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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딩하는 남자

정의권

 

- 노조가 설립됐다는 소식에 아침 조회는 거의 생략되고

- 생산2팀 분위기는 침울 속, 박형은 팀원 움직임 살피며 준법투쟁 나선 노조원 주시

 

- 탁한 기계음 소음 때문에 모두의 신경은 날이 서고

- 로딩 작업대 앞에 흘러 나온 공정이 쉴새 없이 돌아가며 '아마추어'가 쏟아진다

 

- 노조는 투쟁 강도를 높이자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서고

- 역부족 조합원은 끌려나와 발악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세상을 흔들며 몸부림 친다

 

- 지금쯤 작업벨 울릴 시간에 거실서 모형자동차 조립하다 기계 돌아가는 환영에 빠지고

- 나는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와 완성된 부품과 긴호흡을 한다

 

오전 여덟 시 오 분 전, 작업시간 전의 종이 울릴 때까지 생산2팀의 리더인 박 형은 조회가 열리는 공터로 나오지 않았다. 노조가 설립됐다는 것이 회사에 알려지면서 아침 조회는 거의 생략되었다. 작업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현장으로 들어와 에어 벨브를 올렸다. 박 형은 AB라인 중간에 있는 사무용책상에 앉아 있었다. 작업일지를 뒤적거리고는 있지만 현장 안으로 들어오는 팀원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팀원들도 형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각자의 라인에 가 선다. 침울한 표정이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컨베이어 벨트에 연결된 스무 가지의 작업 기계들의 전원이 일제히 들어온다. 잠에서 깨어난 듯 각 기계의 에어가 실린더에 들어차는 소리가 요란하다. 반자동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어리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로딩 작업대 앞으로 흘러들어온 빈 팔레트에 라미네이션과 얇은 플라스틱 재질의 인슐레이션을 차례로 올린다. 지름과 높이가 오 센티미터인 작은 원통 모양의 라미네이션은 톱니바퀴처럼 스물아홉 개의 홈이 파져 있다. 센서를 감지한 팔레트가 벨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본격적인 작업은 샤프트 프레스에서 라미네이션을 관통한 막대 모양의 샤프트와 샤프트 위에 코뮤테이트를 고정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실린더의 압력을 받은 샤프트 프레스 기계가 움직이면 샤프트에 라미네이션과 코뮤네이션을 박는 소리가 쿵, 하고 울린다. 그 소리는 마치 회사 측과 노조와의 교섭이 매번 결렬될 때마다 내려앉은 노조원들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샤프트 프레스 기계를 빠져 나온 팔레트가 라미네이션에 파인 홈에 종이를 끼워 넣는 작업에 이르면 심장은 일 초 간격으로 스물아홉 개의 홈에 종이를 끼워 넣는 기계음에 맞춰진다. 홈에 종이가 삽입되는 소리가 낮게 내려앉은 심장을 들쑤신다. 단체협약을 위한 교섭에 응해줄 것을 회사 측에 타진해보지만 계속 묵묵부답이라고 어제 노조사무실에서 지부장이 말했다. 노조원들은 이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라고 강경한 입장을 제기했다.

