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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두 여자 / 장희재

[시놉시스]

  상인동 주택단지, 새로운 입주민 ‘선화’가 나타난다. 홀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선화. 동네 여자들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한다. 동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지난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여자들. 건넛집 ‘호영’의 아들 ‘재원’이 같은 반 친구에 의해 살해된 일이다.
  선화, 함께하지 못한 호영을 따로 초대하지만 호영은 약속의 날, 밤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제 슬픔을 털어놓는 호영에게 선화, 저 역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끝에 선화가 아들을 죽인 살인범, ‘민서’의 엄마임을 깨닫는 호영.
호영은 저를 목표로 이사 온 선화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외면한다. 하지만 호영, 손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재원의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분노로 가득 차 선화를 찾아간다. 그러나 선화, 호영의 예상과 달리 사죄가 아닌 한을 토해낸다. 피해자로 슬퍼만 하고 살아가는 재원의 가족들을 견딜 수 없었다는 절규다. 긴 시간 재원의 괴롭힘을 겪은 민서의 고통을 마주한 호영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선화가 민서의 엄마임을 알게 된 동네 여자는 고민 끝에 호영을 찾아 그를 알리고, 호영은 여태 자신의 아픔을 불길함으로만 치부하던 주민들의 이중성에 분노한다. 호영의 경고에도 사실을 밝히는 동네 여자. 주민들이 한순간 선화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를 외면했던 호영, 끝내 선화의 편에서 사람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난한다.
  재원의 생일. 정성스레 아들의 생일상을 챙긴 호영은 선화에게 민서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 부탁한다. 선화의 접견에 한 번도 응하지 않던 민서는 호영을 만나고, 각자의 슬픔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상인동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호영은 선화를 찾아가 작별을 청하고 그녀와 자신을 두 어머니가 아닌 두 여자로 칭한다. 동네를 떠나는 호영의 눈앞에 재원의 환상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민서는 또다시 선화의 접견을 거부하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 호영 (52, 재원의 엄마)

  성공한 워킹맘으로, 완벽한 아들의 엄마로 행복하게 살았다. 다정한 남편과 아름다운 집, 언제나 호영과 가족들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재원의 피가 거실 마루에 스며든 그 날, 호영의 삶도 온통 얼룩진 것이 되었다. 남편마저 견디지 못하고 떠난 집에 홀로 머물며, 호영이 하는 일은 늘 재원의 방을 정리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재원의 생전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게 쓸고 닦고 가꾸는 일이다.
  그런 호영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호영을 아이 잃은 엄마로도, 홀로 남겨진 아내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호영은 그간의 설움을 모두 풀어내며 그녀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만... 자신의 모든 불행이 그녀에게서 탄생했음을 알게 된다.

- 선화 (46, 민서의 엄마)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 민서를 키웠다. 외롭게 남겨둔 아들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 아픈 가시였지만 동시에 선화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선화, 어느 순간 민서의 변화를 알아챈다. 하지만 그를 사춘기 한때의 방황이라 생각한 선화는 민서의 사인을 흘려보내고, 결국 어린 나이에 살인자가 된 민서는 끝내 선화의 면회 접견에 응하지 않는다.
  선화, 멀지도 않은 옆 동네 상인동에 집을 얻는다. 그곳에는 재원의 엄마 호영이 살고 있다. 선화, 여전히 슬픔에 젖은 호영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 기획 의도

  호영과 선화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겨우 지고 살아간다. 소중한 아들을 잃고 그 지독한 상실을 인정할 때쯤, 잔인하게도 그 너머의 진실이 다가온다. 우리는 끔찍한 슬픔을 어떻게 견디는가. 그러는 한편, 슬픔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을,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직면할 수 있을까.
  아들을 잃은 두 여자는 제 자식의 불행에 절망하면서도, 명확히 상대를 탓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살아있었을 아이와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아이. 그 고뇌는 또 하나의 밧줄이 되어 목을 죄어오고,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숨통을 막는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우리도 딜레마에 빠진다. 죽음은 생전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가. 한편, 살인은 이해받을 수 있는 복수인가. 재원은 민서를 괴롭힌 학교폭력의 가해자였지만 민서의 살인에 의해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민서는 오랜 피해자였지만, 한순간 가해자가 되었다.

  누군가의 가장 사적인 슬픔은 우리에게 얼마나 사소한 사실이 되고 마는가. 그저 뉴스의 한 꼭지, 인터넷 소식란의 한 줄이고 말 사건들이 각각의 인생에는 그 얼마나 개인적인 슬픔인지. 호영과 선화 역시 과거에는 타인의 불행에 짧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제 삶으로 돌아갈 보통의 사람들이었지만 한순간의 운명에 얽혀 당사자가 되었다.
  서로에게는 서로를 이해할 상대방이 있지만, 만약 재원에게 민서가 민서에게 재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세상 가장 아픈 악연으로 엮인 두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명 제 아들을 죽인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제 아들을 살인자로 만든 아이의 죽음에 강한 슬픔을 느끼는 두 여자를 우리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원고]

S#1. 도로 위 (낮)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신호를 받아 멈춰 선다. 차 안, 운전석의 기사와 조수석의 선화가 나란히 보인다. 아직 젊은 티가 나는 남자가 앞을 보다가, 힐끗 옆자리 선화를 살핀다.

선화 ... (창밖에 시선, 무표정)

다시 신호가 바뀌고 트럭이 출발한다. 내비게이션 화면이 ‘상인동’으로의 진입을 알린다.

선화 (그를 보는)

  동네를 살피며 운전하는 기사의 모습과 가만히 내비 화면을 내려다보는 선화가 한 데 보이는 풍경 그대로 차체가 멈춰 선다.

선화 (천천히 눈을 감는)

  기사는 곧바로 차에서 훌쩍 내리는데, 선화는 움직이지 않는다.

S#2. 상인동, 선화의 집 앞 (낮)

  깔끔히 정돈된 도로, 적당한 크기의 주택들이 줄지어 선 동네. 새 짐이 들어오는 집 앞에 세 여자가 기웃댄다.

연정모 터무니없이 비싸게 내놨더니만, 팔리긴 팔렸나 보네.
강석모 1년을 비워두더니...
수호모 (고개 쭉 빼고) 짐이 별로 없다. 저 용달 하나로 되나?

  선화, 트럭에서 상자를 들고 돌아 나오다가 여자들과 마주친다. 여자들 ‘!’ 놀라 눈 동그랗게 뜨는데... 선화, 말없이 집으로 들어간다. 여자들, 잠깐의 정적 후에 하! 어이없다는 웃음소리와 함께 빈정이 상해 돌아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선화(E) 저, 안녕하세요!

  선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웃음으로 다가간다. 여자들, 잠시 멍하니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으로 낯을 바꾸며 돌아온다.

연정모 안녕하세요~ 너무 반가워요!
선화 새로 이사 왔어요. 잘 부탁드려요.
수호모 부탁은 저희가 드려야죠.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석모 어서 오세요, 어서. 정말 너무 잘 오셨어요.
선화 감사합니다.

  여자들, ‘그럼 그렇지.’ 언제 그랬냐는 듯 화기애애하다. 속이 편안한 표정으로 선화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수호모 아니, 근데 이삿날 어떻게 혼자... 바깥분이 많이 바쁘신가보다!
선화 (옅은 웃음)
강석모 (떠보듯) 아아! 돈 버니라 바쁘시구나! 이 집이 꽤 비싸게 나와서... 한참 안 팔리고 있었는데.
연정모 그거다. 돈 버느라, 일하시느라 바쁘구나!

  선화, 빙그레 웃음으로 잠시 말을 고른다. 여자들, 호기심 가득해 말을 기다리면.

화 즈이 바깥분은 돈 벌러가 아니라 저 멀리 가셨구요. (손짓 하늘로)

  여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손끝을 따라간다.

선화 나는 돈을 아주 조금 번답니다. (웃음 후에) 무리 좀 했어요. 전세로.

  정적이 지나간다. 여자들, 아... 로 선화를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호모 그러시구나. 그렇구나!
연정모 난 또, 것도 모르고...
선화 (이해한다는 미소)
강석모 대단하세요... 저 같으면... (말을 잇지 못하면)
선화 (얼른) 그럴 것 없어요. 애 아빠 간지가 벌써 언제인데요. 괜찮습니다.
강석모 어머! 아이는 몇 살이에요? 학생?
선화 ... (잠시 보다가) 스물, 하나예요.
강석모 어머, 대학 들어갔겠구나!
선화 ...

  선화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지만 여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연정모 (우는체하며) 부럽다, 너무 부러워요.
수호모 난 요즘 제일 부러운 게 대학생 엄마들이잖아요...
강석모 (웃으며, 눈짓으로) 여기 애들이 이제 고2거든요.

  선화, 웃음으로 끄덕이며 여자들의 말을 듣는 사이... 뒤에서 기사가 빼꼼 나와 눈치를 본다. 여자들이 선화 등 뒤의 기사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선화 (기척에 돌아보면)
기사 사모님, TV 어느 방향이셨죠?
선화 아, 네. 잠시만요.
연정모 어머, 내 정신 좀 봐. 짐 정리 한창 바쁘실 텐데 이렇게 오래 잡아놨네.
수호모 그러니까... 이사 잘 마치시구요. 필요한 거 있음 꼭 말씀해주세요.
강석모 저희 얼른 가볼게요. 또 봬요!
선화 정말 반가워요. 정리되면 언제 한 번 모실게요. 늦지 않게요!
수호모 정말요?
연정모 너무 좋죠~

  여자들과 선화, 서로 간에 꾸벅대며 멀어진다. 선화, 잠시 바라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간다.

S#3. 동 / 호영의 집 근처

  여자들, 선화의 집을 번갈아 뒤돌아보며 여전히 조잘거린다.

강석모 엄마 사람 괜찮다. 수더분하니, 막 나대지도 않고.
연정모 정말 언제 한번 가서 모이자. 말 좀 통하나 보게.
강석모 음, 그래도 되고.
연정모 (생각하다가) 그래. 전세구나. 어쩐지...
수호모 (웃음, 왠지 고소한) 집이 그 가격에 팔릴 리가 없지, 팔릴 리가!
연정모 결국 포기하고 전세 놓을 거를, 그 집은 왜 그렇게 미련을 떠나 몰라.
강석모 아쉬울 거 없다 이거지. 어디라더라? 사는 데가 저기 어디고 여긴 세컨 하우스라며.
연정모 참, 나도 꿀릴 것 없이 산다면서도, 이 안에서도 다 사정 다르다니까.

  그 앞에 승용차 하나가 부드럽게 지나가 호영의 집 앞에 멈춰 선다. 여자들 짠 듯한 정적에 ‘...’ 로 바라보면. 호영, 운전석에서 내려 여자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자연스레 집안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에, 누군가 하! 웃음을 흘리고 삐빅. 소리를 내며 잠기는 승용차.

연정모 나, 참.
수호모 아주, 찬 바람이 분다. 찬 바람이 불어...
강석모 쉿, 들려!
연정모 들으라지! 그래야 여기 사람 있는지를 알지. 우리가 무슨 유령이야, 귀신이야! 본 체도 안 하고 증말...
강석모 아유, 이 사람 또 왜 이래! 가자, 가.
연정모 이러는 거 아니지!

  연정모, 겨우 등 떠밀려 호영의 집 앞을 떠난다.

S#4. 선화의 집, 거실 (낮)

  창밖으로 그런 호영과 여자들의 사태를 지켜보는 선화의 뒷모습. 여자들이 사라진 호영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사라지는 호영의 모습 보인다.

선화 ... (알 수 없는 감정의 무표정)
기사 (뒤에서 나타나) 사모님. 서랍 정리는 따로 요청 안 하신 것 맞죠?
선화 ...
기사 ...?
선화 (돌아보며, 옅은 미소) 네, 맞아요. (하다가 기사를 보고) 아고, 잠시만요. 주스 한 잔 내올게요.
기사 (웃고) 감사합니다.

  선화, 부엌으로 가며 미소를 지운다. 기사,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집안을 둘러본다.

기사 (흐뭇하게) 집이 참 좋네요. 두 분 살기에 넉넉하니 딱이겠어요.

  선화, 미소 띤 얼굴로 가져온 주스를 전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 뒤로 보이는 액자. 다정한 모자 실루엣,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S#5. 연정의 집 앞 (저녁)

  주차공간에 세단이 멈춰 서면 조수석에서 연정이 내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뒷좌석 문이 열릴 때, 수호네 대문이 열리며 수호모 얼른 나온다. 연정부, 운전석에서 내려 마주치면 미소.

수호모 아유, 아버님. 오늘도 너무 감사해서 어째요. 요즘 병원 바쁘신 거 다 아는데...
연정부 별말씀을 다 하시네. 항상 우리 애들 등교 도와주시는데 제가 더 감사하죠. 그 꼭두새벽에... 저라면 못합니다. 형님 대단하신 거예요!
수호모 (손 저으며) 대단은요. 어제도 술을 얼마나 먹고 들어왔는지...
연정부 (하하, 크게 웃는)
수호 엄마는 동네에 아빠 흉 좀 보지 마.
수호모 그게 팩트인 걸 어떡하니.

  수호모, 수호의 가방을 전해 받는다. 수호의 어깨 털어주며 가볍게 흘겨보는 수호모.

연정부 수호야, 굿나잇!
수호 (씩 웃으며, 친밀한) 들어가세요.
수호모 (흐뭇한) 얼른 들어가 보세요. 연정 엄마 오늘 바깥 분 좋아하는 거 준비하시던데.
연정부 그래요? 뭐, 또 갈치겠지...
수호모 (하하 웃고) 가자, 우리도 밥 먹자.

  연정부와 수호 모자, 인사를 주고받은 후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S#6. 동네 전경 (밤)

  거리를 따라 상인동의 풍경 이어지고... 창밖을 통해 보이는 집안의 모습들.

-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연정 가족. 연정, 여동생의 조잘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핸드폰 삼매경이다. 부부는 가벼운 이야기 나누는 중.
- 수호모, 수호의 식사를 옆에서 지켜보며 이것저것 반찬 올려준다. 수호는 인상 찌푸리며 단어집 뒤적이고... 수호모, 힐끗 벽시계에 시선을 준다.
- 잠든 아이를 토닥이는 젊은 부부.
- 영화를 틀어놓은 채 가벼운 와인 즐기는 노부부.

  그 풍경을 한데 담은 동네 전경이 따스하다. 유복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S#7. 선화의 집 (밤)

  선화, 불 꺼진 거실에 멍하니 앉아 TV 화면에서 나오는 빛에 얼굴만 겨우 보인다. 화면 속 사람들, 깔깔대며 넘어가지만 선화는 웃음없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부엌 싱크대에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놓여있고 불어 터진 짜장면과 단무지, 양파 등이 담겨 있다.

선화 ... (눈 감는)

  선화의 뒤로 보이는 창밖. 불이 꺼진 집이 딱 하나 더 있다. 그때 그 집의 불이 거실부터 방 하나하나까지 순서대로 켜진다.

선화 (천천히 눈을 뜨는)

S#8. 호영의 집 (밤)

  온 집안에 환한 불이 켜진 호영의 집. 하지만 누구 하나 없이 텅 빈 집안의 풍경. 방마다 문이 다 활짝 열린 가운데... 가느다란 틈으로만 겨우 보이게 거의 닫힌 방문이 하나 있다. 따뜻한 스탠드 조명 새어 나온다.

S#9. 동 / 재원의 방

  주인의 성향을 반영하는 개성 뚜렷한 재원의 방. 축구 선수의 포스터 걸려있고 일렉 기타도 하나 세워져 있다. 침대 스탠드에는 할머니와 재원이 나란히 찍은 다정한 사진 놓여있다. 책상 위에 책이 꽂혀있다. 필기구 하나, 스피커 하나에도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았다. 그 가운데 호영이 있다.

