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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나무는 끌 맛을 안다. 끌 날이 제 살갗에 파묻혀오면 어떻게 갈라지고 쪼개질 것인가를 끌 날의 진동으로 안다. 끌 자루를 잡은 손이 떨렸다하면 나무는 앙탈을 부리며 제멋대로 틀어지고 쪼개진다. 가구 생채기에 꽃문양을 덧새길 때는 서두르면 안 된다. 무협지 한두 권 읽을 만한 짬이 있어야 하고 끌 자루에 쏠린 힘을 덜어낼 줄 아는 요령도 있어야 한다. 애끓게 하는 여자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듯 나무를 톡톡 두드리고 달래면 꽃은 음양까지 드러내며 피어날 것이다. 내 끌은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처럼 늘 발끝을 곧추세워 사뿐거릴 준비를 하고 있다.

트럭 바퀴가 돌길을 짓누르는 소리가 빠그작빠그작 들린다. 박은 방금 내가 짰던 주문 가구를 모두 싣고 내려갔다. 나는 가구가 치이지 않도록 가구와 가구 사이에 담요를 끼우고 고무 밧줄로 단단히 여며주었다. 가구가 놓였던 바닥을 발로 휘젓듯 걷는다. 톱밥 가루가 풀풀 날린다. 햇빛에 휩싸인 톱밥 가루는 뿌옇다. 내 발걸음 소리와 헛기침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린다. 가구는 바닥만 차지했던 게 아니었다. 허공마저 텅텅 빈 소리를 낸다. 작업대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연장들, 벽에 세워진 각목과 판재, 자투리 목재와 톱밥과 대팻밥을 쓸어 담은 자루, 시큼한 목재 냄새가 밴 실내는 영락없는 목공소다. 뜰이나 산길 가에 붙은 '찻집 아드반'이라는 푯말이 없다면 이곳이 한때 찻집이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찻집 주인이 작년에 죽자 주인의 아내가 이곳을 헐값에 내놓은 걸 박이 샀다고 했다.

한쪽에 밀쳐둔 물푸레나무 서랍장을 한복판에 끌어당긴다. 물푸레나무 서랍장은 주문 가구는 아니다. 생나무로 서랍장을 만들어 보고 싶어 비탈에 우거져 있는 물푸레나무 중 한 그루를 솎아 왔다. 생나무는 끌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다. 끌날이 목재에 꾹꾹 박히기만 했다. 직각 끌로 제비초리를 따낼 때 나무 조각이 쉽게 떨려 나오지 않았다. 나무심지가 끌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끌을 부린 나는 끌이 나무 맛을 보는 게 아니라 나무도 끌 맛을 본다는 것을 잊었다.

서랍장 문짝에 손잡이를 달고 위판과 문짝에 찍힌 생채기를 다듬고 나면 나는 이곳을 떠난다. 인도네시아에 가 있는 여동생한테 요즘 자주 전화가 온다. 여동생은 나더러 어서 그곳으로 오라고 닦달을 했다. 동생 식구들은 매제의 사업체를 따라 모두 인도네시아로 갔다. 가면서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아내가 떠나면서 아들을 동생 집에 맡겼다. 그 후 아들은 계속 동생 집에서 살았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열흘쯤 되었을 때 아들은 떠났다. 나는 아들 배웅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일손이 잡히지 않아 몇 시간 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계곡물에 빠져 있다 나왔다. 뿔뿔이 흩어진 세 식구가 다시 뭉쳐질 날은 언제인가, 하는 물음만 새겨졌지 답은 없었다. 아내가 아들을 동생 집에 데려다 놓던 그날에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아내는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뒤, 지방의 지역번호가 뜬 공중전화가 띄엄띄엄 왔지만 받으면 저쪽에서 덜컥 끊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끊어버릴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손에 꼽을 것도 없을 만큼.

박이 가구 주문자를 소개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며칠만 머물고 떠나려고 했다. 주문자가 주문한 것은 책상 하나였다. 느티나무로 판재를 짠 책상은 넓고 묵직했다. 사각 테두리마다 끌로 파내어 층을 이루었다. 정교한 끌질이 필요했다. 주문자는 책상을 보고 나더니 장롱 빼고 여러 가지 가구를 다시 주문했다. 그 주문 가구를 만드는 데 석 달가량 걸렸다. 줄로 톱을 갈고 숫돌에 대팻날과 끌 날을 갈 때는 처음 목공 일을 배우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서름했다.

"자네 끌질 솜씨는 여전해. 이런 연귀맞춤 좀 보라니깐, 공예가구 매장에 깔린 가구도 이렇게 매끈하지는 않을 걸세, 허허허."

