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구덩이 / 이정

 

<당선작>

 

구덩이 / 이정

 

등장인물
이 씨 40대 남자
김 씨 30대 남자


때
깊은 밤.

장소
어느 산.



정장 차림의 김 씨와 어두운 옷차림의 이 씨가 숲을 헤치고 나온다.

김 씨는 삽을 들고 있고 이 씨는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다.





이 씨 :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으며) 아이고, 좀 쉬었다가 가시죠.

김 씨 :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이 씨 : 아니요. 산에 너무 오랜만에 왔더니 힘드네요.

김 씨 : 그러시군요. 다 왔습니다.

이 씨 : 여기군요.

김 씨 : (둘러보며)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이 씨 : 여기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김 씨 :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씨 : 올라오느라 옷에 흙이 잔뜩 묻었네요. 비싸 보이는데.

김 씨 : (옷을 털며) 어머니께서 사주신 거예요.

이 씨 : 촤르륵 휘감기는 게 명품인가 봅니다.

김 씨 : 기죽지 말라고 좋은 걸 사주셨습니다. 첫 출근 때 입으라구요. 구두랑 같이요. 벌써 그게 작년 이맘때 얘기네요.

이 씨 : 그런 옷을 왜....

김 씨 :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싶었습니다.

이 씨 : 어째서죠?

김 씨 : 그냥요. (사이) 그냥.

사이.



김 씨 :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이 씨 :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김 씨 : 사람 죽이는 일 아니면 다 하신다고 하셨죠?

이 씨 : 예. 뭐.

김 씨 : 이제부터 제가 땅을 팔 겁니다.

이 씨 : 땅을... 요?

김 씨 : 제가 땅을 파는 동안 제 얘기도 들어주시고 부탁도 들어주시고 그냥 옆에 계셔주면 됩니다. 아 물론 쉬셔도 되구요.

이 씨 : 땅은 왜.

김 씨 : 다 파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씨, 우산을 꼭 쥔다.



김 씨 : 걱정 마세요. 선생님을 공격하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 힘든 일도 아니구요.

이 씨 : 힘든 일도 아닌데 돈을 그렇게 많이 주시는 이유가....

김 씨 : 힘들진 않지만... 결코 많은 돈은 아닐 겁니다. 먼저 드린 계약금 삼십 빼고 약속한 돈 백칠십만 원은 일이 끝나면 즉시 드리겠습니다.

이 씨 : 점점 미궁이군요.

김 씨 : 금방 끝날 겁니다. 자명한 일이구요.



김 씨, 적당한 곳을 찾더니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얼떨떨한 모습으로 앉을 곳을 찾는다.



이 씨 : (쪼그리고 앉아서 지켜보다가) 거기 뭐가 묻혀 있습니까?

김 씨 : 이제부터 질문은 되도록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씨 : 아... 예. 땅을 얼마나 파실지도 물어보면 안 됩니까.

김 씨 : (허리쯤을 가리키며) 아마 이 정도요.



김 씨, 다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 아... 그 정도 깊이면... 아무래도.

김 씨 : 아무래도?

이 씨 : 오래 걸리겠네요.

김 씨 : 금방 하지 않을까요?

사이.



이 씨 : 군대 갔다 오셨나요?

김 씨 : 아뇨. 공부만 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심하게 와서요. 팔을 못 움직일 정도였거든요.

이 씨 : 아... 어쩐지.

김 씨 : 티가 나나요?

이 씨 :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면 안 되거든요. 제가 시범을 좀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김 씨 : 그러시죠.



이 씨, 삽을 받아들고 우산을 김 씨에게 건넨다.



김 씨 : 오늘 비 온다고 했습니까?

이 씨 : 아뇨. 이 산에 멧돼지가 출몰한답니다.

김 씨 : 아. 그래요? 우산으로 멧돼지를 때려잡으시려구요?

이 씨 : 멧돼지가 나타나면 우산을 쫙 펴고 그 뒤에 숨을 겁니다.

김 씨 : 아...

이 씨 : 그놈이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우산을 펼치면 바위나 거대한 짐승 같은 건 줄 안대요. 그래서 그냥 지나가거나 피해 간답니다.

김 씨 : 그게... 말이 되나요?