날카로우면서도 탁한 기계소음 때문에 신경에 날이 선다. 팔레트는 작업 중 가장 어려운 W 모양의 코일이 삽입되는 것으로 넘어간다. W 모양의 한쪽이 홈에 끼워지고 조여지는 작업은 스무 가지의 작업 중 가장 불량이 많이 나는 공정이기도 하다. 코일이 조금이라도 비틀어지면 홈에 들어가지 않고 기계 틈 사이에 끼게 되고, 그러면 작업을 멈추고 코일조각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코일 삽입 작업이 끝나면 코일의 윗부분을 코뮤테이트에 고정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자동차 시동모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으로서 일명 아마추어다. 하나의 아마추어가 탄생하는 시간은 약 십여 분. 어느새 로딩 작업대 앞에는 전 과정에서의 작업을 마친 아마추어가 팔레트에 실려 들어오고 있다. 이동 박스에 담기 위해 팔레트에서 아마추어를 뺀다. 2킬로그램의 완성된 아마추어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얼마 전부터 결리던 어깻죽지에서 오늘은 저릿한 통증마저 느껴진다. 나는 한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아마추어를 떨어뜨리듯 이동 박스에 담는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노조지부장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금일 열두 시 삼십 분부터 삼십 분 동안 회사 정문 앞마당에서 파업 실시, 전 노조회원 참석 바람.' 폴더를 닫고 나는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달 전부터 노조는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를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노동청에 고소하고 쟁의조정신청을 거친 뒤였다. 생산2팀의 리더인 박 형은 사무실과 연결된 인터폰의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피부의 얼굴이 요즘 들어서는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마흔 다섯에 아직 장가도 가지 못한 박 형의 어깨는 날이 갈수록 좁아진다. 생산2팀의 리더라고는 하지만 회사에서 정한 정식 직책도 아니었다. 다른 사원들과는 달랐던 것은 팀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장 경력이 많다는 점과 회사 사무실로부터 업무지시를 하달받아 팀 내 사원들에게 전달하고, 생산 현황과 팀 내 사원들의 근태상황을 기록하고 보고 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더 높은 시급을 받는 데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수줍음 많고 호의적인 성격에 모두들 형님, 하며 따랐지만 노조가 만들어지고 난 후 그의 입지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 동생 하며 팀 내 사원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며 지내왔지만, 노조가 설립되자, 박 형은 여지없이 회사 측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것이 박 형의 자의가 아니라는 것은 그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B라인의 김이 고개를 살짝 젖히며 눈짓을 한다. 노조지부장에게 연락을 받았다는 신호다. 다른 팀원들도 핸드폰을 들추고는 이내 주머니에 넣는다. 알았다는 신호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로딩 작업대 앞에 놓인 팔레트에 제품을 꽂으려는 순간 현장 중앙에 난 통로로 진 이사와 윤 차장, 총무과의 김 대리가 들어오고 있다. 진 이사는 지난해 12월 어렵사리 노조가 설립되고, 회사 측에서 노조와의 원만한 교섭을 위해 영입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교섭은커녕 노사 간의 약속된 교섭 테이블에도 잘 나타나지 않던 그는 일하는 현장에서는 자주 모습을 보였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쓴 진 이사가 뒷짐을 진 채 현장 안을 휘 둘러본다. 윤 차장과 관리팀의 김 팀장도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현장 안을 주시한다. 웃음기 하나 없는 딱딱한 그들의 얼굴은 완강하다. 나는 쇠망치로 작업대를 두어 번 세게 내리쳤다. 현장에 진 이사가 떴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여기저기서 노조원들만 알 수 있는 둔탁하면서도 강렬한 소음이 들린다. 안경 너머로 진이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이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주말이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부유하던 나는 예전에 즐겨 찾던 인터넷 모형자동차 카페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부분파업을 시작하고 생긴 주말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자식처럼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한동안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여유시간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때때로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인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 측의 부당한 대우와 분열을 조장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불콰해진 동료의 쓸쓸한 미소에서, 그들이 허공을 향해 내뱉는 깊은 한숨에서 술기운 대신 괴로움이 묻어났다. 함께 나온 아내들의 소리 없는 한숨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강제로 주어진 여유시간은 더 이상 휴식의 시간이 될 수 없었다. 노조원 중의 누군가는 절반 이상 줄어든 임금 때문에 보다 작은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부양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나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예전의 습관대로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페라리, 도요타, 벤츠 등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자동차들과 모형제작기를 훑어보았다. 바디의 도색과정과 바디에 데칼을 붙이는 방법 등 치밀하고도 세세한 작업과정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다 인터넷 사이트의 웹페이지를 넘기면서 계속 무언가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포로 몇 시간씩 문지르고, 멋진 데칼로 장식한 화려하고 빛나는 자동차가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엔진의 작업과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모형이 작을수록 엔진은 미세한 배선을 연결하는 작업은커녕 도색조차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뭉뚱그려져 있기 일쑤였다. 웹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자동차 모형에 달린 뭉뚱그려진 엔진을 보면 볼수록, 나는 엔진 속을 눈으로 헤집고 있었다. 엔진 속 어디쯤엔가 놓여 있을 시동모터를 찾아, 그리고 시동모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아마추어의 전류를 가늠했다.

인터넷 웹페이지를 뒤적이는 것이 지루해 질 때쯤, 나는 시내에 있는 모형자동차 매장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모형자동차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버스 안은 서 있는 사람 없이 한적했다. 무심코 버스 안을 휘 둘러보다가 운전석에 앉은 버스기사에게 눈길이 갔다. 기사가 앉아 있는 좌석 주위로 요즘 들어 간혹 보게 되는 보호대가 둘러싸여 있었다. 보호대는 투명 플라스틱 재질로 된 것이었다. 운전을 방해하는 취객들로부터 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는 보호대. 결국에는 그것이 버스를 탄 승객 전체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기사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버스 내부의 한 귀퉁이에 설치된 작은 공간의 보호대 안의 기사는 버스 내 승객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로부터 이십 분쯤 지났을까. 버스 뒷좌석 쪽에서 타이어가 타는 듯한 매케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일부 승객들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기도 했다. 사람들은 연신 코를 막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버스 승객 중 양복차림의 한 사내가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친 발걸음으로 버스 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 좌석 주위에는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기사는 마스크를 쓴 상태였다. 사내는 보호대를 툭툭 두드렸다.

