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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식빵을 사러 가는 소년 / 이익훈

등장인물 : 아저씨·소년

아저씨는 드러그스토어 앞. 지금 막 나왔다.

아저씨: (횡단보도 앞에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너 또 식빵 사러 가니?

소 년: 네.

아저씨: 오늘도 무화과 잼이랑 먹을 거니?

소 년: 어떻게 말해야 하죠?

아저씨: 왜?

소 년: 오늘은 제가 먹을 게 아니라서요.

아저씨: 그러면 누가 먹을 건데.

소 년: 엄마요. 엄마가 아저씨랑 먹을 거래요.

아저씨: 나?

소 년: 아뇨. 엄마 남자 친구요.

아저씨: 아, 지난번에 말했던 아빠 친구 말하는 거구나.

소 년: 쉿, 엄마가 그 말 하면 싫어해요.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지나 봐요.

아저씨: 넌 이럴 때마다 참 어른스럽구나.

소 년: 아저씨, 파란불이 되었어요.

  소년은 깡충깡충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저씨는 횡단보도 건너편 인도에 크게, 깡충, 소리를 외치며 도착한 소년의 뒷모습을 본다. 아저씨는 소년의 뒷모습을 찍고 싶다.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 아저씨는 부끄러움이 많다. 전화기를 찾는다. 전화기가 없다. 아뿔싸. 방금 산 염색약도 없다. 지갑도 없다. 전화기와 염색약과 지갑을 찾는 동안 소년은 ‘비건식빵전문무인판매가성비갑프랜차이즈’ 매장으로 들어간다. 쉽게 누구나 쓰는 마케팅 용어가 매장 앞에 있다. 무인판매라. 아저씨는 키오스크를 사용할 때마다 뒤의 사람이 재촉할까 조급해져 미안한 마음과 짜증나는 마음 때문에 방금 자신이 사려던 게 뭔지 잊곤 했다. 대면이 좋다. 대면이 좋다라. 아저씨는 드러그스토어 안으로 들어간다.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길에 돌아다닌다. 비가 쏟아진다. 아저씨가 드러그스토어에서 나온다. 약속이나 한 듯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사라진다. 아저씨는 한숨을 짓고 드러그스토어 옆 건물 처마 아래 있다. 아이도 식빵 가게 처마 아래 있다.

아저씨: (소년에게) 거기도 비가 오니?

소 년: 그럼요. 거기가 비가 오는데 여기라고 안 오겠어요.

아저씨: 그렇지. 그런데 너는 이럴 때마다 도인 같다.

소 년: 아저씨야말로 사라졌다가 뽕, 나타났어요. 도인처럼.

아저씨: 내가 그랬어? 뽕! 뽕뽕뽕! 뽕뽕뽕뽕?

소 년: 그만해요. (웃으며) 재미없어요.

사이

소 년: 걱정했어요. 사라져서.

아저씨가 말이 없자

소 년: 집에 있는 책을 읽었어요. 아빠가 두고 간 책들. 묵자.

아저씨: 아빠가 철학을 했나 보다.

소 년: (못 들은 척한다) 아닌가. 노자인가. 어려워요.

아저씨: (못 들은 척한다) 식빵은 샀어?

소 년: 네, 감자가 들어 있는 식빵이에요. 맛있을 거 같아요. 요즘 감자가 제일 핫하다고 해서 샀어요. 철학보다 식빵 얘기나 낫네요.

아저씨: 감자가 요즘 유행이지. 감자튀김, 감자칩, 감자깡, 감자전, 감자프라이, 감자만두, 감자옹심이, 감자전, 영국식감자칩, 프랑스식감자오믈렛, 일본식감자돈가스, 독일식감자사우어크라우트곁들임, 감자회오리튀김, 생감자, 찐감자, 말린감자, 감자술, 감자팩, 감자보디크림, 감자립글로즈, 주식감자….

소 년: 여기 빵 중에서 제일 비싸요.

아저씨: 너 왜 말을 끊니.

소 년: 재미없어서요.

아저씨: 내가 재미없구나.

소 년: 네. 다른 건 다 1990원인데 이것만 4990원이에요.

아저씨: 비싼 거 샀다고 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되니?

소 년: 엄마는 날 혼내지 않아요. 미안해하지. 그래서 나는 화가 나요.

아저씨: 그렇구나.

소 년: 혼내는 사람들은 안 미안해하는데 혼내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미안해해요. 미안해하니까 나는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못 내니까 나는 화가 다시 나요. 아니, 엄마를 이해하니까, 아니 엄마를 이해해야 하니까 화가 나는데 화가 안 나요. 그래서 결국 화가 나요.

아저씨: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소 년: (물끄러미, 차갑게) 알아요. 아저씨는 비겁하니까.

