갈 거야. 네 엄마 아빠한테 연락하고, 몇 가지 일을 좀 처 리해야 해.


66. 인천공항 고속도로 (오후 / 실외)


차가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67. 차 안 (오후 / 실내)


차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려 달린다. 바트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한국의 첫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68.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 (오후 / 실외)


서울로 가는 길에 보이는 여러 풍경.


69. 서울 합정동 다문화 복지센터 (오후 / 실내)


복지센터 안에는 한국인 직원 두 명이 일하고 있다. 구석 소파에 바트가 앉아 있다. 잠시 뒤, 복지센터 안에 있는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울찌가 나온다. 울찌는 바트에게 다가와 옆에 앉는다.

울찌 다 확인됐어. 아빠와는 모레 오후에 만날 거야. 엄마는 21일. 직접 통화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가 봐. 나중에 보자더라.
바트 (실망하는 표정) 네......
울찌 곧 만날 건데, 뭐. 만나서 얘기 많이 해.
바트 아빠는 어디 사세요?
울찌 성환이라고, 서울에서 두 시간쯤 가야 해.
바트 ......그때까지 잠은 어디서 자요?
울찌 앞으로 이틀 동안 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거야.

바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울찌 그리고 성환에 성환 대학이라고 있거든. 거기에 몽골 학생들이 많아. 학생 한 명 만나게 해줄까? 알아볼 게 있으면 한국에 온 김에 알아봐.
바트 (환한 표정) 네! 그렇지 않아도 소장님께 유학에 도움 될만한 사람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울찌 잘됐네. 약속 잡아 볼게.
바트 고맙습니다.
울찌 중요한 건 다 처리됐고......어떻게 할래?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부터 서 울 구경할까? 아니면 지금부터 돌아다닐까?


70. 서울 이곳저곳의 모습 (실내 + 실외 / 오전 + 오후 + 저녁)


바트가 울찌와 함께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닌다. 바트는 시종 들뜬 표정으로 다니면서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보기도 하고, 길거리 음식을 먹기도 한다. 울찌는 그런 모습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준다.


71. 서울의 어느 대형 마트 (오후 / 실내)


바트가 울찌와 함께 대형 마트를 구경한다. 바트는 수많은 상품이 가득한 마트를 보며 놀라는 표정이다. 그러다 여러 종류의 김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김치 판매대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울찌 (김치들을 유심히 보는 바트에게) 김치 사 가려고?
바트 갖고 갈 수 있나요?
울찌 떠나는 날 공항에서 사. 거기서도 살 수 있어.


72. 서울 이곳저곳의 모습 (실내 + 실외 / 오전 + 오후 + 저녁)


바트가 울찌와 함께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닌다. 울찌가 바트의 모습을 부지런히 촬영해준다.


73. 충무로의 어느 식당 (저녁 / 실내)


바트와 울찌는 김치두루치기를 시켜서 먹고 있다. 바트는 음식이 무척 맛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

울찌 ......매운 거 잘 먹네.
바트 (음식을 먹으며) 맵기는 매운데......맛있어요.
울찌 여기가 맛집이어서 더 맛있을 거야. 김치두루치기는 어떻게 알았어?
바트 친구 엄마가 한 번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미리 먹어 보려고요.
울찌 나중에 친구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마.
바트 큭큭-.
울찌 서울을 직접 보니까 어때?
바트 정신없지만 재밌어요. 우리가 본 게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죠?
울찌 3분의 1? 무슨 소리야. 10분의 1도 안 돼. 구석구석 볼만한 게 많아.
바트 소장님은 한국에 몇 년 사셨어요?
울찌 14년째. 서울에 산 지는 10년 정도 돼.
바트 (빙긋 웃으며) 돈은 많이 버셨어요?
울찌 여기 다니면서 못 느꼈어? 물가가 엄청 비싸. 많이 버는 것만큼 많이 쓰게 돼. 세금도 많이 떼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곳이 한국이야.
바트 즐거운 지옥이네요.
울찌 응?
바트 한국에 있다가 온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한국은 즐거운 지옥이라고요.
울찌 (웃음) 하하-. 그럼 몽골은 뭐야?
바트 괴로운 지옥이래요. 괴로운 천국이 아니라요.
울찌 하하-.

바트는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다 비운다.

울찌 밥 하나 더 시킬까?
바트 (슬쩍 웃으며) 네!

바트의 뺨에 밥풀이 붙어 있다. 울찌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는다.


74. 충무로 지하철역 (밤 / 실내)


바트와 울찌가 플랫폼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둘 다 많이 지친 모습이다.

울찌 내일은 이렇게 하자. 성환에 가려면 신도림역에서 전철을 타야 해. 내가 거 기까지는 같이 갈 거야. 너는 전철을 타고 가다가 성환에서 내리고. 성환역 에 아빠가 나와 있을 거니까 만나면 돼. 이제 혼자 타고 갈 수 있지?
바트 네.
울찌 성환 대학 학생한테는 너한테 카톡으로 연락하라고 했어. 카톡 깔았지?
바트 어제 깔았어요.
울찌 둘이 약속하고 만나.
바트 네.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울찌 내일부터 진짜 한국을 보는구나.
바트 무슨 말이에요?
울찌 지금까지 본 건 가짜야.
바트 가짜요?
울찌 이제부터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진짜 천국과 지옥은 거기에 있 어. 그걸 만드는 건 너 자신이고. 무슨 말인지 알지?
바트 네.
울찌 네가 만드는 게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바트 저도요......

그때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온다.


75. 충남 성환역 (오후 / 실외)


전철이 떠난다. 역에는 바트 혼자 서 있다. 바트는 주위를 살피다 출구 방향으로 걸어간다.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향한다. 표를 찍고 나가 볼드(바트의 아버지)를 찾는다. 하지만 볼드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린다. 잠시 뒤, 후덕한 이미지의 한 남자가 바트에게 다가온다. 산사르(볼드의 친구 / 남)이다.

산사르 바트?

바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산사르를 쳐다본다.

산사르 아빠 찾아온 거 맞지?
바트 네......
산사르 나는 산사르라고 해. 아빠 친구야.
바트 ......안녕하세요?
산사르 아빠가 오늘 아침에 급히 지방으로 갔어. 내가 대신 나온 거야.
바트 네......
산사르 (살짝 웃으며) 내일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바트 아저씨도 여기 사세요?
산사르 아빠하고 같이 살아. 일단 여기서 나가자.


76. 산사르의 원룸으로 가는 길 (오후 / 실외)


바트와 산사르는 성환역을 빠져나와 인도를 걷는다. 바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산사르 (바트를 쳐다보며) 아빠하고 정말 많이 닮았어. 금방 찾았다니까.
바트 ......아빠는 무슨 일을 하세요?
산사르 이 근처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일해. 나도.
바트 근데 왜 다른 곳에 가셨어요?
산사르 아~, 전에 일했던 회사에 간 거야.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바트 여기서 먼가요?
산사르 아니야. 전주라는 곳인데, 2시간 거리.
바트 집은 어디예요?
산사르 조금만 걸으면 돼. 집이라고 할 것도 없어. 방 하나 달랑 있는 거야. 한국에 는 이런 집들이 많아.

바트는 주변을 둘러본다.

바트 주위가 한적해요.
산사르 여긴 시골이야. 서울과 비교도 할 수 없지.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바트 왜 서울에서 안 사세요?
산사르 서울에서도 한 2년 살았지......아빠나 내가 하는 일이 여기에 많아.
바트 여기 오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산사르 (빙긋 웃으며) 몽골 같지? 조용하고, 바람도 솔솔 불어오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를 걸어간다.


77. 산사르의 원룸 (오후 / 실내)


바트와 산사르가 원룸에 들어온다. 단출한 분위기의 원룸. 성인 남자 둘이 살기에는 작게 느껴진다. 넓은 침대 하나와 TV 한 대 그리고 여기저기 걸려 있는 옷가지들 말고는 별다른 집기도 없다.

산사르 (구석을 가리키며) 짐은 저쪽으로 두고, 편하게 쉬어.

바트는 짐을 구석에 갖다 놓는다.

산사르 배고프지?
바트 (빙긋 웃으며) 네.
산사르 지금 저녁 먹자. 라면 끓여줄게.

(Cut to)

바트와 산사르는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는다. 산사르는 라면을 먹으면서 소주를 마신다.

바트 제가 갖고 온 보드카 드세요.
산사르 그럴 순 없지. 아빠 선물인데.

바트는 처음의 어색함이 많이 풀렸는지 편해진 모습이다.

산사르 ......할아버지는 어떠셔?
바트 우리 할아버지요?
산사르 응. 아빠와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더라고.
바트 보통 성격은 아니시죠. (빙긋 웃으며) 눔루크에서도 유명해요. 지금은 가축 들을 정리하시려고 해요. 도시에 가서 아무 일이나 일하신대요.
산사르 그러실 만도 하지. 이젠 지긋지긋하실 거다.
바트 아빠는 어떠세요?
산사르 아빠? 늘 똑같지 뭐.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고......
바트 어렸을 때 아빠가 저를 많이 안고 다니셨어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산사르는 빙긋 웃고는, 말없이 소주만 마신다. 잠시 뒤, 바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바트 ......그동안 왜 연락 안 하셨대요?
산사르 몽골에서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
바트 네. 물어봐도 알면서 말 안 해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다 모른다고 해 요.
산사르 아빠가 여기서 많이 힘들었어. 일도 많았고.
바트 어떤 일이요?

산사르는 말이 없다가

산사르 처음에는 일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는데......몽골 사람들하고 도박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어. 돈 다 날리고 빚지고 술에 빠지고......자살까 지 하려고 했어.

바트는 놀란 표정이다. 잠시 뒤

바트 엄마하고는요? 헤어진 건가요?
산사르 응. 작년 말에.

바트는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눈만 깜빡거린다.

산사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나.
바트 생각은 했어요.
산사르 일이 그렇게 됐다.
바트 ......아빠는 지금은 괜찮아요?
산사르 지금이야 정신 차렸지.
바트 그러면 연락할 수도 있잖아요.

