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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의 연애

문부일

 

9876호 버스의 메모리칩을 컴퓨터 USB포트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925분 녹화부터 슬로우 화면으로 보기 시작했다. 2930, 버스가 흔들렸다.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 장면 파일을 총무부 김 차장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메일을 보냈다고 따로 연락하지 않고 구석에 달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총무부에는 선명운수 모든 사무실에 설치된 CCTV 녹화 모니터가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오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짓, 전화 통화 내용,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앞에서 묵직해진 성기 따위가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선명운수의 칠백 여대 버스 앞문과 뒷문 위에는 감시카메라가 달려있다. 누가 지갑을 훔치는지, 슬쩍 여자 엉덩이를 만지는지 또는 급정거 때문에 다쳤다는 승객의 항의가 진짜인지 녹화 화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메모리칩은 버스마다 두 개씩 있다. 수위아저씨는 버스 운행이 종료되면 메모리칩을 빼고, 다른 칩을 꽂아놓는다. 녹화된 칩은 번호대로 정리한 후 영상자료실로 보내준다. 나는 하루가 지난 녹화 장면을 보는 것이다.

칩이 고장 나지 않고 녹화가 잘되는지 점검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메모리칩 리더기에 칩을 번호대로 스무 개를 꽂고 2배속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모니터 스무 개가 동시에 켜졌다. 층층이 쌓여 있는 모니터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닮았다. 모니터를 훑어보며 캐비닛 문을 열고 유니폼을 꺼냈다. 나를 지켜보는 카메라가 신경이 쓰여 검은색 테이프로 렌즈를 막고 싶다. 나는 후다닥 청바지를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며칠 동안 한 통의 전화도 없이 시계 역할만 충실히 하는 전화기였다. 배터리가 없다고, 충전을 해달라는 간절한 신호였다. 사람들에게 휴대전화는 소통을 의미하지만 내게는 단절을 말하는 도구였다. 하루 종일 곁에 두어도 전화나 문자는 오지 않았다. 가끔 대출 상담이나 성인용품을 판다는 스팸문자가 전부였다. 휴대전화도 표정이 있다면 지금쯤 나를 측은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전화기의 전원마저 꺼져 나는 이 세상과 불통 중이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지금 누군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연락이 안 된다는 핑계가 생겼다.

영상자료실에서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전문대학도 나왔다며? 서른 살에 팔십 만원 받아서 살 수 있어? 결혼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지. 대형면허 따서 버스나 몰아." 회사 사람들이 흉을 볼 때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없이 웃었다. 나는 이 일이 좋다. 박봉이지만 윗사람이 없어서 편했고, 대학에서 전기를 공부해 카메라나 녹화기가 고장 나면 쉽게 고칠 수 있었다.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에 탄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를 정해 매일 지켜본다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 사람의 이름부터, 직업, 어떤 성격인지 따위를 상상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커피믹스 두 개를 넣은, 진한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보았다. 6742호 버스가 노량진역 앞을 지나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노량진의 풍경이 보기 싫어 4배속 버튼을 눌러 빨리 감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손에 보온병과 방석을 들고 중앙고시학원 앞을 지나가는 수험생들.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입춘 무렵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나는 노량진 고시촌을 떠났다. 오 년만의 탈출이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처음 준비하는 수험생을 현역, 그 뒤부터는 재수생, 삼수생, '장수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1차 시험에 몇 번 붙었을 뿐 여전히 장수생이었고, 노량진에서 불로장생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백 명이 듣는 강의에 일 분만 늦어도 맨 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고, 졸음이 몰려오면 각성제 성분이 들어있는 피로회복제를 보약처럼 마셨다. 공부를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가면 어둠이 기다릴 뿐이었다. 삼만 원을 아끼려고 창문이 없는, () 같은 방에서 오 년을 머물렀다.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알 수 없고 아침이 밝았는지조차 시계를 봐야 알 수 있는 조붓한 곳에서 나는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공부 감옥이었다. 그 동안 친구들의 결혼 소식을 무시했더니 하나둘 연락이 끊겨 외톨이가 되었고 그렇게 서른 살을 맞이했다.