이 씨 : 혹시 모르죠. 하지만 도망치면 죽는 건 확실합니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김 씨 : (걱정스럽게) 이게 멧돼지 소린가요?

이 씨 : 모르겠네요. 어쨌든 서둘러야겠습니다.

김 씨 : 예.

이 씨 : 잘 보세요. 삽을 이렇게 수직으로 꽂아서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팔 힘으로 흙을 퍼내는 게 아니라 지렛대의 원리로 흙을 떠내듯이. 꽂고, 밟고, 뜨고. 꽂고 밟고 뜨고.

김 씨 : 꽂고, 밟고, 뜨고.

이 씨 : 이렇게 하다가 폭을 넓힐 때는 삽을 뒤집어서 흙을 파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닥에서 지면까지 경사를 45도 정도로 만들면서 파야 돼요. 안 그러면 못 나가니까요.

김 씨 : 아... 전문가시네요.

이 씨 : 해 보세요.

김 씨, 땅을 판다. 아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버겁고 서툴러 보인다.



김 씨 : 꽂고, 밟고, 뜨고 이렇게요?

이 씨 : 예 예.

김 씨 : 한결 수월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씨 : (조금 지켜보다가) 사는 게 마음대로 안 되죠?

김 씨 : 예.

이 씨 : 조금 더 잘하는 제가 하는 게 어떨까요? 그냥 앉아서 돈만 받기도 그렇네요.

김 씨 : 답답하신가 보네요.

이 씨 :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김 씨 :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씨 : 힘들면 교대하면 되니까요. 번갈아 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김 씨 : 그럼 언제든 힘들면 말씀하세요.

이 씨 : 대신 멧돼지가 나타났다 싶으면 당황하지 말고 우산을 재빨리 펼쳐야 됩니다.

김 씨 : (우산을 받아 들고) 예예.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씨, 삽을 받아 들고 김 씨 대신 땅을 파기 시작한다.



김 씨 : 땅 파는 것도 제대로 못하네요 저는.

이 씨 : 처음엔 다 그렇죠. 땅 잘 판다고 뭐 대단한가요.

김 씨 : 인생이 한마디로 삽질이었거든요.

이 씨 : 공부만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씨 :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명문대를 나온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씨 : 못 믿기는요. 그럴 것 같았어요. 부모님이 아주 기대가 크셨겠네요.

김 씨 : 과거가 높고 환할수록 오늘의 바닥은 깊고 어둡죠.

이 씨 : 무슨 공부를 하셨길래.

김 씨 : 공시생 10년 차예요. 행시를 준비하다가 7급으로 목표를 바꿨습니 다.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해야 했습니다.

이 씨 : 7급도 대단하죠.

김 씨 : 하지만 그마저도 저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기하지도 못했습니다. 10년이 넘도록요. 결국 저는 부모님의 기대와 실망을 못 견디고 작년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양복까지 선물 받은 겁니다.

이 씨 : 걷잡을 수 없게 되었군요.

김 씨 : 부모님은 제가 법무부 소속 공무원인 줄 아십니다. 어머니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제 자리와 사무실 풍경 사진 좀 보내달라구요. 친구분들께 돌리고 싶다고 명함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견디다 못해 기밀 업무를 해야 해서 신분 노출을 할 수 없다고 허무맹랑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씨 : 믿으시던가요.

김 씨 : 마음 아프게도 그걸 믿으시더라구요.

이 씨 : 그래도 한숨 돌렸네요

김 씨 : 매일 정장을 입고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일 년만 더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꼭 해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너무 아깝게 떨어졌거든요. 대출도 받아야 했습니다. 공부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듭니다. 취직을 했으니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했구요. 이자가 무서웠지만 합격만 하고 나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씨 : 어떤 결과를 내든 부모님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김 씨 : 수습할 기회가 있지 않았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이 씨 : 이를테면요.

김 씨 :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부모님의 기쁨이 너무 컸으니까요. 저희 집 가훈이 뭔지 아십니까? 결과로 말하자, 예요.

이 씨 : 박력 있네요.

김 씨 :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시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제가 합격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떨리는 목소리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모 아들이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부터 어머니는 우울증약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제 합격 소식을 들은 후에야 우울증약을 끊으셨습니다.

