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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입

오희진

 

구는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뚜껑이었다. 짝이 맞는 솥을 찾느라 주변을 살폈다. 다섯 개의 철제 조리대가 디귿 자 형태로 배치된 공간이었다. 솥을 크기별로 분류해 놓은 조리대가 있었다. 구는 근방에 뚜껑을 두었다. 솥에 비해 나머지 도구는 정돈 상태가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교집합은 쉽게 눈에 띄었다. 조리대마다 빠지지 않는 밀방망이였다. 나무로 된 표면은 길이 들어 매끄러웠다. 밀방망이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도구가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구는 일련의 흔적이 낯설었다. 시간은 가만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가진 것을 번번이 망가뜨렸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시간이 무해하게 느껴졌다. 훤하게 열린 창밖으로 천변이 내려다 보였다. 운동복을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책로를 뛰어갔다. 입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흩날리는 밀가루 같았다. 구는 창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문가에서 기척이 났다.

"그대로 두세요."

정이었다. 구는 인사를 잠시 잊었다. 정은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덩치가 큰 구에 비하면 난쟁이 같았다. 구는 내심 놀랐다. 마흔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더 들어 보였다. 백발 때문이었다. 이마를 드러내고 귀 뒤로 넘겨 빗은 머리카락은 희었다. 삼십 대를 막 지나왔다고 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정이 조리대 밑에서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꺼내주었다.

"저녁 먹었나요?"

"아니요."

"먹고 가세요. 칼국수를 만들 거예요."

", 실은 안 돼요."

구는 식이장애 치료 센터에 드나들고 있었다. 어떤 강박증 환자에게 보도의 붉은 블록만 디뎌 걷는 것이 세계를 유지하는 기준이듯, 구에게는 국수를 먹지 않는 일이 그랬다. 이마저도 자각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이곳에 다다른 기분이 들었다. 국수는 그 모양이 길을 닮았다. 차이라면 언제고 끊어지기 마련이라는 것. 구는 국수라면 먹는 족족 토해냈다. '한 그릇 교실'은 국수를 만들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국수 연구소라고도 불렸다. 구는 이곳의 소장인 정을 소개 받았다. 비슷한 강박을 앓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저는 나아질까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선생님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먼저 말해주겠어요?"

구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솥을 집었다. 양은으로 된 것이었다. 정은 솥에 다시마와 멸치를 한 줌 넣고 물을 받았다. 구는 가스레인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곧이어 불이 들어왔다. 그것은 신호 같았다.

 

먹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고, 구는 말했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최후의 식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기다란 탁자가 카메라 앞으로 들어왔다. 햄버거를 가득 쌓은 접시가 머릿수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이라기보다 장식 같았다. 햄버거는 대회용으로 야채와 소스 같은 부재료를 뺀 것이었다. 고동색의 패티와 연갈색의 빵이 피라미드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일 분. 열 개 이상을 먹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반수의 참가자가 탈락했다. 참가자들이 나란히 섰다. 신호음이 울렸다. 구는 패티와 빵을 분리했다. 패티를 씹어 넘기며 빵에 물을 적셨다. 젖은 빵은 그대로 삼키면 되었다. 시계 초침보다 구의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 분이 다 지났다. 구는 열두 개를 먹었다. 참가자 뒤에 달린 전광판에 세 사람의 이름이 떴다. 방청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구는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익명의 가족을 상상했다. 사회자가 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구는 예선전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최후의 식신'은 먹기 대회였다. 모 대기업에서 자사 홍보의 일환으로, 외식상품권과 소정의 상금을 부상으로 걸고 시작한 행사였다. 매스컴을 탄 것은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최후의 식신'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획하면서부터였다. 주말 시간대에 편성되고 여러 식품업계의 광고가 따라붙으면서 우승 특전이 달라졌다. 상금이 수천만 원대로 뛴 것이다. 자연히 참가자가 늘었다. 구는 수백 명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다. '최후의 식신'에 나오기 전부터 식당 개업 행사나 지역 특산물 축제의 먹기 대회는 물론이고 홈쇼핑 식품 광고 보조출연부터 식품회사 신제품 시식 아르바이트까지, 먹는 일이라면 다 했다. 구는 맛이나 질을 따지지 않았다. 친지들의 집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먹는 것은 구에게 적응의 첫 관문이었다. 하지만 한 밥상에 둘러앉는다고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살이 붙을 뿐이었다. 구는 차츰 덩치가 커졌다.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 구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경우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영역에 있거나 어떤 면에서 그 영역보다 뛰어나거나. 각종 먹기 대회에 나간 것은 그때부터였다.