2년 안에 합격을 자신하며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덧 나는 패배자가 되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렸고, 공무원 시험에 청춘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세상을 혐오했다. 무엇보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열패감이 무서웠다. 새해가 되고 공무원 시험 모집 요강이 노량진 곳곳에 붙을 때 탈출을 결심했다. 고시촌에 하루만 더 있어도 미쳐 정신병원에 실려 갈 것 같았다. 손때 묻은 책과 낡은 이불, 유행이 한참 지난 청바지와 추리닝만이 장수(長壽)의 흔적이었다.

집에 돌아갔지만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햇빛을 보며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좋았는데 그것이 도리어 나를 괴롭혔다.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유폐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활기찬 월요일의 신선한 기운 대신 눈부신 태양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태양이 나를 무능하다고 질타했다. 나는 커튼을 치고 방에 덩그러니 앉았다. 고시원과 다를 게 없었다. 텔레비전을 켰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 광고를 하고 있었다. '지루하게 사는 건 젊음에 대한 죄'라고 외치며 새로 나온 차를 거침없이 운전하는 또래 모델을 보니 울컥해 텔레비전을 껐다. 문득 재수생일 때 헤어졌던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먼저 합격해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대기업 회사원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쉬지 않고 두근거렸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피곤하고, 불쾌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

골목을 빠져나가 모퉁이를 돌 때였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얼굴에 복이 많아요." 검은색 청바지에 점퍼를 걸치고, 블랙 크로스백을 멘 사람들이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도를 아십니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그들과 롯데리아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내는 내게 콜라값을 내라고 했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버스카드와 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다. 그들은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결국 나는 혼자였다.

막막하게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데 북한산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느닷없이 산에 가고 싶어졌다. 산은 나를 다독여주고 내 마음을 헤아려 줄 거라 확신했다. 버스에 올라 뒤쪽 좌석에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대학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앉았는데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전염병 환자나 냄새나는 노숙자처럼 여겨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능한 사람 곁에 있으면 무기력이 전염된다고 그들의 눈빛이 말했다. 사람들이 루저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시선을 붙잡은 것은 버스 창문에 붙은 구인 안내였다.

'온종일 혼자서 녹화된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 구합니다. 35세 이하. 특별한 자격 없음.'

EPIER. 그녀를 만날 시간이다. 902번 버스 1980호의 메모리칩을 컴퓨터에 꽂았다. 아침 720, 신림동 동사무소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902번 버스는 열 대가 있다. 1981호부터 차례대로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감기에 걸려 결근을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1989호의 메모리칩을 꽂았다. 750, 그녀가 버스에 올랐다. 어제는 평소보다 삼십 분 늦게 집을 나선 모양이다. 그녀는 짧은 검은색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었다. 그녀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 720분 무렵이면 어김없이 버스에 올라 A로터리 H백화점 앞에 내렸다.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않는데 분명 백화점에서 일할 것이다. 그녀는 늘 'EPIER'라고 적힌, 작은 흰색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EPIER'는 고급 화장품 브랜드였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소매치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 902번 버스에서 지갑이 없어졌다는 신고가 다섯 건이나 들어왔다. 피해자였던 그녀가 선명운수에 직접 찾아왔다. 총무부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김 차장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말하는, 부드럽고 힘이 있는 목소리가 좋았다. 무엇보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을 것 같은 환한 얼굴과 경쾌하게 웃는 모습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그녀는 복도에서 나를 만나자 생긋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튿날부터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902번 버스를 꼼꼼하게 살피며 매일 화면으로 그녀를 만났다.