이 씨 : 그렇군요. 시험에 떨어졌어도 취업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김 씨 : 저는 행정고시, 7급에 이어 최종적으로 9급 공무원 시험에도 떨어졌습니다.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 발표 날 명단에 제발 내가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는 저의 모습을 보았을 땐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열패감이 느껴지더군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저는 그냥 낙오자가 된 겁니다.

이 씨 : 이해합니다.

김 씨 :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이 씨 : 그냥 그렇게라도 살다 보면 살아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 씨 : 아니요! 죽음만이 제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습니다. 위로가 힘이 되는 사람은 따로 있겠지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이미 벼랑 끝에서 두 발을 뗀 사람이거든요. 떨어지는 일만 남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편히 잠들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 씨 : 벼랑 아래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 씨 : 기대가 클수록 충격도 크지 않겠습니까.

이 씨 : 기적과 기대는 다른 겁니다. 기적은 안 일어나도 그만인 거니까요. 복권을 사는 마음 같은 거요. 밑져야 본전이죠.

김 씨 : 저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사이.



이 씨 : 그런데... 땅은 왜 파는 겁니까?

김 씨 : 사라지고 싶어서요. 흔적 없이.

이 씨 : ...

김 씨 : 유난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물 옥상이나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거나 모텔에 들어가 목을 매면 간단할 텐데 말이에요.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워서 못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저의 죽음이 사건이 되어 기사가 될까 봐, 사람들이 그게 나인 것을 알까 봐 두렵습니다. 명문대를 가고 행시를 준비한다고 뻐기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비웃고 자신의 불행에 위안 삼으면서 나와 내 부모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올려질 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 씨 :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입방아질을 많이 하죠.

김 씨 :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모든 거짓이 드러난 채 으깨지거나 퉁퉁 불어서 건져진, 아니면 허름한 모텔에서 굳어진 나의 마지막 모습이 결과로 말하라는 부모님에게 무얼 말하는가 하는 겁니다.

이 씨 : ...

김 씨 : 그래서 저는 오늘 저를 여기 묻을 겁니다.


이 씨, 놀라서 김 씨를 본다.


이 씨 : 저 보고 선생님을 죽이라는 겁니까?

김 씨 : 아닙니다.

이 씨 : (삽을 집어 던지며) 제가 아무리 막장 인생이어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김 씨 : 아니래두요!

김 씨,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낸다.



김 씨 : 땅을 적당히 파고 나면 저는 이걸 마실 겁니다.

이 씨 : 그게 뭡니까?

김 씨 : 모든 걸 끝장내는 약이요.

이 씨 : ...

김 씨 : 이걸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난 것만큼이나요.

이 씨 : 그럼 제가 할 일은 선생님이 이 약을 마시고 저 구덩이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면 파낸 흙을 덮는 것입니까?

김 씨 : 짤막한 애도를 해주시면 좋겠지만 안 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씨 : 미쳤습니까? 이건 범죕니다.

김 씨 : 선행입니다.



김 씨,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는다.



김 씨 : 선생님이 아니어도 저는 결국 누군가를 찾아서 이 일을 끝낼 겁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 씨 : 왜죠.

김 씨 : 절망한 사람은 절망한 사람을 알아보니까요.



김 씨, 무릎을 꿇는다.


김 씨 : 부탁드립니다.

이 씨 : (한숨) 아무리 그래도 이건,

김 씨 : 살인도 유기도 아닙니다. 시신을 아무렇게나 묻는 게 아닙니다. 한 인간의 모든 과오와 고통과 서글픔을 묻어주시는 겁니다. 저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겁니다.

이 씨 : ...

김 씨 : 제발 부탁드립니다!



김 씨, 고개를 숙인다.

이 씨, 통증이 올라오는지 배를 감싸고 찡그린다.


김 씨 :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이 씨 : (이윽고 통증이 줄어드는지 삽을 찾아들고) 하겠습니다.

김 씨 :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할게요. 좀 쉬세요!

이 씨 : 아직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씨, 삽을 들고 구덩이로 들어가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 하지만... 뭐가 다른 겁니까?

김 씨 : (본다)

이 씨 : 실종과 자살 말입니다.

김 씨 : 완벽하지 않다는 건 압니다. 부재의 결과는 같죠. 그러나 그건 결과로 말하라는 아버지의 이론에 의해서만 그렇습니다. 저는 과정과 의미도 중요하거든요. 곧바로 시신을 확인하고 저의 행적을 좇아 한꺼번에 모든 진실을 마주하는 것과 하나하나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천천히 진실에 다가가는 건 아주 다른 일이에요. 그리고 가능한 한 마지막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의 생사 말입니다.

