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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수(孤獨樹)

김태정

 

고해소에 가던 길이다. 한낮의 시간은 더디고 지루하게 흘러간다. 거리에는 깊은 밤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하다. 골목길에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고 죽어있다. 저 혼자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은 수습해야 할 육신을 남긴다. 생이 떠난 육신은 급속히 썩어 들어갈 뿐이다. 살고 죽는 것은 저다지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높은 언덕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언덕 위에는 뾰족한 지붕을 한 성당이 있다. 미사 시간이 다 돼가는 데도 누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고스란히 받아 온 성당은 낡았지만 아직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하얀 망토를 두른 성가대원들과 꽃은 사라진지 여러 해 된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십자가상은 없었다. 고장난 괘종시계만이 입구에 서있다.

고해소에 들어가 문을 닫자 부패한 냄새가 났다. 길거리에서 묻어 온 냄새였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 아내와 딸아이를 보았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빠가 어디에 숨었는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아?’

딸아이의 외침이 이명처럼 귀속을 울렸다. 날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죽은 까마귀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썩어가는 육신을 방치하는 짓도 죄일 것이다.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신부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해소를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꺼운 막이 쳐진 듯 대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집을 나온 지 이 주째다. 아니 삼 주째인지도 모르겠다. 날짜가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휴대폰은 이곳에 오기 전 쓰레기통에 버렸고, 시계는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동안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잤다. 낮과 밤이 몇 번 바뀌었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끝없이 찾아오는 피로감은 책을 읽는 행위처럼 여겨졌다. 그것도 중얼중얼 소리 내어 활자를 읽어대는 반복적인 행위였다. 마치 누워있는 내 머리맡에서 누군가 책을 읽어댐으로써 나를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그만 하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고 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을 꾸면서 흐느껴 울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성당 입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 동네뿐 아니라 옆옆 동네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방치된 땅은 잡초도 자라지 않아 죽은 숲처럼 거무튀튀했다. 곳곳에 삐죽 서있는 건물들은 언젠가 밑바닥부터 뿌리째흔들리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보도블록은 사방이 깨져있고, 가로등은 어느 것 하나 바싹 부서지지 않은 게 없었다. 군데군데 뒤틀리고 함몰된 포장도로를 걷다보면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발이 푹푹 꺼지는 착각에 몸이 자꾸 비틀거렸다.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서는 알맹이 빠진 조개껍질처럼 휑한 바람소리만 났다.

부수고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앞장서서 나서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부추기고 있다. 누군가는 나무를 뿌리째 뽑거나 산을 없애고. 누군가는 흙더미에 깔리거나 홍수에 떠내려간다. 발전하기 위해 개발은 불가피하다지만 그 뒤에는 실리를 따지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문명이 진보하는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이 따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일종의 설계 중인 것이다.

검은 빛깔을 띤 웅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언젠가 큰 불이 나서 건물 하나가 주저앉았다. 그곳에 물이 고였다. 사람들은 수도관이 터진 모양이라고 했고, 수도 관리국에서는 지하수가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웅덩이에서는 악취가 났다.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빠져죽었다거나 커다란 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 구청에서 사람들을 내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거라고 막걸리를 마시던 노인이 말했었다. 웅덩이가 생긴 후로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보도나 날아오는 경고장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웅덩이 앞에서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눈빛은 허공을 헤맸고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고분고분해졌다. 살다보면 누구나 웅덩이 하나쯤은 가지게 된다. 고인 물이 맑은지 탁한지 얕은지 깊은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쓰레기가 쌓인 골목길에 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문명의 이기를 모르는 그들은 행복한 것인가, 불행한 것인가. 까마귀의 날개가 죽음을 알리는 사자인양 유독 섬뜩하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패악을 부릴 것처럼 기세가 등등하다. 커다란 날개를 자꾸만 퍼덕이는 걸 보니 까마귀들은 잔뜩 흥분한 눈치였다. 물컹하고 불그스름한 덩어리를 콕콕 찍어대고 있었다. 그 중 몸집이 제일 큰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은 검은 강물처럼 새까맸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까마귀의 눈을 피해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도 고해를 하지 못한 사실을 떠올렸다.