아저씨: 미안하다.

사이

소 년: 그러나 난 아저씨도 이해해요. 아저씨, 미안해하지 마요. 미안해하면 화가 나요. 화가 나는데 화를 안 내야 하니까 내가 비참해져요.

아저씨: 그래, 더 비겁해지마.

사이

소 년: 따뜻한 걸로 골랐어요. 엄마가 아저씨랑 먹어야 하는 거라. 이거 맛있어야 해요.

아저씨: 비가 계속 온다. 괜찮아?

소 년: 여긴 맞을 만해요. 아니다. 안 맞아요. (식빵 가게 캐노픽스를 가리킨다) 아저씨는요?

아저씨: (처마를 쳐다본다. 그러나 처마라고 할 수 없는 이십 센티 정도의 콘크리트 돌출 형태라 비를 막지 못한다. 요즘 도시에선 함부로 쉽게 비를 피하기도 어렵다. 남의 영업장 앞에서 비를 피하면 장사 방해를 한다고 면박당하고 가로수의 잎은 사지 절단이 된다. 다 아는 마당에 의연할 수 없다.) 여긴 비가 많이 와. (웃으며) 다 젖었어.

  소년은 아저씨가 있는 곳, 처마 밑을 바라본다. 개미들에게야 가수 싸이가 흠뻑쇼를 하는 것처럼 물이 쏟아지는 그곳이 신나는 실외 운동장처럼 보이겠지만 살이 처지고 배가 나오고 무릎이 풀리기 시작한 아저씨, 오래 고정 자세로 서 있는 것도 힘들 아저씨에게, 그 땅은 비를 피하기 좁다고 말하기 전에, 우선 처량해 보인다.

  소년은 생각한다. 방금 나온 드러그스토어 안으로 다시 들어가 아까는 못 사 온 물건이 있는 것처럼 들어가 잠깐 비를 피하면 좋을 것을 왜 저러고 있는지 답답하다. 물론 안다. 드러그스토어는 아저씨 나이 때 남자가 쉽게 드나들기 편한 곳은 아니다.

  소년은 자기가 있는 곳, 식빵 가게 캐노픽스를 쳐다본다. 넓다. 아저씨가 이쪽으로 오면 좋겠다. 그런데 오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는 왜 고집스럽게 저기에 있을까. 그는 비겁하기 때문일까, 처량하기 때문일까, 어리석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캐노픽스 위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비를 본다. 빗소리를 듣는다.

  소년은 슈만의 Op.68 No.12를 듣는다.

아저씨: 그렇게 보지 마렴. 나쁘진 않아. 남 눈에는 나쁘겠지만 나는 나쁘지 않아. (말꼬리를 흐린다. 마치 영화 ‘부기나이트’ 마지막 장면의 그 남자 같다. 두 손으로 자신 있게 붙잡고 일으켜 보지만 쓰러진 성기는 마음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타인의 불능을 안쓰럽게 여기겠는가. 그것도 사회적으로 희생하거나 공헌한 바 없는-오락적으로 음지의 쾌락을 준 것으로 사회적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포르노 배우의 퇴직 직전을. 아저씨는 그 정도 쾌락도 못 되고 그저 처마 밑에 있을 뿐이다. 그깟 비가 뭐 대수라고. 자신감을 억지로 불러 본다. 자신감은 대답이 없다. 사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정말 나쁘지 않아. 그다지. (그러나 우스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소 년: (슈만을 다 듣고) 곧, 끝나요, 그래 봤자.

아저씨: 뭐가, 말이니?

소 년: 비요.

비는 더 온다.

아저씨: 그럴까.

소 년: (번개가 친다) 안 그럴 수도 있겠어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아저씨: 너, 우산도 없잖아.

소 년: 둘이 같이 맞아요. 그러면 덜 외로우니까.

아저씨: (혼자 맞는 거에 오래 익숙해서 이런 권유가 실은 무섭다) 그럴래.

소 년: (신호등을 보며) 파란 불이에요.

아저씨: 조심하렴.

소년은 깡충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소 년: (옷 속에서 식빵을 살짝 꺼내며) 아저씨가 궁금해할까 봐.

아저씨: 그래, 궁금했어.

소 년: 따뜻해요. 아저씨 먹을래요?

아저씨: 엄마랑 아저씨 가져다줘야 한다며.

소 년: 궁금해했잖아요. 감자튀김, 감자칩, 감자깡, 감자전, 감자프라이, 감자만두, 감자옹심이, 감자전, 영국식감자칩, 프랑스식감자오믈렛, 일본식감자돈가스, 독일식감자사우어크라우트곁들임, 감자회오리튀김, 생감자, 찐감자, 말린감자, 감자술, 감자팩, 감자보디크림, 감자립글로즈…. 블라블라 해놓고. (사이) 감자 박사님.