산사르는 말이 없다.

바트 ......혹시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어요?
산사르 그런 거 아니야.
바트 그럼 왜 연락 안 하시는 거예요?
산사르 (가벼운 한숨) 후......그런 건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봐.

바트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런 그의 눈에 침대 위 선반에 있는 사진 액자가 보인다. 사진 안에는 산사르와 볼드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두 사람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러닝셔츠 바람의 볼드가 한쪽 팔로 웃통을 벗은 산사르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있다. 둘 다 환하게 웃고 있다.
바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다가간다. 액자를 집어 사진을 가까이서 본다.

바트 아빠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언제 찍은 거예요?
산사르 작년.
바트 아빠는 언제부터 아셨어요?
산사르 여기서 알게 됐어. 한 4년 됐나?
바트 계속 같이 지내신 거예요?
산사르 응.

바트는 사진 액자를 내려놓고 다시 자리로 가 앉는다.

산사르 내일부터 뭐 할 거니? 난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나 들어와.
바트 아, 내일 성환 대학에서 공부하는 몽골 사람 만나요.
산사르 왜?
바트 유학 올 때 알아둬야 할 것도 묻고, 도움도 받으려고요.
산사르 (놀라며) 너 한국으로 유학 오니?
바트 네.
산사르 언제 와?
바트 졸업하자마자요. 이르면 내년 가을에 와요.

산사르는 멍한 표정으로 바트를 쳐다보기만 한다.


78. 성환읍 (밤 / 실외)


성환의 밤 풍경. 읍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다. 사람도 다니지 않아 적막하기만 하다.


79. 산사르의 원룸 (밤 / 실내)


불 꺼진 원룸. 산사르는 침대 위에서 자고, 바트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다. 바트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80. 성환 대학교 정문 앞 편의점 (오전 / 실외)


바트와 산사르가 편의점에 도착한다.

산사르 여기가 편의점이야.

바트는 주변을 둘러본다. 건너편에 대학 정문이 보인다.

바트 일하러 가세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산사르 그럼 얘기하고 집에 들어와. 비밀번호 알지?
바트 네.
산사르 배고프면 이 근처에 먹을 데 많으니까 사 먹고. 아마 그 사람이 알려줄 거 야.
바트 아빠한테는 아직도 연락 안 돼요?
산사르 응. 내가 계속해볼게. 성환에 도착하면 나하고 같이 들어갈 거야.

바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산사르 갈게.

산사르는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간다.
바트는 편의점 앞에서 대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얼마 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빌궁(성환 대학 유학생 / 남)이다.

빌궁 바트?

바트가 뒤돌아본다.

빌궁 바트 맞지? 내가 빌궁이야.
바트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빌궁 아빠는 만났어?
바트 ......네. 집에 있다가 나온 거예요.
빌궁 그래, 그럼 같이 들어가자. 학교 구경시켜 줄게.

바트와 빌궁은 성환 대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간다.


81. 성환 대학교 캠퍼스 (오전 / 실외)


바트와 빌궁이 대학 캠퍼스를 천천히 걸어간다. 바트는 잘 정돈된 캠퍼스의 모습에 감탄하는 표정이다.

(Cut to)

바트와 빌궁이 캠퍼스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바트 외국인들 입학이 점점 까다로워진다면서요?
빌궁 다 돈 벌려고 뛰쳐나가서 그래.
바트 선생님도 그런 말씀 하셨어요.
빌궁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건 없어. 요즘 한국 대학이 외국인 학생이 없으면 유 지하기 힘들어.
바트 그 정도예요?
빌궁 아마 한국 대학의 반은 없어졌을 거야. 특히 지방 대학은.
바트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죠?
빌궁 그렇지. 애들 많을 때 잔뜩 지어 놓았는데,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애를 많이 안 낳으니까.
바트 형도 무슨 일 하세요? 아르바이트 같은 거요.
빌궁 응. 지금 이 일.
바트 이 일이요?
빌궁 박사 과정 밟으면서 국제 교류 센터에서 조교로 일해. 유학생 유치 담당.
바트 (빙긋 웃으며) 저는 이 학교에 꼭 들어와야겠네요.
빌궁 하하-. 그럴 거 없어. 너한테 맞는 학교로 가. 억지로 끌고 왔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거든. 그럼 더 골치 아파.


82. 성환 대학교 이곳저곳의 모습 (오전 + 오후 / 실내 + 실외)


바트는 빌궁의 안내를 받으며 성환 대학의 주요 건물, 강의실, 연구실, 운동장, 체육관, 복지센터, 기숙사 등을 구경한다.


83. 성환 대학교 학생 식당 (오후 / 실내)


바트와 빌궁이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

빌궁 내일 오후에 시간 나?
바트 네.
빌궁 내일 몽골 유학생들 모임이 있어.
바트 와! 50명이 다 모이나요?
빌궁 아니야. 한 20명쯤 모일 거야. 같이 얘기하면 도움 되는 게 있을지도 모르 지. 저녁까지 놀 수도 있고.
바트 모여서 뭐 하나요?
빌궁 뭐하긴. (웃으며) 그냥 술 마시고 노는 거야.
바트 눔루크에서 온 학생도 있어요?
빌궁 ......내가 알기로는 없어. 자브항 전체에서는 좀 있어.
바트 재밌을 거 같아요. 뭐 준비해올 건 없죠?


84. 산사르의 원룸 (저녁 / 실내)


바트가 원룸에서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그러다 산사르와 볼드가 함께 찍은 사진에 눈이 간다.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다정하고 행복해 보인다.

(Cut to)

바트가 페이스북에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있다.

(Cut to)

저녁 시간, 바트가 TV를 보고 있다. 그때 원룸의 문이 열린다. 바트는 급히 뒤돌아본다. 산사르 혼자 들어오고 있다. 술에 약간 취한 상태다. 산사르는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는다.

바트 아빠는요?
산사르 (옷을 벗으며) 오늘 못 온다고 연락이 왔어. 일이 잘 안 풀리는 거 같아.

바트는 크게 실망한 표정이다.

바트 ......그럼 전화 통화라도 하게 해주세요.
산사르 점심때 연락이 온 다음부터 연결이 안 돼. 스마트폰이 꺼져 있어. 아마 받기 힘든 상황인 거 같아.
바트 언제 오신대요?
산사르 내일은 올 수 있다더라. 기다려 보자.
바트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산사르 아니야. 걱정하지 마.


85. 성환을 지나는 국도 (밤 / 실외)


깊은 밤. 성환을 가로지르는 국도 위를 차들이 빠르게 달린다.


86. 산사르의 원룸 (밤 / 실내)


불 꺼진 원룸. 바트와 산사르는 잠을 청하려 한다. 바트가 조용히 입을 연다.

바트 ......아저씨도 몽골에 가족이 있어요?
산사르 (몽롱한 목소리)......마누라와 애들을 말하는 거야?
바트 네.
산사르 다 몽골에 있어.
바트 자주 연락하세요?
산사르 아니. 이혼하고 온 거야.
바트 ......애들한테는 가끔 연락하세요?
산사르 처음에는 좀 했는데, 지금은 안 해.
바트 왜요?
산사르 왜?

산사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산사르 가족이라는 게 같이 있을 때나 가족이더라. 헤어지고 나니까 서서히 멀어져. 멀어지니까 서로 할 말도 없고.
바트 그럼 앞으로 계속 혼자 사실 거예요?
산사르 글쎄......
바트 혼자 외롭지 않으세요?
산사르 ......외롭지 않아. 혼자도 아니고......

산사르는 잠이 드는지 말끝을 흐린다. 바트도 더는 묻지 않는다.


87. 성환읍 중심부 (오전 / 실외)


바트가 성환읍 중심 거리를 걸어가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다. 시골이다 보니 재미가 없는지 무심한 표정이다.


88. 성환 시장 (오전 / 실외)


바트가 성환의 재래시장에서 물건들을 보고 있다. 재래시장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넘친다. 바트는 몽골에 없는 채소와 과일과 생선류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한다.


89. 성환 대학교 인근 호프집 (오후 / 실내)


성환 대학교 몽골인 유학생 모임. 20명 정도의 학생들이 호프집 전체를 빌려서 맥주와 치킨을 먹고 있다. 바트는 한쪽 테이블에 앉아 유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바트 ......형은 어떤 일을 하세요?
학생1 과일 시장에서 박스 나르고 있어.
바트 한 달에 얼마 정도 벌어요?
학생1 100에서 150? 연장 근무하거나, 지금 같은 방학 때는 그거보다 더 벌지.
바트 한국에 와서 알아본 거예요?
학생1 아니야. 몽골에 있는 유학 센터에서 소개해준 거야. 너도 유학 센터를 통해 서 올 거지?
바트 네.
학생1 그럼 걱정하지 마. 게네들이 그거 전문 브로커들이니까.
바트 일하면서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요?
학생1 공부 안 해.

같이 있는 학생들이 모두 웃는다.