화면을 빨리 감았다. 밤 아홉 시 삼십 분 무렵 H백화점 정류장을 살폈다. 그녀가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1982, 1981호의 메모리칩을 차례대로 꽂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보았지만 EPIER 가방을 든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나는 커피를 발칵발칵 들이켰다. 뜨거워서 혀를 데일 뻔 했다. 남자친구와 거리를 걸으며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걸까. 1984호 메모리칩을 넣었다. 950분쯤 그녀가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 버스카드를 단말기에 갖다 댔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큰소리로 울렸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을 꺼냈고,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끄러운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주울 때, 뒤에 있는 남자들이 치마 끝을 곁눈질했다. 그녀가 요금통에 천 원을 넣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고생하세요."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늦었어요? 피곤하죠?" 나는 중얼거렸다.

 

선명운수와 카메라 장비를 거래하는 도매상은 청계천에 있었다. 장비를 골라 주문하고 집으로 가려고 버스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이 좋은 날씨에 여자 친구 안 만나고 뭐해?" 버스 기사가 거울로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며칠 전 카메라를 고쳐주며 인사를 나눈 기사였다.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버스는 광화문을 지나 A로터리로 향했다. "다음 정류장은 H백화점입니다." 안내 방송을 듣는데 그녀가 떠올랐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내 상황을 보여주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여자는 그녀 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버스가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내렸다. 백화점을 보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이 떠올라 만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일곱 시였다. 떡볶이 포장마차에서 튀김과 떡볶이를 먹었다. 옷에 간장이 묻지 않게 신경을 썼다. 어묵 국물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 왔더니 피곤했다. 쉬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귀가 따가웠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지만 소개팅을 앞둔 듯 설레었다. 백화점 옆에 새로 생긴 영플렉스 쇼핑몰에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쇼핑을 다니는 또래 연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어떨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모자판매대가 보였다.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챙이 넓은 카키색 모자를 집었다. 푹 눌러 써야 어울리는 모자라서 마음에 들었다.

아홉 시 삼십 분이었다. H백화점 창문을 보며 모자를 푹 눌러쓸 때 뒷문이 열렸고 직원들이 나왔다. 다들 비슷비슷해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지켜보자 EPIER 가방과 찰랑찰랑 윤이 나는 긴머리가 보였다. 그녀가 선하품을 하며 내 앞을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EPIER의 향기다.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릴 뻔 했다. 오랜만에 여자 친구를 본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 그녀의 이름은 나미였다. 나미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한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분위기 메이커였다. 더욱 호감이 생겼다. 입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미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902번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몰려갔다. 나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연인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가 내 얼굴을 보았지만 모자를 쓰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다. 영상자료실에서 일한다고 하면 요금을 안 내도 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미는 피곤한지 자리에 앉았고 나도 옆에 따라 앉았다. 나미는 창문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녀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다.

신림동 동사무소 앞에 버스가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나미는 잠에 깊이 빠졌다. 나는 벨을 누르는 척하다가 살짝 그녀를 건들었다. 나미가 눈을 뜨며 창밖을 보더니 놀라 일어섰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가 뒤따랐다. 우리는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는 GS25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골랐다. 나는 가게 앞 간의의자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CCTV에 찍히기 싫어서 모자의 챙을 넓게 폈다. 그녀는 생리대와 컵라면, 햇반을 샀다. 계산을 할 때 점원이 추첨권을 건네자 나미는 작성을 해 추첨함에 넣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꼭 당첨되면 좋겠어요. 아르바이트 힘들죠?"

담벼락 옆 골목으로 그녀가 걸어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심을 하고 뒤를 밟았다. 방심하며 느긋하게 걷는데 멀리 남학생이 달려오자 가로등이 켜졌다. 가슴이 내려앉아 차 뒤에 숨었다. 나는 나미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었고 나는 천천히, 살금살금 뒤쫓았다. 그녀가 왼쪽 골목으로 꺾었다. 놓치지 않으려고 속도를 냈다. 길 끝에 있는 낡은 빌라 안으로 그녀가 들어갔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녀가 계단을 걸어갈 때마다 센서등이 켜졌다. 3층 계단참에서 왼쪽 끝 방 앞까지 불이 이어졌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방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 바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나는 골목을 나오며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를 사 마셨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하자 뿌듯했다. 계산을 할 때 아르바이트생이 추첨권을 주었다. 추첨권에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쓰도록 돼 있었다. 대충 적어 추첨함에 넣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했다.