일렬로 늘어서있는 단층 주택은 들쭉날쭉하다. 군데군데 부스러진 슬래브 지붕이 눈에 띄는가 하면, 쩍 갈라진 틈에 시멘트로 조악하게 덧칠한 담들이 많았다. 어떤 집은 빗물이 새는지 비닐과 담요로 지붕을 덮어놓기도 했다. 비닐이 사정없이 찢겨나갔는데도 그대로 놔두는 걸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흉가나 다름없는 집들이 꽤 되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마당이 있지만 나무 한두 그루 심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개라도 한 마리 키울 요량이라면 목줄을 바투 묶어놓아야 할 듯 싶었다.

어느 집에 아직도 사람이 사는 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노부부는 등화관제 훈련 할 때처럼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했고, 어떤 여자는 일부러 편지를 문 앞에 쌓아둔다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어느 한 사람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쓸모없다는 걸 사람들은 외면했다.

한동안 이곳 주민들은 꿈에 부풀었을 것이다. 리모델링 바람이 불면서 당연히 지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터였다. 현대식으로 지은 새집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앞뒤 가리지 않고 도장을 꾹꾹 찍어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주택지가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주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지도는 단순하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나마 이곳이 가장 늦게 개발된다는 말이 위안을 주었다. 공사 시 발생하는 미세먼지와 유독가스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될 터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집을 버리고 떠날 곳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제껏 나는 이런 곳을 염두에 두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넋두리마냥 몸뚱어리 하나 숨기고 싶은 장소를 말이다. 아내는 늘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어찌 보면 협박조로 들렸지만 나는 못들은 체 했다. 생각해보면 여기만큼 완벽하게 숨을 곳은 없을 듯하다. 이 동네로 들어올 때 부딪쳤던 사람들은 이삿짐업체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플라스틱 박스를 몇 개 씩 들고 부산히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흙탕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처럼 대기가 탁했다. 아직 공사는 시작되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먼지가 폭폭 날렸다.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마당을 서성였다. 한 마리 나방이 찢어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발밑의 흐릿한 그림자가 웅덩이처럼 새까맸다. 웅덩이는 주변 곳곳에 있었다. 웅덩이가 생기면 요령껏 피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 놓기도 했다. 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웅덩이를 보니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갈라진 담에 넝쿨이 질긴 손을 뻗쳐오르고 있었다. 저녁하늘엔 핏빛 같은 노을이 번져갔다. 노을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인생이란 그저 한 순간 반짝이는 빛인 것이다.

넝쿨마냥 담에 몸을 붙였다. 이대로 몇 날 며칠 낮밤을 보내면 몸에서 잎과 뿌리가 자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지낸다는 점에서 식물과 다르지 않았다. 나무의 이름은 고독수(孤獨樹)라고 하면 알맞겠다. 스르르 눈을 감는 순간 무슨 소리가 들린 듯했다. 어쩌면 옆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공기 속에 축축한 냉기가 묻어났다. 살며시 흙을 밟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옆집에서 누군가가 마당으로 내려선 것 같았다. 빨랫줄에 이불이라도 내걸고 툭툭 털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양손으로 벽을 집은 채 한쪽 귀를 갖다 댔다. 이상하게도 옆집이 신경 쓰였다.