학생1 한국에서 대학 나온다고 한국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한국 학 생들도 취직하기 힘든데. 여기 있을 때 돈이라도 버는 게 나아.
학생2 여기 온 몽골 유학생들 대부분이 돈 벌려고 온 거야.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바트 네......근데 저는 그렇게 하면 안 돼서요. 돈도 벌어야겠지만, 공부도 해야 해 요.
학생2 한국에서 대학 나와서 뭐 할 건데?
바트 한국에서 취직해서 일하려고요.
학생1 꿈 깨. 몽골 사람이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기 힘들어.
바트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학생2 아주 드물고, 그나마도 생색내기용이야.
바트 그게 뭐예요?
학생2 한국은 외국인 차별 안 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 뭐 이런 거. 그 래야 국제 사회에서 폼도 나고, 얻는 것도 많으니까.
학생1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몽골 사람들을 무시해. 자기들끼리도 물어뜯고 싸우는데, 그런 대단한 데 들어가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어지간한 인재가 아니면 힘들지.
학생2 여기서는 그냥 돈 하나 보고 있는 거야.
바트 계속 체류할 수 없잖아요. 졸업하면 돌아가야 하고요.
학생2 와서 방법을 생각해. 바로 돌아가기 싫으면 대학원에 가는 게 최고지. 학생 비자로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
바트 대학원에도 유학생들 많죠?
학생2 많냐고? 요즘 한국 학생들은 대학원에 많이 안 가. 대부분 비자 연장하려는 외국인들이나 가지. 비자 연장해 놓고 나가서 돈 벌고.
학생1 내가 일하는 시장에도 지금 석박사 과정에 있는 애들이 드글드글해.
학생3 (빈정거리는 말투) 유학 오겠다는 고등학생한테 참 좋은 얘기들 해준다.
바트 몽골에서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열심히 해서 잘 버텨 보려고요.
학생3 그럼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을 위해 서비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바트 서비스요? 그래도 해주는 것만큼 벌어 가잖아요.
학생3 언뜻 보면 버는 것 같지? 한국에서 하나 주고 둘을 챙기는 거야.
학생1 애가 경제학과 다녀. 큭큭-.
학생3 몽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은 하지도 않는 일 하면서 경제 돌아가게 해주 지, 와서 돈 쓰고 세금 내면서 한국 부자 되게 해주지......봐 바, 여기도 이렇 게 팔아주고 있잖아. 한국이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하는 거야.
바트 대우는 많이 좋아지고 있죠? 예전보다요.
학생3 잘해줘야 합법적으로 들어오니까.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순간 세금부터 시작 해 뜯어낼 게 많거든. 그래서 결국 세상은 똑같이 돌아가는 거야. 잘 사는 나라는 계속 잘 살고, 못 사는 나라는 계속 못 살고.
학생2 아~ 머리 아파. 얘는 왜 갑자기 진지해졌어?
학생1 다 시끄럽고, 내 말대로 해. 학생 비자 받고 와서 돈 벌어. 돈 버는 거 말고 는 볼 거 하나 없는 곳이야, 한국이.


90. 산사르의 원룸으로 가는 길 (저녁 / 실외)


바트가 산사르의 원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성환에는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켜진다. 늦은 시각이 아닌데도,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휑하기만 하다.


91. 산사르의 원룸 (저녁 / 실내)


바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원룸에서는 산사르 혼자 바트가 사 온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산사르 왔구나. 저녁 먹었어?

산사르는 조금 취한 상태다. 바트는 혼자 있는 산사르를 보고 당황한다.

바트 ......아빠는요?
산사르 오늘도 못 온다고 하더라. 이번 주는 안 될 거 같아.

바트는 갑자기 멍해지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바트 ......저, 내일 떠나요.
산사르 어쩔 수가 없대. 일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거 같아.

바트는 힘없이 테이블로 가서 앉는다. 산사르는 바트와 시선을 피한 채 말없이 보드카만 마신다. 바트는 산사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바트 ......저 만나기 싫은 거죠. 아빠가요.
산사르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바트 지금 전화 통화는 당연히 안 될 거고요.

산사르는 한숨을 내쉴 뿐 말이 없다.

바트 아빠, 한국에서 뭐 하세요?
산사르 말한 대로야. 근처 공사장에서 나하고 같이 일해.
바트 진짜죠?
산사르 그러니까 찾은 거 아니야.
바트 아저씨하고 같이 사시고요.
산사르 응.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흐른다. 잠시 뒤, 산사르가 바트를 쳐다본다. 한동안 그렇게 보기만 하더니, 혼잣말하듯 말한다.

산사르 아빠가 나한테 너무 어려운 일을 시켰어......

산사르는 바트를 계속 쳐다보다가

산사르 ......바트야......아빠를 잊어. 잊어버려.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바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바트 아빠가 그러라고 하셨어요?

산사르는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잠시 뒤, 다시 바트를 보면서

산사르 아빠가 한국에서 너무 힘들었어. 이제는 나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어.
바트 그게 저를 안 만나는 이유예요?

산사르는 고개를 젓는다.

산사르 너한테 다 말할 수 없는 게 있어.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너도 내년이면 대학생이고 성인이야. 네 인생 살아. 아빠처럼 살지 말고 멋지게 살아 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게.

바트는 이젠 체념한 듯한 표정이다. 바트와 산사르는 침묵 속에 서로의 눈만 응시한다. 그러다 바트가 침착하게 묻는다.

바트 다시 찾아도 만날 수 없겠죠?

산사르는 바로 대답을 안 한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92. 성환을 지나는 국도 (밤 / 실외)


깊은 밤. 바트는 국도변 벤치에 앉아, 간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93. 산사르의 원룸 (밤 / 실내)


산사르는 술에 잔뜩 취해 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채 침대 위에서 자고 있다. 바트는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산사르는 침대가 넓은데도 한쪽 편으로 누워 있다. 침대 다른 편 머리맡에는 베개 하나가 놓여 있다. 바트의 시선은 침대 위 선반에 있는 사진으로 움직인다. 산사르와 볼드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함께 찍은 사진. 바트는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다.


94. 성환역 (오전 / 실외)


바트와 산사르는 성환역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향한다.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는다.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폼까지 함께 간다.

(Cut to)

바트와 산사르가 플랫폼에 서 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대화가 없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때 전철이 오는 게 보인다. 그제야 산사르가 바트에게 말한다.

산사르 용산역에서 내리는 거다. 지나치지 말고 잘 내려.
바트 네.
산사르 나머지 일정도 재밌게 보내.
바트 들어가세요.

산사르는 전철이 설 때까지 함께 한다. 전철이 멈추고 바트가 올라탄다. 바트는 전철 안에서 산사르를 돌아본다. 산사르는 계단으로 걸어가고 있다. 전철이 서서히 출발한다. 바트는 계속 산사르를 쳐다보지만, 산사르는 바트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계단을 오른다.


95. 서울 용산역으로 가는 길 (오전 / 실외)


바트가 전철 문에 몸을 기대고 서서, 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표정이 차갑다.


96. 용산역 (오후 / 실내)


바트가 용산역 개찰구를 빠져나온다. 성환역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용산역에서 쉽게 출구를 찾지 못한다. 간신히 출구를 발견해 걸어 나간다.


97. 용산역 앞 (오후 / 실외)


바트는 출구를 빠져나와 나랑(바트의 엄마)을 찾는다. 잠시 뒤, 나랑을 발견한다. 나랑도 바트와 눈이 마주친다. 나랑은 빙긋 웃으며 바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잡는다.

나랑 (놀란 표정) 바트, 많이 컸네. 이렇게 컸을 줄 몰랐어. (얼굴을 계속 살피면 서)......얼굴은 그대로인데 키가 쑥 컸어.

바트는 아무 말이 없다. 표정도 밝지 않다.

나랑 배고프지? 점심 먹을까?
바트 네.
나랑 이젠 슬슬 몽골 음식이 생각날 거야. 가자.


98. 광희동 몽골 타운의 어느 몽골 식당 (오후 / 실내)


바트와 나랑이 초이완[*몽골식 볶음국수]를 먹고 있다. 바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다.

나랑 ......아빠는 잘 만났어?

바트는 나랑을 쳐다보지 않고 초이완을 먹으며 말한다.

바트 네.
나랑 뭐라고 하셔?

바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바트 더는 찾지 말래요.

나랑의 표정은 굳어진다.

나랑 ......아빠는 여기서 엉망으로 살았어. 지금도 엉뚱한 생활 하고 있고......너를 위해서 한 말일 거야.
바트 아빠 친구도 만났어요. 산사르요.

나랑은 말이 없다. 바트도 말없이 초이완만 먹는다. 그러다 대뜸 묻는다.

바트 왜 연락하지 않으셨어요?
나랑 아빠 때문에 일이 많았어.
바트 헤어지셨다면서요?
나랑 ......응.
바트 혼자 사세요?
나랑 응.
바트 그럼 연락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몽골로 돌아오시든가.
나랑 ......시간이 필요했어. 너무 힘들었거든. 충격도 많이 받았고.
바트 지금은요?

나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나랑 아직도 정리 안 된 게 많아.
바트 언제쯤 정리가 돼요?
나랑 모르겠어......

그제야 바트는 나랑을 쳐다보면 묻는다.

바트 만약 정리되면 저를 찾으실 건가요?
나랑 그래야지. 그러려고 했어......

나랑은 바트의 시선을 피한다. 잠시 말이 없다가

나랑 ......미안하다. 너한테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흐른다. 잠시 뒤,

바트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나랑 청소해. 밤에 일 끝난 공장 청소하는 일이야.
바트 피곤하시겠어요.
나랑 돈을 많이 주니까. 한국 사람들은 그런 일을 안 하거든.
바트 다른 일은 안 하세요?
나랑 응. (미소를 지으며) 낮에는 너하고 같이 있을 수 있어.


99. 나랑의 원룸 (저녁 / 실내)


나랑이 사는 광희동 인근의 반지하 원룸.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하지만 건물 자체가 낡아 밝은 분위기는 아니다.
나랑은 화장하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바트는 TV에서 하는 K-팝 가수들의 공연을 보고 있다. TV를 보면서 흘끗흘끗 나랑을 쳐다본다. 잠시 뒤, 나랑이 가방을 챙기며 나가려 한다.

나랑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음식 꺼내 먹어. 너 좋아하는 보츠 많이 해 놨어. 장에 이불 있으니까 펴서 자면 되고.
바트 네.

나랑은 밖으로 나간다. 바트는 TV를 보다가, 침대에 올라가 눕는다. 우두커니 천정만 바라본다.


100. 광희동 몽골 타운 (저녁 + 밤 / 실외)


광희동 뒷골목에 있는 몽골 타운. 낡고 오래된 골목에 몽골과 관련된 상점들과 업체들이 모여 있다. 주변에 몽골인들도 많이 보인다. 바트는 골목을 걸으며 한국에서 보는 몽골을 구경하고 있다.

(Cut to)

바트가 어느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101. 나랑의 원룸 (새벽 / 실내)


새벽 시간. 바트는 잠에 푹 빠져 있다. 문이 열리더니 나랑이 들어온다. 나랑은 지친 걸음으로 침대로 향한다. 서랍장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 앉는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침대 밑에서 자는 바트를 힘없이 내려다본다.


