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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은수의 세상 / 이민선

 

0. 변화의 바람

  은수가 소파 뒤에서 통화 중이다.

[네. 당장은 너무 빨라요. 아 네네. 그럼 그때로 해주세요. 네.]

  은수 잠깐 멍하니 있다 집안을 찬찬히 돌며 가구들을 쓸어본다.

  이 방은 내가 만든 세상입니다. 이것들도 내가 여기 들였어요. 그중에서 나는 이 소파를 제일 사랑해요. 이 소파는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갔대요. 먼지를 그득하게 앉혀놓고 문 바깥에서 떨고 있었어요. 내가 빤히 쳐다보니까 집주인은 들어오기로 결정하면 당장이라도 치워주겠다고 그랬어요. 내 세상을 갖겠다고 다른 세상을 지우는 건 안 되죠. 너도 들어와,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게 됐어요.

  아주 푹신하고 풍만한 내면을 가졌어요. 이 소파도 분명 나를 사랑할 거예요.

  은수 문에 가까이 간다. 귀를 댄다.

  그리고 이 문. 가능성의 벽. 오토바이소리. 쿵쿵. 뭔가를 싣고 있나 봐요. 아주 묵직한 거 같아요. 저런 걸 싣고도 고꾸라지지 않는다니. 이 얘기를 애인에게 했더니 내가 너무 걱정이 많대요. 걱정이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선생님한테 얘기했더니 선생님은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래요. 아무튼 나는 이렇게 바깥 세계를 상상해요. 이 상상까지가 내 세상의 영역이에요. 이 문은 그러니까 일종의 국경 같은 거죠. 월 37만원. 매달 15일. 약속만 잘 지키면 문 바깥의 세상과 마주할 일은 없습니다. 여기엔 온통 안전한 것들뿐이에요. 나의 임무는 이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지켜내는 거예요.

  아! 아뇨. 이제 그것도 아니지만….

  이제 나의 임무는 이 문 바깥에 직접 부딪히는 겁니다. 먼저 발을 보호해줄 운동화를 신고 문고리를 돌려요. 지금은 겨울이니까 바람이 추울 거예요. 손을 뻗어서 택시를 잡겠죠. 그리고 목적지 가까운 길가에 내려서 얼마간 걷고 문을 열고, 열고 닫고 또 열고.

  은수 문에 기대앉는다.

  그럼 저 오토바이의 색깔과 싣고 가는 물건 그런 걸 알 수 있겠죠. 어쩌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될지 몰라요. 그래도 오늘은 약속한 날이 아니니까,

  은수가 일어나 집안을 가로질러 걷는다.

  나는 지금도 핑계를 대고 있어요. 아까 전화를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는 나가야 해요. 내 문이 열리기 전에 저 문을 내가 열어야 해요!

  몰랐는데 내 몸에도 문이 있었습니다.

  자기 안의 중심을 가지라는 말 있잖아요. 나는 이제 세상을 품었어요.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세상일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지금 나는 화가 나요. 왜냐면!

  은수 방의 중앙에서 문을 노려본다.

1. 첫 걸음

  은수 소파 왼편에 앉고 조금 떨어진 오른편에 선생님 앉는다.

은수 불안하거든요.

선생님 어떤 게 은수씨를 불안하게 해요?

은수 강해져야 하거든요.

선생님 은수씨는 본인이 약하게 느껴져요?

은수 저는 강해요. 그런데 더 강해져야 해요.

선생님 왜요?

은수 변화가 생겼거든요.

선생님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은수 (문을 바라보며) 문이요. 저기 달랑 하나 있는 줄 알았는데 또 있었어요.

선생님 어디에요?

은수 제 몸에요.

선생님 몸?

은수 이제 선생님 그만 오세요.

선생님 잠깐만요. 지금까지 중에 오늘이 가장 은수씨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은수 저는 이제 나가야 해요.

선생님 지금요?

은수 지금은 아니고요.

선생님 외출 결심이 섰어요? 애인과?

은수 나가야 한다는 것만 확실해요.

선생님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번 주만 해도 소파매트 새로 샀다고 기뻐했잖아요. 은수씨의 세상이 더 완전해졌다고. 크리스마스 준비라면서요.

은수 크리스마스에 나갈 거예요. 예수의 탄신일이잖아요.

선생님 은수씨도 종교가 있었어요?

은수 신 안 믿어요. 믿어야만 축하할 수 있는 건가요?

선생님 여하튼 나가겠다는 말 은수씨가 오늘 처음 했어요. 천천히, 차근차근 하면 돼요.

은수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이 말도 제가 오늘 처음 하는 거죠? 저 알아요. 제가 여 기서 나갈 수 있어야 정말 강한 사람이 된다는 거. 처음 선생님 방문하셨을 때 은수 씨가 이 문을 열고 나와 선생님 상담소로 내담하러 오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하셨잖 아요. 우린 나감으로써 나아가는 거라고.

선생님 하지만 은수씨는 지금 상담소로 오겠다는 게 아닌 거 같은데 그게 나아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은수 하지만 그래야 해요.

