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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위대한 무사고 / 윤성민

 

등장인물

경식

근태

선생님

과장



무대

무대는 공장 작업실과 교무실이다. 무대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눈다. 객석에서 봤을 때 무대 왼쪽 4분의 3을 공장 작업실로, 오른쪽 4분의 1을 교무실로 한다. 공장 벽에는 ‘무사고 980일’이라고 적힌 전자알림판이 걸려 있다. 장에 따라 숫자가 늘어난다. 오른쪽 천장에는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다.



1장

공장 작업실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고 작업실 뒤편에는 오른쪽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도어록으로 된 문이 하나 있다. 작업실 왼쪽에도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 컨베이어 벨트가 느릿느릿 돌아갈 때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난다.

근태와 경식,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소음 방지 귀덮개(헤드셋)를 쓰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오는 기계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정상 제품은 정상이라고 적힌 박스에, 불량 제품은 불량이라고 적힌 박스 안에 담는다. 휴식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근태, 일을 멈추고 헤드셋을 벗고 부채질을 한다. 경식은 알람 소리를 못 들은 듯 기계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근태: 경식아, 쉬었다 하자. 민철이 이 자식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넷이서 해야 하는 걸 둘이서 하려니까 눈알 빠지겠다. 야, 경식아. 그만해.

경식: (귀덮개를 벗고) 예?

근태: 휴식 시간이야. 쉬고 하자고.

경식: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근태: 이게 귀가 먹었나. 딴 건 못 들어도 휴식 알람은 들어야지. 쉬기 싫어?

경식: 아뇨, 좋아요. 죄송해요. 저 요즘 귀가 잘 안 들려서요.

근태: 노인네야? 벌써 귀가 먹게.

경식: 전에는 헤드셋을 껴도 계속 컨베이어 벨트 소리가 들렸는데 이제는 헤드셋을 벗어도 들렸다 안 들렸다 해요.

근태: 너 일하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거 아냐?

경식: 아이, 그런 거 아니에요.

근태: 하루 쉴래?

경식: 진짜요?

근태: 새끼, 잘 들리는구만. 어디서 구라를 까고 있어.

경식: 잘 들릴 때도 있고 안 들릴 때도 있고 그래요.

근태: 선택적이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좋겠다.

경식: 아, 진짜 농담 아닌데.

근태: 됐고. 누구 안 오지? (주위를 살피고 천장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보고 반대쪽으로 등 을 돌린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경식: 저기.

근태: 아, 왜. 이러면 감시카메라에 안 보여. 연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여기서 피는 거 하루 이틀이야? 다른 데는 다 하는데.

경식: 그게 아니라요.

근태: 그게 아님 뭔데.

경식: 저도 한 대만.

근태: 너 원래 담배 피웠냐?

경식: 가끔요. 원래 거의 안 펴요.

근태: 왜? 고민이라도 있어?

경식: 사는 게 고민이죠.

근태: 나이도 어린 놈이 고민은 무슨. 나쁜 건 벌써부터 배우면 안 돼.

경식: 네... (시무룩한 표정이다.)

근태: (경식의 표정을 보고) 이건 나쁜 거 아니니까 한 대 받아라. (담배 한 개비를 건네고 불을 붙여준다.)

경식: 네, 형. (깊게 빨아마시고 내뱉으며)

근태: 요 자식이 또 형이라고 하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여기선 조장님이라고 하라니까.

경식: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요. 겨우 세 살 차인데. 형도 민증에 잉크도 안 말랐잖아요.

근태: 내가 밥 먹은 그릇 수만 따져도 임마. 얼마야? (손가락으로 세어보는 시늉)

경식: 저 밥 많이 먹어요. 그릇 수로 따지면 형이랑 비슷할걸요?

근태: 넌 한마디를 안 지려 드냐.

경식: 형은 한마디라도 이기려 드네요.

근태: 좀 맞자. 이 자식아.


근태와 경식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위 문이 열리고 과장이 들어온다. 근태와 경식, 화들짝 놀라 서둘러 담배를 끈다. 과장,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과장: 월요일부터 아주 신났네.

근태: 죄송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어쩐 일로.

과장: 어쩐 일은 무슨. 관리자가 관리를 하러 돌아다녀야지.

경식: 안녕하세요.

과장: 어, 그래. 안녕. (작업실 둘러보고) 왜 둘밖에 없지?

근태: 저, 그게, 한 명은 실습생인데 오늘 안 나왔습니다. 금요일에 과장님이 사람 부족하다고 데려가셨던 친굽니다.

과장: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아아, 응, 그 친구. 응.

근태: 전화도 안 받고. 아마 몸이 좀 안 좋은가 봅니다. 전에도 코피 흘리고 그랬는데. 그리고 한 명은 그 왜, 지난번에......