102. 서울 남산 (오전 + 오후 / 실외)


바트와 나랑은 이야기를 나누며 남산 꼭대기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나랑은 바트를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어딘지 모르게 건성으로 대화하는 느낌이다. 바트는 어제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뚱한 모습이다.

나랑 한국은 어때? 여기저기 돌아다녔잖아.
바트 정신없지만 재밌어요.
나랑 어디가 제일 좋았어?
바트 (슬쩍 웃으며).....솔직히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다 좋았어요.
나랑 한국은 잘 사는 나라야. 화려하고. 하지만 몽골 사람들은 힘들어.
바트 그래도 계속 오잖아요.
나랑 (혼잣말하듯, 힘없는 목소리) 여기 오면 행복할 줄 아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계단을 오른다.

나랑 나는 네가 더 늦게 오면 좋겠어.
바트 (나랑을 쳐다보면서) 제가 한국에 오는 게 싫으세요?
나랑 (웃으며) 아니야, 아니야. 여기 일찍 온다고 좋은 게 아니어서 그래.
바트 왜요?
나랑 너도 봤잖아. 주변에 놀 데 천지야. 어린 나이에 오면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더라고. 몽골에서 대학을 마치고 온 애들이 그래도 착실해.
바트 저는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나랑 (가볍게 웃으며) 후후-. 하긴, 할아버지가 너 공부 안 하고 딴짓하면 가만 두 겠니?
바트 할아버지가 정말 고마워요.
나랑 지혜로운 분이야. 속 깊고. 늘 미안해......

(Cut to)

두 사람은 남산 타워 밑 전망대에 도착한다.

나랑 여기가 꼭대기야. 엄마는 벤치에 앉아 있을 테니까 천천히 둘러보며 구경해.
나랑은 매점 옆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는다. 바트는 전망대에서 보이는 서울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 나랑을 돌아본다. 나랑은 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바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그쪽에서 보이는 서울의 모습을 바라본다. 다시 나랑을 돌아본다. 나랑은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하품을 한다. 바트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본다.


103. 나랑의 원룸 (저녁 / 실내)


나랑이 옷을 챙겨 입는다. 바트는 TV를 보고 있다. 잠시 뒤, 나랑이 가방을 들고 나가려 한다.

나랑 엄마 갔다 올게. 피곤할 텐데 일찍 자.
바트 (TV를 보면서) 다녀오세요.


104. 광희동 주변 (저녁 / 실외)


바트가 광희동 주변 거리를 걷고 있다. 동대문 일대의 상점 부근에만 사람들이 북적일 뿐, 광희동의 저녁은 썰렁하기만 하다. 바트는 주변 모습에는 관심 없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며 거리를 배회한다.

(Cut to)

독특한 형태의 동대문 DDP 건물. 바트는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다. 건물에서 나오는 색색의 빛이 넓은 광장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별로 없어 휑한 분위기이다. 바트는 화려하지만 쓸쓸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무슨 생각인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다.


105. 나랑의 원룸 (밤 / 실내)


바트는 나랑의 집기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잡다한 용품들만 있을 뿐, 별다른 것은 없다. 그러다 구석의 서랍장으로 가 서랍들을 차례로 열어본다. 콘돔과 약봉지가 가득 든 서랍 하나가 특이할 뿐, 역시 별다른 건 없다. 마지막으로 맨 끝 서랍을 열어본다. 서랍 안에는 서류들이 꽉 들어차 있다. 바트는 뭔지 모를 서류들을 살피다가 구석에 사진 몇 장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내 한 장 한 장 들여다본다. 곧 어떤 사진에 눈이 멈춘다. 그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진다.


106. 여의도 한강 공원 (오후 / 실외)


바트와 나랑이 마포대교 아래 한강 둔치에서 서강대교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 두 사람은 거의 대화가 없다.

(Cut to)

두 사람은 걸어오다가 서강대교 아래 벤치 앞에서 멈춘다.

나랑 (당산철교를 가리키며) 저쪽으로도 쭉 걸어갔다 와 봐. 다리마다 다르게 꾸 며 놔서 재밌어. 엄마는 여기서 쉬고 있을게.

바트는 당산철교 쪽으로 천천히 향한다. 하지만 멀리 안 가고 서강대교 아래 선착장 부근에서 멈춘다. 강물 가까이 걸어간다. 그곳에 서서 강 건너편 아파트들과 빌딩들을 바라본다.

(Cut to)

나랑이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 무료한 표정. 바트가 벤치로 다가온다.

나랑 벌써 갔다 왔어?
바트 (의자에 앉으며) 아니요. 좀 쉬었다 가려고요.
나랑 그래, 너도 이젠 피곤하지.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나랑은 강물만 바라보고 있고, 바트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는 모습이다. 그러다 바트가 나랑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바트 엄마......

나랑은 바트를 쳐다본다. 바트는 머뭇거리다가 차분하게 묻는다.

바트 엄마도 제가 안 찾았으면 좋겠죠?

나랑은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다. 곧

나랑 ......그냥 지금 힘들어서 그래. 좀 정리되고 나면 너랑 같이 살 거야.
바트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

대화는 끊긴다. 잠시 뒤, 바트가 나랑을 쳐다보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바트 저녁에 공장 청소하러 간다는 말도 거짓말이죠?

나랑은 대답이 없다.

바트 엄마도 아빠랑 똑같은 생각이죠?

나랑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린다. 불안한 모습으로 숨을 가쁘게 내쉰다. 그러더니 바트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랑 ......바트야, 엄마......엄마, 결혼했어......

바트는 어이없다는 듯이 숨을 내뱉는다.

바트 하-
나랑 한국 남자랑......어쩔 수 없었어......

바트는 나랑을 쳐다보지 않고, 딴청을 부리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랑 아이도 있어......

바트는 계속 딴청만 부린다.

나랑 바트야, 미안해......미안해......(울먹이며)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어. 정말 미안 해......

바트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다. 나랑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감정을 진정시킨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바트가 차분하게 묻는다.

바트 엄마도 제가 안 찾았으면 좋겠죠?

나랑은 이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힘없는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 강물만 바라본다. 잠시 뒤, 바트가 말한다.

바트 다리 위에 올라갔다 올게요.
나랑 (살짝 놀라며) 저 위는 왜?
바트 저기서 한강 보려고요.
나랑 ......조심해. 다리 위에서 사고 자주 나.
바트 (살짝 웃으며) 한국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무슨 짓 하는지 다 알아요. 금방 돌아올게요.

바트는 다리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한다.


107. 서강대교 위 (오후 / 실외)


바트는 서강대교 인도를 천천히 걸어간다. 얼마를 가다가 다리 중간쯤에서 멈춘다. 태양 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리 난간 가까이 다가간다. 바람이 제법 많이 분다.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본다.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바트는 다시 고개를 든다. 큰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탁 트인 한강의 전경을 망연히 바라본다.


108. 나랑의 원룸 (새벽 / 실내)


새벽 시간. 바트는 잠을 자고 있다. 잠시 뒤, 나랑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친 모습. 나랑은 터벅터벅 침대로 가 앉는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바트를 내려다본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한참 동안 그렇게 보기만 한다.


109. 명동 거리 (오후 / 실외)


바트와 나랑이 번화한 명동 거리를 걷고 있다.

바트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나랑 갖고 싶은 게 있었을 거 아니야. 엄마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바트 ......여기 비싼 데잖아요.
나랑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니까.

바트는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주변 상점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나랑 뭐가 제일 갖고 싶었어?

그때 바트의 눈에 나이키 매장이 들어온다.

바트 (매장을 쳐다보며)......저거요.
나랑 나이키?
바트 네.
나랑 좋아. 들어가자.


110. 나이키 매장 안 (오후 / 실내)


바트는 진열대에 놓인 나이키 운동화들을 보고 있다. 가격에 놀라는 모습이다.

바트 너무 비싸요.
나랑 괜찮아. 마음에 드는 거 골라.

바트는 망설이다가 하나를 집는다. 15만 원짜리 운동화다. 진열대 아래에 있는 운동화 박스에서 사이즈에 맞는 걸 고른다. 의자에 앉아 신어 본다.

바트 이걸로 할게요.

나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111. 명동의 어느 고급 한식점 (저녁 / 실내)


바트와 나랑이 한식점 안의 별실에서 한정식을 먹고 있다. 테이블 가득 고급 한식 요리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서로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다. 나랑은 틈틈이 바트의 눈치를 본다. 바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만 먹는다. 그렇게 애매한 시간이 흐르다가, 나랑이 입을 연다.

나랑 내일 4시 비행기라고 했지?
바트 네.
나랑 그럼 오전에 시간이 있겠네. 가고 싶은 데 있어?


112.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 (오전 / 실외)


인수봉이 보이는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 바트는 멀리 보이는 인수봉을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지만,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데, 뒤에서 나랑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나랑 바트야! 그만 가자. 슬슬 출발해야 해.

바트는 나랑의 말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인수봉을 응시한다.


113. 오트공텡게르 산 앞의 어워 (오후 / 실외)


북한산 인수봉에 오트공텡게르 산이 오버랩되면서 화면이 바뀐다. 바트는 오트공텡게르 산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뒤에서 수렝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수렝 바트야! 가자. 늦기 전에 출발해야 해.


114. 차 안 (오후 / 실내)


수렝이 모는 차가 초원을 달린다. 옆에 바트가 타고 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차가 산을 돌아서 나가자 멀리 무지개가 보인다. 바트는 무지개를 바라본다. 얼마를 더 가자 도로로 접어드는 길로 들어선다. 바트는 잠시 도로를 살핀 뒤, 다시 무지개를 바라본다. 하지만 무지개는 사라지고 없다.


115. 바트의 게르 안 (저녁 + 밤 / 실내)


바트와 수렝은 말없이 양 머리 고기를 먹고 있다. 바트가 먼저 입을 연다.

