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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조르기

안숙경

 

싸울 준비도 없이 그라운드에 서 있는 당신. 잽으로 상대를 탐색해 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한 당신. 너무 종합격투기를 무시한 것이다

그라운드 한쪽 구석에서 훌쩍거릴 것인지 승리의 세레모니를 보여 줄 것인지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목숨을 걸어야 진정한 파이터가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삼각조르기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동지가 된 듯했다

나는 점점 강해졌다

여자의 팔이 목을 죄어도 전보다 오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자기계발서를 쓰기로 한 이유는 무슨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내 책을 읽고 사람들이 얼마나 계발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그런 종류의 책을 수십 가지나 읽었지만 나 자신을 한걸음도 앞당기지 못했다. 왜 그럴까하고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인종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회가 왔을 때 가까스로 다가온 그것을 발로 뭉개 버림으로써 그동안 미련을 떨었던 자신을 가차 없이 벌한다. 아무런 보람도 없이 허무하게 한 방에 끝나버리지만 나는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결국 밑도 끝도 없는 나락이 기다린다. 이 책은 나와 같이 뒷걸음을 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유익한 책이 될지 모른다. 왜냐면 경험 이상의 스승은 없는 것이니까.

그래봐야 한 권의 자기계발서가 늘어날 뿐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누군가가 읽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누군가는 읽을 것이고 읽는 사람에게 감응이 가면 또 다른 독자가 생길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자기계발서니까 나 자신은 충분히 계발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간단하다. 식당 주인이 장사를 하다가 팔리지 않는다. 남는 것은 자신이 먹어 치운다. 어차피 식당 주인도 먹어야 한다. 기운을 내서 열심히 장사를 한다. 더 열심히.

자본이라는 것은 밑천이라는 말이다. 이 자기계발서가 밑천이 돼서 더욱 발전하시기를 고대한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뒷걸음치던 자가 멈추게 되는 것만도 큰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다. 나는 일일이 내가 겪은 것을 토대로 쓰려고 한다. 나 자신이 일단 경험한 후에 적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겪어보지도 않은 것을 화려한 수사에 힘입어 각색하고 조립해 놓은 책과는 다를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종합격투기에 다 있다. 인생을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봤을 때 종합격투기를 통해 살아가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싸울 준비도 없이 그라운드에 서 있는 당신. 잽으로 상대를 탐색해 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한 당신. 너무 종합격투기를 무시한 것이다. 격투기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 여겨진다. 이 경기를 보면 나의 지나온 인생과 나아갈 인생이 한꺼번에 보인다. 어디서 잘못됐는지도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도 윤곽이 잡힌다. 나는 누구에게나 종합격투기를 보거나 직접 해 보라고 권한다. 종합격투기야말로 운동경기다운 경기다. 왕캉 선수의 왼팔이 곤충의 더듬이처럼 랜디 킴 선수의 복부를 향해 뻗어갈 때 랜디킴 선수의 다리가 공중회전을 하면서 왕캉 선수의 턱을 가격한다. 일명 하이킥이다. 서로 한 방씩 주고받았기 때문에 큰 데미지는 입히지 못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고 계속 주고받다보면 어느 순간 한 선수가 나가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라운드 한쪽 구석에서 훌쩍거릴 것인지 승리의 세레모니를 보여 줄 것인지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격투기를 즐겨 보게 된 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다. 여자는 내게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나는 매사가 소심하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회사에서도 감원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여자는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가 데이트 장소로 선택한 곳은 시내의 한 운동 경기장에서였다. 그녀는 내가 강해지기를 바란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녀는 사무를 보는 여직원이었다.