과장: 어어, 내가 잊고 있었네. 워낙에 공장에 사람이 많아야지. 그래. 아무튼 둘이 고생이 많아. 자, 내가 온 건 다름이 아니고 알고 있겠지만 7팀이 우리 공장의 마지막 검사 공정을 담당하고 있는데 작업 속도가 너무 느려서예요. 속도가 제일 안 나오고 있어. 납품기한은 기업과 기업이 하는 약속이에요. 약속을 지켜야지 신뢰가 쌓이고 하는 거란 말이야. 그렇지, 근태야?

근태: 네, 그렇습니다.

과장: 그런데 근태의 근태가 불량하면 되겠어?

근태: 안 됩니다.

과장: 그럼 어떡해야 하지?

근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 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론 부족해. 73점짜리 대답이야. 답은 더 열심히 오래, 잘하겠습니다야. 알간?

근태: 예, 알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과장: 근태 소집해제까지 얼마 남았지?

근태: 딱 73일 남았습니다.

과장: 그래, 얼마 안 남았네. 여태 일한 거 물거품 안 되게 하려면 잘해야지. 이번 납품만 끝내면 휴가 쓰게 해줄게. 가기 전까지 사고 안 나게 조심하고. 무사고 1000일은 봐야 하지 않겠어? 야 씨, 1000일만 되면 기자들한테 돈도 좀 찔러줘서 기사도 팍팍 내고 대대적으로 홍보할 거야. 잘하면 대통령상도 받고. 너도 나중에 이력서에 내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일했다고 쓰고 얼마나 좋아.

근태:네. 그런데 과장님. 사람을 좀 더 붙여주시면 안 될까요?

과장: 응? 사람이 없어. 요즘. 불경기인데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대기업이나 가려고 하지. 쯧.

근태: 원래 넷이 하던 일인데...

과장: 야, 근태야. 생각을 해 봐라. 예를 들어, 음, 그래. 자동차 바퀴가 몇 개야. 네 개지? 물론 네 개가 있으면 아주 잘 굴러가겠지. 그런데 하나가 빠지면 자동차가 안 굴러갈까? 하나 빠져도 자동차는 굴러가. 어디로 굴러가는지는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냥 어떻게든 굴러가기만 하면 돼. 하나 더 빠지면 오토바이라고 생각하고 더 빨리 갈 수 있어. 굴러가겠다는 정신이 중요해. 그리고 내가 일부러 안 붙여주는 것도 아니고, 응. 회사에 돈이 없어요. 돈이. 사람도 없고 돈도 없어. 그럼 있는 걸로 해야지. (사이) 뭐 더 할 말 있어?

근태: 아니요. 없습니다.

과장: 그래, 괜히 사내놈이 쪼잔하게 꿍해 있지 말고, 그리고 학생은 이름이 뭐였지? 여기 학생이 워낙 많아야지.

경식: 한경식입니다.

과장: 아, 그래. 뭐 할 만하고? 얼마나 됐지?

경식: 저 4개월 차입니다.

과장: 제법 됐네. 좀만 더 하면 실습 끝이네?

경식: 네.

과장: 그래, 어떻게 졸업하고 바로 여기 지원하게?

경식: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과장: 실습 다 끝나가는데 아직도 잘 모르면 어떡해? 미리 출근 도장 찍는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 여기만 한 데 없어. 야근이 좀 있긴 하지만 우리처럼 주말에 쉬게 해주는 데가 그렇게 많은 줄 알아? 일 잘하게 생겼네. 그리고 뭐, 다들 건강 문제없지? 뭐 어디가 아프다든가. 그럼 바로 얘기하지 말고 물량 다 끝나면 얘기해. 사고가 나도 공장 밖에서 업무 시간 아닐 때 나라고. 아, 농담이야 농담. 몸 생각하면서 해. 그리고 몸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안전하게 납품기한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사이) 뭐, 나한테 할 말 없지? 그럼 가볼게. 일들 해.

경식: 저, 과장님.

과장: 응?

경식: 저 월급을 첫달 빼고 아직 못 받아서요.

과장: 월급?

경식: 예. 월급.

과장: 하, 이 새끼 이거. 좋게 봐줬더니 너 여기서 기술 배우는 거 아무나 못 배워. 다 돈이야 돈. 학원 가면 학원비 내고 배우잖아. 근데 너 여기 오면서 돈 내고 배우냐? 아니잖아. 무료로 배웠으면 공짜로 일해야지. 임마. 어린놈의 새끼가 벌써부터 돈 밝히네. 야, 너 엎드려.

경식: 네?

과장: 귀먹었어? 엎드리라고. 근태야, 쇠파이프 하나 가져와라.

근태: 과장님. 참으세요.

과장: 넌 나와 새꺄, 참긴 뭘 참아. 내가 몇 팀이야, 그 4팀에도 월급 얘기하는 새끼 있어서 정신교육 시켜줬는데 팀끼리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나 봐? 여기서 또 듣는 걸 보니.

