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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명삼

 

맞은편 사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쩝쩝 소리를 냈다. 고개를 숙인 사장의 휑한 정수리부분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장은 부대찌개에 숟가락을 담근 채 국물을 휘휘 저었다. 휘휘 젖다가 생각난 듯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여직원은 밥을 떠 입에 넣으며 그런 사장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장은 다시 숟가락으로 찌개 냄비 밑바닥을 훑어 얼마 남지 않은 건더기를 건져 올렸다. 여직원은 젓가락으로 마늘장아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 팍팍 좀 먹어. 사장이 고개를 들고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사장의 입술은 찌게 국물이 번져 벌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먹고 있어요. 여직원이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밥을 두 공기나 비워낸 사장은 뭔가 아쉬운 듯 다시 입맛을 다셨다. 사무실 여직원은 자신의 밥공기를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반찬국물이 묻어있는 밥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밥을 사장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시겠어요? 사장의 코가 벌렁거렸다. 그는 여직원이 내민 밥공기를 날름 받아들었다. , 더 먹지 않고. 여직원의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이 아닌 듯 사장은 곧이어 종업원을 불러 반찬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반찬과 육수를 몇 번씩이나 더 요구하면서도 미안해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종업원도 그리 귀찮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종업원이 가져온 반찬그릇에는 김치, 미역무침, 오징어조림 등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추가로 몇 명이 더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종업원은 반찬을 내려놓은 뒤 가스레인지의 불을 약하게 조절하곤 돌아섰다. 사장의 벌어진 입속으로 다시 밥이 들어가고 있었다. , 찌개가 맛이 없어? 매번 밥을 남기더라. 사장이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많이 먹었어요. 이 집 맛있는데요? 나중에 친구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어요. 으응, 그렇지? 이집 보기보다 유명해. 사장은 간신히 건져 올린 햄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누렇게 빛바랜 식당 벽은 온갖 낙서로 도배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누군가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시커멓게 남아 있었다.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식탁, 이빨자국이 선명한 숟가락, 양은냄비는 개밥그릇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근데 그 친구는 예뻐? ? 누구요? 여기에 데려 오고 싶다는 그 친구. 여직원은 순간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가 생긋 웃었다. , 엄청 예뻐요. 그녀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이 마침내 자신의 수저를 식탁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 , 입은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그만 먹어야지, 살쪄서 원. 사장은 혀로 입 주변을 한번 핥은 뒤 탁자위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오른손으로 몇 번 돌려 감은 뒤 뚝 끊어냈다. 그런 뒤 이마에서 정수리 쪽으로 한번 훑어 올렸다. 우리 마누라가 말이야. 사장은 손에서 휴지를 잡아 뺀 뒤 자신의 배를 한번 툭 쳤다. 내 배가 항공모함 같대. 그나저나 그 친구 한번 데리고 와봐. 누구요? 예쁘다는 친구. 어머, 왜요? 여직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예쁜지 한번 봐보게. 순간 여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다시 풀렸다. , 한번 봐서요. 사장은 여직원의 대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탁자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입맛을 한번 쩍 다신 뒤 물을 들이켰다. 그런 다음 양쪽 볼을 번갈아 부풀리며 입안을 헹구기 시작했다. 여러번 양쪽 볼을 부풀리며 입안을 헹구어냈다. 그런 뒤 곧 입안에 든 물을 꿀꺽 삼켰다. 이 집은 언제와도 만원이야. 봐 아직도 밖에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지. 여직원이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을 쳐다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사장은 녹말 이쑤시개로 어금니 안쪽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곳이 파지지 않는 듯 녹말 이쑤시개를 쥔 손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여전히 오른쪽 어금니 부분에 낀 음식찌꺼기는 빠져나오지 않는 듯 했다. 사장은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때 녹말 이쑤시개가 톡하고 부러졌다. 사장은 부러진 녹말 이쑤시개를 빈 밥그릇에 던져 넣고 왼손 검지손톱으로 찌꺼기를 빼내기 시작했다. 여직원은 애써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맨 앞줄에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여직원은 고개를 돌려 다시 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때 사장의 검지손톱에 길고 가느다란 푸른색을 띤 야채조각이 딸려 나왔다. 시재 남은 거 있지? 사장은 손톱에 낀 음식물찌꺼기를 일회용 물수건에 쓱 문질러 닦았다. 여직원은 대답대신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여직원이 계산을 하는 동안 사장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화가 끝난 뒤 둘은 식당을 나섰고 길거리에서 헤어졌다.