선생님 은수씨 애인한테 다음 달 상담비를 받았어요. 상의가 된 건가요?

은수 여기서 모든 결정은 제가 내려요!

선생님 ….

은수 일단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부터가 시작 아닌가요?

선생님 결심은 좋지만 섣부른 결정에 불안정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어요.

은수 ….

선생님 은수씨가 첫날 왜 이곳에 은수씨의 세상을 꾸리게 되었는지 얘기해줬잖아요. 제 입장 에서는 은수씨가 걱정될 수밖에 없어요.

은수 하지만 저는 문을 열어야 해요. 문이 열리기 전에….

선생님 문! 문에 대한 얘기였죠. 좀 더 얘기해줄래요?

은수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그쪽도 안정적인 건 아니니까.

선생님 무슨 얘긴지 몰라서 조심스럽지만 그쪽도 안정적이지 않다면 섣부른 결정이 그쪽에도 상처를 입히지 않을까요?

은수 그건 안 돼요! 상처 받을까요? 제가 너무 서툴러서 그럴까요? 그럼 어쩌죠?

선생님 (시계를 보고) 은수씨.

은수 네.

선생님 은수씨의 세상과 문에 대해서는 준비가 될 때 꼭 얘기해주세요.

  선생님, 갈 채비를 한다.

은수 조금만 더 있어주시면 안 돼요? 오늘만….

선생님 그러고 싶지만 내담자분들과의 약속을 늦으면 그 분들이 슬퍼하지 않을까요?

은수 그렇겠죠.

선생님 다음시간에 또 올게요.

은수 (문에 대고) 아뇨…,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거예요.

2. 질서

  은수, 선생님이 앉았다 간 자리에 몸을 기울인다.

  자리에는 흔적이 남고 서서히 사라져요. 여행자가 남긴 발자국처럼,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혀가 몇 번이고 엉켰을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에 감추는 것처럼. 식어버린 찻잔, 찻잔에 묻은 립스틱자국, 머문 자리의 온기. 여행자의 발자국을 지우거나 보존하는 건 그 나라 시민들의 몫입니다.

  은수, 일어나 찻잔을 치운다.

  찻잔을 치우고 식사 준비를 합니다. 티테이블은 이제 식탁이 됩니다. 근데 식탁에…

  은수 식탁을 닦기 시작한다.

  손자국이 남은 식탁을 둘러보면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 두툼한 외투에서 빠진 오리털 같은 것이 눈에 걸려요. 식사 전에 이것도 치워야 합니다. 걸레로 닦을 수 있는 곳은 모두 닦아요. 구석구석.

  은수 테이블 밑 서랍에서 편지들을 꺼낸다.

  무언가 정리하기 위해선 목소리들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언니의 편지예요. 언니 글씨는 동글동글해서 뾰족한 내 글씨랑 늘 비교거리였어요. 내가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 나를 구한 사람이기도 해요. 나도 언니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어야 했는데…. 난 물이 무서워져서 수영장을 그만 다녔어요. 선생님이 말한 불안정의 악화는 이런 걸까요? 섣불리 물에 뛰어 들었을 때 이제 누가 나를 구해줄까요?


  은수,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은수 누구게!

애인 누굴까?

은수 은수잖아!

애인 우리 은수네!

은수 일하고 있어?

애인 잠깐 괜찮아. 밥은 먹었어?

은수 토마토스프 끓일 거야.

애인 맛있겠다.

은수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애인 언제쯤 먹어보나?

은수 너는 요리사잖아. 부끄러워.

애인 레시피는 유튜브에서 찾았어?

은수 응.

애인 역시. 오늘은 밥 먹고 뭐 하려고?

은수 왜 뭔가 하라고 그래?

애인 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은수 그런 건 물어 보지 마. 짜증나니까.

애인 어? 어… 미안.

은수 (밝게) 오늘 몇 시에 올 거야? 밥 먹고 와?

애인 오늘 면판이 새로 왔어.

은수 신입? 몇 살?

애인 은수랑 비슷해. 근데 은수야 지금….

은수 나는 안 어리거든. 그래서?

애인 환영식 해주기로 해서 좀 늦을 거 같은데.

은수 얼마나? 이미, 바로, 와도, 9시, 30분인데?

애인 한… 11시?

은수 있잖아. 나 생각해봤는데 오늘….

애인 전표 들어왔다. 은수야, 미안한데 지금 나 들어가 봐야 되거든. 이따 다시 할게.

은수 한숨을 쉰다.

은수 나 배고픈 거야, 너 배고픈 거야.

  은수, 토마토를 손질한다.

  토마토는 과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채소입니다. 요즘에는 과일키트가 잘 나간대요. 성공한 서민 자영업자를 소개하는 프로를 봤는데 과일키트로 연 매출이 10억이래요. 그런데 과일 키트에 꼭 토마토를 넣어요. 토마토는 채손데. 유튜브에서 본 얘기입니다. 요리할 때, 밥 먹을 때, 차 마실 때, 낮잠 자거나 청소 할 때도 유튜브를 봐요. 전에는 책을 읽었는데 책은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유튜브는 누군가 나의 세상에 방문하는 느낌입니다.