  호영, 팡팡 두드려 재원의 침구를 정리한다. 매일 해온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손길이다. 호영, 이곳저곳 먼지를 쓸고 닦기를 이어간다.

  호영, 한바탕 청소를 끝낸 후 후련하게 방안을 둘러본다. 애정어린 표정,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흡족함이다. 침대 위 호영, 아들의 얼굴이라도 되는 듯 베개를 쓸어낸다.

  잠시 후 그 손길이 멈추고 베개 끝부분을 그러쥐는 호영.

호영 ...

  호영, 순식간에 베개를 집어 들어 퍽. 소리가 나게 얼굴을 묻는다.

호영 ...

  한참 동안 어떤 작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호영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다.

S#10. 연정의 집, 부엌 (아침)

  연정모, 아침부터 분주하게 베이킹 중이다. 눈치를 보다 손을 대는 연정 동생의 손길을 탁. 쳐내는 연정모.

연정모 네 거 저기 있잖아!
연정동생 치.

  연정모, 아랑곳하지 않고 쿠키를 예쁘게 포장한다.

S#11. 수호의 집, 거실 (아침)

  수호모, 직접 꽃꽂이한 꽃다발을 챙긴다. 품에 안은 채 거울을 보며 한 번 더 자신을 점검하는 여유로운 모습.

S#12. 선화의 집, 앞 (오전)

  여자들, 벨을 누른 듯 기다리며 하늘을 둘러보는.

연정모 요즘 미세먼지 많이 괜찮아졌다.
강석모 나도 오늘 오랜만에 환기했잖어.

  문이 열리고. 선화, 등장만으로 큰 선물을 받은 듯 환하게 웃으며 여자들을 반긴다.

수호모 안녕하세요~!
선화모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정모 실례 좀 할게요.

  어느새 친해진 듯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연출하며 들어서는 여자들. 선화, 문을 닫는다.

S#13. 동 / 거실

  여자들, 처음 보는 집 내부를 빠르게 훑어보며 어머~를 연발한다.

연정모 깔끔하다. 언니는 컨셉이 미니멀리즘이구나.
선화 뭐가 없는 걸, 요즘은 그런 식으로 포장하는 거죠?
강석모 하하. 그게 트렌드잖아요. 저도 꿈이에요. 미니멀리즘을 꿈꾸는 슬픈 맥시멀리스트.
수호모 애가 어리잖아. 애기 있는 집에 미니멀리즘이 웬 말이야. 좀만 더 기다려! (설명하며) 여기 애가 아직 유치원생이에요. 많이 어려서.
연정모 (끄덕이며) 그러게. 언니 성격 딱 보인다. 집 정리 빨리 끝냈네요!
선화 (혀를 내두르며) 이사 보통 아니에요.
수호모 (이해한다는 듯, 다독이는) 보통 아니죠. 생고생. 생고생이 따로 없어요.
강석모 아, 난 또 하라면 못해요!

  연정모, 웃음으로 준비한 선물을 건넨다. 선화, 눈이 동그래져 받아드는.

선화 이게 뭔데요? 뭘, 이런걸~!
연정모 선물. 쿠키예요. 쿠키.
선화 아유, 정말... 준비 안 해도 되는데.
연정모 그래도 받으니까 좋긴 좋죠?
선화 말이라구. 정말... 이쁘기도 해라. (들여다보면서) 천생 여자구나. 이런 것도 하실 줄 알구.
연정모 (하하 웃고) 무슨 천생 여자까지 나와~ 아우...
수호모 나도, 나도 지금이 타이밍이다! 나도 천생 여자 시켜줘요.

  수호모, 준비한 꽃다발을 건넨다.

수호모 이거, 내가 직접 꽃꽂이한 거예요. 여기 이게, 지금 아니면 못 보는 꽃이랍니다. 많이 봐두세요?
선화 (감동해서) 정말 왜들 이러세요? 이분들 진짜, 부담스러워서 다시는 초대 못 하겠네!
강석모 (하하 웃는)
수호모 꽃병 있어요? 꽃병에 꽂아주는 것까지가 제 서비스.
선화 어머, 꽃병이... 잠시만요!

  선화, 꽃병을 찾으러 부엌 장으로 간다. 연정모와 수호모, 자연스레 따라가면. 강석모,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가 집을 마저 둘러본다. 벽에 사진이 걸려있어 다가선다. 강석모, 저 역시 아들을 가진 마음에 미소로 보면... 민서와 선화의 다정한 모습이다.

강석모 (작게 중얼) 애 인물 좋네, 엄마를 쏙...

  강석모,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한다. 기억을 되짚으며 시선이 흔들리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뭐지?’ 찜찜한 얼굴로 멍하니 선 강석모.

수호모(E) 강석 엄마! 얼른 와. 우리 오늘 배 터지는 날이다.

  강석모, 그 말에 고개는 가면서도 눈길은 액자에서 떼지 못한다.

S#14. 동 / 부엌

수호모 (답답함에 보면서) 얼른! 나 배고파~

  재촉에 강석모, 헤헤 웃으며 부엌으로 온다.

선화 ... (말없이 강석모 바라보는)

  강석모, 어느새 찜찜함은 잊은 채 식탁에 앉는다.

강석모 뭘 이렇게 많이 준비를 하셨어요~
연정모 그러니까. 내가 과자 쪼가리 가지고 천생 여자 코스프레 할 게 아니었네.

  선화, 강석모에게서 얼른 시선을 떼고 남은 음식을 가지러 돌아선다.

선화 (뒷모습으로) 맛은 보시고! 칭찬은 맛보시고 부탁드려요?
수호모 네에~ 알겠습니다!

<시간 경과>

  식사 후, 여자들이 차를 마시며 과자를 나눠 먹는다. 선화, 연정모의 쿠키를 베어 물고 사르르 웃으면서.

선화 정말 너무 맛있어요.
연정모 하아... 내가 또 그 한마디 듣겠다고 매번 이 짓 하지요.
수호모 갈수록 실력이 늘어. 이번 거 더 맛있는데?
연정모 어머 왜들 이래. 저쪽에 가게 하나 내?
강석모 아서라. 언니는 사업 체질 절대 아니랬지!

  여자들 가볍게 웃고, 자연스레 화제 돌린다.

수호모 요 며칠, 계셔보니까 어떠세요?
선화 너무 좋죠. 참 예뻐요... 주민분들 다 좋으시고. 적당히 조용하고요.
연정모 그쵸, 동네 딱 좋아요. 조금 나가면 애들 학원 돌릴 수 있지, 없는 것 없지. 근데 막상 또 여기 들어오면 시끄러울 일 없고.
강석모 다들 동네에 애정이 많아요. 언니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선화 저 벌써 애정 가득해요. (웃는)
연정모 벌써요?

  여자들, 선화의 너스레에 기분 좋게 웃는다. 각자 차를 머금으며 짧은 정적이 지나간다. 그리고 연정모, 무언가 떠오른 생각에...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살핀다. 그를 본 강석모, 수호모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천천히 사라진다. 여자들, 입에 쿠키만 우물대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데.

선화 ...?
연정모 저... 물론 소문은 들으셨겠지만요.
강석모 (차를 마시며, 선화의 눈치 보는)
선화 (보면)
연정모 ...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하셔도 돼요. 전혀 험한 일 있을 동네가 아닌데. 그때 딱 한 번 있었던 일이고... 그 후로는 비슷한 사건 있을 일이,
수호모 (O.L / 질색하며) 어우, 무슨 말이야! 당연한 거를, 우리 동네 애가 그런 것도 아닌데!!

  수호모, 놀라 질러놓고도 너무 오바했나 싶어 눈치를 보면... 선화, 그저 조용히 차를 마실 뿐이다. 여자들, 대답 없는 선화를 보며 안절부절 서로 눈치를 주고받는다.

강석모 알고 계시죠? 그 사건.
선화 ... 네.
강석모 (한숨 푹) 아유, 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칼이 삐죽 서요.
연정모 친구였지?
수호모 친구는 아니고. 그냥 같은 반 애였대.
연정모 (힘없이) 그게 친구지. 그 나이 애들이 그게 친구지, 별게 친구야.
선화 ...
강석모 그게 또, 한쪽 이야기만 하기 그런 게. 사건 자체가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잖아요. 막 갑론을박이...
연정모 댓글이 몇천 개가 달리고.
강석모 자기는 가해자 이해하네 마네. 사실은 가해자가 피해자. 피해자가 가해자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도 있었고.
수호모 그래도 살인은 살인 아니냐. 그런 의견도 무시 못 했어요. 거의 반반. 진짜 치열했었어요.

  선화, 대답 없이 듣지만 여자들은 그런 선화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입 놀리기에 바쁘다. 수호모, 고갯짓으로 맞은편 집을 가리키면서.

수호모 저기, 저 건넛집이잖아요.

  여자들, 그 말에 일제히 호영의 집을 돌아본다. 선화는 보지 않는다.

수호모 (한숨) 원래 재원 엄마가... 그전에는 우리하고 왕래도 잦고 했었는데...
연정모 왕래 정도야? 사실 재원 엄마가 여기 왕언니였거든요. 그 언니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직업 빵빵하지, 애 공부 잘 시켰지. 남편에 시댁에... 부족할 게 없는 언니였거든. 성격 괄괄하고.
선화 ...
연정모 (새삼 서운한) 근데 일 있고는 뭐. 안면 싹 바꿨죠. 딴 사람이에요, 완전.
수호모 원래 저기가 시댁에서 결혼하면서 내준 집인데, 아들 그렇게 가면서 남편은 떠나고 재원 엄마 혼자 저기서 저러고 살아요. 벌써 꽤 됐는데...
연정모 ... 아들도 떠나고 남편까지 없는 집에, 왜 저러고 사는가 몰라...
강석모 (툭. 눈치 주면)
연정모 아니, 그렇잖아. 괜히 남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딴 데 가서 다 잊고,
수호모 (O.L / 다그치며) 자기라면 다 잊을 수 있겠어?
연정모 (입 딱 다물고. 과자만 오도독)
수호모 어딜 가나 지옥일 거야.
선화 (생각에 잠긴 낮은 시선)
수호모 ... 아들이 죽었는데, 그것도 남의 손에.

  그 말의 무게에, 식탁에는 무서운 정적이 흐른다. 그때 선화가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다.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 집중된다.

선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강석모 ... (살짝 갸웃,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인서트] 뉴스 화면.

  어제저녁 여덟 시경. 서울 화동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용의자는 평소 피해자 K군와 가까운 관계에 있던 같은 반 학생 M군으로, 사건은 K군의 자택 거실에서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고 있으며 정확한 살해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시간 경과>

  여자들, 짐을 챙겨 선화의 집을 떠날 참이다.

연정모 오늘 너무 좋았네요~ 우리 자주 이렇게 봐요.
수호모 다음에는 저희 집으로 모실게요.
선화 너무 좋죠.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선화, 말과 함께 여자들을 따라나서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짝. 박수를 치며 부엌으로 돌아간다. 여자들 ‘?’ 하고 서로 눈치를 보면.

선화 (종이 가방 챙겨오며) 그냥 보낼 뻔했네. 나도 준비한 거 있는데.수호모 어머, 뭐예요?

  여자들, 종이봉투를 받아 안을 살핀다. 밀폐 용기에 깔끔하게 담기 시루떡이다.

연정모 어머! (빵 터져 웃는) 이 언니 뭐야. 너무 귀엽다.
수호모 시루떡 받기도 진짜 오랜만이네. 정말 잘 먹을게요!
선화 (웃으며) 내가 워낙 고루한 데가 있어요.
강석모 우리 남편이 이거 너무 좋아하는데. 밥 안 먹고 또 이것만 좋다고 뜯어먹겠다.
선화 어서들 가세요. 가족들 기다리시겠네.
연정모 아으, 밥들 좀 알아서 차려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여자들, 웃음으로 선화의 배웅을 받는다.

연정모 또 봐요, 언니!
강석모 갈게요~
수호모 오늘 너무 잘 먹었어요~!

  잠시 후 선화, 뒷정리 되지 않은 부엌으로 돌아와 치우기 시작한다. 그러다 손이 멈추고 어디론가 시선이 향한다. 남은 종이봉투 하나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시루떡이 담겨 있다.

선화 ...

  선화, 다시 치우기 시작한다.

S#15. 호영의 집 (늦은 오후)

  석양이 지는 붉은 하늘. 호영이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다. 그대로 집에 들어서는데... 대문 옆에 선화가 서 있다. 호영, 짧은 시선으로 지나치려 한다.

선화 떡이에요.
호영 (멈춰서, 돌아보는) ...
선화 새로 이사 왔어요. 떡 좀 드셔보시라고...
호영 (한참 말없이 보다가) ... 괜찮아요.

  호영, 짧게 고개를 꾸벅이고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선화 ...

S#16. 동 / 현관

  호영, 현관에서 구두를 벗다가 창밖으로 대문을 내다본다. 선화, 가만히 서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대문 옆에 두고 돌아선다. 호영, 더 살펴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간다.

S#17. 동 / 거실

  호영,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는다. 소파 아무 데나 얹어두는데... 문득 시선 끝에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재원의 방이 보인다.

호영 ... (한참을 보고 선)

  호영, 시선을 떼고 안방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나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잠시 후 종이봉투와 함께 돌아오는 호영. 홧김에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호영 (바라보는) ...

  호영, 시선 안의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쓸어본다. 하얀 먼지가 검지에 묻어난다. 호영, 별스럽지 않게 먼지를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S#18. 동 / 재원의 방

  여전히 외출복 차림 그대로 재원의 방에 들어서는 호영. 소매를 걷고 재원의 방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S#19. 선화의 집, 부엌 (저녁)

  선화, 홀로 식탁에 앉아 접시에 담긴 시루떡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다. 아무 데나 던져둔 시선은 움직일 줄 모른다.

선화 (우물대던 입이 천천히 멈추는) ...

  손가락에 남은 떡을 그릇에 다시 내려두는 선화.

S#20. 호영의 집 앞 (아침)

  호영, 출근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손에는 전날 선화에게 받은 종이봉투가 들려있다.

S#21. 선화의 집 앞 (아침)

  호영, 선화의 집 벨을 누른다. 벨 소리가 이어지고 인터폰이 연결된 듯 백색소음이 들리지만 상대에게서는 말이 없다.

호영 (잠시 기다리다가) ... 통 가져왔어요. 여기 둘게요.

  호영, 문 앞에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조금 걸어갔을 때쯤 뒤에서 문이 열리고 선화가 나온다. 호영, 주저하다가 돌아본다. 말없이 마주 보는 두 사람.

호영 ... 잘 먹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겨) 빈 통이에요.
선화 ...
호영 그럼.
선화 잠시 들어오세요.
호영 (보다가) 출근길이라.
선화 좀, 도와주세요.
호영 ...? (보는)

S#22. 동 / 거실

  두 사람, 의자를 딛고 올라가 창가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있다.

호영 잘 잡아요.

  호영, 탁. 소리가 나게 부품을 끼운다. 선화 역시 그렇게 하면... 호영이 의자에서 내려온다. 선을 이용해 블라인드를 올렸다 내렸다 작동해보는 호영. 선화, 가만히 바라본다.

선화 감사합니다. 늦으신 것 아녜요?
호영 이제 가면 되죠.

  호영, 벽에 세워둔 제 가방을 집어 드는데... 부근에 뒤집어 벽에 기대둔 액자가 보인다. 호영, 대수롭지 않게 돌아선다. 그 시선 끝에 못만 덜렁 박혀 있는 빈 벽이 보인다.

호영 ...?

  호영, 못과 액자를 짧은 순간 번갈아 본다. 하지만 곧 현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선화 ... (그런 호영을 보는)

  호영,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다.

선화 언제 한번 들러주세요. 식사 대접할게요.
호영 (천천히 올려다보는)
선화 아니면, 차라도.
호영 ...
선화 ...
호영 내 이야기, 알아요?