푸드 파이터로서 구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먹기 대회도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스포츠였다. 구는 세 끼를 꾸준히 챙겨 먹었다. 대부분 포만감이 쉽게 오는 식이섬유 음식이었다. 공복 때에는 수시로 물을 마셨다. 이것은 위가 보관할 것이 많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단시간 내에 먹은 양으로 판가름을 내기 때문에 위의 크기를 늘리는 것은 중요했다. 먹는 방법 또한 승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다. 입만 바쁘게 움직인다고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속도만큼이나 음식의 성질 또한 중요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구는 음식을 바꿔가며 연습했다. 햄버거 빵에 물을 적시는 것도 이 때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음식에 구는 면역이 생겼다. 몇 차례의 우승은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음식이 있는 곳은 구에게 일터였다.

구는 제작진이 지정해준 대기실에 들어갔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났다. 우욱. 이십여 명을 웃도는 참가자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늘씬한 여자가 검은 비닐봉지에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구와 같은 조로 예선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가까이에 있던 참가자들이 여자를 부축해 나갔다. 그대로 두었다면 다들 연달아 햄버거를 게워냈을 지도 몰랐다. 구는 축 늘어진 여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몸을 담보로 하는 만큼 몸을 망치는 일도 흔했다. 이윽고 제작진이 들어왔다. 앞으로의 시합 일정을 안내했는데, 합숙에 관한 것이었다. 토너먼트 때부터 합숙소 생활을 방송에 내보낸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사생활이 공개되는 부분에 대해 협조를 구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후의 식신'에 참가를 결정하며 동의한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일주일 후를 기약하며 돌아갔다. 대기실 안팎이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응원군으로 찾아온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구는 그들 사이를 총총 빠져나갔다.

 

구의 짐은 옷가지 두어 벌이 다였다. 구는 외투를 걸치고 거울을 보았다. 타원형의 몸이 거울에 가득 찼다. 자신이 가진 전부가 몸에 담겨 있는 듯 했다. 그런 면에서 구의 엄마는 가진 것이 없었다. 구는 병석에 있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사람 같았다. 구는 이불을 들추어 그 마른 몸을 들여다보곤 했다. 마지막에 엄마는 얇은 흰색 천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구는 차마 천을 열어 보지 못했다. 몸에 용량이 있다면, 그것을 다 써버렸다는 뜻임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지금의 얼굴을 마주했다. 스스로가 커다란 서랍 같았다. 서랍에는 여태 먹은 음식이 남김없이 들어 있었다. 그 맛은 식탁에 홀로 남겨진 날을 연상케 했다. 구에게 맛이란 숫자였다. 햄버거의 맛은 일 분에 열두 개였다. 대회 기록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맛은 숫자가 됐다. 사과는 당도만을 본다면 십 점 만점에 6이었다. 질감이라든가 딱딱한 정도를 따진다면 7은 되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맛은 단 한 가지였다. 서랍의 맨 아래층에 든 국수가 그랬다. 구는 거울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한 준비였다.

참가자 합숙과 함께 토너먼트가 시작됐다. 중계석이 마련된 촬영장은 예선전 때보다 규모가 컸다. 참가자는 열네 개 조를 이루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시합을 펼치고 일곱 명을 걸러내는 것이 이번 방송의 과제였다. 일주일 후에는 일곱 명 중 두 명, 그 다음 주에 또 두 명이 떨어지면 세 명만이 남는다. 결승 시합에서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것으로 '최후의 식신'은 막을 내릴 터였다. 구는 촬영장 뒤에서 세 번째 순서를 기다렸다. 상대는 구와 체격이 비슷한 중년의 남자였다. 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남자와 구는 높게 솟은 단상에 섰다. 밥그릇 모양의 탁자에는 각각 덮개를 덮은 접시가 있었다. 음식은 매번 달라졌다. 사회자가 단상을 가리킴과 동시에 조명이 번쩍거렸다. 구는 덮개를 들었다. 접시에는 한 개의 초밥이 놓여 있었다. 단상의 양쪽에서 이동식 조리대가 들어왔고, 요리사와 도우미가 등장했다. 조리대에는 완성된 초밥 백 접시와 여분의 재료가 벌여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오 분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구는 초밥을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생선살이 물컹하게 씹혔다. 남자는 초반부터 양손을 써가며 열을 올렸다. 반면에 구는 천천히 밥알을 씹었다. 요리사가 초밥을 완성하면 도우미가 빈 접시를 채웠다. 만들어 온 초밥은 금세 동이 났다. 구는 삼 분을 넘어서면서부터 속도를 붙였다. 사회자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시합은 끝났다. 구는 입가를 닦으며 전광판을 올려 보았다. 91. 남자의 기록이 먼저 떴다. 98. 방청석이 술렁였다. 구의 승리였다.