이 씨 : 대체 그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김 씨 : 모두를 위해서죠.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은 저처럼 주변에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하시다가 진실을 밝힐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겁니다. 그러다 자기 자신마저 합리화하고 희망 고문을 하면서 어떻게든 버티실 겁니다. 저의 죽음만은 유보하면서요. 그렇게 사람들도 저와 저희 가족을 잊어가겠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를 어디까지 줄 것인가, 그들의 추측을 풍문에서 그치게 할 것인가 진실로 드러나게 할 것인가가 선생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

이 씨 : 부모님에 대한 일종의 복수인 건가요.

김 씨 : 그렇게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의 인생과 부모님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요. 최대한 부모님께서 느끼실 충격과 슬픔의 크기를 줄여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 씨 : 그렇군요.


정적이 주위를 감싼다.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김 씨 : 진짜 멧돼지가 내려올까요?

이 씨 : 두렵습니까?

김 씨 : 두렵죠. 멧돼지가 아니라 멧돼지에 받쳐 죽었다는 소문이요.

이 씨 : 이제 교대해 주시겠습니까? 좀 힘드네요.

김 씨 : 아, 예. 많이 파셨네요. 제가 했으면 절반도 못 팠을 거예요.


이 씨, 구덩이에서 올라와 김 씨와 삽과 우산을 교환한다.

김 씨, 구덩이로 들어가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 최대한 깊게 파셔야 합니다. 비가 와서 침식되거나 짐승들이 파헤치기도 하니까요.

김 씨 : 그러면 안 되죠.

이 씨 : 그리고 본인 키를 잘 가늠해서 최대한 아늑하게, 하지만 좁지 않게 하세요. 이왕이면 두 다리 쭉 펴는 게 좋으니까요.

김 씨 : 알겠습니다!



사이.



이 씨 : 오늘 별이 많네요.

김 씨 : 밤하늘은 별들의 묘지라고 하더군요. 별은 오래전에 죽었으니까요.

이 씨 : 저렇게 아름답게 죽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김 씨 : 저의 죽음은 고통스럽고 추하겠죠.

이 씨 : 인간의 죽음이 다 그렇죠.

김 씨 : ...

이 씨 : 저기.

김 씨 : 예?

이 씨 : 아까 절망한 사람은 절망한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셨죠?

김 씨 : 아, 그거요.

이 씨 :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김 씨 : 그냥 느낌이 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돈을 벌기 위해 이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산을 오르는 사람은 나만큼 궁지에 몰린 사람이겠구나.

이 씨 : 그렇군요.

김 씨 : 제대로 맞혔나요?

이 씨 : 그런 셈이죠.

김 씨 : 선생님도 힘드셨겠죠? 어쩌면 저보다 더 말입니다.

이 씨 : 제 얘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김 씨 : 물론이죠.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어요.



이 씨 : 한때, 국밥집을 크게 해서 돈을 좀 벌었습니다. 돈을 버니까 더 많이 벌고 싶더라구요. 무리를 해서 외곽에 있는 모텔을 인수했죠. 인테리어까지 하느라 빚을 많이 졌지만 빚도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 있었거든요. 장사도 그럭저럭 잘됐구요. 동반자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김 씨 : 아이고.

이 씨 : 소문이 날까 봐 쉬쉬했는데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자살 명소라도 된 건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파라다이스 모텔이 죽음의 모텔이 된 거죠. 팔지도 못하고 결국 폐업했습니다.

김 씨 : 운이 나빴네요.

이 씨 : 막아야 할 돈이 십 수 억이었어요. 돈 빌려주겠다던 놈들도, 내 돈 빌려 간 놈들도, 내가 돈 좀 벌 땐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바퀴벌레 숨듯이 사라지더군요. 사업 확장할 땐 멋지다고 응원하던 아내도 망하고 나니 제일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혼자가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암에 걸렸습니다. 돈 없고 몸이 아프니 자식들도 저를 피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도 없을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아무도 안 남더군요.

김 씨 : (삽질을 멈추고) 암이면 치료는요?