박은 가구 주문자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주문자는 가구를 샅샅이 살피며 목재로 쓰인 나무 이름들을 물었다. 목재는 모두 박의 제재소에서 갖고 왔다. 느티나무, 박달나무, 참나무, 은행나무까지 모두 귀하고 비싼 것들이었다. 장식장으로 짠 박달나무는 박의 제재소에도 없는 목재여서 여러 군데 연락을 취해 어렵게 구한 목재였다. 어서 새집에 들여놓고 싶네요. 집에 가구가 없으니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은 것처럼 초조해요. 다탁, 장식장, 식탁, 화장대, 서랍장, 책상 등이 놓일 자리가 비었다면 주문자의 집은 헝클어진 퍼즐 판처럼 보일 것 같았다.

박은 목재를 갖다 주러 올 때가 아니라도 이곳에 자주 찾아왔다.

"노가다 하는 맛은 새참 먹는 재미 아닌가, 허허허."

박은 엄지로 맥주 캔 따개를 철컥 밀어 올려 내게 건넸다. 박의 벌어진 윗니를 볼 때마다 장붓구멍을 한꺼번에 두 개씩 파내는 쌍장부끌 머리가 떠올랐다. 쌍장부끌의 두 날 사이로 목재 부스러기가 밀려 나오듯 벌어진 박의 두 윗니 사이로 톱밥 가루 같은 웃음이 나왔다. 화장대 다리의 휘어진 곡선을 잘 자르려면 직소의 톱날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럴 때는 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소의 앙칼진 쇠 날 소리는 박의 말을 댕강 잘라냈다. 직소 날이 지나간 목재에서 톱밥 가루가 날렸다. 박은 예전 나와 함께 목공소에서 일했던 시절이나 제재소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목공소에서 늦게까지 일하다 목재 더미에 걸터앉아 박과 술을 마신 일, 자루에 톱밥을 담아 돼지 막사를 하는 사촌 형한테 실어다 준 일들이 아련하게 스쳤다. 기둥만 보면 목재로 보이고 쇠 날만 보면 연장으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루빨리 목공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때였다.

양지바른 산 중턱, 오후 두 시의 햇빛은 내 머리에 꼬물거리는 생각까지 꿰뚫을 것처럼 환하다. 오후 두 시의 햇빛은 아무것도 가릴 수 없는 진실의 시간인 것 같아.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도록 모든 게 환하게 다 비치잖아. 수필을 배우러 다니면서 아내의 어법은 모호해졌다. '원가 세일'이라고 쓰인 커다란 한지가 창을 가렸지만, 햇빛이 한지를 뚫고 들어와 매장 안을 후덥지근하게 데웠다. 그때 아내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 말대로 진실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매장 뒷문으로 나간 아내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손님 하나 들어오지 않는 오후 두 시이기도 했다.

서랍장 위판은 따끈하다. 경첩을 달았다. 희붐한 나무에 백동 경첩은 깨끗하다. 철물점 사내는 구릿빛 배목과 받침쇠를 꺼내보였다. 흰 빛깔의 물푸레나무가 마르면서 색이 변할 것을 고려한 나는 한사코 백동 장식을 집었다. 끌로 배목의 구멍을 뚫는다. 받침쇠를 받쳐 펜치로 구부린 배목을 망치로 몇 번 친 뒤 문을 여닫고 몇 발 물러선다.

집배원이 창안을 힐끗 보며 뜰을 지나간다. 뜰 안쪽의 벚나무 둥지에 매달린 새집은 영란의 우편함이다. 끌을 놓고 담배를 피워 문다. 배달부는 어느새 오토바이를 타고 뜰을 빠져나간다. 처음 내가 배달부를 봤을 때 배달부는 영란에게 온 우편물을 돌확에 넣으며 이 여자가 여기 떠난 지가 언젠데, 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 여자 알아요? 하며 우편물에 쓰인 이름에 손가락을 짚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드반' 주인의 내연녀였던 영란에 관해서는 철물점 사내에게 가끔 들었지만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 배달부는 나에게 이곳의 새 주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새 주인의 친구라고 했다. 그는 또 쌓여 있는 목재와 널브러진 연장을 보고 이곳은 목공소로 바뀌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영란은 이곳에 대여섯 번 다녀갔다. 우편물을 가지러 왔다가 내가 작업하는 옆에서 몇 시간씩 어슬렁거리다 가곤 했다. 아드반은 인도 말인데 구도자라는 뜻이래요, 구도자. 찻집 이름 치고 좀 그렇죠? 돈을 떼이지 않았다면 내가 이곳을 사서 계속 찻집을 했을 거예요. 말대답하지 않으면 영란이 나갈 줄 알았다. 영란은 주방을 뒤져 커피를 끓여 작업대에 올려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손님들한테 찻물을 끓여내고 한가할 때는 그 사람과 뒷산을 걸었어요. 빈털터리가 된 나를 그 사람이 이곳으로 데리고 와 주었는데……. 탕탕탕. 끌 갱기에 망치 때리는 소리 사이로 영란의 주절거림은 이어졌다. 저 나무 둥치를 바지랑대로 삼아 줄을 치고 빨래를 널었어요. 나는 빨래라는 일상어를 참 오랜만에 들었다.

