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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착해빠져선 / 정희정

 

인물

자해 여, 29
해형 남, 17
은성 남, 17
형석 남, 40
담임 여, 35


무대

1-2 교실.
맨 왼쪽에 낮은 탁자가 있고,
책상 몇이 탁자를 바라보며 일정한 간격으로 줄 맞춰져 있다.
맨 뒤 책상은 다른 것들과 멀리 떨어져 맨 뒤로 밀려나 있다.
무대 뒤론 앞문과 뒷문이 보인다.

1
서늘하게 불이 꺼진 교실.
해형, 맨 뒤로 밀려난 책상에 엎드려, 움직임도 없이 앉아있다.
자해, 앞문으로 들어와 탁자에 걸터앉는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와,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뒤섞인다.

자해 모르겠어.

자해,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잠시.

자해 사실 네 얼굴도 생각이 잘 안나.

해형은 미동 없이 그대로 엎드려 있다.

자해 이름, 주소, 가족 관계, 그런 것들은 알겠는데, 그런 것 말곤, 하나도, 아무 것도 모르겠어.

자해는 고개를 들어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어땠니. 우리. 무슨 말이라도 했던 적이 있었을까. 나한테 뭐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니. 있었을까. 뭐라도 말이야. 왜 난 아무 것도 모르겠지. 아무 생각이 안 나.

자해는 다시 고개를 묻는다.

자해 너를 모르겠어.

그때 해형,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메곤 뒷문 가, 선다.

자해 근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어땠는지,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해형, 문을 열고 나가버리면,
자해, 고개를 들어 뒷문을 바라본다.

자해 어디 있는지…

지지직거리던 스피커로 방송이 들린다.

방송 1학년 2반 학생이 사라진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우리 모두, 친구가 부디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같은 맘으로 바래봅시다.

스피커로 이어 들리는, 지지직거리는 음악소리와 빗소리가 다시 뒤엉키며. 점점 어두워진다.


2
자해, 탁자에 엎드려 있다.
그때 담임, 앞문을 소리 나게 탁,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담임 여기서 또 이러고 계시네.

자해, 고개를 들어 담임을 본다.

담임 집에 안 가세요?

담임, 탁자로 다가오자 자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담임 앉아계셔요. 저 잠깐 찾을 게 있어서 온 거니까.

자해 아니에요. 저도 일어나야죠. 일어나려고 했어요.

담임 근데 그러고 잠이 와요? 난 책상은 영 불편하던데.

자해 자던 거 아니에요…

담임 자다 걸린 학생처럼 말하시네.

자해 진짠데…

담임 잠 잘 못 주무세요?

자해 진짜 그런 거 아닌데…

담임 하긴 잘 못 주무실 만도 해요. 무슨 일이랍니까, 이게. 맘이 뒤숭숭하죠.

자해, 고개를 끄덕인다.

담임 나도 얼굴은 못 봤지만 우리 반 애라고 해서 얼마나 놀랬다고요.

자해 죄송합니다.

담임 왜 선생님이 죄송해요. 일 있어서 한 달 자리 비운 건 난데. 고생했지, 선생님은.

자해 아니에요.

담임 한 달이라지만, 한 달이 꼭 짧은 시간은 또 아니잖아요. 그죠.

자해 네…

담임 심지어 첫 반이었다고 했죠?

자해 네.

담임 첫 반은 원래 더 힘들지. 괜히 뭐 좀 더 잘해보고 싶고, 그런 맘에 정 붙이기 쉬우니까. 근데 그거 다 필요 없어요. 뭐든 적당히, 가 좋은 겁니다. 사람관계 난로처럼 하라잖아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특히 학생들이랑은 좀 그럴 필요가 있어.

자해, 대답 없이 바라보면.

담임 처음엔 나도 그 말 듣곤 좀 그랬는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알게 되더라고. 안 그럼 내가 애들한테 질려버리니까. 애들이야 학교 졸업하면 끝이라지만, 우린 퇴직이 졸업이라 몇 십 년을 다녀야 하잖아요. 관둬서 조기 졸업하거나, 짤려서 퇴학당하는 것만 아니면.

담임, 허허 웃자, 자해는 눈치껏 따라 웃는다.

담임 아무튼 내 말은 고작 1년, 길게는 3년 보면서, 우리가 걔네 인생 책임져 줄 것처럼 할 필욘 없단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요.

담임, 여기저기를 뒤적이다,

담임 파일을 어디 뒀더라.

자해 무슨?

담임 노란 색인데…

자해 아, 그거.

자해, 금세 찾아내 내민다.

담임 나보다 더 잘 아시네.

담임, 노란 파일을 훑으며,

담임 그러니까 그냥 빨리 넘겨 버리자고요.

자해, 대답 없이 가만 서 있자
담임, 자해를 보더니.

담임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또, 한 달 그거 굉장히 짧은 시간이잖아요. 서른 명 넘는 애들 이름 외우기도 벅차요, 사실. 난 두 달은 넘게 걸리던데. 성까지 다 외우려면. 근데 선생님이 무슨 수로 다 아냐고요. 그 아버님도 너무 하시지.

자해 …또 오셨어요?

담임 출근을 여기로 하시는지, 담임 어딨냐고, 또 나 찾아와서 선생이라면서 그동안 뭐했냐, 막 뭐라고 하는데, 막말로 내가 뭘 아냐고. 왔더니 이미 빈 책상만 남아 있는 걸.

자해 제가 할 말이 없어요.

담임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지금까지 실컷 떠든 이유가 없잖아요.

자해, 다시 말 없이, 멍하니 서있자,
담임, 파일을 소리 나게 탁, 접는다.
자해, 그 소리에 바라보면.

담임 내 말 들었어요? 딴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죠.

자해 아니에요.

담임 지루하단 표정인데.

