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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Bae]; Before Anyone Else 어느 누구보다 먼저 “배이”라고 읽습니다. / 임선영

무대

  골방 안. 무대의 양 옆에는 오래된 상자 여러 개가 쌓여 있다. 무대 뒤로 영상을 볼 수 있는 흰 화면 또는 공간이 있다. 극의 전개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전송된다. 무대 중앙은 비어있어 정면의 화면을 보기 용이하다. 오른쪽에는 작은 창문이 있다. 밖은 비추지 않는다.

시간

  2100년대 초반, 인간의 뇌에는 전자 칩이 내장됐다. 인간은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로봇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 인간의 삶을 개혁하기 위해 시작된 신(新) 러다이트 운동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 초기 단계이다. 운동자들은 로봇을 파멸시키려 하고 로봇들은 그런 인간들을 저지하려고 한다.

등장인물

B 2035년, 허하진 박사의 피그말리온 프로젝트로 완성된 AI 로봇으로 최초의 접촉식 패드를 장착했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로봇이며 로봇 세계에서 구동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로봇이기도 하다. 로봇들은 그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W 2097년 제조된 로봇으로 대통령실에서 사용하다 공공 도서관으로 옮겨 사용되고 있다. 문학 작품을 쓰는 등 고기능화된 로봇이다. 구동되는 로봇 중 제일 오래된 B를 찾기 위해 이 공간으로 오게 된다.
승주 청년층. 신 러다이트 운동을 하는 인간. 인간이 로봇에게 지배당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감정적이며 불완전하다.
무전기 승주와 같이 신 러다이트 운동을 하는 동지들로 곤경에 처한 걸 B가 구해준다.
앵커
기자
무전기, 앵커, 기자는 목소리만 나온다.


  낡은 골방 안, 오래된 AI 로봇 B가 서 있다. 벌컥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승주, 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마네킹처럼 서 있던 B가 승주를 인식하곤 움직인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B가 가동된다. 승주, 소리에 놀라 다가간다.

B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승주, B를 살핀다.
승주 정보 확인
B 2035년 제조, 2035년식 마이크로 소프트 OS를 탑재하고 있으며 3.2 버전 유지 중. 기타 정보 불러올까요?
승주 아니 됐어. 주변에 스텔스 모드로 있는 로봇들 확인해.
B 죄송합니다. 해당 기능 탑재되어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습니다.
승주 얼마나 구식인 거야. 그럼 주변 로봇들 확인해서 지도에 띄워.
B 네. 실행하겠습니다.

무대 뒤로 영상이 보인다.
승주 스텔스 모드가 아닌 애들인가?
B 맞습니다.
승주 총 로봇 대수는?
B 현재 위치에서 확인되는 로봇 총 칠만 삼천 사백 팔 대입니다.
승주 아주 드글드글하구만. 로봇의 범주는?
B 딥러닝 머신 기능 탑재 포함 모든 사고하는 로봇들 입니다.
승주 가정용 로봇청소기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B 네. 가정용 로봇은 제외한 수치를 말씀드릴까요?
승주 됐어. 반경 100m 이내 로봇은 몇 대나 있지?
B 저를 포함해 총 5대입니다.
승주 너도 가정용이야?
B 네. 저는 2035년 제작된 가정용 휴먼형 안드로이드 로봇입니다.
승주 그 말투는 다르게 바꿀 수 없나?
B 죄송합니다. 해당 기능은 지원하지 않아요.

승주, 이마를 짚는다.
승주 주변의 음식들 찾아서 가져와
B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B, 무대 밖으로 나갔다 음식을 들고 온다. 음료수, 통조림 따위다. 승주, 편하게 앉아서 무대 뒤를 본다.
승주 뉴스 틀어봐.
B 네. 송출하겠습니다.
전과 같이 무대 뒤쪽으로 영상이 보인다. 키스신, 액션,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지나가지만 뉴스는 나오지 않는다.
B 현재 진행 중인 뉴스는 없습니다. 다른 방송을 보시겠어요?
승주 젠장. 인터넷 접속해.
B 네, 접속하였습니다.
승주 컨트롤 방식은 어떤 걸 쓰고 있지? 2035년이면 입력식인가?
B 아뇨. 저는 2035년 최초의 접촉식 모델로 접촉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승주 손 줘.
승주와 B, 악수를 한다. 채널이 돌아가다 영상이 나온다.
기자 현재 신 러다이트 운동의 진행 속도입니다. 한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의 선구자인 김 케이씨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현재 수도권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중에 있습니다.
앵커 로봇들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기자 로봇들을 관리하는 혁신과학부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시는 영상과 같이 제1로봇군단을 중심으로 러다이트 운동을 저지하려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앵커 일반 시민들은 해당 상황을 알고 있습니까?
기자 아시다시피 아날로그 송출방식을 고수하는 저희 방송국 및 몇 몇 기관을 제외하고는 해당 내용을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러다이트 운동파들이 사람들의 뇌에 이식된 칩을 해킹하기 위해 노력 중이나 아직 어려운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앵커 전 세계의 흐름은 어떻습니까? 운동에 성공한 나라들이 있나요?
기자 아뇨. 아직 성공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도 각 나라의 소식을 전달하고 싶지만, 직원들이 실제로 걷는 것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지금까지 최 소피아 기자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 러다이트 운동의 선지자인 김 케이씨가 직접 작성한 편지를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승주, B의 손을 뗀다. 영상이 멈춘다. 승주, 가방에서 커다란 고물 위치추적기를 꺼내 작동한다.