숙소까지 따라온 카메라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꺼졌다. 일전에 구토를 했던 여자가 뒤풀이를 제안했다. 여자의 방에 일곱 명이 모였다. 토너먼트를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참가자였다. 자리를 잡는 동안 여자가 주전부리를 내왔다. 구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고생도 있었고, 환갑을 지났다는 정정한 노인도 보였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도 여자는 눈길을 끄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는 반듯했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여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낯이었지만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기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구는 재방송으로 본 여자의 인터뷰를 기억했다. 여자는 외모와 더불어 화제가 된 사연이 있었다. 배우를 지망하던 이력이었다. 푸드 파이터로 전향한 것은 안면근육마비장애가 오면서부터라고 했다. 인터뷰 끝에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입가의 흔들림이 클로즈업 됐다. 여자가 도전 과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피하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요?"

"딱히 없어요. 뭐가 나오든 다 비슷하니까요."

구의 말에 사람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역시 강력한 우승후보답네요."

"맞아요. 정말 잘 드시던 걸요."

"저 말인가요?"

구가 되물었다.

"못 따라잡겠던데요."

여자의 말에 모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구는 잠시 먹먹해졌다.

"잘 먹어야 해."

라면을 달라고 보채는 구를 타이르는 것은 엄마의 일과였다. 구는 편식이 심했다. 유일하게 가리지 않는 음식은 국수였다. 구의 엄마는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냈다.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다른 냄비에는 소면을 익혔다. 하얀 거품이 확 끓어오르면 찬물을 조금 부었다. 소면은 냄비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구는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앉은뱅이 상에는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명은 잘게 썬 김치와 깨소금뿐이었다.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그 앞에서 구는 라면을 잊었다. 김치의 작은 탑을 부수면 국물이 붉어졌다. 어설픈 젓가락질로 면발을 감아올리다 보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면발은 보드랍고 매콤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묵은 김치의 맛이 스미어 있었다. 그릇이 반쯤 비워지면 엄마가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마주 닿았다. 그때마다 구는 온몸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국수를 담은 그릇이 된 것 같았다. 메밀을 넣어 반죽하면 메밀국수, 녹차로 색을 내면 녹차국수, 멸치로 국물을 우리면 멸치국수, 들깨를 갈아 넣으면 들깨국수, 고기 고명을 얹으면 고기국수, 고추장을 뒤섞으면 비빔국수한 가지를 먹어 봤을 뿐이지만 모든 맛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국수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혼자가 된 구는 편식을 고쳤으나 국수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서랍의 맨 아래층, 겹겹이 불어난 살의 더미에 짓눌려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일곱 명과의 시합에서 구는 가까스로 다섯 명 안에 들었다. 도전 과제는 만두였다. 십 분 동안 젓가락으로만 집어서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갓 쪄내 뜨거운 온도가 시합의 변수였다. 구는 초반부터 혀를 데었다. 피는 얇은 만두라서 젓가락으로 집기도 까다로웠다. 그 와중에 여고생이 기권을 외쳤다. 또 다른 참가자가 한 개 차이로 밀려나고, 뒤처져 있던 구는 부전승으로 올라갔다. 결승전 진출자를 가리는 시합에는 닭튀김이 등장했다. 닭다리만을 튀겨낸 것이었다. 여자와 구는 막상막하였다. 노인까지 세 사람이 결승전 진출자로 확정되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의 승부를 예고하는 것으로 생방송은 끝이 났다. 조명이 관객석부터 차례로 꺼졌다. 불빛은 낮은 조도로 무대만을 비추었다. 촬영장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제작진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구는 손을 문지르며 옆을 보았다. 여자는 마른 수건을 얼굴로 가져갔다.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모습이 가느다란 선 같았다. 선은 조금씩 앞으로 구부러졌다. 구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세 사람만 남은 합숙소는 적적했다. 끼니를 거르겠다며 노인이 방으로 돌아간 후, 여자와 구는 합숙소를 나섰다. 죽을 먹기로 하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알은 체를 했다. 구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일부러 구석진 데를 골라 앉았다. 구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우는 걸 봤어요."

