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2013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소감-신은숙

 

 

 

유리알 닦듯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진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멸망의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구는 저녁까지 안녕했지만 그 순간 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써 온 저와 그 깊은 절망에 대한 멸망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멸망 앞에서 새로운 우주가 열리듯 오늘 저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 하나에도 남다른 눈빛 하나 건넵니다.

 

필사하던 밤들을 생각합니다. 고급 독자로 시 읽는 행복감을 누리는 게 차라리 편할진대 시를 쓰겠다고 덤비는 순간부터 마음은 어두운 동굴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덜컥 당선이 되고 보니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시를 쓰면서 견뎌야 할 고독과 현실 앞에서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제게 시는 마음으로 읽는 세상입니다. 그 안에 새소리 바람소리 깃들 수 있도록 마음을 유리알처럼 잘 닦아 놓겠습니다. 낮은 자세로 이름 없는 사물들을 사랑하고 살피겠습니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단 하나 그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오세영, 강은교 심사위원께 큰절 올립니다. 묵묵히 지켜봐준 가족들 그리고 ‘히말라야시다’가 있는 초등학교 앞에 사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물방울의 힘을 알게 해주신 정병근 시인님 감사드립니다. 경희사이버대 김기택 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수님들, 학우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 숙희와 진경에게도 따스한 마음을 보냅니다.

 또 저를 알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겠습니다. 마음의 빚은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이제 조용히 히말라야시다에게로 가서 조금만 울고 싶습니다.

 

● 프로필

▲1970년 강원 양양 출생

▲강원대 국문과 졸업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재학

 

 

 

 

[2013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심사평-오세영·강은교


신선한 상상력·미학적 논리 통해 세계 재해석


예심을 거쳐 올라온 스물여섯 분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의한 끝에 두 심사위원은 이의 없이 신은숙의 ‘히말라야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구조적 완결성과 언어적 진솔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한 특별한 사물의 인식에서 촉발된 신선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의 미학적 논리를 통해 이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계란 하나의 큰 학교이며 삶은 그곳에서 이수해야 하는 일종의 학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학습은 학교 운동장 한 켠에 말 없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히말라야시다’의 존재론적 의미와 같은 것이 되지 않고서는 일상성을 탈피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 생의 진정한 완성이란 히말라야시다의 나뭇가지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되새 떼의 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당선작이 요즘 우리는 간과하고 있으나 시가 지향해야 될 이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신선하게 형상화하려 노력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상상력에 대한 믿음, 언어적 소통에 대한 가치 부여, 미학성과 철학성의 적절한 조화 등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 시단이 소통 부재의 언어유희나 정신분열적 사유의 독백 같은 시들로 오염되고 있어 더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작품 과반수도 이 같은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씁쓸했다.

 

마지막까지 논의되다가 탈락한 작품으로 이시언의 ‘유리창의 파리’는 형상성이나 시상 전개에서 재능을 보여줬으나 상상력이 단순하고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약했다. 구한의 ‘노인목경건조공법’은 묘사력과 수사가 탁월하고 언어의 밀도도 나무랄 데 없으나 시상의 비약이 심했고 대상을 단지 묘사해 보여주는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게 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