  은수 다시 기쁘게 토마토 스프를 만든다.

  이렇게 꼭지를 따고 십자로 칼집을 내 잠깐 데쳐서 껍질을 까요. 버터와 치즈, 밀가루, 소금을 넣고 계속 저어요. 짓이기고 짓이기면 물러집니다. 잘리고 뭉개져야만 다른 재료들과 섞여들 수 있는 걸까요. 계속 나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수 말없이 토마토 스프를 먹는다.

  맛있습니다.

  은수 다시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애인 왜?

은수 오늘 상담한 거 안 물어봐?

애인 이따 물어보려고 했는데.

은수 이따 언제? 늦게 온다며.

애인 오늘은 어쩔 수 없어.

은수 매정해.

애인 에이….

은수 매정해.

애인 알았어.

은수 알았어?

애인 바로 집으로 갈게.

은수 택배 시켰으니까 그것도 찾아와. 나 이제 화 풀렸어.

  은수 토마토스프를 정성스레 냉장고에 보관하고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다.

  나는 꼭 왼쪽에 머리를 대고 누워요. 오른쪽은 눌러앉았어요. 전에 살던 사람은 오른쪽에만 앉았나 봐요. 그러니 거기는 내 자리가 아니에요. 이 책은 어린왕잔데요. 어린왕자는 자신의 작은 별에서 장미를 수호하다가 장미와 다투고 별을 떠나요. 내가 궁금한 건 어린왕자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장미예요. 어린왕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장미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도 많대요. 아뇨. 장미는 비로소 그때 더 강해졌을 지도 몰라요. 자기도 몰랐던 힘을 깨닫는 거예요. 가시를 날카롭게 제련해서 바오밥나무를 무찌르고 바오밥나무스프를 끓여먹는 거죠. 그때 장미의 기분은 글쎄요.

  나는 좀 나른한데.

  초인종 소리. 은수가 문 앞으로 달려 나간다.

은수 누구야?

애인 택배 왔습니다!

  이 사람이 나의 애인이에요. 아주 차가워요. 하지만 아주 따뜻합니다. 나는 애인이 머리카락이나 옷에 묻히고 오는 바깥냄새가 좋습니다. 그 냄새로 애인의 하루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은수 들어오세요.

3. 혼자는 외롭고 둘은 괴로워

애인 뭘 시킨 거야? 크키는 크고 무게는 가볍고.

은수 열어봐!

  꼬마방울 전구와 크리스마스카드가 들어있다.

애인 크리스마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은수 한 달이 아니고 27일.

애인 정확하네?

은수 정확하지.

애인 이거 집에 달려고?

은수 응!

애인 카드도 있네? 누구 주려고 그러나.

은수 넌 아니야. 아니 어쩌면 절반은 너이려나.

애인 그게 무슨 소리야?

은수 지금 문에다가 벽트리 만들 거야. 테이프 가져와.

  두 사람 벽트리를 정성스럽게 만든다.

애인 이런 거 어디서 봤어?

은수 유튜브.

애인 이거 불 켜야 되지. 전선을 어디로 연결해야 되나.

은수 신발장 안쪽에 콘센트 있잖아.

애인 그러네? 은수 완전 마스터다.

은수 여기는 내 세상이니까.

애인 치우는 김에 청소도 해버려야지. (사이) 걸레 빨았어?

은수 응.

애인 방 닦은 거야?

은수 응.

애인 어쩐지 먼지가 없더라.

은수 감동이야?

애인 조금?

은수 밥 먹고 왔어?

애인 아니! 바로 온다고 그랬잖아. 바로 왔어.

은수 술 마실래?

애인 그래도 돼?

은수 환영식하는 거야!

애인 (반색하며) 내 환영식?

은수 뭐, 얼마쯤은?

애인 은수도 마실 거야?

은수 나는 차 마실래.

애인 그럼 나만?

은수 같이 마셔 줄게.

애인 그게 중요한 거지.

  애인 캔맥주 가져와 소파 오른쪽에 앉는다.

애인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참 좋다. 특히 일 힘들었을 땐 더욱.

은수 미디어 영향이지. 퇴근 후 맥주 한잔 그런 거.

애인 오늘 진짜 힘들었어.

은수 맥주 많이 마시면 풍 온대. 조심해. 나이도 있는데.

애인 나이 먹었다고 놀리는 거야?

은수 걱정. 너 죽으면 안 되거든.

애인 네~

은수 무슨 말인 줄 알고 네, 하는 거야?

애인 나 죽으면 슬프다 그런 거 아냐?

은수 절반 쯤 정답.

애인 오늘 되게 바빴어. 저녁은 예약 없어서 좀 쉬려고 했더니 갑자기 30명 단체가 저 녁 예약을 한다는 거야. 브레이크 타임에! 근데 사장이 그걸 오케이 한 거지. 그 래서 다들 자리 펴고 누웠다가 일어났지.

은수 못한다고 하지 그랬어.

애인 어떻게 그래.

은수 고생 했네. 짠 해.

애인 오늘 뭔가 좀 다르다?

은수 그런가?

