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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 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시 당선자 김기주 씨 "바텐더·쇼핑몰 운영…결국 제 본질은 詩였죠"

 

강원랜드 TV다큐 보고 대학서 카지노경영학 공부
카지노와 글쓰기는 극과극…그래서 서로 통했나봐요
당선작 '화병'은 떨어지는 물 지켜보다가 詩想 떠올라 쓴 것

 


“감격스럽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슬플 때 표정이 자신에게 가장 진실된 표정이라고 하죠. 어떻게 보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당선된 게 아닌가 싶어요. 당선 이후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으로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를 쓸 겁니다.”

한경 청년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김기주 씨(30·추계예대 문예창작과 4학년)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알고 지내던 김나영 시인이 시집을 선물하며 첫 페이지에 ‘김기주 시인에게’라고 써줬어요. 시인이라는 호칭이 감격적이면서도 부끄럽고 어색했죠.”

‘김 시인’의 부끄러움은 실력이 없거나 수줍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심사위원(신경림 최승호 김기택)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신인을 발굴해 기쁘다”고 입을 모았다. 닿을 수 없는 본질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김씨는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천상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이다. 

그는 젊지만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 응암동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였다. 충암고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소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TV에서 강원랜드를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돌연 ‘여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의 끝’으로 직접 들어가고 싶었던 그는 2002년 제주관광대 카지노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참 즐거웠죠. 그런데 ‘욕망의 끝’인 카지노와 시 쓰기는 극과 극이잖아요. 그래서 서로 맞았던 것 같아요. 제주관광대 친구들이 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걸 알면 깜짝 놀라겠죠. 시적 감수성 같은 건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강원도 고성 수색대에서의 군생활 중 책을 200권 넘게 읽으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했다. 그래서 2011년 추계예대로 편입했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 바텐더, 대출영업, 온라인 쇼핑몰 운영, 차량견인, 헬스트레이너 등 온갖 일을 했다. 

추계예대 편입 후 ‘시마(詩魔)’가 씌었다는 표현 그대로 시 쓰기에 전념했다. 그는 “처음부터 차곡차곡 글쓰기를 해온 게 아니라서 최소한 게으르지는 말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당선작인 ‘화병’뿐만 아니라 함께 투고한 시 ‘내가 내 속의 나보다 겉에 있다’는 끈질긴 묘사와 자신만의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는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술자리에서 물을 엎질렀는데 물이 ‘둥글게’ 모여들면서 뭉치더라고요. ‘화병’은 그 둥근 물을 한 시간 넘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쓴 시예요. ‘쏟아진 물인데 너희들은 서로 둥글게 붙잡고 있구나, 나는 이 물보다도 모나고 모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 속의 나보다 겉에 있다’는 그가 동네 버스정류장 앞에서 죽은 개를 보고 묻어준 경험을 그대로 옮긴 시다. 길에 버려진 개를 묻어주면서도 그는 “개의 죽음을 그대로 본 게 아니라 시의 소재로 써먹은 것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앞으로도 시가 중심이 되는 인생을 살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아무리 큰 돈과 권력이라도 고개 숙이지 않을 텐데 시 앞에서는 제가 고개 숙일 수 있겠구나 싶어요. 100명이 한 번 읽는 시보다는 한 명이라도 100번을 읽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독자 그 한 명과 딱 붙는 그런 시 말입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당선 소감 ) "모른 척 걸어가듯 시 쓰겠다"

‘시는 결코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다 솔직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아직도 사람을 알려면 오백년은, 사랑을 하려면 천년은 걸릴 거라고 믿습니다. 모른 채 태어나 모른 척 걷는 게 유일한 특기인 셈입니다. 

하늘이 참 좋은 날. 은대 원준 영수 인태랑 사막에다가 오줌을 휘갈기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박찬일 선생님과 이형우 교수님, 이성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기뻐해준 추계예대 동문들, 유정이 삼겹살 때문에 우리 많이도 웃었습니다. 승빈이의 지조와 그대들의 밝음에 감사합니다.

하이네 시집을 들고 웃는 어느 여인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자격이지만, 역시나 침묵은 압제자를 돕는 것. 그만큼은 글을 쓰겠습니다.

▷1983년 부산 출생 

▷제주관광대 카지노경영학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4학년

 

 

 


심사평 ) "여백과 침묵으로 상상력 확장한 수작"

‘청년’과 ‘신춘’이라는 말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는, 굳어지지 않아서 무정형인, 무엇으로 변화할지 모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직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어린이가 살아있는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

선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기성세대의 잣대로 가공되지 않은, 드러난 것보다는 앞으로 드러날 탄력이 더 풍부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물론 응모작에는 서툴고 거칠고 어눌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라기보다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새로움을 한껏 내장하고 있는 가능성으로 보였다.

선자들의 이런 마음을 향해 한 작품이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망설이지 않고 당선작으로 결정한 그 작품은 김기주의 ‘화병’이다. 

이 작품은 조금도 화려하지 않고 신춘문예에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고 어눌해 보인다. 

그러나 대상의 작은 것까지 낚아채는 관찰은 섬세하고 정확하며, 묘사는 끈질기고, 표현에는 집중력과 응집력이 있으며, 어조는 차분한 정도를 넘어 무심할 정도로 건조하다.

당선자는 말을 적게 하면서 행간의 여백과 침묵을 한껏 활용해 시를 힘 있게 만들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말을 덜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함께 투고한 ‘내가 내 속의 나보다 겉에 있다’ 역시 죽음에 대한 블랙 유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들을 보며 당선자에게 아직 쓰지 않은 더 크고 풍부한 것들이 있으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게 됐다. ‘청년’과 ‘신춘’에 어울리는 참신한 신인을 한경 청년신춘문예의 첫 당선자로 내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소연의 ‘나를 기포의 방에’와 강산하의 ‘티베트 노인들의 합창’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겨뤘으나 당선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앞의 작품은 이미지가 발랄하고 신선하지만 일부러 꾸민 것 같은 작법이 거슬렸고, 뒤의 작품은 성실한 관찰과 재미있는 모순어법이 돋보였지만 성장을 위한 습작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신경림·최승호·김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