자해 그런 거 아닌데…

담임 정신 차립시다. 그런 표정 할 거 없어요. 그래도 그동안 많이 의지했다면서요. 선생님을.

자해 저를요?

담임 그렇다고 하던데.

자해 그러던가요?

담임 아니에요?

자해 글쎄요.

담임 뭐, 상담을 했거나.

자해 한 적 없어요.

담임 꼭 불러놓고 하는 게 상담은 아니니까. 지나가다 우연히 툭, 몇 마디 하는 것도 상담이 될 수도 있고.

자해는 고개를 도리도리 한다.

담임 그럼, 뭐, 혼자 그렇게 생각했나보네. 학생 혼자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그럴 수 있죠.

자해 정말 그랬었나요? 의지했다고.

담임 난 학생 만난 적이 없으니까.

자해 저한테 뭐라도, 얘기한 적이 있대요?

담임 글쎄요. 난 모르지. 그냥 선생님이 모를 리가 없었을 거다, 그러기에 상담이라도 했는지 알았지, 난 또.

담임, 자해를 한 번 슥 살피더니.

담임 그렇게 맘 쓸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자해 그게…

담임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어요?

자해 아니요.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닌데…

자해, 가만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담임 이럴 필요 없다니까요. 어째, 내가 백 번 말해도 모르겠단 눈치네.

수업 내내 졸던 애들이 딱, 이럽니다.

담임, 웃으며 가만히 자리에 서 있는 자해의 등을 토닥이더니 앞문 앞에 선다.

담임 혹시 생각나는 일 있으면 저한테 얘기 해주세요.

자해 네.

담임 말 못한 거 있거나, 하면.

자해, 가만히 담임을 바라보면,

담임 그냥 혹시나. 갑자기 생각 날 수도 있는 거고. 우리 둘이 말이 다르면 꼬여버리잖아요. 그럼 학생 찾는데 어려움이 될 수 있다, 그거죠.

자해 …네.

담임 그럼 저 먼저 퇴근합니다. 선생님도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담임, 손에 든 파일을 흔들어 보인다.

담임 고마워요.

담임, 밖으로 나가면
자해는 자리에 가만 서 있다가,
꺼내 앉았던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넣는다.

3
자해,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뒷문이 스륵, 열린다.
자해는 멈춰 뒷문을 바라본다. 그러나 다시 닫히는 문.

자해 밖에 누구 있니.

그러나 조용한 교실.
자해는 가만 바라보는데, 뒷문이 다시 천천히 열린다.
은성,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선다.

자해 뭐 두고 갔니?

은성, 대답 없자.

자해 뭐 잃어버렸어?

은성,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자해, 은성을 가만 살피다,

자해 이 반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은성 …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자해 무슨.

은성, 고개를 들어 자해를 가만 바라보기만 한다.

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은성, 자해를 보다 고개 젓는다.
자해,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은성을 한참 보다, 다시 가방을 든다.

자해 갈 때, 문 좀 잠가 줄 수 있을까. 안에서 잠그고, 나가서 그대로 닫기만 하면 되는데.

자해, 대답이 없자, 그냥 나가려다,
해형의 자리 앞에 서는 은성을 보곤 멈춰 선다.

자해 그 애를 아니?

은성 네.

자해 친구야?

은성 아마도요.

자해 그럼 혹시…

은성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자해 …그런 질문 많이 받았구나.

은성 지겹게요.

자해 그래.

자해, 은성을 보다, 나가려는데.

은성 혹시…

은성, 뒷말을 잇지 않고 서있자,
자해, 멈춰 서서 은성을 바라본다.

자해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그런 질문 많이 받았거든.

은성 뭐라도 알고 싶어서 온 건데, 역시나 대답해 줄 사람은 없네요.

자해는 가방을 내려둔다.
잠시.

은성 문은 제가 잠그고 갈게요.

자해 응.

그러나 자해, 그대로 서 있고.

은성 안 가세요?

자해 그냥, 좀.

은성 저 진짜 아는 거 없어요.

자해 나도 진짜 없어.

은성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자해 글쎄, 넌 왜 안 가?

은성 그냥요.

자해 궁금한 게 있어서 왔다고 했잖아.

은성, 해형의 자리에 앉는다.

은성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요. 이러고 앉아 있는 걸 봤거든요.

은성, 말없이 그대로 앉아있자
자해, 탁자에 걸터앉아 바라본다.
잠시.

자해 무슨 생각해.

은성 아무 것도. (고개 저으며) 아무 생각도.

자해 그런 표정이 아닌데.

은성 맞아요. 그런 표정이 아니었죠.

은성, 고개를 들어 자해를 바라본다.

은성 이제 뭐가 궁금하세요. 내가 뭘 궁금해 했어야, 내가 뭘 물어봤어야 했을까요.

자해는, 해형의 책상을 가만 바라본다.

은성 이럴 줄 알았다면 뭐라도 물었을 거예요. 쓸데없는 말이라도. 그랬어야 했어요. 친구니까.

자해 친구라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은성 다 알았어야 했어요. 그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해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은성 그렇게 생각하다보니까,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근데 왜 모른 척했지. 모른 척 하고 싶었나.

자해 그렇지 않았을 거야.

은성 아님 익숙했었나.

잠시.

은성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자해, 해형의 책상을 보다 고개를 젓는다.

자해 없어. 그 학생은 늘 말이 없었으니까.

은성 한 번도.

자해 이상하지 않았어. 다르지 않았거든.

그냥, 조용한 아이라고 생각했어.

은성 (끄덕이며) 원래 잘 웃지도 않잖아요.

자해 그래. 그래서 원래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어.

은성 그런 표정으로 앉아있는 게 이상하지도 않죠.

자해 맞아.

은성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지.

자해 처음부터 그 얼굴이었으니까.

은성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편한가요?