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자 사장과 여직원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무실을 나서면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 매번 고민이 되었다. 굴밥 어떨까? 사장이 말했다. 그 집 맛있긴 한데 날이 더워져서 굴이 괜찮을까요? 오히려 주꾸미 볶음은 어때요. 여직원이 그렇게 말하자 사장은 그곳은 너무 매워서 먹을 땐 좋지만 먹고 나서 하루 종일 속이 뒤집어진다고 말했다. , 맞다. 그때 그러셨죠. 여직원이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이야. 나는 주꾸미를 먹을 때 마다 꼭 외계인을 먹는 거 같아서 영 께름칙해. 사장의 농담에 여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장은 회전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보기에도 더워보였다. 사장은 밖을 내다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도 오지게 덥겠는데. 사장이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툭 밀리며 뒤쪽 벽에 쿵 부딪쳤다. 사장은 큰 걸음으로 사무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직원도 반사적으로 지갑을 챙겨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여직원은 소파 앞 탁자로 다가가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전원버튼을 누르자 띠리링하는 소리를 내며 통풍구 덮개가 천천히 닫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들은 첫째, 기다리는 줄이 짧고 둘째,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셋째, 맵지 않은 음식점으로 가자는데 동의했다. 밖으로 나오자 얼굴로 지열이 훅 끼쳐왔다. 여직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햇볕에 사물들이 표백된 것처럼 눈부시게 보였다. 손으로 차양을 만든 여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장의 한걸음 뒤에서 걸었다. 여직원은 사장의 흰 셔츠 등 쪽에 난 연갈색의 커다란 얼룩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리자 셔츠 한쪽 끝단이 바지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사장은 작은 키에 엉덩이까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거래처 직원을 떠올렸다. 둘은 지난 주말에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한강에서 키스를 했다. 거래처 직원은 여직원보다 두 살이 어렸다. 그는 팽팽한 엉덩이와 날렵한 콧날을 가졌다. 여직원은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사장은 뒷짐을 진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식당은 직장인들로 대부분 붐볐다. 모퉁이를 돌자 '짬뽕 잘하는 집'이라는 간판 아래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사람들은 뜨거운 땡볕아래에 서 있었다. 저 집은 조미료 범벅인데 왜 저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모르겠어. 사장은 뒷짐을 진채 끌끌 혀를 찼다. 그때 누군가가 사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 건너 대각선 쪽에 있는 주꾸미볶음집 앞에서 옆 사무실의 사장과 여직원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사무실 사장은 어디로 식사하러 가느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사장은 아직 식사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옆 사무실 사장은 그럼 자신들과 함께 식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다음다음이 자신들의 차례라고 말했다. 길게 줄을 늘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장과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사장은 약간 고민하다가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여직원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여직원은 머리를 약간 까닥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자리가 났다. 그들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4인용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식당 안은 왁자지껄했다.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쟁반을 든 식당 종업원들의 다리가 그들의 등과 머리를 스치며 지나다녔다. 바로 옆자리에 한 무리의 남자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곳의 처참한 광경을 인터넷에서 보았다고 누군가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천안함과 이번 연평도 사건은 무관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자 천안함 사건과 이번 사건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는 반대의견이 나왔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번 광우병 파동과 굴욕적인 한미 FTA, 그리고 청계광장과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는 유모차부대 아줌마들과 살수차,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겠다던 여자연예인 이야기 등이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결국에는 천안함과 이번 연평도 사건이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기 시작했다. 천안함 뿐만 아니라 연평도 사건도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새로운 주장도 나왔다. 둘 다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얘기였다. 