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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우

 

여기가 뒷골목 여인숙이야? 명색이 A급 모텔인데 이게 뭐냐고. 빠지고 차고 시원한 맛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나 참.”

담배 연기를 내뿜고 난 사장이 또 다시 사설을 늘어놓는다. 다 아는 내용이다. 요컨대 빈 객실이 너무 많다는 말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이럴 때 사장의 카리스마는 숨소리마저 멎게 만든다. 객실 담당인 황과 오, 그리고 위엔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도 적당히 고개를 숙인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실쭉거린다. 웬일로 사장이 뜸을 들인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들고 사장의 눈길을 쫓는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위엔의 가슴. 사장의 눈길이 그를 향한다. 그는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숙인다. 사장이 헛기침을 한다. 첫째도 서비스, 둘째도 서비스, 오직 서비스만이 살길이다 이거야. 알았어요들? 그 말로 아퀴를 지은 사장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선다. 현관문을 거칠게 밀고 나간 사장의 뒷모습이 반투명 유리에 어룽거린다. 지들끼리 하는 서비스도 넘칠 판에 또 무슨 서비스. 황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이죽거린다. 프런트를 담당하고 있는 박 마담이 피식 웃는다. 나머지 직원들도 킥킥거린다. 그는 웃지 않는다. 웃을 일이 아니다. 할리데이비슨. 크롬 도금으로 차갑게 빛나는 녀석의 핸들이 떠오른다. 마치 활강하는 독수리의 날개를 닮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본다. 핸들을 받치고 있는 서스펜션의 미끈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눈을 감는다. 날렵하게 시트에 오른 뒤 번개 문양이 새겨진 헬멧을 쓴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스로틀그립을 당긴다.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까라지던 마음이 곧추선다. 요컨대 내 사업이 모텔의 손익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장은 모르겠지만 실상 이곳은 그의 사업장이기도 하다. 그는 뒷주머니에 장갑을 찔러 넣는다. 순간 옆구리에 저릿한 통증이 온다. , 하는 소리에 위엔이 돌아본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지나친다. 그녀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자재 창고에 붙어 있는 컨테이너 막사로 향한다.

그는 문을 잠근 뒤 옆구리에 찜질파스를 붙인다. 일삼아 모니터를 켠다. 재활용품 수거 차량이 오려면 30분은 더 있어야 한다. 빈 침대가 뜬다. 길 건너편 언덕배기에 새로 들어선 모텔이 생각난다. 사장의 부루퉁한 얼굴이 겹쳐진다. 문득 이 모든 게 거미의 생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은밀히 그물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내친김에 네 개의 방을 죽 훑어본다. 모두 인테리어에 각별히 신경을 쓴 특실이다. 방마다 발신기와 2밀리미터 크기의 핀홀렌즈를 끼운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뜻밖에 여자의 모습이 잡힌다. 408호실이다. 여자는 쿨렁거리는 물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선다. 미스 김이다. 길 건너 <뮤즈 살롱>에서 일하는 그녀는 한 달에 한두 번 호출된다. 미스 김과의 약속을 잊었는지 사장은 종내 나타나지 않는다. 미스 김은 대상이 아니다. 파트너가 사장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테크닉이 문제다. 거의 젬병이라고 봐야 한다. 그는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자신의 성기를 지그시 눌러 본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그는 모니터를 끄고 CD카세트의 스위치를 누른다. 구구궁. 기다렸다는 듯 둔중한 배기음이 고막을 울린다. 애앵거리며 촐싹대는 스쿠터와는 벌써 급수가 다르다. 특이하게도 모터사이클의 엔진음과 배기음을 전주에 깐 곡이다. 90년대 중반 미국의 각종 앨범 차트를 석권했다는 곡인데 글쎄, 다른 건 몰라도 헤비메탈 특유의 금속성 사운드와 샤우트 창법 그리고 오토바이의 굉음이 근사하게 어우러진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간이침대에 드러눕는다. 요란한 폭음이 그의 몸을 휘감는다. 독수리의 날개처럼 유연하게 도로를 미끄러져 가던 그 밤이 떠오른다. 그왕그왕, 다소 신경질적으로 스로틀을 당기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혼다의 신제품이었다. 머플러가 45도 각도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시트를 쳐올려 가속이 붙을수록 상체가 가라앉는, 주로 십대들이 선호하는 모델이었다. 바퀴살에 장착한 할로겐램프에서 발산되는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헤이 형씨. 녀석은 주먹으로 자신의 주홍색 헬멧을 툭툭 치며 쭉 뻗은 전방의 도로를 가리켰다. 그냥 웃고 지나쳤어야 했다. 구멍 뚫린 머플러가 내지르는 굉음에 덩달아 흥분했던 것일까. 녀석 또래 몇몇이 좌우 측면으로 붙었다. 보란 듯이 앞바퀴를 들고 주행하는 아이도 있었다. 빠라빠라바. 동시다발로 이어지는 에어혼 소리가 귓구멍을 들쑤셨다. 임마, 넌 삼촌도 없냐. 거칠게 응수해 보았지만 4기통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음에 이내 묻히고 말았다. 스로틀그립을 거칠게 당겼다. 75, 90, 105계기판의 바늘이 춤을 추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카세트의 스위치를 끈다. 거짓말처럼 고요해진다. 심호흡을 한 뒤 방 안을 둘러본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초라한 방이지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그만의 공간이다.

