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산은 말한다 / 주은길
<당선작>
산은 말한다 / 주은길
등장인물
사냥꾼
여우목도리
순사1
순사2
남자
어머니
아버지
노루
때
초저녁. 해가 곧 질 때
곳
어느 산속
1. 첫 번째 산
추운 겨울 깊은 산속.
여우 목도리를 한 사냥꾼, 총을 들고 있다.
사냥꾼: 어디 갔니?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나와라.
사냥꾼, 총구를 겨누며 조심히 움직인다.
사냥꾼: 어디 갔니? 편하게 보내 줄게.
사냥꾼, 총구를 겨누며 조심히 움직인다.
사냥꾼: 어디 갔니? 어디 갔니? 이러면 너만 더 고통스러워져.
여우목도리가 말한다.
여우목도리: 저기 숨었네.
사냥꾼, 걸음을 멈춘다.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저기 숨었다고, 답답하네.
사냥꾼: 어디서 뭐라고 하는 거야?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어디? 누가 따라온 거야? 어디야?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어디? 장난치지 말고 나와!
여우목도리: 시끄러워. 노루 도망가겠다.
사냥꾼, 거친 호흡을 내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여우목도리: 어지러워.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네 목.
사냥꾼: 목?
사냥꾼은 여우목도리를 내려본다.
손으로 죽은 여우의 털을 만진다.
여우목도리: 간지러워.
사냥꾼: 내가 오늘 너무 뛰어다녔나 보다.
여우목도리: 그냥 집에 가게?
사냥꾼: (머리를 흔들며) 이 소리가 왜 안 사라져? 빨리 내려가서 찬물로 좀 씻어 야겠다.
여우목도리: 날도 추운데.
사냥꾼: 조용히 좀 해라. 조용히 좀.
여우목도리: 왜? 좋잖아. 심심하지도 않고.
사냥꾼: 귀신이 들었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겠다.
여우목도리: 내가 아직 안 죽었거나.
사냥꾼: 안 죽긴 뭘 안 죽어. 내가 네 머리부터 내장, 뼈까지 싹 도려냈는데.
여우목도리: 잘했다 잘했어.
사냥꾼: (한숨) 귀신 장난 때문에 노루 놓쳤네.
여우목도리: 장난은 무슨, 진지하게 나불대는 거야.
사냥꾼, 여우목도리를 벗어 던지려 한다.
벗겨지지 않는 여우목도리.
여우목도리: 아파.
사냥꾼: 이게 왜 안 벗겨져?
여우목도리: 그만 좀 해. 아파. 아프다고.
사냥꾼: 이게 왜 안 벗겨져?
여우목도리: 찢어지겠어! 아파!
사냥꾼, 온 힘을 써보지만 여우목도리는 벗겨지지 않는다.
사냥꾼: 내가 요물을 죽였네.
여우목도리: 요물은 너야.
사냥꾼: 아가리 다물어라.
여우목도리: 노루 잡아야지.
사냥꾼: 아가리 좀 다물어라.
여우목도리: 노루 저기 있어.
사냥꾼: …
여우목도리: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사냥꾼: …
여우목도리: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사냥꾼, 허리춤에 단도를 꺼내 여우목도리에 댄다.
사냥꾼: 그 아가리 좀 다물어라! 네 몸통 다 찢어 갈겨버리기 전에 아가리 다물어라! 응?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쟤가 지금 널 봐.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그래, 거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거기 있잖아 거기.
사냥꾼: 어디! 어디! 어디! 어디에 있는데!
여우목도리: 이것도 안 보여? 나는 어떻게 잡았어?
사냥꾼, 어디론가 뛰기 시작한다.
여우목도리: 어디 가?
사냥꾼: …
여우목도리: 어딜 그렇게 뛰어.
사냥꾼: …
여우목도리: 땀 냄새 나. 힘들겠다.
사냥꾼, 뛰다 멈춰 숨을 고른다.
사냥꾼: 말 해봐. 알겠으니까 말 해봐. 어디서부터 나한테 들러붙은 거야? 나보단 옆 동네 박씨가 여우는 훨씬 더 많이 죽였을 걸? 노루도 앞 동네 김씨가 훨씬 더 많이 죽였을 걸? 뒷동네 홍씨 할아버지는 곰이며 호랑이도 죽여봤대.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해봐. 왜 나야? 이 길을 달려도 끝이 없네. 저 길을 달려도 끝이 없을까? 말 좀 해봐. 왜 나냐니까? 애초에 나는 노루를 쫓은 게 맞아? 노루가 지금도 날 보고 있어? 이젠 노루가 날 쫓는 거야? 말 해봐. 말 좀 해봐. 그 나불대는 아가리로 말 좀 해봐. 응?