근태: 납품기한 맞추려면 얘 없으면 힘듭니다. 과장님.


그때, 웃음벨이 울린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웃어요. 웃으면 복이 와요. 웃으면 건강해지고 웃으면 행복해요. 웃어요. 힘든 일도 잊고 웃어봐요. 웃어요’라는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웃음벨 소리와 함께 과장,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근태와 경식도 억지로 크게 웃는다. 웃음벨 소리가 끝나자 웃음 뚝 그친다.


과장: 후, 하. 야,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너 다음에 또 월급이 어쩌니 하면 너네 학교 애들 안 받는다고 할 거야. 근태야. 나 간다.

근태: 넵. 고생하십시오.


과장, 넥타이 고쳐매면서 계단을 올라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고 나간다. 한숨을 쉬는 근태. 경식은 주먹을 꽉 쥔 채 말이 없다.


근태: 후. 과장새끼 왜 급발진이냐. 그래도 마침 타이밍 좋게 웃음벨 울려서 다행이지.

경식: 전 웃음벨이 싫어요. 왜 저렇게 억지로 웃게 하는 거예요?

근태: 억지로 웃는 것도 진짜 웃음의 90%만큼의 효과가 있댄다.

경식: 전 힘들 때 억지로 웃으면 더 공허해진다고 들었는데요. 학교 갔다가 늦게 출근할 때 사람들이 단체로 억지로 웃고 있는 거 본 적 있는데 너무 기괴하고 소름 끼쳤어요. 안 하면 안 되나?

근태: 다들 자기 입맛에 좋을 대로 받아들이는 거야. 좋게좋게 생각해야지 어쩌겠냐. 그건 그거고, 너도 여기 4개월이나 다녔으면 알 거 아니냐.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데 다니는 니 친구들이 얘기 안하디? 그걸 왜 물어봐가지고.

경식: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형, 아니 조장님까지 혼나고.

근태: 야, 그냥 형이라고 해. 됐어. 대신 오늘은 야근이다.

경식: 어차피 매일 야근이었잖아요. 근데 형은 야근 수당 얼마씩 받아요?

근태: 야, 쥐꼬리만 한 실습생 월급도 안 주는데 나같은 산업체 따까리한테 야근 수당을 챙겨줄 것 같냐?

경식: 형은 근데 왜 신고도 안 하고 다른 데로 안 가요?

근태: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소집해제 거의 다 됐는데 옮기려면 골치 아프다.

경식: 신고 안 하면 다음 사람도 고통받잖아요.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근태: 신고하면? 뭐가 나아질 거라고 믿냐? 사람만 바뀌지. 일은 똑같아. 그러니까 노예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먼 옛날에 노예해방이 됐어도 아직도 이렇게 거의 노 예처럼 살고 있잖아.

경식: 그래도 산업체 온 덕에 군대는 안 갔잖아요.

근태: 야, 이거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일한 만큼 돈도 못 받는 게 얼마나 고통인데. 나한텐 이게 군대야. (사이) 아니, 근데 민철이 새낀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됐고, 우리끼리라도 다시 시작하자. 이렇게 노가리까고 있을 시간 없어.

경식: 예.


근태와 경식, 귀덮개 쓰고 버튼을 누른다.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암전.


2장


장소는 교무실이다. 경식의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 앉아 문서들을 확인하고 있다. 책상에는 책들이 이리저리 쌓여 있다. 경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무실로 들어온다.


경식: 선생님.

선생님: 어, 경식이 왔구나. 오랜만이다.

경식: 예. 실습 보고서 가져왔어요.

선생님: (경식에게서 보고서 받아들고) 그래. 일은 할 만하고?

경식: 뭐, 그냥요.

선생님: 그냥은 무슨. 어디 아픈 데는 없지?

경식: 네, 귀가 잘 안 들릴 때가 있긴 한데 괜찮아요.

선생님: 귀가 왜?

경식: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컨베이어 벨트 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지 귀덮개를 계속 쓰고 있어서 그런 건지.

선생님: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하냐. 병원은?

경식: 병원까지 갈 거 있나요? 이러다 나아지겠죠.

선생님: 조심해 임마. 몸 관리는 어릴 때부터 해야 돼. 지금이야 이렇게 선생님이 걱정해주지, 사회 나가면 아무도 안 챙겨줘.

경식: 네. 조심할게요.

선생님: 진짜 조심해야 돼. 민철이 이번에 다친 거 알아?

경식: 민철이가요? 공장도 안 나오던데. 많이 다쳤대요?

선생님: 프레스기에 오른손이 완전히 나갔대. 어제 수술 끝났다고 해서 퇴근하면서 병문안이라도 가려고.

경식: 프레스기요? 민철이 저랑 같이 불량률 검사하는데...... 프레스기 만질 일이 없어요.

선생님: 민철이랑 많이 친해?