자해, 은성을 바라본다.

자해 그게 궁금한 거니.

은성, 가만 자리에 있다, 고개를 젓는다.

은성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은성, 천천히 일어나 뒷문 앞에 선다.
은성, 나가려다 말고 멈춰서.

은성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게 궁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없는 사람 찾으러 누가 없어진 곳에 오겠어요. 어디 있는지 궁금했으면, 어디든 갈 만 한 곳으로 갔었어야 했는데.

자해 더 이상 가볼만한 곳이 없으니까.

은성 그래서 그런 게 궁금했나 봐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은성, 자해를 바라본다.

은성 대답, 해주실 수 있나요. 선생님.

자해는 그 말에 은성을 바라본다.

은성 선생님이잖아요.

자해, 대답 없이 해형의 책상을 바라본다.
은성, 그대로 멈춰있는 자해를 바라보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문을 열고 나간다.
자해,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 들어 뒷문을 바라본다.
지지직거리는 스피커 소리가 들린다.

4
자해, 여전히 탁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가방을 들고 앞문으로 나가려는데,
그때 해형, 뒷문을 열고 들어온다.

해형 선생님.

자해는 그대로 멈춰 선다.

해형 선생님.

자해 … 뭘 두고 갔었니.

해형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자해는 고개를 돌려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날 찾아왔었어?

해형 선생님.

자해 그렇게 부른 적이라도 있었니.

해형 잠이 안 와요.

해형, 책상에 엎드려 눕는다.
자해는 가만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내가 뭐라고 했었어. 뭐라고 했었니.

해형은 그대로 가만 대답이 없다.

자해 뭐라고 물었어야 했을까.

한참,
자해는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책상은 영 불편한데, 그러고 잠이 와?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해형, 움직임 없이 그대로 누워있자,
자해는 탁자 옆에 앉아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무슨 생각해? 너도 질문이 많았니.

사이

자해 역시나 대답할 사람이 없네.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

5
자해, 탁자에 엎드려 누워있다.
그때, 앞문이 열리고
담임, 안으로 들어와 자해를 본다.

담임 선생님.

자해,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담임 여기서 또 이러고 계실 줄 알았어.

자해 …언제 오셨어요.

담임 방금요. 이러고 또 안 주무셨다고 할 거죠?

자해 잠들었었나 봐요.

담임 꿈까지 꾸면서 주무시는 것 같던데.

자해 그런 것 같아요.

담임 진짜? 난 그냥 한 말인데, 진짜 대단하셔.

담임, 웃으며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자.

자해 뭐, 찾으러 오셨어요?

담임 아니, 뭐, 그냥.

자해 도와드릴까요?

담임 아뇨, 아뇨.

자해 뭐 찾으시는데요?

담임 그런 건, 저도 알죠. 우리 반인데.

자해 …죄송해요. 제가 매 번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자해, 가방을 들고 나가려하는데
담임, 자해를 막아선다.

담임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고.

자해 그럼?

담임, 말없이 서있자.

자해 하실 말씀 있으세요?

담임 그, 손님이 오셨거든.

자해 아, 몰랐어요. 죄송해요. 제가 빨리 나가…

담임 아니, 그게 내가 아니고, 선생님을 찾아온 거라.

자해 저를요?

담임 응.

자해 누가요?

담임 얘기 하고 싶다고 하시기에, 여기 있을 것 같아서.

담임, 앞문 앞에 선다.

담임 미리 말 못한 거 미안. 나도 갑작스러워서.

담임, 문을 여는데
형석, 문 앞에 서있다 안으로 들어온다.
둘, 서로를 바라보는데.

형석 안녕하세요.

형석, 다가와 손을 내민다.

형석 사라진 애 아버집니다.

자해 …알고 있습니다.

자해는 형석의 손을 보다 잡는다.

형석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자해 아닙니다.

형석 한 번 뵙고 싶어서, 약속 없이 왔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자해 …제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형석 그런 소리를 듣고자 온 것은 아닙니다.

담임은 말없는 둘을 바라보다,

형석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담임 네, 그럼 말씀 나누세요.

담임, 형석의 말에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간다.
형석, 둘러보다 맨 뒤로 밀려나 있는 해형의 책상 앞으로 간다.

형석 이 자린가요.

자해 네.

형석 진작 와보고 싶었는데, 선뜻 이 안까지 들어올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자해 …속 많이 상하시죠.

형석 말이라고 할까요.

자해 할 말이 없습니다.

형석 그러시면 안 되지요.

자해, 형석을 바라보면.

형석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자해 … 부끄럽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형석 알고 있습니다. 반을 그냥 잠시 맡으셨단 것도 알고 있고,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형석은 손바닥으로 해형의 책상을 털어낸다.

형석 전 이 밑에서 약국을 합니다.

자해 네, 알고 있어요.

형석 매번 같은 약을 사 가는 사람이 있어요. 주기적으로. 많은 양도 아니라 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근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더라고요.

자해 …앉으세요.

형석 사실 나중엔 묻지도 않고 약을 꺼냈지요. 매일 같은 걸 사 가니까, 딱히 묻지 않았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뭐가 필요한지. 약사로서, 어쩌면, 전혀 엉뚱한 약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롭습니다.

형석은 앞에 놓인 의자를 꺼내 앉는다.
자해도 탁자 옆 의자에 앉는다.

형석 선생님.

자해 네. 말씀하세요.

형석 우리 애는 돌아올 겁니다.

자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형석 아무리 약이라도 삼키지 않고 순간순간을 그냥 지나가, 많은 양이 되어버리면 독이 되어버리죠. 나는 그만 괴롭고 싶습니다. 그냥 넘겨버리고 싶지 않아요. 때문에 듣고 싶습니다. 별거 아닌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자해 저는…

자해, 말을 잇지 못하자

형석 선생님.