새집에는 우편물이 제법 쌓였다. 죽은 '아드반'의 주인에게 온 골프회원 정보지와 영란에게 온 휴대전화 요금청구서가 맨 위에 있다. 새집을 만들어 달기 전에는 돌확에 담긴 우편물이 바람에 날려 연못에 빠지거나 뜰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내게 주소가 생길 때까지 이곳에서 우편물을 받아야 해요. 영란은 연못에서 건진 우편물을 목재 위에 펼쳐 놓고 자투리 목재와 못과 망치를 들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우편함을 만들어야겠어요. ! 못은 저만치 튕겨 나갔다. 나는 대패질을 멈추고 영란의 손에서 못과 망치를 받아들었다. 영란이 만진 판재에는 우그러져 박힌 못이 여러 개 있었다. 나는 휘어진 못을 노루발장도리에 끼워 뽑아냈다. 뽑아낸 못자리에는 검은 구멍이 생겼다. 버릴 목재라도 목재에 박힌 못을 다 뽑아냈다. 바닥에 깔린 각목이나 판재에 못이 박혀 있는 줄 모르고 밟아 발바닥이 욱신거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알량한 쇠침 하나가 며칠을 절룩이게 했다. 나는 펀펀한 자투리를 골라 넓은 맞배지붕을 한 새집을 만들어 영란에게 주었다. 새가 제집인 줄 알고 날아들어 올 것 같아요. 새집을 치켜든 영란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못 함부로 치는 것 아닙니다."

나는 새집을 벚나무 둥치에 매달아주면서 낮게 말했다. 나의 집은 목공소 골방이었다. 박은 신방을 목공소 골방에서 차린다고 나를 나무랐다. 대부분 여자들은 가구가 잘 갖추어진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고 일러주었다. 마련해둔 아파트와 목공소는 한참 떨어져 있어 목공소를 신방으로 차리자고 한 사람은 아내였다. 일꾼들이 몇 명 있어도 대팻밥과 톱밥을 쓸어내는 일과 사포질 등을 아내가 거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바빴다. 아이가 생기면 살림집을 따로 이사하기로 했건만 약속을 지킬 시간이 없었다. 아들이 학교 갈 때쯤이면 어떤 일을 제치고라도 학교 가까운 곳에 살림집을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사람은 영란뿐 아니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 중 유리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실내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는 문을 밀고 들어 와 이곳이 찻집이었던 때를 들먹이거나 가구를 주문해도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가 그랬듯이, 영란이 그랬듯이 여자들은 가구 만드는 걸 구경하고 싶어 했다. 한참 구경하고 나서 가구를 갖고 싶다고 했다. 여자들은 빈 곳만 보면 가구를 놓고 싶어 했다. 그녀들은 갖고 싶은 가구가 보이면 멀쩡한 가구를 들어내고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았다. 가구의 쓰임새를 생각하기보다 그 가구와 공유할 사람이나 물건을 생각했다. 그런 다음 가구 앞에서 야금야금 환상을 키우는 것 같았다.

아내에게 짜주었던 서랍장은 그대로 혼수품이 되었다. 아내는 산을 오르내리면서 목공소 안을 자주 기웃거렸다. 산 어귀에 목공소를 차리자마자 주문 백골을 짜기 바빴던 서른 무렵이었다. 가끔 아내의 손에 망개 열매 줄기나 억새 다발이 들려 있을 때도 있었다. 아내가 두고 간 망개와 억새는 목재더미 위에서 며칠 계속 말라갔다. 억새 비늘이 떨어져 톱밥 가루에 쌓였다. 아내를 기다리던 내 마음은 마른 억새 줄기 같았다. 억새처럼 역광을 받아 한없이 반짝일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느 날 나타난 아내는 서랍장을 주문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내가 짠 백골은 공예장이나 칠기장에 대주기도 바빴다. 개인한테 주문까지 받을 틈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말쑥하게 켜낸 미송으로 아내에게 서랍장을 짜 주었다. 깍지를 꽉 낀 모양의 장부사개맞춤의 단단한 짜 맞춤으로 테두리를 쳤다. 그 무렵 아내한테 청혼했다. 가진 것이라곤 목공 연장뿐이라며 어설프게 마음을 전했다. 결혼 후 아내는 서랍장에 반달 모양의 거울을 올려놓고 화장대로도 썼다.

함석류. 아내 이름이다. 속을 파헤치는데 칼이 필요 없는 유일한 과일은 석류다. 석류는 때가 되면 저 스스로 갈라 질 줄 알기에 사과나 배처럼 칼을 맞지 않는다. 아내는 석류답게 제 속을 스스로 열었다. 석류답게 속을 드러내고서도 투명함으로 속을 싸고 있었다. 탱글탱글하게 여문 알맹이들은 끌 날로 찍어 터뜨려버리기 좋았다. 아내는 추궁도 의심도 할 기회마저 주지 않고 놓아달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빚 독촉과 생활고에 허덕이게 한 것, 일터를 따라 지방을 다니느라 아내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 어두컴컴한 반지하나 골방 신세만 지게 한 것, 나는 아내를 잡을 언턱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품었던 고마움과 미안함은 분노와는 결코 맞먹지 못했다. 아내의 남자는 수필 쓰는 사람이라 했다. 수필 쓰는 사람,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숫돌 가는 사람으로 들렸다.