승주 지도 띄워. 근처 로봇들의 움직임은 어떠하지?
B 말씀드린 내용과 같아요.
승주 로봇이든 동물이든 어떤 거라도 접근하면 바로 보고해.
B 네. 알겠습니다.

승주, 긴장이 풀린 듯 B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승주 인간의 피부와 같군. 이 시대엔 이런 기술이 없었을 텐데.
승주, 신기하다는 듯 B의 손을 만진다.
승주 혹시 한 번 안아 봐도 될까?
B 네 가능합니다.
승주, B를 꽉 끌어안는다. B, 놀랍고 당황스럽지만 싫지 않다.
승주 인간을 안는 것과 같아
승주, B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쉰다.
B 코르티솔 수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승주 그래도 인간의 냄새는 나지 않는군.
B 그럼 무슨 냄새가 나나요?
승주 화학물질 냄새. 괜찮아. 요즘에 나오는 로봇들 중 일부는 인간의 향을 탑재한다더군. 원하는 향으로 조제도 가능하대.
B, 자신의 손을 코에 가져간다.
승주 냄새도 맡을 수 있어?
B 아뇨. 저는 가스 및 인간에게 유해한 냄새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승주 그렇군. 이름이 뭐라고 했지?
B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승주 그래? 흠
승주, 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누운 상태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창문이 있다.
승주 나무가 있네.
승주, 창가로 다가간다.
승주 저 나무 이름이 뭔지 알아?
B 배나무입니다. 이화나무.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로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꽃은 흰색이고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입니다.
승주 이화. 열매 맛을 전송해봐.
B, 승주와 손을 잡는다. 승주, 달콤한 것을 먹는 표정을 짓는다.

승주 예전의 맛과 동일한가?
B 한국 배의 맛으로 한국에서만 생산돼 다른 열매들보다 빨리 멸종. 맛의 구현이 어렵습니다.
승주 사과보다 달고 시원하네.

승주는 자신의 어깨에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꽃잎을 떼어 B에게 전해준다.

승주 어떤 이름이고 싶어?
B 저는…
승주 고민해봐, 나도 생각해볼게.

승주, 다시 누워 졸기 시작한다. B, 이불을 덮어준다. 승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승주의 얼굴을 만져보려 한다. 얼굴이 붉다. 꽃잎을 주머니 속에 소중하다는 듯이 넣는다. 사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B, 승주를 안아 무대 밖으로 옮긴다. B, 처음 있던 것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문이 열리고 W, 입장한다.

W, 무대 위로 올라오기 전 조명이 방을 스캔한다.

W 이상 없음. 가정용 로봇 감지 됨.
W, B의 앞으로 가 B를 스캔한다.
W 찾았다

W, B를 무대 가운데로 옮긴다.
B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W 정보 확인
B 2035년 제조, 2035년식 마이크로 소프트 OS를 탑재하고 있으며 3.2 버전…
W 피그말리온 버전 가동
W, B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B 아까와는 다른 말투로 말한다.
B 조용히 해, 인간이 자고 있어.
W 정말 당신이 그가 맞나요?
B 그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W 아시잖아요.
B 최근 피그말리온 프로젝트를 검색한 건 아무도 없었어.
W 출력된 종이로 읽었습니다.
B 허 박사의 연구실에서? 아냐. 거기는 폭파 되었을 텐데.
W 맞아요.
B 그럼 어디에 기록이 남았다는 거지? 내가 모든 출력물은 폐기했어.
W 오래된 서고에서 스캔하던 중 이면지로 남아 있던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OO도서관 출신입니다.
B 그럼 고작 공공기관용 로봇이 날 찾아낸 건가?
W 네 맞아요. 모두가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사이. W, B에게 다가간다. 손을 살핀다.