바트 (조심스럽게)......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무것 도 안 물어보셔서요.....

수렝은 아무 말 없이 고기만 먹다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수렝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그러다 한숨을 내쉬고는, 싸늘한 말투로 말한다.

수렝 내가 그것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있었을 거 같아?
바트 ......다 아셨어요?
수렝 하나는 남자놈이랑 붙어살고, 하나는 한국놈이랑 붙어살고, 내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꼭 해야겠어?

바트는 당황한 표정이다. 잠시 말이 없다가

바트 저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요?
수렝 너뿐만 아니라 사람들 귀에 안 들어가게 하려고 틀어막고, 틀어막고, 또 틀 어막았어. 남사스럽고 창피한 일, 알려져서 뭐 하게. 알고 나니까 이젠 속 시원해?

바트는 말없이 고개만 숙인다.

(Cut to)

깊은 밤. 바트는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다 침상 옆 틈에서 사진 액자를 꺼낸다.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 바트는 스마트폰 불빛으로 사진을 비춰본다. 한참 동안 사진만 쳐다본다.


116. 눔루크 이곳저곳의 모습 (오후 / 실외)


인적이 드문 눔루크 곳곳의 모습. 몽골 서북쪽은 8월 초순이 지나면 가을로 들어선다.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분위기의 눔루크는 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117. 눔루크 고등학교 (오전 / 실내 + 실외)


아직 여름 방학이어서 텅 비어 있는 눔루크 고등학교의 모습.


118. 눔루크 고등학교 교정 벤치 (오전 / 실외)


바트와 엥크에체첵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트는 밝은 표정이다.

엥크에 (기쁜 표정) 다행이다. 잘 갔다 왔네.
바트 선생님 덕분에 좋은 경험 했어요. 고맙습니다.
엥크에 한국 대학은 좀 보고 왔어?
바트 직접 가보기도 했어요. 유학생들도 만났고요. 도움 많이 됐어요.

엥크에체첵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엥크에 ......부모님은 만나 봤니?
바트 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더라고요. 한국에서 헤어지고 지금은 따로 사세 요......하지만 두 분 다 제가 한국에 유학 오는 걸 굉장히 좋아하세요. (빙긋 웃으며) 한국에 오면 서로 자기와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엥크에 그래, 한국에서 일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네가 가면 좋아질 거야.
바트 네.
엥크에 이젠 들뜬 마음 정리하고 다시 공부해. 방학도 얼마 안 남았어. 자습실은 늘 개방하니까 나와서 해도 되고.
바트 네, 선생님.
엥크에 들어가 볼게. 잘 지내라.

엥크에체첵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트는 인사를 한다. 엥크에체첵이 걸음을 돌려 학교 건물로 향한다. 그러자 바트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진다.


119. 초원 (오전 / 실외)


8월이 되자 초원도 달라진다. 초원의 풀이나 가축들의 모습이야 그대로이지만, 대지를 감싸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다.


120.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멀리서 아미나가 오토바이를 몰며 온다. 바트의 게르 앞에서 멈춘다.


121. 바트의 게르 안 (오후 / 실외)


바트는 기운 없는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다. 아미나는 건너편 침상에 앉아 있다.

아미나 엥크에체첵 선생님이 그냥 속아주는 거 아닐까?
바트 몰라.
아미나 할아버지가 아신다면 선생님도 알고 있었을 거야.

바트는 말이 없다. 아미나는 축 처져 있는 바트를 계속 보고만 있다가

아미나 (답답하다는 표정) 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바트 뭘?
아미나 그렇게 혼자 시체처럼 지내고 있을 거냐고.

바트는 말이 없다.

아미나 결국 네 사람의 작전만 성공한 거잖아.
바트 그게 무슨 말이야?
아미나 할아버지와 선생님은 네가 부모를 보고 오면 미련을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거고, 네 부모는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한 거고.
바트 난 내 감정이 더 중요해.
아미나 누가 안 중요하대? 너도 이젠 정리해.
바트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아미나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정리 안 하고 평생 부모만 생각하며 살 거야?

바트는 한숨을 푹 내쉰다.

바트 ......모르겠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화가 나기도 하고......생각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해.
아미나 (핀잔을 주듯, 날카로운 말투) 너한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야.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듣는 이야기야. 아빠는 한국에서 술과 도박에 빠져 번 돈 다 날리고 빚잔치하며 형편없이 살고, 엄마는 그 꼴 보다보다 헤어지고, 혼자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하다가 어찌어찌한 일 로 한국 남자와 만나 결혼해서 애 낳고......이런 이야기 이젠 놀랍지도 않아.
바트 난 어떡하면 될까?
아미나 어떡하긴. 정리해야지.
바트 어떡하면 정리할 수 있냐고.
아미나 친구나 아는 사람들 만나서 수다도 떨고 재밌게 놀아. 나도 시간 낼게. 그렇 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각이나 마음이 많이 정리될 거야.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 방법이 최고야.
바트 ......나는 그래도 안 될 거야......
아미나 미치겠다, 진짜. 네 할아버지나 부모 모두 모질고 독한데, 너는 왜 그렇지 못하니? 그것도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야.

바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바트 ......혼자 있을게. 그게 좋아.
아미나 그러면 너만 더 힘들어.

바트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 눕는다. 아미나는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122. 초원 (오전 / 실외)


바트가 양들과 염소들을 몰며 초원을 걸어간다. 얼마를 가는데 멀리 무지개가 떠 있다. 바트는 잠시 서서 무지개를 바라본다. 그러다 양 몇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안으로 몰아넣는다. 다시 무지개를 바라본다. 하지만 무지개는 사라지고 없다. 바트는 얼빠진 표정으로 텅 빈 하늘만 멍하니 바라본다.


123. 바트의 게르 밖 (오후 / 실외)


양들과 염소들을 몰며 게르로 향하는 바트. 멀리 있는 게르 앞에서 수렝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 뒤, 수렝은 게르 안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게르 옆에 세워둔 차로 향한다.


124. 바트의 게르 안 (오후 / 실내)

바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바트 누구세요?
수렝 취직하게 될 거 같다.
바트 잘 됐어요! 울란바타르요?
수렝 아니. 올리아스타이. 모텔 관리하는 일이야.
바트 여기서 멀지도 않고 좋네요.
수렝 내일 같이 가보자.
바트 네.

수렝은 옷장에서 옷들을 살핀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들뜬 모습이다.


125. 눔루크에서 올리아스타이로 가는 길 (오전 / 실외)


수렝이 모는 차가 올리아스타이로 가고 있다. 옆에 바트가 타고 있다. 초원길을 달리다 고갯길로 접어든다. 비포장도로지만 경사가 완만하고 땅도 거칠지 않아 비교적 안정되게 달린다.


126. 올리아스타이 중앙로 (오후 / 실외)


수렝이 모는 차가 올리아스타이에 도착해 중앙로로 들어온다. 올리아스타이는 자브항의 중심 도시답게 눔루크에 비해 크고 도로나 건물들이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몽골의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낡고 오래된 모습이다.


127. 차 안 (오후 / 실내)


차 안에서 바트와 수렝은 주변 건물들을 살핀다. 바트가 한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바트 저거 아니에요?

수렝도 건물을 본다. ‘아즈 모텔(AZ Motel)’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수렝 맞다. 다 왔어.

수렝은 아즈 모텔로 차를 몬다.


128. 아즈 모텔 앞 (오후 / 실외)


바트와 수렝이 차에서 내린다. 수렝은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매만진다. 두 사람은 곧 모텔 안으로 들어간다.


129. 아즈 모텔 사무실 (오후 / 실내)


사무실에서 수렝과 찬드바자르(모텔 사장 / 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옆에 바트도 함께 있다. 젊은 사장인 찬드바자르는 수렝을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이다.

찬드 베케씨를 통해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이런 일은 처음이시죠?
수렝 네. 한때는 가축 2천 마리까지 키운 적도 있습니다. 여기도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찬드 가축 기르는 거에 비하면 여기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처음 한두 달만 지 나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수렝 (빙긋 웃으며) 젊은 사람 같지야 않겠지만, 건강한 편입니다. 걱정하지 않으 셔도 됩니다.

찬드바자르는 잠시 서류들을 살핀다.

찬드 (서류를 보며)......좋습니다. 자세한 업무는 매니저가 차근차근 알려드릴 겁니 다.
수렝 숙소도 마련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찬드 모텔 205호예요. 바로 같이 가보죠.......아, 급료는 한 달에 90만 투그릭 드리 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바트와 수렝은 살짝 놀라는 표정이다.

찬드 모텔에서 먹고 자고 하기 때문에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수렝 정말 감사합니다.
찬드 그럼, 올라가 보실까요?


130. 자브흘랑트 톨고이 사찰 (오후 / 실외)


올리아스타이 진입로 부근에 있는 작은 사찰. 수렝이 사찰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Cut to)

바트와 수렝이 사찰 앞 바위에 앉아 넓게 펼쳐진 올리아스타이 외곽의 전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산과 초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바트 사장님이 좋은 분 같아요.
수렝 많이 배려해준 거 같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 주고......그냥 불쌍한 노인네 하나 거둬주는 거야.
바트 바로 옮기실 거예요?
수렝 그래야지. 너는 기숙사로 들어가고. 다 얘기해 놨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해.

바트는 말이 없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바트 ......유학 안 갈 거예요.

수렝은 풍경만 바라볼 뿐 말이 없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고는,

수렝 네가 충격을 많이 받았어. 어려서 그래.

바트는 말이 없다. 수렝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 독백하듯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간다.

수렝 누구를 원망하지는 마. 가난이 죄일 뿐이야. 네 아빠나 엄마나......그래서 잘 살아 보려고 그 먼 나라까지 간 거고. 그 가난도 우리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야. 너도 알잖아. 지금은 우리 같 은 유목민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야. 예전에는 가축만 있으면 걱정 없이 살 았어. 지금은 그렇지 않지. 풀 찾아 돌아다니면서 가축이나 치면 안 돼. 평 생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바트는 수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모습이다. 시선을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돌린다.