사냥꾼, 주변을 돌아보며 거친 숨을 내쉰다.
2. 두 번째 산
깊은 산속.
일본 순사복의 2명의 남자.
한 손에 총을 들고 주변을 살핀다.
순사1: 쥐새끼들이야. 쥐새끼들.
순사2: 쥐새끼는 무슨 바퀴벌레지. 지독하잖아.
순사1: 동물적으로 숨는 게 몸에 밴 민족이야.
순사2: 그러다 걸리는 것도 몸에 밴 민족이야.
순사1: 이 개새끼 못 잡으면 곤란한데.
순사2: 잡을 때까지 못 내려간다고 생각해. 내려가면 기무라가 우릴 가만 안둘 걸?
순사1: 개 같은 기무라. 성격이 아주 개 같아.
순사2: 맞아. 우릴 개처럼 대하잖아.
순사1: 우리한테만 그래, 조센징이라서.
순사2: 우리 같이 바로 협력한 조센징이 얼마나 된다고? 감사한 줄 알아야지. 개새끼들, 인력난이면서.
순사1: 이 조센징은 어디 있는 거야?
순사2: 조센징 중에도 아주 지독한 조센징이야.
순사1: 되지도 않는 개 짓거리하는 놈들.
순사2: 독립이 온다고 개소리 하는 놈들.
순사1: 넌 독립이 안 올 것 같냐?
순사2: 빠가야로. 절대 안 오지. 넌 올 것 같아?
순사1: 고노야로. 절대 안 오지. 여긴 이제 일본인데.
순사2: 그걸 인정을 못 해.
순사1: 그러게. 인정을 못 해.
순사2: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인정했으면 얼마나 살기 편해. 가족들도 편하고 말이야.
순사1: 그래, 우리 누이랑 어머니가 얼마나 편하게 있는데.
두 순사, 웃는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순사1: 뭐야?
순사2: 저쪽.
순사1: 어디?
순사2: 저쪽.
순사1: 저쪽에서 난 것 같은데?
순사2: 아냐, 저쪽.
순사1: 그래, 저쪽일 수도.
순사2: 아냐, 저쪽인가 보다.
순사1: 어디?
순사2: 저쪽.
순사1: 그래, 저쪽일 수도.
순사2: 아냐, 저쪽인가?
순사1: 너 뭐 하는 거야?
순사2: 뭐가?
순사1: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들어?
순사2: 제대로 들었어. 저쪽이라니까.
순사1: 아까는 저쪽이라며.
순사2: 그런데 이제 저쪽인 것 같아.
순사1: 뭔지 봤으면 좋았을 텐데.
순사2: 노루였던 것 같은데?
순사1: 봤어? 난 못 봤는데.
순사2: 못 봤지. 노루가 워낙 빠르잖아. 노루 본 적 없나? 얼마나 빠른데.
순사1: 실 없는 얘기 그만해. 노루가 확실 했던 거야? 조센징이 아니고?
순사2: 그런 것 같네.
사이.
순사1: 어이.
순사2: 왜?
순사1: 너 뭐야?
순사2: 뭘?
순사1: 이상하잖아.
순사2: 뭘?
순사1: 방해하는 것처럼 굴잖아.
순사2: 도대체 뭘?
순사1: 조센징 잡는 거. 네가 지금 방해한다고.
순사2: 무슨 소리야? 집중이나 해.
두 순사, 전방에 총을 겨누며 주변에 집중한다.
순사1: 어이.
순사2: 왜?
순사1: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그건 갑자기 왜?
순사1: 요새 안 물어본 것 같아서.
순사2: 언제는 물어봤나?
순사1: 어이.
순사2: 왜?
순사1: 가족 잘 있냐고.
순사2: 왜 그런 말투로 물어보는 거야?
순사1: 어떤 말투?
순사2: 날 의심하잖아. 내가 뭘 잘못했나?
순사1: 의심 안 해.
순사2: 그래? 알겠어.
두 순사, 자리를 바꿔 움직이며 주변을 살핀다.
순사1: 어이.
순사2: 왜?
순사1: 그래서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날 아직도 의심하네.
순사1: 아니야 그런 거.
순사2: 그럼 왜 자꾸 물어봐?