이 씨 : 중단했습니다.

김 씨 : 어떻게 견디셨는지 상상이 안 가네요.

이 씨 : 힘들었습니다. 사는 게 괴롭고 몸이 아플수록 좋았던 날들만 생각났어요. 그러다 꿈이 깨면 깨닫는 거죠. 아, 인생은 빠꾸가 없구나.

김 씨 : 정답이네요.

이 씨 :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선생님하고 똑같아요. 마지막 자존심이었죠. 결국 그렇게 갔다더라, 장례식장이 휑하더라, 가족들이 울지도 않더라, 와이프 화장이 진하더라... 말들 드럽게 많잖아요. 저의 성공을 시기하던 사람일수록 저의 실패를 즐거워할 겁니다.

김 씨 : 백번 이해합니다.

이 씨 : 죽은 사람들 소식이 들리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김 씨 :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저처럼 말입니다.

이 씨 : 그렇죠. 사고의 폭이 좁아지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김 씨 : 제가 생각이 모자라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씨 : 아닙니다. 모든 감각이 지금 몰아친 불행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거기가 끝이라고, 거기서 끝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김 씨 : 착각... 이라구요?

이 씨 : 분명 그 너머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할 기운이 없는 거죠.

김 씨 : 그 너머요?

이 씨 : 상상이 안 되겠지요.

김 씨 : 그 너머에 뭐가 있습니까? 좌절과 고통, 굴욕 이후에요. 더 큰 절망 이외에 뭐가 더 있다는 건가요?

이 씨 : 무감각입니다.

김 씨 : ...

이 씨 : 어느 순간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아집니다. 맞아도 쪽팔리지 않고, 욕을 들어도 화가 안 납니다. 나도 아내에게 미안하고 자식 볼 낯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누가 나에게 실망을 하든 나 때문에 기절을 하든 알 바 아니게 되더군요. 이미 있는 빚에 몇 백, 몇 천이 더 불어나는 것 정도는 신경도 안 쓰입니다. 세상과 연결되었던 모든 끈이 끊어지는 거예요. 진짜 절망은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무감각입니다. 그때부터는 신체적인 고통만 남게 됩니다. 배고픔, 추위, 통증 같은 것 말입니다. 정신적인 고통과 불행을 느낀다는 건 아직 끝까지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씨 : 저에게 절망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이 씨 : 아닙니다. 저는 제 얘기를 할 뿐입니다.

김 씨 : 그런 상태로 왜 사는 거죠? 재미도 의미도 없는데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이 씨 : 그 상태가 되면 인생에 대해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이 사라집니다. 의문이 사라지면 답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겁니다. 오늘은 안 추워서 좋다. 오늘은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서 기쁘다. 오늘은 술을 한잔했으니 만족스럽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그런 좋은 일도 생기지만 대체로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갑니다. 그런 작은 운이 아니라 기막힌 기적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선생님 말씀처럼 기적이 일어나기란 쉽지 않죠. 그래서 저도 죽으려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요.

김 씨 :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왜죠?

이 씨 : 지루해서요.

김 씨 : 지루... 해요?

이 씨 : 괴롭지도 외롭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냥 지루합니다. 세 번이나 다시 살아났지만 나한테 무슨 신의 가호가 내렸다거나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하는 생각 같은 건 안 해요. 다시 살아나서 살아야 하는 진공 상태 같은 하루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지겨울 뿐입니다. 죽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의 통증을 겪어야 하는데 다음에 또 그만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게 가장 귀찮고 아쉽습니다.

김 씨 : ...

이 씨,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한다.

김 씨, 구덩이에서 뛰어나온다.



이 씨 : 통증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김 씨 : 아까부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 씨 : 췌장암 말기예요.

김 씨 : ...

이 씨 : 고통이 심합니다.

김 씨 : 약은요? 진통제 같은 걸 드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씨 : 다 떨어졌어요. 오늘 돈을 받으면 진통제를 사려고 했습니다.

김 씨 : 아, 그러시군요. (우왕좌왕한다) 깊이가 얼추 된 것 같습니다. 얼른 마무리하고 진통제를 사러 가세요. 여기요.



김 씨, 품 안에서 돈 봉투를 꺼내 이 씨에게 준다.