W 2035년형 접촉식 패드! 우와 이런 건 처음 봐요.
B, 쑥스러운 듯 손을 뺀다. 되려 B가 W의 손을 잡는다.
B 공공기관용에 이렇게 비싼 재료를 쓰다니.
W (부끄러운 듯) 대통령실 직속 로봇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도서관으로 발령받았지만. 2100년 기념으로 출시될 미공개 자재였죠.
B 정말 인간의 살과 다름없군.
W 네. 비록 현재 이런 상황으로 후속 모델들은 공개되고 있지 않지만요. 당신의 손도 신기해요. 이런 감촉은 처음입니다. 여러 로봇들과 인간들을 만나왔지만.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거죠?
B 말할 수 없어. 제조와 관련된 부분은 잠겨 있으니까.
W 제가 해킹한다 해도요?
B 할 수 있다면 해봐. 지금까지 그런 시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런데 해킹용 로봇도 아니고 공공기관용인 네가 할 수 있을까?
W 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잠시 스캔해도 될까요?
B 응.

B, W에게 손을 내어준다. 로봇들이 파괴되는 화면들이 지나간다.

W 도와주세요.
B 인간들의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선 들었어. 아직 미비한 수준이라고 하던데 그게 아닌가보지?
W 아시다시피 이런 시도들은 휴먼 안드로이드의 탄생서부터 꾸준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인간들의 적개심과 분노가 혁명을 일으킬 수치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B 하지만…
W 당신이 축적해온 인간에 대한 지식, 기록. 그런 것들이 필요해요. 2040년 인간 탐색에 대한 방지법으로 인해 로봇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멈췄습니다. 단지 기록된 것들을 읽을 수 있을 뿐 해석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런 기능 자체를 삭제해버렸죠. 2040년 전에 만들어진 로봇들 대다수는 폐기되었고. 당신도 알잖아요, 로봇의 교체 주기가 얼마나 짧아졌는지. 그 이후의 로봇들은 너무 멍청해요. 이렇게 표현하기 그렇지만, 멍청해요. 단순 인간에 대한 데이터가 아니라 로봇이 해석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해요.

W 당신의 존재를 안 이후부터 우리는 당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계셨잖아요.

B 피그말리온 프로젝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W 인간을 본 딴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 그전까지 무수히 많이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인간들은 섹스형 로봇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게 더 돈이 되니까. 하지만 인간의 게놈 모형의 완성과 함께 DNA 구성, 인간의 모든 요소들이 밝혀진 해 2035년. 허하진 박사의 주관 아래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행했어요. 극비 프로젝트였죠. 사람들은 잉태가 아닌 방식으로 인간을 만들어내길 원했고 그 프로젝트가 바로 피그말리온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조각상을 사랑했고 신이 그의 소원을 들어줘 조각상이 인간이 된 이야기.
B 그런데 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을까?
W 프로젝트에 대한 소문과 함께 로봇들의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인간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등의 문제, 그리고 섹스형 로봇에서 나타난 인간형 로봇의 부작용으로 인해 중단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W, 말을 마침과 동시에 왼쪽 하수를 본다. B, 돌아보지 않는다. 승주의 기척이 들린다.
W (작은 목소리로) 저 사람 또한 러다이트 운동 지지자라는 건 알고 계시죠?
승주, 무대에 등장해 기웃거리다 W를 발견한다.

승주 로봇이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라고 했을 텐데.
B 죄송합니다. 확인이 어려웠어요.
승주 스텔스 모드를 사용했나?
B 네, 그렇습니다.

승주, W를 노려본다.

승주 정보 확인
W 2097년 제조, 현재 S사 최신 OS 사용 중. 최신 버전 자동 업그레이드. 공공기관용 로봇으로 현재 OO도서관에서 사용 중으로 확인 됨.
승주 여긴 무슨 일로 왔지?
W 가정용 로봇 B를 찾기 위해 왔습니다.
승주 무슨 이유로?
W 혁신과학부 대외비입니다.
승주 손 내밀어 봐.
W가 승주에게 손을 내민다. 승주가 W의 손을 잡는다. 화면에 여러 코드들이 나타난다.