그때 종업원이 대형쟁반에 밥과 반찬 그리고 주꾸미 볶음을 들고 등장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수저통을 열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 움큼 쥔 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저를 공손히 받아 탁자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주꾸미 볶음은 주방에서 이미 한 번 볶아진 듯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종업원이 모든 반찬을 내려놓은 뒤 돌아서자 그들은 일제히 밥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마치 경주하듯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두 아이 데리고 촛불집회에 갔었는데. 옆 사무실 여직원이 그렇게 말하자 사장과 사무실 여직원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샐쭉 웃었다. 왜 촛불집회에 가면 안 되나? 옆 사무실 사장이 두둔하듯이 말했다. 사장은 그게 아니라 벌써 결혼을 하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옆 사무실 사장은 웃으며 이 사람이 지금 농담하느냐고 말했다. 여직원은 옆 사무실 여직원이 아이까지 있다니 더욱 놀랍다고 말했다. 어려보이세요. 그럼 저한테 한참 언니 되시겠네요. 앞으로 언니라 부를게요. 여직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옆 사무실 여직원을 향해 말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여직원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남편분께서는 무슨 일을 하세요? 사장이 물었다. 남편은 없어요. 옆 사무실 여직원이 말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 이분 얼마 전에 혼자되셨어. 옆 사무실 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몇 달 전에 이혼했어요 라며 옆 사무실 여직원이 꾸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 . 사장과 여직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고 긴 눈매, 손을 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날렵한 콧날, 인중의 피부가 모자란 듯 약간 들려 있는 윗입술, 보톡스를 맞은 듯 통통한 볼, 사장은 옆 사무실 여직원을 슬쩍슬쩍 쳐다보며 예전에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바로 옆 사무실인데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또 처음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냅킨을 한 장 톡 뽑아 들었다. 이 사람과 전 왕래가 잦은 편이어서 서로 부탁할 거리도 많을 거예요. 사장은 뽑아든 냅킨으로 코밑을 한번 쓱 닦았다. 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옆 사무실 여직원은 오히려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한다고 대답하곤 부탁거리가 있더라도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했다. 사장은 무슨 말인지 좀 애매하게 들렸지만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결혼하고 몇 년 쉬어서요. 옆 사무실 여직원이 덧붙였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사장과 여직원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소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주꾸미 볶음이 나오자 활기를 띠었다. 철판위로 지글지글 익어가는 주꾸미 볶음을 들여다보며 모두 군침이 도는 표정이 되었다. 먹어도 될 것 같은데요. 옆 사무실 여직원은 모두에게 작은 접시를 돌렸다. 주꾸미 볶음을 자신의 접시로 옮겨 담은 뒤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사장은 커다란 냄비에 든 주꾸미를 젓가락으로 직접 집어먹었다. 도대체 주꾸미는 어디에 있는 거야? 사장이 젓가락으로 주꾸미 볶음을 휘저으며 다소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야채를 계속 뒤적이기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넷은 식당을 나와 편의점에 들렀다. 여직원이 '콩다방'에 들러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지만 옆 사무실 여직원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자고 말했다. 사장과 옆 사무실 사장은 그러는 게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더 시원한데. 하지만 여직원의 말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있다가 거래처에도 들러야 하니까. 옆 사무실 사장이 말했다. 여직원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과 거래처를 들러야 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 여직원은 양쪽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은 잠시 여직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편의점으로 들어서는 옆 사무실 여직원의 뒤태를 슬쩍 훔쳐보았다. 더운 날씨였지만 옆 사무실 여직원은 꽉 죄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굴곡을 그대로 드러낸 엉덩이가 실룩댔다. 셋은 아이스크림을, 여직원은 바나나맛 우유를 골랐다. 편의점을 나온 그들은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직원은 단지형 바나나맛 우유를 뜯지도 않은 채 가슴에 꼭 품듯이 안고 걸어갔다. 사무실 조금 못 미쳐 옆 사무실 사장은 자신은 오른쪽 길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셋은 옆 사무실 사장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옆 사무실 사장이 떠난 뒤 그들은 나란히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장은 다시 옆 사무실 여직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티셔츠위로 솟은 봉긋한 가슴을 훔쳐보았다.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 내린 셋은 복도에서 헤어졌다. 사장은 여직원에게 자신은 화장실에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사무실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사장은 소변을 본 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검어보였다.