"들켰네요."

구는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저는요, 하고 운을 떼더니 여자는 극단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대사가 열 줄도 채 안 되는 배역을 주로 얻었다. 순간이나마 조명 아래에서 말문이 열렸을 때의 느낌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이렇게 살아도 만족해요. 그런데요."

여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대를 잊지는 못할 거예요."

주문한 죽이 나왔다. 구는 묵묵히 숟가락을 떴다. 빈속에 뜨거운 죽이 치덕치덕 내려앉았다. 여자가 첫 무대를 기억하듯, 구의 서랍에는 국수가 있었다. 숫자가 될 수 없는 맛이었다. 다만 구는 그 기억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것이 여자와의 차이였다. 견고한 숫자의 벽이 무너진 것은 결승전 당일이었다.

번화가의 광장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을 불러냈다. 구는 무대로 뛰어올랐다.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울렸다. 구의 위치는 가운데였다. 양옆으로 여자와 노인이 섰다. 그들 뒤로는 '최후의 식신'의 로고를 입힌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 사람을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가 비장하게 말했다.

"최후의 식신을 가려낼 마지막 음식입니다!"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장막이 걷혔다. 널따란 주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명의 요리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왼편에서는 양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여 뽑아냈고 오른편에서는 끓는 물에 익힌 면발을 빠르게 건져냈다. 하나같이 능숙한 솜씨였다. 주방 가운데의 탁자에는 국수를 한 사리씩 담은 그릇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세 사람에게는 십오 분이 주어졌다. 신호탄이 터졌다. 육수와 고명은 따로 없었다. 오로지 면발만을 먹어야 했다. 도우미가 날쌘 손놀림으로 세 사람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구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자와 노인은 이미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연출이 무대 밖에서 다급하게 팔을 흔들었다. 구는 허둥지둥 젓가락을 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구는 면발을 빨아들였다. 속도는 곧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구의 탁자에는 빈 그릇이 늘어갔다. 시합 종료까지 일 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구는 목이 막혀왔다. 다급히 물을 들이켰다. 덜커덕. 일순간 구의 입이 벌어졌다.

 

"물이 끓어요."

", 내가 한 번 볼게요."

정은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 뚜껑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구의 코를 자극했다. 멸치 국물이었다. 정은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불을 껐다. 솥에는 연둣빛의 말간 국물만 남았다. 정은 바가지를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바가지에 이어 칼, 도마, 밀방망이가 차례로 올라왔다. 끝으로 꺼낸 것은 밀가루였다. 정은 밀가루를 바가지에 붓고 소금을 약간 쳤다. 이따금 물을 약간씩 부어 가며 손을 움직였다. 춤을 추듯, 정의 몸이 흔들렸다. 파슬파슬하게 흩어진 덩이가 차츰 모아졌다. 반죽은 둥그렇게 덩어리졌다. 정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져 앞을 가렸다. 구는 정의 옆으로 다가갔다.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묶어줄래요?"

정은 고무줄이 감겨 있는 손목을 내밀었다. 구는 고무줄을 빼 밀가루를 털어냈다. 정이 머리를 살짝 뒤로 뺐다. 구는 정의 백발을 가볍게 쥐었다. 머리카락은 얇은 데다 숱이 적었다. 국수 면발로 치면 한 줌에 불과했다. 가르마를 가로질러 목덜미까지, 구는 손빗으로 낮게 묶었다. 한 갈래의 머리카락은 등까지 길게 늘어졌다. 구는 정이 지나온 세월을 가늠했다. 밀가루 반죽을 늘이듯 길게, 혹은 짧게도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은 반죽의 반을 떼어 구 앞으로 밀어 놓았다. 구는 손을 씻고 조리대로 왔다. 반죽에 손바닥을 대자 밀가루의 탄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을 만지는 듯했다. 구는 반죽을 둥글리고 치댔다. 정은 다 된 반죽을 비닐로 감쌌다.