"저기, 버스 기사 양반. 지금 버스 뒷좌석에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납니다."

운전 중이던 기사는 힐끗 다가온 승객을 쳐다볼 뿐, 별 다른 반응이 없다.

", 이 양반이, 지금 버스 뒷좌석에서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데, 와 아무 대꾸가 없어요."

사내가 보호대를 거칠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기사는 흠칫 놀라며 버스를 길가에 세우더니, 쭈뼛쭈뼛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뒷좌석으로 다가왔다. 마스크를 벗고 냄새를 킁킁거리던 기사는 버스에서 내려 차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후 기사는 버스가 고장이 났다며 이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타야한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가 섰다. 기사에게 항의하던 사내는 버스 뒤의 보닛을 열어 안을 살피던 기사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보호대에 마스크까지 떠억 하니 끼고, 뭐 하는 짓이고. 지만 살겠다는 기가, ."

말끔한 양복 신사의 힐난 섞인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날카로웠다. 어쩌면 버스 보호대 안에 있는 기사가 승객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버스 내 승객들이 기사로부터 격리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기요, 여기, 지금 불이 났거든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연기가연기가 너무 많이 나서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주세요 .' 2003년에 있었던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를 보도하던 뉴스에서는 CCTV에 찍힌 한 여성의 모습을 내보냈다. 불이 난 지하철에 갇혀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된 것이었다. 암흑처럼 피어오르던 매케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눈물이 그렁한 채 CCTV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빛은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죽음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그녀, 그러나 살려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애원은 너무나 정중했고 그것이 소름끼치도록 슬펐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는, 그래서 죽음 직전의 상황에 처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졌을 그녀. 그러나 시커멓게 피어오르던 화염 속에서 그녀는 곧 쓰러졌다. CCTV 앞에서 애원하던 그녀도, 그날 화재참사에 희생된 백구십이 명의 생명들도 그들의 목소리는 외면당했다. 참사의 실질적 원인이 방화사고 후 지하철공사 직원들의 신고와 연락 체계상의 문제 탓인 것으로 확인돼 더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나는 갑자기 기도를 타고 울컥하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삼킨다. 겉으로는 '성실교섭' 운운하며 언제든지 교섭할 의양을 내비쳤지만 노조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수선한 현장 분위기를 감지한 회사 측에서는 미온적으로나마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경기불황이 그 이유였다. 환율상승, 주가폭락, 부동산 시장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집값은 천정부지로 급등. 미국의 경기불황의 여파로 위태로운 한국 경제상황이 연일 방송에서 보도되었다. 하루 열세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가끔씩 회사동료들과 간단한 술자리를 갖는 것이 전부인 생활에서는 그러한 우려들이 그다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외 펀드 붐이 일었을 때 넣어두었던 계좌의 돈이 절반이 넘게 날아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더구나 방송 뉴스에서는 제2IMF가 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보도를 연일 내보냈다. IMF. 온 나라가 유례없는 경기침체에 숨죽였던 때였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오직 생계를 위해 생산 현장직으로 와야만 했던 이유가 아니었던가. 수출에 의존하는 회사의 입장으로서는 불황의 세계적인 확산에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회사 측은 지난해 연말까지 현장 내의 모든 비정규직 사원들을 내보냈다. 현장 내에는 잔여 인력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생산 물량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학자금 지원 정책 또한 없어졌다. 야유회와 체육대회, 해마다 실시하던 가족행사와 유류비 지원 등도 끊겼다. 2년 동안 임금은 동결되었다. 매년 1700억을 전후로 한 매출을 올리고, 수백억의 이익을 남긴다고 했던가. 마치 어느 먼 나라의 이름처럼 낯선 이야기다. 노조설립이 비밀리에 성사되고 회사측과의 협상에서 얻으려 했던 것은 그것에 대한 공정한 배분도 아니었다. 회사 측은 노조원들의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회사 출근을 은근히 저지하는 듯했고, 대신에 연봉직들을 현장 내에 투입하여 생산 물량을 메웠다. 현장 사원의 자리에 연봉직들을 투입함으로써 소외와 박탈감, 그와 더불어 업무 지시의 불이행시 겪게 될 강제퇴사 조치에 대한 불안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어느새 코끝이 시큰해져 온다. 나는 차로를 달리는 차들에 눈길을 주며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좋은 회사, 능력 지급제로 공정한 회사임을 강조하던 회사 측은 느닷없이, 회사 측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시정을 건의하는 순간 노조와의 대화부터 봉쇄했다. 2월에 금속노조에 가입하여 회사 측과의 단체협약을 위한 교섭을 서른여덟 차례나 진행했지만, 그때마다 무산되기 일쑤였다. 회사 측과의 교섭이 무산될 때마다 지부장을 비롯하여 함께 참여했던 노조 간부들의 실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노조원들에게 전해졌다. 회사 측은 서로의 합의가 아닌 일방적 지시에 의해 현장 사원들을 움직이려 들었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유념하며 다닌 지 얼마 안 되어 모형자동차 매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상가에 위치한 매장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한쪽의 유리 벽면에는 여러 종류의 전시용 프라모델이, 다른 한쪽에는 판매용 모형이 든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주로 모형자동차가 놓인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상자를 열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엔진을 제대로 제작하려면 적어도 1 : 18 정도의 크기는 사야한다. 상자를 열어보니 형광등 불빛에 바스락거리며 빛나는 비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낱낱의 자동차 부품들은 사각의 러너에 고정되어 있다. 나는 비닐을 조심스럽게 들추고 자동차 엔진을 확인했다. 배선과 오일통로, 파이프 등이 장착되지 않은 엔진은 마치 생명선을 끊어 놓은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나는 엔진을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모형자동차를 골랐다.