경기장 내부에 들어섰을 때 이미 경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로 내부는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사각의 링 안에서는 두 사람의 선수가 어지럽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더 많이 때리거나 덜 맞기 위해 두 선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종합격투기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처음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를 패주고 싶은 마음을 이런 곳에서 푸는 건지도 몰랐다. 여자가 입식타격인 K-1 경기를 보러 가자고 처음 말했을 때는 그냥 말로만 그러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인터파크로 전화를 걸어서 예매를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의 여자는 이렇게 피 터지는 경기는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나가고 싶었지만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레이저 빔으로 교차해서 쏘아대는 조명과 요란하게 들리는 테마곡으로 경기장 안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는데 어느 순간 여자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언제 울었냐는 듯이 힘차게 응원을 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경기장을 나왔을 땐 저녁이 다 되어있었다. 뭣 좀 먹겠냐고 물었더니 여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그저 쉬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선수로 뛴 것도 아니면서 녹초가 다 되어서는 내게 배가 고픈지는 묻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의 숙박업소를 찾았다. 카운터에 식사를 미리 주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내게 종합격투기가 재미있지 않느냐고 했다. 남자들은 아마 많이 좋아할 거라고 했다. 나는 폭력을 쓰는 것은 그것이 비록 운동경기라도 싫다고 했다. 로마의 콜로세움이 연상된다고 했다. 오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투사들은 싸우다가 죽어야 했다. 여자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경기이고 목숨에 위해가 가지 않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고 했다. 종합격투기가 지금의 룰이 없을 때는 남자들이 머리채를 잡아당기거나 눈알을 손가락으로 쑤시는 것이 허용됐어요. 아무런 규칙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너무 재밌지 않아요? 여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아마도 상당히 위험한 경기가 됐을 거라고 말했다. 잘 훈련된 선수들의 주먹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솜뭉치로 감싸서 휘두르는 정도로 무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느냐면서 누군가는 목숨을 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희가 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때 주문했던 닭백숙이 와서 그것을 먹느라고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닭의 모가지가 없네요, 하면서 여자는 백숙을 열심히 뜯어 먹었다. 모가지가 없네요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밥맛 떨어지게 하면서 자기는 허겁지겁 먹어대는 여자의 행동에 필요 이상의 과장이 들어 있었다.

여자가 종합격투기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옷을 벗었다. 빨리 벗지 뭐해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옷을 벗자 여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종합격투기는 말 그대로 주짓수, 무에타이, 킥복싱, 레스링, 유도, 태권도 등 모든 격투기들을 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술도 다양하고 머리 회전도 빨라야 돼요. 모든 무예를 다 할 수 있다고 상대를 눕히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공격에 애를 먹게 되죠. 상대의 복부나 머리를 가격하려고 하지만 상대는 내 정강이뼈를 타격하고 있거든요. 열일곱 차례 다리에만 타격을 맞고 그라운드에 뻗어버린 선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여자는 내 머리를 잡고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끼우는 동작을 했다.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데 별안간 여자의 두 다리가 목을 죄어왔다. 자 이 기술이 삼각조르기예요. 상대방을 그로기 상태에 빠트립니다. 그때 잠시 기절해 있었던 것 같았다. 여자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철썩철썩 때려서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약해 빠져가지고 무얼 하려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무얼 할 수 있겠어요. 여자는 처음으로 푸념이 섞인 말을 했다.

밤마다 그녀는 한 가지씩 기술을 내게 걸었다. 상대의 등에 올라타서 양다리가 상대의 배를 감아야 하는 백 마운트 포지션, 누워서 방어하는 상대의 팔을 제압해서 어깨의 관절을 꺾는 기무라, 니바, 니어 네이키드초크, 암바, 킬로틴초크등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주먹을 맞다보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내가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맞아주는 것뿐이었다. 특히 수많은 기술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은 그 여자가 내게 걸었던 격투기 기술 중 하나인 트라이앵글 초크라고 하기도 하는 삼각조르기였다.