무언가가 명치에 걸려 삭여지지 않을 때면 작업순서를 어기면서 대패 자루를 잡았다. 대패 자루에 힘을 넣어 나무를 한 켜 한 켜 벗겨 냈다. 당신한테 나무뿌리 냄새가 나, 하고 내 품을 파고들던 아내의 목소리를 걷어내듯 목재를 벗겼다. 대패는 감질났다. 아내와의 기억들을 도려내야 했다. 널브러진 연장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져보았다. , 망치, , 도끼, 송곳, 대패 등 연장들은 하나같이 쇠 날에 나무 자루가 달려 있었다. 나무 자루만 없다면 연장들은 그대로 흉기였다.

배달부의 오토바이는 숲에 가려 보였다 말았다 한다. 찾아가야 할 주소를 정확히 쥐고 떠나는 배달부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다. 나도 배달부의 나이쯤이었던 서른 중반에는 이사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다. 밤새 사포질을 해서 백골을 완성하던 때였다. 서른 후반부터는 가구업계에 불어 닥친 회오리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 회오리가 마흔 중반인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값싼 수입가구가 들어오던 때와 맞물려 새로 짓는 아파트마다 붙박이 가구를 짜 넣었다. 가구는 신발 사듯 쉽게 사고 헌신 버리듯 훌쩍 버리는 품목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새 가구를 사는 것보다 헌 가구를 처분하는 걸 먼저 걱정하기 시작했다. 백골을 짰던 내 손은 한가해졌다.

일찍 제재소에 발을 들여놓은 박의 처세가 남달라 보였다. 나와 같은 공고를 졸업한 박은 기계공구 가게의 점원을 했다. 공구에서 나는 쇳내와 공구가게 골목에 풍기는 기름 냄새가 싫다던 박을 내가 목공소로 이끌었다. 나는 공고를 졸업하자마자 목공소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박이 아교풀을 녹이거나 대팻밥과 톱밥을 난로에 던져 넣을 무렵 나는 톱질과 대패질은 물론이고 끌로 촉과 홈을 따내고 있었다. 목공소 일꾼들이 내게 기술을 빨리 익힌다는 소리를 하던 때였다.

연못 안의 분수대에는 부레가 엉켜 있다. 연못의 물비린내를 없애려고 모터를 끼워도 인공 분수대는 작동되지 않았다. 돌 틈의 창포 잎이 누렇다. 창포는 초가을까지 폈다 졌다 했다. 돌에 담배를 비벼 끈다. 창포 꽃잎은 어깨까지 늘어뜨린 아내의 웨이브 머리카락 같았다.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 아내는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면서 백화점 문화센터에 수필을 배우러 다녔다. 아내가 목공소 마당에 세워둔 장롱백골을 그늘 삼아 앉아 책을 읽는 모습과 미니 옷장 앞에 엎드려 무언가를 끼적이던 모습들이 그때야 뇌리에 되살아났다. 아내는 수필을 배우러 갈 때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숄더백을 멨다. 그 모습은 아내와 썩 어울렸다. 나는 돌길을 내려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뾰족구두가 산길을 디디는데 좀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가 풀썩거려야 아내 주위를 돌아보았다.

박은 싱크대나 신발장을 짜주는 작업장을 차리는 게 실속 있는 사업이라 내게 귀띔을 해 주었다. 아파트 리모델링이 한창일 때 싱크대와 신발장은 괜찮은 일거리이긴 했다. 사포장이, 백골장이, 칠장이 중에도 그쪽으로 발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전통공예가구 판매장 상가에 원목공예장을 얻어놓은 상태였다. 목공예 가구도 팔고 원목 가구를 주문도 받는 일을 겸하고 싶었다. 내 매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내 가구가 비싸다고 했다. 유명 브랜드 가구를 사는 게 낫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브랜드가 없는 원목 가구가 유명 브랜드의 티크 가구에 밀리는 것은 질보다 메이커를 따지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박이 말했다. 내놓은 매장은 보러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아내한테 매장을 맡기고 나는 일터를 찾아 나섰다. 월세라도 벌어야 했다. 건물 철거작업에 끼어 들무새로 일하던 중 내가 아는 백골장이한테 아파트 공사 건에 합류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아파트는 지방에 있었다. 긴 공사였다. 우리는 붙박이 가구 팀에 소속되었다. 지방의 숙소에서 나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매장을 처분하고 남은 돈을 고스란히 내 통장으로 다 넣었다고 했다.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가 되었으니 잘 챙기라는 말까지 했다. 미안해요. 뜬금없는 존댓말이었다. 아내가 정말로 내 안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것 같았다. '우리 매장에 좋은 목재로 만든 가구가 꽉 찼는데 나는 늘 가구가 고프다'라고 쓰여 있는 컴퓨터 화면에 뜬 아내의 글을 읽었을 때 징조를 알아차렸다. 어서 수필가로 등단하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말을 꼰다고 좋은 글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그것은 아내의 어법은 아니었다. 아내의 어법은 단도직입이었다. 나는 수필은 잘 몰라도 아내를 수필보다는 많이 알았다. 아내는 어디선가 자꾸 때를 묻혀오고 있었다.