 

오전 열 시.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현장 내에 있는 노조원들이 일제히 회사 정문 앞마당에 모여들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교섭이 결렬되자 특단의 조치로 단체조퇴를 단행하게 되었고, 오전 열 시 이후부터 장외투쟁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기혁 형님, 그거 압니꺼? 주철이 형님이랑 상열 형님 패거리들 있잖습니까, 그 형님들 모두 회사 쪽으로 넘어갔답니다."

같은 생산2팀의 정이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갓 스물두 살에 장가를 들어 벌써 초등학생 자식을 둔 정은 파업으로 인한 임금삭감에 누구보다도 초조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투쟁을 통해서 회사로부터의 좀 더 나은 대우를 믿고 있었다.

"열 명 모두?"

"."

전체 인원은 백구십팔 명, 그 중에서 노조가입 대상자는 백 명이었다. 전체 사원을 사무실, 기술지원팀, 현장팀으로 나누었을 때 중간적 위치에 있는 기술지원팀은 회사 측, 즉 사무실 쪽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현장 사원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회사 측의 압박은 그들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남은 것은 현장팀, 인원은 고작 육십 명 남짓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열 명이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노조 설립을 결심한 정예멤버들이 노조설립 초기부터 노조설립을 마땅찮게 여길 사원의 리스트를 뽑았었다. 슬그머니 설립 의사를 타진하여 가입여부를 권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회사설립 이래 몇 번의 노조설립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여파로 알게 모르게 노조설립에 힘썼던 사람들이 해고당한 사례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현장 내 사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의견을 타진하여 가입을 약속받았고, 심지어 누가 가입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더 이상의 인원이 빠져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 정문 앞마당에 모인 노조원 오십여 명은 사무실에 있는 회사 측 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투쟁을 해 나갔다. 그 와중에 금속노조 지부장과 몇 몇의 금속노조간부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조원들과 합세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진 이사가 안으로 들어가고 총무과 김 대리는 마치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로 노조원들을 주시했다. 투쟁은 점심시간까지 계속되었다.

"근데, , 회사 간부 중에 진 이사라는 사람 있잖습니까."