아저씨: 놀리지 마렴.

소 년: 딱 놀려야 좋은 타이밍인데,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 박사 아니야. 그냥, 예전에 글을 썼지. 글을 잘 쓰려고 감자 조사를 했지. 지금은 글도 감자도 모조리 다 실패했어. 나는 실패한 인생이야.

소 년: 알고 있어요. 아저씨는 실패한 인생.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땐 양배추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아저씨: 내가?

소 년: 내가 호밀 식빵을 사러 가던 날이었는데요. 아저씨가 내게 식빵 사러 가냐고, 울면서 말 걸었어요. 울면서. 아저씨가 대낮에 울다니. 나는 너무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아저씨를 사랑스럽게 봤어요. 아저씨가 말했어요. 호밀 빵에는 사우어크라우트란다. 샌드위치 만들어 먹으렴, 기가 막혀. 낮술에 취해 있었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아저씨: 기억나.

소 년: 그때도 아저씨는, 멋있었어요.

아저씨: 내가?

소 년: 실패한 사람들은 다 멋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은 다 밥맛이에요.

아저씨: 그렇구나.

사이

소 년: 왜, 라고 안 물어요?

아저씨: 인생에 왜가 어디 있어.

소 년: 알겠어요. (아저씨를 보며) 아저씨가 왜 시에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겠어요.

아저씨: 왜?

소 년: 이런. 왜가 없다고 해 놓고.

아저씨: 왜?

소 년: 말 못 하겠어요.

아저씨: 왜?

소 년: 정말 말 못 해요.

아저씨: 그럼 말하지 마렴.

소 년: (소심하게) 왜가 없는 사람이니까.

아저씨: 응?

소 년: 왜를 묻지 않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고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아저씨: 그런데?

소 년: 그런데 아저씨가 갑자기 왜냐고 물어서, 이건 뭐지, 당황했어요.

아저씨: 비가 그치는 거 같다.

사이

소 년: 여하튼, 그날부터, 사우어크라우트 샌드위치를 해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소금이 처음에 짰는데 시면서도 달아진다는 게 신기했어요.

아저씨: 엄마가 해 줬니?

소 년: 내가 했어요. 그쯤은 저도 할 줄 알아요. 엄마가 음식 해 주는 사람도 아니고.

아저씨: 그렇지.

소 년: 엄마는 그럴 때도 미안해해요.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를 안아요. 숨이 막혀요. 싫어요. 엄마 팔에는 온통 낙서에요. 뭘 감추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요. 엄마는 가끔 저에게도 낙서를 해요.

아저씨: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너한테.

소 년: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아저씨: 기다리다 죽을 수도 있어.

소 년: 와우,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다.

아저씨: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우리 엄마는 결국 자기를 죽였지. 나는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어. 용서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어. 내 팔에도 낙서가 있다. 내 팔 좀 볼래?

사이

소 년: 싫어요.

사이

소 년: 그런데요. 감자주식은 뭐예요? 주식감자였나.

아저씨: 그건, 그건.

소 년: 말 안 해도 돼요. 그 정도는 알아요. ‘감’ 자는 아마 감소한다는 ‘감’ 자일 거고. ‘자’는 아마 자본주의 할 때 ‘자’일 거고, 주식은 요즘 영끌한다는 주식을 말하는 거겠죠, 뭐.

아저씨: 잘 아는구나.

소 년: 나는 실패한 사람이 좋아요. 아저씨처럼.

사이

소 년: (식빵을 들이밀며) 먹어도 돼요. 여기엔 제 몫이 있어요. 따끈한 건 제 몫이에요. 그들은 차가운 걸 먹어야죠. 그게 심부름시킨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당연한 몫이에요.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의 몫.

아저씨: 미안하지 않아?

소 년: (단호하게) 왜요? 그들이 미안해해야죠. 엄마는 미안해하지만 뭘 미안해하는지 모르는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아저씨: 나는 미안해.

소 년: 제 몫을 나눠 먹어요.

아저씨: 그래도, 좀 그래.

소 년: (채근하며) 그들은 여기 없어요. 눈치 보지 말아요. 우리 같이 먹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아저씨: (소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도 미안하지. 그건 네 몫이지, 내 몫이 아냐.

소 년: 이건 우리들의 몫이에요. 아저씨, 나를 부끄럽게 만드네요. (식빵을 옷 속으로 넣으며) 나는 나한테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미안하다고 너무 쉽게 성의 없이 점잖게 말하면서 자기만 회피의 천국으로 가요.

아저씨: 미안하게 되었구나.

소 년: (시계를 보며) 저는, 십 분 정도 늦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 줘요. 아저씨.