실내는 후끈하다. 밖은 으슬으슬했다. 차가운 산 공기는 벌써 초겨울 날씨 같다. 서랍장 위판의 거스러미는 끌 날이 빗나가면서 생긴 것이다. 생나무에서 생기는 금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는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 낸 생나무의 금은 완벽한 무늬라고 표현했다. 아내가 글의 소재로 연장이나 나무를 삼으니 목공소 전체가 그럴싸해 보이기도 했다. 수필 선생님이 내 글은 티는 묻지 않았는데 끌질이 많이 필요하대. 아내는 선생한테 평을 받은 글을 내 옆에서 읽어 주었다. 나는 작동하던 직소를 멈추고 아내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나는 글을 듣는 동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에 넓은 책상이 놓인 아내만의 서재를 꾸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왼손잡이시네요. 장식장 장부맞춤을 튼튼하게 하려고 산지못 끼울 자리에 홈을 파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영란이 말했다. 끌 자루를 쥐고 끌 끝을 목재에 찍는 오른손이 엷게 떨리던 순간이었다. 왼손은 망치를 잡아야 했다. 망치를 잡은 왼손과 끌을 잡은 오른손의 힘 조절이 어려웠다. 나는 왼손잡이는 아니다. 섬세함과 힘이 필요한 일은 오른손으로 할 수 없다. 신경이 죽은 엄지와 검지는 숟가락도 겨우 걸친다. 목공 일의 절반은 연장 다루는 솜씨라는 선배들의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스크롤 톱으로 목재를 자르다가 톱날에 오른손이 스쳤다. 살갗이 헤벌어져 뼈가 보일락 말락 했다. 날이 촘촘하고 예리한 전기톱은 어떤 연장보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보호대를 끼지 않아 톱밥이 눈에 튀어 안질이 뻑뻑하고 따가웠지만, 피가 흐르는 손가락부터 얼싸 매야 했다.

 

스크롤 톱뿐만 아니었다. 쌓아둔 목재가 떨어지는 바람에 어깨에 타박상을 입은 것부터 크고 작은 사고는 잦았다. 코드를 꽂은 채 그라인더 쇠 날을 갈다가 스위치를 건드려 쇠 날이 그르렁거리며 허벅지에 달라붙어 살점이 찢겼다. 땀을 닦으려다 들고 있던 기역자 쇠자로 이마를 쳐 이마가 찢어졌던 일, 초보 시절에 망치로 손을 내리쳤던 일, 끌로 손바닥을 찢은 것은 흔하디흔한 사고였다. 모두 내 손에 익은 연장들이었다. 손에 익은 연장들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조그마한 다탁처럼 조용한 아내를 꼬드겨낸 것은 수필이라고 판단했다. 수필을 핑계로 바깥을 돌고 싶어 한 사람은 아내였으리라 단정 지었다. 아내는 책에 골몰해 있다가 가끔 저녁 지을 때를 놓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막막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목공인 내가 아니라 함께 머리 맞대고 글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야 했을 것 같았다. 나무를 어루만지며 묵묵하게 연장을 만지는 내가 좋았다는 아내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장롱 백골을 짜서 세워놓고 바라보며 집 한 채 지은 듯이 뿌듯해 했던 것이 내 객기가 아니었든가 하는 회의마저 처음으로 일었다.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것이 아교처럼 녹았다, 굳었다 반복하며 내 속에 진득거렸다.

아내와 아내의 남자가 어느 등꽃 아래나 강변에 앉아 있는 모습들만 상상이 됐다. 그런 상상이 뻗치면 잠을 뒤척였다. 감쪽같이 해치우는 데는 평끌 한 자루면 충분했다. 끌은 나무만 갉작대려고 생긴 것은 아니었다. 끌 본래의 쓰임새는 분명히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연장 가방을 끌어 엎어 쇠 날을 모두 집어 들었다. 묵중하면서 날렵한 것은 끌 만한 것은 없었다. 쌍장부끌, 밀이 끌, 평끌, 각진 것부터 골라 숫돌에 갈고 또 갈았다. 손이 붓도록 숫돌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숫돌에서 떨어져 나앉았다. 젖은 숫돌은 가슴팍이 움푹 꺼져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숫돌은 아귀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정작 갈았던 것은 끌이 아니라 숫돌이었다. 나는 갈았던 끌을 톱밥에 묻어버렸다. 아내를 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징조가 가장 무서운 흉기라는 것을.