사무실에 돌아온 사장은 여직원이 디자인한 일러스트 파일을 열어보았다. 꼼꼼하게 세부적인 디테일을 살려놓았지만 별 특징은 없었다. 이제까지 해온 여러 개의 디자인 시안 중에서 몇 개를 골라 합쳐놓은 듯이 보였다. 좋아. 고생했네. 가운데 글자를 조금 더 키우고 아래쪽에 있는 물결무늬 색상을 좀 더 화사하게 바꾸면 좋겠어. 사장은 간략하게 여직원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다. 사무실 안은 여직원이 작게 틀어놓은 라디오 음악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렸다. 잠시 후 사장은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장은 화장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주꾸미 때문인가?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직원도 사정은 다를 바 없었다. 뱃속으로 가스가 차오르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다섯 시경 옆 사무실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옆 사무실 사장의 등장으로 조용했던 사무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거래처에 다녀온 옆 사무실 사장은 흥분해 있었다. 당장 거래처로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보였다. 사장은 옆 사무실 사장에게 미소를 띠며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말했다. 사장은 커피를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옆 사무실 사장은 소파에 앉으며 좋다고 말했다. 사장이 맞은편에 앉으며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묻자 옆 사무실 사장은 에폭시에 반드시 반짝이가루를 뿌려달라고 했는데 뿌리지 않고 그냥 에폭시 작업을 해버렸다고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고 분개해했다.

여직원이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가지고 와서 옆 사무실 사장에게 건네주었다. 사장님도 한 잔 드릴까요? 여직원이 묻자 사장은 자신은 됐다고 말했다. 사장은 옆 사무실 사장에게 그런 일 어디 한두 번 겪어보냐고 옆 사무실 사장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래 반짝이 가루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옆 사무실 사장이 재차 분통을 터뜨렸다. 사장은 자신도 그런 비슷한 일을 몇 번 당했다고 말했다. 사장이 동조하자 옆 사무실 사장의 분노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사장은 다른 거래처를 뚫어보았는데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래도 그만한 거래처가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옆 사무실 사장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그럼 그걸 그대로 놔두고 봐야한단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사장은 옮겨봤자 그놈이 그놈인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 푸념조로 말했다. 옆 사무실 사장은 어쩐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며 옆 사무실 사장은 거래처가 밀집해 있는 골목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멍청하고 믿을게 못되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옆 사무실 사장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오늘 시간이 어떠냐고 물었다. 시간이 되면 기분도 풀 겸 오늘 자신과 술이라도 한잔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사장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옆 사무실 사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장은 오늘은 선약이 있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옆 사무실 사장은 깜박 잊었다는 말투로 여직원에게 일러스트 파일을 출력할 수 있는 틀을 파일 형태로 좀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여직원이 잠시 사장의 눈치를 보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 사무실 사장은 자신의 웹하드로 좀 올려달라고 말했다. 옆 사무실 사장이 고개를 돌려 사장을 쳐다보았다. 오늘 우리 여직원이랑 같이 한잔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어떻게 되냐니깐. 옆 사무실 사장은 마치 자신이 이제껏 계속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사장은 옆 사무실 여직원과 함께 술자리를 가진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럼 그럴까? 옆 사무실 사장이 끙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따가 보자구.

옆 사무실 사장이 나간 뒤 사장은 여직원에게 오늘 시간 괜찮으면 같이 한 잔 하는 게 어떻겠냐고 여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마우스를 움직이던 여직원은 들여다보던 화면에서 눈을 떼고 사장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 그래? 뭐야, 데이트? 사장이 다시 묻자 여직원은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라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 애인이야 뭐야. 사장은 약간 볼멘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거 드시러 가는 거면 약속 취소하구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다 뒤통수에 여직원의 말이 날아와 박히자 사장은 고개를 돌려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사장은 여직원의 귀에 걸린 커다란 링이 달랑거리는 것을 쳐다보았다.