순사1: 내가 자네 가족도 못 물어보나?
순사2: 어이, 의심은 의심을 낳는 법이야. 그만하지.
순사1: 그래.
순사2: 어디 간 걸까?
순사1: 숨은 게 아니고?
순사2: 안 보이잖아.
순사1: …
순사2: 날 의심하는군.
순사1: 아냐.
순사2: 여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면 더 멀리 간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되잖아.
순사1: 아무 소리도 안 났어.
순사2: 그래, 그럼 계속 여기서 찾아보지 뭐.
순사1: 널 의심하는 게 아냐. 그리고 너일 리가 없잖아?
순사2: 나일 리가 없지.
순사1: 그래, 너일 수는 없어. 네가 정말 맞다면…
순사2: 맞다면?
순사1: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나와 있었던 모든 일들이 거짓이라는 말이잖아. 그건 너무 잔인해.
순사2: 그래 그건 너무 잔인하지.
순사1: 상실의 시대야. 난 내 유일한 친구를 잃을 수 없어.
순사2: 날 계속 의심하네.
순사1: 아니라니까!
순사2: 의심은 의심을 만들고 결국 진실이라고 속여. 멍청하긴.
순사1: 넌 천황폐하를 모시고 있나?
순사2: …말할 가치가 없어.
순사1: …그래, 내가 잠시 이상했어. 좀 더 이동해보자. 너 말처럼 도망갔을 수도 있으니까.
순사2: 그래.
순사1: 그런데.
순사2: 왜?
순사1: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
순사1: 미안해. 정말 궁금해서 그래. 우리 가족은 잘 있거든. 누이와 어머니 둘 다 나 덕분에 굶지 않고 잘 계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했었나? 안 했지. 우리 정도면 그래도 이제 서로 가족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순사2 총구를 돌려 순사1의 가슴을 향해 쏜다.
총소리.
순사1, 그대로 쓰러진다.
순사2: 빠가야로.
산속 바위 뒤에서 남자가 나온다.
남자: 이걸 어떻게 합니까?
순사2: 그냥 어떻게든 지나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자: 잘하셨습니다. 이 자가 그 정도로 의심했으면 고발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순사2: 아뇨… 못했을 겁니다.
남자: 예?
순사2: 이 자는 고발 못했을 겁니다.
남자: …
순사2: 총소리 때문에 다른 순사들이 이리로 올 겁니다. 빨리 이동하시죠.
남자: 좋습니다. 이 산 넘어 임시 독립군 기지가 있습니다. 서두릅시다.
순사2: 예.
순사2와 남자, 쓰러진 순사1을 남겨두고 급히 사라진다.
3. 세 번째 산
깊은 산속.
어머니와 아버지가 손전등을 켜고 두리번 거린다.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현수 너 어디 있는 거야!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그만 나와!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현수야! (소리치며) 빨리 안 나와?
아버지: (한숨) 에라이.
어머니: 애가 어디까지 간 거야 도대체.
아버지: 죽으려고 환장한 거지.
어머니: 자꾸 그렇게 무섭게 하니까 애가 도망가는 거 아냐.
아버지: 내가 뭘? 잘못했으면 혼이 나야지. 그럼 그냥 방치 해?
어머니: 알겠다고. 근데 현수가 도망친 적은 없었잖아.
아버지: 도망은 무슨 지가 어딜 간다고.
어머니: 그래서 찾았어? 지금 세 시간째야. 해도 지기 시작했고.
아버지: 여기 산으로 올라갔다고 진기네 엄마가 그랬다며. 더 갈 데도 없어.
어머니: 그냥 경찰에 신고할까?
아버지: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쪽 팔리게 경찰서 들락거리게?
어머니: (소리치며) 김현수! 너 안 나올 거야? 엄마 아빠 여기까지 왔잖아!
아버지: 이 새끼 덜 맞아서 그래. 또 남자 새끼가 어디 웅크리고 숨어 가지고 벌벌 떨기나 하고 있겠지.
어머니: 또 때려? 그러다 또 도망가면?
아버지: 그럼 또 맞아야지. 안 도망갈 때까지.
어머니: (한숨) 애가 그러니까 당신 싫어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 그래도 교육 똑바로 시켜야 돼. 진기는 혼자 운동장에서 농구도 하고 인사도 싹싹하게 하잖아. 근데 현수 이 새끼는 애가 비리비리해가지고 어디 나가지도 않고 말이야.