자해, 바라보면.

형석 선생님이시잖아요.

자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잠시.

자해 …약사시면, 약을 주시겠네요.

형석 (보다가) 그렇습니다만.

자해 다들 나아지던가요?

형석 나는 약을 주는 일만합니다.

자해 누구한테 약을 주시나요.

형석 필요한 사람에게 줍니다.

자해 그걸 어떻게 알죠.

형석 찾아와 달라고 하니까요.

자해 주지 않으신 적도 있었나요.

형석 그게 왜 궁금하시죠.

자해 어떤 사람에게 주지 않으세요?

형석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해 저는 찾아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지 않을 것 같아요.

사이.

형석 제가 지금 맞게 잘 알아들은 건가요.

자해, 대답 없자.
형석, 일어나 뒷문 앞으로 간다.

형석 맞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줄 수 없지요.

자해 제 말은 그 뿐입니다.

형석 그치만 아프면서도 굳지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좀 참으면 괜찮다고, 이런 작은 것에 무슨 약이냐 본인 의지 탓하다 큰 병을 얻는 사람도 봤고, 이런 게 뭔 효과가 있냐고 의심하는 분들도 있지요.

형석은 문을 연다.

형석 간혹 들어오는 게 무서워 돌아가시는 분들도 봅니다.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서 가시거나, 앞까지 왔지만, 그래, 먹어봐야 더 살아봐야 뭐하겠어, 하고 마음 바꾸신 분들도 계셨죠.

형석, 자해를 바라본다.

형석 맞아요. 찾아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치만 그들이 내게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를 낫게 하진 않을 거란 생각. 결국 들어와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거 하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사이.

형석 아이가 선생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나요. 뭐라도 말한 적이 있었었나요.

자해 저는…

형석 그냥 그랬던 적이 있었나요.

자해 저는…

형석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전부 야기해주기를 사실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방금 우리가 한 이야기도 전부 기억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요.

형석은 문밖으로 고개를 돌려, 숙인다.

형석 난 그냥 여길 찾아왔었는지. 정말 아무 말이라도, 뭐라도 했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게 궁금했을 뿐이에요.

두 사람 말이 없다.

형석 말없이 찾아와서 미안했습니다.

형석은 고개를 돌려 자해를 향해 웃어 보인다.

형석 가끔 이렇게 약국에도 불쑥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있지도 않은 걸 내놓으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실례했습니다.

형석,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자해는 고개를 숙인 채로 멈춰 서 있다.
형석, 밖으로 나가고,

자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도 한참을 그대로 서있다.
스피커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자해는 해형의 자리를 바라보다, 탁자 뒤로 주저앉는다.
어두워진다.

6
뒷문이 열리고,
은성, 안으로 들어온다.
담임, 뒤이어 안으로 들어온다.

담임 편하게 앉아.

은성은 의자를 꺼내 앉는다.

담임 어때.

담임은 그 앞에 걸터앉는다.

담임 학교는 재밌게 잘 다니고 있니.

은성 원래 재미는 없었어요.

담임 왜 재미가 없을까.

은성 처음부터 그랬어요.

담임 밥은 잘 먹고?

은성 그냥.

담임 오늘 메뉴 괜찮던데. 너네 맛있는 거 나오는 날 형광펜으로 그어둔다며. 우리도 그래. 다를 거 없이.

은성 네. 조금 덜 맛이 없던데요.

담임 그래도 도시락 들고 다니는 것 보다야 좋지 않니.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라고. 우리 애는 아직 초등학생인데, 급식실 공사한다고 도시락을 한 일 주일을 싸갔거든. 근데 애들끼리도 뭐가 맛있니, 없니, 같이 먹니 마니, 했나봐.

은성 네.

담임 은근히 신경 쓰이더라고. 괜히 그런 걸로 따돌림 당하거나 그럴 수 있으니까.

은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담임은 은성을 가만 살피다가.

담임 요즘 고등학생들은 어떠니.

은성 급식실 공사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담임 친구들끼린 어떤 얘기를 하니. 요즘 유행하는 말들도 많다며.

은성 전 잘 몰라요.

담임 그런 거 알고 모르는 거 가지고, 얘기하기도 하니?

은성 관심이 없어요.

담임 너무 어렵더라. 나도 애들이랑 대화 좀 하려고 하면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서 알아듣지를 못 하겠어. 아, 요즘도 친구들끼리 뭉쳐 다니거나 무리가 있거나 해? 나 학교 다녔을 때는 우르르 다니는 거 좋아하고 그랬거든. 홀수로 다니는 건 또 싫고. 둘둘, 짝지어야 하는 게 있으면 괜히 소외감이 드니까.

은성 저는 복잡한 거 싫어해서.

담임 짝수로 다녔어? 둘이?

은성 이제 홀수요.

담임 넷이었구나.

은성 아니요. 둘.

담임, 바라보면.

은성 이제 혼자요. 그러니까 따돌리고 그런 거 못 해요. 그런 거 없었어요.

담임 그랬구나.

담임, 은성을 가만 바라보는데
은성,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담임 무슨 고민이 있니.

은성 어떤 고민이요.

담임 그냥 어떤 것이든.

은성 그니까, 저의 고민이요, 아님.

담임 너에게 묻고 있잖아. 너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야.

은성 제가 궁금한 게 아니라, 제게 궁금하신 거 아니었나요. 서로 혼자 다니는 걸 더 좋아해서 친해진 거라 저도 잘 몰라요.

담임 그럼 만나면 뭘 했어?

은성 핸드폰을 만지거나, 손톱을 뜯거나.

담임 손톱?

은성 학교에선 핸드폰을 내야 하니까. 만질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담임 그럼 서로 무슨 얘기를 해?

은성 아, 잘못 뜯었다. 피나네. 휴지 있냐. 아프다.