서랍장은 환하다. 덜 마른 목재치고 서랍은 부드럽게 열고 닫힌다. 서랍장 문짝의 금 간 것도 꽃문양을 덧새길 자리다. 가는 평끌을 곧추세운다. 끌 자루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하면 조각칼이 아니라도 가는 선을 그릴 수 있다. 연장 가방에 든 끌은 종류와 크기 별로 다양하다. 평끌, 밀이 끌, 훑이기 끌, 둥근 끌, 직각 끌, 가는 평끌, 쌍장부끌 등이다. 좋은 연장을 보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사 놓곤 했지만 좋은 끌은 더 탐을 냈다. 새 백골을 짤 때면 판재를 자르기도 전에 끌부터 숫돌에 갈아놓아야 일손이 잡혔다.

아파트 공사는 거의 열 달가량 걸렸다.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모르게 나는 몇 달을 돌아다녔다. 잊고 있었던 동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내 휴대전화에 자주 걸려오는 지방의 지역번호대로 트럭을 몰고 몇 번이나 돌기도 했다. 내 촉각을 곤두세우는 소리 없는 침입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도시 전체는 군데군데 호수였다. 모든 여자가 아내같이 보였고 모든 남자가 아내의 남자같이 보였다. 떠돌다 발길이 닿은 곳은 동생 집이었다. 아들 얼굴은 막 켜낸 판재처럼 까칠했다. 아들 책상 위에 놓인 '2 수학'이라는 표지를 못 봤다면 나는 아들이 몇 학년인지 물을 뻔했다. 나무도 한창 물이 오를 봄과 여름에는 둥치를 건드리지 않았다. 도끼나 톱날이 지나간 나이테에 퍼런 곰팡이가 피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많은 옹이를 박은 것 같았다. 동생 집에서 며칠 좀 푹 쉬라는 동생 부부의 말을 뿌리치고 나는 박을 찾았다.

박을 찾던 발걸음은 무거웠다. 좀 오랫동안 외면했던 박이었다. 박은 매일 본 듯 태연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제재소는 송진 냄새로 진을 쳤다. 일꾼들은 막 부려놓은 통나무들을 쌓고 있었다. 제재소 마당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당에는 판재들이 우물 정자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쟁여진 판재들은 박이 닦아온 시간의 흔적처럼 단단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박은 더는 내게 제재소에서 함께 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파트 공사를 가기 전에 박의 제재소에 오라는 제의를 끈질기게 받았지만 나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했다. 자네한테 보여줄 게 있네. 통나무 껍질을 벗기는 깎낫 질을 하는 내게 다가와 박은 트럭에 나를 태웠다.

"어떤가, 이곳."

뜰에 쓰레기와 잡초가 뒤섞여 있던 '아드반'이었다. 산과 계곡을 낀 전망이 트인 곳이었다.

"저기 바위 위에 물푸레나무 좀 봐, 싹 베어와 궤짝 짜서 팔까?"

나는 박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았다. 바위 아래의 계곡에서 물이 요동치는 걸 보고 있었다. 피서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깊은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렸다. 여자가 물에 잠겼다 솟아올랐다 하면서 튕겨내는 물보라가 허공에 부서졌다. 한 사내가 바위에 여자를 건져 올렸다. 아내도 여자처럼 딱 죽음 직전의 까무러침과 죽음 직전의 허우적거림만 맛보았으면 싶었다. 매미 소리와 계곡물 소리 때문에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했다. 박이 바짓가랑이를 걷고 계곡물에 들어가는 걸 보며 나는 눈길을 비탈에 두었다. 짙푸른 숲이었다.

그날 이곳에서 박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나는 이곳에 며칠 묵고 싶다는 말을 했다.

"며칠만이 아니라 자네 있고 싶은 대로 있게. 나는 자네가 연장을 그렇게 오래 묵히는 게 답답하다구, 나나 자네나 나무 붙들고 살 팔자 아닌가."

박의 목소리는 실내에 울렸다. 희붐한 외등이 어둠 속에 떠 있었다. 외등 주위로 모기인지 하루살이인지 모를 벌레들이 우글우글 맴돌았다. 박은 창을 활짝 열었다. 파스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국도를 달리는 차들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술을 마시는 동안 박은 내가 이곳을 가꾸고 지키면서 목공 일을 하기 바란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팔뚝에 앉은 모기들을 철썩철썩 내리쳤을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매제가 나에게 일손을 청하는 것을 거절할 변명거리도 없었거니와 아들 곁에 있을 겸해서 곧 인도네시아로 갈 예정이라는 말은 천천히 하려고 했다.