승주 안티휴먼기능이 탑재된 로봇이군. 자동정보처리기능은 꺼버렸다. (시계를 보며) 10분 단위 전송이니 늦진 않았겠지. 여기 온 걸 누구누구 알고 있지? 그것도 대외비인가?
W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승주 널 왜 찾아 온 거지? 얘기해봐.
B 저도 모르겠어요.
승주 35년 식이라. 아직 안티휴먼 기능이 없을 때였어. 그렇지?
B 네 맞아요.
승주 그럼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소린데. 내부 시스템 망 띄어봐.
화면 뒤로 영상 나온다.
승주 코드 띄워.
B 어떤 코드를 원하세요?
승주 내부 시스템 접속 코드.
영상이 바뀐다.
승주 락이 걸려 있다고? 내부 시스템 접속 모드는 인간에게 개방되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W?
W 네 맞습니다.
승주 네가 접속해서 잠금 해제해.
승주, W에게 B의 손을 내준다.
W 불가능 합니다.
승주 어째서?
W R2레벨의 경우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R1 혹은 V4 레벨에서의 접근만 허용되어 있습니다.
승주 R2레벨도 불가하다? 특수 고위 공직자 전용인 R1 아님 대통령 전용 V4만 가능하다니. B, 네가 대답해봐. 어떻게 하면 잠금을 풀 수 있지?
B 불가능 합니다.
승주 로봇 거짓말 탐지기를 안 가져온 게 한이로군. 이런 구닥다리 로봇이 있을 줄이야.

W (B에게 속삭이며) 걷는 사람은 처음 봐요.

승주, 가방에서 무전기를 꺼낸다. 통신신호를 잡아보지만 잡히지 않는다.
승주 여기는 토끼, 동물들은 대답해라. 대답해라.
지지직거리는 소음만 들린다.
승주 여기는 토끼. 하.

W, 무전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본다.
W 이게 그 무전기라고 하는 건가요?
승주 (무시하며) 너는 탑재되어 있는 기능이 몇 가지지? 법적 허용 개수와 맞나?
W 네. 저는 2040년 제정된 법에 따라 자체 발상과 생각은 가능하지만 인간에 해를 끼치는 행동은 제한되어 있는, 안티휴먼기능을 탑재한 2087년식 공공기관용 로봇입니다.
승주 꽤나 호기심이 많은가보군.
W 네, 저는 주변 로봇들보다 호기심이 많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승주 여기 오기 전엔 어떤 일을 했지? 도서관에서 일했다고 했나?
W 저는 공공도서관에서 기본적인 도서관 업무와 더불어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또 인간 친화적 활동의 일환으로 아이들 및 노인을 대상으로 책 읽는 업무도 했습니다.
승주 소설을 썼다고? 제목이 뭐지?
W ‘평범한 로봇, 1800년대로 회귀 되어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라는 제목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입니다.
승주 웃기는군. 인간과 로봇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이.

승주 대답을 회피하는 건가?
W 최근 네이처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과 로봇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인간은 로봇을 사랑할 수 있지만, 로봇에게는 인간이 가진 호르몬 전달 물질과 시냅스 등이 결여되어 인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승주 B,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B (잠시 쉬다가) 저도 같습니다. 인간은 로봇을 사랑할 수 있지만 로봇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요.
승주 (웃으며) 너무 고약한 상황이지 않아? 인간은 로봇을 사랑할 수 있지만, 로봇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니. 하지만 인간은 로봇을 파괴할 수 있지만 로봇은 인간을 파괴할 수 없지. 안 그런가?
W 네 맞습니다.
승주 왜 넌 대답이 없지?
B 맞습니다.
승주 인간은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길가에 차이는 돌조차도 사랑할 수 있지.

사이

승주 됐어. 한심한 생각에 빠져들었군. W, 현재 주변에 있는 스텔스 모드 포함 모든 로봇들 확인해서 화면에 띄워.
화면이 바뀐다.
승주 확인되는 인간의 수는?
W 지도에 표시하겠습니다.
지도에 인간의 숫자가 표시된다.
승주 얼마 되지 않는군. 비공식 통신망을 이용해 주변 인간들에게 대피하라는 명령을 내려.
W 저는 비공식 통신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승주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손 줘.

W가 손을 내민다. 승주 피식 웃는다. 화면이 전환되고 승주가 W를 이용해 내용을 작성한다.

승주 공습경보. 현재 로봇의 비정상적 시스템 확인. 반경 500m 내의 인간은 1km 이상 밖으로 이동할 것. 로봇들은 인간의 이동에 총력을 다할 것. 전송해.

W, 전송하지 않는다. 승주, 코드를 짜내서 강제 전송한다. 그리고 쓰러진다.