애인 지금 이런 반응!

은수 밥 먹을래?

애인 괜찮아. 배고프면 밥 좀 할까?

은수 토마토스프 있는데.

애인 그거 나 주는 거야?

은수 너 줄려고 한 거니까. (사이) 이번엔 진짜 감동했네.

애인 은수 요리 처음 먹어 보는 건데.

은수 좋아?

애인 아까워서 못 먹겠어.

은수 그래도 먹어. 놔두면 상해.

애인 와! 이런 맛이구나.

은수 나도 거기 취직해서 요리할까?

애인 힘들어서 되나. 그나저나 오늘 상담에서 뭐 좋은 일 있었어?

은수 나 이제 상담 안 받아.

정적

은수 놀랐어?

애인 돈 때문이면 마음 쓰지 마.

은수 그런 거 아냐.

애인 이제 많이 나아진 거야?

은수 응.

애인 잘 됐다.

은수 끝이야?

애인 응?

은수 그게 끝이냐고.

애인 나아져서 상담 그만 받는다며.

은수 나아지려고 그만 받는 거야. 더 정확히는 나아가려고.

애인 좀 어려운데.

은수 돈도 아끼고.

애인 돈은 신경 쓸 거 없다고 그랬잖아.

은수 이제 신경 써야 해.

애인 무슨 말이야?

은수 너도 이제 사람들하고 어울려 노는 거 줄여.

애인 지금도 많이 줄였는데.

은수 더 줄여. 오늘 유튜브 봤는데 최고의 제테크는 절약이래. 씀씀이를 다잡지 않으면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어. 더 벌면 된다? 얼마나? 조금 냉정한 말이지만 너가 버는 건 한계가 있어. 지금만큼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특히 그 친구 들! 죄다 서로 없는 처지에 술 마시고 내기당구 밖에 더 해? 이제는 너도 사람 가려 만나야지.

애인 알았어….

은수 불만이 가득한데?

애인 나도 정신 차려야지.

은수 이사도 가고 싶어. 이곳은 너무 좁아.

애인 좁아서 좋다고 여기로 계약한 거였잖아.

은수 지금까진 좋았어.

애인 마음이 바뀌었어?

은수 상황이 바뀐 거지. (사이) 더 먹을 거야?

애인 배불러. 맛있게 먹었어. 이제 자자.

은수 오늘 어린왕자 또 읽었는데 번역이 아무래도 이상해. B612에는 어린왕자 말고 다른 사람들은 살지 않잖아? 그런데 왜 어린왕자는 어린 왕이나 왕이 아니라 어린왕자일 까? 대체 누구보다 어린 건데? 어리다는 기준이 없잖아. 게다가 little prince면 어린 왕자 말고 작은 왕자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장미 말이야….

  애인은 은수의 소파 아래에 이불을 편다.

은수 애인이 일어난 자리에 몸을 파묻는다.

은수 오빠 나 이불.

  애인, 이불 덮어준다.

은수 아무튼 장미 말이야. 어린왕자가 떠나고 어땠을까? 어떻게 생각해?

애인 글쎄, 잘 모르겠는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어.

은수 내용은 알잖아.

애인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은수 내 생각에 장미는 혼자서 엄청 용감해졌을 거 같아. 바오밥나무로 스프도 끓여 먹 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드는 거지. 듣고 있어?

애인 어, 어?

은수 듣고 있냐고.

애인 은수야, 이제 자자. 내일도 출근해야 돼. 벌써 두시 반이야.

은수 나도 나가.

애인 어디 가는데.

은수 내일은 아니고.

애인 은수야, 자자.

은수 매정해.

애인 알았어. 얘기하자.

  애인, 일어난다.

은수 안 할래.

애인 하고 싶잖아.

은수 듣는 귀가 있어야 말할 입이 신이 나지.

애인 알았어.

  애인, 다시 누워 바로 잠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한밤에 먼저 잠든 애인의 숨소리를 어떤 심정으로 견뎌내고 있을까요? 내가 너무 예민하죠. 하지만 나는 정말로 견뎌내고 있어요. 혼자 있으면 외로워요. 외로움은 혼자로움. 잠든 애인의 숨소리를 들으면 괴로워져요. 살짝 벌린 저 입에서 금방이라도 말소리가 쏟아질 거 같은데….

  여기는 내 세상입니다. 이 소파부터 모두 내가 들였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요. 내 것이 모두 모인 시간인데 하루 중 가장 괴롭고 지루합니다. 잠든 사람의 코를 막고 싶어요. 그러면 켁켁거리며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지지 않을까요?

  은수가 손을 뻗어 애인에게 댄다.

  접촉. 껍데기의 감촉. 이 안에도 하나의 세상이 있겠죠? 나는 그걸 존중하고 싶어요. 존중하기 위해서 최대한 나의 세상을 나눠주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세상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건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세계는 내 안에서만 자라고 있어요.

  접속. 접속은 온 몸을 다해 뛰어드는 일입니다. 그건 나일까, 너일까. 그래도 나는 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던 이곳도 가꾼 것처럼.

4. 고립

  애인은 간단한 아침식사가 차려두고 출근했다.