 

새로 산 장비를 들고 차고지로 향했다. 추석이 지났지만 낮에는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넓은 차고지 한복판에 버스 열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버스에 들어가자 화학성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숨이 탁 막혔다. 아직도 새차증후군에 적응이 안 됐다. 버스에 시동을 켜면서 창문을 열었다.

드릴로 앞문 위에 구멍을 뚫고 센서를 달았다. 문이 열리고 승객이 버스에 오르면 센서가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운전석 위에 카메라를 달았다. 녹화기는 메모리칩을 쉽게 꽂고 뺄 수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 바닥에 달면 비 오는 날 물이 들어가 금방 고장이 난다. 버스 천장에 녹화기를 단단하게 달았다. 대충 달면 승객 머리 위에 떨어질 수 있었다. 뒷문에도 카메라와 센서를 달았다.

설치가 끝났다. 나는 밖에 나가 오 분 동안 서 있다가 앞문으로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 나서 몇 분쯤 서성거리다가 뒷문으로 내렸다. 녹화 테스트를 한 것이다. 녹화기의 메모리칩을 빼서 노트북에 연결을 시켰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내 모습이 모니터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선명운수에서 일하기 전까지 버스에 카메라가 달렸다는 것을 몰랐다. 타인 앞에서는 짐짓 멋지게 행동할 수 있지만 구석에 숨겨진 카메라 앞에서는 본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득 나미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퇴근을 하고 신림동으로 향했다. 정류장 앞 공중전화로 H백화점에 전화를 했다. 몇 초 후 EPIER 매장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여덟 시 삼십 분까지 영업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와의 첫 통화였다.

나는 마음을 야무지게 먹고 가방을 챙겼다. 모자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의 기억을 되짚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골목길이 많아 한 번 길을 잃었지만 어렵지 않게 빌라를 찾았다. 빌라에 들어가 천장을 살폈다. CCTV는 없었다. 101호 문에 교회 홍보 전단지가 붙어있었는데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계단참을 지날 때마다 나를 경계하듯 불이 켜졌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오는지 살폈다. 어제 불이 들어온 방은 301호였다. 문에 피자집, 치킨집 전단지가 어지럽게 붙었다. 앞에 쓰레기봉투를 대충 살펴보니 맨 위에 컵라면 용기가 있었고 그 밑에 휴지로 싼 생리대도 보였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혹시 문이 열리면 전도하러 왔다고 말하려고 교회 전단지를 꺼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먼저 살구색 밀착장갑을 끼고 주머니에서 만능키를 꺼내 도어 열쇠 구멍에 넣고 천천히 돌렸다. 바로 철컥, 소리가 났다. 문은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힘없이 열렸다. 오래된 빌라, 특히 원룸은 잠금장치가 허술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 온 것 마냥 어두컴컴하고 스산했다. 고시원 방문을 열 때와 같이 어둠이 나를 맞이했다. 손으로 벽을 만지며 스위치를 찾았다. 몇 번을 만지작거리다 스위치를 눌렀지만 불이 켜지지 않았다. 휴대전화 조명으로 집 안을 비추었다. 창문마다 두꺼운 검은색 커튼이 쳐 있어서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옆 벽면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켜졌다. 스위치에는 뽀얀 먼지가 앉았고 누를 때 뻑뻑했다.

한 명이 살기에 적합한 원룸이었다. 그녀의 냄새를 맡으며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에도 검은색 썬팅지가 붙어 동굴 같았다. 불을 켰다. 칫솔은 하나뿐이었고, 변기 둘레에 오줌이 끈적끈적하게 묻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거울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거울이 사선으로 깨져 반쪽만 남았다. 몸이 으스스하고 오싹해졌다. 책상 귀퉁이에 있는 전화 요금청구서를 보았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책꽂이 맨 위에 대학 졸업 앨범이 있었다.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고, 전문대학 피부미용과를 졸업했다.

