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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귀꽃 / 김보성

 

폐사지에서는 나의 말[言]을 방목해도 괜찮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채로 퇴색되어 고요로 쌓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던 연꽃은 까만 연자를 품어 동안거에 들고, 고인을 헤아리다 지친 귀부의 몸통은 덩그러니 황토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제각각 흩어진 돌들이 사고무탁으로 노거수에게 제 몸을 맡기고 무연하다. 햇살은 담백하게 내려앉고 바람은 가식 없이 방랑한다. 계절이 비껴간 터는 옛날의 어스름을 닮아 홀로 담담하다.

젖은 숨이 바삭해진다. 사초는 은빛으로 일렁이고 그 뒤를 바람의 소리가 뒤따른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귀를 열어 소리를 담을 뿐이다. 침묵 속에 나 홀로 소란하다. 하지만 말의 무게를 누르고 고요의 결을 느끼면 생각은 비워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점점 내 안의 풍경 속으로 몰입된다.

폐가람은 세월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중 사자 석등이 마음을 붙잡았다. 두 마리의 사자가 배를 맞대고 화사석을 받쳐 들었다. 허벅지의 탄탄한 근육과 엉덩이의 유려한 곡선이 불을 지키는 수호자의 의지를 돋보이게 한다. 혹자는 사자들이 벌을 서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늘을 떠받고 있는 아틀라스의 힘든 목덜미나 헤라클레스의 고단한 오른발이 느껴지지 않는다. 객의 눈에는 재기발랄한 표정과 숭고한 몸 힘이 눈에 들어온다. 죄(罪)의 의미가 아니라 헌(獻)의 뜻이 담겨 있다.

석등의 지붕 모서리마다 돌꽃이 솟았다. 귀꽃이다. 귀마루에 새긴 꽃 장식이라 귀꽃이라 불린다. 하지만 나는 꽃의 귀라 칭하고 싶다. 사방으로 열려 있는 귀, 누구든 무슨 사연이든 다 들어주는 귀 말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기 위해 두 마리의 사자는 상대석을 받든다. 그들의 지순함이 돌 표면에 순박하게 묻어난다. 덕분에 불은 꺼지지 않고 어둠을 밝혀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우리는 촉화의 영광과 사자의 헌신을 기억한다. 하지만 귀꽃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꽃을 새긴 이유가 궁금하다. 육중한 돌 분위기를 가뿐하게 하기 위함일까. 귀퉁이조차 아름다움을 놓지 않으려는 석공의 장인 정신인가. 그도 아니면 하늘에 닿으려는 바람을 꽃으로 표현한 것인지. 석등은 소망의 대상이다. 귀를 활짝 펼쳐 모든 이의 애환을 들어주고 그들 가슴에 꽃으로 피어나라는 의미라 여겨본다. 길 잃은 삶에게 꽃귀가 길잡이 되어 줄 것이다. 처음부터 귀꽃이 되지는 않았을 터. 이명을 앓듯 귀를 열어 쓴 말은 씻어냈으리. 마음 소리는 무심히 흘려보내고 상처에 두 손을 오므렸을 것이다. 무채꽃으로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피고 지고 흘렀을까.

귀꽃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고사리 모양은 꿈틀거리는 미로 형태다. 애달픈 사연으로 굴곡진 달팽이관을 닮았다. 꼬인 소리 덩이를 실타래 풀어놓은 듯 늡늡하게 피어 있다. 이파리 형은 형형의 삶이 갈라졌다 모여 한 길로 향하는 소실점이다. 앞선 이가 걸어왔던 발자국이고 앞으로 걸어갈 이의 이정표처럼 너볏하다. 이렇듯 무늬도 다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듣는 마음자리에 따라 꼬불꼬불한 고사리로, 뾰족한 이파리로, 만개한 연꽃으로 발현된다. 나는 어떤 화관으로 피어 누구의 꽃귀가 되고 있을까. 귀는 막은 채 눈만 끔벅거리는 헛꽃은 아닌지, 뭉그러진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는 꽃멍은 아닌지 살피게 된다.