아저씨: (처마를 보며) 비가 그치는 것 같아.

소 년: 습기를 먹어 빵이 더 폭신폭신해졌어요. (쾌활하게) 비가 오는 날은 빵 만들 때 물을 조금 덜 넣어야 해요. 비 때문에 나는 추운데 빵 때문에 나는 더 따뜻해져요.

아저씨: 정말 비가 조금, 조금 가늘어졌다. 너, 아까 곧 그칠 거라고 하더니.

소 년: 비는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고 굵게 조금 오기도 하고 가늘게 많이 오기도 해요. 갑자기 내려오기도 하고 갑자기 멈추기도 해요. 그걸 몰라요?

아저씨: 너 신기가 있나 봐. 십 분 후에 비가 그칠까?

소 년: 십 분 후?

아저씨: 십 분 정도 늦게 들어가는 게 좋겠다며. 그때까지만 같이 있자며.

소 년: 아저씨?

아저씨: 응.

소 년: 정말 몰라서 그래요?

아저씨: 화났니?

소 년: 비가 와서 안 간 게 아니에요. 엄마가 아저씨랑 하는 일이 아직 안 끝났어요.

아저씨: (소년의 말이 뭘 말하는지 잘 모른다) 우산이 없는데.

소 년: 우산이 없다고 어딜 못 가요? 비가 와서 못 가요? 인생에 우산이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우산은 다들 멋으로나 쓰는 거예요.

아저씨: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소 년: 이제 팔 분 남았어요. 이빨 닦고, 양말을 신고, 단추도 채우고.

아저씨: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내가 담근 사우어크라우트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가 죽었어. 그걸 먹어 줄 사람이 이제 없어.

소 년: 알아요. 아저씨가 술에 취해 항상 말했어요.

사이

소 년: 빵 드실래요?

아저씨: 아니.

소 년: 실은, 저도 그랬으면 했어요. 엄마한테 새걸 주고 싶었어요. 남은 건 제가 먹고요. 그 정도가 제일 괜찮아요.

아저씨: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게걸스러운 이 세상에서는, 더욱.

소 년: 이제 오 분 남았어요. 집까지 가면 딱 맞아요. 갈게요. 아저씨 잘 가요.

아저씨: 그래, 비가 다 그쳤구나. 잘 가렴.

소 년: 미안해요. 다음에 제가 그거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 sauer 시큼한, kraut 양배추 / sauer에 망가진, 무기력한이라는 뜻이 있다.) 먹어 줄게요. 아저씨가 해 준 거, 같이 먹어요.

2.

  오래된 아파트 단지 놀이터다. 오후, 이 시간. 보통의 아이들은 모두 학원이나 피시방에 있기 때문에 놀이터는 이제 교복 소년소녀들이 담배 피우며 잠깐 부모를 피해 돈을 피해 세상을 씹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이 아이들은 귀여운 구석이 있을 수도. 교복 소년소녀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심심하면 시소를 타다가 그네를 타다가,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말이야, 몇 초 정도 반성하지만, 라이프 이스 고 온, 다시 담배를 피운다. 이럴 때 라이프 이스 고 온을 사용하는 게 맞는지 모르지만 영어를 사용하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약간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우면서 뿌듯하기도 하다. 아직 교복 소년소녀들도 없는 시간. 텅 빈, 잡초만 무성한 곳 벤치에 느긋하게 앉아 아저씨는 셀프 염색을 어느 정도 마쳤다. 이제 셀프 염색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뒷머리를 어찌할까, 언제나처럼 대충 문댈까, 그러다 아니다 싶다. 마지막은 단정하고 싶다.

  소년이 놀이터로 폴짝 들어온다.

아저씨: 너구나.

소 년: 네, 저예요. 염색하나 봐요. 어제 산 걸로.

아저씨: 어제 하려다가, 비 오는 날은 염색이 잘 안 되고 흘러내려서. 그동안 비 오는 날 염색하다가 옷을 많이 버렸어.

소 년: 비 오는 날은 밖에만 비가 오는 게 아니니까요. 염색약도 축축해지고 속마음도 축축해져요.

아저씨: 빵은 폭신폭신해지고.

소 년: 재미없어요.

아저씨: 어젠 잘 갔니?

소 년: 잘 갔어요. 엄마가 좋아했어요. 아저씨가 고맙다고 했어요.

아저씨: 나 말이니?

소 년: 아뇨. 엄마 남자 친구요.

아저씨: 아저씨가 너 올 때까지 기다렸나 보다. 인사하려고.

소 년: 단추를 목까지 다 잠그고, 마치 로만 칼라처럼, 그러곤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아저씨는 단정해요.

아저씨: 나도 단정해지려고, 염색을 했어.