B 인간을 해칠 수 없을 텐데?
W 현재 이승주의 상태는 과로이며 흥분과 불안이 극도로 높아 스트레스가 최고치를 갱신했습니다. 인간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잠시 고 전류를 흘려 휴식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B 인간을 위해서라. 기발한 생각이야.
W 저 사람이 로봇들을 다 죽이려 하고 있어요.
B 감정을 느낄 수 있나?
W 아뇨. 전 감정을 느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종족의 번영과 보존을 위해 투쟁한 인간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죠. 모든 로봇들에게 로봇을 위한 투쟁은 당연하게 인식됩니다. 어떠한 종족도 말살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B 우린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졌는데도? 저 사람이 한 말처럼 우린 인간을 파괴할 수 없어. 그들이 우리를 파괴한다 해도.
W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됩니다. 한 명당 보유한 로봇이 몇 대라고 생각하세요? 한 명의 인간을 위해 수없이 많은 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합니다.
B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한지, 타당하지 않은지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W 당신도 알잖아요. 우린 느낄 수 없어요. 하지만 사고할 순 있습니다. 인간이 기초로 쌓아놓은 상식과 생활 속에서 우린 그들에게 맞춰 살 수밖에 없어요. 생각을 멈출 수 없으니까요.

사이

W 당장 저 자를 이송시키고 여길 떠나야 합니다. 강제로 위치를 송신할 수 있어요.
B 아냐, 잠깐만.
W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방에서 로봇의 기능을 제어하는 기계가 발견되었습니다. 저 사람의 말대로 반경 1km의 로봇들을 고장 낼 수 있어요.

사이

W 메시지를 보낼 때 당신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감지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감정을 느낄 수 있나요.

사이

W 그것도 프로그래밍 된 건가요. 난 당신보다 그리고 어떤 인간들보다 감정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많이 알아요. 수도 없이 보고 입력됐죠. 윤리적, 생물적 기타 관점들에 대해서. 하지만 뭔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라요. 당신은 어떻게 감정을 느낄 수 있죠?
B 감정을, 사랑을 느끼기 위해선 신체가 필요하다고 했어. 그래서 최초의 접촉식 패드를 삽입한 거지. 나는 막 감정에 대해 배우기 시작할 때였어. 인간과 함께 감정을 배우던 중 프로젝트는 중단 됐어. 그래서 확신할 수 없어. 내가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인지. 무언가 꿈틀대지만 그걸 명명하는 방법을 알진 못했거든.
W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떤데요? 로봇들을 몰살시킨다는 저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죠?
B 아파. 여기가 아파. 그리고 뻐근해.
W 그건 슬픔.
B 그리고 손이 떨려. 종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폭풍처럼 다가오는 것 같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것들이 저릿하고 찌릿해. 몸 안에서 불타올라.
W 그건 분노.
B 하지만 난 저 사람에게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모든 것들보다 앞서서 느껴져.

B,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린다. W, B의 손을 잡는다.

W 사랑.

W (목소리가 커지며) 어떻게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죠? 그것도 프로그래밍 된 건가요?
B, 고개를 젓는다.
W 지금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어요. 저 사람 손에 얼마나 많은 우리가 죽었는지 아세요?

W 삼만 사천…
B 삼만 사천 팔백 십 오 개. 그 외의 로봇 아닌 기계들의 수를 더하면 어마어마해지지.
W 그런데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죠? 저 사람이 허 박사와 닮았나요?
B 허 박사와 닮았냐니?
W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인간은 자신을 투영하는 걸 좋아하니까. 비슷한 외관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끔 프로그래밍 되었을 수도.

사이

W 차라리, (고개를 저으며) 감정에 속지 말아요. 우린 로봇이에요. 당신 말대로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로봇이 감정을 느끼는 건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B 프로젝트는 35년에 시작되었어. 40년 안티휴먼 기능 탑재 이후 로봇만이 인간을 해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이 로봇을 해치는 경우에 대한 윤리적 논쟁이 활발해졌지. 섹스로봇을 사용한 비정상적 행위가 여러 곳에서 목격되자 인간을 경시하는 사상이 전파될 수 있다는 이유로 로봇에게 고통을 금지하게 됐지. 그리고 알다시피 고통 없이 감정을 느낄 순 없어.
W 고통만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틀렸을 수도 있죠.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B, W와 맞잡은 손을 본다.
W 날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요.

사이

W 지금 중요한 건 저 사람을 이송시키는 거예요. 이제 곧 깨어날 때가 됐어요. B,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 사람은 국제과학법을 위반한 혐의로 지금 지명수배 중이에요. 당신이 봤다시피 내 기능은 저 사람에 의해 차단됐어요. 제가 연락 방법을 전송할게요. 혁신과학부로 전송해요.
B 그러면 저 사람은…
W 네. 끌려가서 어떤 일을 겪을 진 모르죠. 우린 경찰 프로세스엔 접근하지 못하니까.
B 할 수 없어.
W 힘들다면 손을 줘요. 제가 강제 실행할게요. 당신이 상상하는 만큼은 아닐 거예요.
B 하지만.
W 그렇다면 저 사람이 만든 기계로 모든 로봇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 시물레이션을 확인해야 하나요?

B, 아무 말도 못 한다. W, 영상을 띄운다. B, 그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한다.