들어주는 자가 되고자 했다. 앞장서는 말보다는 뒤따르는 행동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소망은 무시로 깨져버린다. 상처와 맞닿은 감정을 만나면 그날의 듣기는 실패다. 서로를 알아챈 슬픔들이 생채기를 내보이기 바쁘다. 자신의 눈물이 더 깊고 짜다며 소리를 높인다. 펄떡이는 말[言]들이 고삐가 풀린 채 줄행랑을 친다. 고초의 사연들이 각자 앞만 보고 질주를 한다. 그러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음이 낯빛에 부딪혀 하루살이처럼 소멸하고 혼자만의 방백만 빈말되어 흩어진다. 결국, 듣는 자가 아니라 앞서 말하는 자가 되고 만다. 매번 되풀이되는 후회스러운 말들을 사발에 담아 주둥개산의 말무덤[言塚]에 묻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옛 선인들은 마음을 얻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경청’을 택했다. ‘듣다’라는 뜻의 청(聽)을 풀이해보면 귀耳, 임금님王, 열十, 눈目, 한一, 마음心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금님 귀로 열 개의 눈, 즉 다섯 사람 모두가 하나의 마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곧 듣기라는 것이다. 귀를 항상 열어두고 상대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지혜를 얻고 공감을 키우라는 뜻일 게다. 듣기보다 말하기에 급급한 세상이다. 말소리는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고 눈에도 담기지 못한 채 대부분 허무하게 소비된다. 귀한 인연이 스쳐 가도 알아채지 못한다. 제대로 들어야 잘 이해할 수 있고 동감할 수 있으며 나와 상대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입 밖의 말뜻부터 입안의 말속까지 품을 수 있는 귀꽃은 세이공청의 끝에서 한 겹씩 트인다.

육신은 목숨을 다해도 귀는 한동안 열려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망자에게 마지막 말을 들려주라고 했다. 눈물로 얼룩진 이부자리에 고요가 미동 없이 누워 있다. 어린 영혼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짧디 짧은 생 앞에 여러 말들은 통곡으로 바뀌었다. 같은 혈육으로 태어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시간보다 병석에 누워 있던 시간이 많았던 아홉 살 인생이다. 나는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들어야 할 때는 귀를 막았다. 뒤늦은 후회에 이승의 마지막 말을 놓치고 말았다. 떠나가는 여린 귀에 누이의 울음만 그득히 담겼을 것이다. 난 자리는 덤벙이 되고 선선한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나의 계절은 여전히 상중(喪中)이다.

신 앞에 읍소하면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리라는 신념 때문이다. 매 순간의 다짐은 하찮은 뉘우침의 반복으로 쌓인다. 무명한 중생이니 겉말을 비운다. 세 치 혀는 묵언에 접어두고 두 귀를 꽃처럼 펼친다. 세상의 허언을 씻고 침묵의 언어를 듣는다. 나는 누구인가. 궁구하던 자신의 말부터 들어준다. 나의 꿈, 나의 시선, 나의 기쁨, 나의 이기심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으니 체면도 미화도 필요치 않다. 그저 진솔하게 들어준다.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면 타인의 불가한 마음도 나눌 수 있게 된다. 귀 품은 넓어지고 깊어져 진실과 아픔도 정성껏 담아낼 수 있으리라.

귀 기울면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단다. 마음에 담고 이해하고 변화되는 거, 이 모든 행위는 귀를 여는 것에서 시작된다. 풀벌레의 미세한 떨림부터 소망 담은 자의 발자국까지 난청을 앓으면서도 성심껏 품어냈을 귀꽃. 잠시 머물다 피고 지는 물상과 매번 스치고 지나간 인연들, 그들 생을 묵묵히 지켜보고 꽃이 된 석화.

쉿, 누군가 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석탑의 기단에 바람의 숨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화안으로 들어주는 이. 책 속의 인물일 수도 먼 옛날의 선지자일 수도 자신만의 신일 수도 있지만 분명 이곳에도 내 안에도 있다는 걸 알겠다. 그래서 빛 없는 불은 꺼지지 않는다. 불꽃을 밝혀 환하게 비추고 품어 안는다. 하늘의 말과 땅의 뜻이 만나 화창(火窓)속에서 밝게 빛난다.

꽃들의 귀가 지나가는 계절의 조언을 듣는다. 오래된 별들의 경험을 새기고 소망 비는 이의 애절함도 기억한다. 이야기꽃들이 피어난다. 향기 없는 꽃, 하늘 향해 피어나는 돌꽃, 누구에게나 귀를 열어주는 귀꽃이 천화로 만개한다. 그리고 바람의 입을 빌려 세상 말을 전한다. 괜찮다고,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당선소감>

 

   진정성 있는 글 길을 차분히 따라가겠다

돌아보면 생각만으로도 힘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의 첫 글을 인정해주고 소중하게 기억해 줄 때나 오래된 상처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꺼내 주었을 경우 또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의심에 확신을 심어 주었던 때입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은 날이 그런 날이 될 겁니다.

묵묵히 걸어온 길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최선이라 믿으며 쌓아 올린 시간의 모래탑이 허물어질 때, 믿고 의지하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낯설어질 때, 저는 오늘의 이 순간을 길어 올려 목을 축이고 숨을 돌리며 다시 참 길을 걸어갈 겁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조각들은 좋은 일보다 좋지 못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기억은 각별하고 귀중하여 삶에 큰 힘을 실어줄 거라 확언합니다.