  선화, 무언의 대답으로 눈길을 피한다. 호영, 그를 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선화 토요일 낮에 오세요.
호영 (멈춰서는)
선화 저도 일을 하고 있어서, 그때 시간이 되거든요.
호영 ...

  호영, 돌아보지 않은 채 선화의 집을 나선다.

S#23. 강석네, 거실 (아침)

  강석모, 강석의 등교를 도우며 잔소리하는 중이다.

강석모 아니, 그러니까. 너는 그걸 왜 미리 이야기 안 하는 건데?
강석 (빵 우물거리며) 까먹었다니까. 엄마, 까먹는 게 뭔지 몰라?
강석모 (얄미운) 말이나 못 하면...
강석 아, 몰라 몰라. 말 시키지 마, 엄마.

  강석, 헐레벌떡 가방을 챙긴다.

강석 아, 맞다. 저기 이사 왔다며?
강석모 얼씨구.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강석 나랑 나이 비슷한 애 있나? 그 집에?
강석모 (입에서 빵 뺏고, 옷 가다듬어주는) 없어. 그 집 애는 다 컸어. 형아래.
강석 에이, 좀 놀라 그랬더니.
강석모 네가 놀 때야!
강석 그럼 놀 때지, 학생이 놀지. 다 큰 어른이 노나?
강석모 그만 나불대고 학교나 가셔! 응?!
강석 엄마는 아들한테 나불나불이 뭐냐?

  강석, 대충 싼 가방을 들쳐메고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선다. 강석모, 아니꼽게 보며 배웅하다가... 문뜩, 생각에 잠긴다.

[플래시백] S#13.
  강석모,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한다. 기억을 되짚으며 시선이 흔들리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뭐지?’ 찜찜한 얼굴로 멍하니 선 강석모.

강석모 ...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강석모, 손톱을 물며 고민하다가... ‘에이, 모르겠다.’ 싶은 얼굴로 돌아선다.

S#24. 상인동, 마트 (낮)

  선화, 신중히 식재료들을 들여다보며 장을 본다. 그러다 순간 무언가 생각에 빠져 시선이 멈춘다.

선화 ...

S#25. 동 / 거리 (낮)

  귀가하는 선화, 무거워 보이는 장바구니를 내색도 하지 않고 들고 걸어간다. 무표정한 선화와 그 옆을 스쳐 가는 사람들의 모습.

S#26. 수호의 집 앞 (낮)

  수호, 사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그 앞에 연정 부녀가 차를 대고 기다리는 중이다.

수호모 (수호 옷 털어주며) 수업 잘 들어. 이 수업 잡기 힘들었던 거 알지?
수호 아, 알았어.

  수호, 수호모에게 가방을 전해 받다가 저 멀리 집을 나서는 호영을 발견한다. 호영, 곧장 차에 올라 사라진다.

수호 ... 아줌마네.
수호모 (못 본 체하는)
수호 토요일에도 회사 가시나.
수호모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와. 기다리시잖아.
수호 어.

  수호,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수호모, 그 모습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한다.

수호모 어, 강석 엄마! (상대 이야기 듣고) 아이고... 친구 온다던 날이 오늘이야? 그럼 못 보겠네? (듣고) 아쉬워라... 아니, 난 셋이서 어디 나갈까 했지. 연정이네랑 묶어서 과외 보냈거든.

  수호모, 대화를 이어가며 제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수호모 됐어, 뭐. 나중에 저기. 저 선화 언니랑 같이 넷이 보던가. (듣고) 그래. 친해져놔서 나쁠 게 어딨어? 아들 어디 학교인지도 모르는데. (웃으며) 또 몰라. 엄마 분위기 봐서는 애 공부 놨을 집 아니야. 분명히 얻을 거 있을 거야. 암튼. 내가 자리 한번 만들든지 할게. 그래, 다음에 봐!

S#27. 연정부의 차 안

연정부 아이고, 우리 수호. 토요일에도 공부하느라 고생이네.
수호 오늘 같은 날도 못 쉬고 우리 데려다주는 아저씨가 더 불쌍해요.
연정부 (하하 웃는)
연정 아, 시끄러. 야, 정수호 조용히 좀 해.
수호 네, 네.

  연정부의 차가 선화의 집 앞을 지나간다.

수호 맞다, 여기 이사 왔지?
연정 엄마들 벌써 갔다 오신 것 같던데.
수호 (‘그렇구나’ 끄덕임)
연정부 암튼~ 다들 부지런해요. 부지런해.

  연정부의 차, 호영의 집 앞을 지나간다. 힐끔 호영의 집을 본 아이들이 서로 짧은 시선을 마주한 후 눈을 돌린다.

연정부 ... (굳어지는)

  어쩔 수 없는 숙연한 분위기에... 아무도 입을 떼지 않는다. 연정, 차가 호영의 집을 지나간 후에야 호영의 집을 돌아본다.

S#28. 호영의 집, 마당 (과거 / 낮)

  조금 더 어린 연정, 교복 차림으로 지쳐 터덜터덜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곳에 동네 주민들, 바비큐 파티를 하기 위해 불을 피우며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호영(E) 연정아~

  연정, 고개를 들어 보면 지금과는 달리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지은 호영이 연정을 향해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온다.

연정 (따라 미소 지으며, 안기는) 아줌마.
호영 우리 연정이. 왜 이렇게 지쳤어. 공부 많이 힘들어?
연정 네...
호영 그래서 아줌마가 고기 맛있는 걸로 준비했다~ 맛있겠지!

  호영, 오구오구... 하며, 등 토닥인다. 그 뒤에 있던 연정모, 두 사람에게 다가와 연정의 가방을 벗겨 제 손에 든다.

연정모 얘는 또 엄살이다. 너 오늘 학원도 하나밖에 없는 날이었는데 왜 그래?
연정 아, 진짜 그렇게 이야기하지 좀 마.
호영 (연정 어깨 감싸며) 그래, 그렇게 이야기하지 좀 마!

  호영, 연정을 달래 데리고 들어간다. 연정의 자리를 마련해 의자를 빼주면... 이미 먹고 있던 재원, 연정에게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재원 이뻐졌다?
연정 뭐, 한 일 년 만에 보는 것처럼 이야기해...
재원 아닌가? (하고 키득대는)
호영 (흐뭇하게) 연정아. 오빠가 괜히 껄떡댄다, 그치?
재원부 우리 연정이. 대학 졸업하면 바로 아저씨 며느리 하는 거지?
연정 엥...?

  어른들, 연정의 맹한 반응에 빵 터져 웃고... 재원도 어깨를 으쓱하며 나쁘지 않다는 식의 반응.

재원 나 땡잡았다. 아빠 고마워! 하다 하다 이제 와이프도 구해주네.
재원부 (말없이 엄지척)
연정 참나...
연정모 난 찬성!
호영 나도 찬성!
연정 아, 누구 마음대로!!

  호영과 연정모, 서로를 붙들고 깔깔 웃는다. 한데 모인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그보다 정다울 수 없다.

S#29. 연정부의 차 안

연정 ... (속상한)

  연정,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든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듯 토독토독 움직이는 손가락. 연정부의 차가 상인동을 빠져나간다.

S#30. 선화의 집, 부엌 (낮)

  선화, 두 사람분의 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에 홀로 앉아있다.

선화 ... (음식 보다가, 창밖을 보는)

S#31. 호영의 차 안

  호영, 익숙한 길인 듯 내비게이션도 살피지 않고 어디론가 운전한다.

호영 (담담한) ...

S#32. 강석네, 거실 (낮)

  강석모,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다가... 인터폰 소리에 나간다. 강석모의 지인인 듯한 여자 둘이 들어선다.

강석모 어서 오시지요~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여자1 (장난투 받아주며) 그러게 말입니다!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드십니까~
여자2 아우, 강석아. 아직 춥다. 겨울이 갈수록 길어져.
강석모 그러니까. 얼른 들어와.

  강석모, 두 여자의 외투를 받아주며 거실로 이끈다. 그러다 여자1이 든 짐에 시선이 가고... 종이봉투에 든 앨범이다.

강석모 어디 뭐, 갔다 왔어요?
여자1 어, 애 학교 잠깐 들렀어. 아니, 이놈의 자식이... 졸업앨범을 아직도 안 찾아가서, 담임이 전화가 다 왔다? 이놈의 새끼, 대학은 어떻게 다니려나 몰라...
여자2 왜 애한테 전화를 안 하고 언니한테 전화를 했대?
여자1 (제 자식이지만 답 없다는 투로) 모르는 번호라 안 받으셨답니다.
강석모 (웃음으로) 아이쿠.
여자2 못살아~

  여자들, 자연스레 거실 소파에 둘러앉는다.

강석모 (부엌에 눈짓) 조금만 기다려. 다 돼가. 내가 오늘 제대로 먹일라고 준비 많이 했다?
여자1 어머머? 웬일이래.
여자2 (앨범에 시선) 언니, 앨범 좀 보자.
여자1 그럴까? 이거 졸업사진 찍는 날 머리는 감고 갔나 몰라...
강석모 (웃는)

  여자1, 테이블 위에 앨범을 펼친다. 차라락- 넘겨, 제 아들의 사진을 먼저 찾는.

여자1 아우, 이게 뭐야~ 얘는 머리를 진짜... 왜 이러고 갔어?
여자2 (웃고) 왜, 잘 나왔는데. 언제 봐도 언니 닮은 코가 백만 불짜리라니까.
여자1 야, 나 이거 세운 거야.
여자2 아, 정말? 미안~
강석모 (웃겨 넘어가는)

  강석모, 호기심에 다른 사진들도 둘러본다.

여자1 교복 이쁘지? 이제 강석이도 이거 입으면 옷 태 좀 날 거다.
강석모 (웃고, 앨범 보면서) 키나 좀 더 커야 될 텐데. 걱정이라니까.
여자2 남자애들은 군대 가서도 커. 걱정 마. 강석 아빠 큰데 뭘.
강석모 (앨범 보면서) 내가 작잖아, 내가.

  강석모, 누군가를 찾는 듯... 저도 모르게 빠르게 앨범을 넘긴다.

여자1 (그사이에 다른 대화) 아니 너는,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
여자2 (제 얼굴 만지며) 진짜? 기초 바꿨는데, 잘 맞긴 해.
여자1 어, 파리가 미끄러지겠어. 물광이 아주...
여자2 파리가 미끄러지기는. (깔깔 웃고) 근데, 통 기미에는 효과가 없다.
여자1 얘, 기미는 피부과 가야지.

  강석모, 그 대화에 웃음 지으며 앨범을 보다가... 재원을 찾는다.

강석모 ... (멈춰서, 바라보는)

  두 여자, 그런 강석모를 보고 말이 없어진다. 모두들 사연을 아는 듯.

강석모 ... 참. (한숨 쉬고) 남의 아들인데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여자1 (눈치 살피며, 궁금한) 그 집 엄마는... 아직도 여기 살아?
강석모 응, 살아.
여자2 아유, 참...

  강석모, 씁쓸한 얼굴로 앨범을 덮으려 한다. 그런데 그때, 문득 스쳐 가는 모습에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여자1 화장실 좀 가야겠다. 강석아. 나 화장실 좀 쓸게.
강석모 ... (무언가를 보고, 하얗게 질린)
여자1 강석 엄마?
강석모 ... 어, 언니. 뭐, 뭘 물어... (말 더듬으며) 가, 가, 갔다 와요. 화장실.
여자1 어, 그래. 그래. 잠깐들 있어.
여자2 (의아한, 강석모 보는)

  강석모의 시선에... 앨범 속 민서의 모습 보인다.

여자2 (역시 들여다보고) ... 어머, 어머. 얘 보고 놀라서 그러는구나.
강석모 (충격에 빠진)
여자2 아니, 생각이 있어 없어. 얘를 버젓이 여기 사진을 넣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얘 맞지? 저기, 저... 집 아들이랑... (조심스러워 눈치 보는)

  강석모, 대답도 하지 못하고 충격에 빠져있다.

[플래시백] S#13.
  선화, 꽃병을 찾으러 부엌 장으로 간다. 연정모와 수호모, 자연스레 따라가면. 강석모, 흐뭇한 모습으로 보다가 집을 마저 둘러본다. 벽에 사진이 걸려있어 다가선다. 강석모, 저 역시 아들을 가진 마음에 보는데... 민서와 선화의 다정한 모습이다.

S#33. 봉안당, 내부 (낮)

  호영, 재원의 사진과 유골함으로 꾸려진 봉안당 앞에 서 있다. 재원, 친구들 가운데 중심이 되어 여유롭고 자신감 있는 표정이다. 호영, 미소로 그를 보다가 눈을 감는다. 속눈썹이 잘게 떨리지만 미간을 찌푸려 감정을 억누른다.

S#34. 상인고등학교, 운동장 (오후)

  호영의 차가 운동장 구석에 멈춰 선다. 호영, 차에서 내려 천천히 둘러본다. 축구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호영, 밀려드는 기억에 멍하니 학교를 둘러본다.

S#35. 동 / 운동장 (과거 / 오후)

  호영, 같은 곳에 차를 대고 재원을 기다리고 있다. 재원이 친구들과 몰려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고 표정을 밝힌다.

재원 엄마!

  호영, 씩 웃으면 가볍게 달려오는 재원.

S#36. 호영의 차 안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호영, 소리 하나 없이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시고 있다.

S#37. 선화의 집 (밤)

  선화, 편한 내의 차림으로 집을 돌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곳곳을 살피고 스탠드와 캔들 워머 등 스위치를 내리는. 시계를 한번 살핀 후 방에 들어서려 한다. 그때 노크 소리 들린다.

선화 ...?

  선화, 잠시 주저하다가 소파 위의 카디건을 두르고 현관으로 향한다.

S#38. 동 / 집 앞

  선화, 문을 열어 상대를 확인한 후 가만히 바라본다. 그곳엔 지치고 외로운 모습의 호영이 서 있다. 손에는 봉지 가득 과일이 들어있다.

선화 ... (봉지 바라보는)
호영 ...
선화 (호영 보면)
호영 영, 마음에 걸려서요.
선화 ...
호영 (슬프게 웃는) 내가 원래는. 받은 통을 절대 빈 그대로 돌려보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선화 ...
호영 아니었거든요.

  호영, 달랑대는 봉지를 내민다. 선화, 바라만 보면.

호영 이거, 이제라도 받아줘요.

  선화, 그를 받아든다. 호영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선화 들어오세요.
호영 ...
선화 ... 어서요.
호영 (작게 숨 내쉬는)

S#39. 동 / 부엌

  두 사람, 식탁 위 노란 등만 켜둔 채 마주 앉았다. 호영, 호로록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고 선화는 말없이 차를 바라볼 뿐이다. 선화 집 창문을 통해 호영의 불 꺼진 집이 보인다. 선화, 가만히 집과 호영을 겹쳐본다.