퇴근시간 무렵 옆 사무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정에 없던 손님이 들이닥쳐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장은 별로 할 일이 없어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인터넷 사이트를 클릭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곱시 오분 전 옆 사무실 사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안 나가? 사장이 말하자 여직원은 거래처 직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전화 받고 곧 갈게요. 그럼 출발할 때 연락해. 사장은 몸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섰다. 사장이 사무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이 밖에서부터 열리며 한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상대편이 몸을 한쪽으로 비켰다. 하지만 사장도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상대방이 다시 반대방향으로 몸을 움직이자 사장 역시 자석에 이끌리듯 같은 쪽으로 몸을 틀었다. , 죄송합니다. 너무 급하게 들어오느라 노크하는 걸 깜빡했네요. 겨우 비켜선 낯선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 전화한다고 해놓고 오는 건 또 뭐야? 사장이 거래처 직원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 이 근처에 올 일이 갑자기 생겨서요. 온 김에 그냥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려고요. 사장이 나가려고 하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장에게 인사했다. 저 새끼는 아직 안 뒈졌냐. 재수없어. 사장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거래처 직원이 여직원을 향해 말했다. 여직원이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갖다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셰퍼드보다 귀가 더 쫑긋해. 여직원이 말했다.

사장은 옆 사무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옆 사무실 여직원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사장은 옆 사무실 사장 그리고 옆 사무실 여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오늘 잘 됐네요. 안 그래도 함께 한잔하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사장이 옆 사무실 여직원에게 친근한 말투로 말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화답하듯 방긋 미소 지었다. 요즘 친정어머니가 애 보느라 힘드시겠어요. 옆 사무실 사장이 말하자 여직원은 대신 생활비를 얼마나 드리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 사무실 사장은 아이쿠, 이런 괜히 물어봤네. 월급 올려달란 소리보다 더 무섭네 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옆 사무실 여직원이 한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다른 한손을 들어 옆 사무실 사장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걸어가면서 사장은 둘의 그러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집들로 죽 이어진 골목길이 나타났다. 바깥에 간이탁자를 놓고 장사하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길은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들은 한 술집에 들어가 둥그런 원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파란색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는 담배꽁초와 누군가가 뱉어놓은 침도 보였다. 여긴 술집이름이 술집이야 라며 옆 사무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지난번에 밥집에 갔는데 식당 이름이 밥집이더라구 라며 사장이 맞장구쳤다. 사장과 옆 사무실 사장은 벽에 붙은 메뉴표를 들여다보았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길 건너편 조개구이집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집은 열탄이 맛있으니까. 옆 사무실 사장이 혼잣말을 한 뒤 여기 열탄 불고기 좀 주세요 하고 종업원이 있는 방향으로 고함을 질렀다. , 열탄 불고기네요. 연탄불고기가 아니라. 옆 사무실 여직원이 벽에 붙은 메뉴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죠. 연탄이 아니라 열탄이에요. 고추장 소스에 찍어먹는데 고기가 되게 얇아요. 옆 사무실 사장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때까지 사장은 옆 사무실 사장과 그의 여직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한잔 하는 거 같은데, 우리. 옆 사무실 사장이 손을 닦은 물수건을 탁자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장은 으응 하고 대꾸한 뒤 옆 사무실 여직원을 향해 집이 어디세요? 하고 물었다. N동이요. 옆 사무실 여직원이 짧게 대답했다. , N동이요. 사장이 맞장구를 치자 왜 N동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하고 옆 사무실 사장이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아니 좋은데 사신다고. 근데 강남이란 말 참 촌스런 말인데그렇지 않아요? N동 어디 살아요? 사장이 다시 물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N초등학교 부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은 아, 거기 선수촌 있는 데네요. 미용실 많고 언덕배기에 원룸들 많고. 옆 사무실 여직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선수촌? N동에 무슨 선수촌이야? 옆 사무실 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거기 나가요걸들이 좀 살거든.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어. 사장이 말했다. 혹시 투잡 하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한 뒤 사장은 혼자 킬킬거리며 웃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물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조금 마셨다. 옆 사무실 사장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물 컵을 내려놓은 뒤 고개를 들어 사장을 쳐다보았다. 앉은키가 작은 탓인지 사장의 자리가 폭 꺼져 보였다. 학교 다니실 때 만날 1번만 하셨겠어요. 옆 사무실 여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옆 사무실 사장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사장은 시선을 떨어뜨려 이제 막 불판위에 고기를 얹고 있는 종업원의 젓가락질을 쳐다보았다. 종업원은 능숙한 솜씨로 불판위에 고기를 얹어 나갔다. 고기는 매우 얇아서 금방 오그라들며 익어나갔다. 연기가 솟아올랐다. 종업원이 불의 강도를 조절하곤 천장위에 붙은 연통을 불판위로 바짝 내렸다. 대부분의 연기가 연통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 한잔들 하자구. 옆 사무실 사장이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셋은 소주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곤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켰다.

