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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자화상의 오후 / 김정애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매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당선소감>

 

   -

가을해는 노루꼬리보다 짧다고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분주하게 가을걷이하시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따뜻한 볕이 머무는 밭담 벼락에 기댄 예닐곱 살의 내가 있습니다.

나는 쌀쌀해지는 갈바람에 자꾸만 몸을 움츠리며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휘청이는 두 개의 등허리를 보며 들판에 너울대는 억새꽃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아져 가는 그림자를 흙 묻은 손으로 따라 그리며 온기가 베인 담장에 등을 댄 내가 맨 처음 배운 감정은 '기다림'으로 기억됩니다.

쌓이는 원고만큼이나 짓눌리던 빈칸의 무게와 하얗게 바랜 여백으로 맞던 새해. 그렇게 열병을 앓을 만큼 앓아야 12월과 겨울을 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움츠러든 거울 속 자화상 앞에 다시, 펜을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글. '밤은 검지만 검은색이 아니야.'

밤하늘은 파란색에 노란빛이 섞이고 검은색을 혼합했지. 빨강, 노랑, 파랑 기본색에 흰색과 검은색을 조금씩 섞어야만 조화로운 색채가 뿜어져 나오듯 시어를 고르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제주시조시인협회' 선생님들은 저의 스승이자 내 시조의 산실입니다. 김정숙 회장님과 더불어 모든 회원과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이런 날도 이서사 살주' 따뜻한 포옹으로 안아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표현이 서툰 무뚝뚝한 남편과 아이들에게, 오랜 벗들과 지인들께도 당선 소감으로 고마움과 안부를 전합니다.

오늘도 스스로에 거는 주문으로 응원합니다. '그래그래 괜찮아! 잘하고 있어.'

기다림을 담보한 따뜻한 감성으로 위로가 되는 글 오래 쓰겠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이루게 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시인 강현덕 선생님께 감사의 절 올립니다.

● 1968년 제주 생.
● 2017 제주시조지상백일장 입선.
● 2019년 8월, 2021년 8월, 2022년 4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 사 ) 제주어보전회 제주어 강사.


 

  <심사평>

  

  시조로 해설하는 그림

신춘문예만큼 문학도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신춘문예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최고의 작가 등용문인데도 연령 등 그 어떤 것과도 관계없는 응모 자격이 이 제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번에 응모한 투고자들만 봐도 주소는 전국적이었고 연령은 20대에서 80대에 걸쳐져 있었다. 별처럼 아득하지만 누군가는 '당선'이라는 그 별 같은 것을 손에 쥐게 된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문학도들은 기꺼이 이 병에 드는 것이다.

올해는 김정애의 '자화상의 오후'가 그 별을 안게 되었다. 그가 보내온 작품들은 모두 완성도가 높아 믿음이 갔다. 그중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제재로 한 이 당선작은 시조의 정형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였다. 자칫 실수하기 쉬운 음보와 음보, 구와 구의 운용이 매우 자연스럽고 안정감 있어 신뢰를 높였다. 색채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 첫 수와 둘째 수는 그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다. 미술관 도슨트처럼 고흐의 일생뿐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와 작품 세계를 압축하고 정제해 한 편의 시조로 해설하였다. 시조를 많이 공부한 사람 같아 이후가 기대된다.

끝까지 함께 겨룬 작품은 오시내의 '억새는 억세다'와 심순정의 '플라스틱 말'이었다. '억새는 억세다'는 언어유희를 잘 살린 점과 주제를 향해 밀고 가는 힘은 좋았으나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과 편차가 있어 내려놓았으며, '플라스틱 말'은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몇몇 시어의 선택에서 아쉽게 밀렸음을 밝힌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함께 시조단의 중심이 되어 활동해 주기를 바라며, 낙선자에게는 큰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강현덕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작품 개요
김정애의 "자화상의 오후"는 전통적인 시조 형식을 현대적 감성과 예술적 이미지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이 시조는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화자의 내면 세계와 예술 창작의 고통, 그리고 자기 표현과 은폐 사이의 모순적 관계를 섬세하게 탐색합니다. 특히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통해 예술가의 고독과 자기 성찰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식과 구조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시조의 형식(초장-중장-종장)을 기본 틀로 삼으면서도 현대적 어휘와 감각적 표현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세 수로 구성된 이 시조는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의 시간적 흐름과 정서적 변화를 담아냅니다.

각 수의 구조적 특징:

 - 제1수: 자기 인식의 시작과 상처의 확인
 - 제2수: 창작 과정에서의 감정 표출
 - 제3수: 창작의 본질과 내면 은폐의 역설

시조는 전체적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준비에서 시작하여, 그림을 그리는 과정, 그리고 내면의 감정을 캔버스에 투영하는 최종 단계로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각 수별 분석

제1수: 상처와 자기 인식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매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 초장: "빈칸 생의 여백"은 삶의 공허함과 결핍을 암시합니다. "귓불을 뜯게 했나"는 반 고흐의 귀 자상 사건을 연상시키며, 내면의 고통이 자해로 표출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 중장: "느닷없는 살 조각"과 "붕대"는 상처와 그 불완전한 치유를 의미합니다. 이는 육체적 상처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상처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 종장: "회색빛 푸른 눈동자"는 우울함과 내면의 깊이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거울 앞에 앉았다"는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준비이자 자기 성찰의 시작점입니다.