  은수, 달력에 크리스마스까지 날짜를 세고 있다.

  이제 크리스마스까지 4일 남았습니다. 예보에 강수 확률이 40퍼센트래요. 비는 아니어야 할 텐데. 야경도 보고 싶어요. 반짝반짝. 1년 전과 많이 달라졌을까요? 1년은 무언가 탄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도시가 변화하기엔 짧은 시간일 겁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점처럼 모여 사는 모습. 언제나 편지는 첫 마디가 가장 어려워요. 지금은 더욱 떨립니다.

  은수 행복해 한다.

  오늘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어제도 그제도 애인과 전혀 싸우지 않았고 오늘은 아침식사가 식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예감이 좋습니다.

  문에 귀를 대본다.

  오늘은 소리가 다르네. 덜덜덜덜. 자동차 시동일까요? 덜덜덜덜. 모두 사람이 내는 소리겠지만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 문을 열면 내 보폭 하나 만큼의 보도블럭이 있고 바로 2차선 도로입니다. 차들이 지나는 소리는 때때로 파도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바닷가 고동도 문이었을까. 트리를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반짝반짝. 트리 너머의 파도소리. 정말로 예감이 좋습니다.

  은수, 집안을 깔끔하게 치운다. 가벼운 스트레칭도 한다.

  운동을 해줘야 한다고 해요. 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문 안의 사람이 감각하는 것은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되나봅니다. 너에겐 파도소리 같을까. 끝까지 읽지 않은 책들도 읽고 있어요. 닭국 끓이는 사내 이야기를 좋아해요. 사내가 한밤중에 닭국을 끓인다. 국이 끓는 소리에 빗소리가 잠긴다. 닭기름냄새가 집안에 퍼진다. 아이들은 잘도 잠을 잔다. 사내는 닭을 건져 뼈를 발라낸다, 손을 후후 불어가면서. 살코기를 찢어 소금을 친다. 사내는 뜨거운 닭국에 밥 한술을 말아먹고 머릿수대로 작은 그릇에 닭국을 퍼 담는다. 사내가 나가고 아이들은 깨어나 제 몫의 닭국을 삼킨다. 그동안 알맞게 식은 닭국이 닭국, 닭국.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한다더니 정말입니다. 닭국 끓이는 사내는 제가 꿈에서 본 이야기예요. 요즘은 종종 애인에게 요리를 해줍니다. 채소를 듬뿍 넣은 카레라든지 맑은 순두부찌개. 오늘은 닭국을 할 겁니다. 요즘처럼 용감해본 적이 없어요. 애인이 올 때쯤이면 닭국은 충분히 끓어 우리도 따뜻한 밤을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애인에게 전화 걸려온다.

은수 응!

애인 어떡하지?

은수 왜?

애인 오늘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은수 누구 집?

애인 우리집.

은수 우리집이 어딘데?

애인 당진에 가족 집….

은수 당진?

애인 응.

은수 가족…집?

애인 응.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좀 전에 알았어.

은수 ….

애인 은수야?

은수 ….

애인 은수야 듣고 있어?

은수 응.

애인 응. 그래서 오늘은 집에 못 갈 거 같아.

은수 누구 집?

애인 은수네 집이지.

은수 내 집?

애인 응.

은수 이게 왜 내 집이야?

애인 은수가 사니까.

은수 나만 살아?

애인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은수 이게 왜 내 집이야?

애인 은수가 항상 있으니까. 아무튼 나 바로 가봐야 해.

은수 ….

애인 폐가 안 좋으셨잖아.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실 줄은 몰랐네.

은수 ….

애인 은수야, 듣고 있어?

은수 무서워.

애인 무서워?

은수 무서워.

애인 오늘만 그렇게 하자. 내일 저녁에 갈게.

은수 손님처럼 말하네.

애인 어쩔 수 없잖아. 가서 전화할게.

은수 …됐어. 넌 헛것에 공을 들여.

애인 헛것이라니. 은수도 이건 이해해야지. 너도 작년에….

은수 닥쳐.

애인 넌 무조건 욕이지.

은수 그 얘기를 왜 꺼내.

애인 그 얘기 꺼낸 건 미안한데…

은수 미안하면 하지 마. 미안한데, 이런 것도 하지 마. 모든 게 다 잘 되어가고 있는데 초 치지 말란 말이야! 그냥 미안해 할 일이 없으면 되잖아.

애인 은수야….

은수 선택 잘 해.

은수 손을 후후 불어가며 닭고기를 뜯는다.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눕는다. 무언가를 견뎌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두운 방, 벽트리만 빛난다.

  정적

  은수가 쿵쿵대며 돌아다닌다.

은수 우리집? 누구 집? 우리집… 우리? 은수네 집. 내 집. 누구 집? 여기에 나만 살아? 나도 살지. 그런데? 항상 있으니까. 집. 당진에 있는 가족집. 가족? 가족? 가족! (사 이)가족….

은수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건다. 받지 않는다.