브라질 그레이시 가문이 발전시켰다는 주짓수는 관절기를 주무기로 한다. 상대가 숨을 못 쉬게 하거나 관절을 꺾어서 제압하는 무술이다. 타격 없이 상대를 제압하기에 좋은 기술이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 남자나 여자들이 호신술로 많이 써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주짓수를 배웠던 것일까. 정글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삼각조르기는 삼각김밥이나 삼각함수와는 다르다. 단순히 도형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삼각이라는 것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여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자세로 누워 있다가 내가 다리 사이로 몸을 들이밀면 다리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럴 땐 여자의 가랑이 사이에 바짝 끼워졌다. 한쪽 팔이 허리를 감기 위해 빠졌을 때 그녀는 다리로 한쪽 겨드랑이를 감아 둘렀다. 그리곤 재빨리 다른 쪽 다리로 목을 감으며 반대쪽 다리에 걸었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두 손이 내 머리를 감싸쥐고는 자신의 아랫배 쪽으로 잡아당긴다. 그 때 내 입에서는 끽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여자의 길고 탄력 있는 다리 사이에 끼워져서 까무러질 때 여자는 관용을 베풀듯 다리를 벌려준다. 여자에게 목을 내어 맡기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자의 부드러운 다리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여자의 두 다리가 스폰지처럼 폭신하게 목을 누르다가 서서히 조여들어 오는 느낌이 좋았다. 그다음 불이 붙은 것처럼 환하게 타오르다가 꺼져가는 순간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때 여자는 다리를 벌려 나를 놓아 주었다. 나는 여자의 가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목을 조여들어 오는 길고 탄탄한 다리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여자와 밤을 보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태우며 살았는지 여자는 모른다. 여자의 다리에 목을 조여 본 사람이라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칠십년대 유행했던 YES I CAN이라는 자기계발서가 있었다. 미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우리의 대기업에서도 사원들에게 권장해서 읽도록 했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어려운 현실을 돌파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실례를 들어서 풀어나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뜬금없는 좌 우 훅을 맞고 있다면 혹은 무지막지하게 강한 펀치를 맞아서 얼굴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고 해도 절대 긍정적인 자세로 맞아주라고 말해 주고 싶다. 맞는 자세에 따라서 당신의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각의 링 안에서나 철망으로 두른 팔각의 옥타곤 위에서나 도망갈 구멍은 없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맞는 선수는 절대로 지지만은 않는다. 두 눈을 감고 맞다가 결국 스탠딩 다운으로 실려 나가게 된다. 두 눈을 뜨고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당신이 처할 수 있는 어려운 현실을 집어 들어볼 생각이다. 당신의 회사는 감원의 철퇴를 맞고 집에 들어앉은 사람들이 많아 썰렁해졌다. 회사 재무구조가 너무나 나빠서 지금 당장 문을 닫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부실해졌다. 사장만이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이 그 회사에 들어간 직후에 부도를 크게 맞았다. 사장은 당신이 알기에도 숨 가쁘게 뛰어다녔지만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남아 있던 직원들도 퇴직금이라도 빨리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제는 강 차장과 당신만 남아서 뒤치다꺼리를 한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의 자리는 하필 당신의 뒤 벽쪽에 자리 잡고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인다. 당신은 약 먹은 고양이처럼 뻣뻣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불행하다. 여러 가지 태클과 펀치에 시달리다보면 펀치드렁크에 걸린 사람처럼 체머리를 흔들게 된다. 그러다보면 오후가 되고 퇴근시간이 된다. 하지만 아직 사장의 펀치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당신이 돌아본 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 차장에게 다가간다. 그는 가볍게 라이트 훅을 날린다. 어제 수금한 돈을 입금했겠지. 강 차장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훅을 날렸는데 팔을 비틀어 조이는 암바에 걸린 사람의 얼굴을 한다. 고통을 참고 있는 듯 두 눈조차 감고 있다. 저 그게 말이죠. 말까지 더듬는 걸로 봐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예상된다. 당신은 컴퓨터 전원을 끄고 나갈 차비를 한다. 저 집에 돈이 너무 필요해서요. 집사람이 수술을 했거든요. 사장이 강차장의 멱살을 쥐고 밖으로 나간다. 당신은 저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언지 더 상상을 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밖으로 나가 거리를 헤맨다. 거래처를 둘러본다는 구실을 대고 나왔지만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맞지도 않은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나는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다고 했다. 이것은 내가 겪었던 사실이다. 나는 망해가는 것이 내 본분인 것처럼 철저히 망해갔다. 나는 아내가 수술을 하다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원망스러웠다. 나쁜년. 지방을 빼는데 오백만원이라니. 하지만 사장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았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긍정적인 자세로 맞았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맞다보니까 그것도 할 만했다. 다만 사장이 내게 건 기술은 그냥 아프기만 했다. 여자의 삼각조르기처럼 절정이라는 것이 없어서 서운했다. 사장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멈추고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걱정되는 마음에서다'. 옥타곤에서 치러진 UFC 경기에서 해설자가 한 말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지만 새삼스러웠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뒤에서 누군가가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도 되겠다. 어쨌든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면 사람은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앞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아서 얼마큼 가치 있는 인생이었나를 생각해보라.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앞으로 당신은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전화를 건 사내는 책을 한 권 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면서 버릇처럼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팸 메일이 꽉 들어차서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나는 내가 스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쓰레기를 하나 둘 처리하듯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사내는 내 노트북을 흘끗 보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바로 인터넷과 관련된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그 분야에서는 명성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생각해보니까 책을 한 권 내보지를 못했는데 이왕이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사실 떳떳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런 열망이 생기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떳떳하지 못한 일이 무얼까 궁금해졌다. 불법적인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내는 약간 화를 내었다. 생전 합법적인 일만 일삼을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보지 마십시오. 저는 공과 사가 다 불법입니다. 모르시나본데 돈을 많이 버는 일이 합법과 불법 사이에 있는 일이죠. 그렇게 물으시는 선생은 법을 잘 아시나요? 나는 사내가 입고 있는 정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눈에도 명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나는 사내가 그럴듯한 대답을 해줄 줄 알았다.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정말 평판이 없으시더군요. 저는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냐면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이기 때문이죠. 쓰라린 경험이 없이는 인생을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전 그런 사람들을 한 트럭 정도 알고 있는데 모두 제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패배감이죠.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내는 혼자서 떠들어댔다. 전 책을 한권 내고 싶어요.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 들어 있는 책을 말이죠.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책. 아무도 거기서 불행을 느끼지 않는 책.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나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 책을 왜 저같이 평판도 안 좋고 패배감으로 얼룩진 인간에게 부탁하는 겁니까. 실패가 뭔지 모르고 인생의 쓰라림과 거리가 먼 양반께서 직접 쓰시지. 아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사내는 당황해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제가 잘났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생은. 선생은 이라고 사내는 말했다. 제 말을 헤아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실패가 뭔지 쓰라림이 뭔지 잘 알죠. 다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서 싸웠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제 생각을 조리 있게 쓰는 것은 잘 못하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내용은 다 알아서 써 주세요. 저는 터치를 하지 않을 테니 다만 중간중간 제게 보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내의 태도는 불량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의 보수를 주겠다고 했고 계약금도 받았다. 합법과 불법 사이에 있는 일이라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돈도 다 써가고 있다. 나는 책을 써 가는 동안 사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뭘까 하고 생각을 거듭했다. 사내가 쓰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럴듯한 자기계발서와 같은 책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편으로 사내가 다시는 연락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서두를 쓰고 그 무성의함에 나도 놀랐다. 독자가 읽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니. 사내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곤두섰다.그러니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따져 묻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내의 냉정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IT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사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제멋대로 쓰라는 것이니 당연히 우스꽝스러운 글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내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목을 졸리던 이야기를 쓴 걸 안다면 사내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지 궁금했다.