선인장은 토막 난 상태에서도 살아난다고 했다.

영혼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든다.

끝내 새살이 돋지 못하는 상처도 있는 법이다.

생활정보지의 구인란에서 허드렛일을 할 남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낙원 모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기억의 창고에서 풀썩, 먼지가 일었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가 영도하는 지상 낙원. 칠판에 적힌 그 말을 누런 갱지에 옮겨 쓰던 코흘리개의 모습이 희부연 시간을 헤치며 피어올랐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숙소가 제공된다는 사실에 구미가 동했다. 삼시 세끼와 잠자리만 있으면 됩니다. 보수가 박하다는 뜻을 비치는 사장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추레한 몰골을 한 선인장이 눈에 들어온다. 귀면각이라고 했던가. 얼마 전 쓰레기통 앞에 버려져 있는 걸 들고 와 구석에 놓아두었다. 선인장은 주둥이 부위가 형편없이 떨어져 나간 토분에 심겨 있는데 여기저기 거무스름하게 파인 자국이 있다. 선인장은 그러나 발아점만 있으면 토막 난 상태에서도 살아난다고 했다. 영혼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든다. 때로 더디게 회복되는 아니, 끝내 새살이 돋지 못하는 상처도 있는 법이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검은 동공이 그려진다. 서서히 커지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눈. 병목 현상이 심한 도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하는 자동차 행렬. 어찌할 바를 몰라 입속에 갇히거나 눈빛으로 번질거리는 말들. 오마니. 느닷없이 그 말이 새어 나온다. 찬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완벽하게 남쪽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 모양이다. 그는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서서히 어둠이 번지고 있다. 그때 눈에 익은 갤로퍼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차에서 내린 남녀는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모텔로 들어간다. 눈에 익은 모습이다. 그제야 밖으로 나간 그는 번호판 가리개를 세운 뒤 6층을 올려다본다. 잠시 후 609호실에 불이 켜진다. 늘 같은 방을 찾는 작자다. 가리개 뒤의 번호판을 본다. 번호를 더듬던 그의 시선이 27에 머문다. 숫자를 되뇌어 본다.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침부터 심사가 틀어져 있던 새엄마는 사내가 오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탁자를 훔쳤다. 그리곤 소년을 돌아보며 턱짓을 했다. 밖에 나갔다 오라는 신호였다. 아버지는 새엄마가 무섭다고 했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뒤를 흘금거리며 동백주점으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엄마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곳이었다. 소년이 운동화 뒤축으로 바닥을 긁고 있자 안줏거리를 다듬고 있던 노파가 구석방을 가리켰다. 소년의 아버지는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술꾼들이 오기