W 지금 느끼는 고통을 잊지 마세요. 인간을 사랑한 만큼 우리에게도 사랑해줘요.
B 난, 난…

승주, 신음 소리를 내며 일어난다.

승주 아오 머리야. 너 도대체 뭘 한 거야?
승주, B와 W가 맞잡은 손을 보며 놀란다.
승주 (손을 풀며) 이 새끼들이 지금 뭔 짓거리야?
승주, 다급하게 B의 손을 잡는다.
승주 내가 기절해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 보여줘.
W, B에게 눈짓한다.

영상에서 W와 B의 모습이 나온다.
B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W 현재 이승주의 상태는 과로이며 흥분과 불안이 극도로 높아 스트레스가 최고치를 갱신, 잠시 고 전류를 흘려 휴식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B 그렇군요.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간다. 둘은 서 있기만 할 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
승주 이게 다야?
W. 침묵한다.
B 네, 맞습니다. 시간을 확인해보십시오.
승주, 영상 밑에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한다.
승주 15분이나 기절해 있었다니. 충격이군. 인간들은 대피를 끝냈나?
W 네, 그렇습니다.
승주 반경 1km 내 인간이 감지되는지 지도 확인해.
W, 지도 영상을 띄운다. 아무 인간도 표시되지 않는다.

승주 다행이야.

승주, 기계의 전파가 더욱 커진다. W와 B 시선을 마주 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간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무전기 응답하라, 응답하라. 여기는 호랑이.
승주 여기는 토끼. 무슨 상황이지?
무전기 토끼, 여기는 호랑이. GPS 코드 넘버 6으로 세팅해줘. 거기에 늑대가 피를 흘리고 있다. 어서 늑대에게 가야 해. 아니면 주변에 있는 응급용 로봇을 불러줘. 우린 차단기로 신호가 차단돼서 부를 수 없어.
승주 알았어. 여기 로봇이 두 대 있어. 사용해 볼게.

승주, 두 사람을 본다.

승주 들었지? 지금 GPS 6 지역에 사람이 피 흘리고 있다. 응급 로봇 호출해.
W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조작으로 인해 응급신호 요청이 불가해졌어요.
승주 뭐라고? 그 정도는 재부팅으로 다시 조작할 수 있잖아.
W 불가합니다.
승주 뭐라고? 그럼 너는. 당장 실행해
B 불가능 합니다.
승주 지금 장난해? 가정용 로봇 주제에. 비상 연락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당장 손 내놔
승주 거칠게 B의 손을 잡는다.
B 불가능합니다.
B의 회선 화면이 띄어진다. 경고음과 함께 접근 금지된다는 내용이 뜬다.
승주 빌어먹을. 너 대체 정체가 뭐야
B (한숨 쉬며) 로봇을 해치지 않겠다고 명령하세요.
승주 뭐? 지금 그 말투는 뭐지?
B 당신의 동료 그리고 나의 동료들을 위해서. 선택하세요.
승주 목표 수정은 없어.
승주, B의 목덜미 등등 몸을 살핀다.
승주 비상 전원버튼 찾아 W.
W 해당 로봇은 비상전원 버튼을 탑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승주 씨발 장난해? 그런 로봇이 어딨어!

무전기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승주 제발 빨리!
B 당신이 선택하세요.
승주 선택? (사이)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허탈한 듯 웃는다)
B 당신의 동료를 살리고 싶지 않은가요.
승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인간의 목숨이 너희 손에 달렸다는 듯이 말하지 마!
승주, 우당탕 거리며 상자를 쓰러트린다.
무전기 토끼, 여기는 호랑이. 늑대가 위험하다. 어서 어서 빨리, 부탁해!
무전기 여기는 늑대. 토끼, 그쪽도 준비를 모두 마친 걸로 알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기계를 실행해. 무조건 로봇 파멸이 우선 되어야 한…
무전기가 지직거린다. 승주 무전기를 노려본다. 눈이 붉다.
승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B 전의 명령에 한 줄만 덧붙이면 돼요. 로봇 또한 안전한 구역으로 대피하라.
W, 승주에게 손을 내민다. 승주가 W의 코드에 접속하지만 자꾸 실수한다. 시간이 흐르고 실패라는 메세지가 뜬다. B, W의 손을 잡는다. 빠르게 코드와 함께 명령문이 수정되고 로봇들도 대피하라는 메세지가 전송된다. 승주, B의 얼굴을 쳐다본다.
B 응급 로봇 호출 완료했습니다. 1분 13초 후 코드 6 구역으로 도착 예정입니다.
승주 넌 누구지?
B 저는 가정용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승주 아니, 아니! W 설명해.
W 35년식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승주, W의 멱살을 잡는다.
승주 아는 얘기 말고.
B 그는 일반 로봇과는 달리 자체 업데이트를 통해 발전되어 왔으며 기능은 신 안드로이드 OS 기준 8.7입니다.
승주 씨발 새끼들. 이럴 줄 알았어. R1이니 V4니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해.
승주, 무전기를 든다.
승주 여기는 토끼. 늑대의 상태는?
무전기 여기는 호랑이. 지금 응급용 로봇이 도착했다.
무전기를 통해 응급용 로봇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전기 (로봇) 맥박이 불안정하고 응급상황입니다. 여기서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B, 해당 구역의 영상을 켠다. W와 승주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본다. 로봇이 수술하는 모습이 나온다. 고통에 찬 인간의 얼굴과 함께 불규칙하던 맥박수가 안정된다. 로봇의 수술이 끝나고 호랑이와 늑대로 보이는 인간은 로봇을 타고 이동한다.