옆집을 의식하게 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누가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불빛을 본 기억이 없는데다 낮에도 현관문이 열린 적이 없었다. 부엌 환기구창을 비롯한 모든 창문이 늘 닫혀있었고, 널어놓은 빨랫감을 보지 못했다. 노인들이 골목 안 두 번째 집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은밀한 비밀을 나누는 척 그들은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후로 흉가가 되었다고 했던가. 남편이 아내와 딸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도주한 사건을 아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언젠가 뉴스에서 들었던 내용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 유사한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 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버림받은 집들은 더럽고 털 빠진 유기견처럼 보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반쯤 열린 부엌 창가 앞에서 나는 막 끓인 물을 컵에 따르고 있었다. 옆집에서 들리는 무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컵을 놓쳤다. 양말을 신지 않은 발등으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고, 컵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누군가 이사를 왔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철거지역이었다. 곧 갈아엎을 집으로 누가 이사를 온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는 기척이 나는 듯했다. 어쩌면 나처럼 남의 집에 숨어든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썼다. 내가 잘못 들었는지도 몰랐다. 굶주린 쥐떼나 고양이가 낸 소리인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내다버린 유기견은 또 얼마나 많은가. 쏟은 물을 행주로 닦고, 깨진 컵 조각을 주웠다.

옆집에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은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 나는 좀 예민하게 굴었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고, 부엌 창가에 자주 서성댔다.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마당과 골목길 앞을 왔다갔다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옆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같았다. 골목길에서 옆집을 들여다보다가 길거리에 앉아있는 어떤 아이를 보았다. 여자아이가 입은 원피스는 먼지와 오물로 뒤범벅이 되어 몹시도 더러웠다. 버려진 아이가 틀림없었다. 곱슬곱슬한 머리는 풀어헤친 채였고, 한쪽 머리카락만 귀 뒤로 넘겼다.

잠시 잊고 지냈던 딸아이를 떠올렸다. 딸아이는 일곱 살이 되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에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고, 끔찍이도 집착이 강했다. 노란 병아리가 프린트된 잠옷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는데 좀체 벗으려고 하지 않아 빨 수도 없었다. 잠을 잘 때 몰래 벗기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눈을 뜨고 괴성을 질렀다. 똑같은 옷을 사왔지만 갈아입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옷을 입은 채로 아이를 목욕시켜야만 했다. 아내는 아이가 무섭고 징그럽다며 치를 떨었다. 목욕 후 내가 안아주려고 하자 딸아이는 매몰차게 손을 밀어내고 돌아섰다. 아내는 웅크리고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한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마다 유기한 사건이 보도되던 참이었다. 그 횟수가 자그마치 네 번이라고 했다. 취재기자는 여자가 아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애완동물을 쓰레기 버리듯 유기하던 사건이 보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인간은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다. 과거의 내가 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미래의 내가 버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내는 딸아이가 달라붙듯 매달리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그럴수록 딸아이는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부모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딸아이의 비명과 아내의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웃들에게 항의도 수차례 받았다. 결코 내가 꿈꾸던 가족은 아니었다. 아내는 자주 히스테릭하게 행동했다.

너무 시끄러워. 좀 조용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뒤 아내는 입을 다물고 물건을 집어 던졌다. 접시들은 일정한 소리를 지르며 깨졌고, 여러 개의 냄비도 마찬가지로 찌그러들었다. 그럴 때면 딸아이는 마치 정상적인 아이처럼 제 엄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내는 내 셔츠를 잡아 당겨 단추를 죄다 뜯어놓기도 했고, 신발장에서 모든 신발을 꺼내 창밖으로 던지기도 했다. 마치 일부러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한 채 주저앉은 아내는 난데없이 짐이 너무 많다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게 무슨 암시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아내의 말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는 모양이었다. 두껍고 곱게 뻗은 아이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얼굴은 신중하고 진지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길은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한 발을 내딛는다는 게 깨진 보도블록을 잘못 밟고 말았다. 시멘트 덩어리가 발끝에 채였고,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인기척에 놀란 아이는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나는 아이가 있던 자리로 갔다. 땅바닥엔 집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빼곡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두 그루의 나무 그림도 보였다. 아빠나무, 엄마나무라고 삐뚤빼뚤하게 써있었다. 아이가 사라진 골목길로 발걸음을 떼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집들은 하나같이 비어있는 듯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들어가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이가 왜 저런 그림을 그렸는지 의아했다. 아이가 혼자 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동안 이상하게 여겼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곳에 처음 와서 깊은 잠을 잘 때였다. 나는 온 몸이 타들어가듯 심한 갈증에 허덕였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손에 생수통을 쥐어주었다. 분명 살갗이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었다. 물을 달게 마신 뒤 나는 또 잠이 들었다. 그때는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빈 생수통이 옆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악몽을 꾸었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도 같았다. 아이가 내 눈을 피해 골목길을 돌아 나와 옆집으로 들어갔으리란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나는 옆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후로 바깥에서 무슨 소리만 나면 허겁지겁 뛰쳐나와 귀를 기울였다. 대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나 뭔가를 두들겨 부수는 소리였고, 까마귀들의 날갯짓 소리나 지나가는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였다. 급기야 없는 소리들도 머릿속에서 만들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아이의 비명 소리, 개들이 짖는 소리, 가야금인지 뿔피리인지 모를 소리, 끊어졌다 이어지는 음악소리.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톱을 물어뜯곤 했다. 벽에서 몸을 떼고 목을 가다듬었다.