담임 아프다.

은성 짜증난다.

담임 짜증난다.

은성 존나 아프다.

담임, 은성을 바라보면

은성 존나 짜증나.

은성, 담임을 보더니.

은성 말씀하셨던 애들 말로요. 그렇게 말했어요.

담임 그거 말곤 그 얘길 한 적은 없어?

은성 무슨 얘기요?

담임 방금 말했던, 뭐, 어쩌고, 짜증나, 아파, 그런 것들 말이야. 손톱 뜯을 때 말고.

은성 모르겠어요. 서로 별 말 하지 않아서.

담임 선생님들 짜증난다, 뭐 그런 건?

은성, 가만 담임을 보면

담임 했구나.

은성 별 얘긴 안했어요.

담임 다른 학교 얘기는? 다른 친구들 얘기라든가.

은성 아뇨.

담임 선생님 얘기만 했구나.

은성, 대답 없자,

담임 혹시 내 얘기니?

사이.

담임 농담이야. 난 본 적도 없잖아. 그치?

은성 네.

담임 근데 넌 뭐 진짜 그런 것처럼 그래.

은성 농담인 줄 알았어요.

담임 그랬구나. 그, 마지막으로 본 적은 언제였니. 어디였어?

은성 교실이요.

담임 다른 반이었지?

은성 네.

담임 네가 이 반에 온 거야? 아님.

은성 제가 왔어요. 매번 그랬어요. 할 말이 있던 건 매번 저였으니까.

담임 주로 만나면 무슨 말을 했어?

은성 그냥 제 개인적인 얘기들이었어요.

담임 고민 같은.

은성 네.

담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나눴니?

은성 일방적이었어요. 난 말하고 걘 듣고.

담임 별 말없이?

은성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그 정도.

담임 먼저 말을 꺼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은성 그러게요.

담임 친한 친구들끼린 허물없이 하잖아.

은성 아니었나 봐요. 친한 게.

담임 친했으니 둘이 다닌 게 아닐까.

은성 아님 친구가 아니었던지.

담임은 은성을 가만 보는데.

은성 아니었던 것 같아요. 친구라면 이렇게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은성은 담임을 가만 바라본다.

은성 제 생각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친군데. 어쩌면 너무 내 얘기만 했는지 몰라요. 걘 적어도,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몇 가지 이유를 얘기 했을 거예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친구니까.

담임 다음에 우리 더 얘기할까?

은성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친구면. 친구면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담임 이만하자.

은성 그렇게 묻고 싶으시면 그렇게 물으셔도 돼요. 차라리 그럼 저도 뭐라도 할 말이 있을 거예요.

담임,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두드린다.

담임 다음에.

담임, 뒷문으로 가는데.

은성 너무 제 얘기를 했죠. 쓸데없이.

담임 아니야. 생각한다고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집으로 가.

은성,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담임, 은성을 보다, 나간다.
은성은 가만 책상에 엎드린다.

은성 짜증나.

은성, 엎드린 채 한 손으로 손톱을 툭툭 뜯는다.

은성 짜증나, 진짜.

점점 어두워지면,
밖으로 빗소리가 들린다.

자해, 들어와 밖을 바라본다.
은성도 비슷하게 몸을 일으켜 밖을 본다.

비, 한참 계속 되고,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

7
담임과 형석,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앉아있다.
자해는 탁자 옆에, 떨어져 서있다.
담임은 노란 파일을 꺼내, 형석의 앞으로 펼쳐 내민다.

담임 알고 계셨나요.

형석은 앞에 놓인 파일을 본다.

담임 매년 학기 초에 작성하는 건데, 채우지 않은 칸들이 많더라고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여기도.

담임은 형석 앞에 놓은 파일을 손으로 몇 가리킨다.

담임 아직 1학년이라, 목표 학교 같은 것들은 안 쓰는 친구들은 많지만, 부모님장래희망만 적고 본인 칸은 이렇게 비워두고, 취미나 특기, 이런 것도 비워둔 것 보면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형석은 파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자해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담임 약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형석 그냥 얘기 했던 겁니다.

담임 아버님 따라서.

형석 네. 별 일 없다면, 이어 하면 좋으니까요.

담임 맞아요. 처음부터 자리 잡으려는 것보다 훨씬 고생이 덜 하죠.

형석 그 뿐입니다.

담임 대화를 하였었나요. 이걸 적으면서.

형석 아니요. 혼자 적은 모양입니다.

담임 평소에 뭐 하고 싶다거나, 되고 싶다거나 그랬던 것은 없었나요?

형석 동네에 약국이 없어서 늦은 시간까지 합니다. 들어가면 새벽이고, 자고 있어서 별 다른 얘기를 나눈 적이 드뭅니다.

담임 혼자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형석, 말없이 파일을 본다.

담임 성적 좋지 않은 건 알고 계셨나요.

형석 잘 하지 못한 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담임 중학교까지는 그냥 배정이었지만, 성적순으로 고등학교 배정되면서, 조금 더 안 좋아졌던 것 같아요.

형석 그렇군요.

담임 제 생각에는 약사를 하기엔 무리한 성적 같아요.

형석 그렇네요.

담임 하지만 아직 1학년이라 무리하단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학생도 약사가 하고 싶은 거라면.

형석은 여전히 파일을 바라본다.

담임 따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나요?

형석 아니요. 딱히 그런 것들이 필요하단 말이 없었습니다.

담임 그럼 하교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겠네요.

형석 아마도 그럴 겁니다.

담임 형제가 따로 없다고 적혀 있는데.

형석 네. 혼잡니다. 제가 혼자 데리고 있어요.

담임 가정에서 혹시 고민이 있어 보이거나, 고민이 있을 일은 없었나요?