회사 인근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함께 자리한 금속노조지부장이 노조지부장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 얼마 전에, 그러니까 노조가 설립된 걸 회사 측에서 알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 아무래도 전문브로커 같습니다. 노조가 생기려고 한다든지, 이제 막 설립된 신생노조를 타파하기 위해 회사 측에서 전문적으로 노조를 깨러 다니는 사람들을 영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진동진이라고 했지요? 몇 년 전에 구미에 있던 한 전자회사 노조도 그 사람이 들어가서 깼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면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진 이사는 구미에 있던 전자회사 노조를 깨는 조건으로 회사 측으로부터 이 억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금속노조지부장은 말했다. 노조를 탄압하는 수법은 회사 측의 회유로 인한 노조 탈퇴와 노조간부들의 부당 징계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진한을 비롯한 그의 패거리 열 명이 일시에 노조탈퇴를 한 것이 진 이사와의 은밀한 면담이 있은 후라는 얘기도 나왔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 장외투쟁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상자를 열고 모형이 든 비닐을 뜯어냈다. 러너를 조심스럽게 들추어 엔진부터 확인한다. 다른 부품들처럼 엔진 역시 탁한 아이보리 색을 띠고 있다. 여전히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듯한 엔진을 손으로 한번 쓸어본다. , 하고 샤프트 프레스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낮고 둔중한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고, 엔진에 가 닿아있는 손끝으로 희미한 전류가 느껴진다. , 하고 들리던 샤프트 프레스 기계음은 어쩌면 노조사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한숨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숨쉬기의 신호를 알리는 것처럼 억울함과 분노, 좌절과 배신감으로 조여들었던 심장이 미세한 움직임의 박동을 내뿜고 있으니 말이다. 흑백의 희미한 바탕에 서서히 색깔이 입혀지듯 손끝에 흐르는 희미한 전류는 온몸으로 퍼진다. 엔진 부품들이 고정되어 있는 사각의 틀인 러너를 비닐에서 조심스럽게 꺼낸다. 깨끗한 흰 종이에 올려놓고, 러너와 부품이 연결되어 있는 게이트를 니퍼로 조심스럽게 자른다. 엔진이라고는 고작해야 뭉뚱그려진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 찾아 헤맨다. 이 작고 가벼운 어딘가에서 자동차에 에너지를 제공하게 될 동력이 숨어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이제 나의 심장은 빠른 박자로 뛰고 있다. 낮게 내려앉았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락커를 보관하는 공구함을 연다. 한 번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도색에 필요한 색들을 하나씩 사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게이트에서 떼어낸 엔진 부품들을 사포질해서 매끈하게 만든다. 장갑과 마스크를 끼고 실린더 헤드에는 반광 이탈리안 레드를, 실린더 블록에는 알루미늄 색을, 커버에는 무광 검정색을, 연료필터에는 유광 파란색을 칠한다. 락커를 뿌린 부품들은 가는 막대기에 끼워 스티로폼에 꽂는다. 전체적으로 골고루 마르게 하기 위해서다. 다 마른 엔진 부품들을 가조립 해본다. 탁한 아이리스 색의 엔진이 여러 색깔로 바뀌자 차가운 기운을 내뿜던 엔진에 생명의 기운이 도는 것 같다.

 

 

출근 준비를 서두르던 아침 여섯 시 반에 핸드폰 문자 알림 벨이 울렸다. '금일부터 회사는 직장폐쇄에 들어감. 노조사원들은 현장 출입을 금함. 각 가정에서 대기하기 바람.' 핸드폰 폴더를 여는 순간 액정 화면을 가득히 메운 글씨들이 날카로운 기운을 토해냈다. 잠시 숨이 멎은 듯 답답해졌다. 온 세상이 숨을 멈춘 듯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핸드폰 폴더를 닫으면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금속노조지부장의 말처럼 진 이사가 주도한 회사 측의 노조에 대한 태도는 비협조적이면서도 강압적이었다. 현장 내 사원들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에서 열 명의 사원들을 회유한 것도 진 이사였다. 어제는 노조지부장인 동우 씨가 회사 측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근무태만이 그 이유였다. 육 개월 동안 무임금 조치가 치러졌다. 일 년 전 결혼하여 만삭이 된 아내가 있었다. 노조원들은 돈을 각출하여 매달 노조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었다. 무임금 조치가 내려져 육 개월 간은 얼마간의 돈을 더 각출해야 했다. 이제 회사는 직장폐쇄라는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노조원들을 아예 현장에서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통근버스는 굳게 닫혀 있었다. 같은 팀의 현에게 연락을 해서 함께 회사로 출근을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 이미 연락을 받은 노조원들이 회사 정문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회사 측의 직장폐쇄는 정문 앞마당과 주차장을 포함한 회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지부장과 노조 임원들이 도착하자 정문 주위로 현수막을 내걸고, 스피커를 연결하는 등의 장외 투쟁 준비를 서둘렀다. 정문 밖의 오십 여 명의 노조원들은 회사 현관을 마주하고 섰다. 이에 대응하듯 연봉직들과 진 이사를 비롯한 회사 측의 무리들이 현관문을 막은 채 서 있었다. 그 중에는 노조에서 탈퇴한 진한과 그의 무리들도 있었다. 출근이 저지된 노조원들이 자칫 정문과 현장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전면적으로 막으려는 것이었다. 오전 여덟 시가 되자, 일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현장에서 회사 정문 앞마당으로 울려 퍼져 나왔다. 기계를 움직여야 할 사원들이 빠져나간 현장 안은 고요할 것이었다. 일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의 여운만이 묵직하게 내려앉을 로딩 작업대가 떠올랐다. 에어 벨브를 올리고,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팔레트에 제품을 넣어 센서를 누르면 곧바로 샤프트 프레스 기계가 움직일 것이다. , 하고 샤프트 프레스의 기계음이 들린다. 둔중하면서도 깊은 저음이 가슴 안 어딘가에서 울려 퍼진다. 이상하게도 이내 사라지고 말 것 같았던 울림이 내 몸 속에서 서서히 배회하고 있다.