혹시 댁에 아이가 있나요? 집 앞에서 아이를 봤거든요.”

내 목소리가 음산하게 갈라져 나왔다. 헛기침을 하고 여보세요를 서너 차례 불러보았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낮고 길게 울려왔다. 옆집 사람은 이미 집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빈 집에서 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눈 뜨니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두 그루 심은 나무 사이에 누웠다

온 몸을 감싸주는 부드러운 땅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미지근한 벽에 몸이 닿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귀를 틀어막은 것처럼 조용하고 먹먹했다. 그렇게 깜박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나는 누군가 옆집에서 나왔으리란 확신에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저만치 골목 끄트머리에서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들으면 개가 낑낑거리고 으르렁대는 것도 같았다.

조그만 손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사람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새까만 까마귀들이었다. 까마귀들이 모여 뭔가를 물어뜯고 헤집는 광경은 이 지역에서 종종 눈에 띄는 장면이었다. 까마귀 틈바구니에서 조그만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서너 마리의 커다란 까마귀와 아이가 뒤엉켜 있었다. 나는 대문 옆에 기대어있던 막대기를 들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까마귀들은 후루룩 날아갔다. 아이는 허깨비처럼 마른 몸뚱이를 일으키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였다. 하얀 원피스가 저번보다 더 더러워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던지자 담배가 간절히 생각났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이는 불그스름한 덩어리를 들고 있다 재빨리 등 뒤로 감추었다. 배가 몹시 고파 보였다. 나는 주머니 속을 뒤져보았다. 담배꽁초 하나가 손에 잡힐 뿐이었다.

네 집은 어디니?”

마음과는 달리 새된 목소리가 퉁명하게 튀어 나왔다. 아이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하자 아이는 순식간에 모퉁이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뒤를 쫓았지만 막다른 골목에는 쓰레기만 쌓여있었다. 꿈을 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지방이 빠진 두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제풀에 무릎이 꺾이면서 넘어질 뻔했다. 헛것을 보았던 걸까. 마치 신기루처럼 아이와 까마귀는 사라졌다. 아직도 귀가 먹먹했다. 양쪽 귀를 손가락으로 후볐다. 며칠 전부터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녀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사람 대신 처음 보는 쓰레기 뭉치들이 생겼다. 멀쩡해 보이는 컴퓨터나 세탁기가 버려져있기도 했고, 식탁 의자들이 얼키설키 뭉쳐있기도 했다. 찢어진 소파 위에는 구겨진 사진들도 보였다. 아이의 돌잔치 모습, 고궁 앞에서 찍은 부부, 수영장에서 찍은 가족사진,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와 동물원에서 포즈를 취한 아이사진도 있었다. 비록 끄트머리이긴 하나 엄연히 도시인데 신기했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고, 아이가 타던 자전거는 어디 있을까.