"이제 냉장고에 넣어둘 거예요."

"얼마나요?"

"보통 하루는 숙성하는데, 오늘은 한 시간만 둘게요."

"그래도 오래 걸리네요."

"이야기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죠."

"같이 먹어요."

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강생 중 한 명이 손짓을 했다. 대여섯 명이 모여 앉은 조리대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정은 괜찮다고 말했다. 일 년 전부터 먹는 일 자체가 수월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거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강생들은 음식을 조금씩 덜어 맛보았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정은 요리 학원에서 경리 업무를 봤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모두 가르치는 곳이라 야간반까지 운영했다. 뒷정리를 하다 보면 퇴근은 매번 늦어졌다. 혼자 사는 집은 버스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천변을 끼고 도는 노선이었다. 정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천변이 보이지 않는 길로 다니기 위해서였다. 걸어가자면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지나가야 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은 인파가 북적이는 길을 택했다. 도시의 소음에는 잔상을 묻어두기 쉬웠다. 하지만 한 시간 전의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강생의 목소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같이 먹을래?"

마가린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은 둑길에서 저수지를 굽어보았다. 물가에 우거진 수풀은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스산했다. 저수지는 운동장만해서 호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때는 삼월이었다. 훨씬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쌀쌀한 날씨는 계속되었다. 하교한 뒤, 정은 둑길에서 한숨을 돌리곤 했다. 보육원으로 돌아가면 쉴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만 돼도 큰언니 구실을 해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함께 놀아 달라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칭얼댔다. 누군가가 돌본다고 채워지는 부재가 아니었다. 혼자인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아야 했다. 마가린의 등장은 그래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인사도 않는 동급생이었다. 정은 벌떡 일어났다. 둑길에 앉은 마가린은 가방에서 삼단찬합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은 먹다 남은 음식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소시지 반찬과 과일, 주먹밥이 담겨져 있었다. 마가린은 자신이 숟가락을 들고 정에게 젓가락을 주었다. 얼결에 정은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식사에 동참했다. 주먹밥은 잗다랗게 가루를 낸 김에 궁굴린 것이었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맛이 진하게 퍼졌다. 주먹밥의 단면은 누르스름했다. 간장으로 밑간을 한 것 같았다. 마가린은 정에게 물병을 건넸다.

"나 너 가끔 봤다. 여기 있는 거."

"그래?"

"좋은 곳이야. 그치?"

"비 오는 날이 더 괜찮아."

"그런 날은 대어를 낚을 수 있대."

"처음 듣는 말인데."

"아버지가 그랬어. 밤낚시를 다니셨거든."

"너도 간 적 있어?"

"가끔. 이걸 얻어먹었지."

"맛이 좀 특이하네."

", 마가린 때문일 걸."

도시락을 들고 나타난 동갑내기 소년의 호칭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둑길에서 만나곤 했다. 대개는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마가린은 도시락을 자주 남겨 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은 주먹밥일 때가 많았다. 주먹밥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정은 해거름의 식사가 기다려졌다. 계절이 바뀌면서 둑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녹음이 짙어지면서 삭막한 기운은 한층 물러갔다. 저수지에도 여름이 왔다. 장맛비가 연일 지겹도록 퍼부었다. 저수지의 물은 넘칠 듯 불어났다. 마가린은 밤낚시를 하자며 정을 졸랐다. 오랜만에 하늘이 갠 날이었다.

"내가 다 준비할게."

"고기가 있긴 할까?"

"물이 있잖아."

"물만 있는 것 같은데."

"저수지를 그릇이라고 생각해 봐."

"그릇?"

"밥상에 올라온 물그릇이다, 이렇게."

"그 다음에는?"

"내 밥이 저절로 보인다는 거지."

"그게 뭐냐, 싱겁게."

"원래 낚시는 기다리는 맛이야."