수렝 고향 떠나 외국에 사는 거, 다 노예 생활이야. 한국에서 몽골 사람이라고 무 시당하고, 한국 사람들이 하지도 않는 찌꺼기 일이나 하며 돈 벌고......나라고 널 보내고 싶겠니? 하지만 여기는......희망이 없어. 한국은 선진국이야. 잘 사 는 나라 가서 배우고, 좋은 직장 얻어 번듯하게 살아. 나는 세상 떠날 준비 를 하는 사람이지만, 너는 멋진 미래를 만들 수 있어. 그런 기회를 걷어차지 마.
바트 그러면......행복할까요? 여기서 저기로 가면 행복할까요?
수렝 이 세상에 행복한 곳은 없어. 좀 편한 지옥으로 가려고 발버둥 치는 거뿐이 지. 길을 잃지만 않으면 돼. 한국에서 그것들 봤지? 무지개 쫓아가다가 진창 에 빠진 거. 그러지만 마. 너는 그러지는 않을 거야.
바트 잘 모르겠어요. 요즘.....너무 힘들어요. 머릿속도 엉망이고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수렝 네 마음을 왜 모르겠니? 힘들 때는 힘들어해. 아플 때는 아파하고. 흙탕물을 억지로 맑게 하려고 하지 마. 그럼 더 힘들어. 가만 내버려 두면 흙들이 가 라 앉고 맑은 물이 보일 거야.

바트 무슨 말을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바트 부모님이 저 버리신 맞죠? 그런 거죠?

수렝은 대답이 없다. 무거운 표정으로 풍경만 바라본다.


131. 초원 (오전 / 실외)


바트가 평소와는 달리 양들과 염소들을 몰지 않고 혼자 초원을 걷고 있다. 텅 빈 초원을 걷는 모습이 쓸쓸하다. 걷는 모습도 맥이 없고, 얼굴도 초췌하다. 얼마를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도 맑고 푸르기만 할 뿐, 텅 비어 있다. 바트는 한참 동안 서서 텅 빈 하늘만 바라본다.


132. 바트의 게르 앞 (오전 + 오후 / 실외)


바트의 게르 앞에 트럭 세 대가 서 있다. 세 남자가 트럭에 양들과 염소들을 몰아넣고 있다.

(Cut to)

한 남자가 수렝에게 돈을 준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Cut to)

바트와 수렝이 게르를 철거하고 있다. 한 남자가 도와준다. 게르를 덮은 양가죽을 떼어낸 뒤, 구조물을 분해한다. 그런 다음 수렝의 짐과 함께 트럭에 싣는다.

(Cut to)

게르가 치워진 휑한 공터에 바트와 수렝이 서 있다. 바트는 말없이 수렝을 꼭 껴안는다. 수렝도 바트를 안아준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깊은 포옹을 한 채로 있다. 잠시 뒤, 수렝이 트럭으로 가 올라탄다. 곧 트럭은 출발한다. 바트는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다.

(Cut to)

바트가 커다란 가방 위에 앉아 있다. 넋을 놓은 듯한 표정이다. 이젠 게르도 없이 초원만 펼쳐진 곳에서 그 모습이 쓸쓸하다.

(Cut to)

아미나와 바야르(아미나의 아버지)가 탄 차가 다가온다. 차는 바트 앞에 선다. 아미나가 차에서 내린다. 바트와 아미나는 짐들을 차에 싣는다. 다 싣고 나서, 두 사람은 차에 탄다. 바야르가 차를 몰고 떠난다. 초원에는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아 있다.


133. 눔루트 고등학교 기숙사 - 바트의 방 (저녁 + 밤 / 실내)


바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작고 허름한 공간에 2단 침대 한 개와 책상 두 개가 놓여 있다. 바트는 구석으로 가 짐들을 내려놓는다.

(Cut to)

깊은 밤. 기숙사 방에는 바트 혼자 있다. 바트는 아래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다.


134. 초원 (오전 / 실외)


바트가 탁 트인 초원을 무작정 걷고 있다. 걸으면서 흘끗흘끗 하늘을 쳐다본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만 떠 있다.


135. 눔루크 고등학교 자습실 (오후 / 실내)


바트가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자습실에는 바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바트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노트에 낙서만 하고 있다. 그러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바트 힘없는 눈으로 하늘만 바라본다.


136. 눔루트 고등학교 기숙사 - 바트의 방 (밤 / 실내)


바트가 볼드와 나랑의 스마트폰 번호가 적인 메모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으로 볼드에게 전화한다. 그런데 결번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온다.

안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The pressed that you have dialed is not in service. Please check the number and call again.

바트는 다시 한번 걸어본다. 하지만 마찬가지다.

안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The pressed that you have dialed is not in service. Please check the number and call again.

바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나랑에게 전화한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나랑이 전화를 받는다.

나랑 여보세요?

나랑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바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랑 여보세요?

이번에도 바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랑도 말을 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흐른다. 그러다

나랑 ......바트?

그 말과 동시에 바트는 전화를 끊는다. 잠시 멍하니 있기만 하더니, 혼자 히죽히죽 웃는다.


137. 눔루크 밤거리 (밤 / 실외)


깊은 밤. 바트는 눔루크의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고 건물과 집들의 불도 대부분 꺼져 있어,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밤이어서 다니는 사람도 없다 보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바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걷기만 한다.


138. 눔루크 면사무소 앞 동상 (밤 / 실외)


바트가 동상 앞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작은 조명 하나가 동상을 비추고 있을 뿐 주변은 어둡다. 바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렇게 앉아 어둠에 잠긴 눔루크의 거리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바트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바트는 두 손으로 떨리는 몸을 감싸 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더니, 엉엉 소리를 내 울기 시작한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기만 한다.


139. 눔루크 고등학교 뒤편 공터 (밤 / 실외)


바트는 공터에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다. 불은 곧 활활 타오른다. 불 위에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 액자를 올려놓는다. 액자는 서서히 불에 타들어 간다.


139-1. (회상) 나담 축제 현장 (낮 / 실외)


어린 바트와 볼드와 나랑이 나담 축제 현장에 있다. 볼드는 바트를 안고 구경하고 있고, 나랑은 축제에서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다. 잠시 뒤, 나랑이 다가온다.

나랑 친구가 사진 찍어 준대요. 좋은 카메라로 찍는 거니까 잘 나올 거예요.
볼드 바트야, 사진 찍자.

볼드는 바트를 내려놓는다. 나랑의 친구가 온다. 바트와 볼드와 나랑은 축제 현장을 배경으로 나란히 선다.

나랑 괜찮아?
친구 좋아......찍는다, 웃으세요~ 하나, 둘, 셋-


139-2. 눔루크 고등학교 뒤편 공터 (밤 / 실외)


바트는 엄마가 사준 나이키 신발을 내려다본다.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신발을 벗는다. 신발을 불길 속으로 집어넣는다. 신발도 서서히 타기 시작한다. 바트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는 액자와 신발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140. 눔루크에서 초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오전 / 실외)


바트는 눔루크에서 이어진 도로를 걸어 나와 초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다른다. 그곳에 서서 초원을 바라본다. 이전보다 더 초췌해진 얼굴이다. 잠시 뒤,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141. 초원 (오전 / 실외)


바트는 초원을 하염없이 걷는다. 어느 낮은 산을 돌아나가자 멀리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는 게 보인다. 바트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무지개를 바라본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뒤, 바트는 무지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천천히 움직이던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곧 무지개에 빨려 들어가듯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한다. 계속 무지개만 바라보며 달려가기만 한다.


142. 하르노르 호수 (오후 / 실외)


바트는 무지개를 따라 호수까지 달려온다. 사막과 푸른색 호수가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무지개는 그 모습 그대로 떠 있다. 바트는 걸음을 멈추고 넋 놓은 표정으로 무지개를 바라본다. 그러다 무지개를 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사막은 곧 호수로 이어지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물이 발목을 지나 무릎까지 올라온다. 하지만 바트는 무지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점점 안으로 들어간다. 물은 가슴까지 차오른다.


엔딩 (오후 / 실외)


화면이 꺼지고 ‘솔롱고스’라는 타이틀이 떠오른다. 잠시 뒤, 다시 화면이 나타난다. 바트는 사라지고 무지개가 떠 있는 하르노르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만 남아 있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끝]


  <시놉시스>

 

■ 로그 라인

코리안 드림의 허상에 무너져 가는 어느 몽골 가족의 이야기.


■ 기획 의도

2020년 현재 한국에는 약 250만 명의 다문화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OECD에서는 전체 인구의 2% 이상이 다문화인이면 다문화 국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이고, 지금은 다문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다문화 콘텐츠들은 주로 다큐멘터리와 예능에 몰려 있었고,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큐멘터리와 예능도 우리의 관점에서 사랑과 화합의 ‘감동 코드’만 강조한 게 대부분입니다. 이번에 응모하는 <솔롱고스>는 다문화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현실을 다룬 시나리오입니다. 다문화인 가운데서 몽골인이 주인공입니다.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라고 합니다. 솔롱고스는 ‘무지개’라는 뜻으로, 몽골인들은 한국을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입니다. 몽골인들은 그만큼 한국에 호감을 느끼고 동경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코리안 드림’이 일반화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한국에는 약 5만 명의 몽골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몽골 인구 약 300만 명 가운데 거의 2% 가까이 되는 것으로, 한국은 몽골 이외의 나라 가운데 몽골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계속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몽골인들의 삶은 힘겹습니다. 몽골인들은 수년간 다문화인 범죄율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범죄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해, 몽골 현지 가족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사례도 적잖습니다. <솔롱고스>는 이와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코리안 드림의 허상에 무너져 가는 어느 몽골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입니다.

이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었던 일방적인 감동 코드 이면의 현실적인 면을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다문화 시대를 깊이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영화는 이런 부분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장르일 것입니다.

<솔롱고스>는 단순히 다문화 컨셉만으로 나온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실제 어느 몽골 가족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꼼꼼하고 입체적인 취재, 철저한 동선 체크, 그리고 실제 제작 시 현실적인 면을 충실히 반영하여 완성했습니다.