"회사는 금일 공 육 시부터 무기한 직장폐쇄를 통보해 왔다. 지난 오월부터 우리 노조는 부분파업을 해왔고, 성실교섭과 준법투쟁을 준수하며 정상조업을 해 왔다. 그러나 회사 측은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는 부당노동행위인 직장폐쇄를 단행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노조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이에 우리 노조는 금일부터 직장폐쇄 철회 촉구 결의대회를 열 것이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그날까지 회사 측의 어떠한 부당행위가 가해지더라도 이에 즉각적으로 맞설 것이다."

노조지부장의 직장폐쇄 철회 촉구 결의 대회 선언이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낮게 배회하던 울림이 심장을 자극하고, 기도를 타고 올라온다.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라미네이션에 종이가 삽입되는 걸까. 호흡은 점점 빨라진다. 노동가요가 울려 퍼졌다. 머리에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채 노조원들은 오른 팔을 사선으로 들어 올리며 구령에 맞춰 노동가요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호흡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노동가요의 박자에 실린다. 노래를 부르자,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리듯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뜨거운 것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 온 몸의 땀구멍들이 일제히 열리는 듯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 노래는 점점 커지고 사선으로 들어 올리는 팔의 움직임은 거세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피커에 나오던 소리가 멈추었고, 갑자기 회사 현관을 에워싸고 있던 연봉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문의 양 옆으로 걸려 있던 현수막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조간부인 현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 일대에 있던 연봉직들이 한꺼번에 현에게 달려들었다. 용수철이 튀듯 연봉직들의 기습적인 움직임에 정문 밖에 서 있던 노조원들 역시 일제히 달려들었다. 기혁 씨, 하고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조지부장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한다. 촬영을 하라는 신호다. 나는 정문 옆에 있던 경비실 지붕위로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비추었다. 순식간에 정문 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 연봉직 중 누군가가 달려드는 현을 팔꿈치로 밀치고 현수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현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누군가의 발에 차이기도 했다. 일그러진 현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현수막을 걷어내고 있는 연봉직들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흠칫, 하마터면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현수막을 걷어내고 있는 이 중에 한 명은 이번에 노조를 탈퇴한 철한이다. 진한과 단짝으로 어울려 다니며 노조원들을 비웃던 놈이다.

정문 밖에 있던 노조원들이 정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백여 명 가량의 연봉직들이 그들을 막아 섰다. 처음엔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다가 밀리고 밀치는 몸싸움과 함께 욕설과 고성이 오갔다. 생산관리 차장이 대화로 해결하자며 노조원들을 설교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가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옆에 있던 김 대리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자신도 뭔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상관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린다. 현이 당한 부상으로 부지부장이 부른 모양이다.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자 노조원들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진다. 그 중에 연봉직 누군가가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넘어지고, 바닥을 뒹군다.

"사장 나오라케라. 사장, 이 새끼 나오란 말이다."

노조원 중 누군가가 울부짖는다. 연봉직들이 거세게 몸부림치는 노조원들을 밖으로 끌어낸다. 끌려 나갔던 노조원들은 다시 정문 안으로 들어온다. 엎치락뒤치락, 넘어지고 일으켜세우고, 발악하고, 울부짖는 소리에 온 세상이 흔들렸다.

결국 회사 정문에 있던 철문이 닫히고 노조원들은 정문 밖으로 모두 내몰렸다. 오십여 명의 숫자가 백오십 명이 넘는 연봉직들에게 맞서기에는 너무 벅찼다. 격한 몸싸움으로 대부분 노조원들 셔츠는 찢어지거나 흙투성이 되었다. 8월의 뙤약볕에 익은 얼굴이 땀과 함께 벌겋게 달아 올랐다. 숨을 몰아쉬는 목덜미에 핏줄이 선명하다. 다들 회사 측의 무력적인 대응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오전 여덟 시. 아침은 이미 거실에 들어와 있다. 지금쯤이면 회사 현장 내에는 작업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릴 것이다. 거실에 들어차 있던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지럽게 흩어진다. 에어벨브가 올려지고 실린더에 에어가 들어차는 소리가 환영처럼 들린다. 8월의 무겁게 떠도는 더운 공기의 정적을 깨고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로딩 작업대 앞으로 흘러들어온 빈 팔레트는 비어있을 것이다. 장전되기를 기다리는 탄창의 빈 약실처럼 공허할 것이다.