경식: 네. 같이 일하기도 하고 학교 와도 다들 실습 나가 있어서 그나마 얼굴 자주 보는 건 민철이라서요.

선생님: 그럼 좀 나아지면 가. 많이 놀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좀 그럴 거야. (받아든 보고서 살펴보다가) 장래 계획서가 없네. 내가 안 줬나?

경식: 아뇨, 받았어요.

선생님: 근데 왜 안 가져왔어?

경식: 선생님, 저 아직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책 읽는 게 좋긴 한데. 읽는 것만으로는 직업이 될 수 없잖아요.

선생님: 크게 고민해서 안 써도 돼. 장래희망이라고 쓴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써.

경식: 선생님은 어릴 때 꿈이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 나? 음,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글 잘 쓰는 사람은 많고 글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포기했어. 그래도 뭔가 계속 쓰는 직업을 갖긴 했으니 거의 이뤘다고 치자.

경식: 네에... 다음 보고서 내러 올 때까지 생각해올게요. (사이) 선생님. 근데요, 제가 업체에서 실습비를 못 받아서요.

선생님: 어떻게, 너도 안 준대?

경식: 다른 애들도 다 못 받았대요?

선생님: 그래. 골치다. 진짜.

경식: 어떻게 받아주실 수 없을까요?

선생님: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 아니, 근데 걔네는 학생 실습비 얼마나 한다고 그걸 안 주냐. 그래놓고 우수 산업체 선정이라고 홍보하는 뻔뻔한 새끼들. 이걸 어쩌지? 이제 실습도 거의 다 끝나가는데 그냥 사회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참자.

경식: 그래도 선생님이 업체에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선생님: 나도 마음 같아선 우리 애들 돈 다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현실이 이런 걸 어쩌냐. 아쉬운 건 우린데. 그쪽에서 다음부터 실습생 안 받는다고 해봐. 우리 학교 애들 그만큼 받아주는 데가 거기뿐인데 합격률 떨어지면 학교 문 닫아야 돼. 너 형편 어려운 것도 알고 다 아는데,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진짜 미안하다. (지갑에서 만원 꺼내 쥐어주며) 그래도 거기 만한 데가 없어. 가는 길에 이걸로 뭐라도 사 먹어. 그리고, 보자. (책상 위의 책들을 이것저것 집어 경식에게 주며) 너 아까 책 읽는 거 좋다고 했지? 가져가서 읽어.

경식: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 그래. 몸 챙기고.


경식, 꾸벅 인사하고 나간다. 선생님, 한숨 쉬고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떨구며 암전.


3장


공장 작업실이다. 근태, 귀덮개를 쓰고 검사 작업하고 있다. 경식, 왼쪽 문으로 들어와 일하고 있는 근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인사한다.


경식: 안녕하세요.

근태: 왔냐? 좀 늦었네.

경식: 학교 다녀왔어요. 담임 선생님이 그러는데 민철이 병원에 있대요.

근태: 어디가 아파서?

경식: 프레스기에 손이 찍혔대요.

근태: 프레스기에 손 찍힐 일이 뭐가 있어?

경식: 그러니까요. 지난주에 과장님이 일 시킨다고 데려간 다음에 사고 난 것 같은데. 오시면 여쭤볼까요?

근태: 야, 괜히 물어봤다가 무슨 욕을 또 바가지로 먹으려고.


작업실 위의 문 열리고 과장, 화난 얼굴로 커다란 박스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과장: 박근태!

근태: (달려가 박스 받으며) 예, 과장님. 이게 다 뭡니까?

과장: 네가 고른 불량품이다. 너 임마!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근태: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받은 물량 검사 거의 다 끝냈습니다. 불량인 것들만 다 제대로 골라냈습니다.

과장: 누가 물량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줄 알아? 불량률!

근태: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과장: 불량률 너무 잡아내지 말라고 했잖아! 시스템에 불량률 높다고 전체 재공정 돌려야 된다고 뜨잖아.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몇 명이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아? 이 기계 하나에 얼마인 줄은 알고? 아니면, 너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근태: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갑자기 기계에 이물질이 들어간 경우가 많아져서 걸러냈습니 다.

과장: 불량 판정 낸 것들, 재검사해서 쓸 만한 거 추려내고 불량률 수정해.

근태: 저, 그럼 품질에 문제가 생길 텐데.

과장: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납품기한이나 신경 써!

근태: 예. 알겠습니다.

경식: 저, 과장님.

과장: 넌 또 왜?

경식: 민철이가요, 저랑 같이 일하는 제 친구인데요. 프레스기에 손을 찍혔다는데 과장님이 지난주에 일손 부족하다고 데려가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여쭤보고 싶어서요.

과장: 뭐라는 거야? 그런 건 난 모르겠고, 우리 공장에서는 사고 같은 건 없어. 일 시킨 거 안 하고 지 혼자 싸돌아다니다가 다친 거겠지. 다쳐도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업무 다 끝내고 공장 밖에서 해! 아무튼 난 몰라. 일이나 해!