여덟 시였다. 나미의 진짜 모습을 더 알고 싶었다. 가방에서 녹화 도구와 공구를 꺼냈다. 현관문 옆에 큰 신발장이 있었고 안에 전기단자함이 보였다. 드릴로 단자함에 녹화기를 달고 전선을 밖으로 꺼냈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워 신경이 쓰였다. 옆집 사람이 벽을 두드렸다. "곧 끝낼게요." 구시렁거리며 서둘렀다. 그때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칫거리다 공구를 가방에 넣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파 일찍 돌아온 걸까. 방금 전 나와 통화를 끝내고 백화점에서 바로 출발을 해도 도착할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면 시골에 사는 어머니가 올라왔을까. 두근거리는 마음 한 편에 짜릿함이 컸다. 빛이 없어 답답했다. 욕실 창문을 열기 위해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뿐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에 힘을 줘서 세게 밀었더니 겨우 열렸다. 손끝이 빨갛게 변했다. 창문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잠시 뒤 벨이 울렸다. "식사 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변기 뚜껑을 열고 쭈그려 앉아 오줌을 쌌다. 오줌이 튀어 바닥이 끈적거리면 안 된다.

카메라는 커튼봉에 달았다. 녹화할 때 센서가 작동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렌즈는 독수리의 눈동자를 닮았다. 테이프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끝을 자르려고 칼을 찾았다. 부엌 싱크대를 열었지만 없었다. 가위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도 문구용 가위나 칼이 없었다. 눈여겨보니 유리컵, 사기 그릇 따위는 하나도 없고 모두 스테인리스 그릇 뿐이었다. 가스레인지 옆에 있는 찌그러진 양은냄비가 처량하게 보였다.

 

5628호 버스가 새벽에 교통사고를 냈다. 사건 처리를 위해 경찰서에서 녹화 영상을 달라고 했다. 사고 순간의 화면이 저장이 안 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전체 화면을 요구했고 나는 화면을 복원하느라 청계천과 용산을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미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복원이 돼 며칠 만에 나미의 집에 갈 수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공중전화로 나미에게 전화를 했다. 빗방울이 공중전화 부수 밑으로 들어와 바지 끝단이 축축했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차도 있었다. 오후가 아니라 저녁 같았다. 한참이 지났지만 나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백화점에 전화를 하자 EPIER 매장으로 연결을 해주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안심하고 그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 친구의 집에 몰래 찾아가는 남자친구였다.