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 너 몇 살이니? 여자가 물었지만 소년은 입을 떼지 않았다. 여자는 소년을 흘깃 쳐다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여자는 입술연지를 바르고 있었다. 여자의 입술이 해당화처럼 발그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당장은 깨우기 힘들걸. 여자는 화장지를 입에 물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답답하다는 말을 노래 삼아 글쎄 소주를 네 병이나 비웠단다. 여자가 화장지를 내밀며 말했다. 새엄마의 주점에서는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던 아버지였다. 여자가 어떠니, 하며 턱으로 화장지를 가리켰다. 꽃잎 같은 핏빛 입술이 선연히 찍혀 있었다.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 그럼 나는 몇 살로 보이니? 그래도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스물일곱이란다. 어떠니, 네 아버지한테는 과분한 애인 아니니? 애인이라는 말쯤은 알아듣는 나이였다. 아줌마는 갈보야. 기철이 형이 그랬어. 여자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이번 웃음은 좀 달랐다. 새엄마가 숫돌에 식칼을 갈 때의 느낌, 그런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이렇게 맹랑한 도련님을 봤나. 그래, 틀린 말은 아냐. 하지만 얘야, 갈보 등쳐먹는 네 엄마보다는 낫단다. 어디 그뿐이니, 여자는 한마디 더 하려다 에이 관두자, 하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손질하면서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농담이다 농담. 누가 니네 아버지 같은 주정뱅이를 애인으로 삼겠니. 여자는 얼굴에 분을 바르면서도 입을 달싹였다. 젊기를 하나, 돈이 많기를 하나, 그렇다고 밤일을 잘하나, 니네 엄마도 참 무슨 생각으로. 여자의 뽀얀 목덜미가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씨팔, 그 여자는 친엄마가 아니란 말야. 소년은 그 말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럴 때면 괜히 오줌이 마려웠다. 오줌이 마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를 마담이 부른다.

 

이봐요 미스터 손, 301, 505호 욕실 파이프 막혔대요. 사장님 오시기 전에 뚫어놔요.”

고압적인 목소리다. 아 예. 대답을 해 놓고 그는 미간을 찌푸린다. 마담을 볼 때마다 새엄마가 떠오른다. 아버지에게서 알겨낸 정착금으로 주점을 연 새엄마는 색시들을 상대로 일수놀이를 했다. 여자들은 새엄마 앞에선 새살거리다가도 돌아서면 입을 비쭉거렸다. 한솥밥 먹은 년이 더 지독해요. 새엄마를 악바리라고 부르는 여자도 있었고 각다귀라고 부르는 여자도 있었다. 그는 공구함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5층에서 내린 뒤 계단을 오른다. 생각보다 공구함이 무겁다. 주위를 살피다 609호실 방문에 귀를 댄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가 고막을 간질인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때 인기척이 들린다. 그는 잽싸게 문에서 몸을 뗀다. 따이 사오. 타월을 한아름 안은 위엔이 의혹에 찬 얼굴로 바라본다. 빠끔히 열린 607호실 앞이다. , 싸우는 소리가 난 것 같아서. 그는 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아래층으로 향한다. 이봐 위엔, 빨랑 오지 않고 뭐해. 황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따이 사오? 회식이 있던 날 수월찮이 들었던 말이다. 따져 묻는 말일 터이다.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자리 운운했지만 실상은 사장의 카리스마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까지 훈시를 늘어놓는 사장을 보며 그는 잔소리도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은 무서웠다. 소년은 틈만 나면 문틈으로 방 안을 엿보았다. 새엄마와 사내는 어둑한 방 안에서 칡덩굴처럼 엉키곤 했다. 그는 머릿속의 그림을 지우기 위해 거푸 술잔을 비웠다. 고기 냄새가 풍기고 술잔이 돌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위엔의 체구는 생각보다 작았다. 위엔 역시 이곳에서 겉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왜 그러고 있수? 쌈을 싸다 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가 생각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입을 뗐다. 엄마가 생각납니다. 바로잡아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시장에서앉아서팝니다.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로이꾸온입니다. 삶은 새우, 돼지고기, 부추라이스페이퍼에 음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쌈을 하고 먹습니다. 응온 람(맛있어요)! 그 말을 감탄사처럼 내뱉던 그녀가 손으로 쌈을 싸서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물컹 밟히는 게 있다. 묶지도 않고 버린 피임기구이다. 욕지기가 치민다. 샤워기로 슬리퍼를 씻는다. 욕실만 그런 게 아니다. 방도 엉망이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맥주병이며 오징어다리며 물에 젖어 떡이 된 휴지며 엎어진 재떨이며 말 그대로 난장판이다. 휴지통에 오줌이나 안 쌌으면 다행이다. 수도파이프에서 한 움큼의 머리칼과 길다란 고무밴드를 끄집어내고서야 파이프가 뚫렸다. 트래펑을 양껏 붓고 난 뒤 허리를 편다. 옆구리가 불에 덴 듯 뜨끔하다. 일이 좀 과도하다 싶으면 이 모양이다.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천만다행입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응급실로 실려 간 그는 두 시간의 수술 끝에 회복실로 옮겨졌다. 정신이 들자 사고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보같이 코너링에서 브레이크를 잡다니. 어금니를 깨물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수술을 맡았던 의사는 마치 시혜를 베푸는 왕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다행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성기능에 다소 문제가 있겠지만 대신 목숨을 구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었다. 그 말은 보호자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따금 병상을 들르던 그녀는 퇴원 날짜가 잡히자 기다렸다는 듯 발길을 끊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다 말고 시계를 본다. 얼추 40분이 흘렀다. 대충 손을 씻은 다음 방을 나선다.