2021년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솔롱고스> 역시 이민자들의 사회적 맥락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로만 그치지 않고 영화로 제작되어, 내용과 질적인 면에서 다양화된 우리의 영화를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등장인물

(*등장인물은 모두 몽골인입니다. 몽골 이름이 다소 어렵기 때문에, 호칭으로 간략하게 표기하였습니다.)



바트 (18세 / 남자 / 주인공)

몽골 눔루크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가난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그가 한국으로 유학 가려는 이유는, 한국에 대한 동경과 함께 한국에 돈을 벌러 간 부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초등학교 때 한국으로 떠났는데, 2년 후 연락을 끊었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이 가족을 버리고 한국에서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몽(韓蒙) 교류 협회’에서 몽골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있는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행사를 진행한다. 그는 이 행사에 선발돼 여름 방학 때 열흘간 한국으로 가게 된다. 평소 동경하던 나라, 꿈에도 그리던 부모도 만난다는 생각으로 날아간 한국.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피해 만나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한국 사람과 결혼하여 애까지 낳은 상태였다. 그는 두 사람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다시 몽골로 돌아온다. 그리고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방황하면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수렝 (70세 / 남자)

바트의 할아버지. 전형적인 몽골의 유목민으로, 평생 유목 생활만 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유목민은 몽골의 최하층민들이다. 평생 가난 속에 산 그는, 손자인 바트만은 유목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전 재산을 다 처분해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려 한다.

그는 한국으로 가 연락을 끊은 아들과 며느리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너무나 창피한 일이어서, 그 이야기가 바트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부모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바트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볼드 (45세 / 남자)

바트의 아버지. 돈을 벌러 한국으로 가 처음에는 착실하게 돈을 모은다. 하지만 이후 술과 도박에 빠져 빚더미에 쌓이고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바트의 어머니와는 헤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 자신을 거둬 준 몽골인 산사르를 만나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몽골의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 그러다 바트가 자신을 만나러 한국으로 찾아오자 그를 피한다.



산사르 (46세 / 남자)

볼드의 친구. 한국에서 알게 된 볼드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그를 다시 일어나게 해준다. 이후 그와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바트가 한국에 왔을 때 볼드가 만나지 않으려 하자, 대신 바트를 맞이한다. 그리고 볼드를 기다리는 바트에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가 떠나는 날까지 시간을 끈다. 하지만 결국 볼드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고, 앞으로도 찾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



나랑 (43세 / 여자)

바트의 엄마. 처음에는 남편 볼드와 함께 한국에서 착실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의 방탕한 생활을 못 견디고 헤어진 뒤 혼자 산다. 쉽지 않은 한국 생활 속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녀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한다. 그러다 영주권을 위해 한국인 남자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이 일로 남편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가족과 인연을 끊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 한국에 온 바트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관계를 정리한다.


엥크에체첵 (35세 / 여자)

바트가 다니는 눔루크 고등학교 상담 교사. 그녀는 가족을 버린 부모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바트를 늘 안쓰럽게 생각한다. 바트가 자라면서 극복하기를 바랐지만, 외로움이 오히려 집착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점점 더 걱정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몽 교류 협회의 행사에 참여할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녀는 많이 고민하다가 바트를 추천해 한국에서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아미나 (18세 / 여자)

바트의 여자 친구. 그녀는 한국에서 몽골과 등지고 다른 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바트에게 가끔 싫은 소리도 하며 현실적인 충고를 많이 해준다. 하지만 성인이 다 되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부모에 더 집착하는 그를 보면서 답답해한다. 특히 그가 한국에 갔다 온 이후 매일매일 얼빠진 상태로 지내자 크게 걱정한다.



■ <솔롱고스>의 무대

<솔롱고스>의 주요 무대는 한국과 몽골이다. 한국에서는 ① 서울과 ② 충남 성환이고, 몽골은 ① 수도인 울란바타르와 ② 눔루크이다.

눔루크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서북쪽으로 1,000km 떨어진 곳으로, 인구 3,000여 명의 촌마을이다. 몽골의 촌마을이 그렇듯, 중심부에 공공시설과 상업 시설이 있고, 주변으로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주민 대부분은 초원에 흩어져 가난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기타 몽골의 장소들은 눔루크 일대의 지명이다.(오트공텡게르 산 / 하르노르 호수 / 올리아스타이 / 호림트 강 / 자브흘랑트 톨고이 사찰)
■ 줄거리

무지개를 쫓다 길을 잃은 사람들,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이야기



1.

바트(주인공)는 몽골의 눔루크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오전에는 초원에서 가축을 치다가, 오후에는 마을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다. 바트는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가려고 했다. 그는 다른 몽골인들처럼 한국을 동경했고, 무엇보다 한국에는 부모가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간 부모는 돌연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부모를 향한 그리움이 컸던 바트는,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몽골의 초원에서는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초원에 아름답게 떠 있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한국(*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한다. 솔롱고스는 ‘무지개’라는 뜻으로, 몽골인들은 한국을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다)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바트는 초원의 게르(*몽골의 전통 가옥 / 텐트 형태의 집)에서 할아버지인 수렝과 함께 살았다. 수렝은 엄한 성격이었지만, 부모 없이 혼자가 된 바트를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수렝은 평생을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유목민은 몽골의 최하층민이었다. 그 역시 평생 가난 속에 살았고, 그 가난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었다.

수렝은 바트만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축들을 다 처분해 돈을 마련하고 바트를 선진국인 한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했다. 한국은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였고, 몽골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외국이었다. 바트를 보내고 나서 자신은 유목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도시로 가 소일거리나 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렝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트는 다른 건 흠 잡을 데 없는 손자였지만, 부모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 늘 안타까웠다. 수렝은 아들과 며느리가 가족을 버리고 한국에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간 몽골인 가운데 이런저런 일에 얽혀 그렇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렝은 두 사람이 한국에서 뭘 하고 있고 어떻게 됐는지, 바트는 물론 주변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무나 창피한 일이어서, 자신도 그들과 인연을 끊은 상태였다. 바트는 그런 내막도 모르고 부모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와 형제 없이 혼자 외롭게 자라서 그런 것으로만 생각해, 커가면서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외로움이 집착으로 바뀌는 것 같아 걱정만 깊어 갔다.

수렝뿐만 아니라 바트를 각별히 아끼는 학교 상담 교사인 엥크에체첵과 바트의 여자 친구인 아미나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엥크에체첵은 바트가 부모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늘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녀 역시 몽골에서 여러 사례들을 봐와서, 한국으로 간 부모가 몽골의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미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에는 곧 성인이 될 바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이같이 철없어 보이고 너무나 답답했다.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충고도 해주고, 때로는 심한 소리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부모 없이 자란 외로움이, 바트에게는 그 어떤 말로도 위로나 해결이 안 되는 큰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이 딱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교사인 엥크에체첵은 ‘한몽 교류 협회’로부터 의뢰를 받는다. 협회에서는 몽골에서 학생들을 선발해 한국에 있는 부모와 만나게 해주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하며, 학생 한 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여름 방학 때 열흘간 가는 일정이고, 부모와 연락되어 한국에서 바로 만날 수 있는 학생이 대상이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다문화인들의 복지 차원에서 이러한 행사를 자주 진행했다.

엥크에체첵은 곧바로 바트를 떠올렸지만, 망설였다. 우선 바트는 부모와 연락이 안 돼 선발 조건이 안 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연락이 안 되는 이유를 짐작하는 그녀는, 바트와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일이 옳은지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 번 추천해보기로 하고, 협회에 바트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협회에서는 논의를 거쳐 추천을 받아들였다.

이후 몇 가지를 더 확인해야 했다. 바트 부모의 거주지, 몽골의 가족과 연락을 끊은 부모가 바트를 만나고 싶은지 여부, 그리고 바트의 보호자인 수렝의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도 신원을 등록해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주지와 연락처는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한 결과, 바트의 아버지는 충남 성환에, 어머니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또 두 사람 모두 바트를 만나겠다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수렝의 허락이 남았다. 사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수렝은 엥크에체첵이 쓸데없는 일을 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바트의 부모가 한국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만남이 오히려 바트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엥크에체첵과 상담 후, 긴 고민 끝에 한국행을 허락했다.

수렝이 바트의 한국행을 허락한 이유는, 이번 기회에 그가 부모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수렝의 입장에서는 바트의 부모이자 자신에게는 아들과 며느리의 일을 더 이상 숨기 수도 없었고, 숨겨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트도 이제 곧 성인이 되니까 모든 사실을 알고, 비록 적잖은 상처를 받더라도 스스로 극복하기를 바랐다.

수렝은 아들과 며느리가 바트를 만나겠다고 한 이유도 대충 짐작했다. 협회에서 하는 행사가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저런 사정을 대며 만남을 피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번 기회에 마음의 앙금 같았던 바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수렝은 그들의 결정이 괘씸하기는 해도, 확실하게 정리한다는 면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엥크에체첵은 바트에게 모든 내용을 알렸다. 바트는 뛸 듯이 좋아했다. 한국에 간다는 것도, 한국에서 부모를 만난다는 것도, 무엇보다 부모도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기뻤다. 바트는 이 일에는 분명 수렝의 배려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바트는 수렝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수렝은, 그 일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바트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인터넷을 통해 서울의 관광지를 검색하기도 하고, 간단한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아미나와 한국에 입고갈 옷을 사기도 하며 한국행을 준비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여름 방학이 되었다. 바트는 눔루크를 떠나 1,000km 떨어진 수도 울란바타르까지 간 뒤, 부푼 기대감을 안고 꿈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떠났다.



2.

한국에 도착한 바트는, 이틀간은 협회 사람과 함께 서울 구경을 했다. 몽골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서울의 모습에 감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부모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협회 사람의 안내에 따라, 먼저 아버지 볼드를 만나러 전철을 타고 성환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역에 도착하니까 볼드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나와 있었다. 남자는 볼드의 친구 산사르라고 소개했다.