결의 대회가 있은 후에도 회사 측은 단체협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노동청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노조는 파업과 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자료들을 모아 법적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경기가 빠르게 회복 중이라는 방송보도가 계속됐다. 갑자기 생산물량도 늘었다고 했다. 회사측에서는 여전히 연봉직 사원들을 현장 내에 투입해 생산물량을 채웠다. 그러나 연봉직 사원 내에서도 서서히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작업은 밤 열한 시를 넘기기가 예사였고, 관리팀 여직원들까지 현장에 동원되었다. 온종일 서서 일하는 현장일은 무척이나 고됐을 것이다. 불만은 노조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회사 측과의 교섭이 장기전으로 갈수록 나타난 회의적인 반응이 오히려 젊은 층에서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평생직장이 보장되지 않는 현 시점에서 장기적인 파업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의 대회가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에 불안해했다. 단체협약에 미온적인 회사측과 장기적인 파업을 예상하며 냉소적으로 변한 노조 내부의 불만이 쉽사리 물러가지 않을 것만 같은 늦더위마냥 힘겹게 느껴졌다.

완강하게 버티고 선 햇살에 대항하듯 거실 한 가운데에 도색을 마친 엔진부품들을 늘어놓는다. 좀 더 실감나는 엔진을 위해 여러 종류의 배선을 부착하기 위해서이다. 가조립한 엔진에 예전에 썼던 오토바이 배기통으로 엔진오일 순환 파이프를 만들어서 단다. 연료를 공급하는 파이프로도 사용할 수 있다. 회사 공무팀에서 쓰던 고무튜브를 잘라 점화 플러그를 만들고 센서를 만들어서 함께 부착한다. 여러 배선들이 연결된 엔진의 몸체가 완성됐다. 수많은 정동맥을 거쳐 몸 전체에 피를 전달하는 심장처럼 엔진도 자동차를 움직이게 할 전류를 보낼 것이다. 완성된 엔진을 차체에 부착한 후, 가만히 차체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제야 제 기능을 발휘할 것 같은 엔진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 아홉 시. 야간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텅 빈 현장 안에 울려 퍼진다. 어두컴컴한 정적을 깨고, 굳게 닫힌 회사 정문의 담을 넘어온 내 심장을 들쑤신다.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 소리는 내가 일하던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손을 더듬어 에어 벨브를 올리자 작업대에 미등이 켜진다. 실린더에 에어가 들어차고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작업대에 가 선다. 벨트에는 이미 빈 팔레트가 올라와 있다. 나는 탄약을 장전하듯 라미네이션에 얇은 플라스틱 재질의 인슐레이션을 위아래로 감싼 것을 팔레트에 올리고, 센서를 누른다. 샤프트 프레스 기계가 움직이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코뮤테이트는 마치 챙이 좁은 중절모 같다. 샤프트에 라미네이션과 코뮤네이션이 연결되니 중절모를 쓴 눈사람처럼 생긴 것도 같다. 샤프트에 라미네이션과 코뮤네이션을 박는 소리가 쿵, 하고 낮게 울린다. 그 소리가 마치 숨쉬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듯, 나는 참고 있었던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는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아니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 심장, 그 태초의 박동 소리는 저렇듯 둔중하면서도 희미한 바람에 스멀거리는 안개처럼 깊고도 조용할 것이다.

샤프트 프레스 기계를 빠져 나온 팔레트가 라미네이션에 파인 홈에 종이를 끼워 넣는 기계에 이르면 심장은 일 초 간격으로 스물아홉 개의 홈에 종이를 끼워 넣는 기계음에 맞춰진다. 느긋하던 심장의 박동이 점차 빨라지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작업은 라미네이션 홈에 종이를 삽입하고, 컨베이어 벨트 라인 작업 중 가장 어려운 W 모양의 코일을 끼우는 작업이 끝나면 코일의 윗부분을 코뮤테이트에 고정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 된다. 그렇게 해서 자동차 시동모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으로서 아마추어가 완성된다. 어느새 로딩 작업대 앞에는 전 과정에서의 작업을 마친 아마추어가 팔레트에 실려 들어오고 있다. 스무 가지의 작업을 거쳐 들어온 아마추어는 기계가 내뿜는 열에 의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내 심장도 이렇듯 따뜻할까. 자동차 시동모터, 그곳에 회전력으로 발생한 전류를 공급함으로써 자동차를 움직이게 할 아마추어. 그러나 엔진에는 아마추어 말고도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연료의 공급과 오일, 점화 플러그, 그 모든 것을 제어하는 센서 등도 필요한 것이다.