그날 나는 환승 지하철에서 푸시맨과 함께 튕겨져 나왔다. 지하철 문이 닫힐 때 누군가가 욕설을 뱉었다. 몸이 맞닿았던 여자가 심하게 얼굴을 찡그렸던 것도 기억난다. 연착이 된 지하철이 방금 떠난 터라 다음 열차는 십 분 후에 도착한다고 전광판 메시지가 떴다. 어떻게든 아등바등 간다 해도 지각은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해도 해도 업무는 터무니없이 많았고, 일은 결코 끝이란 게 없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치밀었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왔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거리는 한산했다. 등교나 출근시간이 지나서인지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아스팔트에 두 발을 딛고 있는데도 도무지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어딘지 어긋나고 불편했다. 어제 무엇을 했나 떠올려보았다. 또 그저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보았다. 그 그저께는 무엇을 했던가. 내 지루한 일상들이 폐지처럼 쌓여갔다.

길가에 젊은 남자 두 명이 하얀 조립식 탁자를 펼치고 있었다. 둘 다 짙은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어느 모로 보나 신입사원 같았다. 주위를 흘끔거리며 저희들끼리 툭툭 치고는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아름다운 변화, 리조트 형 Woo 아파트. 그들이 두른 띠에 써진 글귀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한 젊은 남자가 재빨리 팸플릿을 내밀었다. 그것은 아파트 분양 광고지였다. 당신의 변화가 행복을 드립니다. 변화와 행복 글자 위에 검은 방점이 찍혀있었다.

변화를 원하시면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꿔보세요. 우선 이 팸플릿부터 자세히 살펴보세요.”

젊은 남자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듯 말했다. 뒤에 서있던 직원이 젊은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젊은 남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팸플릿을 들고 역 앞 작은 공원으로 갔다. 자판기에서 빨간색 콜라 캔을 뽑았다. 수많은 기포가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콜라는 미지근했다. 팸플릿을 건넨 젊은 남자가 저만치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실직자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팸플릿을 꼼꼼히 읽었다. 소재지에는 아파트가 들어설 주소가 적혀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콜라 캔을 우그러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젊은 남자에게 팸플릿을 흔들어 보이며 택시를 탔다.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동네였다. 유독 골목이 많았고, 길도 좁았다. 도대체 어디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몇 노인들만 무리지어 앉아있는 게 눈에 띄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은 대부분 붉은 녹이 슬어있었다.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자꾸만 땀이 났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땀이었다. 흘린 땀만큼 목이 말랐다. 구멍가게에서 캔 맥주를 두 개 샀다. 가게는 허름했지만 맥주는 얼음처럼 차가워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가게 앞에 앉아있는 노인들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통에 마음 편히 맥주를 마실 수가 없었다. 막걸리를 두통 사서 노인들에게 잔을 돌렸다. 막걸리를 마신 노인들은 갑자기 수다스러워졌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노인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노인들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언제 개발이 될 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체모를 파리들이 꼬이는 게 가장 큰 문제라니까.”

빈 막걸리 통을 내려치며 한 노인이 말했다. 처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노인이었다. 나는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잠이 쏟아졌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 평소대로라면 커피를 마시면서 오전업무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을 시간이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몸이 적응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꼬불꼬불한 골목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보이는 집마다 무작정 대문을 흔들었다. 아침부터 마신 맥주 탓이었다. 한 집의 대문이 싱겁게도 금방 열렸다.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내가 전신을 덮쳤다. 거무스름한 고요가 어떤 음파가 되어 들리는 착각에 빠졌다. 지하실까지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리고 간 낡은 책장과 싱크대는 텅 비어있었다. 팸플릿의 아파트 구조와 이 집을 비교해보았다. 뒷방이 있는 곳에 주방기구가 들어서고, 샤워부스만 있는 욕실이 두 군데 생긴다. 요즘 주방은 개방형으로 식탁은 거실과 가까워질 것이다. 베란다를 확장한 거실엔 햇빛이 가득해서 아이가 하루 종일 놀기에 좋을 것이다. 아내는 아이를 바라보며 조리대에서 식사를 준비할 수도 있다.