 

공이나 기구를 가지고 하는 경기는 공이나 기구가 커무니케이션을 해 준다. 둥근 공의 탄력이 선수들 간에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주고 적대감을 최소한으로 줄여준다. 사람들 사이의 언어가 그렇듯이 이 세상은 우호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렇다. 당신의 언어 수준은 늘 함량미달이다. 어디서나 함부로 지껄인 탓에 사람은 좋지만 실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당신의 아내가 당신이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알 수 있다. 뒷수습을 하는 것도 아내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다. 수도 없이 소통의 언어를 날려야 사람들은 돌아선다. 돌아설 때 당신의 신뢰도 함께 돌아선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당신의 가족사를 조금 들춰볼 생각이다. 놀이기구를 타려고 가족과 공원에 갔다. 아내는 뚱뚱한 몸을 이끌고 두 아이와 함께 등장한다. 당신은 갑자기 어디로 숨고 싶다. 아내는 몇 바퀴 돌고 숨을 헐떡이면서 돌아왔다. 롤러코스터가 주저앉지 않았나 봐. 술을 마시는 당신의 입술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라는 소리와 함께 불쌍한 영웅처럼 두들겨 맞는다. 또 나의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처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종이에 붙은 영어 단어를 외느라 아버지를 외면했다. 내가 그렇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을 몰랐다. 빈대떡처럼 평평하고 압정으로 눌린 것 같은 안정된 생활을 원했다. 아버지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한 번은 일어서야 했지만 일어설 거라 믿었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어우 너무 아프다'였다.