형석 …두 몫을 하긴 제가 부족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서로 건조해서,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속 썩이는 아이는 아니라, 크게 혼을 내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담임 집에선 어떤 아들이었나요,

형석 …글쎄요.

담임 아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로서.

형석, 고개를 드는데
멀리 서있는 자해와 눈이 마주친다.

형석 모르겠네요.

담임 그 날도 별 이야기 없었나요?

형석 대화가 별로 없었다고 말씀드렸지만, 전 날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생각해보니 먼저 와서 무슨 일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담임 착한 아들.

형석 그렇다고 생각했나 봐요. 별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말이 없었으니까. 근데 지금 이걸 보니 알겠네요.

형석은 자해를 바라본다.

형석 내가 몰랐네요. 아무 것도. 아버지로서.

형석, 자리에서 일어난다.

형석 약국을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될 것 같아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담임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담임, 고개를 살짝 숙이자 자해도 뒤따라 살짝 고개를 숙인다.
형석도 둘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자해와 형석, 짧은 눈이 마주치고,
형석, 천천히 뒷문으로 가 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담임, 의자에 길게 자세를 늘어뜨리고 앉는다.

담임 힘들다.

자해는 다가와 파일을 정리한다.

자해 괜찮을까요.

담임 괜찮아야죠.

자해 학생 아버지요. 안 그래도 마음 복잡하실 텐데.

담임 그거 좀 덜어드리려고 얘기한 거예요. 이유를 계속 찾고 싶어 하셨잖아요.

자해, 말없이 서있자.

담임 학생들한테 마음 주더니, 이제 학부모까지 신경 쓰는 거예요?

자해 그런 거 아니에요.

담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 화살이 학교로 오고, 선생님한테 오는 거예요.

자해 그냥… 이런 이유들이 아닐 수도 있는데, 다 얘기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담임 성적이나 장래 얘기 같은 거 얼마나 중요한데요, 학생한테. 거의 전부예요. 그래서 그게 마음처럼 안 되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중요해야만 하는 것도 맞고요, 학생이라면.

담임은 자해에게 있는 파일을 가져다 든다.

담임 그러니까 이런 거 있다고 일찍 좀 알려주지. 성적이나 적성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자해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담임 알면서 말 안 해준 거랑 같은 거예요.

자해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담임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다 진짜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스스로.

자해, 담임을 바라보면,
담임,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정리한다.

담임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으면, 선생으로서 생각해야죠. 사람 사람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감정의 끝이 없어요.

담임, 자해를 보더니.

담임 또 심각한 표정 하고 계시네.

자해 그랬나요.

담임 언제쯤 우리 선생님이 이 일에서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차라리 막 욕을 하시는 쪽이 편할 겁니다. 대신, 학교 밖에서.

담임,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자해는 그대로 책상에 걸터앉는다.
점점, 어두워진다.

8
뒷문이 열리고,
은성, 안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은성은 가만히 허공을 보고 있는 자해를 가만 바라본다.
잠시.

은성 무슨 생각하세요.

자해, 걸터앉은 채로 은성을 바라본다.

자해 언제 왔어.

은성 방금요.

자해 뭘 또 두고 갔어?

은성, 고개를 도리도리한다.
은성은 안으로 들어와 자해 마주 편에 걸터앉는다.

자해 하긴, 궁금한 게 있어서 왔다고 했지. 아직 답을 못 찾았나보네.

은성 선생님은 여기 왜 이러고 계세요.

자해 나도 궁금한 게 있나봐.

은성 어떤.

자해 어쩌면 너랑 같은 거.

둘, 잠시.

은성 그럼 또, 여기 대답할 사람이 없네요.

은성, 어깨를 으쓱 해 보인다.
자해는 은성을 보더니, 웃는다.

자해 그러게.

둘, 다시 말이 없다,

자해 학교 재밌어?

은성 할 말 없으시죠.

자해 티났니.

은성 그냥, 와야 하니까 오는 거죠.

자해 그렇구나.

은성 선생님은요. 재밌으세요?

자해 나? 글쎄. 선생으로서 이런 말해도 되나 싶은데, 재미없지.

은성 근데 왜 선생님이 되셨어요.

자해 그러게.

은성 학생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선생님은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자해 그냥 이 정도로 공부했던 학생이었어.

은성 재미없던데, 공부.

자해 나도 재미없었어. 선생님 되면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학교 오니까 또 공부해야 되는 거 있지. 왜 굳이 학교로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겠어.

은성 선생님은 되지 말아야겠다.

자해 그래. 급식도 여전히 맛없고.

은성 그니까요.

자해 사람들도 힘들어. 누구랑 같이 다니고, 그런 신경 쓰는 거 학교 졸업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선생님인데, 선생님인데도 그런 게 있더라고.

은성 선생님은 누구랑 친하세요.

자해 나, 난 사실, 그냥 혼자 있는 게 좋아.

은성 따돌림 당하시는 건 아니죠.

자해 은근히 그런 거 있는 것 같기도 해.

은성 괜찮아요?

자해 괜찮아. 사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잖아. 나이 다 먹고 학교에서 따돌림 당한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선생이.

은성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자해, 고개를 끄덕인다.

자해 넌 어때. 잘 지내?

은성 저요?

자해 응.

은성 저도 혼자가 편해요.

자해 친구 없구나.

은성 이젠 그렇죠.

은성, 고개를 끄덕인다.

은성 걔도 그럴 거예요. 그게 신경 쓰여요.

잠시.

은성 저는 불만이 많아요. 궁금하시지는 않겠지만,

자해 궁금해.

은성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요. 어렸을 때부터. 위로 형이 있고 아래로 동생이 하나 있거든요. 형은 첫 째로서 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동생은 막내로서 해야 하는 게 있는데, 전 딱히 없어요. 둘 다 내가 부럽대요. 넌 좋겠다, 형은 좋겠다, 이런 거 안 해도 되니까. 맞아요. 중간을 한다는 건, 그냥 가만히 있는 거랑 같으니까.