그 새끼를 다시 받아줬다는 거야?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술잔을 들어 입술만 조금 적신 뒤 다시금 제자리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새끼 양다리였잖아. 그걸 다시 받아줘?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젠 완전 편해져서.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 여자가 대답했다. , 그 새끼 다리를 찢어. 양다리 그거.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래, 만나라 만나. 다시 만나는 거 나쁜 거 아니다. 짜증나는 거지.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며 말했다.

불판위의 고기가 금세 타들어갈 듯 익었으므로 사장은 빠른 동작으로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불판의 가장자리로 휘휘 옮겨놓기 시작했다. 사장과 옆 사무실 사장은 익은 고기를 고추장 소스에 찍어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옆 사무실 여직원은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한 점 먹고는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하곤 했다. 좀체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옆 사무실 여직원이 술을 마시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고기가 너무 빨리 익으며 타들어갔기 때문에 고기에 신경을 쓰느라 다른 대화에 신경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거 먹고 소금구이나 좀 시켜서 먹자구. 옆 사무실 사장이 말했다. 사장은 옆 사무실 여직원에게 배가 고프시면 밥을 시켜서 된장찌개랑 좀 드실래요? 하고 물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지 않으세요? 사장이 다시 묻자 옆 사무실 여직원은 고기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른걸요 라고 말했다. 그럼 야채라도 좀 드세요. 고기가 싫으시면. 옆 사무실 사장이 말을 거들자 옆 사무실 여직원은 네하고 짧게 대답하곤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뒤적여 가장 작은 크기의 고기를 상추에 싸서 한 입 먹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아랫배 쪽으로 묵직한 느낌이 고여 드는 게 느껴졌다. 여직원은 괄약근을 옴찔거렸다. 빨리 집으로 달려가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싶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지영이는 왜 안 오지? 사장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참 지영씨는 왜 뭐하느라 안와? 옆 사무실 사장이 묻자 사장은 아, 거래처 사람이 와서 잠시 이야기하나본데. 그래도 올 시간이 됐는데 안 오네. 그럼 전화한번 해봐. 오겠지 뭐.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사장과 옆 사무실 사장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술은 벌써 한 병이 동나고 말았다. 옆 사무실 사장이 종업원을 불러 술을 시키며 소금구이 2인분을 추가로 주문했다. 잠시 후 불판도 좀 갈아달라고 옆 사무실 사장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자 어느 구석에선가 종업원의 ''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여기 고기가 입에 맞지 않으세요? 그럼 강남에 가서 한잔 할 걸 그랬나. 거기 H포차도 유명하고 S식당도 있고. 사장은 옆 사무실 사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옆 사무실 사장은 강북고기가 강남고기와 달라? 난 강북에만 살아봐서. 하고는 소주잔을 들어 한잔 들이킨 뒤 사장을 향해 한 잔 비우라는 시늉으로 술병을 기울였다. 그럼 다르지. 초밥도 강남초밥이랑 강북초밥이랑 달라. 강남초밥은 위에 얹는 생선이 연미복 꼬리처럼 이렇게 길다구. 사장은 손가락으로 꼬리부분을 만들어보였다. 그런 뒤 옆 사무실 사장이 들고 있는 술병 쪽으로 자신의 잔을 갖다 댔다. 잔을 채운 뒤 술잔을 탁자위에 놓고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래 전화한번 해봐. 옆 사무실 사장이 부추겼다. 안 그래도 한번 해볼까하고. 사장은 통화목록을 열어 여직원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고 곧이어 여직원이 받았다.