격투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마우스피스로 입을 틀어막아 버린다. 입을 닥치고 어찌해볼 도리 없이 때리거나 맞아야 한다. 선수들이 말을 할 때는 경기를 하기 전이나 끝난 후이다. 특히 경기를 하기 전에 상대의 기를 빼기 위해 아주 심한 말을 하기도 한다. 내 성질을 건드리면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얼굴을 깔아 뭉개주겠다. 이렇게 공격적인 멘트를 많이 할수록 그들의 가슴은 공허하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언어가 뛰어들 수 없는 격렬하고도 인정사정없는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라는 것이다. 내가 여자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서서히 조여들어오는 압박을 알면서도 목을 내어준 것처럼 누구나 알면서도 상대를 허용한다. 당신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나와 다를 것이 없다. 넌덜머리를 내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회사를 다니고, 이를 갈면서 사랑을 한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가위를 눌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목을 내밀어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조여지면서도 왜 그런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액션 배우들이 몸을 사리지 않는 이유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처절한 고통을 상대는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건 단지 왜곡하기 쉬운 감정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다. 당신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당신은 준비를 많이 해 왔다. 무릇 싸움이란 조용할수록 격렬하고 파괴력이 무섭다. 그동안 어설피 주워들은 것은 많아서 병법도 꽤나 알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당신은 내편과 네편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무나 벌렁 자빠뜨리다가는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뒤집기를 잘한다고 칭찬받지 못하는 이유다. 차라리 객석에서 피켓 걸의 엉덩이를 훔쳐보는 게 낫다라는 주문을 받는다.

또 주의할 것은 상대의 호흡과 호흡이 서로 교환되기 때문에 우호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여자가 내게 베풀어준 호의들이 그렇다. 선수들은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감정을 없애려고 더 과격해지기도 한다. 세계 최강의 무술인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 힘만 세거나 기술이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고 그라운드를 빙빙 돌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옥타곤을 두른 철망 가장자리에서 쭈뼛거리는 것은 싸우지 않고 승리를 얻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없다. 맞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쨌든 당신은 그라운드로 복귀해야 한다. 야비한 함성을 들어야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꺼져가는 불꽃의 심지를 다시 돋우고 소금물에 절인 오이 같은 얼굴을 들어 상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럴 때 당신은 이미 위대한 승리자다.

당신이 해고 통지서를 받던 날. 당신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굴을 덮고 있다. 길로틴초크를 당하는 자세로 목을 빼고 있다. 주위의 위로를 받으며 회사를 빠져나와 터벅터벅 도로를 걸어 나올 때 누군가 당신을 열심히 부른다. 차장님. 어디 가서 술 한잔해요. 사무실 미스 김이다. 미스 김은 평소 당신을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긴 속눈썹이 너무 애절하고 가슴을 아리게 한다고 한다.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다. 마치 바닥에 눕혀져서 마구마구 파운딩당하고 있을 때 쉬는 공이 울려준 것처럼 반갑고 행복하다. 난 돈도 없는데. 당신이 풀이 죽어 말하자 여자는 당신의 몸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는 격투기가 벌어지는 경기장에 데려갔다. 그다음 벌어지는 이야기는 앞에 썼다.