거실 한 복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한없이 조용하고 또 조용했다. 눈을 감으면 스르르 잠이 들 것 같았다. 빈 집 특유의 서늘한 냉기와 곰팡내가 달콤한 유혹처럼 나를 잡아끌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고독이 갈증처럼 입 안을 바짝바짝 마르게 했다. 충동은 소심하게도 아주 작은 곳에서 출발한다. 나는 방 안쪽에 벌레처럼 몸을 말고 누웠다.

한 동안 자고나서 가보니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다. 비어있는 막걸리 통과 찌그러진 맥주 캔만 뒹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실종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 집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이들은 또 다른 빈집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곳에서 무슨 생활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배가 고프면 이상하게 아내가 생각났다. 저녁 한 끼 얼굴 맞대고 먹어본 기억도 별로 없는 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최근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나를 피했다. 등을 보인 채 소리치거나 비스듬히 옆을 보고 말했다. 모든 용건은 문자로 알렸다. 어떨 때는 내가 집안에 있는데도 문자를 보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딸아이를 쳐다보았다. 딸아이가 내 발등을 뚫어지게 보더니 동그란 과자를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딸아이가 문자를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나는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아이가 보낼 내용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증오에 찬 불만과 욕설을 보내더니 급기야 엉뚱한 문자들이 찍혔다. 도대체가 무슨 뜻인지 앞뒤도 없고 맥락도 없었다.

멀리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쇠공으로 지붕과 외벽을 부스러트리는 모양이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뼛조각 사이사이로 무엇인가 박히는 듯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낡고 오래된 것을 무너뜨리는 속도는 한순간이다. 머지않아 이곳도 바스라질 것이었다. 어제 새벽에도 집이 무너지는 꿈에 소스라쳐 눈을 떴다.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고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기와 가스가 중단 된 부엌은 더 이상 부엌이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밥이 끓는 냄새가 났다. 이젠 후각마저 환각인가 싶었다. 밥 냄새는 집요하고 끈덕지게 났다. 배가 고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헌책더미를 담 앞으로 끌고 갔다. 책을 딛고 담을 넘었다. 밥이 있다면 좀 나누어 달라고 할 참이었다. 현관문을 세게 두드렸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리니 문이 열렸다. 오랜 세월 묶어두었던 봉인이 터지듯 퀴퀴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크고 작은 박스들과 검은 봉지 하얀 봉지들이 촘촘히 쌓여있어 현관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마루 한구석에는 수건이 빼곡하게 널린 빨래 건조대가 눈에 띄었다. 누런 얼룩이 생긴 수건들은 바짝 말라있었다. 방마다 옷장문은 활짝 열렸고, 이불과 옷가지들이 어지러이 널린 채였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도 곳곳에서 풍겼다. 이런 곳에 누군가 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어쩌면 소리의 근원지는 쓰레기와 악취였는지도 모르겠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아 곪아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 마당으로 내려서니 달짝지근한 밥 냄새가 났다.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까르륵 아이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김치찌개 냄새도 나는 듯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 어느 집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비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은 어두웠다. 천둥소리인지 쇠공 내리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아이의 울음소리인지 계집아이의 웃음소리인지 헷갈리는 소리도 계속해서 났다. 옆집을 나와 다른 집 대문을 두드렸다. 대문은 꼭 잠겨있었다. 집으로 뛰어가 헌책더미를 끌고 왔다. 이제 담을 넘는 것은 쉬웠다. 또 빈집이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와 밥 짓는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책더미를 잡아 끌다말고 잠시 멈췄다. 등줄기와 관자놀이에서 땀이 났다. 몸에서 오래 묵은 장 냄새가 훅 끼쳤다. 무릎을 양손으로 집고 헉헉 숨을 골랐다. 집들은 모조리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다못해 유기견이나 도둑고양이라도 사는 집이 있을 것이었다. 빈 집을 둘러볼 때마다 낯이 익은 마루가 나오고 방이 나오고 부엌이 나왔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오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오고 있었다. 집들은 비어있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비어있었다. 살림살이가 그냥 있는 집도 있었고, 말끔히 치워진 집도 있었다. 칙칙한 올챙이 무늬의 커튼 달린 집이 나왔고, 동굴처럼 음습하고 어두운 집도 나왔다. 성당의 고해소마냥 단정하고 작은 집에서는 무릎을 꿇기도 했다. 울먹이며 죄를 줄줄이 나열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동네 한 바퀴를 빙 돌아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왔다. 까마귀의 새까만 날개 같은 어둠이 온 동네를 감싼 후였다. 소리 없이 내리는 안개비의 위력은 얕잡을 게 아니었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발자국도 더는 뗄 기력이 없었다. 온 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욱신 쑤셨다. 코를 킁킁거려봤지만 김치찌개나 밥 냄새는커녕 지독한 악취만 났다. 그새 깜깜한 밤이 된 모양이었다. 달빛마저 없으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냉기가 도는 마룻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녹물처럼 흘러내렸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창밖이 환했다. 누워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메마른 모래 알갱이가 만져졌다. 기침을 콜록거리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안개비는 그대로 안개가 되어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안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안개의 침묵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두 눈이 감긴 까마귀의 날개마저 안개에 덮여 새하얗게 빛났다. 어쩌면 이곳은 거대한 안개의 도시가 되어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나 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에 휩쓸려 간 바다 속 유령도시처럼 눈앞에서 없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이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한 남자의 사진과 주인을 잃어버린 운동화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엔가 파묻힐 것이다.