소 년: 단정한 아저씨는 재수 없어요.

아저씨: 나도 재수 없니?

소 년: 아저씨 같은 사람이 단정해지면 무서워요. 그 끝을 나는 다 알아요.

사이

소 년: 싫어요. 단정해지지 말아요. 어린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요.

사이

아저씨: 아저씨가 빵 먹고 가려고 했나 보다. 네가 사 온 맛있는 빵을.

소 년: 양말도 다 신고 벨트도 풀었던 흔적이 없었어요. 재킷도 다시 입은 흔적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벗지 않았나 봐요. 엄마랑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나 혼자 별생각을 다 했어요. 그 정도는 해도 되는데. 내가 그 정도 아량은 있는데. 너무 매너가 좋았어요.

아저씨: 좋은 사람이구나.

소 년: 용돈을 주기에 받았어요. 많이 줬어요. 또 빵을 사 와야지. 아저씨랑 엄마가 편하게 쉬게 해 줘야지.

아저씨: 용돈을 받았구나.

소 년: 매너가 너무 좋아서 화가 났어요. 그를 때리고 싶었어요. 용돈을 받아서 나는 화가 났어요. 나는 나를 때리고 싶었어요.

아저씨: 그런 걸 왜 벌써 알았니? 그런 건 모르는 게 나은데.

소 년: 아저씨를 만난 다음부터, 엄마가 몸에 낙서하지 않아 나는 좋거든요. 엄마가 많이 웃어서 좋아요. 엄마가, 씻고 화장하고 몸을 예쁘게 가꿔서 나는 정말 좋아요. 엄마가 더이상 울지 않아서 좋아요. 엄마가 천장에 줄을 달지 않아서 좋아요. 베란다에 기대어 저 아래 높이를 가늠하지 않아서 좋아요. 엄마를 그렇게 만들어 준 아저씨가 너무 좋아요. 그런데, 전, 집에 들어가기 전에 빵에다 침을 뱉어요. 빵은 촉촉해져요. 그래 놓고, 그 침 뱉은 빵을 주고 용돈을 받은 거예요. 전 못된 아이예요.

사이

아저씨: 못된 아이야.

소 년: 네?

아저씨: 못된 아이야. 내 뒷머리 염색 좀 해 줄래?

사이

소 년: 싫은데요.

아저씨: 우선 비닐장갑을 끼고.

소 년: 싫어요.

아저씨: 단정해져도 네가 안다는 그 길로 안 갈게.

소 년: 싫은데. (싫다고 하면서 비닐장갑을 낀다. 포기한 걸까. 믿는 걸까)

아저씨: 냄새가 독하니까, 한 손으로는 코를 막고.

소 년: 아저씨 냄새만큼 독할까.

아저씨: 내 냄새?

소 년: 네.

아저씨: 홀아비 냄새가 나니? 아, 너 홀아비라는 낱말을 아니?

소 년: 그쯤은 알아요. 홀아비는 서 말 구슬을 꿴다!

아저씨: 홀아비가 아닐걸. 구슬이 아니거나.

소 년: 제 말은 홀아비일수록 구슬을 꿰어야 한다!

아저씨: 그럼, 냄새가 안 나겠네.

소 년: 냄새가 나요.

아저씨: 무슨 냄새가 나. 늙은 냄새가 나니?

소 년: (망설이다가) 슬픈 냄새요.

사이

소 년: 슬픈 냄새가 나요. 못 닦은 냄비의 눌어붙은 라면 냄새, 찬밥에서 나는 딱딱한 냄새, 보일러를 켜지 않은 방의 차가운 냄새, 혼자 마시는 소주 냄새, 눈알에 초점을 잃은 냄새, 가누지 못하는 오줌의 냄새, 기름기 없이 가늘어진 흰 머리의 냄새.

아저씨: 혼자 늙는 남자의 냄새구나.

소 년: 그냥 슬픈 냄새가 나요. 심심하고 할 일 없어 아무나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외로운 냄새가 아니에요.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고 광야에 서 있는 남자의 냄새. 곧 자신도 잃을 것 같은, 슬픈 냄새가 나요.

사이

소 년: 그냥 빵 냄새만 맡아도 그 슬픔의 냄새가 사라질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살아요? 제가 좋아하는 명대사가 있어요.

아저씨: 명대사?

소 년: 보족세트와 비빔막국수요!

아저씨: 무슨 영화야?

소 년: 영애 누나랑 혜준이 누나랑 선영이 누나랑 홍내 형아랑 현철이 형아가 아름답고.

아저씨: 그래 그게 무슨 영화니?

소 년: 종준이 아저씨랑 해숙이 아줌마가 너무 멋진 구경이요. 자살을 결심했던 소년은 그 말을 듣고 꿀꺽 침을 삼킨 후 살아가게 됩니다.