호영 (찻잔에 시선, 낮고 조용하게) ... 옛날, 나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사고로 온 가족을 잃은 아저씨가 살았어요.
선화 (시선 옮겨 바라보는)
호영 동네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어요. 나도 그랬어요. 괜히 십 분을 더 걸어서 아저씨 집 앞을 피해서 학교에 다녔어요. 무서워서. (잠시 생각하다가) 그 불행이, 무서워서.
선화 ...
호영 어느 날, 슈퍼에 사탕을 사러 갔다가, 술병 든 봉지를 흔들며 나오는 아저씨랑 마주쳤어요.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너무 따뜻하게 웃더라고.
선화 ...
호영 근데 그 얼굴이. 웃는 그대로 일그러지면서. 내가 아저씨 우는 건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를 꼭 안았어요. 부서질까 봐, 자기 몸에 힘을 더 주면서도 꼭. 품 안에 나를 넣었어요.
선화 ...
호영 내 뒤를 따라오던 울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길길이 뛰면서. 무슨 짓이냐. 이게 웬 추태냐, 화를 내셨는데...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화 (보다가, 창으로 시선 옮기는)
호영 아빠는 아저씨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해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나한테 아저씨 불행을 옮겼을까 봐, 화를 내는 거라고.
선화 ...
호영 아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네를 떠났고, 나는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할 때까지 그 동네에 살았지만, 한 번도 아저씨 생각을 안 했어요.
선화 (천천히 눈을 감는)
호영 그런데 오늘, 아이 학교에 갔죠. (슬프게 웃으며) 편치 못한 약속을 피하려고 떠돌다가... 정말 오랜만에 아이 학교엘 갔어요.
선화 (마주 보는)
호영 우리 아이랑 비슷한 남학생들이 땀내를 풍기면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데 오늘에서야 그 아저씨 생각이 나더군요. (숨을 고르고) 잃어버린 내 것과 꼭 닮은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부모를 지독히 질투하는 그 마음이.
선화 (굳어가는 얼굴)
호영 우리 아버지는 몇 초도 안 돼 나를 그 아저씨한테서 떼어냈지만, 이미 늦었던 거예요.
선화 (잘게 떨기 시작하는)
호영 그 불행이, 이미 내게 옮았으니까.
선화 (시선 올라가는)

  호영, 말을 마치고 떨리는 손으로 잔을 집어 든다. 천천히 머금으며 제 앞의 선화를 바라본다. 선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호영 ... 그럴 것 없어요. 이건 내 불행이니까.
선화 (천천히 눈 감았다 뜨는)
호영 좋은 사람이군요. 하지만 이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나만의 불행이에요.
선화 ...

  선화, 대답하지 않는다. 기묘한 정적이 지나간다. 호영,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 쓰게 웃음이 날 때. 선화의 입술이 움직인다.

선화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내 남편은 우리 아이 백일에 죽었어요.
호영 ...!
선화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니었어요. 오랜 병을 앓았던 사람이니까.
호영 ... (안타까운)
선화 (그런 호영 표정 바라보며)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데려가는 하늘이 조금은 고마웠을지도 몰라요.
호영 ...
선화 그 사람이 아픈 걸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곧 죽을 걸 알면서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나를 떠나며 남기는 단 하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호영 (차마 볼 수 없어 시선 떨어뜨리는)
선화 그렇게 우리 셋은 둘이 되고, 나는 주부에서 가장이 되고. 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달았어요.
호영 (가늠하는 듯한 시선)
선화 내게는 선물이었던 아이의 탄생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외로움의 시작이었는지. 언제나 유치원에서 홀로 남은 아이를 데려오면서. 보지도 않는 티비를 굳이 켜두고 거실 바닥에서 책을 읽으면서... 퇴근할 나를 기다리던 아이를 보면서 깨달았죠. 내가 아이에게 준 삶이, 어떤 것인지.

  호영,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이 더 아프지만, 선화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선화 너무나 착한 아들로, 반듯한 아이로. 성실한 학생으로 잘 자라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호영 (작은 끄덕임)
선화 원래도 밝은 아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외로움을, 너무 많이 물려준 탓이겠죠. 조금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그 내면을 알아봐 주는 친구들이 늘 아이의 곁에 있었죠.
호영 ...
선화 그런데 어느 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야기를 듣던 호영의 눈이 조금 커진다. 선화, 눈을 감으며 감정을 견디려는 듯 숨을 고른다.

선화 내가 피곤해서... 일이 바빠서. 아이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냥 스쳐 보낸 단서들이. 결국에는 외면할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어요.
호영 (그에 대해 생각하며,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는)
선화 아이가 더운 여름에도 왜 긴 팔을 벗지 않는지. 왜 피울 리가 없는 담배 냄새에 흠뻑 젖어 돌아오는지.
호영 (굳어지는)
선화 나는, 난...

  선화, 고통에 이를 악문다. 그를 바라보는 호영의 표정이 조금씩 텅 비어간다. 듣지 않아도 이어질 이야기를 아는 듯...

선화 몰랐어요. (주저하다가) 몰랐어... 아니, 내가 몰랐을까요? 바로 거기 있었는데. 내가 잡아주길 기다리던 내 새끼 손이 거기... 바로 거기에 있었는데.
호영 ...
선화 모든 사실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이 되어 내 눈앞에 들이밀어졌을 때는. 나는 이미!

  선화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호영의 얼굴은 두려움에 질려간다.

선화 인간이 아니었어요. (이성이 날아가 중얼대는) 이제 대학교 입학을 겨우 앞둔 남의 아이가... 그 꽃다운 나이에 내 아들 손에 죽었다는 게 나는. 조금도 안타깝지 않았으니까.

  선화의 한 서린 목소리에 호영, 새하얗게 질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자가 아주 느리게 넘어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선화가 그런 호영을 눈물 젖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선화 고통 속에서 해방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저 스스로 괴물이 된 내 아들이 나는, 나는 더! 아니,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가여웠거든.

  호영, 문뜩 떠오른 생각에 홱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 뒤집어 놓인 액자가 세워져 있다. 호영, 얼른 달려가 액자를 집어 든다.

호영 ...!

  사진 속 민서가 호영을 마주 본다.

S#40. 상인고등학교, 운동장 (과거 / 오후)

  차를 대고 재원을 기다리는 호영. 인파 속에서 재원을 발견하고 미소 짓는다. 재원, 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손을 흔든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민서가 움찔 놀라 호영을 바라본다.

친구 안녕하세요!
호영 어, 잘 지내지? 어머니 잘 계시고.
친구 그럼요.
민서 ...
친구 야, 인마!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친구, 민서의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웃음을 흘리면 민서, 꾸벅 호영에게 허리를 숙인다.

친구 더, 더 인마! (등을 거칠게 때리는) 자식이 싸가지가 없어. 입은 뒀다가 처먹을 때 쓰냐?
재원 (킥킥대고 웃는)
민서 안녕하세요.

  호영, 짓궂은 장난에 난감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만류한다.

호영 그래. 그래 알았어. 너무 그러지 마!
친구 아, 어머님. 장난이에요, 장난.
호영 아이고, 녀석들. 암튼...
재원 (화제 돌리며) 엄마! 오늘 아빠 늦는대?
호영 몰라. 그 아저씨. 언제는 안 그랬니.
재원 아, 아빠랑 게임하기로 했는데.

  재원, 민서를 밀치고 호영의 어깨를 감싼다. 호영, 마음이 쓰여 돌아보며 차로 걸음을 옮긴다.

친구 안녕히 가십쇼, 어머님!
호영 그래, 적당히 놀고 들어가. 집에 놀러 오고.
친구 넵!
민서 (말없이, 꾸벅 인사하는)
재원 내일 보자, 새끼들아!
호영 (팔뚝 찰싹 치며) 입! 입!
재원 (과한 엄살로) 아, 아파! 엄마~

  재원, 팔을 문지르며 웃음... 차에 오른다. 호영, 운전석에 오르던 중 민서와 짧게 눈이 마주치고. 떨리는 민서의 눈빛에 저 역시 잠깐 시선이 흔들린다.

S#41. 선화의 집, 거실 (밤)

  호영의 떨리는 손이 겨우 액자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호영, 어찌할 줄을 몰라 꽉 쥔 주먹을 떨다가... 겨우 가방을 찾아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호영 (고개를 흔들며, 위태롭게 걷는)

S#42. 호영의 집, 마당 (과거 / 저녁)

  집 앞에 차를 댄 호영,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난다. 호영의 시선 끝에 문 열린 현관이 보인다.

호영 (의아한) 재원아. 왜 문을 열어놓고 있어?

  그때 쾅. 문이 벽에 부딪히며 민서가 튀어나온다. 상의가 온통 피투성이다.

호영 (소스라치게 놀라는) !!!

  숨이 멈춘 듯 놀라 마주 선 호영과 민서. 민서, 덜덜 떠는 그대로 얼굴을 구기며 눈물 흐른다.

호영 ... 누, 누구... 아니. 그, 재원이.

  호영, 당황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발작에 가깝게 온몸을 떠는 민서, 고통을 견디지 못해 무릎을 꿇는다. 잔디 바닥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민서 죄송, 죄송합니다..
호영 ... (짙은 두려움에 질식할 듯한)
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서, 바닥에 제 이마를 마구 찧으며 절규한다. 호영,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겨우 몸을 움직여 집으로 향한다.

S#43. 호영의 집 (밤)

  과거의 기억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호영을 난자한다. 떨리는 몸으로 넋이 나가 돌아온 호영. 도어락 문도 여러 번에 걸쳐 겨우 열고 들어선다. 그 앞에 보이는 거실. 호영,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에 눈을 감는다.

S#44. 호영의 집, 현관 (과거 / 저녁)

  무거운 비극의 기운에 가까스로 한발 한발을 떼는 호영. 손이 덜덜 떨리고 이미 눈물이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다. 어렵게 들어선 거실. 마구 떨리는 목을 겨우 움직여 바라본다. 칼에 찔려 쓰러진 재원이 온 거실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호영 (숨이 넘어가는) 어... 억...

  호영,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S#45. 호영의 회사, 사무실 (낮)

  통창을 통해 쾌청한 하늘이 보이는 사무실. 그 풍경을 뒤로한 상석의 데스크. 호영이 자리하고 있다.

호영 (넋이 나가, 모니터만 보고 앉은) ...

  사원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간간이 호영의 눈치를 살핀다. 서로 시선이 부딪히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 건넬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간이 흐른다. 그때 호영과 비슷한 연배, 직책인 듯한 ‘수정’이 나타나면... 사원들, 호영의 눈치를 살피며 수정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한다. 수정, 가볍게 끄덕이며 받아준다.

호영 (인기척에, 바라보면)
수정 (가만히 보다가, 옅게 웃는)

S#46. 동 / 옥상, 하늘공원

호영과 수정, 인적 드문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다. 기분 좋은 바람은 느끼듯 수정이 눈을 감았다 뜨며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긴다. 호영은 손에 쥔 종이컵만 내려다보고 있다.

수정 부쩍 네 이야기를 많이 하시네.
호영 ...
수정 (보다가) 나는 네가 여전히 우리 식구인 걸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러워. 아마... 그 이후부터겠지.

  호영, 손에 쥔 커피를 마신다. 수정이 눈치를 살피며 답을 기다리는데.

호영 갈게.
수정 (한참 후에, 긴 한숨) 고맙다, 호영아.
호영 고맙긴.
수정 ...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나보다 네가 더 좋으시잖니.
호영 (아주 작게 중얼) 모르시니까.
수정 (못 들은 척) 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 김수정이 평생 한 일 중에 너랑 우리 오빠 엮어준 걸 제일 장하다 생각하실 거다.
호영 ... 어머님은, 내가 재원이 잃어버린 거 모르시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가려던 수정, 몇 번 더 입을 벙긋거려보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 역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다.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S#47. 선화의 집 앞 (낮)

  수호모, 연정모, 강석모가 장을 봐 돌아오는 길이다. 강석모, 두려움에 질려 선화의 집을 쳐다도 보지 못하는데.

수호모 (박수 짝 치며) 우리 생각난 김에 선화 언니네 좀 들러볼까?
강석모 !
연정모 그러니까. 그때 한 번 보고 통 볼일이 없었네... 확실히 전업이 아니니까 마주칠 일이 많이 없어.
수호모 에이, 재원 엄마는 일하면서도 빠지는 법이 없었는데, 뭘.
연정모 그 언니야 뭐... 워낙 슈퍼 맘이고.
강석모 (하얗게 질려서, 말 없는)
수호모 강석아. 생각난 김에 약속 한번 잡자. 자꾸 봐야 친해지지. 그냥 안면 터놓는다고 가까워지는 게 아니잖아. 응?
강석모 ... 그게...
연정모 그래, 모이자. 이번엔 우리 집으로 와. 애 아빠 없어서 주말도 오케이야.
수호모 (반가운) 그럴까?

   그렇게 약속이 확정되어가는 분위기에... 강석모, 우뚝 멈춰 선다. 저들끼리 대화하다가, 그 기척에 두 여자 역시 멈춰서 의아하게 돌아보면.

강석모 좀, 좀 있다가... 좀 이따 보자.
수호모 왜? 무슨 일 있어?
강석모 (핑계 짜내는) 우, 우리 애가 감기 기운이 좀 있어. 괜히 옮길까 봐.
연정모 (아쉬운, 걱정) 어머, 정말? 그래. 요즘 감기 유행이야. 조심해야 돼.
수호모 그렇다고 등원 안 시킬 수도 없고. 참 그렇겠다.
연정모 (수긍하며) 그러니까. 암튼, 조심해. 강석 엄마. 약속은 나중에 잡지, 뭐.

  강석모, 바짝 굳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다가... 두여자가 모르는 새 두려움에 질려 선화의 집을 한번 돌아본다.

S#48. 호영의 집 앞 (낮)

  호영, 외출을 준비해 집을 나선다. 호영의 승용차 옆에 미리 불러둔 택시가 서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선화의 집.

호영 (입꼬리 팽팽하게 당기며, 보이지 않는 척)

  호영, 얼른 택시에 오르고... 곧 택시가 동네를 빠져나간다.

S#49. 요양 병원, 병실 앞 (오후)

  의료진과 환자들 오가는 병실 복도. 서류 가방, 트렌치 차림의 재원부가 걸어온다. 재원부, 지나가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목 인사한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하며 병실 앞으로 다가온다.

재원부 ... (병실 안을 보고, 걸음 멈추는)

S#50. 동 / 병실 안

  호영, 재원의 할머니에게 손이 잡혀 마주 앉아있다.

할머니 왜 이렇게 살이 빠져! 으이그. 못 먹구 살어?
호영 (옅은 웃음) 저 살 빠졌어요?
할머니 (진심으로 걱정되는) 재원 애비가 돈 안 벌어다 줘?
호영 (웃는)
할머니 잉, 웃기는. (하고 따라 웃는)

  재원부, 들어서며 근처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호영은 할머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할머니만 재원부를 올려다본다.

할머니 너는 이 녀석아. 처가 이렇게 얼굴 상하도록 뭘 한 거야.
재원부 ...
호영 (따스한 눈빛, 할머니 얼굴 가만히 살피는)
할머니 잉?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나뿐인 각시를.
재원부 이 사람 밖에서 얼마나 대접받는데요. 저보다 더 비싸고 좋은 거만 먹고 다녀요.
할머니 근데 그래? 요즘 뭐, 그 다이트인가. 그거 하는 거야?
호영 조금 날씬해 보여요?
할머니 잉, 그래. 그래. 아주 늘씬해. 그만해도 되겠어, 다이트.
호영 (웃고) 아유, 좋아라.

  재원부, 호영의 곁에 앉는다. 그에 할머니, 고개를 쭉 빼고 병실 문밖을 살핀다. 그 의미를 알아챈 재원부, 얼른 시선을 피하고. 호영, 역시 얼굴을 흐린다.

할머니 재원이는? 화장실 갔어?
재원부 ...
호영 (겨우 웃으며, 할머니 바라보는)

  정적이 흐른다. 할머니, 대답 없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빛으로 답을 구한다.

재원부 (시선 피한 채로) 엄마. 걔가 요즘 어떤 때인데요. 학교가 바빠요.

  할머니, 가만히 재원부를 바라본다. 그 눈빛, 모든 풍파를 겪어낸 후의 고요함과 닮았다. 하지만 잠시 후 특유의 샐쭉한 얼굴로 돌아오며 입을 삐죽이고.

할머니 잉, 그래두. 얼마 만에 보는데. 못 본 지가 오래됐어. 너무 오래됐어...
호영 ...
재원부 그렇게 오래 안 됐어요. 보세요, 저번에 왔을 때 찍은 거 있네요.

  재원부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할머니와 재원의 사진이 있다. 재원의 방에 있던 것과 같은 사진. 재원, 할머니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미소가 해맑다.