나는 빈 집마다 들어가 마당을 살펴보았다. 적당한 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래저래 나무도 버려진 신세라 말라 죽은 것이 많았다. 마침 간밤에 안개비라도 내려서 땅은 부드러웠다. 찢어진 비닐로 지붕을 덮은 집에 의외로 아담한 나무가 있었다. 어른 키만 한 높이에다 층층이 뻗은 가지에는 동그랗고 도톰한 입술 같은 나뭇잎이 적당하게 붙어있었다. 나는 나무를 와락 끌어안았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마당 한구석에 있던 빗자루로 땅을 팠다. 나무를 옮겨와 마당에 뉘여 놓았더니 이마에 땀이 솟았다.

어린아이 키만한 높이의 나무를 구하기는 더 어려웠다. 안개 속을 더듬더듬 가다보니 가파른 언덕을 지나 성당까지 올라갔다. 나는 성당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바다 속처럼 뿌연 물입자만이 반짝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웅덩이 같기도 했고, 아무도 살지 않는 하나의 빈집 같기도 했다. 안개에 가려진 성당은 전설 속에 나오는 폐허의 성처럼 보였다. 성모상이 있던 화단에 자그마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촘촘히 자란 길쭉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향해 바짝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나는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나무를 끄집어냈다.

나무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안개는 좀 전보다 더 짙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찾지 못할까봐 겁이 났다. 한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앞의 길이 조금씩 보였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두 그루의 나무를 마당에 심었다. 키 큰 나무는 아내나무이고 작은 나무는 딸아이나무였다. 아껴두었던 식수를 두 나무에 나눠서 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아내나무와 딸아이나무 사이에 몸을 뉘였다. 땅과 안개는 부드럽고 촉촉하게 내 몸을 감싸주었다.

