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검은 줄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시 당선소감 - "손녀에게 한 수 가르쳐 준 할머니께 영광을"

 

올봄 고향에는 유난히 벚꽃이 고왔다고 했습니다. 그 고운 꽃빛이 다하고 배롱나무 꽃 필 즈음 할머니께서 하늘로 꽃구경 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울다 말고 그날 분의 방송 원고를 썼습니다. 

그렇게 불성실한 자세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죽은 자의 일과 산 자의 책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가시는 길에도 손녀딸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신 아름다운 매화, 정가매 씨. 당선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할머니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제가 쓰는 글에 책임을 지며 살겠습니다. 제 시에 뼈를 세워주신 부모님, 시의 살이 되어주신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과 원광문학회 식구들, 헐벗지 말라고 옷을 지어주신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외롭지 않도록 함께 길을 걸어준 문우들께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차마 순서를 정할 수 없어 고마운 이름들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두고두고 그 이름 부르면서 곁에 있겠습니다. 

제 시의 가능성을 보아주신 유강희 선생님, 박성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시를 보듬어 주신 정양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게 했던 두 분 선생님께서 제 시를 안아주셨다는 것이 아직도 꿈 같습니다.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신 전북일보사에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시 심사평 - "파업현장 현실 인식·시적 긴장감 돋보여"

 

마지막까지 남아 선자들을 고심케 한 작품은 '검은 줄'(김정경)과 '닭'(정지웅)이었다. '닭'은 '닭이 발톱을 세워 저물녘을 뒤란에 눌러놓는다/머리에 달린 어떤 생각이 갈 방향을 콕 쪼아야 한 발 걷는 닭/퇴근 없는 저 눈이 무섭다'처럼 언어가 생각을 담는 솜씨가 놀라울뿐더러 비유가 관습을 벗어나 새롭게 빛을 발하고 있다. 

말하자면 관념을 언어로 낚아채 시적 표현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검은 줄'은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장/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로 시작되는 시의 첫머리처럼 우리 시대의 아픈 '파업 현장'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기왕의 사실주의 시들의 상투적인 표현을 벗어나 현실을 다루면서도 시적 주체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숙고 끝에 우리는 언어의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닭' 대신 오늘의 사회 현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검은 줄'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합의했다. 

같이 응모한 다른 작품에서도 보이지만 '닭'의 시인은 그 건강한 농경정서가 자칫하면 익숙한 농촌시들의 복제에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깨끗이 씻어버리기에 아쉬운 표현들이 많이 눈에 띈 반면, '검은 줄'은 파업현장을 다루면서도 거기에도 끼지 못하는 '특수고용자'로서의 신분이 뚜렷이 부각된 시구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같은 표현이 보여준 바대로 주체와 현실의식과의 시적 긴장이 앞의 작품보다 조금 더 우위를 차지한다고 판단되었다. 

이밖에도 선자들의 눈을 끈 작품은 '보랏빛 선글라스'(문화영), '연잎 정자에 초대하다'(이정희) 등이었음도 밝혀둔다. '닭'의 시인에겐 정진을, 그리고 당선자 김정경씨에겐 축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