국문과가 점점 사라지고 신춘문예에서의 수필 입지도 좁아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탓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저의 방식대로 글을 써 내려가려 합니다. 글을 좋아하는 것과 글을 짓는 능력은 별개라는 걸 깨달을 즈음 믿어주고 이끌어주신 김정화 선생님, 이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셔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학구열이 넘치는 동서수필아카데미 문우님들, 그리고 한걸음 뒤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들, 진정성 있는 글 길을 차분히 따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제 능력치보다 높게 평가해줘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남편과 행복-일을 잘 엮어가는 원하, 도전·열망을 멋지게 즐기는 호수, 우리 가족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냅니다.

● 1967년생
● 부산 거주


 

  <심사평>

  

  풍부한 어휘력·신선한 문체로 문학성 견인

202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응모작을 살펴보면 소재의 다양성과 해석의 확장이 주목을 끌었다. 시나 소설처럼 허구를 유산으로 받지 못한 수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수필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응모작 가운데는 빼어난 수작도 있는 반면, 창작이론에만 갇혀 상상과 해석의 날개를 달지 못한 작품도 많았다. 수필문학작품이 되려면 매미가 우화(羽化)하듯이 어떤 변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종 당선작으로 뽑은 〈귀꽃〉은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폐사지의 풍경과 말[言]을 연결한 첫 단락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풍부한 어휘력과 신선한 문체가 수필의 문학성을 견인했고, 꾸밈음처럼 등장하는 우리말이 문장의 맛을 살려주었다. 수필의 성패는 해석의 깊이와 두께로 결정된다. 특히 역사적 소재는 기존의 해설을 뛰어넘는 독창적 시선과 해석이 성패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그래서 수필은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벼운 소품에 그치기 쉽다. 이 작품은 풍성한 표현력으로 사자석등의 모서리에 새긴 귀꽃의 의미를 새롭고도 심도 있게 해석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구성에서도 입체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귀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미지의 확장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구성의 다변화를 시도한다. 마치 큐빅을 맞추듯이 입체화를 시도하는데, 이는 수필의 한계로 지적되던 평면성을 극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전반부에는 폐사지의 풍경과 석등의 외형과 문양 등이 내포한 이미지에 집중하다가 귀꽃에 대한 해석으로 옮겨가면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미지의 점층법처럼 석등에 귀꽃을 새긴 이유에 대한 해석을 확장해 나가는 품새가 만만치 않다.

중반부로 진입하면 말과 현실, 경청과 공감 등 언어와 인간 삶의 문제가 등장한다. 귀꽃을 단순히 폐사지에 남은 석등의 장식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꽃의 귀’로 변용한다. 작가의 자의적 변용이 자연스럽게 언어와 삶, 인간으로 연결된다. 이는 수필이 삶과 성찰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태생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수필은 삶과 동행하면서 무르익을 때 가치가 빛난다. 당선자들이 더욱 정진해 수필문단의 귀꽃으로 남기를 기원 드린다.

심사위원 : 허숙영, 이운경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작품 개요:

김보성의 수필 "귀꽃"은 폐사지에 있는 석등의 귀꽃을 통해 '듣기'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성찰적 수필입니다. 화자는 폐사지라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정한 경청의 의미를 발견해 나갑니다.

구조적 분석:

1. 공간적 구조
 - 폐사지라는 물리적 공간은 '고요'와 '비움'의 상징적 공간으로 확장
 -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에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구조
 - 구체적 대상(귀꽃)에서 추상적 사유로 확장되는 원심적 구조

2. 상징적 소재
 - 귀꽃: 모든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열린 귀'의 상징
 - 사자 석등: 헌신과 봉사 정신의 구현체
 - 말무덤(언총): 후회스러운 말들의 집적소
 - 폐사지: 침묵과 성찰의 공간

주제 분석:

1. 핵심 주제
 - 경청의 가치와 의미
 - 진정한 소통의 본질
 - 자기 성찰과 깨달음

2. 부차적 주제
 - 과거의 후회와 극복
 -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 전통과 현대의 조화

문체 및 표현 분석:

1. 서술적 특징
 -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
 - 구체적 관찰에서 철학적 사유로 이어지는 전개
 -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진리의 조화

2. 표현 기법
 - 감각적 묘사를 통한 장면 구현
 - 비유와 상징을 통한 의미의 확장
 - 고유어와 한자어의 조화로운 사용

종합적 의의:

"귀꽃"은 현대 사회의 소통 부재 문제를 성찰하며, 진정한 경청의 가치를 환기하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청각적 듣기를 넘어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귀꽃'의 자세를 통해,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특히 전통 건축물의 요소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현대적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  소통 부재의 시대에 경청의 중요성 강조
 -  자기 성찰을 통한 인간 이해의 확장
 -  전통적 가치의 현대적 재해석 가능성


이처럼 "귀꽃"은 단순한 수필의 차원을 넘어, 현대인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와 통찰을 전달하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