은수 열까지만 셀 거야. 더 세지 않을 거야. 선택 잘 하라고 했지. 선택 잘 하라고. 이게 니 선택이야? 딱 열 번만 할 거야. 딱 열 번만. 그 이상은 안 돼. 열 번이야. 왜 안 받아. 왜. 한다며. 가서 연락하겠다고 했잖아.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그래야 성숙한 어른이지. 나는 다 했잖아. 왜 안 받아, 왜. 도대체 어디 있는데! (사이) 괜찮아, 괜찮 아.

은수 소파 뒤에 숨어 한 번 더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은수 왜! 도대체 왜 안 받아, 왜! 다 소용 없어….

  시선이 벽트리에 멈춘다.

은수 장미는 강해지지 않았어. 그럴 수 없어. 당신들이 맞았어. 나는 자격이 없어. 이런 건 다 사치야, 사치! 다 소용 없어.

은수 벽트리를 뜯어 목에 감다 주저앉는다.

은수 아무것도 안 손대고 여기서만 살았잖아. 그럼 이 정도는 가져도 괜찮잖아. 치사해. 진짜 치사해.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희미한 새벽빛

애인 전화 많이 했었네. 미안해.

은수 꺼져.

애인 왜 욕을 하고 그래.

은수 약속 어겼어. 꺼져.

애인 무슨 약속. 너 그만 욕해.

은수 꺼져.

애인 그만하라니까.

은수 너가 욕먹는 게 더 중요하단 거지?

애인 너가 욕한 건 안 미안하지?

은수 너가 욕먹는 것만 중요하단 거지?

애인 ….

은수 그래. 그럼 꺼져.

5. 은수의 세상

선생님 음성메시지 듣고 놀랐어요.

  은수, 웃으며 차를 내온다.

은수 제가 걱정 되셨어요?

선생님 그럼요. 외출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은수 (문을 바라보며) 다 뜯어졌어요.

선생님 뜯어져요?

은수 선생님 말이 맞았어요.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잠깐 꿈꾼 거예요.

선생님 애인은요?

은수 헤어졌어요.

  은수, 여전히 문을 바라보고 있다.

선생님 싸웠어요?

은수 선생님은 아이도 있으니까 말인데요. 임테기 말이에요. 정확해요?

선생님 임테기? 설마….

은수 크리스마스 다음 날로 병원 예약을 잡았어요. 그전에 크리스마스에 나가고 싶었어요.

선생님 예수 탄생일?

은수 기억하시네요.

선생님 얼마나 됐어요?

은수 정확히 몰라요.

선생님 몸은 괜찮아요?

은수 아마도요.

선생님 그런 일이었다면 섣불리 상담을 끊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은수 강해져야죠. 그 애에게는 세상이 방충망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정도가 되면 안 되잖아 요. 그 친구가 자기 세상을 정할 때까지 나의 임무는 어디든 데려가주는 거 아니겠어 요? 겁도 났고.

선생님 충분히 이해해요.

은수 신기해요. 나 자체가 세상이라는 거. 기특하기도 했고요.

선생님 은수씨 애인은 이 사실 알아요?

은수 몇 번이고 신호를 줬는데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어제 얘기하려고 했는데 보시다시 피… 이제 저 혼자 살 거예요.

선생님 그래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은수 알리실 거예요?

선생님 은수씨가 직접 알려야죠.

은수 필요 없어요. 그런 아빠. 제가 버리는 거예요. 자격 미달로. 이기주의자. 가끔 보면 소시오패스 같아. 친절한 척 사람 짓밟고.

  선생님이 차를 따라준다.

선생님 뭐라고 하던가요?

은수 욕한 건 안 미안하냐고요. 욕한 게 더 중요하다고. 꺼지라고 했어요.

선생님 그럴 수 있어요.

은수 역시 그렇죠?

선생님 하지만 은수씨가 감정 처리하는 방법도 건강하지 못했어요. 내일 또 올게요. 은수씨 한테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요.

은수 소파에 몸을 파고든다.

은수 내일 또 올게요. 내일 또 올게요. 내일… 또….

  은수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갑게 깨어난다.

애인 은수야.

은수 문 앞에 멈춰 선다.

은수 돌아가.

애인 돌아 온 거야.

은수 돌아가.

애인 돌아 온 거라니까.

은수 돌아가라니까!

애인 쫓아내는 거야?

은수 쫓아낸 적 없어.

애인 이 문 열어.

은수 네가 닫고 나간 거야. 네가 열어.

애인 선생님은 들어올 수 있고 나는 허락하지 않겠다?

은수 선생님이 그래?

애인 내가 다 미안하다.

은수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애인 내가 필요할 거라고.

은수 다른 말은?

애인 없었어. 내가 다 미안해.

은수 늦었어.

애인 늦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한텐 얘기조차 하지 않는 거야.

은수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애인 그 중 정말 알아야 할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지.

은수 그동안의 이야기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거야?

애인 그렇게 얘기한 적 없어.

은수 방금 하나도 없었다고 그랬잖아.

애인 은수야, 제발. 너 이럴 때마다 나 미칠 것 같아.

은수 나는 이미 미친지 오래야. 가만! 지금 내가 너를 미치게 만들었다는 거야?