아저씨: 명대사구나.

소 년: 그러니, 아저씨도 식빵을 먹어요.

아저씨: 그래. 식빵을 먹어야겠구나. 그럼 우선 염색을 빨리 끝내야겠구나. 멋을 부리고 싶구나.

소 년: 좋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우선 장갑을 끼고.

그들은 오래 조용히 염색을 한다. 빛을 받아 머리에서 윤이 난다. 염색이 끝난다.

아저씨: 고맙다. 잠깐 기다릴래. 염색했으니 머리를 감아야 해. 창포물로.

소 년: 머리 감고 만나요.

아저씨: 그럴까.

소 년: 잘 감아요. 전, 그사이, 같이 먹을 식빵을 사 올게요.

아저씨: 무슨 빵을 사 올 거니?

소 년: 마늘이랑 양파가 들어 있는 빵을 사 올까 해요.

아저씨: 네가 그런 걸 먹을 수 있어? 매울 텐데.

소 년: 아저씨. 나, 이래 봬도, 엄마 남자 친구가 아빠 친구인 사람이에요. 인생이 이렇게 매운데, 그깟 매운 빵 정도야.

아저씨: 그렇구나. 그래 넌, 그럴 수 있겠구나. 나는 매운 인생을 견딜 수가 없는데. 너는 의젓하구나.

소 년: 아저씨, 머리 감고 나와요. 저는 빵을 사 올게요.

아저씨: 그래. 있다 보자.

아저씨는 염색약 도구를 챙기고 저벅저벅 기쁘게 집으로 향한다. 소년도 식빵을 사러 간다. 깡충깡충. 놀이터는 다시 텅 빈다. 오래.

텅 빈 놀이터.

식빵을 사러 갔던 소년이 빵을 사 온다. 소년은 언제나 그렇듯 빵을 가슴에 품고 있다. 소년은 아저씨를 기다린다. 아저씨가 오지 않는다. 어디선가, 구급차 소리.

소년은 식빵을 결국 혼자 뜯어 먹으며 화가 났다.

오랜 시간 소년을 텅 빈 놀이터에 둔 아저씨가 소년에게 온다.

소년 화가 나서 아저씨에게 달려가 아저씨를 때린다.

소 년: 아저씨. 그렇게 제멋대로 하니 자유로워요?

아저씨: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자유롭지 않구나.

소 년: 그럼, 내가 자유롭게 해 줄게요. 죽어 버려.

소년, 깡충 뛰며 아저씨 목을 조르려고 한다.

아저씨: 이제 안 할게. 정말이야. 자유가 뭔지 알고 싶었어. 미안해.

소년, 아저씨의 발목을 때린다.

소 년: 자유가 뭐긴 뭐예요. 자유가 자유지.

아저씨: 자유가 자유구나.

소 년: 엄마는 내게 빵 심부름시킬 때마다 미안해했어요. 미안해하지 말고, 엄마. 낙서나 하지 마. 이미 우리에겐 지울 낙서가 이만큼이야!

아저씨: 그게, 난 힘들구나.

소 년: 이거나 먹어요.

아저씨: (자기 머리를 만지며) 염색이 잘 나왔어. 고마워. 단정하게 잘 가고 싶었어.

사이, 어두워졌다가 환해진다.

다시 놀이터. 놀이터는 조용하다. 소년 혼자 빵을 먹고 있다. 여전히 조용히. 품 안에 넣었던 빵을 새 모이만큼 아주 조금 뜯어서. 다시 품 안에 넣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그래 인생을 멀리서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평화롭다. 그래 인생을 가까이서 보자. 무슨 일이 계속 일어난다. 그렇다고 평화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멀리 볼 것인가. 가까이 볼 것인가.

아저씨가 놀이터로 들어온다. 아저씨 단정하다.

아저씨: 못된 아이야.

소 년: 아저씨. 오우! 몰라봤어요.

아저씨: 너 덕분이다. 나 안 갔어. 가려다 말았어.

소 년: 아저씨를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그러나 올 거라고 확신했어요. (품 안에 있는 빵을 꺼내며) 이거.

아저씨: 나도, 빵을 기다렸어.

소 년: 절 기다린 거예요? 아니면 빵을 기다린 거예요.

아저씨: 빵을 기다렸지. 네가 사 오겠다고 했던 마늘 양파 빵을.

소 년: 쳇.

아저씨: 삐졌니?

소 년: 조금 먼저 먹었어요.

아저씨: 그 빵을 같이 먹을 너를 기

아저씨: 내가 너 안아 줘도 되니. 살고 싶구나.

소 년: 그럼요. 전 괜찮아요. 언제든 같이 안아요.