방에 들어서자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위엔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다. 그도 놀란다. 문이열려입니다. 청소를주면 싶어서. 서툰 한국어로 변명을 하며 쓰레받기를 들어 보인다. 그는 문을 잠그지도, 수신기를 치우지도 않고 나간 자신에게 화가 난다. 누가 청소해 달랬어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밖으로 몰아낸다. 못 생긴, 빼빼 마른 몸이술이 취해서, 내가, 많이싫습니까? 그렇습니까? 시선을 피하는 그에게 위엔은 따지듯 물었었다. 회식이 끝나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숙소까지 데려다 준 날이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 모니터 앞에 앉는다. 괜찮을 거라고 애써 마음을 눙친다. 609호실이 뜬다. 아무래도 한발 늦은 듯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간헐적으로 영상이 찌그러진다. 잡음도 심하다. 동영상은 물론 오디오까지 완벽하게 재현하죠. 한마디로 끝내주는 물건임다. 판매상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평소 두세 가지 체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던 커플이다. 여자가 머리를 타래 지어 핀으로 고정시킨 뒤 욕실로 들어간다. 바지를 꿰입은 사내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꾹꾹 누르고 있다. 눈썹 위에서 뺨까지 제법 길게 잡힌 흉터에다 날카로운 눈매까지, 한눈에도 험악한 인상이다. 욕실에서 나온 여자가 남자 등에 엎드리며 콧소리를 낸다. 오늘은 그만. 낼 모레 한 번 더 오자구. 사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말을 잇는다. 그날도 609호실이 좋겠군. 여기에선 강 건너편까지도 볼 수 있지. 전망이 끝내준단 말야. 사내는 609호실을 거듭 강조하며 연기를 내뿜는다. 쏘는 듯한 눈빛. 그는 시선을 돌린다. 여자가 사내의 등을 쓰다듬으며 뭐라고 말한다. 잡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다. 사내의 등에 새겨진 문신을 본다. 칼이다. 해골을 가운데 두고 교차한 칼. 다시 영상이 찌그러진다. 칼이 어긋매끼로 엮은 댓개비처럼 층이 진다. 한 손으로 여자의 볼을 어루만지던 사내가 방금 비벼 끈 꽁초를 아무렇게나 던진다. 재떨이가 코앞에 있어도 늘 그런 식이다. 썩을 놈들. 객실 담당 황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모니터를 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는 두통을 잠재우기 위해 캔맥주를 딴다. 위엔이 방문 앞에 두고 간 것이다. 그녀는 그에 대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정한 거리 이상은 허용할 수 없다. 개인파산 선고를 받은 건 사소한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리모컨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켠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건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겹도록 본 장면이다. 카퍼레이드를 향해 연도의 주민들이 붉은 꽃을 흔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강제 송환된 엄마와 잘 연결되지 않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번번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옥상에 올라간다. 난간에 기대어 천천히 맥주를 들이켠다. 저 아래 고즈넉이 흐르는 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근사한 정경이다. 위엔이 말했던 강 이름이 입안에서 뱅뱅 돈다. 그래, 메콩강이라고 했다. 회식 때 위엔이 부른 노랫말에도 그 이름이 여러 번 나왔었다. 메콩강을 끼고 있는 빈롱이 고향이라고 했다. 호치민시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는 곳. 엄마는 음메콩강을 올라가 빈호아후크 촌과수원 거기서 음파파야를 땄습니다. 그리고 음쿠롱 호텔 가까운시장 음누크맘에 찍어 먹는 튀김에 음고이꾸온도 팔았습니다. 가난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러니까그래요. 행복했습니다. 행복을 말하며 눈빛을 빛내던 위엔의 모습이 떠오른다. 행복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 남자에게 시집왔다는 그녀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중개업소에서 잡화점 사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실상 조그만 철물점을 가진 중년이었다고 했다. 위엔은 그러니까 철물점 주인의 철권을 견디다 못해 도망 나온 거였다. 그는 다 마신 캔을 찌그려 등 뒤로 던진다. 빈속에 마셔서인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는 들판에 눈길을 던진 채 행복이란 말을 곱씹는다. 어쩐지 진창길을 걷는 기분이다. 그는 난간에 이마를 댄다. 차가운 기운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진다. 중국 공안원에게 허리춤을 잡힌 채 버둥거리는 여자가 보인다. , 오마니. 담장에 한쪽 다리를 걸친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울상을 짓는다. 여자의 두 눈이 이글거린다. 그예 소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소년의 종아리를 잡은 여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니, 당기는 힘에서 떠미는 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날래 가라우. 여자의 눈빛이 섬광처럼 터지는 순간 소년의 몸은 대사관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여자의 눈빛은 화인(火印)처럼 남는다.