할머니 (얼른 집어 들고) 으응? 이게 어디 있었어? 나 이제 알았잖어.
재원부 저번에 왔을 때 찍어드렸잖아요.
할머니 (끄덕이며) 그래, 그랬구만... (쓰다듬는) 아이구, 내 새끼. 이쁘다 이뻐.

  호영, 더는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군다. 재원부 역시 병실 밖의 상황을 살피는 척 감정을 감추는 데 필사적이다. 재원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원부 엄마, 저 선생님 좀 뵙고 올게요.
할머니 (사진에 시선) 선생? 그래. 그래...

  재원부, 고개를 떨군 호영에게 짧은 시선 준 후 얼른 병실 밖을 나선다. 할머니, 재원의 사진을 다시 올려놓으며 길고 가는 한숨을 내쉰다. 곧 창밖으로 시선 이동한다.

호영 (그 모습 바라보는)
할머니 ... (창가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흔들리는 시선)

S#51. 동 / 병실 앞

  재원부, 병실 복도 벽에 숨어 입술을 꽉 문다. 눈이 붉어져 겨우 눈물을 삼킨다.

S#52. 동 / 병실 안

  호영,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주름진 손 위에 제 손을 포갠다. 가만히 쓸어보는데... 그 위로 뚝. 뚝.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호영 (울컥. 얼굴을 구기며 필사적으로 울음 참는)

  할머니, 어느새 아이처럼 방울지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를 마주 보는 호영 역시 눈물을 참을 수 없다.

할머니 생각해보니까... 우리 애기 옷이 교복이잖어.
호영 (입술이 붉어지게 꽉 무는)
할머니 호영아, 호영아.
호영 ... (쉰 소리, 겨우) 네.
할머니 (애원하는) 재원이 어딨어. 우리 재원이, 보여줘. 재원이 어디 있어, 응?

  호영, 더는 참을 수 없는 울음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저 할머니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울기만 한다.

할머니 호영아.
호영 ... 죄송, 죄송해요. 어머니.
할머니 (심장이 툭 떨어진, 놀라서) 왜 죄송해. 네가 무엇이 죄송해. 응? 호영아.

  호영, 할머니의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운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호영 (고개 들지 못하는 그대로) 제가, 제가 교육을 잘못 시켰나 봐요, 어머니. 그 싹수없는 놈이. 친구들하고 놀기 바빠서 할머니 뵈러 오기 귀찮단 거 있죠. (끅끅대고 우는)

  할머니, 마음이 찢어지는 눈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엄하게 얼굴을 굳히면서.

할머니 그놈의 자식. 나쁜 놈의 자식!

  소리 내 오열하는 호영. 그 손을 꼭 잡아주는 할머니.

호영 죄송해요. 제가 죄송해요.
할머니 (눈물 흐르며) 할미 보러도 안 오는 이 나쁜 놈의 자식!

  할머니의 손이 애처롭게 떨린다. 호영, 사라질 듯한 그 존재감을 겨우 붙잡는다.

S#53. 동 / 병실 앞

  어느새 돌아서 달려가고 있는 재원부의 뒷모습.

재원부 (소리 없는 오열, 눈물 닦는)

S#54. 호영의 집, 마당 (과거 / 낮)

  어린 시절의 재원, 할머니의 앞에 서서 열심히 동요를 부른다.

할머니 (그저 이뻐서, 박수 치며) 아이구, 내 새끼.

  재원, 노래를 마치고 할머니의 품에 달려와 폭 안기는. 그를 바라보는 호영 부부의 행복한 얼굴.

S#55. 재원부의 차 안

  재원부가 운전하는 차 내부. 나란히 앉아 돌아가는 길이다.

호영 (창밖만 보는)
재원부 ... 고맙다, 너 바쁜 거 아는데.
호영 ...

  잠시 차가 더 주행하다가, 신호를 받아 멈춰 선다. 호영의 시선에 차 옆 인도를 걷는 단란한 가족이 보인다. 호영,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호영 그 애 있잖아.
재원부 ...? (의미를 몰라, 바라보는)

  재원부를 돌아보는 호영. 재원부, 호영의 텅 빈 눈동자를 보다가... 의미를 알아챈 듯 표정을 굳힌다.

호영 (다시 시선 돌리고) 그 애. 사건 후에 만났었지.
재원부 ...
호영 당신은 만났지?
재원부 당신은 그때. 많이 아팠잖아.
호영 그 애 엄마도... 만났었어?
재원부 ...

  무언의 대답. 호영, 마른 입술을 축인다.

호영 뭐라, 그랬어? 그때 그 여자가... 당신한테, 뭐라 그랬어?
재원부 ...

  호영, 한참 대답을 기다리지만 재원부, 입을 떼지 않는다. 신호가 바뀌고 뒤의 차량이 가볍게 클랙슨 울리면 재원부 출발한다. 호영, 그런 재원부를 바라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S#56. 상인동, 호영의 집 앞 (오후)

  재원부의 차가 호영의 승용차 앞에 선다.

호영 ...
재원부 ... 내려야지.
호영 (한참 후에) 오늘도 안 들어갈 거야?
재원부 안 들어가, 어서 내려.
호영 ...

  호영, 차에서 내려 대문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다 운전석의 재원부 앞에 선다. 재원부, 고집스럽게 집을 바라보지 않다가... 창문을 내리고 호영을 올려다본다.

호영 ...
재원부 ...
호영 ... 당신한테 이 집은, 재원이가 죽은 집이구나.
재원부 (눈가 붉어지는)
호영 근데 여보. 나한테 이 집은 말이야.

  호영의 시선에 노을빛을 받은 집이 아름답다.

호영 (꿈을 꾸듯, 집을 바라보며) 우리 재원이가 태어난 집이야. 아장아장... 첫걸음을 뗀 집이야.
재원부 (눈물 젖어 들고)
호영 처음 학교에 보낸 집이야. 첫 생일 파티를 열고...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초대했던 집이야.

  재원부, 눈빛 흔들리지만 끝내 집을 보지 않고 앞으로 고개 돌린다.

호영 나한테 이 집은, 그런 집이야. (재원부 바라보며) 재원이의 모든 처음. 재원이의 마지막이 아니라... 재원이의 처음이야. 이 집은.

  재원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차창을 올린다. 호영을 홀로 두고 사라지는 재원부의 차.

S#57. 동 / 재원의 방

  호영, 방금 전의 외출복 그대로 재원의 방에 우뚝 서 있는 뒷모습. 천천히 방안을 둘러본다.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재원의 흔적 그대로다.

호영 ... (시선 끝에)

  할머니와 다정하게 찍은 재원의 사진이 보인다. 다가가 액자를 집어 드는 호영. 소중하게 쓰다듬고, 소매를 끌어와 이미 깨끗한 유리를 몇 번이고 훔쳐 닦는다.

호영 (곧 울컥. 입술을 무는)

  호영의 떨리는 손끝이 사진 속 재원의 얼굴에 겨우 닿는다. 애처로운 손길이 점점 더 강해져 마구 문지른다. 투명하던 유리 위에 지문 자국이 남는다.

호영 재원아.

  호영, 사무치는 고통에 가슴에 품어보는 재원의 사진.

호영 재원아...!!

S#58. 선화의 집, 부엌 (저녁)

  선화, 아주 희미한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텅 빈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들려온다.

선화 ... (천천히 돌아보는)

S#59. 동 / 집 앞

  호영, 이성을 잃고 선화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다. 마구 초인종을 누르고... 그래도 답이 없자 다시 쾅쾅! 문을 두드린다. 잠겨있는 손잡이를 마구 돌려보기도 한다.

호영 (눈에 핏발이 서서, 입술을 깨물고)

  호영이 초인종을 연타할 때, 문이 열리고... 퀭한 눈빛의 선화가 호영을 마주한다.

호영 ... (한 서린)

  호영, 선화를 밀친 후 집 안으로 쳐들어간다. 밀려난 충격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선화 보이는 그대로... 현관문 천천히 닫힌다.

S#60. 동 / 거실

  호영, 사나운 눈빛을 홱홱 돌려가며 선화의 거실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 시선 끝에 선화 모자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호영, 순간 눈이 돌아 그것에게 다가가 바닥에 내리친다. 투명한 플라스틱이 분리되자 사진이 튀어나온다.

호영 (분에 차서, 세로로 길게 사진을 찢는)

  사진 속 민서와 선화의 사이가 갈라지고 나머지마저 북북 찢어 발겨진다. 민서의 얼굴이 훼손되기 직전, 몸이 흔들리는 충격에 호영이 사진을 놓친다. 선화, 호영이 놓친 민서의 사진을 품에 안고 눈물 고인 눈으로 호영을 노려본다.

  호영, 물러서지 않고 다시 달려들어 뺏으려 한다. 두 사람 간의 무언의 실랑이가 살벌하게 이어지고... 결국 서로에게서 밀쳐져 거친 숨을 내쉰다. 선화, 등 뒤로 민서의 사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다.

호영 ... 대체, 무슨 염치야?
선화 (덜덜 떨며, 노려보는)
호영 대체 왜 나타난 거야.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질려서) 네가, 네가 인간이야? 니들이 인간이니?!

  선화, 한기라도 느껴지는 듯 온몸을 떨면서도 노기에 가득 차 호영을 노려본다.

호영 대체 무슨 짓이냐 묻잖어. 왜 내 눈앞에 나타나 이러는지 묻잖아!!! 그래, 네 아들한테 새끼 잃은 년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네가 정말 사람이야?!!

  호영, 여전히 등 뒤로 민서의 사진을 감춘 선화를 보고 울컥. 열이 올라 달려들어 사진을 빼앗아 든다.

호영 (마구 찢으며) 어디 봐. 어디. 왜 숨겨, 왜! 이 사진 따위가 뭔데!
선화 (억장 무너지는)
호영 이 사진 따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 종이 쪼가리가!!
선화 (벌벌 떨며, 노려보는)
호영 내 새끼는 사진 하나 멀쩡하고 모든 게 사라졌는데. 네 새끼는 이 사진 한 장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호영, 찢어진 사진을 뭉쳐 선화에게 던진다.

호영 (이를 갈며) 사죄 같은 거 받을 생각 없으니까 당장 꺼져. 네가... 니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선화 ...
호영 나는 네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어.

  선화, 핏발 선 눈으로 한 번도 호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으득. 하고 이 갈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선화의 입술에 피가 고인다.

호영 (움찔, 몸이 떨리고)
선화 ... 용서? 사죄?
호영 (질려서 보면)
선화 난 그런 거 하려고 온 거 아니야.

  호영, 스스로의 안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다. 숨이 턱 막히고...

호영 (귀를 의심하는) 뭐...?

  선화, 천천히 주저앉아 민서의 사진을 주어 모은다.

선화 ... 당신. (숨을 겨우 내쉬며) 그리고 당신 아들...
호영 (경악으로, 질려서 내려다보는)
선화 그 누구도 사죄 같은 거 받을 자격 없다고.

  호영, 말을 잃고 선화를 바라보다가... 괴성을 지르며 선화에게 달려든다. 선화, 호영에게 밀려나 목이 졸린다.

호영 (목을 조른 손을 몇 번이고 흔들며) 네가 지금 그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감히!!!
선화 (숨 막힌 목소리로) 당신 아들이, 내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었어.
호영 (어이가 없고, 눈물이 다 나는)
선화 네 아들은 내 아들 인생을. 그리고 미래를 죽였어!!
호영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멱살 쥐고 흔들며 괴성 지르는)
선화 (더 큰 목소리로, 비명 같은 절규) 넌 네 아들이 당한 아픔만 생각하지!! 네 아들이 아팠던 건 단 하루야!!! 아니, 몇 분이야!
호영 (우뚝 행동이 멈추고, 얼이 빠져 내려다보는)
선화 내 아들이 아팠던 건 몇 년이야! (오열하는) 네가 정말 몰랐어? 네 잘난 그 아들이. 그 우습지도 않은 장난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지옥이라는 거. 네가 정말 몰랐어!!!
호영 (목을 조른 손 부들대고 떨리는)
선화 넌 네 아들이 저지른 죄는 돌아보지도 않았지. 넌 내 아들이 받은 상처는 생각해본 적도 없을 거야.

  선화, 제 목을 조른 호영의 손 위로 제 가슴을 마구 할퀸다. 선화의 손톱이 선화의 가슴팍과 호영의 손목에 붉은 선 자국을 남긴다.

선화 아악!!! 아악!!! (절규하며, 마구 제 가슴팍을 치는)
호영 ... 미쳤어. 미, 미쳐서... (거의 쓰러질 듯, 눈앞이 가물한)
선화 그래서 왔어! 나는 이 동네에, 내가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이 동네에!! 그래서 왔다고! 너와 네 아들이. 죽음 하나로... 피해자인 척 슬퍼하고만 사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눈물로, 실성한 웃음 흘리는) 그래서.
호영 ... (비어버린 눈으로, 선화에게서 시선을 올려 허공을 보는)
선화 (여전히 핏발 선 눈으로) 내 아들이 죽인 건. 네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야. 이제 내 아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늙어서야 그곳을 나오겠지.

  호영, 조금씩 얼굴이 구겨지고... 눈물이 흐른다. 꺽꺽대며 커지는 울음.

  선화,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힘을 쭉 빼고 팔을 펼쳐 눕는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에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다.

선화 (서글프게) 왜 괴롭혔어... 우리 민서가, 내 아들이... 어디가 그렇게 미워.
호영 (몸을 떨며 우는)
선화 이런 동네에 사는 외동아들이... 대체 내 아들 돈을 뺏어다 어디에 쓴 거야? (눈을 감고, 크게 소리치며) 왜 아들을 그렇게 키웠어? 왜!!

  호영, 선화의 어깨 부근을 손에 꽉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운다. 선화, 그런 호영을 세게 밀쳐낸다. 호영, 밀쳐져 주저앉은 그대로 오열한다. 선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호영을 한 서린 얼굴로 내려다본다.

선화 (서늘하게) 내 아들은 죄 없어! 죽어도 죄 없어!!!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게 뭐가 나빠!!!

  선화, 거친 손길로 눈물 젖은 제 얼굴을 훔쳐낸다. 호영, 흔들리는 시선으로 겨우 올려다보면.

선화 이미 오래전에 내 아들을 영혼부터 죽인 게 네 아들인데.

S#61. 강석네, 침실 (밤)

  강석모, 스탠드 조명만 켜진 어두운 침실에서... 손톱을 물며 서성이고 있다. 침대 위 강석부는 세상 모르게 자는 중이다.

강석모 ... (한숨) 아무리 그래도, 호영 언니한테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겠지.

  강석모, 제게 닥친 고민이 막막하고 답답한, 작은 짜증 내며 침대로 돌아가 눕는다.

S#62. 교도소, 접견 대기실 (오전)

  선화, 접수처의 알림판에 제 접수번호가 뜨자 인포메이션으로 다가간다.

  직원 민서 씨, 접견 거부하셨습니다.
선화 ...

  선화,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잠시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선화 ...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직원 (마음이 안 좋은)
선화 수고하십시오.

  선화, 차분한 걸음으로 교도소를 나선다.

S#63. 호영의 집, 침실 (낮)

  호영, 땀에 흠뻑 젖어 침대에 누워있다. 머리맡에 약봉지와 물컵 놓여있다. 질끈 감은 눈을 겨우 뜨는 호영.

호영 ... 재,원아..

  호영의 부은 눈이 느리게 껌벅이며 천장을 바라본다.

S#64. 호영의 집, 침실 (과거 / 오전)

  현재와 다른 구조의 부부침실. 재원부, 선식류의 음료를 준비해 안방으로 들어온다. 눈이 벌겋게 핸드폰을 훑고 있는 호영. 재원부, 얼른 다가가 뺏어 든다.