자해 예를 들자면?

은성 딱히 배려하지도 않고, 배려 받지도 않고. 책임을 지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그냥 그런 것들에서 조금은 자유롭죠. 형이니까 너가 해, 이런 건 막내가 해야지, 하는 소린 있어도, 이건 둘째가 해라, 그런 것은 딱히 없으니까.

자해 그렇지.

은성 근데 너가 무슨 불만이 있어.

자해, 은성을 바라보는데.

은성 제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에요.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근데 저는 불만이 많아요. 많았어요. 그치만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아, 나는 그냥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구나. 어렸을 때부터, 아님 태어날 때부터.

자해 이런 얘기를 해 본 적 있니. 동생이나, 형이나…

은성 네.

자해 뭐라고 하던데?

은성 부럽다.

은성은 자해를 바라본다.

은성 부럽다. 딱 그렇게 말했어요. 걔도.

잠시.

은성 화가 났어요. 저는 불만이 많잖아요. 그냥 그 말이 불만이었어요. 힘들겠다, 고생한다, 그냥 그런 말을 해줄 순 없나, 친구로서. 그래서 묻지 않았어요. 그 날.

은성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은성 이렇게 앉아있는데도…

자해 괜찮니.

은성 누구나 그 얼굴을 봤다면 물었을 거예요. 무슨 일 있냐고. 근데 하필 그게 나였고, 나는 유치하게, 묻지 않았어요.

자해 친구였으니까. 친구니까, 서운했을 수 있어.

은성 그래서 매번 내 얘길 들어줬으니까 나도 한 번은 물었어야 했어요.

사이.

자해 힘들었겠다.

은성은 고개를 들어 자해를 본다.
잠시.

자해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자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

은성 네. …그렇게 말해줬어야 했어요.

둘, 한참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밖,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

9
스피커에서 방송 들린다.

방송 벌써 1-2반 친구가 사라진지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를 위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래봅시다.

자해, 탁자에서 본인의 파일들을 꺼내 가방에 담는다.
담임, 그 뒤에 서서 자해를 바라보고 있다.

담임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요?

자해 그런 거 아니에요.

담임 이렇게 가시면 내가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자해 죄송해요.

담임 학기 중에 이렇게 가시는 게 어디 있어요. 남은 학생들도 있는데…

자해 선생님으로서 책임감 없단 거 알아요.

담임 그런데…

자해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별 일이 아니지 않아서요.

담임 지난번 제 얘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 맞네.

자해 선생님 때문은 아니에요.

담임, 가만 자해를 바라보는데.

자해 잠이 안와요.

자해는 멈춰, 담임을 바라본다.

자해 그때, 교실에서 진짜 잔 거 아니에요.

담임 알겠어요.

자해 진짜요.

담임 믿어드려요.

자해 간신히 잠들어도 금세 깨요.

담임 이상한 꿈꾸며 주무시더니.

자해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별 일이 아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분히 힘들만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담임 그렇게까지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자해 알아요. 그 날, 선생님 저한테 문자도 주셨잖아요. 힘든 만큼 남은 학생들 위해서 버티자고. 선생님은 선생님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담임 그렇게까지 기억을 해주시네요.

자해 그게 맞는데, 저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인가 봐요. 여기, 교실에서 나가고 싶어요. 나가서,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해는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담임 그러면서 그 집 주소는 왜 알아보셨대요. 이제 선생님 반 아이도 아닌데.

자해 아니라고 아니었던 건 아니니까. 그냥 한 번 뵙고 싶어서요.

담임 학부모까지 신경 쓰시는 거 맞네.

자해 저 진짜 피곤하게 살죠.

담임 말해 뭐해요.

자해 처음부터 그랬어요. 어렸을 때부터. 성격자체가.

담임 고칠 수도 없네.

자해 그냥 가서, 밖에서 잠깐 얘기라도 하고 싶어서요. 그날 그렇게 집으로 가신 게 너무 신경 쓰여서요.

담임 나 진짜 나쁘네.

자해 그런 게 아니라, 집을 못 견디실 것 같아서요. 잠깐이라도. 그냥.

담임 그 분도 선생님 연락처를 묻긴 했어요.

자해 그랬나요.

담임 연락 못 받으셨어요?

자해 네. 안 하셨어요.

담임, 정리하는 자해를 보다가.

담임 도와드릴까요.

자해 괜찮아요.

담임 하긴, 저보다 더 잘 아시니까.

자해는, 멀뚱히 서있는 담임을 바라본다.

자해 저 괜찮아요.

담임 내가 이래요. 그런 말을 잘 못해요.

자해 다 했어요. 문은 제가 잠그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담임 그래요.

담임, 자해를 보다가,
앞문으로 간다.
담임, 정리하는 자해를 몇 번 보다, 문을 닫고 나간다.
자해는 정리를 마치고 일어나려다, 자리에 다시 가만 앉아본다.
한참.

10
밖, 어두워지고.
자해는 가방을 들고 앞문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자해, 해형의 자리를 한 번 보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뒷문 열리더니
해형, 안으로 들어온다.
자해는 그대로 멈춰 선다.
해형, 곧바로 책상으로 가 엎드려 눕는다.

자해 나를 찾아온 거야?

자해는 해형을 가만 바라본다.

자해 찾아왔었어?

자해는 대답 없는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언제까지 있을 거니. 얼마나 그렇게 있었어. 그렇게, 얼마나 있을 거야.

자해는 해형을 바라보다, 탁자 옆에 앉는다.
한참.
자해는 그렇게 한참 해형을 가만 바라보는데,

해형 선생님.

자해 …선생님.

해형 선생님.

자해 그래.

해형 잠이 안 와요.