, 왜 안와? 사장이 여직원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금방 갈게요. 무슨 일 있어? 사장이 다시 물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금방 갈게요. 여직원은 그렇게 말한 뒤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여직원은 불 꺼진 사무실에서 반쯤 벌거벗은 채 소파위에 누워있었다. 그녀 위의 검은 그림자가 다시 그녀를 지그시 눌렀다. 조금만 더, 남자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사무실 소파위에서 둘은 엉겨 있었다. 다시 에어컨이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여직원이 전화를 끊자 남자는 다시 여자의 몸을 열기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여직원은 이제 그만하자고 남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지금 나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전화질은. 거래처 직원이 투덜거렸다. 원래 우리 사장이 좀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인간이잖아. 여직원이 대꾸했다. 가야 돼? 거래처 직원이 다시 물었다. 간다고 했으니까. 내일 면접 본다고 했잖아.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여기만큼 설렁설렁 놀면서 일할 수 있는데도 사실 없어. 그런데 왜 옮기려구. 거래처직원이 물었다. 십만 원 더 준다잖아. 여직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되면 우리 회사로 올래? 싫어 거긴! 여직원이 단호하게 거래처직원의 말을 잘랐다.

사실 지금 자기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안 갈수가 없잖아. 같이 갈까? 우리 사장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직원이 양손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호크를 채우며 말했다. 됐어. 안 갈 줄 뻔히 알면서. 거래처 직원은 심통 난 얼굴로 시들어버린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소파 앞 탁자위에 놓아둔 여직원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이이잉 거릴 때마다 휴대폰이 시계방향으로 조금씩 몸을 틀었다. 여직원이 잽싸게 손을 뻗었지만 거래처 직원의 손이 먼저 휴대폰을 낚아챘다. 어두운 탓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여직원의 휴대폰 액정을 거래처 직원은 쳐다보았다. 반쪽? 이거 뭐야! 거래처 직원의 말에 여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어떻게 알아. 걔가 전화하는걸. 여직원이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 반쪽이야. 거래처 직원이 재차 다그치듯이 물었다. 냅둔거야. 그냥귀찮아서.

사장은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별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온대. 사장은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반쯤 남은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야채 쪽을 뒤적여 고추를 찾아냈다.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도 소주 한 병을 더 비울 시간이 흘렀지만 여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 빼드릴까요? 종업원이 그들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불판위의 고기는 대부분 가장자리로 치워져 있었고 이제 누구도 고기에 젓가락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옆 사무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이 불판을 열고 집게로 화로를 들어냈다. 종업원이 돌아가자 옆 사무실 사장이 과장된 몸짓으로 다시 건배를 제안했다. 셋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서로의 잔에 가볍게 부딪힌 다음 한잔씩 들이켰다. 하지만 여전히 옆 사무실 여직원의 앞에 놓인 잔은 비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사장이 불콰한 얼굴로 옆 사무실 여직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로리타에 있지 않았어요? 삼성동에 있는. 사장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때 옆 사무실 여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너무 늦어서. 옆 사무실 여직원의 말에 옆 사무실 사장은 손목시계를 흘긋 보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한잔도 안 먹고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사장이 옆 사무실 여직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 사무실 여직원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잔 죽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옆 사무실 사장을 향해 죄송하지만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사장은 혼자 휑하니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투덜댔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사장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섰다. 사장은 불콰한 얼굴로 돌아서는 옆 사무실 여직원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내가 바래다주고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옆 사무실 사장이 말했다. 그때 사장이 돌아서 가는 옆 사무실 여직원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손목을 잡힌 채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은 사장을 쳐다보았다. 사장의 얼굴은 마치 불가마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옆 사무실 사장은 그만하라고 사장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렇게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사장이 말했다. 이 친구 참 술버릇 나쁘네. 