재원부 이런 걸 왜 보고 있어!!
호영 여보...
재원부 어서 누워. (정신없는) 아니, 이거 좀 마셔.
호영 여보... 사람들이 왜 우리 재원이를 욕하는 거야?
재원부 (흔들리는 눈빛)
호영 우리 재원이가 걔를 괴롭혔대. 때렸대. 돈도... 뺏었대.
재원부 (이를 악물고, 눈 피하며) 아니야.
호영 (눈물 고이고) 여보, 그런 거짓말을 하게 두면 어떡해. 사람들이 우리 재원이를... 불쌍한 내 아들을 모함하는데! 재원이가 어떤 앤데, 얼마나...

S#65. 호영의 집, 침실 (낮)

  다시 홀로 된 침실. 새우 자세로 누워 와들대고 몸을 떤다. 치아가 닥닥 부딪힌다.

S#66. 호영의 집, 재원의 방 (과거 / 낮)

  호영, 거실을 지나가다가 아이들 왁자지껄한 소리에 흐뭇한 얼굴로 문틈을 살핀다. 그때 재원이 마구 웃으며 민서의 뒤통수를 퍽 때린다.

호영 !!!
민서 ... (고개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떠는)
친구 야, 뭘 오바야. 뇌진탕 왔냐?

  호영,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대지만... 쉽사리 들어서지 못한다. 잠시 후 아이들 와하하 웃는 소리 들린다. 호영, 문고리에서 천천히 손을 뗀다.

호영 ... (찜찜한, 걱정스러운)

S#67. 호영의 집, 침실 (낮)

  호영, 눈을 감고 한기를 억누르며 잇새로 내뱉는다. 쉰 목소리로 중얼대는 소리.

호영 우리 재원이가 얼마나 착한데. 우리 재원이가 얼마나 바른데. 우리 재원, 재원이가 얼마나... 얼마나.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억누르는 호영.

S#68. 선화의 집, 서재 (늦은 오후)

  텅 빈 서재, 덩그러니 놓인 책상 위 노트북 앞에 앉은 선화. 화면에는 교도소 홈페이지 접견 신청란이 떠 있다.

선화 ...

  비어있는 신청 양식을 바라보다가, 하나씩 입력하는 선화.

S#69. 경찰서 앞, 프레스존 (과거 / 낮)

  민서를 태운 봉고가 멈춰 서면... 벌떼 같은 취재진이 모여든다. 곧 차 문이 열리고 민서가 내린다.

기자1 같은 반 친구를 그렇게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자2 학교폭력이 있었다던데, 사실입니까?
기자3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십니까?

  민서, 인파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이며... 양옆의 경찰과 함께 겨우 걸음을 옮긴다. 모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민서 ...

  민서, 대답 없이 이동하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누군가를 찾듯 움직이는 시선. 하지만 경찰에 의해 연행되며 시선 다시 돌아간다.

S#70. 선화의 예전 집, 거실 (과거 / 낮)

  그 모습을 집 소파에 앉아 보고 있는 선화. 이미 불어 터진 붉은 눈에는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

선화 ... (그저 화면 바라보는)

  온몸이 떨리는 선화, 눈에 피가 몰려 붉게 충혈된다.

S#71. 호영의 집, 거실 (오후)

  호영, 겨우 조금 회복한 듯... 퀭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다. 켜지지도 않은 티비를 빤히 보고 있다. 그때 벨이 울린다.

호영 (반응하지 않는)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린다. 호영, 천천히 돌아보면... 인터폰 화면에 강석모의 얼굴이 보인다.

호영 (여전히 앉아, 바라만 보는)
강석모(F) ... 언니, 저예요. 갑자기 미안한데...
호영 ...

<시간 경과>

  강석모와 호영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대충 보아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식탁, 강석모, 어색함에 어디에도 손을 내려놓지 못하다가 다시 제 무릎으로 손을 가져간다.

호영 (그저 그 모습 바라보는)
강석모 ... 잘, 지냈. (적절하지 않은 말인 것 같아, 끝맺지 못하는)

  둘 사이에 짙은 정적이 지나간다. 호영, 거칠게 쉰 목소리로 입을 연다.

호영 ... 무슨 일이야?

  강석모, 호영을 바라보며 한참을 주저한다.

강석모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호영 ...
강석모 그...

  강석모,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어 시선이 방황하다 거실로 향한다. 순간 소름이 돋은 강석모,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다.

호영 (그 모습보다가, 무표정한 너털웃음) 무서워?
강석모 (바짝 굳은, 고개 빠르게 흔들며)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호영 저기가 재원이 죽은 곳이라서 무서워?
강석모 ... (울듯) 언니.
호영 내가 너희들. 우리 집 앞으로 애들 걸어다니는 것도 싫어하는 거... 모를 줄 알지.

  강석모, 두려움에 압도되어 그저 바라본다.

호영 여기가... 귀곡산장이야? 귀신의 집이니...?
강석모 (눈물 고인)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호영 (점점 이성 잃어가며) 그렇잖아... 너희 그랬잖아. 그 일 있고... 우리집 쳐다도 보기 싫어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해봐.

  강석모, 눈을 껌뻑이며 바라만 보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석모 ... 가볼게요.
호영 왜 왔어.

  강석모, 그 말에 우뚝 멈춰서서... 본 목적을 상기하며 고민한다. 주저하며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다가...

강석모 (결심한 듯) 놀라지 말고, 들어요. 언니.
호영 ... (텅 빈 눈으로 올려다보며) 내가 뭐에 더 놀라겠어.
강석모 ... (한숨 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저기 새로 이사 온 선화 언니.
호영 (의외의 언급에, 표정 달라지는)
강석모 (몇 번이고 더 주저하다가, 겨우 용기 내서) 그 아이 엄마예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강석모, 알 수 없는 호영의 반응에 눈치만 살핀다.

강석모 (못 믿나 싶어서) 그 아이, 그 애 엄마라니까요! 이민서 엄마라구요! 무슨,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일부러 접근한 거예요. 우리 동네에.
호영 ...
강석모 ... 언니, 내 말 듣고 있어요?!

  호영, 가만히 강석모를 바라보다가... 식탁의자에서 일어난다. 강석모, 왜인지 바짝 쫄아 한걸음 물러선다.

호영 ... 가. 이제. (돌아서는)

  강석모, 호영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당황하며 돌아선 호영을 멍하니 바라본다.

강석모 ... 설마, 알고 있었어요?
호영 (멈춰서서, 바라보는) ... 다신 우리 집 오지 마.
강석모 ...
호영 혹시 또 알아? 내 불행이 너한테 옮을지.

  강석모, 눈동자 가득 충격이 어린다.

S#72. 호영의 회사, 사무실 (낮)

  호영, 텅 빈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며 타이핑 친다.

강석모(E) 그 아이, 그 애 엄마라니까요! 이민서 엄마라구요!
호영 ... (멈추는)

  직원들, 제 일을 하다가도 조마조마한 얼굴로 호영의 눈치를 살핀다.

호영 (표정 변화 없이, 다시 타이핑 시작하는)

S#73. 거리 (늦은 오후)

  호영, 재원이 다녔던 고등학교를 지나쳐 운전해오지만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표정은 여전히 공허하다.

S#74. 호영의 집 앞 (저녁)

  호영, 차를 세운 후 문을 잠그며 돌아 나오는데 문 앞에 인영이 보인다. 수호, 핸드폰을 보며 쪼그려 앉아 기다리다가 호영을 보고 씩 웃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호영 ... 수호야.
수호 아줌마.
호영 ...
수호 좀 늦으셨네요. 요즘도 많이 바쁘세요?
호영 (재원을 보듯, 애달프게 바라보는)
수호 (눈썹 움직이며, 장난스레 웃는)
호영 너 이러고 있으면 엄마가 싫어하셔.
수호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 으쓱) 그럴 리가요.

  정적이 흐른다. 호영, 가만히 수호를 바라보면... 수호,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낸다. 크지 않은 향수 상자다. 수호, 새삼 쑥스러운 얼굴로...

수호 어, 이거...
호영 (가만히 내려다보는)
수호 내일 재원이 형 생일이잖아요.

  호영, 순식간에 눈물이 고여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를 알아챈 수호도 울컥해 시선을 피한다.

호영 (한참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마워, 수호야.
수호 ... 향수예요. 형이 저 사줬던 거랑 같은 건데... (애써 웃고) 예전에 제가 형을 너무 따라 하고 싶어 하니까 똑같은 걸 사주더라고요. 형도 웃기죠. 참...
호영 (슬프게 웃으며) 그랬구나.

  수호, 마음이 아파 그저 바라본다. 호영, 어린 수호 앞의 눈물이 민망해 얼른 얼굴을 훔친다.

수호 생일 축하해요.
호영 (다시 눈물, 입술을 물면)
수호 형한테 그렇게 전해주세요. 아줌마.

  호영, 눈물이 고여 그저 바라본다. 그를 마주 보다가 돌아서려는 수호... 호영, 수호의 뒷모습에.

호영 수호야.
수호 ... 네. (하고 돌아보면)
호영 (보다가) 재원이, 좋은 형이었지.
수호 ...
호영 우리 재원이, 수호한테 좋은 형이었지?
수호 (슬픈 미소로) 그럼요.
호영 그래... 우리 재원이. 그랬을 거야.
수호 아주 좋은 형이었어요. 재원이 형. 친형처럼, 좋은 형.
호영 (끄덕이며, 넋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그랬어. 우리 재원이...
수호 ... (마음 아픈)

  호영, 터져 나오는 감정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온 얼굴이 눈물에 젖는다.

호영 근데, 왜... 왜...
수호 (함께 우는)
호영 근데 왜 그랬을까...
수호 아줌마...
호영 왜 그랬을까, 수호야. 재원이가. 너한테 그렇게 좋은 형이었던 재원이가. 대체 왜... 왜 그랬을까.

  수호, 다가가 호영을 감싼다. 호영, 너무나 그리웠던 품에 안겨 어깨를 떤다.

S#75. 강석네, 거실 (저녁)

  강석모, 간단한 다과를 차려둔 거실... 초조함에 가만있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강석모 (깜짝 놀라는) !!

  강석모, 얼른 나가 문을 열어준다. 연정네 부부와 수호네 부부가 들어선다. 다들 강석네의 초대에 웃음으로 들어서는데... 강석모만 굳은 얼굴이다. 두 부부, 가져온 짐들을 거실 한편에 놓아둔다.

연정부 안녕하십니까~ 강석 아빠는 아직도 중국?
강석모 (생각에 잠겨 있다가) 네? 아, 네. 네. 좀 더 있다 올 거예요.
수호부 아이고~ 고생이 많으시네.
연정모 애기는 자?
강석모 ... 응.

  연정모와 수호모, 강석모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시간 경과>

  동네 사람들, 차를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 강석모만 딴 세상에 있는 듯 정신이 팔려있다.

연정모 ... 강석아. 정말 왜 그래, 오늘?
수호모 그러니까... 오늘 진짜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
강석모 (한참 후에) 응?
연정모 어디 안 좋아? 컨디션 나빠?
수호모 왜 그래... 오늘 막내 많이 까불었어?

  여전히 대답 없는 강석모에... 그를 본 남자들도 심각해서 시선 집중된다.

연정모 (순간 떠오른 생각에, 파리해진 얼굴로) 설마... 강석 아빠랑. 아니지?
연정부 여보. 괜히 부정 타게 그런 말을 왜 해.
연정모 어, 미안 미안. (아차 싶은) 아니, 나는 강석 엄마 저러는 걸 처음 봐서...
수호모 무슨 일이야. 우리한테 못 할 말이 뭐야.
수호부 ... 무슨 일이에요. 정말. 다 같이 해결해요. 우리.
수호모 그래, 얼른 말 해봐. 나 불안해 죽겠어!

  강석모, 그 말에 두려움에 질린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본다.

강석모 ... 드릴 말씀이 있어서 부른 건 맞아요. 근데, 저희 집... 일은 아니에요.
수호모 (끄덕이며, 기다리는)
강석모 ... 재원이네. 일이에요.

  그 말에 사람들, 표정 굳어진다. 부부끼리 시선이 오간다. 강석모,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한참을 더 주저한다. 입술을 물고...

강석모 ... 재원이 그렇게 한, 민서라는 아이...
수호모 (눈 조금 커지는)
강석모 새로 이사 온 선화 언니네 아들이에요.
연정모 !!

  얼음물을 끼얹은 듯 사람들 사이에 소름 돋는 적막이 흐른다.

강석모 확실, 해요. 제가 확인도 했어요...
연정부 그게, 그게... 정말,
강석모 (O.L / 호소하듯) 호영 언니도 알아요!
연정모 ... (두려움에 질려서)

[플래시백] S#71.
  강석모, 호영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당황하며 돌아선 호영을 멍하니 바라본다.

강석모 ... 설마, 알고 있었어요?
호영 (멈춰서서, 바라보는) ... 다신 우리 집 오지 마.
강석모 ...
호영 혹시 또 알아? 내 불행이 너한테 옮을지.

  강석모, 눈동자 가득 충격이 어린다.

  다시 현재, 아무도 입을 떼지 않는 강석네 거실. 연정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저 멀리 호영의 집을 바라보면... 사람들 시선 차례로 따라간다.

S#76. 호영의 집, 부엌 (아침)

  호영, 부엌에서 요리 중이다. 한솥 가득 끓이고 있는 것은 미역국. 그 외에도 잡채, 떡갈비 등 다양하다.

호영 (감정을 지운, 편안한 무표정)

  호영이 섬세한 손끝으로 도시락에 음식들을 담는다.

호영 (한참 후에, 아주 작게 웃는)

S#77. 동 / 집 앞

  호영,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선다. 조수석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오른다. 한편 선화의 집은 불이 꺼져있다.

S#78. 호영의 차 안

  호영, 부드럽게 차를 몰아 이동 중이다. 신호가 받아 차가 멈춰서고...

호영 (애정 어린, 도시락 바라보는)

  호영, 조수석에 놓인 도시락을 다시 한번 안전히 자리한 후 신호를 받아 움직인다.

S#79. 상인동, 마트 (낮)

  선화, 카트를 끌며 간단한 장을 보고 있다. 신선 코너에서 제품을 비교하며 고르던 중... 저 멀리 마트에 들어서는 강석무리 세 여자를 발견한다.

선화 (옅은 미소로, 아는체하려는데)

  세 여자, 그런 선화를 발견하고 귀신이라도 본 듯 표정을 굳힌 채 얼른 뒤돌아선다.

선화 ...?

  강석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트를 나서고 수호모와 연정모, 선화를 힐끔대며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 고개를 떤다.

선화 (가라앉은 얼굴, 그제야 이유를 알듯한) ...

  우뚝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선화와는 달리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듯한 연출.

S#80. 봉안당, 외부 (낮)

  간단한 제사를 위해 마련된 봉안당 뒤뜰의 공간. 거대한 석판 위에 호영이 준비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고... 해맑게 웃는 재원의 사진 놓여있다.

  호영, 제대로 차린 생일상에 마지막으로 수저를 놓아준다. 잠시 생일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재원의 사진을 마주 본다.

호영 ...

S#81. 동 / 내부, 재원의 제단

  호영, 도시락통을 들고 재원의 제단을 바라보고 서 있다. 유리 위로 수많은 편지들이 붙어있다. ‘생일 축하한다, 재원아.’ ‘보고 싶다. 잘 지내냐?’ ‘우리 왔다.’ 등.

호영 (바라보는)

  잠시 후 호영, 그를 남김없이 떼어낸다. 처음엔 하나하나 조심스럽던 그 손길이 점점 빨라져 결국엔 박박 긁어내듯 치워버린다.

호영 (입술을 물고, 단호한)

  그제야 다시 유리 너머로 제단의 전체모습이 보인다. 호영, 손안에서 편지들을 구겨버린다.

호영 재원아.

