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폭설 밴드 / 노은 당선작> 폭설 밴드 /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 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 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 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쿵, 쿵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 내가 말했다 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 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 카테고리 없음 8일 전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사력 / 장희수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 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좋은 글/시 13일 전
[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 좋은 글/시 14일 전
[2025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적당한 힘 / 김정미 당선작> 적당한 힘 / 김정미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의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握手)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 .. 좋은 글/시 16일 전
[2025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 / 이문희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 / 이문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 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 좋은 글/시 16일 전
[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오키가하라 / 이지우 당선작> 아오키가하라 / 이지우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 숲에 도달할 수 있다 여름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어떤 날, 나는 스스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노력과 사랑을 뒤섞어서 밥과 함께 삼켜 보기로 했다 문장 속으로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벽을 참 좋아하고 이것은 글로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창 너머로는 고장난 실외기가 소음 없이 돌아간다 다리 사이로 차오르는 땀과 찝찝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내게는 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아버린 빙하처럼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견뎌낸다 곧이.. 좋은 글/시 17일 전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 좋은 글/시 18일 전
[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 좋은 글/시 18일 전
[2025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야 / 원수현 당선작> 백야 /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 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 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 좋은 글/시 19일 전
[2025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날개 / 박봉철 당선작> 날개 / 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났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 좋은 글/시 20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