 

시트가 담긴 통을 한쪽으로 밀쳐놓고 6층으로 향한다. 불그스름한 조명이 카펫을 적시고 있다. 쥐죽은 듯 괴괴하다. 딱히 시선을 둘 곳 없는 이 같은 복도에서 쌍쌍이 걸어가다 맞닥뜨리면 꽤나 쑥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혹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운을 떼는 그에게 되레 짱짱하게 나오던 그녀가 떠오른다.

그는 문을 잠그고 텔레비전 앞으로 바싹 다가간다. 그리고 심벌마크에서 가로 세로 1.5센티미터 가량의 조각을 떼 낸다. 예리한 절삭기로 작업한 것이다. 구멍 속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마이크가 내장된 초소형 무선카메라다. 렌즈의 지름이 2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보기엔 전혀 이상이 없다. 그래도 AS를 받는 게 낫겠다 싶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조각을 다시 끼워 넣는다. 감쪽같다. 그는 방을 나오다 말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웃음이 나온다. 화재감지기 구멍에 면봉이 꽂혀 있다. 몰카인 줄 알았나 보다.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위를 살피는 치들이 있다. 그게 다 인터넷 영향이다. 깜냥이 제법이지만 그래 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육안으로 봐선 코앞에 두고도 모를 만치 위장술이 발달됐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문을 닫고 나온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벨이 울린다. 아 네. 짧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끈다.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온다. 드라마를 보고 있던 박마담이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샤워기헤드를 몇 개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담은 더 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며 시뜻한 표정을 짓는다. 한때 호스티스를 서른 명은 좋이 거느린 적도 있다는 마담이다. 그래서인지 모텔 프런트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지만 관록이랄까 서슬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자 마담은 입을 다물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마담의 축 처진 가슴을 일별하곤 얼른 밖으로 나온다.

그는 50스쿠터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간다. 창피하지만 돈을 모을 때까진 참아야 한다. 할리데이비슨, 그것도 원하는 모델을 사기 위해선 최소한 이천만원이 필요하다. 카드를 가질 수 없는 그로서는 오롯이 현금으로 채워야 한다. 왜 굳이 그 회사, 그 모델을 원하는가, 자문해 보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 본 한 편의 영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장발의 사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으로 난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이었다. 전신주만한 선인장들을 휙휙 제치며 아스라한 지평선까지 소실점이 되도록 질주하던, 꽉 막힌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주던 그것. 같이 간 기철이 형을 통해 녀석의 이름이 할리데이비슨이란 것을 알았다. 아버지 시신이 발견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내가 안방에서 밥상을 받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그는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둔 지폐 뭉치를 떠올린다. 부족한 액수를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진다. 여기저기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초고속 인터넷 설치, 스팀사우나 전동침대 월풀욕조 완비, 특실은 52인치 LCD 홈시어터 설치 등 문구도 가지각색이다. 아예 침대와 욕조 따위의 시설물들을 브로마이드로 현상해 걸어둔 곳도 있다. 다들 색다른 미끼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다. 2년 전만 해도 낙원모텔을 포함해 세 개에 불과하던 모텔이 어느새 스무 개에 육박하고 있다. 사장의 지청구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사내가 타고 온 것은 250, 체급부터가 다르다. 사내와 흥정하는 것도 잊은 채 그는 사내의 오토바이를 흘금거린다. 별 문양이 그려진 붉은 색 카울을 씌운 데다 구멍 뚫린 머플러에 오솔레미오 음()을 내는 나팔 모양의 5단 에어혼까지, 전형적인 폭주족 스타일이다. 사내는 휴대용 플레이어로 그가 건넨 USB를 검색하고 있다.