애인 그래. 내가 무엇이든 전부 미안해.

은수 못 이기는 척, 이해하는 척 사과? 선생님은 내가 걱정이 돼서 오셨다고 그랬어.

애인 나도 네가 걱정이 돼.

은수 말을 따라할 뿐이지.

애인 걱정되지 않았다면 내가 왜 지금 이 문 앞에서 너에게 사정하고 있겠어.

은수 선생님이 오실 거야. 돌아가.

애인 내가 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선생님도 들어가지 못해. 나한테 얘기해.

은수 협박하는 거야? 됐다는 사람 상담 받아보라고 설득할 땐 언제고. 넌 소시오패스야.

애인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넌 나르시시스트야.

은수 난 내 세상을 사랑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애인 네 세상에는 너뿐이잖아.

은수 뭐? 내 세상에는! 그만 공격해줘.

애인 공격? 내가 널 때리기라도 했어?

은수 때리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라는 거야?

애인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은수 그런 말이 아니면? 말은 생각의 산물이야. 그래 유전자가 어디 가겠어.

애인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은수 너희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울었어. 그게 꼭 나 같아 서. 언젠가 다다르고 말 나의 미래 같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애인 나를 이해해주는 것 아니었어?

은수 아들은 아빠를 닮을 수밖에 없으니까.

애인 난 네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맞는 소리를 방문 너머로 듣기만 해야 했던 어린 나를 위해 울어준다고 생각했어.

은수 남자들은 그런 애비도 아버지라고 부르더라. 이해는 해.

애인 그렇게 간단히 말해버리면 끝나는 거야?

은수 네 방식이야. 너 간단한 거 좋아하잖아. 기분 나빠? 그럼 나도 사과할게. 전부 미안 해. 네 방식으로 사과해봤어. 이렇게 하니까 진짜 간편하다.

  긴 사이

애인 너 이 문 당장 열어.

은수 문에서 떨어져 몸을 숨긴다.

애인 나 일부러 화나게 하려는 거 알아.

은수 너는 좋은 아빠 자격 미달이야.

애인 문 열어.

은수 부모는 아이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돼. 절대!

애인 넌? 넌 뭐 달라?

은수 나?

애인 집 비밀번호. 왜 가르쳐주지 않아?

은수 그건 다른 문제야.

애인 그래. 그럼. 간다.

은수 이기주의자!

애인 은수야! 가족이 죽었어. 연락 안 한 거. 그래 그거 정말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 런데 넌…!

은수 미안해. 그렇지만 너도 잘못했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넌 그런 식으로 꼭 끝에 내 탓도 있다면서 혼내.

애인 내가 지금 너한테 혼나는 기분이야. 날 밖에다 세워놓고 벌주는 거.

은수 네가 나간 거야, 이 문을 닫고. 내 집이라며. 은수네 집.

애인 내가 아니면 넌 여기 살 수도 없어.

은수 또 협박. 넌 소꿉놀이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야. 이 집은 빌어먹게 가성비 좋은 소꿉 놀이장소고.

애인 여기로 결정한 건 너였어.

은수 집안 문제를 모두 아내 탓으로 돌리는 무심한 남편.

애인 난 이해가 잘 안 됐어. 이 집 처음 봤을 때 여기서도 사람이 사는 구나, 놀랐어. 건물도 낡아서 문제가 많아 보이고 그보다 그냥, 그냥 정말 딸랑 문하나 있는 방. 현관도 대문도 없고 그냥 정말 딸랑 문하나. 그래서 네가 이 집으로 결정했다고 이 문 앞에서 얘기했을 때 나 더욱 놀랐어. 한편으론 여기서는 내가 할 일이 있겠다. 진 짜 잘 해야지. 그랬어.

은수 문에 기대선다.

애인 화장실이 막혔어. 설거지가 밀렸어. 바닥청소 해야 해. 창틀이 아귀가 안 맞는 거 같아. 그런 것들 나 좋았어. 나도 필요로 하는 데가 있는 놈이구나. (사이) 근데 내가 틀렸어. 나는 1년 동안 너 만나면서 자꾸 내가 틀려먹은 놈이라는 것만 확인했어. 이 게 나겠지. 잘하고 싶었는데 이것마저도 틀렸어. 전부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야. 안 믿어도 어쩔 수 없지만.

은수 점점 웅크리고 앉는다.

은수 미친놈.

애인 욕먹어도 싸.

  애인도 문짝에 기대앉는다.

은수 넌 너만 알지.

애인 너를 모르겠어.

은수 (살짝 돌아보며)알려고 들기나 했어?

애인 나한테 욕해.

은수 (문을 노려보며)왜 이렇게 욕에 집착해!

애인 진짜야.

은수 미친놈. 이 말 취소 안 해.

애인 문에 트리 만든 거 예뻤는데. 그 앞에 있어?

  은수, 뜯어진 전구 줄을 잡는다.

은수 병원가기 전에 나가려고 했는데….

애인 병원? 어디 아파?

은수 죽어가는 병원 말고 태어나는 병원.

애인 ….

은수 나 예전에 너가 사온 임테기 해봤어. (사이) 지금 무슨 기분이야?