제2수: 창작의 과정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 초장: "아직 남은 소음"은 내면의 혼란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의미합니다. "눈빛이 묻고 있다"는 표현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나타냅니다.
 - 중장: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라는 표현은 창작 과정의 격렬함과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게워내다"라는 동사는 창작이 단순한 표현이 아닌 내면의 고통스러운 배출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 종장: "진녹색 코트"와 "파이프를 문 사내"는 반 고흐의 자화상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이미지입니다. 이는 화자가 그리고 있는 자화상의 모습이자, 화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3수: 창작의 본질과 내면의 역설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 초장: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이라는 강력한 비유는 예술적 선택의 날카로움과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색채 선택이 자기 절단과 같은 고통스러운 결정임을 암시합니다.
 - 중장: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은 감정이 직접적으로 붓질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거칠게 찍어 눌러"는 격정적인 표현 방식을 묘사합니다.
 - 종장: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는 이 시의 핵심적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자기 노출의 형식을 통해 오히려 가장 깊은 내면("고독")을 감추려는 모순적 행위를 포착합니다.

이미지와 상징 분석

반 고흐 이미지

시에는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여러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 귓불을 뜯은 상처와 붕대: 반 고흐의 귀 자상 사건 연상
 - 회색빛 푸른 눈동자: 반 고흐의 자화상에 나타나는 특징적 눈빛
 - 진녹색 코트와 파이프: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상과 소품
 - 격정적인 붓질: 반 고흐의 특징적인 화풍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순한 참조를 넘어 예술가의 고독과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구체화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색채의 상징성
 - 회색빛 푸른 눈동자: 우울함과 내면의 깊이를 동시에 상징
 - 낯선 색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예상치 못한 감정들
 - 진녹색: 생명력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복합적 정서
 - 색을 고르는 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방식을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

상처와 치유의 이미지
 - 귓불을 뜯다: 자해와 내면의 고통
 - 붕대로 친친 매고: 상처의 은폐와 불완전한 치유
 - 덧칠하다: 감추려는 시도이자 예술적 승화의 과정

주제 의식

예술 창작의 고통과 자기 직면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묘사가 아닌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표현됩니다.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이라는 표현은 예술적 선택의 고통과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고독과 자기 은폐의 역설

화자는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화상이라는 형식이 가진 근본적 역설을 드러냅니다. 자화상은 본질적으로 자기 노출의 행위이지만, 화자는 오히려 이를 통해 가장 깊은 내면을 감추려 합니다. 이는 예술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자기 은폐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술적 표현을 통한 내면의 투영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라는 표현은 창작이 내면의 감정을 토해내는 과정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는 감정이 직접적으로 예술적 표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표현 기법

감각적 언어 사용
 - 시각적 이미지: "회색빛 푸른 눈동자", "진녹색 코트", "낯선 색채" 등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내면 풍경을 효과적으로 그려냅니다.
 - 촉각적 표현: "붕대로 친친 매고", "거칠게 찍어 눌러" 등 촉각적 표현을 통해 감정의 강도를 전달합니다.

강렬한 비유와 상징
 -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과 같은 강렬한 비유를 통해 예술 창작의 고통과 위험성을 표현합니다.
 - "게워내다", "덧칠한다" 등의 동사를 통해 창작 과정의 격렬함과 복잡성을 표현합니다.

대비와 역설
 - 자기 표현과 자기 은폐의 역설적 관계를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라는 표현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 "울분"과 "슬픔"의 대비, "거칠게 찍어 눌러"와 "덧칠한다"의 대비를 통해 창작 과정의 복잡성을 표현합니다.

종합적 해석
"자화상의 오후"는 예술 창작, 특히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자기 인식과 표현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시적 화자는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과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시가 포착하는 역설적 상황입니다. 자화상이라는 형식은 본질적으로 자기 노출을 전제로 하지만, 화자는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술이 때로는 자기 표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자기 은폐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은 단순한 참조를 넘어 예술가의 고독과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구체화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귓불의 상처, 진녹색 코트, 파이프 등의 이미지는 반 고흐의 삶과 작품을 떠올리게 하며, 예술 창작의 고통과 광기를 암시합니다.

이 시조는 단순히 미술 행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 창작이 갖는 실존적 의미와 창작자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전통 시조 형식 안에서 현대적 감성과 미술적 상상력을 결합함으로써, 형식의 제약을 뛰어넘는 풍부한 시적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