문을 열고 301호에 들어가자 어둠이 나를 반겼다. 방안에 눅눅하고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화면으로 그녀를 만날 차례였다. 녹화기에서 메모리칩을 꺼내 노트북에 연결을 했다. 화면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고 가끔 휴대전화 불빛에 그녀가 보였지만 정전이 된 집안과 다를 게 없었다. 혹시나 하며 중간 부분을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집에 불을 켜지 않았다. 커튼 때문에 가로등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화면 정지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녀가 고함을 지르고 쌍욕을 했다. 놀란 나는 볼륨을 높이고 스피커 옆에 귀를 갖다 댔다. "미친 년, 쌍년 그러니까 너 년 쌍판이 그렇지. 그 얼굴에 그 화장품 바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또라이. 그 시간이면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이나 뜯어라. 정과장 개새끼야. 네가 과장이면 다냐? 미친 새끼들." 나미는 거친 목소리로 신들린 무당이 사설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외쳐댔다.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일까. 분명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욕하고, 혼자 듣고 있었다. 그녀 안에 다른 사람이 숨어 있었다. 이십 분 정도 그러다가 '잠 좀 잡시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중얼거리며 주문처럼 뭔가를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고시촌에 들어간 지 4년이 됐을 때였다. 그해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난 직후였다. 까닭 없이 화가 났고, 수시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보다가 나도 몰래 욕을 중얼거리면 옆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나는 또 욕을 뱉으며 한강 둔치까지 뛰어갔다. 물론 달려가면서도 욕을 했고, 길가에 보이는 깡통을 걷어찼다. 멋진 차가 보이면 야구방망이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 욕을 하면 목이 마르고,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내 안에 숨은 다른 나와 마주하다 멀리 동이 터올 때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면 허탈해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 다행히 1차 시험에 합격해 공부를 하느라 그 증상이 없어졌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막막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다시 화면을 보았다. 녹화 시간을 보니 오늘 아침이었다. 휴대전화 불빛이 조금 보이고 그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침대에 누워 통화를 했다. 그녀는 어젯밤 일은 깡그리 잊고 다시 상냥하게 대화를 했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찬물에 머리 감았잖아. 보일러 고칠 시간이 어디 있어? 월요일은 돼야지. 오만 원? 빌려줄 수 있어. 걱정 마." 그녀는 친절한 나미 씨로 돌아왔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 다시 구시렁거렸다. "미친 년, 지금까지 안 갚은 돈이 얼마야?" 그녀는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나는 냉장고 옆에 있는 보일러 전원을 눌렀다. 보일러는 점화되더니 바로 꺼지며 컨트롤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베란다 세탁기 옆에 보일러가 달려 있었다. 책상 의자를 가져다가 보일러 앞에 놓고 올라가는데 몸이 휘청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보니 의자 다리가 부러진 채 대충 테이프로 붙여 있었다. 창문에도 금이 가 실리콘으로 붙여놓았다. 나미가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지 머릿속에 자세하게 그려졌다.

창문틀과 세탁기에 의지해 올라가 보일러 덮개를 열었다. 대학생 때 보일러 시공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보일러 내부 연료 전원을 껐다고 다시 켰다. 가스 공급은 충분했다. 문제는 점화봉에 붙은 불이 쉽게 꺼지는 것이었다. 산소 공급이 안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보일러 밑 배기관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보일러 전원을 누르자 가동이 되었다. 불붙는 소리가 경쾌했다. 잠시 뒤 방안에 온기가 돌았다.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고, 상쾌하게 일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의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베란다 구석에 쌓여있는 약봉지가 보였다. 맨 아래에 있는 것은 누렇게 변했고 지난주에 받아온 약도 있었다. 일주일치 약을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버렸다. 약봉지 속에는 신경정신과에서 발급한 처방전도 들어 있었다. 무슨 약인지 궁금해 나는 처방전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빗방울이 굵어져 운동화 속에 물이 스며들었고 가을 점퍼를 입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침대에 누워 낮잠이나 자지 않고 뭐하고 있냐고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게 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연애가 즐겁다. 정류장에서 가까운 약국은 휴일이라 문을 닫았다. 주말 당번 약국 안내문을 읽고 십 분을 걸었다. 우산을 써도 비에 흠뻑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걸어가는 동안 약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약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침을 하는 어린 아이부터 코를 킁킁거리는 할아버지까지 약을 사기 위해 기다렸다. 약사들은 환자의 증상을 듣고 부산스레 약을 챙겼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하며 처방전을 내밀까.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말주변이 없는 것을 탓하며 고민을 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환자들이 나가자 약국에는 혼자 남았다. 약사가 나를 불렀다.