6월부터 시행이 가능해진 복수노조설립을 위해 회사 측은 연봉직들을 대상으로 한 노조를 설립할 예정에 있다고 했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한 그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 현장 사원을 대상으로 한 노조에 압력을 가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나는 로딩 작업대에 들어온 팔레트에서 아마추어를 뽑는다. 장갑을 벗고 손에 쥔 아마추어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맨 손으로 이동 박스에 아마추어를 담는다. 브러쉬 홀더에 장착되어 엔진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심장 역할을 하게 될 아마추어는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따뜻하게 침묵하고 있다.

 

 

<당선소감>


내 기다림의 대상인 '세상', 이젠 두려움 없이 다가갈 것

 

기다림의 필요조건은 간절함이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다림은 애타게 기도하는 마음 외에 나 역시 기다리는 그 무엇에게로 다가가야 한다는 충분조건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공부하고, 마침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서야 내 기다림은 완성될 수 있었다. 물론 그 기다림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 뒤따르긴 하지만, 얼마 전 나에게로 날아든 '당선'이라는 선물로 인해 앞으로의 내 기다림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아 기쁘다. 그리고 내 기다림의 대상인 '세상', 그 세상을 좀 더 분명하고 냉철하게 보고, 그것에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아 행복하다.

'왜 너는 좁은 통로로만 세상을 보려 하느냐'라고 꾸짖으시던 박훈하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글쓰기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엄기학 씨, 그동안 나에게 많이 관대했던 것을 압니다. 팍팍한 세상살이가 당신 때문에 조금은 따뜻하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쌍둥이 언니인 최은희, 남동생 최준용과 그의 아내 영숙이, 기꺼이 내 문학적 동지가 되어주겠다고 했던 백미옥, 언제나 나의 소설을 읽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김영석, 김옥선, 우리의 창작공장 모임(안종준, 엄준석, 김유진, 박수진, 최동호) 여러분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저의 글쓰기에 희망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생각하고 공부해서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약력 1974년 부산 출생. 경성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심사평>


우직함과 균형감으로 노동현장 실감나게 형상화

 

최근 문화콘텐츠산업의 핵심적인 부문으로 여겨지면서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되고 있다. 이야기라는 용어의 범람과 함께 너도나도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지만, 정작 소설쓰기의 본원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신춘문예 심사에서 소설의 상품가치만을 따질 수 없음은 이로써 자명해진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8편 가운데 '로딩하는 남자''용목', 두 편을 두고 고심하였다. '로딩하는 남자'는 갈등을 빚는 노동현장을 다루고, '용목'은 남루한 삶을 버텨낸 한 소목장의 긍지에 초점을 둔다. 자동차 부품공장과 소목 장인의 공방이라는 전혀 다른 현장을 내세우지만, 인간 노동이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행위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이 다르다 할 수 없다. 두 작품 모두 일정한 수준과 장점을 지녔으나, 소설쓰기의 원칙에 보다 충실한 작품을 주목한 결과, 최은순의 '로딩하는 남자'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로딩하는 남자'는 서술자의 화려한 언술을 자랑하지 않으며 서술방식의 신기성을 무기로 삼지 않는다. 멋부림이 아니라 우직함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소설쓰기의 미덕이라 한다면, 그 사례로 단연 '로딩하는 남자'를 꼽을 만하다.

또 우리 사회가 당면한 노동의 문제를 다루되, 노동은 상품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심장을 부여하고 혼을 불어넣는 일이라는 것, 노동자 또한 피와 살을 지닌 생명체로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꿈꾼다는 사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제시한다. 특정한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노동현장의 리얼리티를 이 정도로 실감나게 형상화한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다른 한편, '로딩하는 남자'는 작중인물들에게 고유한 개성을 부여하고 복잡한 심리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여 성격창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노동현장의 여러 전문용어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견인하는 점, 균형적인 시선과 생생한 인물형상화로 볼 때, '로딩하는 남자'에 작가의 풍부한 인생체험과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반영되었다고 믿을 만하다.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와 함께 우리 소설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활동을 기대하며, 다른 응모자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이호철(소설가) 황국명(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