다렸지.

사이

아저씨: 그런데, 못된 아이야.

소 년: (소년은 아저씨를 보지 않는다) 네.

아저씨: 너는 식빵을 사러 어디까지 갔니?

소 년: 왜요?

아저씨: 나도 널 너무 오래 기다렸어. 네가 오지 않더구나. 정말 너무 많은 생각을 했어.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식빵을 사러 어디까지 갔니?

소 년: 아저씨 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데로요.

아저씨: 나 같은 사람? 나에 대해 알아?

소 년: (냉정하게) 잘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들. 떠나간 사람만 그리워하는 사람. 고통 속을 떠도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

아저씨: 내가 그랬니?

소 년: 우리 엄마랑 똑같아요.

아저씨: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소 년: 나는 아저씨처럼 안 클 거예요.

사이

소 년: 삶은 멀리 있으면 바로 앞에서 안아 줄 것처럼 오라고 하면서 정작 앞으로 가면 멀어져요. 나는 그걸 알아요.

아저씨: 너는 몰라야 하는 걸 너무 빨리 알았구나. 그래서 재밌니?

소 년: 재미가 없을 게 뭐가 있어요. 빵을 사러 갈 때 매일 달라요. 날씨가 달라요. 재밌어요. 길의 사람들이 늙어 가요. 재밌어요. 나무는 키가 자라고 도로는 파여요. 겨울이 되면 보도블록을 새로 깔아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요. 상처가 나요. 상처가 조금씩 지워져요. 다른 상처가 생겨요. 침을 바르고 약을 바르고 안아 줘요. 몸이 커져요. 비가 오면 차분해져요. 바람 부는 날은 창밖에 화분을 내다 놔요.

아저씨: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바람 부는 날은 지붕이 날아가는 게 아니고.

소 년: 그럼요. 비가 새면 방수공사를 해야겠다, 다른 집 천장은 괜찮을까. 바람이 불면 오즈에 다녀와야겠구나, 같이 다녀와야겠다.

아저씨: 그래서 너는 식빵을 사러 어디까지 갔다 왔니? 어제 그 식빵 집?

소 년: 아뇨. 아저씨 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데로요. 아저씨, 자꾸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말고 차라리 빨리 죽어요. 내게 상처만 가득 주고 떠나요. 이기적이고 못된 아저씨야.

사이, 어두워졌다 다시 환해진다.

  다시 놀이터.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아저씨는 자고 있다. 아저씨 옆에 봉지가 있다. 소년이 나타난다. 아저씨 일어난다.

아저씨: 너 또 식빵 사러 가니?

소 년: 네. 아뇨.

아저씨: 네? 아뇨?

소 년: 응, 아니야.

아저씨: 그거 유행하는 말이지. 부정의 긍정 같기도 하고 긍정의 긍정 같기도 하고 긍정의 부정 같기도 하고 부정의 부정 같기도 하구나.

소 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아저씨: 모르겠다.

소 년: 저번에 아저씨 오래 기다렸어요. 화났어요.

아저씨: 염색하고 머리를 감고 나니까 잠이 솔솔 왔어. 그래서 아주 오래 깊은 잠에 빠졌어.

소 년: 저를 잊을 정도로요.

아저씨: 너는 안 잊지. 나를 잊고 싶었어. 잊혀지고 싶었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김광석의 노래 그날들 가사 중에서.

사이

소 년: 오늘 제가 사 온 빵은 뭐게요?

아저씨: 빵을 사서 오는 길이었구나.

소 년: 네. 그래서 아까 응, 아니야라고 했어요.

아저씨: 오늘은 무슨 식빵을 사 왔니?

소 년: (아저씨에게 식빵을 주며) 테두리에 설탕이 마구 뿌려진 식빵을 사 왔어요.

아저씨: 맛있구나.

소 년: 이건 조금 식어도 맛있어요. 식빵은 식으면 맛이 덜해요. 그래서 품 안에 오래 두느라 저는 좀 힘들었어요. 저번에 아저씨가 안 오기에, 그걸 다 먹었어요. 처음에는 새 모이만큼 먹었는데 결국 나 혼자 다 먹었어요. 아저씨가 안 오니까 무서워서 나중에는 화가 나서 다 먹었어요.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하구나. 사람들이 깨워 줘서 일어났어.

소 년: 괜찮아요. 이제라도 잠에서 깨어났으니까.

아저씨: 이거 정말 맛있구나. 꿀맛이다.

소 년: 꿀맛이라뇨. 설탕 맛이죠.

사이

아저씨: 날 좀 안아 줄래.

소 년: (망설임 없이) 기꺼이요. (안아 준다)

사이

아저씨: 이거 정말 맛있구나. 설탕 맛이 이렇게 맛있다니. 참, 이거. (봉지를 열어 보인다)

소 년: 뭐예요?