과장, 씩씩거리며 경식을 밀치고 계단을 올라가 도어록 비밀 번호 누르고 쾅 소리 나도록 문 닫고 나간다. 그 광경을 보던 근태, 묵묵히 박스를 질질 끌고 자리 앞으로 가 앉는다.


근태: 일 시작하자. (박스에서 기계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 본다.)


경식도 자리에 앉아 기계를 돌려본다. 이리저리 확인해보다 기존에 있던 불량 박스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작업하다가 근태, 경식이 불량 박스에 넣은 기계들을 꺼내 살펴보고 몇 개는 다시 꺼내 정상 박스에 넣는다. 경식, 잠시 근태의 행동을 지켜본다.


경식: 형.

근태: 왜.

경식: 생각해 봤는데요. 이상하지 않아요?

근태: 뭐가.

경식: 불량 있는 걸 잡아내는 게 우리 일인데 불량을 너무 많이 잡아내지 말라는 거요.

근태: 원래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야. 공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경식: 그럼 이 기계를 받을 사람들은요? 전 아직도 이 기계가 뭐에 쓰이는 건지도 잘 이해 못 하겠어요. 사람 살릴 때 쓰는 기계라고 했잖아요. 근데 불량인 걸 보내면 사람 죽이는 기계가 되는 거고 결국 우리가 죽이는 셈이 되잖아요.

근태: 야, 자꾸 생각하려고 들지 마. 공장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어. 그냥 까라면 까. 그게 군대고 그게 사회야.

경식: 군대 가본 적도 없으면서.

근태: 나한텐 여기가 군대라니까.

경식: 이거 언제 다해요?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그리고 형은 화도 안 나요?

근태: 시간이라고 생각해라.

경식: 시간이요?

근태: 그래. 끝없이 흐르는 시간. 네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가만히 있다간 너만 엿되는 거야.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고1의 시간에는 고1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재검사를 납품기한 전까지 끝내는 거야.

경식 전 싫어요. 안 할래요.

근태: 뭐? 너 지금 이거 안 하면 사회 나가서 뭐 할 건데?

경식: 전 작가 할 거예요.

근태: 뭐? 작가? 야, 임마. 작가는 아무나 하냐? 작가가 얼마나 계량, 계측, 계산이 확실한 사람들인데. 인물을 어디에 배치하고 어떤 사건을 어디에 배치하고 그런 게 딱 있단 말이야.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굳이 할 거면 그래, 넌 시인이 어울린다. 맨날 경제적 가치도 없는 잡지도 못할 뜬구름을 쫓아다니는 놈들. 플라톤이 시인놈들은 다 추방해야 된다고 했는데. 너 플라톤이 누군지는 알아?

경식: 알아요. 소크라테스 제자잖아.

근태: 어쭈?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경식: 선생님이 준 책에서 봤어요.

근태: 너네 학교는 무슨 선생이 고삐리한테 그런 책을 주냐.

경식: 난 연극이 마음에 드는데, 시인도 좋아요. 그리고 형은 뭘 몰라.

근태: 넌 뭘 아는데?

경식: 형이 모르는 걸 알죠.

근태: 말장난이나 할 줄 알지 아주.

경식: 집안에 보탬 되려고 마이스터고 온 거지, 나 중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어요.

근태: 기계가 웃겠다.

경식: 형은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근태: 넌 실없는 놈이고. 아무튼, 지금은 일이나 해.

경식: 하기 싫은데.

근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사회고 그걸 해내야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걸 아 직도 모르겠냐? (경식이 반박하려고 하자 입 틀어막고) 그냥 해.

경식: 알았어요...


암전.


4장


교무실이다. 선생님,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경식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경식, 조심스럽게 다가가 선생님의 어깨를 두드린다.


경식: 선생님.

선생님: 어, 경식아.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벌써 보고서 낼 때가 됐나? 엊그제 본 거 같은데 시간 빠르네.


경식이 건네주는 보고서 받아들고 읽다가 한숨 쉰다.


경식: 선생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선생님: 어?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경식: 민철이 병문안 다녀오셨어요?

선생님: 어, 어.

경식: 민철이 괜찮아요? 전화 계속 안 받던데.

선생님: 그게,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아.

경식: 왜요? 많이 아프대요?

선생님: 손이, 아니다. 아니, 후.

경식: 손이 왜요?