나는 여자가 문득 그리워진다. 내가 여자에게 목을 내어 맡길 때 여자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두 팔이나 다리로 목을 죄어 감으며 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느끼는 듯 했다. 목숨을 걸어야 진정한 파이터가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삼각조르기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동지가 된 듯 했다. 나는 점점 강해졌다. 몸도 근육이 붙고 단단해졌다. 여자의 팔이 목을 죄어도 전보다 오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여자가 그리워서 전화를 하면 자신은 매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는 다시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에 어떤 여자를 만나도 만족할 수 없었다. 목을 졸라달라고 하면 열이면 열 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가끔 시키는 대로 해주는 여자들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강도를 적당히 맞춰서 목을 누르고 눌렀다가 떼는 순간을 잘 모른다. 하마터면 병원에 실려갈 뻔한 적도 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 여자는 살인미수에 걸려들고 싶지 않다고 떠났다. 나를 천상으로 데려갔던 여자는 대체 내게 어떤 짓을 한 것일까? 그때의 그 쾌감을 다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계발서 초고를 사내에게 보내주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나 자신 구분이 가질 않았다. 종합격투기의 역사도 적고 현재 판도를 알 수 있는 흐름도 페이지를 장식했다. 한 번 맞았을 때의 자세와 두 번 맞았을 때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도 갈피를 채웠다. 사내가 만나자고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의뢰자와 제작자의 관계는 결과물의 성과에 달려있다. 사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만족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과 말의 내용이 항상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고 했다. 선생이 말한 여자가 바로 제 아냅니다. 사내가 물었다. 글을 쓰면서 좀 강해지셨습니까? 강해지다니요. 지금 죽어가는 사람 때리는 것과 다를 바가 뭐요. 당신은 나를 모욕해서 강해졌다고 착각하고 싶은 거요? 내가 화를 내자 사내는 중얼거렸다. 아내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하지 않았고 당신을 몰랐겠죠. 난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당신의 삼각조르기를 몰랐다면 정말 불행했을 거예요. 아내와 난 지금 행복하게 지냅니다. 특히 여자의 다리사이에서 목을 눌리다가 하얗게 비워지는 순간에 말 못할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전보다 강해지고 용기도 더 생겼다고 했다. 원고는 폐기하든지 마지막 정리를 잘 해서 선생이름으로 내든지 하세요. 돈은 다 지불하지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사내는 없애라고 했지만 나는 한동안 이 자기계발서 초고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 자기계발서는 사내를 위한 책이었다. 사내가 내게 부탁을 해서 쓴 것이니 사내의 이름을 걸어야 옳았다. 사내는 삼각조르기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버렸다. 뒷걸음치던 자를 멈추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헛되이 물거품이 되었다. 사내는 내게 다시는 여자를 찾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나로선 어쩔 수 없다. 사내를 원망하거나 여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보면서 나를 위해 울던 여자는 어쩌면 나를 사랑했으리라.

노트북을 열어 사내로부터 메일이 와 있나 살펴본다. 사내로부터 온 것은 없고 스팸메일이 쌓여있다. 하나둘 지우기 시작한다. 나도 될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페니스의 존재 목적은 자신을 확대시키는 발기에 있으니깐 이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건전한 성생활이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고생과 인내 끝에 낙이 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펌프질이나 테크닉이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메일을 지운다. 이글은 쓰레기가 아니다. 적어도 목적에 충실한 글이다. 내 이름을 쳐 본다. 작가 프리랜서 작품으로 '공중회전 두 번 하기'가 있고 사업실패와 사기, 공금횡령 등 물의를 일으키고 이혼하여 현재 은둔 중.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정보를 올린 인간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사기는 당한 것이지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공금횡령도 월급을 안 주길래 수금한 돈을 받아 챙겼을 뿐이었다. 이런 쓰레기 정보를 유통시키는 자를 그냥두면 안 된다. 모든 게 다 음모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체급이 슈퍼 헤비급인 상대를 마주보고 있는 것 같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여자가 옆에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의 다리 사이에 숨을 수 있다면 괴물이 나를 깔아뭉개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에게 삼각조르기를 당하다 죽는다고 해도 좋다.