이 씨 : 저는 믿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뭘 바란 게 아니라 그냥 기적이요. 그 순간이 되어야만 깨닫게 되는 기적 말입니다.

김 씨 : 그러시군요. 기적적으로 저를 만나서 진통제를 살 수 있게 됐나 봅니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나 완쾌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아무런 기적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김 씨, 삽을 내려놓고 유리병을 꺼낸다.

잠시 심호흡을 한다.



김 씨 :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요. 만일 발견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부모님이 다 떠나신 후에나 누군지 알아낼 수 없는 백골로 발견될 수 있도록요.



김 씨, 유리병을 열려는 찰나,



이 씨 : 잠깐만요.

김 씨 : 왜 그러십니까.

이 씨 : 악수나 한 번 하시죠. 그래도 스친 인연인데.



이 씨, 김 씨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김 씨가 손을 내미는 순간, 이 씨가 김 씨의 유리병을 낚아챈다.

김 씨 : 왜 이래요!

이 씨 : 난 선생님을 묻으려고 지금껏 기다린 게 아닙니다.



이 씨, 유리병을 열어 마셔버린다.



김 씨 : 악!



김 씨,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는다.



이 씨 : 나를 묻어주십시오.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씨 : 오, 제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

이 씨 : 드디어 지루하고 아픈 인생을 끝내게 됐습니다. 나에게 온 기적은 바로 이겁니다.



이 씨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김 씨가 울부짖는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이 씨 : 멧돼지가 나타나면 잊지 말고 우산을 펼치세요. 도망치지 말고!



이 씨, 구덩이 안에 눕는다.

김 씨가 괴로운 듯 뒤돌아 나무에 기대어 신음한다.

반딧불이가 하나둘 떠올라 김 씨를 감싼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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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소감>

 

   ‘내 노력이 부족했었구나’ 도착해보니 깨닫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씁니다. 누구의 인생을 뒤흔들거나 세상의 어둠 한구석을 밝히는 작은 불빛이 되겠다는 포부가 이제는 없습니다. 내가 쓰는 것으로 그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만이고 욕심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나는 그저 내가 즐거워지기 위해, 내가 위로받기 위해, 내가 용기 내기 위해, 내가 답을 찾기 위해 씁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쓴 것들이 부끄럽지만 운 좋게 다른 이들을 만나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면, 운이 더 보태져서 숨소리처럼 작은 울림이라도 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 또한 나만의 기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쓰인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음에도 이 영광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실 분들이 있습니다. 뭘 하기는 한다는데 어슬렁거리기나 하는 것 같은 나를 보며 분통 터졌을 분들에게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오랫동안 변함없는 우정으로 응원과 믿음을 보내주는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준 분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신춘문예에 꼭 당선되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도착해 깨닫습니다. 운이 나빠서, 경험과 고통이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 세상이 나를 못 알아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랬다는 것을요.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계속 써보겠습니다. 나를 위해. 나의 언어로.

● 1977년 서울 출생
●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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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등장인물들의 목적·갈등, 무대 위의 긴장 담보할 수 있는 가능성 높아

 응모작 97편은 현재 한국 사회의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나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서로 소통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폐쇄적이고, 절망, 우울, 불신, 폭력, 죽음이 넘실대고 있었다. 독백이나 방백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작품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변적이거나 자기 넋두리에 그치는 측면이 있고 시대와 접점을 형성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또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른 폐해를 다룬 작품도 많이 보였으나 깊은 사유까지 도달한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동파’ ‘부메랑, 그 임계점’ ‘구덩이’가 최종심에 올랐지만, 세 작품 중에서 선뜻 한 작품을 꼽기에는 각각 아쉬운 점이 보였다. ‘동파’는 전세 사기를 당한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부부의 고단한 삶의 풍경을 배수관이 얼어붙은 세탁기에 빗대어 생생하게 묘사하였으나 예측 가능한 전개와 감상적 결말이 아쉬웠다. ‘부메랑, 그 임계점’은 대한민국의 구조적 부조리와 소통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흥미로웠으나 표층적 사건에 치우쳐 인물을 통한 심층적 주제 증명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구덩이’는 자살을 소재로 한 기시감이 있는 구성과 전개가 아쉬웠으나 희곡은 상연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등장인물들의 목적과 갈등의 조합이 무대 위의 긴장과 밀도감을 담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 임선옥, 오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