근데, 이 소린 뭐요. 아무래도 바이크 소리 같은데.”

, 그게 요즘 들어 근처에 폭주족이

아차, 싶어 말꼬리를 흐린다. 사내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거래를 튼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친밀감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친구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기철이 형을 닮은 데가 있다. 기철이 형은 좀처럼 웃지 않았다. 내레 웃을 일이 있간? 표정 좀 풀라고 하면 늘 고개를 틀었다. 잠꼬대까지도 남쪽 말로 하려 애쓰던 그와는 달리 형은 곧잘 남쪽 말을 쓰다가도 밸이 꼴리면 북쪽 말을 내뱉곤 했다. 대사관 담장을 함께 넘은 인연으로 친해진 형이었다. 그러나 연락이 끊긴 지 5년이 넘었다. 이럴 때 형이라도 곁에 있으면 위안이 되려나. 사내가 그의 생각을 끊는다. 할 거요 말 거요. 사내는 지폐를 흔들며 채근한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웹사이트에 직접 올리는 것보단 수입이 못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시작한 거래였다. 처음부터 오토바이의 배기음을 삽입한 건 아니었다. 동영상을 편집하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거였다. 나름대로 분위기에 맞는 음향을 깔았다. 이를테면 전희 단계에선 시동셀을 눌렀을 때 들리는 경쾌한 엔진음을, 본론이다 싶은 대목에선 스로틀을 거칠게 감는 소리를, 오르가슴에선 알피엠을 최대한 올렸을 때의 굉음을 삽입했다. 그런데 사내는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평소 받던 액수의 반 토막에 넘겼다.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늪이 떠오른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35년 생애가 이제 턱 아래까지 잠긴 듯 숨이 가쁘다.

눈꺼풀의 무게를 못 견디고 그는 눈을 감는다.

모텔 직원들은 주말이 가장 바쁘다. 특히 모텔 직원이자 사장인 그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전보다 못하다고는 해도 그래도 주말이면 객실 회전이 제법 원활하다. 이날만은 사장도 잔소리를 자제한다. 간신히 짬을 낸 그는 모니터 앞에 앉아 고객들을 살핀다. 시침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직 그가 원하는 커플을 보지 못했다. , 사십대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부부는 아니다. 사랑이란 말을 예사로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친 것들. 그는 모니터를 보면서 습관처럼 그 말을 내뱉는다.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러나 그의 눈엔 달리 보이지 않는다. 한때 새엄마로 불렸던 여자와 그 여자의 기둥서방으로 불렸던 사내, 그의 눈엔 한결같이 그들로 보일 뿐이다. 이번엔 젊은 애들 걸로 가져오쇼. 학생이면 더 좋고. 거래처의 사내는 학생을 강조하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어디 그게 말처

럼 쉬운가. 어지간히 지쳐 그냥 잘까 하던 참이었다. 남자가 먼저 들어오고 주뼛주뼛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파마머리를 보고 막 스위치를 끄려는 순간 여자의 머리가 훌렁 벗겨진다. 스위치에서 손을 뗀다. 여자는 머리를 소파에 던진다. 가발이다. 앳된 얼굴이 드러난다. 예감이 좋다. 그는 당장에 녹화 버튼을 누른다. 시동키를 돌리듯 음향 다이얼을 조심스레 돌린다. 후끈 달아오른 엔진의 굉음을 기대하며 귀를 세운다. 넥타이를 푼 남자는 다짜고짜 여자를 안는다. 아저씨, 일단 씻고요. 여자가 남자의 팔을 풀려고 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다. 땀 냄새? 괜찮아. 나중에 씻어. 기분이 좋아진 그는 캔 맥주를 딴다. 두 개째를 따던 손이 멎는다. 아저씨, 싫다고 하는데 왜 자꾸 이러세요. 사내의 손에 짧은 채찍이 들려 있다. 젠장.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기분이다. 캔을 놓고 모니터를 응시한다. 다섯 장, 아니 열 장 더 줄게. ? 사내는 채찍을 여자에게 건넨다. 채팅할 땐 이런 말 없었으면서여자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냥은 발기가 안 돼. 그러니 어떡하니. 사내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세일러복이다. 여자는 마지못해 그것을 입는다. 사내는 침대 가장자리를 잡고 엎드린다. 마치 팔굽혀펴기를 하는 사람 같다. 여자가 채찍을 휘두르는 시늉을 한다. , 그래 가지고 어디 느낌이 오겠니. 채찍을 빼앗은 사내가 시범을 보인다. ,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머릿속으로 따가운 볕이 내리쬐던 골목길이 펼쳐진다. 기신기신 골목길을 빠져나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어깻죽지가 불그스름하다. 그는 입술을 깨문다. 폭력은 안 돼. 그는 녹화된 것을 지우고 스위치를 끈다. 모니터에 삐쭉삐쭉 솟은 머리칼이 비친다.