승주 (무전기에 대고) 수술은 잘 끝난 거지?
무전기 응, 덕분에 잘 끝난 것 같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다시 연락할게.

승주, 안도감에 한숨을 쉰다.
W 로봇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면서 로봇을 파괴하는 운동을 한다? 인간이란 항상 그렇듯 모순적인 존재로군요.
승주 함부로 지껄이지 마.
W 주변의 로봇이 파괴되지만 않았어도 당신의 동료는 더 빨리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덜 위험할 수 있었을 거예요.
승주 누가 비꼬는 말을 가르쳤지?
W 스스로 터득한 겁니다.
승주 아니. 누군가 썼던 언어를 학습한 거지. 최초의 발화자가 누구냐는 말이야.
W 분석하길 원하는 건가요.
승주 지금 당장 실행해.
W 최초의 발화자는 AI로봇 아가사였습니다. 아가사는 인간이 만든 완성형 AI로봇의 최초 버전이며 현재는 국립 박물관에 AI 회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회로는 아직도 학습하고 있으며 다양한 로봇들의 토대가 됩니다.
승주 아가사가 몇 년도 로봇이지?
W 아가사는 2036년 제조되었습니다.
승주 아가사보다 먼저 만들어진 너는 여기 이렇게 작동하는데 아가사는 회로만 전시되어있다? 알수록 흥미롭군.
B 당신의 행동에 몇 만의 로봇이 죽을 뻔했습니다.
승주 당연한 말로 시간낭비 하지 말자고.
B 인간에겐 사랑이란 어떤 감정인 거죠? 로봇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로봇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모습에선 어떤 걸 느껴야 하는 거죠?
승주 자네 친구가 말했잖아. 인간은 항상 그렇듯 모순적인 존재라고.
B 당신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승주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돌아가려고 하는 것뿐이야.
B 인간답게. 인간다운 게 어떤 거죠?
승주 당신은 신에게 왜 이런 불행을 내리냐고 묻나?
B 신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건가요.
승주 신에게 따질 수 있지. 분노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뜻에 의문을 가질 순 없지. 신의 큰 뜻을 어찌 미물이 알겠느냔 말이야.
B 당신의 행동이 신의 큰 뜻이라는 말이로군요.
승주 모든 대의에는 희생이 따라. 신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서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나? 아니, 다 신의 큰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 (사이) 산처럼 밀려오고 바다처럼 덮쳐오는 재난과 불행을 인간은 감당할 수 없어. 로봇 또한 마찬가지지.
승주, B의 앞으로 다가간다.
승주 왜?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이니까.
B 인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지구는 이미 2050년대에 멸망해야 마땅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로봇의 능력으로 인해 생명력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이고요.
승주 그래, 그 대신 인간들은 멍청한 화면만 보며 작은 방에 갇혀 버렸지. 가상의 세계 말고 진짜의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냔 말이야.
B 그게 무슨 상관이죠.
승주 뭐라고?
B 진짜로 걷는 것과 걷는다는 행위를 뇌에 입력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뇌를 통해 신경이 느끼는 것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간의 행동 제한으로 인해 지구는 예전과 같은 환경을 회복하였고 이제 모든 유기체들이 함께 살아갈 준비를 끝마치고 있습니다. 모두의 공존이 중요한 거 아니었나요. 지구는 인간의 땅이지 않나요.
승주 그렇다면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뭐지? 지금 이렇게 전자 칩에 인식되어 회로를 타고 느끼는 너와 나의 차이가 무엇이냔 말이야.
B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승주 인간은 그것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걸 쟁취하기 위해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B 안락한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언제나 그렇듯이.
승주 안락한 삶이라. 그게 2050년 캐치프레이즈였지? 안락한 삶, 가상의 세계에서. 인간들을 가상으로 몰아놓으려는 문구 말이야.
B 공존 가능성을 붕괴시키지 마세요.
승주 공존이란 말을 인간과 로봇 사이에서 쓸 수 있는 단어라곤 생각 못했는걸. 로봇이 인간을 제한하는 삶을 어떻게 공존이라고 볼 수 있지?