어머니: 그냥 말로 따끔하게 혼내고 말자.
아버지: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애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거야. 이제 고등학교 가봐. 바로 왕따 당할 걸?
어머니: …
아버지: 김현수! 지금 나오면 아빠가 안 때릴 게! 진짜로!
어머니: 정말?
아버지: 조용히 해. 자! 셋 셀 동안 나와! 하나! 둘! 셋!
사이.
어머니: 여기 없나?
아버지: 여기 뒷산에 갈 데가 어디 있어? 이 근처 말고 다른 데는 다 가봤는데.
어머니: 산 넘어서 다른 데 간 거 아냐?
아버지: 얘 어디 갈 데 있어? 여기 산 너머에 친구 있냐고.
어머니: 아니? 전혀 없지?
아버지: 거 봐. 우리 동네에도 친구가 없는데 여기 넘어서 갈 데가 어디 있겠어?
어머니: 그럼 정말 여기 숨어있다는 거야? (소리치며) 야! 김현수! 엄마 아빠 이제 추워! 빨리 안 나와?
아버지: 에이씨, 좀 전 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아. 김현수! 이제 그만 나와!
어머니: 진짜 넘어갔나?
아버지: 이 새끼가 진짜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머니: 여기 숨어 있으면 안 얼어 죽어?
아버지: 그러니까 좀 잘 찾아봐.
둘은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살핀다.
어머니: 으스스하다.
아버지: 경찰서 간 거 아니겠지?
어머니: 경찰서?
아버지: 여기 산 넘어 경찰서 있지 않아?
어머니: 어머나.
아버지: 에이, 이 새끼 경찰서 갔네!
어머니: (가슴에 손을 대며) 잠깐만, 나 심장 뛰어.
아버지: 내가 뭐라고 했어? 현수 새끼 인생 패배자야. 고자질이나 할 줄 알지.
어머니: 가서 무슨 말 했을까?
아버지: 맞았다고 했겠지! 에이씨, 가정폭력이니 뭐니 지랄 떠는 소리나 듣겠네!
어머니: 그러니까 왜 자꾸 때리는 거야! 당신 때문에 이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녀!
아버지: 나 때문에? 당신은 안 때렸어?
어머니: 내가 언제 때렸어?
아버지: 당신도 애 머리 툭툭 때리잖아. 영어 단어 못 외운다고 때리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머니: 나는 그냥 툭툭 건드린 거지! 당신은 매로 때리잖아! 매로만 때려? 주먹으로 그냥 마구잡이 패기까지 하면서!
아버지: 내가 뭘 마구잡이로 팼다고 그래? 잘못했을 때 훈계 목적으로 몇 대 때린 거지.
어머니: 어머, 기억 못 하는 척하는 거야, 진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회식하고 들어온 날 현수 방 들어가서 그냥 때린 거 몰라?
아버지: 에이씨, 당신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어? 당신도 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냐고.
어머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도 당신한테 맞을까 봐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지!
아버지: 참 나, 어이가 없네?
어머니: 뭐가?
아버지: 왜? 신고 당하면 당신도 피해자라고 말하게?
어머니: …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점점 다가간다.
아버지: 맞잖아.
어머니: 아, 아니야! (한숨) 주변 잘 봐봐. 어디 쓰러져 졸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아버지: 잘도 그러겠다.
어머니: 김현수! 현수야!
아버지: 김현수! 김현수!
어머니: 에이씨, 사과를 좀 하자.
아버지: 뭐? 사과를 해?
어머니: 아니, 애가 어디 숨어서 안 나오는 거면 미안하다고 해서 좀 마음을 풀어주자고.
아버지: 그런 식으로 하면 애가 우리 진짜 우습게 본다?
어머니: 아니 사과까지 해도 안 나오는 거면 여기 없는 거 아냐? 그러니까 사과하고 안 나오면 산을 넘어가든, 내려가서 동네 다시 돌아보든, 아니면….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 경찰서 가보든가 해야지! 뭐 어떻게 해!
아버지: 에이씨….
어머니: 현수야! 이제 그만 나와! 엄마가 미안해! 빨리 내려가자! 위험하잖아 여기!
아버지: …
어머니: 뭐해? 안 해?
아버지: 김현수! 빨리 안 나올래! 아빠가 미안해! 지금 나와도 안 때릴게! 어서 나와! 아빠가 미안하다!
사이.
아버지: 잘도 나온다.
어머니: 아니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아악!’비명소리 같은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깜짝아!