선생님: (사이) 의사가 그러는데 절단을 하고 의수를 달아야 할 것 같다고. 근데 수술비라도 달라고 하니까 이 업체 새끼들이 자기들 과실이라는 증거 대라고 하는데 감시카메라는 고장났다고 안주고 경찰들은 증거가 없으니 고소해도 안 될 거라고만 하고. 요즘 시대에 감시카메라 고장 났다는 게 말이 되니? 사람의 도리라는 게 있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해준다는 게 내년부터 실습생 정원 늘려주겠다는 건데 애들 다쳐도 책임도 안 지는 곳에 보내고 싶어하는 담임이 있겠니? 교장 선생님은 실적 좋은 업체라고 좋다고 받아들였지만...... (사이) 어, 내가 너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너 무 많이 했다. 경식아.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민철이 일은 내가 봐서 반 애 들한테 얘기할게.


사이.


경식: 선생님.

선생님: 응.

경식: 선생님이 주신 책들, 공장 셔틀 타면서 전부 읽어봤는데 재미있었어요.

선생님: 책? 어, 그래? 잘됐구나.

경식: 그래서 말인데요. 지난 번에 말씀 못 드렸던 장래희망이요. 저 연극 할래요.

선생:님 연극?

경식: 네. 그냥 이게 다 연극이고 연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


암전.


5장


작업실이다. 근태와 경식, 말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경식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기계만 잡고 그걸 계속 돌려본다. 그러다 웃음벨이 울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내어 억지로 웃는 근태. 경식은 웃음벨 소리에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근태, 그런 경식을 바라본다.


근태: 너 무슨 일 있냐? 왜 안 웃어? 감시카메라에 안 웃는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경식: 형.

근태: 왜?

경식: 저랑 같이 감시카메라 보러 가요.

근태: 뭐하러? 너 안 웃는 거 걸렸나 확인하게?

경식: 민철이 다친 날 무슨 일 있었는지 보려고요.

근태: 자기 혼자 돌아다니다 다쳤다며.

경식: 형은 대학까지 다니면서 그 말을 믿어요?

근태: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경식: 확인해야죠. 민철이가 왜 프레스기에 손을 찍혔는지. 그리고 신고해야지.

근태: 뭐? 너 미쳤어?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경식: 민철이의 억울함이 풀리고 벌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받겠죠.

근태: 안 억울하고 본인 잘못이면 어쩔 건데? 그리고 야, 만약에 과장이 잘못된 업무 지시를 했고 안전 절차 없이 일을 시켜서 걔가 다쳤다고 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경식: 형. 민철이, 손이 다 으스러져서 앞으로 피아노 못 칠 거래요.

근태: 갑자기 피아노는 왜?

경식: 민철이 아주 나중에라도 음대 가서 피아니스트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아무것도 누를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대요.

근태: 의수 있잖아.

경식: 개인 잘못이라고 배상금도 안 나오는데 어떡해요. 보험 들어둔 것도 없고. 그리고 의수라니. 형은 너무 냉철해요.

근태: 감시카메라 몰래 보면 법에 걸려.

경식: 증거를 구해야죠.

근태: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거 몰라?

경식: 그래요?

근태: 그래, 임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경식: 그러면 언론에 뿌린다고 협박이라도 해야죠. 거짓된 무사고 1000일. 뭐 이런 제목으 로.

근태: 야, 무사고 1000일 채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거 달성 못 하면 너도나도 모가지야. 모가지만 당하면 다행이게? 사실적시 명예훼손 같은 걸로 고소 먹을걸? 요즘 은 사실을 말해도 죄가 되는 시대야. 그리고 너, 너야 고딩이라 앞길 창창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경식: 형, 민철이 앞길도 창창했어요.

근태: 그럼 난? 다른 산업체 못 구하면 처음부터 다시 뺑이 쳐야 돼. 내 앞가림 신경 쓰기 도 바쁜데 누굴 신경 쓰라는 거야 지금?

경식: 자기 앞가림하려고 다른 사람 앞날을 가려버리는 건 되나요?

근태: 뭐? 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참사가 있었는지 알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지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사람들은 다 잊고 살아.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경식: 형은 잊고 살 수 있어요?

근태: 당연하지. 내가 왜 기억해야 하는데?

경식: 형 대학도 나오고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지성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 어요?

근태: 야, 감성에 호소하는 논리밖에 안 돼. 말로는 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근데 그게 가능한 소리냐? 그리고 지성인은 개뿔, 개나 소나 돈만 주면 다 가는 게 요즘 대학이 야. 그리고 정말 똑똑한 사람은, 몰라도 아는 척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무튼, 병역 대체만 아니었으면 난 여기 올 일도 없었고 니네 볼 일도 없었어. 생판 남이라고.

경식: 그래도 왔잖아요. 와서 같이 생활했잖아요.

근태: 내가 원해서 생활한 거냐? 아니잖아. 너도 원하지 않았듯이 나도 원하지 않았어. 걔도 원하지 않았을걸?

경식: 그런 일을 겪길 원하지 않았겠죠.

근태: 자꾸 말꼬리 잡지 마.

경식: 저는요. 여기 있으면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소리가 민철이 비명 소리처럼 들려요. 헤드셋으로 귀막고 작업하고 있을 동안 들렸을 비명 소리요. 그런데 이제는 잘 들리 지가 않아요. 여기서 계속 있다간 영영 안 들릴 것 같아. 그러니까 갈래요.