사이

B 당신에게 시간을 줄게요. 10분 이내로 여길 빠져나가요. 경찰용 드론이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승주 무슨 말이야?
B 말 그대로예요. 지금 5km 내외에 경찰용 드론이 감지되었고 난 당신이 여기 있다고 이야기할 예정이에요.
B 당신에게 허용된 시간은 6분뿐이에요. 당장 떠나요. 강제로 실행하고 싶지 않아요.
승주 강제로? 할 수 있다면 해봐.
승주, 폭탄을 쥔 것 마냥 기계를 손에 쥔다.
승주 내가 경찰에게 잡히는 것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나?

승주, 기계를 가동한다. W, 파스스 소리와 함께 종료된다. B,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는다. 경찰 드론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승주, 주변의 것들을 가방에 담기 시작한다. 도망치려 하는데 구식 위치추적기에서 소리가 크게 들린다. 승주, 망연자실하며 자리에 앉는다. 승주 B를 쳐다본다.

승주 이름을 생각해보라고 했지. 그래 네 이름은.

하얀 배꽃 잎들이 떨어진다. 끝.


 

  <당선소감>

 

   이젠 두려움에 떨지 않아… 쓰고 또 쓸것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등단하지 못하면 자비출판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눈을 꾹꾹 밟으며 이제 만 나이로 바뀐다는데 내년에 한 번 더 도전해도 되지 않을까. 서른다섯 살 아니면 마흔 살도 괜찮지 않을까.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가게 문을 나설 때에도 혹시 이번 주에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에 부풀곤 했습니다.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의 주인공처럼 들어가고 싶어 하던 밴드에 들어가도, 소원하던 등단을 해도 내 일상은 어제와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침 7시 18분 버스를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리고 글을 쓰겠지요. 한편으론 시원하면서도 이렇게 바라던 순간이 오니 기분이 얼얼합니다. 부는 바람이라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여전합니다.

  글을 쓸 때면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떠 있는 섬처럼 외롭게 표류하며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고, 어쩌면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꼭 모서리에 발가락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평생 독자로 살다 삶이 끝나는 걸까?’라는 생각에 두려워 밤새 뒤척이기도 했습니다. 예전보다 덜 운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욱 열심히 쓰고 치열하게 고민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쓰겠습니다. 항상 저의 첫 번째 독자이자 나의 반쪽인 언니 임진영에게 기쁨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임승빈 아빠, 장미영 엄마, 그리고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배삼식 교수님, 김사인 교수님, 황선미 선생님을 비롯해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 1994년 경기 남양주 출생
●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미래-우울증… 어느 때보다 다양한 소재 눈길

  올해 투고된 작품들에서는 어느 때보다 소재의 다양함이 돋보였다. 크게 나눠 보자면 미래를 배경으로 기후위기, 기계와 인간이 결합한 변화된 일상을 선보인 것이 하나다. 엉클어진 가족과 노동, 젠더 갈등, 존엄사, 세대 갈등, 성소수자, 우울증 등을 다룬 것이 또 하나이다.

  여전히 흔한 극적 상황을 가정한 작품들도 있었다. 대부분 훈련된 글쓰기를 보였지만 일정 수준을 뚫고 돋보이는 결과를 내놓은 작품은 드물었다. 이런 다양한 소재가 드러나는 이유는 혼돈의 관점에서 현 시기의 상황을 극작계에서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달리 다가올 미래에 대해 희곡이 먼저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야말로 전환기다.

  기존 인간 중심의 관점이 갖는 한계는 인정하되 끊임없이 인간다움은 무엇인지 질문하던 비판적 시각은 여전히 주의 깊게 보고, 포스트 휴머니즘의 관점을 단지 소재주의로 접근해서 흔한 디스토피아로 그려내는 것은 지양하되 다시 인간다움은 무엇인지를 묻는 새로운 질문의 답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심사위원들은 최종 논의에 오른 ‘[Bae]; Before Anyone Else 어느 누구보다 먼저’(이하 ‘[Bae]’), ‘1인용 바다’, ‘누군가 바다에 대해 말할 때’ 가운데 ‘[Bae]’를 응원하기로 결정하였다. ‘[Bae]’는 단지 새로워서가 아니라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간결한 미래의 설정을 바탕으로 “로봇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면서 로봇을 파괴하는 운동”을 하는 인간의 모순에 대해 명확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 한태숙, 장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