박은 이곳을 보자마자 나를 떠올렸다 한다. 나는 이곳을 보자마자 예전 내가 하던 목공소를 떠올렸다. 산길 모퉁이에 버려진 신발짝과 빈 병 등이 흩어져 있고 폐타이어 구멍으로 엉겅퀴나 잡초들이 돋은 것, 그 주변으로 햇볕에 겨운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까지 예전 내가 하던 목공소 주변 모습 그대로였다. 비탈에 상수리나무와 오리나무가 우거진 것까지 내 목공소와 같았다. 산 어귀에서 업어달라고 보채는 아들과 아들 앞으로 등을 내미는 아내가 없을 뿐, 영락없는 내 목공소가 있던 곳이었다.

목재와 합판이 쟁여진 곳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둘이 함께 막걸리를 마시던 일, 아내 손을 잡고 한밤에 암자를 올랐던 일, 백골을 트럭에 가득 싣고 아내를 옆에 태우고 배달을 갔던 일, 배달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매화 축제가 유명한 지방으로 핸들을 꺾었던 일, 아내가 새참으로 내온 국수를 일꾼들과 둘러앉아 먹던 일 등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에 며칠 묵다 보면 내 속에 똬리를 튼 망념들이 헝클어질 것이라 믿었다. 아니 헝클어뜨리고 싶었다. 술을 마시는 내내 박이 아무 것도 묻지 않아 고마웠다.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받으면 끊어버리는 좀 전 그 지역번호다. 요즘 이 전화는 자주 온다. 신호음이 한참 울린 뒤에 받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수화기를 귀에 대고만 있어본다. 저쪽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공중전화기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저쪽에는 빵빵거리는 차 소리만 들린다. 전화를 끊고 끌을 잡는다.

서랍장 생채기를 화심으로 삼아 꽃을 갉작갉작 그린다. 가는 꽃문양이 새겨지는 자리마다 물비린내와 습한 흙냄새가 섞인 듯한 생나무 냄새가 난다. 나뭇가루가 날린다. 끌 자루를 잡은 손에 느슨하게 힘을 풀어 포개진 꽃잎 안쪽 선을 다독이듯 민다. 자잘한 금을 꽃술로 삼아 가는 평끌 끝을 쓱싹쓱싹 그린다. 안쪽으로 오므린 꽃잎 부분을 지날 때 끌 자루에 힘을 살짝 뗀다. 내가 끌 자루에 매달린 것 같다. 몇 걸음 물러서서 서랍장을 본다. 생채기는 꽃으로 피어났다.

원목으로 짠 서랍장에 든 옷을 꺼내 입으면 나무 냄새가 나는지 영란이 물은 적 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가구를 갖추고 살아보지 못했다. 벽에 못을 쳐서 옷걸이로 썼다. 네 다리 접이 상은 밥상과 아들 책상으로 번갈아가며 썼다. 이사하면 은행나무로 화장대를 짜고 소나무로 장식장을 만들어 거실 벽면을 채우고, 거실 복판에 참나무 다탁을 만들어 놓고, 물푸레나무로 서랍장을 만들고, 박달나무로 아들 책상과 아내의 책상을 짜주겠다던 말은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제재소에서 제일 힘센 장정을 데리고 가서 가구를 다 놓고 나오는 길이네, 자네는?"

박의 전화 목소리는 늘 우렁차다. 모두 원목이라 둘이 들기에도 어려웠을 것이다. 가구는 자꾸 옮겨야 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처음 놓을 때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가구를 옮길 때 가구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가구 주변 모두를 건드려야 한다. 가구를 들고 움직이다가 액자와 꽃병을 깨기도 하고 뒷걸음치다가 선풍기도 넘어뜨리고 문짝에 받치기도 한다. 가구를 옮기다가 심지어 제 발등을 찍기까지 한다. 거치적거리지 않을 장소에, 있는 듯 없는 듯 앉혀 놓고, 쓰는 둥 마는 둥 하며 손길을 뻗치는 것이 가구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자리에 놓였어도 빠져나간 그 자리는 어떤 공간보다 크고 넓다. 가구는 용적이 아니라 관계의 몸통이다. 언젠가는 비워질 그 자리를 멍멍함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면 공간이 비었다고 함부로 가구를 들여놓으면 안 된다. 허전함이란 말은 아마 가구장이들이 가장 먼저 썼을 것이다.

"이왕이면 좀 빨리 이쪽으로 넘어오게, 옆에 장정이 술 고파 쩝쩝거리고 있네."

어차피 인도네시아는 오늘 당장 떠날 수는 없다. 호수가 곳곳에 있던 그곳을 둘러보고 박의 제재소로 가려고 했다. 작업하던 중 멀리 국도를 내려다보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볼 때면 안달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대패 자루를 팽개치고 호수를 보러 갔다 왔다. 호수 위에 번쩍이는 햇빛이 서슬 푸른 끌 날로만 보이던 예전과는 달랐다. 잠포록한 수면에 물새까지 눈에 들어왔다. 물새들이 수면 위로 사뿐거렸다. 아내가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지금쯤 호수 주변의 가로수 이파리들이 많이 떨어져 있을 것 같다.