한때 평범한 일상의 평균치 행복을 꿈꾸며 고학하던 청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죽어라 영어단어를 외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에서는 영어 하나만 잘해도 출세한다카이. 하모, 그기 자수성가의 지름길이다. 그를 고용했던 치킨집 사장의 지론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 말이 복음으로 들렸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나이트클럽의 DJ가 되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꽤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라면을 박스째 들여놓은 다음 남은 돈으로 빌보드차트에 오른 앨범을 샀다. 틈틈이 헐리웃 영화도 보러 다녔다. 꼬박 4년을 노력한 끝에 결실을 보았다. 변두리의 삼류 나이트클럽이긴 하지만 마침내 어엿한 DJ가 된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한동안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다 밖으로 나온다. 한 커플이 현관을 나서는 게 보인다. 여자의 오렌지색 머리가 눈길을 끈다. 그와 잠시 살았던 여자의 머리도 저런 색일 때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물들인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남자까지 달고 다녔다. 뭐 크게 마음 아프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데 따른 자괴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유의지의 발로니 뭐니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오토바이를 탄 그의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그녀가, 그리하여 뒷걸음치는 그를 설득해 동거를 시작했던 그녀가 채 반 년이 안 되어 오토바이의 위험성을 들먹이며 이별을 통보한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침대 시트를 갈고 온다고 하더니 침대에 엎어져 자나 봐. 마담이 인터폰으로 위엔을 찾았다. 특실이라면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모니터를 켰을 때 위엔은 남자의 무릎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실험실의 개구리가 떠올랐다. 그는 짧게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사장이었다. 이봐, 혼인 신고도 안한 상황에서 도망쳤으니 불법체류야, 알아? 그러니 내 말 들어. 그 자그마한 체구로 사장의 완력을 당할 수는 없다. 한사코 저항하던 위엔이 동작을 멈추었다. 사장의 거친 숨소리가 위엔의 흐느낌을 압도했다. 위엔의 젖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도와주십. 위엔의 눈이 희번덕이며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껐다.

 

