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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이유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선소감

 

종종,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견디고 있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즐거운 때, 도저히 그 속에 섞여들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나는 줄곧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희박하지만 여일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애초부터 빈약하고 어수룩한 내 글이 삶의 방편이 되리라는 위험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쓴다는 것'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2010년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다른 쪽으로 난 두 갈래 길을 합쳐 하나로 만드는 무모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기를 게을리 했다.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쓰기를 소홀히 했다. 앞서 간 이들의 빼어난 문장을 교묘하게 훔쳐와 내 것인 양 우쭐대기도 했다. 이 과분한 자리를 빌려 깊이깊이 고개 숙여 반성한다. 앞으로 다가올 새날은, 나만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 살뜰한 문장들이 정수리 위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날들이길 바라본다.

'시'라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철부지를 이끌어주신 정일근 교수님, 글 쓰며 동고동락한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친구들, 맹랑한 후배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경남신문사 식구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애틋한 나의 가족과 친지들,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서른 전에 등단하겠다'는 만용을 패기로 여겨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문장 겨우 쓰고 쉽게 두 문장을 지우는, 스스로에게 야박하고 모진 시인이 되겠다.

▶약력 198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사범대학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재학. 현재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

 

 

심사평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상식으로 굳어져 최초의 경이를 상실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삶과 사물에 대한 실감을 끌어올 수 있을까. 

예심과 본심을 겸한 1차 심사를 거쳐 오른 작품들은 시 장르 고유의 구심점을 향한 몰입과 그로부터의 탈주로 크게 구별되었다. 서정성에 충실하였으나 새로운 모험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 그리고 과잉된 탈주의지로 설명적인 산문투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조립은 잘 되었으나 맥이 빠져 시적 울림에 실패한 작품들 또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박다닌, 최희명, 김유경 세 사람의 응모작이다. 우선, 박다닌은 소외된 삶을 조명하는 따듯한 시선에 호감이 갔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최희명과 김유경의 작품을 들고 팽팽한 긴장 속에 심사를 이어갔다. 최희명은 '고려인 집성촌'이라는 무거운 오브제를 절제된 감각으로 구조화하는 솜씨가 녹록잖았다. 견고한 형식미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형식미가 시상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