근태: 씨발, 너 진짜 맞고 싶냐?

경식: 때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맞는 건 한 순간이지만 기억은 계속되는걸.

근태: 맞은 것도 기억이 될 거다. 임마. (경식의 멱살 움켜쥔다.)

경식: 형! 산업 혁명은 정말 혁명이었어요?

근태: 갑자기 또 무슨 개소리야? 맞기 싫어서 별 헛소리를 하는구나. 그런다고 안 때릴 것 같냐?

경식: 그게 혁명이라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어요? 산업 혁명 일어나고 노동자들 다 푼돈 받고 오히려 먹고 살기 힘들어졌는데, 그게 누굴 위한 혁명이었냐고요. 그거 다 자본 가들 뱃속으로 들어갔잖아요.

근태: 갑자기 왜 빨갱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너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받은 거야?

경식: 형은 3살짜리 어린이가 굴뚝 청소하는 사진 본 적 있어요? 노동자들이 관보다도 좁 은 곳에서 잠들고 일하러 가는 사진을 봤어요? 그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며 잠들었 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아요? 그런 일이 아직도 일어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요!

근태: 다 감성에 호소하는 소리잖아. 그걸 왜 내가 해야 되냐고!

경식: 동료니까!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형은 어른이니까! 어른이 애들을 이끌어줘야지. 떠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근태: 그럼 너네 선생님한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너네 담임은 나보다 어른이야!

경식: 그치만...

근태: 누군 그러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알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 그걸 어떻게 하냐고. 후폭풍을 어떻게 견디라는 건데. 너만 형편 힘든 줄 알아? 우리 집도 가난해. 나도 걔가 그렇게 된 건 정말 안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강요하지 말란 말야. 제발......

경식: 강요가 아니라 부탁이에요.

근태: 네가 본 책들 속에서는 이렇게 호소하면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결국 다 옳은 일 을 하고 다 선한 쪽으로 흘러갔지? 어림도 없어.

경식: 형.

근태: 형이라고 하지 마. 난 네 형 아냐.

경식: 그럼 나 혼자라도 갈래요.

근태: 감시카메라에 영상이 저장되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저기 들어가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고. 내가 조장인데 나까지 책임져야 되잖냐. 그냥 포기하면 안되겠어?

경식: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죠. 도어락 비밀번호만 알려줘요. 나 혼자 했다고 할게.

근태: 사람들이 그걸 믿겠냐고.


경식,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고 근태가 가로막는다. 둘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경식의 휴대폰이 울린다. 경식, 근태의 눈치를 보다 전화를 받는다.


경식: 네, 선생님. 네. 아뇨, 통화 괜찮아요. 네. 네. (전화 끊고) 형. 민철이가요......


경식, 근태를 바라보며 뭐라고 얘기하지만 웃음벨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고 무대 점차 암전.
 


 

  <당선소감>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 일어나선 안 될 일들에 대해 쓰겠다"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 일어나선 안 될 일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뒤풀이의 뒤풀이의 뒤풀이의 뒤풀이에 남은 사람들은 아홉 명이었습니다. 밖에는 폭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택시는 저희를 구하러 오지 않았는데요. 되풀이되는 뒤풀이 속에서 가질 것 없이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분씩 무엇을 쓰는지 고백했고 시와 희곡을 쓴다고 말한 건 저뿐이었고 등단을 못 한 것도 저뿐이었는데 좋은 분들이 곧 될 거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아침 일찍 집에 돌아와 두 시간을 잠들어 있다 당선 전화를 받았는데요. 이 정도로 곧일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 뵙게 된다면 제가 사고 싶어요.

 감사를 전하고 싶은 분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고 70명 정도 되었을 때, 도무지 감사하지 않은 분이 없어서 적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왜 소감문에 본인 이름이 없냐고 섭섭해하실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을 하면서 저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화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면 부족할 테니 회사 얘기는 쓰지 말라고 한 현수와 지윤님, 예림님, 유진님, 규태님, 데브팀 분들께,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북엔드와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왔기에 배울 수 있었던 가르침들을 생각하면 많은 이름들이 떠오르지만 가장 먼저 홍창수 교수님께, 5년 전 교수님의 전화로 저는 느려도 멈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감사의 말을 여기서 쏟아내면 만날 때 어색하니 직접 뵙고 감사의 말씀을 전할게요. 하율쌤, 민호쌤, 종우쌤, 태현쌤, 항상 유쾌하고 상냥하신 희곡 전공 선생님들이 저는 좋습니다. 제가 쓴 작품으로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해주신 김왕근 배우님, 그건 지금 쓰고 있습니다.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이제 교수 아니라고 자꾸만 정정하시는 이영광 선생님.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저는 너무 어렵지만 제자이면서 동료 시인이 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되겠습니다.