"이 약 어디가 아플 때 먹어요?" 처방전을 내밀었다. "함부로 환자의 증상을 말해줄 수 없는데. 어떤 관계죠?" "여동생이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자고, 이상해요. 그런데 이 약을 먹더라고요. 어떤 약인지만 말해주세요.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데……." 어눌하게 말하는 나를 잠깐 바라보던 약사는 우울증 치료제라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면 가면성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해요. 웃고 있지만 속에서는 분노하고 있죠. 화가 날 땐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울증에 좋은 음식 많이 먹고요." 약사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미는 지금도 웃으면서 속에서는 울고 있을 것이다. 나미에게 오빠 같은 남자친구가 돼 주고 싶었다. 나는 약국을 나와 A로터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백화점 정문에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백화점이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 보았지만 기죽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EPIER 화장품 코너는 남성 구두 매장 옆에 있었다. 그녀는 아줌마 손등에 화장품을 발라주고 있었다. 여자는 손등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더니,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하며 옆 매장으로 옮겼다. 나미는 허리를 굽히고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 그녀는 화를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화를 터트려주고 싶었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 앞에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세일을 맞이해 남성 신상품도 많이 들어왔어요." 나는 화장품을 보는 척 하며 그녀의 눈동자를 살폈다. 웃고 있지만 공허했다. 칙칙한 피부를 밝게 하는 화장품을 추천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화이트닝 제품이라며 디톡스 화이트 옴므 세트를 꺼냈다. 가격이 십오만 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샘플을 발라주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향기 한 번 맡아보세요." 화장품 냄새보다 그녀의 향기가 더 좋았다.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었다. 가슴에 붙은 명찰에 정과장이라고 적혔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그녀가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참고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계산할게요." 나는 아버지의 카드를 내밀었다. 정과장이 "즐거운 쇼핑 하세요." 라고 말하며 옆 매장으로 옮겼다. 나는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보일러 시공을 하느라 얼굴이 많이 탔어요." 나미에게 말했다. "보일러 시공 하세요? 제가 손님께만 선크림 하나 몰래 넣어드릴게요. 자외선 차단 지수가 놓아요. 여쭤 볼 게 있는데 저희 집 보일러가 갑자기 안 되는데 왜 그럴까요?" 그녀는 주변 눈치를 보며 보일러 상담을 했다. 처음으로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그럴 때가 있어요. 전원 공급이 잠깐 차단되곤 하거든요. 본체 전원 껐다가 다시 켜면 작동 될 거예요." 나미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하며 웃었다. 웃음이 진심이길 간절히 바랐다. 화장품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며 스마트폰으로 가면성우울증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 의사들은 초콜릿과 바나나를 강력 추천했다. 세로토닉 성분이 있어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A로터리 선물 가게에서 여러 종류의 초콜릿을 사서 예쁘게 포장을 했다.

 

일요일이라 나는 안심하고 나미의 집에 갔다. 그녀는 지금 정신없이 손님을 만나며 억지로 웃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젯밤 어떻게 보냈을지 궁금해 얼른 녹화 장면을 보았다. 잠을 자기 직전 욕설을 내뱉는 것은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욕을 하다가 전화가 오자 반색을 하며 통화를 했다. "보일러 고장 나서 어떻게 고치나 걱정했어. 난 뭐든 안 되는 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되더라. 얼마나 기뻤는데." 나미가 경쾌하게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보았다. 밝은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택배회사에서 온 문자였다. 수취인이 없어서 물건을 집 앞에 놓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었고 몰래 선물을 보내줄 지인도 없었다. 잘못 온 문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가방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카메라를 뜯고 전선을 정리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훔쳐보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 연애는 이제 지겨웠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는데 초콜릿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집 앞에 두고 가면 누가 가져갈 수도 있고, 그녀가 발견한다면 뭔가를 의심할지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로 가방에 넣고 301호를 빠져나왔다. 애써 준비한 선물이었지만 전달하지 못해 허탈했고 용기가 없는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빌라 밖으로 나와 삼층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명 내게 온 물건이었다. 발신자는 GS25 편의점이었다. 상자를 뜯었더니 지난번에 응모한 추첨권이 당첨되었다는 안내문이 들어있었다. 내용물은 올리브유 세트였다. 식용유를 식탁 위에 놓고 상자를 버리려고 택배 운송장을 뜯는데 문자가 왔다.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GS25 더욱 사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발신자는 1544-12××' 라고 적혔다. "제가 더 감사하죠." 중얼거렸다. 나는 평생 당첨, 당선, 합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 년 동안에 처음 당첨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같은 날 추첨권을 응모했던 나미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 오늘 301호에 온 택배는 없었다. 당첨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나는 GS25에서 보낸 문자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러고는 상자에 붙은 운송장에 적힌 내 이름을 지우고 나미의 이름과 주소를 정확하게 적었다.

