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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지다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툭,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당선소감] 
 

권행은

  
▲ 권행은씨(시 부문 당선자)
원고를 보내던 그날은 하늘 보자기가 풀린 듯 함박눈이 쏟아졌습니다. 하늘도 무언가 쏟아내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요? 조곤조곤 하늘의 하얀 말씀을 들으며 돌아오는 길이 미끄럽지만은 않았습니다. 올해 신춘은 어쩌다 보니 주요 일간지의 마감일을 놓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동인들 덕에 마감일 전날에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번에는 눈발이 쌀밥처럼 부풀다가 한 줄 물이 되어 주루룩 흐릅니다. 모자라는 시를 선하여 빛을 보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손 모아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 말없이 응원해준 남편과 아이들, 늘 웃음으로 격려해주던 친척들과 친구들, 시의 열정으로 한 식구가 된 아바동인들, 그리고 뒤늦게 시의 길로 인도해주신 문효치 선생님과 박남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납니다. 시는 저에게 길을 밝히는 별이자 빛입니다. 빛을 잃은 별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 겨울 숲의 나무들에 매답니다. 제 우듬지의 빙점을 통과하며 아름다운 눈꽃 세상을 만드는 나무들, 그 신비한 찰라 속에서 나무들의 인내를 배우며 낮은 걸음으로 시를 통하여 세상과 만나고 싶습니다.


* 권행은(본명): 1962년 전남 광양 출생
2006년 미네르바 신인상 시 
* 주소 :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30-33 대림아파트 104동1403호
* 전화번호 : 
* 메일주소 : upinin@hanmail.net



[심사평] 삶의 진정한 피투체로서의 시

 

겨울 들어 내린 대설이 다음해에 풍년이 들 것을 예고하듯, 이번 영주 신춘문예에 투고된 만만찮은 분량의 수작들을 접하면서 우리 시의 밝은 미래를 예감하게 된다.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분포된 투고자들은 이 신춘문예의 위상과 공신력을 말해주는 한편, 새삼 우리 사회에 시인 지망자들의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든든하다.


이같이 전국에서 답지한 많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당선작을 가려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열을 가려야 하는 신춘문예의 성격상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의 서기 위한 탄탄한 레토릭과 공감대를 넓게 하면서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 등에 우선 주목하였다. 하지만 기교를 위한 기교나 작위적인 면이 지나친, 이른바 공모 제도에 병폐를 노정하고 있는 작품들에는 눈길을 빼앗기지 않는 데 유의하였다.


이번에 공모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공모 제도에 횡행하는 낯선 소재 선택 및 지나치게 작위적인 레토릭 구사에 치중한 시편들이 적지 않았다. 시는 무엇보다 진정한 삶에 바탕하여야 하며, 지나침이 없이 시인이 염두에 둔 주제에 걸맞는 수사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경향에 편승하기보다 더욱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수사가 강구된 시편들을 찾는 데 주력하였다.


그 같은 고심의 결과 장고 끝에 손석만 씨의 「사월」과 권행은 씨의 「목련꽃 지다」가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게 되었다. 「사월」은 예전에는 풍성한 호수였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린 타클라마칸 사막을 둘러싼 드라마를 알레고리로 하여 우리네 삶에 내재된 삶의 삭막함과 그로부터 일탈하고픈 욕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눈썹 깜박거리는 모반을 꿈꾸는/ 이 모래먼지는 우주의 피부다’ 등의 구절을 통하여, 모래먼지로 상지되는 무소유의 정신이 현대를 새롭게 하리라는 사유를 펼쳐 보이고 있다.


「목련꽃 지다」의 경우에는 독거노인의 삶을 둘러싼 생의 비의를 ‘목련꽃’을 환유로 하여 풀어낸 작품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물질적 풍요에 역행하는 비인간화의 풍경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가운데 선명한 이미저리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또한 낯선 수사를 찾아내는 데 골몰하지 않고, 목련의 눈부신 개화와 쇠락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점에 눈에 띈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하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는 대목에 보이듯, 비록 육신의 쇠락은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내면에 간직한 영혼은 깨끗하다는 사유가 잘 녹아 있다.


두 작품이 다 일장과 일단을 갖고 있다는 데 선자들은 동의하였다. 앞의 작품은 소재의 신선함과 잘 다져진 수사가 선뜻 눈길을 끄는 반면에, 추체험만에 바탕하여 구축한 사상의 전개와 다소 작위적인 수사가 마음에 걸렸다. 권행은 씨의 작품은 명징한 이미저리의 구사를 바탕으로 한 수사와 공감대가 넓은 주제의 구현이 강점이지만, 다소 다양하지 못한 시상의 전개와 결구의 미진함이 엿보였다. 선자들은 두 사람의 여타 투고 작품들을 함께 검토한 끝에 권성은 씨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견지하고 있으며, 흔히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노출하기 쉬운 상투적인 골격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아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결선에서 함께 논의된 몇몇 작품들도 선자들의 손에서 놓기가 아까웠다. 정순 씨의 「빈 통장 같은 오후」는 디지털 세상이 노출하고 있는 비인간화와 과소비의 문제를 실감있게 다루고 있으나 좀더 치밀한 수사의 강구가 아쉬웠다. 주대생 씨의 「태안 검은 얼굴 앞에서」는 서해 오염 문제를 소재로 삼아 시상을 전개하고 있지만, 보다 폭넓은 환기력과 적절한 수사가 요구되었다. 김창호 씨의 「감기」는 신선한 이미저리의 처리가 일품이지만 소재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주제의 모호함이 지적되었다.


이상 결선에서 논의된 작품들은 당장 기성 시단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역량을 보여주어 선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분발한다면 어느 지면을 통해서든 우리 시단의 일원이 될 역량을 지닌 이들이니만큼 더욱 정진을 게을리 하지 말기 바란다. 아울러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더욱 정진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시단의 일가(一家)를 이루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 변종태(시인), 박몽구(시인․문학평론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