그날 밤, 찌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가린은 낚싯대를 드리운 채 꾸벅꾸벅 졸았다. 정은 그 옆에서 저수지를 내다보았다. 수면에는 둑길의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떠 있었다. 어두운 사위를 밝히기엔 충분한 빛이었다. 날벌레가 들끓었지만 그마저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정은 잠든 마가린을 바라보았다. 밤낚시를, 주먹밥의 비밀을, 허기가 나누어지는 공식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마가린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마가린의 말대로라면 저절로 보이게 되는 법이니까. 정은 자신의 그릇에도 물을 채우고 싶었다. 마가린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하게 스쳤다. 수면이 느리게 일렁였다. 딱 그만큼, 정은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기점이었다. 정의 그릇에는 어느덧 마가린이 들어와 있었다. 낚지 못한 물고기 대신 건져 올린 것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영근 마음이었다. 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저수지의 날씨는 첫 만남 당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해거름의 식사는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돌기 직전까지는.

 

이른 아침부터 정은 학원 문을 열고 식재료를 주문했다. 학원에는 경리가 거들어야 할 업무가 꽤 있었다. 월요일 야간반처럼 수강생이 몰리는 수업에는 보조강사로 들어갔다. 사적인 심부름을 하는 날도 있었다. 학원장은 오전반에서 야간반까지 이어지는 수업 때문에 늘 바빴다. 정은 학원장을 대신해 경조사 부조를 전달한 일이 몇 차례 되었다. 정은 오전에 학원 업무를 서둘러 끝맺어야 했다. 지인의 국수전문점 개업식에 다녀오라는 학원장의 부탁이 있었다. 버스로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지방이었다. 정은 점심식사를 거르고 터미널로 향했다. 대합실은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은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은 일 년 전을 상기시켰다. 정은 억지로 눈을 붙여 보았다. 창가 좌석이라 괜스레 한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희끄무레한 빛이 감돌았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가을은 짧았다. 십일월 중순,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정은 교무실에 불려갔다. 담임교사가 한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다. 정은 그들 앞에 앉았다. 담임교사는 멋쩍게 운을 뗐다. 몇 가지를 물어 볼 테니 솔직하게 답하라는 말이었다. 질문자는 아주머니였다. 처음에는 학교생활과 방과 후 일과에 대해 물었다. 그때까지도 정은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마가린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에야 정은 알아차렸다. 마가린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본격적인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요즘 붙어 다니는 여자아이가 너인 것을 안다. 읍내에서 소문이 별로 좋지 않다. 야밤에도 단둘이 만난다고 들었다. 믿지 않지만 확인 차 알고 싶다. 임신을 했던 일이 사실인지 말해 달라. 교무실의 모든 눈과 귀가 한곳에 쏠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 정은 보호 받지 못했다. 동석하지 않은 마가린을 생각했다. 몰라도 되는 일은 모를 수 있었다. 그것이 마가린의 열아홉이었다. 정은 제 나이를 앞서 가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담임교사가 정을 채근했다. 헛소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한 마디로 족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정의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공식적인 면담은 끝이 났다. 교실로 돌아온 정은 모종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들은 사실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소문은 정을 끈질기게 따라올 터였다. 창가에 서 있던 마가린과 눈이 마주쳤다. 바깥에는 진눈깨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정은 교실을 뛰쳐나갔다. 가방도 챙겨 들지 않고 슬리퍼만 신은 채였다. 그대로 둑길까지 내달렸다. 교복이 안쪽까지 차게 젖어들었다. 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슬리퍼를 벗었다. 맨손으로 언 발을 한참 동안 주물렀다. 체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은 생기지도 않은 일에 수치심이 들었다. 이대로 온몸이 그냥 얼어붙었으면 싶었다. 그때였다. 마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을 부르고 있었다. 정은 수풀에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혼자이고 싶었다. 마가린은 비탈진 둑길을 한달음에 내려섰다. 정의 가방과 외투를 들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마가린은 슬리퍼를 금방 찾아냈다. 그러더니 손에 든 것을 내던지고 물가로 나아갔다. 마가린은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헤엄쳐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이 수풀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가린은 둑길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물귀신 같은 년. 마가린의 어머니는 저수지에서 부르짖었다. 정은 최초 목격자 진술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틀 만에 경찰서를 나섰다. 장례식이 치러진 뒤였다. 정은 그 후 세 달을 입방아 속에서 견뎠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던 날이었다. 정은 마가린과 밤낚시를 하던 그곳을 도망치듯 떠났다. 목적지는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매순간이 무의미한 소음으로 넘쳤으면 했다. 언제든 정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과거를 영영 파묻고 싶었다. 정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천변은 피하면 그뿐이었다. 거식증이 시작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화 불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증세는 점차 명확해졌다. 밥의 형태를 가진 것에는,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정은 죽이나 과일로 겨우 속을 달랬다. 별안간 구토 증세가 밀려오는 때는 허다했다. 주변에서는 장기 입원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은 속이 뒤틀려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거식증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진눈깨비가 그친 뒤에도, 정은 여전히 황폐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정은 약도를 펼쳐 들었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국수전문점이 있다는 동네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이었다. 약도대로 주택가에 들어섰지만 학원장이 일러준 상호명은 보이지 않았다. 간판이 없는 식당을 발견한 것은 골목길의 끄트머리였다. 막 개업했다고 보기에는 낡은 외관이었지만, 김이 서린 창에 나붙은 차림표만으로는 국수전문점이 분명했다. 정은 문을 열었다. 이인용 식탁 여섯 개로 꽉 차는 공간이었다. 안쪽 주방에서 주인 부부가 부산히 움직였다. 정은 머뭇거리며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머릿수건을 쓴 여자가 나타났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뒤따라 나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정에게 펼쳐 보였다. 무엇을 주문하실 건가요? 가지런한 글씨였다. 정은 주인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가 검지로 자신의 입을 가리킨 다음 손을 내저었다. 정은 봉투에 적힌 학원장의 이름을 내 보였다. 주인 부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듯 했다. 주인 부부는 목례를 하더니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은 긴 여정에 기운이 빠졌다. 숨을 고를 요량으로 잠시 문가에 기대었다. 주인 부부가 주방에서 양푼을 들고 나와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때였다. 양푼에 든 것은 국수였다. 정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국수전문점을 다시 찾아 볼 생각이었다. 문득 여자가 손짓을 했다. 정은 주인 부부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젓가락을 내밀었다. 남자가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젓가락을 받아든 정은 주인 부부 사이에 앉았다. 국수는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것이었다. 주인 부부는 식사를 시작했다. 후룩, 후룩, 후룩.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주인 부부의 식탁에도 소리가 있었다. 젓가락이 양푼 모서리를 튕겨 내거나 잔에 담긴 물이 연신 찰랑였다. 떠들썩한 식탁에서 정은 해거름의 기억을 되찾았다. 텅 빈 몸 안에 물이 서서히 차오름을 느꼈다. 마가린은 반복되는 허기처럼 떠오르곤 했다. 정은 종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살아가는 한 끝나지 않을 허기였다.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일 때였다. 주인 부부와 머리를 맞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입안에 신물이 고였다. 그 모든 물을, 정은 힘껏 삼켰다.