해형은 뒤척인다.

해형 왜 잠이 안 올까요.

자해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여긴, 불편하잖아.

해형 집에서도 그래요. 똑같아. 집에서도 잠이 안 와요.

자해 왜 일까.

해형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더 잠이 안 오고.

자해 고민이 있니.

해형 이유가 없단 게 고민이에요. 이유가 없어서 괴로워요.

자해, 해형을 가만 바라보고 있다.

해형 선생님.

자해 …응.

해형 선생님은 이유를 알까요?

해형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해형 아세요? 내가 왜 이런지.

자해는 말이 없다. 해형은 미소 보인다.

해형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잖아요. 그쵸. 선생님.

자해 그래.

해형 선생님이잖아요.

자해 맞아.

해형 그래도 모르는 게 있으시겠죠. 선생님이라고 다 아는 게 아닌데… 대답을 못 들을까 봐 못 묻겠어요. 궁금한데 못 찾아가겠어요.

해형은 다시 자리에 눕는다.
자해는 가만 해형을 바라본다.

해형 선생님도 이런 적이 있었을까요.

자해 나도 잠이 안 왔어.

해형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해 나도 이유를 몰라서 괴로웠어. 그래서 여길 나가는 거야. 알 수 없는 게 너무 괴로워서. 그래서 여길 나갈 거야.

해형 선생님.

자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찾아올 수 없어.

해형 선생님

자해 이제 그렇게 부를 수 없어.

해형 선생님.

자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돼.

자해는 움직임 없는 해형을 바라본다.

자해 있잖아.

사실 나는 아직도 네 얼굴이 잘 생각이 안 나.

자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해 사실 너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지도 않아. 나는 계속 여기 있었으니까. 이유를 나에게서 계속 찾았으니까. 혹시 너도 같은 이유로 여기 있는 거라면, 나는 너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자해, 앞문으로 간다.

자해 있잖아.

해형, 고개를 들어 자해를 본다.

자해 나는 이제 너한테 미안한 게 없어. 너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자해, 문을 연다.

자해 언제까지 있을 거니. 문 잠가야 해. 그러니까 나가줘. 나가줘, 해형아.

해형은 자해를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해형 제 이름을 아실 줄은 몰랐어요. 매번 거기 맨 뒤에 있는 학생, 23번 학생, 그 옆에 있는 학생으로 불렀으니까.

해형은 뒷문 앞에 서 자해를 본다.

해형 저도 선생님 이름을 알아요.

자해, 해형을 바라보는데.

해형 부를 일이 없었을 뿐이에요.

해형,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자해는 해형이 나가고도 뒷문을 한참 바라본다.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와
스피커로 들리는 지지직거리는 소리 뒤섞이고.
한참.
점점 어두워지며,
막.


 

  <당선소감>

 

   쓴다는 건, 밤을 견디는 일 어제를 버텨 오늘이 왔다

  첫 줄은 늘 어렵습니다. 그간 어떤 날,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모두 적으면 일기장이 될 것 같아서 미련하게 어제를 버텨 오늘이 올 수 있었다고, 다행이라 적겠습니다. 결국, 밤을 견뎌야 하는 일 같습니다.

  어렸을 적, 방에 가족을 불러놓고 동생과 말도 안 되는 공연을 한 기억이 납니다. 외우지도 못한 대사를 스케치북에 적어 읽으며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저도 기억을 못 하지만, 본 사람 아무도 기억을 못 합니다. 그럼에도 그때, 스스로 의심 하나 없이 무작정 쓰던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할지조차 고민이 될 때, ‘너는 죽이고 싶은 사람도 없니’ 교수님께 들었던 그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러곤 괜찮다고 넘겼던 일에 괜히 분노합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번, 상자에 귤 하나 썩은 걸 그냥 두었더니 몇 개가 더 상해 버렸어요. 관계 속에서 살면서 사람에게 상해버린 사람들에게, 박수는 못 받아도 기억되는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좋은 작품들 속, 저의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이야기, 오가는 술잔으로 나를 생기 돋게 해준 사람들, 친구들 고마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께도 감사합니다. 읽는 사람이 있어,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특히, 늘 의지가 되어주는 가족에게 매우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딸, 언니로서 조금은 자랑이 되었으면 해요. 하고 싶은 것을 해서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첫 줄만큼 마지막을 내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저 성실하게, 끝까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992년 충주 출생
●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심사평>

 

  대화·침묵 교차한 구성, 묘한 박진감 돋보여

  응모작은 여전히 비슷한 세상을 담고 있었다. 질병, 실직, 죽음, 가족 해체, 주식과 코인, 세대 갈등, 혐오와 차별, 인공지능 등 현실에 나타난 다양한 현상을 통해 탐욕과 위선, 인간과 기술의 관계, 사회에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과 부조리한 삶 속에서의 무기력함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다수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여된 채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스케치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본심에는 3편이 올랐다.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전국학생그림대회에서 우승한 그림이 학교 이사장의 비리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이를 철회시키려는 학교 당국과 부당함을 제기하는 학생의 논쟁을 통해 공정과 정의가 소실된 세상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늑장’은 의무적으로 ‘희망’을 죽여야만 국가의 성실한 인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희망을 거세당한 세대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씁쓸하게 묘사한다. 두 작품 다 장면 구성과 사건 전개, 인물 간의 충돌을 안정감 있게 구축하고 있으나 소재의 기시감, 극적 행동의 비약, 익숙한 결말 등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빛나는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당선작 ‘착해빠져선’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한 학생을 둘러싸고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관계와 소통의 불가해성을 섬세하고 솔직하게 펼쳐놓는다. 인물들 간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는 대화와 침묵으로 생성되는 묘한 박진감이 돋보였다. 다소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미덕이 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큰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여정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심사위원 : 임선옥, 오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