"거절하기도 어렵네. 가구 주문했던 사모님이 가구 주문자를 몇 사람한테 소개를 해도 되느냐고 묻기에 일단 자네 시키는 대로 안 된다고는 했네만, 인도네시아 가면 아들 얼굴만 보고 다시 와야겠네. 자네 팬이 너무 많아, 허허허."

주문자의 소개뿐만 아니라 박은 얼마 전에 또 다른 가구 주문자를 자꾸 들먹였지만 나는 거절했다. 신명으로 우러나 연장을 풀어헤치고 나무를 얼싸안고 싶을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좀 기다려 보라고 박에게 대답했다.

연장가방을 조수석에 던지고 트럭 시동을 건다. 영란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급한 우편물이 오면 연락을 해달라며 영란이 남긴 전화번호가 있었다. 나는 저수지 가는 갈림길에 트럭을 세워 문자메시지를 작성했다. 물푸레나무로 서랍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짐이 되지 않는다면 가져가라고 썼다. 이곳의 열쇠는 철물점에 맡긴다는 내용도 덧붙인다. 영란이 또 다른 '아드반'을 찾아다닌다면 그녀의 '아드반'에 바지랑대로 삼을 나무둥치가 뜰에 있었으면 한다. 나도 종일 볕 드는 이곳이 좋았다.

트럭 바퀴와 돌이 맞물리는 소리가 빠그작빠그작 들린다. 박의 제재소로 먼저 갈 것인지 호숫가를 먼저 갈 것인지 국도를 달리면서 생각해 볼 것이다. 열어놓은 차창 안으로 오리나무가지가 쑥 밀고 들어온다.

 

 

<당선소감>


든든한 밑돌 되어 준 엄마, 고마워요

 

오랫동안 소설을 동경만 하고 쓰지 못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은 소설을 못 쓰고 머뭇대는 내게 마땅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좋은 독자라도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늘 책은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책을 탁 덮었을 때 머리를 치고 가는 멍한 울림을 주는 글들이 좋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도 쓰면 그런 글을 써야지 하고 가당찮은 각오를 품었다. 아직 연필심도 갈아놓지 못한 상태인 것 같은데 덜컥 당선되어 당황스럽고 두렵다. 늦깎이에게 힘차게 매진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내게 소설을 쓰면 어울릴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 학창 시절의 성병오 교수님, 함께 공부한 치열한 문우들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기운 잃지 마라 격려하고 다독거려 준 친구들과 지인들, 오랜 세월 동안 두더지 같이 움츠리고 있던 내게 소설의 양지쪽을 구경시켜 준 안지숙 씨, 멀리 평택에서 매일 전화를 걸어 응원해준 김상봉 씨, 소설을 대하는 안목과 늘품을 갖게 하여주시고 소설 공부가 인생 공부라고 깨우쳐 주신 윤후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무엇을 하든 늘 묵묵히 지켜봐 준 가족, 든든한 밑돌이 되어 주신 엄마한테 이 영광을 드린다. 내게 가능성을 열어주신 네 분의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을 쓰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쓸 거다.

이병순/1964년 부산출생. 부산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중문과 졸업.

 

 

<심사평>


여러 겹의 심리와 정황 묘사 탁월

 

수백 편 중에서 눈에 띄어야 하는 공모전의 성격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소재가 대체로 자극적이다. 그런 중에 네 편을 골라냈다. '물고기의 손톱'은 오래전 사랑하고, 유산하고, 그리고 떠난 남자의 결혼식에 참가해 그것을 지켜보는 여자의 이야기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너머에 숨어 있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느시의 거리' 역시 사랑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신파적 사연만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는 어떤 통찰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냥 사연에서 딱 그치고 말았다.

결선에서 겨룬 '중심의 비밀'은 어린 시절 팔려가는 송아지와 애인과의 동거, 거기에 끼어드는 자기 생의 근원을 찾는 남자와의 만남이 어울려 이야기가 활기를 띠지만 고모의 혼수비용으로 팔려가는 송아지의 삽화가 이십 대 여성의 유년 삽화로 연결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짧은 분량 속에 세 축의 이야기 역시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은 차분하고도 정확한 문장으로 마치 눈앞에서 모델이 가구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듯 그려냈다. 인물의 손놀림뿐 아니라 그 안에 배어드는 여러 겹의 심리와 정황을 그림처럼 묘사해내는 솜씨 또한 칭찬받을 만하다. 자칫 통속으로 떨어질 수 있는 아내와 수필가의 이야기나 찻집 여자의 이야기를 역시 이 소설에 꼭 필요한 만큼만 아주 잘 절제하여 그려냈다. 부디 정진 바란다.

심사위원 : 조갑상·이순원·조명숙·이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