 

정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냈다. 엄지로 힘주어 누르자 오목한 자국이 남았다. 정은 구에게 도마와 밀방망이를 주었다. 구는 반죽을 가장자리부터 밀어 폈다. 반죽은 도마 모서리에 걸칠 만큼 커다래졌다. 구는 밀방망이를 다시 정에게 넘겼다. 정은 들쑥날쑥한 두께를 평평하게 편 다음 반죽을 겹겹이 접고 칼질을 시작했다. 면발은 소면처럼 얇게 잘렸다. 그것을 면포를 깐 너른 쟁반에 놓고 밀가루를 살짝 뿌렸다. 칼질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그 박자를 유지하며 정은 조곤조곤 말했다.

"어떤 유목민은 새해 첫날, 집안 곳곳에 밀가루를 뿌린대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만수무강을 바라는 거예요, 이 모양처럼."

정은 면발 한 가닥을 들어 보였다. 구는 그것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가닥마다 삶의 기원이 담겨 있는 셈이었다. 정이 면발을 삶고 양념장을 준비하는 사이, 구는 고명을 만들었다. 먼저 달걀지단을 부쳤다. 다음으로는 김을 부수고 대파와 청양고추를 다졌다. 끝으로 손을 댄 고명은 김치였다. 구는 그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몸속에서 서랍이 일제히 덜컥거렸다. 구는 심호흡을 하고 칼을 잡았다. 도마에 김치 서너 줄기를 놓고 잘게 썰었다. 손끝에 빨갛게 물이 들었다. 그것은 언젠가 구의 얼굴빛과 닮아 있었다. 정은 두 개의 그릇 가득 칼국수를 담았다. 그 위에 구가 조그마한 원을 채우듯 고명을 조심스레 얹었다. 마무리는 양념장 한 숟가락이었다. 칼국수 두 그릇이 조리대에 가지런하게 놓였다. 구와 정은 비로소 마주앉았다.