그런 게 어딨냐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옆 사무실 사장이 사장을 향해 소리쳤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그들 쪽으로 쏠렸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자신의 손목을 억센 힘으로 움켜쥐고 있는 사장을 내려다보았다. ,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놓으세요. 하지만 사장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순간 작심한 듯 옆 사무실 여직원이 걸레를 쥐어짜듯 허공에 원을 그리며 자신의 팔을 힘껏 비틀었다. 방심하고 있던 사장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옆 사무실 여직원의 손목을 놓치면서 사장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옆 사무실 사장이 그를 잡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파란색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사장의 몸이 벌렁 뒤로 젖혀졌다. 그때 본능적으로 다리를 일직선으로 쭉 뻗었고 원형 탁자 양쪽 가장자리부분이 그의 발에 걸렸다. 곧이어 쿵하는 소리가 났다. 사장이 원형 탁자를 안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어이쿠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원형탁자가 사장을 반쯤 올라탄 형국이었다. 탁자위에 남아 있던 음식물들이 사장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된장국물이 그의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종업원 하나가 달려와 원형탁자를 일으켜 세웠다. 사장은 상체를 일으켜 바닥에 앉은 채 양팔을 무릎위에 얹고는 머리를 숙였다. 곧이어 퉤하고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실내에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닥은 흘러내린 음식물 때문에 몹시 지저분해져 있었다. 옆 사무실 사장과 여직원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종업원들 역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때 누군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웃음이 나는 쪽으로 쏠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여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려보이는 여자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히죽대며 웃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차도에 서서 각자 다른 방향을 쳐다보았다.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이 시계를 힐끔거렸다. 그거 오늘 꼭 가지고 가야 돼? 옆 사무실 사장이 사장을 향해 말했다. 사장은 대답대신 흔들리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었지만 여전히 된장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잘 들어가고. 주연씨는 지하철 타고가요? 옆 사무실 사장이 여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옆 사무실 여직원은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 친구는 사무실에 메모리 스틱을 두고 왔다네요. 사장과 옆 사무실 여직원은 등을 보인 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장은 사무실 방향으로 뒤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저 친구 요즘 별거중이거든요. 사장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옆 사무실 사장이 말했다. 메모리 스틱이 필요한 게 아니라 메모리 스틱에 붙은 집 열쇠가 필요한 거예요. 옆 사무실 여직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지내거든요. 말은 안하는데 아마 곧 이혼할거에요. 옆 사무실 사장이 덧붙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는 캄캄했다. 모두들 퇴근한 뒤인지 불 켜진 사무실은 없었다. 사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쪽으로 다가갈수록 윙하는 희미한 소음이 조금씩 크게 들려왔다. 에어컨 소린가? 하고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 문을 쳐다보았다.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사장은 디지털 도어록의 덮개를 열었다. 파란색 숫자 판이 눈부시게 빛났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무실 문을 열자 몸을 감싸고 있던 더위가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에어컨의 파란 불빛이 레이저 포인터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장은 불을 켜려고 벽 쪽으로 손을 더듬다가 에어컨 소리에 섞여드는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사장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소파는 출입문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워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장은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소파에는 벌거벗은 두 남녀가 얽혀 있었다. 사장은 내려다보았다. 여직원이 발가벗은 채 누워 있었다. 그 위로 한 남자의 몸이 겹쳐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여자의 가슴 쪽으로 비스듬히 돌려져 있어 누군지 금방 알 수 없었다. 사장은 고개를 좀 더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래처 직원이었다. 여직원은 가슴을 드러낸 채 천장을 향해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거래처 직원은 여직원의 배위로 한쪽 팔을 올리고 오른쪽 다리는 여직원의 음모부위를 덮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여직원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코를 고는 쪽은 여직원이었다. 소파 앞 탁자에는 그들의 옷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옆에 뜯지 않은 바나나맛 우유가 놓여 있었다. 사장은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직원의 가슴은 생각보다 훨씬 커보였다. 혹시 자는 척 하는 건 아닌지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