  호영, 떨리는 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호영 재원아... (애써 웃으며) 엄마가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미역국도 끓이고 밥도 지었다? 햅쌀이야. 너 좋아하는 잡채도 하고... 떡갈비두 하고... 너 좋아하는 과자에, 음료수에... (말을 잇지 못하는)

  재원의 사진, 너무나 밝은 미소다. 그를 보는 호영, 마음이 아파 표정 일그러진다.

호영 재원아... 엄마는, 그 애 용서 못 해. (눈가 젖어 들고) 아, 아직도 나는. 네가 너무 아프고... 그래도 나는 네가 예뻐서... 용서 못 해.

  호영의 고개가 푹 떨어져 어깨가 떨리기 시작한다. 적막 속에 시간이 흐른다.

호영 그래도, 그래도 재원아... (고개 들어 다시 재원을 보며) 누군가 너 대신. 너 대신 그 아이를 미워할 수 있다면, 그게 나일 테지만 재원아. (입술 아프게 물었다가) 누군가 너 대신 그 애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나이지 않을까?

  호영의 소리 없는 눈물, 결국은 오열이 된다. 참을 수 없는 울음이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온다.

호영 재원아...

  호영, 엉엉 우는 그대로 열쇠를 이용해 유리문을 연다. 재원과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거두는 호영. 그제야 감춰져 있던 재원의 독사진이 보인다. 고등학교 입학을 맞이해 교복을 입고 찍은 단정한 증명사진이다.

호영 아직도 나는 네가... 정말, 너무 보고 싶다.

S#82. 동 / 사무실

  호영, 봉안당 관계자와 마주 서 있다. 울고 난 말간 얼굴이다.

호영 계약을 조금 빨리 끝내고 싶어요. 아이,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요.
관계자 (조금 놀란, 잠시 보다가) 저... 괜찮으시다면, 영종시에도 저희 봉안당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신다면 위약금 없이도 가능하세요.
호영 ... 잘됐네요.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관계자 알겠습니다.

  호영,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서는데 관계자, 주저하다 입을 뗀다.

관계자 저, 조심스럽지만,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호영, 그 말에 관계자를 돌아본다. 호영의 도시락 가방에 구겨진 그대로 얹혀진 편지와 사진들이 보인다.

호영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재원이 있는 곳을 알고 있거든요.
관계자 ...
호영 이제 더는,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주고 싶어요.
관계자 (가늠하는 듯, 느리게 끄덕이며) ... 네, 말씀 감사합니다.
호영 ... (고개 숙여 인사)

S#83. 호영의 차 안

  호영, 더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붉은 눈으로 운전 중이다. 신호를 받아 차가 멈추고... 조수석 창가로 상인동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호영 (느리게 고개를 틀어 보면)

  그곳에 선화, 텅 빈 얼굴로 동상처럼 꼼짝없이 앉아있다.

호영 ...

  호영, 잠시 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차를 출발시킨다.

S#84. 호영의 집 앞 (늦은 오후)

  호영, 차를 대고 내리는데... 그 뒤로 재원부의 차량 보인다. 운전석에 앉아 시선을 맞추는.

호영 (눈빛 가라앉고)
재원부 ...

S#85. 동 /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차도 내놓지 않고 말없이 앉아있다.

호영 (고개를 들어 재원부를 보면)
재원부 (어딘가에 시선)

  재원부, 조금 열린 틈을 통해 재원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얼굴, 건조하지만 너무나 아픈 그리움이다.

호영 ... 봉안당으로 오지 그랬어.
재원부 ...
호영 ...
재원부 (갈라진 목소리) 보고 싶어.
호영 ...
재원부 호영아, 나 재원이 너무 보고 싶다.
호영 (눈물이 고이는)
재원부 우리 아기. 내 아들. 정말 너무 보고 싶어...

S#86. 선화의 집 앞 (저녁)

  선화, 멍하니 아무 데나 던져둔 시선으로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선화 ... (걸음 멈추고, 천천히 올려다보면)

  날이라도 잡은 듯, 한데 뭉쳐 기다리던 강석 무리 세 여자, 선화를 따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선화 ... (한참 보다가, 걸어가 가까워지는)

S#87. 호영의 집 앞 (저녁)

  호영, 집을 나서는 재원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두 사람의 눈가가 모두 붉다.

재원부 (차를 열고, 타려다가) ...?
호영 (재원부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에 대치 상황에 놓인 세 여자와 선화가 보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재원부와 굳어진 얼굴의 호영.

S#88. 선화의 집 앞 (저녁)

  선화, 한 명씩 돌아가며 눈을 맞추지만... 세 여자 모두 소름 돋는다는 듯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피해버린다. 선화, 결국 바닥으로 시선 떨어뜨린다.

강석모 ... 이사, 가세요.
선화 (보면)
강석모 무슨 이유로 이 동네에 오신 줄은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구요. 가세요! 저희, 선화 언니, (호칭조차 께름칙한) 아니 그쪽이랑... 같은 동네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연정모 (벌레 보듯, 혐오스럽게 보는)
선화 ...
수호모 저희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죠. 그쪽, 이민서. 가해자 엄마 맞잖아요!
선화 (올려다보는)
강석모 (움찔 놀라는)
연정모 ... 버텨도 소용없어요. 저희 동네 힘 약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내보낼 수 있어요. 애들 아빠도 사정 다 알고 있고...! 진심으로 아이들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어요. 이사 가주세요!
선화 ... 저한테, 그렇게 이야기하실 권리 없어요. 전, 어디도 안 가요.

  선화의 서늘한 말에 세 여자, 말을 잃는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다는 태도의 연정모, 욱하는 마음에 위협적으로 다가간다.

연정모 권리가 없긴 왜 없어? 우리가 댁 같은 범죄자 집안이랑 살기 싫다는데!! 나가라고! 우리 동네에서 당장 나가라잖아. 지금!!
수호모 (말리며) 연정 엄마, 진정해. 감정적으로 이럴 일 아니야.
연정모 지금 이 여자 태도가 그게 아니잖아요!
강석모 언니. 왜 이래! 차분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자 그랬잖아.

  선화, 아득한 얼굴로 세 여자의 입 다툼을 바라만 보고 서 있다. 그때 선화의 시선 느리게 돌아간다. 세 여자, 말을 마치고 선화의 시선을 따라 돌아본다.

호영 ...

  저들을 보고 선 호영을 보고 펄쩍 놀라는 세 여자. 어쩔 줄 몰라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다.

호영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세 여자, 말을 잃고 호영을 바라만 본다.

연정모 ... (잘못한 아이처럼 땅만 보다가, 울컥해서 호영에게) 언니도 그러는 거 아니지! 이 사람이 그 여자인 걸 알면서 어떻게 한마디를 안 해요!!
수호모 ... 말해줬어야죠. 우리 아이들 사는, 우리 동네인데.

  호영, 말없이 세 여자를 번갈아 바라본다. 세 여자, 그 시선에 움찔 눈을 피하면.

호영 ... 너희는, 저 여자가 가해자 엄마라서 싫은 게 아니야.
선화 (보면)
호영 그냥... 싫은 거 잖아. (환멸이 나서, 헛웃음으로) 나랑. 우리 집이랑 같이... 우리 재원이랑 똑같이. 불길해서 싫은 거지.
수호모 그게 지금 무슨 말,
호영 (O.L / 소리치며) 재수 없어서 싫고! 내 동네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싫고!! 이런 일을 겪은 나랑 그렇게 친하게... 언니 동생을 하면서 지냈다는 사실 자체가 께름칙하잖아!!!
강석모 ... (울 듯)
호영 나도. 우리 재원이도. 우리 가족도... 이 동네에서 꺼져주길 바라잖아. 저 여자가 가해자 엄마라서 싫은 게 아니잖아, 너희는!!

  호영, 여자들에게 다가가 힘으로 셋을 떠민다. 여자들, 말 한마디 못 하고 혼나는 아이처럼 집에서 쫓겨난다.

호영 내 생각해서. 우리 재원이 불쌍해서 그렇다는 핑계 대지도 마. 너희는 그냥 싫은 거야. 그냥! 뉴스 한 꼭지에 나오고 말 그런 비극이... 니네 소중한 터전에서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싫은 거라고.

  재원부, 저 멀리 차 옆에서 그 소란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호영 이 여자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마. (서늘하게,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적어도 너희는. 그럴 자격 없어.

  호영, 여자들을 쫓아낸 후 제 등 뒤에 있을 선화를 홱 돌아본다. 어느새 호영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다. 선화,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마주 보면... 호영, 그대로 돌아서 저 역시 선화의 집을 떠난다.

선화 ... (말없이 우뚝 선)

S#89. 호영의 집, 거실 (저녁)

  호영, 격해진 감정으로 집에 들어서면... 재원부, 얼른 따라 들어온다.

재원부 왜 이야기 안 했어.
호영 (숨 몰아쉬는)
재원부 저 여자, 언제부터 저기 저러고 살았던 거야? 대체 왜 이야기를,
호영 (돌아보며, 눈물로) 이야기하면? 이야기하면! 당신 이 집으로 돌아왔을까?
재원부 ...
호영 당신도 그만 가.
재원부 호영아.

  호영, 재원부를 등지고 침실로 들어가면... 말없이 서 있던 재원부,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린다.

재원부 ... (받으며, 낮은 목소리) 네, 보호사님.

  재원부, 일상적인 투로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너진다.

재원부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재원부, 전화를 끊고...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삽시간에 눈물에 얼굴이 젖는다.

재원부 (흐느끼며, 거실 바닥에 얼굴을 묻는)

  호영, 소리를 듣고 침실에서 나온다. 무언가를 예감한 듯... 웅크린 재원부를 참담한 얼굴로 바라보는 호영.

S#90. 봉안당, 제단 (낮)

  재원의 할머니 사진이 놓인 봉안당이 마련된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한 재원의 자리. 호영과 재원부가 제단 앞에 서 있다.

호영 (그리운, 애처로운 눈빛으로 할머니 사진 보고, 재원 보는)

  재원부, 주머니에서 꼬깃접힌 쪽지 하나를 꺼낸다. 펼쳐보면... ‘애비야, 나 이제 재원이 볼 수 있는 게지.’ 하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다. 재원부, 할머니 제단을 열어 쪽지를 넣어둔다.

재원부 ... 그래, 호영아. 그 집. 우리 재원이의 모든 시작이야.
호영 (눈물이 고이면)
재원부 하지만, (호영 보며) 그 집. 우리 재원이의 마지막이기도 해. 재원이의, 아픈 마지막이기도 해.
호영 (애써 부정하듯, 눈물로 고개 젓는)
재원부 근데 재원이의 마지막이... 너의 마지막이어서는 안 돼.

  호영,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떨며 흐느낀다.

재원부 나랑 가. 이제, 나랑 떠나자. 호영아. (재원 사진 보며) 이제 재원이는 괜찮아. 할머니랑 있잖아.
호영 (재원부 바라보는)
재원부 (눈물로 웃으며) 사실 재원이는 엄마가 다 키웠지. 우리가 뭘 했니?
호영 (그 아픈 미소를 오열로 바라보면)
재원부 재원아. (눈물 닦으며) 이제 할머니랑 잘, 있을 수 있지. 좋은 곳에서 할머니 잘 놀아드리면서... 엄마 아빠 기다려줄 수 있지.
호영 (아이처럼 우는)
재원부 우리 아들, 조금만 있다가 만나자. 엄만 걱정하지 마, 아빠가 있잖아.

  벌건 얼굴로 엉엉 우는 호영의 어깨를 감싸 안는 재원부.

S#91. 상인동 전경 (아침)

  변화하는 계절. 상인동의 거리마다 예쁜 봄꽃이 만개해있다.

S#92. 강석네, 집 앞 (아침)

  강석모, 어린 막내를 등원시키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아이 엄마! 엄마! 나비다!
강석모 (피곤, 하품) 어어, 나비네~ 뛰지 마!
아이 나비야, 나비야.

  강석모, 노란 유치원 버스에 아이를 실어 보내고 웃음으로 손을 흔든다. 그 시선 끝에 어둠에 잠긴 선화의 집이 보인다.

강석모 ... (차분한)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저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는 강석모.

S#93. 호영 부부의 새로운 아파트 (낮)

  호영, 재원부와 함께 부동산 중개인의 안내를 받아 집에 들어선다.

중개인 경치 좋죠? 여기가 진짜 뷰가 죽여요. 두 분 노후까지 보내기에 최고죠.
재원부 낮에 너무 덥지는 않겠어요?
중개인 아유, 덥기는요. 해가 들어야 집이 곰팡이도 안 슬고... 풍수지리로도 훌륭한 거죠.
재원부 (둘러보며, 느리게 끄덕이는)

호영, 진지한 재원부의 태도와는 달리 소극적으로 집을 대충 훑어본다. 재원부, 그런 호영의 기척을 알지만 모르는 척... 다른 방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호영 ... (집 안 어디에도 길게 시선 주지 않는)

S#94. 선화의 집 앞 (낮)

  선화, 일을 본 후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그러다 한데 뭉쳐 다가오는 강석무리 세 여자와 마주친다.

선화 ...

  강석무리 역시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세 여자와 선화, 잠시 후 시선을 빗겨내며 각자의 길을 간다. 선화가 집 앞에 가까워지고.

선화 (무표정, 그러다 앞을 보면)
호영 ...

  호영, 자신의 집 앞에서 선화를 바라보고 있다.

S#95. 호영의 집, 부엌 (오후)

  호영과 선화, 무거운 침묵 속에 마주 앉아있다. 두 사람 누구도 앞에 놓인 차에 손을 대지 않는다.

호영 ... 여기로 불러서 미안해.
선화 (보면)
호영 할 말이 있어서. 그치만 우리가, 동네 카페에서 차 마실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아.
선화 ...

  호영, 선화를 바라보지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선화 할 말. 뭔가요.
호영 ... (보면)
선화 (해보라는 듯, 곧은 시선)

  호영, 천천히 차를 들어 마신다. 그리고 내려놓는다. 선화, 그 모습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바라본다.

호영 부탁할게. 한 번만.
선화 (눈빛 굳어지는)
호영 네 아들 보게 해줘.
선화 ...!

  선화, 급히 눈길 피하며 시선 흔들린다. 그리고 움찔, 순간적으로 다시 호영을 바라본다. 하지만 오래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한다.

호영 ... 마지막.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선화 (그 의미를 아는 듯, 두려움에 바라보는)
호영 (역시 마주 보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 두 사람이 시선은 마주친 그대로.

호영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선화 ...
호영 나까지. (감정을 억누르려, 입술을 물고) 네 아들 민서... 상처입힐 리 없다는 거. 알잖아.

  선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그저 바라본다.

S#96. 선화의 집, 부엌 (저녁)

  선화, 노란 등만 켜놓은 어두운 집에서 고민에 빠져있다.

호영(E) 생각해보고 알려줘. 하지만... 정말, 부탁할게.
선화 ... (어두운 눈빛)

  선화,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꼭 쥔 주먹이 식탁 위에서 바들대고 떨린다.

S#97. 동 / 집 앞 (아침)

  선화, 집을 나서면 그 앞에 이미 호영의 차 도착해있다. 운전석에서 내려 선화를 바라보는 호영.

호영 ...
선화 ...

  선화, 호영의 차로 걸어가 조수석에 오른다.

S#98. 호영의 차 안

  출발 전, 말없이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잠시 후 호영이 차를 출발시킨다. 앞을 보던 선화의 시야에 자동차 미러에 달린 호영 모자의 사진이 달랑거린다.

선화 (얼굴 굳는)
호영 (생각지 못한, 눈빛 흔들리는)
선화 (얼른 고개 돌리고)

  호영, 차가 신호를 받아 멈춘 사이, 사진을 떼어내 글러브박스에 넣는다. 선화, 고집스럽게 창밖을 보며 시선 주지 않는다.