벌써 갔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609호실전망이 끝내준단 말야. 사내가 했던 말을 상기한다. 모니터는 여전히 먹통이다. 소리도 없고 그냥 깜깜하다. 이제 보니 수신 신호도 떨어지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서 609호실을 본다. 불이 꺼져 있다. 곧바로 609호실로 가서 텔레비전을 살핀다. 없다. 그는 마른침을 삼킨다. 손전등을 들이대고 안을 살핀다. 이걸 찾는가 보군. 머리칼이 곤두선다. 허리를 펴고 돌아선다. 눈썹 아래 꿈틀거리는 흉터. 그 사내다. 사내가 렌즈를 들어 보인다. , 어떻게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어떻게 알았냐고? 사내는 히죽 웃는다. 내가 워낙 꼼꼼한 성격이거든. 사내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아 참, 여자는 먼저 보냈어. 자네하고 볼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사내는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흔들어 보인다. 램프가 깜박거린다. 몰카 탐지기란 거야. 사내가 스위치를 누르자 램프의 불이 꺼진다. 사내는 커튼을 내리고 방문을 잠근다. 친구들이 나보고 스타가 됐다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지. 근데 빌어먹을, 그 말이 맞았어. 내가 주연한 영화의 인기가 대단하더라구. 그래, 내 연기가 어떻던가. 보기만 해도 꼴리디?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다. 그것을 생물도감 보듯 했다면 이해할는지. 웃어?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가 인터폰을 누른다. 뚜우우. 응답이 없다. 대체 마담은 어디를 간 것일까. 벌떡 일어선다. 마음뿐이다. 그의 몸은 여전히 벽에 기댄 채 늘어져 있다. 갈기갈기 찢긴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트가 눈에 들어온다. 사내는 돈을 요구했었다. 그는 그의 방으로 사내를 데려왔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미안하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고 했다. 꼭 쓸데가 있는 돈이라고 했다. 사내가 가죽장갑을 끼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가 웃통을 벗었던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리던 투숙객에게 효과적으로 써먹었던 방법이다. 여기저기 길게 파인 자국이 불빛에 드러났다. 수술실의 칼도 칼이다. 사내가 싸늘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지랄, 칼자국은 그렇게 길게 곡선을 그리질 않아요. 그러면서 사내는 자기 전공이 칼이라고 했다. . 그는 그제야 그의 몸 여기저기가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내의 말이 맞았다. 사내가 그린 무늬는 짧은 직선이다. 그러고 보니 방바닥 여기저기가 붉은빛을 띠고 있다. 앙증맞은 꽃잎 같다. 왠지 낯설지가 않다. 내팽개쳐진 매트리스와 깨진 화분 조각 사이에 누워 있는 선인장이 눈에 들어온다. 남은 기운을 눈으로 모은다. 아직 뿌리가 살아 있다. 선인장은 생존을 위해 잎을 가시로 바꾸었다고 했다. 가시는 물의 증발을 막으면서 동시에 사막의 동물을 퇴치한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가시로 만드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위엔이 떠오른다. , 그녀를 도우러 가지 않았을까. 의문이 이어진다. 왜 그날 경찰이 아버지의 소재를 물었을 때 도리질했는지.

아버지의 뒤를 밟은 소년은 관목 수풀 사이로 아버지가 소나무 가지에 노끈을 매는 것을 보았다. 낯익은 몸뚱이가 자벌레처럼 꼿꼿해지는 걸 바지가 축축이 젖도록 보고 말았던 것이다. 어쩌면, 하고 그는 길게 숨을 내쉰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그럴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온몸이 빠져드는 느낌이다.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늪이 떠오른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35년 생애가 이제 턱 아래까지 잠긴 듯 숨이 가쁘다. 그래,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인다. 이젠 뭐 좀 달라지려나. 눈꺼풀의 무게를 못 견디고 그는 눈을 감는다. 크롬 도금으로 차갑게 빛나는 핸들이 보인다. 마치 활강하는 독수리의 날개를 닮은. 그는 헬멧을 쓴 뒤 날렵하게 시트에 오른다. 곧장 시동을 걸고 스로틀그립을 당긴다.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까라지던 마음이 곧추선다. 그때 인터폰이 울린다. 그 소리에 맞춰 오토바이가 폭음을 내며 출발한다. 달라질 게 없어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그래도 가슴이 뻥 뚫리도록 달려 보는 거야. 잃을 게 더 뭐 있겠어.

 


<심사평>


모텔 풍속도 소재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 돋보여

 

예심을 거쳐서 넘어 온 작품이 11편이었다. 문장력에 의심이 드는 4편이 일차적으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가령 진주는 모태의 젖 줄기를 받으며 새로 태어난 듯 생명의 나라로 발돋음 하는 시작조차 모른 체 철없는 아이처럼 음식을 받아 먹었다라든가, ‘크든 작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고인 물 같은 슬픔이 극대화되기 마련이다같은 문장이 그 견본이다. 소설은 바르고 알맞은 낱말을 골라 문맥이 제대로 통하는 문장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비밀번호>는 밋밋한 문장이 흠이었고,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어깨에 문신을 새기는 <독거미>는 이야기 전개가 지루했다. <고시원 가족><로열패밀리><도산서원 가는 길>, 그리고 <미끼>는 인물과 구성이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군더더기는 과감하게 잘라내는 기량이 필요한 법이다. 작가는 펜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칼로 작품을 쓴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떤 부분을 요약 서술로 처리하고, 어떤 부분을 장면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효과는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이 <1><>이었다. <1>은 오해가 빚은 엄청난 비극적 결말을, <>은 모텔 풍속도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삶의 이야기여야 한다. <1>은 생각하게 만드는 삶의 이야기이고, <>은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장단점을 고루 갖춘 두 작품을 놓고 고심 끝에 <>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심사위원 : 정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