"먹어요."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요."

"말해 봐요."

"삼키지도 못했잖아요."

"그랬지요."

"근데 왜, 다시 먹을 수 있었어요?"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구는 고개를 낮게 떨어뜨렸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어제의 불행보다 눈앞의 온기가 지금은 더 가까웠다. 후룩, 후룩, 후룩. 정이 칼국수를 먹는 소리였다. 구는 젓가락을 쥐었다. 면발을 신중하게 감아올려 입에 넣었다. 그것은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랍의 맨 아래층으로 향하는 긴 통로가 천천히 열렸다. 구는 눈을 들어 정을 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맛있어요.

 

 

<당선소감>


밥 한 끼 같이 따뜻한 글 쓰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가까운 이들을 집에 부르곤 합니다. 어둑해지면 문간이 소란합니다. 빈손으로 오는 이는 없습니다. 즐겨 마신다는 술을 사오거나 어젯밤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답가를 준비해야겠지요. 나는 쌀을 안치거나 물을 끓이거나 야채를 볶습니다. 볶음밥, 덮밥, 스파게티, 카레음식은 대개 한 그릇짜리입니다. 더이상의 구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앉은뱅이 식탁에 둥그렇게 모여 앉습니다. 비로소 금요일 저녁이 시작됩니다.

날이 밝아옵니다. 하나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때때로 홀로 술을 마시겠지요. 어두운 방에서 노래를 부르겠지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밥 한 끼의 온도를 간직한 채로요. 내가 쓰고 싶은 소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밥상머리에서 늘 기도해 준 가족들, 나를 희봉식당이라고 불러준 친구들, 허기진 밤을 나란히 지새운 문우들, 밥상의 기억을 나눠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설익은 이야기를 기꺼이 맛 보아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신춘문예라는 밥상을 마련해 준 경인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오래오래 쓰겠습니다. 한 그릇으로도 충분한 온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약력 1987 전라북도 무주 출생 / 전주기전여고 졸업 /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 서울 거주

 

<심사평>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작품미래 기대돼

 

소설가 윤후명 선생님과 내게, 1차 걸러진 24편의 소설이 각각 배달되었다. 이중 5편 정도는 문장 작법이나 소설의 기본 서술법이나 구성법 등이 미숙한 작품들로 우선 제외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정독에 들어갔다. 전체 플로트와 관계없는 무의미한 장식적 에피소드나 묘사 서사의 남발이 거슬렸다. 전형적이지 못한 캐릭터와 사건도 소설의 깊이를 담보할 수 없었다. 일상 경험에서 창작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좀더 진전된 실험의식을 지닌 경험 개척을 통해 창작에 나서야 할 것이다. 치열한 인생 현장 탐구와 고뇌가 동반될 때라야 비로소 명작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얻는데 힘들었던 제재라도 전체 소설과 밀접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거대 담론의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거대 담론에 대한 이해없이는 현실이나 미래를 투시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하여야 한다. 최종적으로 손에 남은 작품은 7~8.

이제 윤후명 선생님과 나는 토론에 들어갔다. 폭력의 악순환을 희망으로 극복하려 한 '옥수수밭 아코디언', 흡인력있는 문장력을 바탕으로 사랑과 우정이라는 진부한 제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응시하려한 '오후 세 시의 배웅', 그리고 '전어대가리'의 적나라한 서사와 거침없는 입담, '어디로 가야 하나요?'의 시의적절한 제재 선택, '다이빙'의 적절한 제재 배치와 언어 선택, 그리고 '첫입' 등은 우리 두 사람의 최종 선택을 매우 힘들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약간의 차이지만, '첫입'을 골랐다.

'첫입'은 자칫 간과할 뻔했다. 얼핏 보면 초라한 '칼국수'에 불과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능력으로 육수를 우려내었고, 숙달된 손으로 정성스레 면을 뽑았다. "맛있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섭식장애 이야기를 통해 현대 인간사회에 늘어가는 트라우마의 대두와 회복을 보았다. 다만,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가 부족하고, 먹기 대회의 서술이나 대화가 적절하게 성격 창조나 플로트 전개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문제로 남는다. 다만 가능성만으로 미래를 기대해 보고자 한다.

 

심사위원 : 윤후명·장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