 

 

<당선소감>


외로운 나무처럼, 고독은 삶과 글쓰기의 힘

 

허리를 곧추세우고 콸콸 흘러가는 강물을 봅니다. 검은 물속에 둥둥 떠가는 저 운동화는 누구의 역사일지 생각합니다. 이미 저만치 흘러갔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강은 제게 말합니다. 강물 속의 돌멩이가 목구멍을 막은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한없이 부서지고 오그라든 날개였습니다. 이제 고개를 들고 넓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겠습니다. 눈 쌓인 들판에 홀로 서있는 나무.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달라붙은 얼음알갱이들. 혹독한 겨울은 끝없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외로운 나무처럼 살아온 듯합니다. 어쩌면 평생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소설 고독수(孤獨樹)’고독이 미끼라는 다섯 글자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제게 있어 고독은 글쓰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동국대 홍기삼·장영우·황종연·박성원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변변치 않은 졸작을 뽑아주신 소설가 성석제 선생님과 하성란 선생님, 그리고 영남일보에도 허리 숙여 깊이 감사합니다.

저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인간 내면 추적해가는 작가적 의지 돋보여

 

본심작 모두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소재도 다양해서 십인십색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세상을 엿보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암울한 이미지들이 독서 후에도 길게 남았다. 작가 개인의 성향일 수도 있겠으나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 작가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우리의 삶을 잠식한 것은 무엇일까, 오래 고민하게 했다.

황사는 애도의 자리에서 곡을 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녀 또한 유원지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런 직업이 있을까라는 의문은 잠시, 작품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무연고에 병든 남편의 애인을 생판 남인 여자가 데리고 올 수 있었다는 설정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다른 매력들을 뛰어넘지 못했다. ‘은 여든둘, 여든셋인 노인들의 사랑과 결혼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사랑을 관찰하는 것은 이혼하고 다시 할머니 곁으로 돌아온 손녀다. 할머니의 사랑을 통해 손녀가 떠올리는 것은 두고 온 아이와 헤어진 부모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소설 얼개를 위한 부자연스러운 설정이라는 생각과 문장이 다소 평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토요일의 여자들은 이제는 특이하달 수 없는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거기에 대리모까지 다소 무거운 주제가 역시 무겁게 흘러간다. 트랜스젠더인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를 바라는 남자가 대리모로 여자를 구하고, 대리모와 아내인 무용수 디타와의 교감 역시 별 무리가 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말은 미리 준비해둔 파국처럼 과장스럽다. 이제 이런 소재의 소설도 좀더 담담하게 쓰이면 어떨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줄넘기고독수(孤獨樹)’이다. ‘줄넘기는 실연의 상처를 가진 한 젊은이가 밤의 공원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줄넘기를 하는 노인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우연히 줄넘기를 하면서 조금씩 이별도 받아들이고 타인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경쾌한 줄넘기라는 운동을 고독한 운동으로 이미지화한 것이 신선했다. 군데군데 깊은 사유와 위트가 드러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작가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하지만 무심함을 의도하고 쓰였다고 해도 반복되는 작가 특유의 대화체 처리는 조금 거슬렸다. 이 작품에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는 느낌이 들어 두고두고 아쉬웠다.

고독수는 가출해서 재건축 폐허 현장 속으로 숨어든 한 가장의 이야기다. 정확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지만 그에게는 돌아가봐야 반겨줄 가족이 더 이상 없다. 한 개인에게 닥친 이런 끔찍한 상황과 황폐해진 내면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까마귀가 남은 흉흉한 재건축 현장이 여실히 드러내준다. 살풍경 속에 나무 두 그루를 심는 장면에서 희망이 읽힌다. 비슷하게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었지만 한 사내의 뒤를 끝까지 쫓는 그 핍진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 작품만 뽑아야 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오랜 상의 끝에 고독수를 당선작으로 골랐다. 작품 속에서 그 어느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제 보폭으로 열심히 걷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 여정에서 본 많은 풍경들을 앞으로도 많이 전해주길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다음을 기약하게 된 분들에게는 정진을 바란다. 몇 날 열독의 시간을 주셨으니 여러분 모두 이미 훌륭한 소설가라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다.

심사위원 : 성석제·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