 

빌라 앞에서 301호를 올려다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쉬는 날이었지만 그녀는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것이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등산 조끼를 꺼내 걸치고 모자를 썼다. 오늘은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올라 301호 앞에 섰다. 쓸쓸하게 누워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고 마음이 심란했다.

벨을 눌렀지만 대꾸가 없었다. 301호 문 틈새에서 차가운 기운과 짙은 어둠이 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벨을 누르고는 '택배 왔습니다.' 크게 외쳤다. 복도를 타고 건물 전체로 퍼졌지만 정작 그녀는 조용했다. 나미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옆집에서 '사람 없나 봐요. 대신 맡아드릴게요.'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꼭 싸인을 받아야 해서.' 나는 마지막으로 벨을 눌렀다. 한참 지나자 마지못해 "집 앞에 두고 가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싸인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기쁨을 숨기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할 것이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베란다 쪽에서 보일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복도 불빛이 눈부신지 눈을 찌푸렸다. 모자챙으로 얼굴을 가렸더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섭섭했다. "죄송합니다. 얼른 나와야 하는데. 싸인 어디에 하면 되죠?"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싸인 안 하셔도 되는데 제가 깜빡했어요. 나미 씨 맞으시죠? 여기 물건입니다." 그녀에게 상자를 건네며 뒤돌아섰다. 계단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창문에 비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상자를 흔들어보더니 나를 불렀다. "저기요. 에피어 화장품 쓰세요?" 그녀에게서도 EPIER의 향기가 났다.

 

 

<당선소감>


문학 본질은 작품 통해 감동 주는 것

 

많이 부족한 작품이라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하게 보이려고,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설 습작을 많이 하지 못 했고, 인문학 공부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두렵습니다. 글을 너무 쉽게 쓰는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합니다.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고 정진하겠습니다. 전북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문학의 본질이 '감동을 주는 것!' 이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딱딱한 전공 서적을 읽고, 리포트를 쓰느라 문학과 가까이 할 시간이 없었는데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소설과 아동·청소년 문학을 꼼꼼하게 읽게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올해 유독 고민이 많아 삶이 고단하다고 느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에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감동의 힘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읽을수록 풍성해지는 작품을 보며 어떤 글이 좋은 작품인지 곰곰이 생각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까닭에 2011년은 제게 의미가 크고, 이번 당선은 새로운 시작이 될 겁니다.

소설가 최인석 선생님,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 선생님, 이남석 선생님 감사 드립니다. 늘 격려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특히 '런치 메이트' 수빈 누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사평>


미소가 번지는 새해 선물같은 소설

 

본심에 올라온 5편을 읽으면서 새삼 소설 속 개인사가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적절한 연결고리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결국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잣대임을 확인했다. '이야기'를 넘어 문학으로 이르는 길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쉽지 않지만.

'울려라 종소리'는 이야기에 급급했고 '컴백홈'은 자신의 이야기가 부족했다. 심리치료사인 화자가 지니고 있는 상황이 주변 인물들의 삽화에 묻혀버려 아쉬웠다.

'라일락 나무가 있다'는 도입부 문체부터 아주 명료하여서 기대를 가지고 읽었지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단순했다. 공감하고 싶었지만 공감할 수 없었다.

'깊은 숨'은 탄탄한 문체만으로 이미 시선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밀한 묘사들에 지나침이 없었고 때때로 깊은 성찰이 드러나는 문장도 꽤 있어서 아마도 당선작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대의 연애'가 나타났다. 정말이지 단숨에 읽었다. 소설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니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아니, 새해의 선물 같은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어서 기쁘다. 중앙지 신춘문예와 비교한다 해도 손색이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윤흥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