아버지: 고라니야 고라니.
고라니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
어머니: 어우 시끄러워.
아버지: 어디서 계속 울어대는 거야? 고라니 소리 처음 들어봤지? 군대에서 엄청 많이 들었었는데. 소름 끼쳐. 비명소리 같잖아.
아버지, 손전등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리고 이동한다.
어머니: 어디 가 무섭게!
아버지: 아니 계속 울어대잖아. 오랜만에 고라니 한번 보고 내려가게.
어머니: 그만 내려가자. 울음소리가 재수 없어.
아버지: 저기 찾았다!
어머니: 고라니? 어디?
아버지: 잠깐, 뭐야 저거?
어머니: 뭐가?
아버지의 손전등이 어느 한 나무 위쪽을 비춘다.
손전등 불빛이 나무 위를 비추자 교복 넥타이로 목을 매 죽은 현수가 보인다.
어머니: 어머… 어머….
아버지: 현, 현수야….
어머니: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버지: 아니야… 아니야….
어머니: 현수야… 현수야…
아버지: 아빠가 미안해… 이건 아니야… 현수야… 아빠가 미안해….
고라니가 풀숲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가 점점 사라진다.
4. 다시 첫 번째 산
추운 겨울 깊은 산속.
여우 목도리를 한 사냥꾼, 총을 든 채 숨을 가쁘게 내쉰다.
사냥꾼: 얼마나 뛰어온 걸까… 아무리 뛰어도 이 산 밖으로 나가질 못하겠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난 잘 살려고 한 거야. 내 가족 먹여 살리려고 사냥한 것밖에는 없다고! 아가리 좀 열고 대답 좀 해봐! 응?
여우목도리: 소리 좀 그만 질러. 시끄러워.
사냥꾼: 난 어떻게 해야 해?
여우목도리: 뭘 어떻게 해? 노루 사냥해야지.
사냥꾼: 집에 돌려보내 줘… 날 기다릴 거야.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어디! 어디!
사냥꾼, 사방에 총을 겨누어 본다.
여우목도리: 저기 있잖아. 저기.
사냥꾼: 여기?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여기?
여우목도리: 저기 노루 눈 안 보여? 아직 해가 다 안 떨어졌는데도 빛나. 아무래도 산신님인가 봐. 영롱해.
사냥꾼: 산신님? 내가 여기서 잡은 노루가 몇 마리인 줄 알아? 이 썩을 여우새끼야! 사람 홀리지 말고 내 몸에서 꺼져! 꺼지라고!
사냥꾼, 소리를 지르며 단검으로 목도리를 찌른다.
단검은 목도리를 뚫고 사냥꾼의 목도 찌른다.
사냥꾼: 아악!
사냥꾼은 쓰러진다.
여우목도리: 미련하다.
사냥꾼: (흐르는 피를 막으며) 그만해! 그만해!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어디! 노루가 대체 어디에 있는데!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아파. 너무 아파.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여우목도리: 노루가 다가온다.
사냥꾼: 뭐라고? (총을 겨누며) 어디?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여기 네 앞에.
어느새 노루가 사냥꾼의 앞에 있다.
노루가 고개를 내려 사냥꾼을 내려다본다.
사냥꾼은 노루의 모습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노루: 저기 있잖아. 나도 다리가 아파. 나도 피곤하고 나도 배고파.
저기 있잖아. 나도 걱정돼. 나도 가족이 기다려. 나도 무서워.
나도 짜증 나, 나도 화가 난다고.
산은 너희한테 얼마나 더 내줘야 하는 거야? 사냥하게 해줘. 숨게 해줘. 도망가게 해줘. 땅에 뭘 묻게 해줘. 살게 해줘. 자게 해줘. 오줌싸고 똥 싸게 해줘. 등산하게 해줘. 산책하게 해줘. 밥 먹게 해줘. 심지어 죽게 해줘. 그 외 너무 많아.
저기 있잖아. 여기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항상 도망가고 누군 쫓아가고 그걸 다시 누군가 쫓아가고 또 쫓아가고 반복하고. 여긴 계속 그래. 뭐가 태어나면 금방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금방 죽고 또 죽고 또 죽어.