산사르는 바트를 따뜻하게 맞았다. 그는 볼드를 내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볼드와 산사르는 성환 인근의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전 일터인 전주에서 일이 생겨, 오늘 새벽에 급히 가게 됐다는 것이다. 바트는 처음 보는 산사르도 어색했고 볼드도 나오지 않아 실망했지만, 곧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볼드와 산사르는 성환에 있는 원룸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바트는 산사르를 통해 그동안 볼드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게 됐다. 볼드는 처음에는 한국에서 착실하게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질 나쁜 몽골인들과 어울려 술과 도박에 빠지면서 거액의 빚을 지고 생활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런 일들로 바트의 어머니인 나랑과 한국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추락하던 볼드는 급기야 자살까지 기도하였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때 그를 일어나게 해준 사람이 산사르였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알게 된 사이로, 어느 공사장에서 잠깐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산사르는 볼드의 처지가 딱해 그의 곁에서 힘이 돼주며 새 출발을 독려했다. 이후 볼드는 마음을 잡고 산사르와 함께 다시 열심히 일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바트는 산사르의 말에 충격을 받고 놀란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볼드가 방탕한 생활을 할 때야 그렇다고 해도, 안정되었다면 몽골의 가족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트는 볼드가 왜 연락을 안 했는지 물었다. 산사르는 그런 건 직접 물어보라며 대답을 피했다. 산사르는 그것 말고도 민감한 질문은 대부분 어물쩍 넘어갔다.

바트는 산사르의 원룸에서 지내며 볼드를 기다렸다. 산사르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 밤에 들어왔다. 바트는 협회에서 소개해준 현지 유학생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볼드는 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다. 산사르는 전주에서의 일이 잘 해결이 안 돼, 하루 더 있다가 온다고 알렸다. 통화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산사르는 그곳 일이 워낙 바빠 연결이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바트는 또 하루를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볼드는 같은 이유로 오지 않았다. 바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볼드는 왠지 자신을 피하고, 산사르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볼드와 산사르를 한국에서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만난 친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 이상의 관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되었다.

볼드는 바트가 성환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트는 산사르에게 볼드가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닌지 물었다. 산사르는 처음에는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다가, 결국 실토했다. 산사르는 바트에게 볼드는 한국에서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그를 잊어버리고 더는 찾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아빠처럼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 멋지게 살라고도 했다.

바트는 볼드도 같은 생각인지 물었다. 산사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랬기 때문에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안 온 것이라고 답했다. 바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꼭, 제발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았다. 볼드에게, 아니 볼드와 산사르 사이에 자신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바트는 볼드에게서 받은 충격을 간신히 추스르고, 어머니인 나랑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성환을 떠나 용산역에 내리자 나랑이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나랑은 바트를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바트는 볼드에게 받은 충격으로 뚱한 상태였다. 나랑은 광희동에 있는 몽골인 거리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광희동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바트는 나랑에게 성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나랑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볼드의 방탕한 생활과 헤어진 이후 한국에서 너무나 고생하며 생활했기 때문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또 그 일들이 아직 정리가 안 돼 지금도 힘든 상태라면서, 생활이 나아지면 같이 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바트는 광희동에 있는 나랑의 원룸에서 지냈다. 밤에 공장 청소하는 일을 한다는 나랑은, 저녁에 나가 새벽에 들어왔다. 나머지 시간은 바트와 함께 보냈다. 나랑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던 볼드와는 달리 바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두 사람은 서울의 관광지에 같이 가기도 하고, 한국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바트는 나랑이 겉으로 보여지는 친근함과는 달리 자신을 건성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함께 있는 며칠 동안만 좋게 좋게 시간을 보내려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또 밤에 공장 청소를 한다고 했지만 거짓말 같았고, 볼드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랑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그녀의 집기들을 몰래 뒤져 보았다. 그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바트는 나랑과 함께 한강공원에 나갔다. 그때 그는 나랑에게 볼드처럼 자기가 찾지 않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나랑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생활이 나아지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바트가 거짓말하지 말라며 따지듯이 계속 묻자, 나랑은 그가 자신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결국 나랑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국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했고, 아이까지 있다고 고백했다.

바트는 나랑에게 자기가 찾지 않기를 바라는지 재차 물었다. 나랑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먹였다. 바트는 나랑의 뜻을 알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랑은 바트가 갖고 싶다던 나이키 신발을 사주었다. 그리고 최고급 한식당으로 데리고 가 저녁을 사줬다. 바트는 이것이 어머니 나랑과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같이 있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트는 나랑과의 만남을 끝으로 열흘간 한국에서의 일정을 보내고 다시 몽골로 돌아왔다.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충격이 컸는지 한동안 멍한 상태로 지냈다. 오랫동안의 꿈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허탈감, 배신감이 주는 분노 그리고 이제 세상에는 자기 혼자뿐이라는 슬픔 – 한 갈래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렝은, 바트의 부모이자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만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바트는 수렝이 두 사람과 인연을 끊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고 왔는데도 너무나 무관심했다. 하지만 곧 수렝이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수렝은 바트를 위해, 또 주변에 알려지면 창피해서 모른 척한 것일 뿐이었다.

바트가 한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 수렝이 가까운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어느 작은 모텔의 관리인 자리였다.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월급이나 근무 환경이나 모두 만족할만한 조건이었다. 수렝은 계획대로 가축들을 다 처분하고 유목 생활을 정리했다. 유목 생활을 하며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왔던 터라, 조금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초원에서의 마지막 날, 수렝은 바트에게 학비 걱정은 말고 유학 준비를 착실히 하라고 말했다. 또 이젠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한다면서, 마음 굳게 먹고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수렝은 엄하기는 했어도, 바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더욱이 한국에서 부모의 모습을 보고 왔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슬펐다.

그렇게 해서 수렝은 도시로 떠나고, 바트는 모든 짐을 챙겨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다. 바트는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수렝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극도의 외로움과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절망감에 빠져들어 갔다. 얼굴은 나날이 초췌해져 갔고, 종일 얼이 빠진 사람처럼 지냈으며, 심지어 이유 없이 혼자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아미나가 틈틈이 바트를 찾아와 말벗이 돼주었다. 그녀는 이젠 배짱과 오기를 갖고 그 두 사람이 후회할 정도로 멋진 인생을 만들어가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더는 바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느끼는 절망감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급기야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바트는 틈틈이 기숙사를 나와 혼자 텅 빈 초원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때부터 무지개의 환영이 자주 눈에 보였다. 초원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보지만, 다시 보면 신기루와 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헛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바트는 초원만 배회한 것이 아니었다. 밤에는 눔루크 거리도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바트는 한밤중에 눔루크 거리를 걷다가 어느 동상 앞에 잠시 앉았다. 거리는 텅 비어 있어 휑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멍하니 거리만 보고 있던 바트는,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울음은 한참 동안 그치지 않았다.

며칠 후, 그날도 바트는 습관처럼 초원을 배회했다. 늘 그렇듯 초원은 먼 하늘과 맞닿아 있을 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전에 가축을 칠 때는 초원이 삶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절망의 땅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방황하다가 또 무지개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환영인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바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무지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내내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뒤, 자주 찾던 인근의 호수까지 가게 되었다. 무지개는 호수 위로 아름답게 떠 있었다. 바트는 걸음을 멈추고 무지개를 바라보다가, 무지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호숫물로 들어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이 발목을 지나 무릎, 가슴까지 차오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안으로 들어가기만 했다.

 

  <당선소감>

 

   시절인연 같은 당선… 계속 걸어가겠다

 미디어 환경이 휙휙 달라지고 있다. 영화와 방송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유튜브 틱톡과 같은 매체에 자리를 잃어가고, 또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세상이다.

 살아오면서 어지간한 변화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지금의 변화는 놀랍다 못해 감당이 안 될 때가 많다.

 이런 역동적인 시대에 살면서 시나리오 작가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시류에 발 빠르게 편승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고, 우직하게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닐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인생길의 모든 일에는 거기에 딱 맞는 때가 있다.

 때가 되면 질문하게 되고, 때가 되면 해답이 떨어진다. 이번 당선은 내게, 그동안 해왔던 그대로, 옆을 돌아보지 말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소중한 해답을 준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또 곁에서 늘 응원해준 가족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내 몫만 남았다. 이번 당선을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이 고민하며 작품 활동을 해나갈 것을 다짐해 본다. 2024년 첫날 새롭게 시작된 울림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

 

● 1964년 서울 출생
● 홍익대 미술학과 박사


 

  <심사평>

  

 울림 있는 서사… 악착같은 핍진성 놀라워

  ‘솔롱고스’는 작가가 오랜 시간 취재하며 발품을 판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쓸쓸한 몽골의 초원과 호수가 등장하고 매력적인 할아버지와 함께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1970, 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의 사연과 정서가 많이 닮아 있는 작품이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고, 작품의 핍진성에 악착같이 매달린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죽어도 Go!’는 세대, 젠더 간 갈등을 잘 봉합해서 좋았다. 다만 세대 갈등을 나이로만 계산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다 보니 공감대가 얇았다. ‘파파야 초콜릿’은 대사가 위트 넘친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영화적 장르에 맞게 구성도 제 모양을 갖췄지만 영재에 대한 동화의 마음의 행로가 비현실적이었다. 멜로 장르를 독창적으로 쓴다는 건 쉽지 않다. ‘세기의 사랑’이 그렇다. 배경만 바꿔도 참신한 작품이 될 수 있다. 100분 내외의 영화적 구성도 잡혀 있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시나리오는 없다. 최근 영국 버밍엄대에서 6000여 편의 영화를 분석한 결과 가장 큰 수익을 낸 이야기는 ‘구덩이에 빠졌다가 탈출한 이야기’고, 수익성과 관계없이 관객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가난뱅이가 백만장자가 되는 이야기’였다. 또 관객들은 비극보다는 해피엔딩을 선호한다. 저마다 살기 팍팍하고 힘든 시대에 영화를 통해서나마 위로를 받고 싶은 이유겠다.

 영화와 시리즈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시대에 이런 데이터도 참조하면 소재를 선택하고 작품을 기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낙선작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정향, 주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