집 앞 체육관으로 간다. 관장과 약속이 되어 있다. 체육관에는 운동 연습을 하는 사람이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매달린 샌드백과 펀칭볼이 보이고 바벨등 운동기구들이 널려있다. 도로에 면한 유리창에는 체육관이름이 붙어있다. 깔끔한 것이 이제 새로 오픈하는 분위기다. 운동기구들에서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던 에너지가 느껴진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서 넘어지거나 해도 큰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선수들은 상대의 타격에서 대미지를 입지만 외부 구조물에서는 큰 손상을 입는 일은 없다. 어쩌면 선수들보다 창밖에서 활보하는 시민들이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같다. 사방이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발려져 있고 달려오는 자동차들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이곳이 안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문밖에 관장이 서 있다. 격투기를 배워보시겠다구요? 관장의 얼굴은 맷집왕 마크헌트를 닮았다. 마크헌트는 일반인보다 두개골의 뼈가 3배 이상 두껍다는 마우이족의 후예라고 한다. 얼굴이 넓적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몸이 약해보이시는데 건강은 좋으십니까? 나는 맷집왕도 때려눕힐 수 있다고 대답한다. 관장은 정말 그런지 보자고 하면서 일어선다. 나도 엉겹결에 일어서서 관장과 마주선다. 관장이 마루를 발로 차면서 순식간에 태클을 걸어온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하는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뜨면서 바닥에 내리꽂힌다. 불이 번쩍하면서 암전된 것 같은 순간이 지나자 온몸이 쑤신다. 갑자기 자기계발서가 생각난다. 절대 긍정적인 자세로 맞아 주라고 썼던가. 나는 긍정적이 되기 위해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관장이 몸을 일으켜준다. 이렇게 약해 빠져가지고 무얼하려고 그러십니까. 한 육 개월 정도 배워야 체력이 붙겠는데요. 관장은 여자와 같은 말을 한다. 여자도 나를 약해 빠졌다고 했다. 나는 마룻바닥에 앉아서 관장에게 말한다. 저 관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저한테 삼각조르기 기술을 걸어 주세요. 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저기요. 그 기술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서요. 관장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삼각조르기를 한다. 여자와 달리 관장의 두 다리는 근육질이라 단번에 조르기에 들어간다. 머리가 하얘진다. 관장의 목소리가 텅 빈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격투기를 정말 배워보시겠다구요?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바로 이거야. 모든 게 다 꿈이지. 모든 게 다 꿈이야. 이게 현실이라면 말도 안돼. 나도 모르게 탭을 친 후에 풀려 나온다. 관장은 시종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 뒤에 어떤 칼이 숨어 있을지 몰라 나는 내내 숨을 몰아쉰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꺼낸다. 이제는 사내에게 거부당한 자기계발서 초고를 없앨 차례다. 사내를 위한 글이었으며 여자의 이야기였던 글.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고 del 키를 누르기 위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는다. 뒷걸음을 치면서 살아 온 나도 어딘가 공간속으로 지워져간다. ()

 

 

<당선소감>


오늘밤은 푹 자고 내일부터 가자!

 

부족한 작품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분발해서 좋은 글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늘 저의 앞날을 걱정하시면서 기원해주시는 어머니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위의 모든 분과 KSGI(국제 창가학회) 회원님들 감사드립니다.

소설을 쓰겠다고 찾아간 저를 내치지 않고 보듬어주신 윤후명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너무나 부족했던 저는 문학에 조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의 배려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늘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함께 공부했던 문우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희망이 없으면 자신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가 어두우면 자신이 태양으로 빛나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의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문학의 힘으로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잠자지 말고 걸어야 할 길과 일부러 고생길을 가는 가여운 나에게 위안을 조금 주고 싶습니다. 오늘 밤은 푹 자고 내일부터 가자.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소설 열 편을 읽었다. 소재와 스타일이 다양했지만 문장이나 이야기의 짜임새가 허술하다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 많았다. 참신하고 세련된 감각은 발견되지 않는데 꼼꼼하고 성실한 글쓰기마저 실종되어 가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네 편을 주로 논의했다. '플레이아데스의 소녀'는 소설 전개가 무난하고 안정되어 있지만 발상이 동화적이고 사유나 주제의식이 너무 순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샤를르 드 방피르-세 개의 인터뷰'는 자유롭고 여유 있는 서술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그렇지만 인물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이 허약하고 현실의 삶과 대응하는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 구멍'은 트라우마와 그 극복이라는 익숙한 소재의 이야기를 아주 익숙한 방법으로 쓴 소설이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견되는 상투성과 작위적 요소가 문장의 밀도나 구성에 들인 공을 무색하게 했다. '삼각조르기'는 격투기의 기술과 처세의 방법을 연결한 발상이 흥미롭고 인물들의 심리 포착도 잘 되어 있지만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의문을 야기하는 부분이 있었고, 어떻게 끝내야 할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듯한 결말도 아쉬움을 주었다.

우리는 ', 구멍''삼각조르기' 사이에서 망설였다. 상투적 완성 대신 미완의 가능성을 지지하자는 쪽으로 심사자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것이 '삼각조르기'가 수상작이 된 이유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 이승우, 최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