 언제나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이혜원 교수님, 소감문을 쓰고 있는 오늘도 상냥한 의사 선생님의 호통을 들었지만 저는 지지 않아요. 그래도 건강해져서 교수님께 좋은 작품 보여드리고 싶어요.

 저의 부족함을 너무 잘 알고 계시는 박유희 교수님, 덜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등단하면 업고 교정을 돌겠다고 하셨던 박형서 교수님은 45도 각도로 웃어주세요.

 황수대 교수님, 임곤택 교수님, 박혜상 교수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쓰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과 재능이 부족하네요. 그래도 가르쳐주신 분야에서 좋은 소식 들려드리고 싶어요. 항상 학생들의 진로와 꿈을 도와주려 애써주시는 과사무실 신선영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느린 속도로 살고 있는 저를 믿어주시는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제가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나가 있어서 저는 살아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사랑해요. 다 같이 할머니를 뵈러 가요.

 온통 감사 범벅 속에서 마구 떠오르는 이름들에게 무책임한 감사를. 장성초 현석, 우림, 후인, 한길, 강우, 종호, 우석, 보희, 동윤, 병우, 현호, 윤석, 연준, 주민, 일산대진고 현우, 용준, 진교, 재윤, 홍규, 현주, 상모, 진언, 동완, 민규, 석영, 호영, 건희, 준행, 영진, 돼지길드 해연, 은비, 철호, 연지, 상원이에게, 광욱, 정완, 유라, 규보, 은일, 나연 선배에게, 가혜, 현정, 슬기, 태영, 연주, 홍, 지은, 예경, 준우, 정수, 경남, 태욱, 진원, 정민, 은혜, 지영, 혜윤, 지경, 은경을 비롯한 거의 모든 동기들과 13학번 후배들에게, 지은씨, 원재, 원정, 수현이 계속, 잘 쓰기를 바라며. 상냥한 재경쌤과 상혁, 우준, 수민, 겨레, 희선, 예슬, 유미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어요. 지호 선배와 선우쌤, 수연씨의 두 번째 책이, 경은 선배의 첫 시집이 곧 나오길, 승원이의 시를 지면으로 많은 사람이 보게 되길 바라며.

 지원이에게, 너는 네 생각보다 더 소중함을 잊지 말길. 잊는다고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많이 부족한 작품의 좋은 점을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문학을 하는 자들의 활로를 열어주시는 한국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사는 동안 많이 쓰겠습니다.

● 1991년 서울 출생
●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심사평>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말을 찾아주고 경청하는 일, 연극·희곡이 해내길

 희곡 부문 응모작은 모두 101편이었다. 단막극의 길이나 시·공간 제한 등 기본 조건을 넘어서는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화와 이미지를 다루는 문학적 훈련, 동시대적 주제와 이를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 의식, 연극이 담아낼 수 있는 행동 서사 등을 찾자는 시선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단 대화를 쓸 줄 아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대화를 시늉한 독백에 그치거나 상황만을 그릴 뿐 진전 없는 구조가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 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작품은 매우 적었다. 설명적인 대사로 채우거나 인물 각자의 혼잣말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 다수였다. 최종까지 거론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지구 반대편에서 스쿼트를 하는 사람들'에는 학교폭력에 희생된 동생의 죽음을 추적해가는 누나가 등장한다. 과거를 현재화하는 솜씨, 명료하고 탄력감 좋은 대사 구사가 큰 장점이다. 다만 극중 누나가 가해자로 오인한 필라테스 강사의 강습 장면은 공연 시 소재가 지나치게 희화화될 가능성이 크다. 결말 또한 콩트적 반전 구성을 넘어서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은하수에 묻었다'는 세련된 언어 구사와 풍성한 이미지 구축이라는 장점으로 끝까지 우리를 고민하게 했다. 무엇보다 상징과 은유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으나 인물 구도가 카뮈의 희곡 '오해'를 연상케 하는 점, 다채로운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언어는 문학적 아름다움에 그칠 뿐 과연 무대 위에서도 그 힘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사막화된 남도 해변이라는 장소적인 사실성을 고려해서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또한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다. 시적 환상이 담긴 작품의 매력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위대한 무사고'는 현장실습을 나간 고등학생 소년이 경험하는 겹겹의 부조리를 다룬다. 신문 기사 몇 줄로 요약되는 사건 사고 속에 어떤 마음들이 부딪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다소 극적 긴장을 상승시키지 못하는 사실의 나열이 아쉽지만 일단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시스템 상자를 열어젖혀 보이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고립된 개인의 내면 독백을 담은 다른 응모작들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었다.

 사회와 언론이 다 못하는 일을 좀 더 응시하고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말을 찾아주는 일, 그것을 우리가 경청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연극과 희곡의 대화적 속성이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어 올린다.

심사위원 : 이성열, 장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