S#99. 교도소 앞, 주차장 (오전)

  호영의 차가 멈추어 선다. 두 사람, 말없이 앉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호영 ... 혼자 갈게.
선화 (느리게 보면)
호영 여기 있어. (...) 나, 혼자 가게 해줘.
선화 ...

  호영, 선화를 조수석에 남겨두고 차를 나선다. 남겨진 선화, 차 앞으로 지나가는 호영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 글러브박스로 이동한다.

선화 ... (조금씩 떨리는 입술을 무는)

S#100. 동 / 접견실

  호영, 인포 앞에 서 있다.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호영을 올려다본다.

직원 ... 민서 씨, 접견 거부하셨습니다.
호영 ...
직원 원래, 어머니와도 접견하지 않으세요.

  호영, 시선을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긴다. 직원, 잠시 그를 기다리다가 다음 접수번호를 호출하려는데.

호영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 전해주실 수 없을까요.
직원 ...
호영 재원이. (잠시 울컥, 겨우 참고) ... 김재원, 엄마라고. 꼭 만나고 싶다고...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직원,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난다.

S#101. 호영의 차 안

  선화, 못 박힌 시선을 글러브박스에서 떼지 못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다.

S#102. 교도소, 접견실 (낮)

  호영, 접견실에 홀로 앉아있다. 초침 소리와 함께 시간이 흐른다. 그때 문이 열린다.

호영 (흠칫, 어깨가 굳는)

  호영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고... 호영의 눈이 순식간에 젖어 든다.

S#103. 호영의 차 안

  글러브박스 안, 호영 모자의 작은 사진이 보인다. 선화, 그를 집어 가까이서 바라보면... 재원, 아이같이 맑은 웃음이다.

선화 (얼굴 일그러지고, 삽시간에 눈물 고이는)

  선화의 눈물이 그 위로 방울져 떨어진다.

S#104. 교도소, 접견실 (낮)

  민서, 눈에 띄게 수척한 모습으로 차마 호영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자리에 앉는다. 호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몸을 떨며 운다. 민서의 눈가도 젖어 들고... 눈물 흐르기 시작한다.

호영 (떨리는 목소리) ... 민서야.
민서 (움찔, 여전히 보지 못하는)
호영 오랜만이지... 재원이 엄마야.

  그제야 민서,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한다. 호영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토해낸다.

호영 ... 민서야.
민서 (소리 내 우는)

  눈을 벅벅 비비며 오열하는 민서, 마치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민서 죄송합,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서, 말을 더듬으며 온몸을 덜덜 떨고... 눈물 사이로 겨우 반복해 말한다.

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호영, 그 말에 숨이 턱 막혀 한마디도 더 할 수 없다.

호영 ... 무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널 보겠다 결심했을 땐,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민서 (엉엉 울며) 죄송합니다.
호영 모, 모르겠다. 나는.... 너를 원망해야 할지, 너에게 용서를. (울음커지고) 구해야 할지.
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호영 미안하다. 나는 아직도 너무나 모자란 인간이라... 너한테 미안한 마음보다는 원망이 더 커. 미안하다, 민서야.
민서 (엉엉 우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호영 미안하다. 내가 이 정도 사람이라 정말 미안하다, 민서야.

  민서, 연신 꾸벅이다가 탁자에 고개를 박는다. 저 스스로를 벌하듯 몇 번을 더 그렇게 한다. 문 너머로 긴장해 들여다보는 교도관의 모습 보인다.

호영 (차마 볼 수 없어, 시선 떨어뜨리며) ... 너희 어머니가, 그러시더구나. 재원이가 너의 미래를 죽이고... 너의 인생을 망친 거라고.

  민서, 선화의 말에 눈빛이 흔들린다.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그대로 흐느낌만 흐른다.

호영 하지만 난, 아직도 너무 뻔뻔하고 부족해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복받치는 감정에, 겨우) 그래도 당신은 아들을 잃지 않았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영의 오열이 시작된다. 절규에 가깝다.

호영 그래도 당신 아들은 살아있잖아! 그래도 그렇지, 왜 사람을 죽이니. (참담한) 왜, 왜 네 미래를 더 소중히 여기지 않았니. 하고 혼낼 수 있는 아들이... 살아있잖아.

  민서, 다시 고개를 박으며 흐느낀다. 제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아이같이 운다.

호영 하지만 내게는 없어, 민서 엄마. 나는 잃어버렸어. (재원에게 꾸중하듯) 대체 왜 그렇게 친구를 괴롭힌 거야. 왜 때렸니? 너도 맞아봐!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너도 맞아봐!

  호영,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친다.

호영 그렇게 해서라도 가르칠 수 있는 아들이. 내게 남아있다면...
민서 (울음 그대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호영 미안하다, 민서야...
민서 ...
호영 너를 용서할 수 없어서. 나는, 나는 그래도 그게 어려워서... 정말 미안하다, 민서야...

  민서, 떨리는 손에서 얼굴을 떼 겨우 호영을 마주 본다. 두 사람의 눈이 그제야 마주친다. 서로의 고통이 선연하게 연결된다.

호영 미안하다, 민서야...

S#105. 호영의 차 안

  재원의 사진을 손에 꼭 쥔 선화, 가슴을 치며 오열한다. 재원 모자의 사진에서 겨우 시선을 뗐다가...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바라본다.

선화 (숨이 막혀, 신음하며 오열하는)

S#106. 교도소 앞, 주차장 (오후)

  호영, 위태로운 걸음으로 차를 향해 돌아온다.

호영 ...

  자신의 승용차 앞에 서 멍하니 바라본다.

호영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호영의 차 조수석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호영, 잠시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가 운전석에 오른다.

S#107. 호영의 차 안

  호영,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채 가는 숨만 내쉬다가... 어디론가 시선 이동한다. 그곳에 미러, 다시 재원 모자의 사진이 달려있다.

호영 (애처로워, 겨우 웃는)

  호영, 너무나 소중한 듯 그 사진을 엄지로 쓰다듬는다.

S#108. 호영의 집, 거실 (오전)

  하나씩 짐이 빠져나가는 호영의 집. 거실이 텅 비어있다. 그대 들어선 재원부, 둘러보며 호영을 찾는데...

재원부 (무언가를 보고, 얼굴 흐리는)

  호영, 텅 빈 재원의 방에 우뚝 선 뒷모습이다.

호영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저 보고 선)

  재원부, 더는 바라볼 수 없어 돌아서 겨우 발걸음을 뗀다. 호영은 여전히 재원의 방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S#109. 동 / 집 앞

  호영의 집 앞에 커다란 이삿짐 차가 서 있다. 장을 봐 돌아오던 선화가 그를 발견하고 잠시 바라본다.

선화 ...

S#110. 선화의 집 앞 (낮)

  선화,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호영과 마주한다.

호영 ...
선화 (시선 피하며, 손에 든 봉지 바스락거리는)
호영 잠깐, 나 좀 들어갈게.
선화 (보는)

S#111. 동 / 부엌

  선화와 호영, 마주 앉아 차를 마신다. 불편하지 않은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다. 호영, 알 수 없는 후련한 마음에 선화네 창을 통해 상인동 풍경을 바라본다.

호영 ...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선화 ...
호영 (선화를 봤다가, 다시 창가로 시선)
선화 (겨우 차를 들어 마시는)
호영 난 앞으로도, 잘은 못 살 거야. 그러니까 너도... (선화를 보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선화 (천천히 올려다보는)
호영 혼자 잘 살기만 해.
선화 ...
호영 내가 아플 때마다, 너도 아파야 해.
선화 ...
호영 네가 아플 때마다, 나도 아플 테니까.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는 그대로 짧지 않은 순간이 지나간다.

S#112. 동 / 집 앞

  호영이 집을 나서면, 선화가 마중하며 천천히 따라 걷는다.

호영 더 나올 필요 없어. 들어가.
선화 ...

  선화, 호영을 보다가 그 너머로 시선 이동한다. 호영, 무언가 싶어 돌아보면... 그곳에 조심스러운 태도의 판매원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온다.

판매원 아유, 마침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JW 정수기입니다.

  호영과 선화,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판매원 잠깐 말씀 괜찮으시죠? 혹시 지금 댁에 정수기는 사용하고 계신가요? 두 분, 서로 친한 어머님들 맞으시죠? 마침 잘됐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저희가 두 가정 커플 할인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번 프로모션이 얼마나,
호영 (O.L) 우리, 어머니들 아니에요.
선화 (호영을 보는)
판매원 ... 에?

판매원, 당황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흘려놓고... 얼른 표정을 다잡는다.

판매원 아이고,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호영 ... 이 아줌마도 나도. 아들을 잃어버렸거든요.
판매원 (당황해서, 땀이 삐질) 죄송합니다.
호영 (바람 빠지듯 웃으며) 죄송하실 건 없어요. 아저씨가 뺏어간 것도 아닌데.
판매원 저, 그럼...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선화 ... (아래를 보는 시선)
호영 (선화를 보고, 다시 판매원 보며) 굳이 호칭을 정할 건 없고... 그냥, 아줌마들이죠, 아줌마.
판매원 아... 하하.
호영 이제 어머니는 아니니까. 그냥 두 여자.

  판매원, 무어라 응대해야 할지를 몰라 멍하니 바라본다. 선화, 그런 호영을 말없이 바라본다.

S#113. 상인동 전경 (낮)

  호영, 재원부의 차 조수석에 탑승해 이사 짐차를 따라나선다. 저 멀리서 그들의 이사를 지켜보는 동네 주민들이 보인다.

호영 ...
재원부 (앞만 보며, 굳은 얼굴)

  호영, 가만히 창밖을 둘러본다. 오래 살아온 이 동네가 새삼스러운 얼굴이다.

호영 (보다가, 옅게 웃는)

  그런 호영의 앞에 재원의 환상들이 펼쳐진다.

- 다섯 살의 재원, 작은 자전거를 타고 차 옆을 달려간다.
- 초등학생 재원, 음료수를 홀짝이며 친구들과 차 옆을 스쳐 걸어간다.
- 중학생 재원, 교복을 입고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옆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

호영 (눈물이 고이고, 휙 뒤를 돌아보면)

  고등학생 재원, 호영이 돌아보길 기다렸다는 듯. 가만히 서서 보고 있다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방방 흔든다.

호영 (눈물 흐르고, 시선 떼지 못하는)
재원부 (앞만 보며, 역시 젖은 눈)

  재원, 여전히 손을 방방 흔들며... 자신은 괜찮다는 듯 되려 호영을 위로하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호영 (눈물 사이로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이는)

  호영, 다시 앞을 보고 앉는다. 그 옆에 재원부 역시 흐르는 눈물을 겨우 닦아내며 운전에 집중하려 한다.

호영 ... 우리 이제 정말, 재원이 놓아줘야 하나.
재원부 ...
호영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걸까.

  상인동을 완전히 벗어나는 호영 부부의 차량.

S#114. 호영의 집, 내부 (오후)

  텅 빈 호영의 집 이곳저곳이 차례로 비친다.

- 부부침실, 꾸며져 있던 모습과 텅 빈 지금이 교차된다.
- 부엌 역시 가득 차 있던 모습과 현재 모습 비교된다.

  그리고 재원의 방.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모습에서... 소품 하나, 가구 하나가 순서대로 사라지며... 결국 빈 공간이 된다.

  창문을 통해 텅 빈 재원의 방을 비추던 햇빛이 각도를 바꾸면... 어둠 속에 잠기는 재원의 방.

S#115. 교도소, 건물 앞 (낮)

  택시가 멈춰 서면, 선화가 내린다.

선화 (건물 바라보는)

  선화, 잠시 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S#116. 동 / 접견실

  선화, 긴장해 대기하다가 제 순서가 되어 인포로 다가간다.

직원 어서 오세요.
선화 안녕하세요.
직원 (마음이 무거운) 민서 씨... 접견, 거부하셨습니다.
선화 ...

  선화, 천천히 시선 떨어뜨리며 그 말을 곱씹는 듯... 한참을 침묵 속에 있다가. 겨우 돌아선다.

직원 ... 저, 하지만.
선화 (멈춰서서, 돌아보면)
직원 다음에는 뵙겠다고... 그렇게 전해달랍니다.
선화 ...!

  건조하던 선화의 눈에 삽시간에 눈물이 고인다. 직원이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떨어뜨린다.

선화 ... (목이 메어, 갈라진) 감사합니다.
직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선화, 가방을 꼭 쥔 손을 떨며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한다. 직원 역시 얼른 일어나 인사한다.

선화 (고개 숙인 채) ... 저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선화, 어깨를 떨며 한참을 고개 들지 못한다.

S#117. 동 / 건물 앞 (오후)

  선화, 느린 걸음으로 건물에서 나온다. 다른 방문객들이 나오는 선화를 지나쳐 건물로 들어간다.

선화 ... (천천히 돌아보는)

  건물 앞에 선 선화, 교도소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노을을 받은 선화의 그림자가 주차장을 따라 길게 늘어진다.





 

  <당선소감>

 

   나를 닮은 쓸쓸한 얘기… ‘영광’ 품고와 얼떨떨

  나에게는 더 많이 사랑하는 자식(같은 작품)들이 있기에, 사실 ‘두 여자’는 나의 아픈 손가락도 예쁜 손가락도 아니다. ‘두 여자’는 나를 닮은 자식이다.

  쓰는 내내 웃음과 즐거움을 준 A도 있었고, 엉망진창에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아도 애정을 거둘 수 없던 B도 있었다. 그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아직도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가장 나를 닮은 것은 ‘두 여자’다.

  구상부터 집필까지 조금의 막힘도 없이 헤매지 않고 달렸다. 호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했고, 선화의 그러한 행동은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에선 자연스러웠다. 어느 부분에서도 더 나은 장면을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저 따라가면 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를 닮아 쓸쓸했으며, 나를 닮아 끝까지 마음이 쓰였다. 몇 번을 보다 보면 속이 쓰려 울화가 치밀었고 몇십 번을 채우다 보면 아예 파일을 삭제해 디지털의 심연에 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작품이 결국 얼떨떨한 영광을 갖고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작가로 사는 한 절대 글의 등 뒤로 숨을 수 없겠구나 깨닫는다. 사는 대로 써야 하고 쓰는 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가까스로 얻은 첫 성취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써야 할지가 어렵다. 서늘한 기쁨이다.

  끝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내준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 1993년 대구 출생
● 유원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심사평>

 

  소름 끼친다… 읽는 내내 숨소리 한번 내지 못해

  신춘문예 심사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설렘보다는 당선작을 못 낼 경우를 예단하며 초조할 때가 많았다. 햇수를 거듭할수록 초조함은 더해 갔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당선작이 우뚝 솟아 있어 쉽게 찾았다. 당선작에 자리를 내어준 다른 작품들도 예년에 비해 풍년이었다.

  한국의 1980년 전후 정치적 격변기를 다룬 ‘초절정고수’는 풍자와 재치가 돋보이지만 그만큼의 깊이가 따르지 못했다. 또한 제목의 분위기와는 달리 액션이 감질났다. 제주4·3사건을 다룬 ‘4월이 오면’은 욕심을 부린 탓에 주제의식이 길을 잃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사건도 풍성하지만, 그래서 주제는 더 빈곤해졌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하는 대신 한 단면만 부각시켜 감성에 호소하는 건 위험하다. ‘뭐지? 이건 뭐지?’ 하며 끌려가듯 읽은 ‘도둑까치’는 산만하지만 속도감이 느껴져 점수를 땄다. 하지만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단편적이다. 없는 자는 항상 선하고, 있는 자는 언제나 악인으로 묘사되는 게 아쉽다. 그래도 종합적으로는 꽤 신선했다.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신문사는 찾기 힘들다. ‘두 여자’는 동아일보의 그간의 고집과 수고에 보답하는 작품 같다. 두 여자들 각자의 입장과 각각의 명분을 소름 끼칠 정도로 명확하게 담아내 읽는 내내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다. 신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다.

심사위원 : 이정향, 주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