[전화벨소리]

은수 선생님이야.

애인 은수야, 놔 둬.

은수 쉿!

애인 선생님은 오시지 않아.

은수 뭐?

애인 오시지 않을 거야.

은수 그래서 왔어?

애인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으니까.

은수 넌 내가 안 미워?

애인 어.

은수 미친놈.

[전화벨 끊긴다.]

은수 (선언하듯) 나 계속 욕할 거야.

애인 괜찮아.

은수 (문에 바짝 서서) 레퍼토리 바꿨냐!

애인 다 괜찮아.

은수 진짜 미친놈.

애인 욕해. 나만 욕해.

은수 너 진짜 잔인한 구석 있어. 알아? 가. 그냥, 너 그냥, 너, 가… 이제.

애인 나 못 가.

은수 내가 버리는 거야.

애인 나 안 가.

은수 싫어. 꺼져. 그래, 이것도 욕이야. 나는 이렇게 돼 버려. 가. 사라져 줘….

  은수,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는다.

은수 너 할 만큼 했어.

애인 은수야.

은수 이제 벌 안 서도 돼.

애인 욕하는 거 상관없었어.

은수 이제 와서….

애인 살면서 처음으로 집에 오는 게 행복했어. 그 낡은 소파. 그래 거기 내 자리가 있으 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것처럼 작아서는 내 손 하나 안 탄 구석이 없는 집. 너가 만 들어줬잖아. 그걸 두고 내가 어딜 가.

은수 여기는 내 세상이야.

애인 난 무서웠던 거야. 내가 부족할 까봐.

  은수와 애인 오래간 말이 없다.

애인 이 문 앞에 서니까 알겠어.

은수 ….

애인 우리 이사 갈까?

은수 무서워. 여길 떠나는 게.

애인 상황이 바뀌었잖아.

은수 기억하네.

애인 기억하지.

은수 일 공 공 삼 일 공 이 공. 너가 열고 들어와.

  애인이 번호키를 누르고 문 열리며 어두워진다.

  이사날짜를 잡았습니다. 짐은 모두 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소파도요. 그래도 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우주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사우스코리아. 코리아에서 서울, 서울에서 석관동. 석관동에서 270번지, 270번지에서도 101호. 101호에서 서은수. 서은수 안에…. 우리는 단지 문을 열고 닫고, 닫고 또 열고 반복해가며 살아가면 그뿐이에요.

*

  커튼콜

  소파에 두 사람 나란하다.

 

  <당선소감>

 

   -

  2019년 3월 황금소나무 아래 언니를 묻고, 국어사전에서 ‘절망’이란 단어를 찾았습니다.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 밑에 다른 한자 표기로 ‘간절히 바람’이라는 문장이 붙어있었습니다. 절망과 희망은 배우와 관객처럼 마주보는 한 쌍이며 우리는 그 세상을 유지보수해가면서 지독하게 살아가나봅니다. 문은 가능성의 벽. 조금만 용기 내자, 상처를 보듬으며 오늘도 살아보자는 생명에 대한 간절함으로 초인종을 눌렀더니 거기 ‘은수’가 있었습니다. 바라던 절망들을 찢어 화투처럼 섞어 하나로 이어 붙인 세상에서요. 이제 문밖의 은수를 상상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은혜 갚으며 살겠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먼저 제 글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라던 고유명사 ‘그사람’과 이니셜로 남은 이름들, 무한한 신뢰를 기반으로 온기를 나눠준 친구들, 수묵화 같은 나의 레전드, 정신적 지주 고연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 태산같이 단단한 성정을 지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엄마, 두 언니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 슈, 오래 곁에 있어줘.

  ‘너가 무엇이 될지 궁금했는데….’ 언니의 나무 앞에만 가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적어도 건넬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가장 기쁩니다. 계속 희망을 열고 닫고, 닫고 또 열겠습니다.

● 이민선(27)
● 서울


 

  <심사평>

 

  -

  희곡 부문의 응모작은 총 75편이었다. 작품은 대부분 비극적 정서를 다루고 있었으며 젊은 작가 지망생 뿐만 아니라 인생의 연륜이 담긴 응모작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아울러 그동안 흔하게 보여왔던,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과 출처 불명의 설화 등이 감소하고, 진중하게 극적 정서를 무대 화법으로 담아낸 비극들이 늘었다는 사실이 긍정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1차로 ‘연민 그 초라함에 대하여’(김민채), ‘윤슬’(안현경), ‘겨울 외곽의 처방전’(김내원), ‘해질녘’(송천영), ‘은수의 세상’(이민선), ‘빛’(김태현), ‘가해자’(최율하) 등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였다. 공통적으로 아쉬운 것은 극적 구성과 전개는 수준에 이르렀으나 반전 또는 복선의 경우, 상대적으로 미흡했다는 점이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은 ‘윤슬’과 ‘은수의 세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는데, 극적 구성과 전개가 대사보다 인물 간의 정서에 의해 표현된 점이 돋보인 ‘은수의 세상’으로 결정하였다. 최종 후보작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철리, 김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