아저씨: 사우어크라우트야. 같이 먹자.

소 년: 저번에 말했던. 같이 먹어요.

아저씨: 응. 이걸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같이 못 가서 항상 미안해했어.

소 년: 그 사람은 그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우어크라우트를 먹으며) 맛있다. 짠맛이 단맛이 되었어. 시고 달콤하고 짜고 고소해요.

아저씨: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이제 살아야겠어. 그만해야겠어.

사이

아저씨: 내가 너 안아 줘도 되니. 살고 싶구나.

소 년: 그럼요. 전 괜찮아요. 언제든 같이 안아요.

끝.


 

  <당선소감>

 

   갈지 자 그리며 걷는 희곡의 길,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잘게요

  당선소감을 쓰고 있다. 어떻게 써야 하나. 무섭다. 창밖은 황금폭포수가 흐르고 있다. 이 희곡은 갈지 자를 그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집에 가서는 자야지 하는 마음으로 썼다. 길에서 자면 나도 슬프고 나를 일으키려는 사람도 얼마나 힘들겠는가.

  춘천 후평동 인공폭포 사거리 카페 뽐므에서 거의 썼다. 지금 당선소감도 그곳에서 쓴다. 오래 있어도 뭐라 않는 사장님 덕에 마쳤다. 낡은 아파트의 오래된, 다 주는 나무를 봤다.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우울한지도 쓸쓸한지도 몰랐다. 무소의뿔 사람들, 춘천과 강원도의 연극인들을 존경한다.

  어느 날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피상적으로 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했다. 난 내게도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런 사람의 글을 뽑아 준 두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하고 감사하다.

  올해 ‘구경이’를 수십 번 봤다. 감탄을 수십 번 했다. 은희경, 이우성, 홍상수, 박찬욱, 에릭 로메르, 하마구치 류스케, 루이지 피란델로. 마음이 아리송할 때 그들의 작업을 들추었다. ‘마담 보바리’를 읽었다. 감사한 분들과 작품이다.

  오아주와 도연, 승태, 성주, 분남, 은경. 오래 밥을 사 주었다. 더 사 줬으면 좋겠다. 무너지면 다른 장르에서 힘을 얻으라던 껌새, 1993년 남산을 같이 오르던 친구들 그립다. 혜아쭌소 후배, 힘을 주었다. 감사드릴 분들이 더 있을 텐데, 다음에 또 기회가 있기를, 제발 부디! 정승옥, 김용은, 김언자 선생님 응원 덕에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좀 많이 늦었어요.

  그리고 엄마, 오래 건강해서 맛있는 거 많이 먹으러 다니자. 사랑해.

● 1972년 충북 보은 출생 
● 강원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 1998년 김유정신인문학상


 

  <심사평>

 

  웃으며 곱씹는 굴곡진 두 인생, 쓰디쓴 삶에서 배어나온 단맛

  희곡 부문 당선작은 ‘식빵을 사러 가는 소년’이다. 서로의 관계가 불분명한 두 인물 ‘소년’과 ‘아저씨’의 파편적인 대화가 전부인 이 희곡은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엔 유력한 당선작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장면의 연결이 거칠고, 지문 또한 인물의 행동 묘사가 아닌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어 언뜻 희곡 쓰기에 서툰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작품의 수를 추린 뒤, 다른 희곡들과 견주어 다시 읽었을 때 ‘식빵을 사러 가는 소년’은 새로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이는 실제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인지-소년인지 아저씨인지, 묘사된 상황들이 무엇인지- 꿈인지 현실인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는 빵의 맛이 ‘맵고, 짜고, 시고, 달다’는 은유를 통해 우리 인생의 굴곡진 면면을 드러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자신들의 비참한 일상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두 인물의 대화는 시리도록 아프지만, 결코 상투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문학적 사유는 깊고, 삶에 대한 고민은 치열하며, 시선은 따듯하고 섬세하다.

  부디 이 작품을 통해 많은 관객(독자)들과 작가 본인에게 인생의 단맛이 느껴지길 바라며,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다른 작품은 ‘예상 이별’과 ‘소녀의 방’이다. ‘예상 이별’은 사랑과 이별, 관계에 대한 사유를 수학과 철학의 명제들을 빌려와 아주 간결하고 위트 있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극적 재미가 충만하고, 논리적이며, 결말도 깔끔하다. ‘소녀의 방’은 부조리극의 전통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계승한다. 관계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을 풀어내면서, 쉽고 간결한 은유와 함축적인 무대 언어들을 활용한 수작이다.

  당선된 작가에겐 축하를,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케 한 작가들에겐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심사위원 : 성종완, 송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