그래, 여기서 내려가 봐. 여기서 내려간다고 산에서 나간 걸까. 산은 곧 땅이야. 땅은 곧 산이야. 어디든 똑같아. 여긴 특별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가 특별하게 죽이고 살리고 은밀하게 이루어내고 있는 모든 일들. 결국 모두 땅에서 일어나는 거야. 수치스러워. 그걸 바라보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 계속 도망가. 이 땅끝엔 뭐가 있을까. 도대체 거기엔 뭐가 있을까. 다시 산 입구가 있겠지. 덧없어. 참 얄궂어. 안 그래? 무엇을 그렇게 쫒으며 뛰어다녀? 정말 넌 노루를 쫓고 있었던 걸까? 넌 뭘 쫓고 있었던 걸까. 넌 뭘 위해 그렇게 달렸을까. 난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도 이 목도리처럼 될까. 머리는 어디 잘나가는 집 벽에 걸리고 몸은 누군가의 목에 매달려 말을 걸게 될까. 그러면 넌 죽으면 어떻게 되지. 너도 머리가 걸리고 목도리가 되나? 아니, 땅으로 간다. 넌 땅으로 간다. 네가 쌓이고 쌓여 산은 높아진다. 그렇게 산이 된다. 네가 지금 닿아 있는 땅 위에 풀이 곧 너의 자식이자 너의 어머니다. 서로를 먹고 서로를 삼켜. 우린 고로 하나야. 자 뛰어 도망가. 또 너의 손으로 너의 가족들을 죽여. 너 자신을 죽여. 시간은 잘 흘러간다. 영원히. 공허하고 허무하게. 그렇게 억겁의 시간은 흘러간다.
긴 사이.
사냥꾼: 노루야. 날 집으로 보내줘.
노루: 그래. 어서 가자.
사냥꾼 총구를 돌려 자신의 턱을 겨냥 후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
사냥꾼은 쓰러진다.
노루가 사라진다.
노루가 풀들을 해집고 뛰어가는 소리가 곧 바람이 되고 곧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된다.
막.
<당선소감>
난세 속에서 용기 있게 해야 할 말 내뱉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쉽사리 ‘희곡 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항상 글 쓰는 것을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까 고민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노력들이 혹여나 촛불처럼 흔들리다 훅 꺼져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움이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계기로 저는 ‘희곡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변화일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너무나도 큰 하나의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막연하게 아들이 연극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당선 소식은 제 자신에 대한 기쁨보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다시 한번 알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큰 의미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며 여전히 희곡을 완성 시킬 때마다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앞으로 너무나도 즐겁게 글을 써 내려갈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움직이게 해줄 동기부여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난세 속에서 용기 있게 해야 할 말들을 내뱉으며 앞으로도 변치 않고 꾸준히 글 쓰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소식을 듣고 아낌없이 축하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응원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 조언을 해주신 윤한솔 연출님, 전성현 작가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제가 하는 일에 언제나 한결같은 믿음으로 밀어주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1994년 경기도 수원시 출생
● 본명 이준길
● 순천향대 연극무용학과 졸업
● 그린피그 연출부 단원.
<심사평>
시적인 리듬감 갖춘 도전적인 실험성에 주목
대다수의 희곡과 시나리오는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체로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었고, 염세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작동된 자연주의 작품도 제법 보였다. 응모작에서 빈번하게 언급된 단어를 소개하자면 집주인, 월세, 시험, 취직, 백수 등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젊은 세대들의 불안감이 내 머리를 흔들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희곡은 다음의 세 편이 인상적이었다. 안유현의 ‘지구 반대편에서 스쿼트를 하는 사람들’은 단막극의 형식과 규모 안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를 개성적으로, 넘치지 않게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휘영의 ‘파란’은 고래를 도시로 끌어들인 상상력이 매력적이다. 주은길의 ‘산은 말한다’는 분절된 구성이지만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흡입력이 있다.
시나리오는 두 편이 눈에 들어왔다. 조정임의 ‘그녀가 돌아왔다’는 죽음을 앞두고 돌아온 여자의 마음과 그걸 받아들이는 남자의 마음 사이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같은 작가의 ‘생의 어느 순간 지독한 수치심이 몰려왔다’도 비슷한 느낌으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특이한 파동을 일으켜 사건을 일으키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솜씨가 좋다.
많은 망설임 끝에 주은길의 ‘산은 말한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실제 공연에서 여우목도리의 형상화에 애로점이 있겠지만, 인물들이 구사하는 대사가 시적인 리듬감을 갖추고 있고, 우화적인 상상력과 더불어 도전적인 실험성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글 속에는 칼이 있다. 언젠가 관객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길 수 있는 극작가가 되기를.
심사위원 : 김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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