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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설혜원

 

피곤하다. 눈을 뜨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꿈을 꾼 날이면 잠을 잔 것 같지가 않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피로한 몸을 통해 오늘 또 꿈을 꿨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양 날개에 핀이 꽂혀 박제 당하려다 풀려난 나비처럼 나는 몸을 꿈틀거려 본다. 모퉁이, 모퉁이였다.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 내 앞에 있던 건 모퉁이였다. 초연과 마지막 순간을 나눈 모퉁이. 모퉁이를 돌면 초연의 집이 나오지만 그날, 나는 모퉁이에서 초연을 보내야 했다. 모퉁이의 환영을 지워보려 뻑뻑한 눈을 크게 떠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눈을 찌른다. 종이 따위에 손가락이 베이기도 하는 것처럼 고작 빛 한줄기에 가슴 한쪽이 베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체감한다. 모퉁이에서 초연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가로등 불빛에 가슴을 베였었다. 모퉁이를 벗어난 뒤부터는 자주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날카로운 흉기로 육박해올 수도 있다는 걸 매일매일 새롭게 깨달았다. 하여 적막과 고요가 필요한 영혼에게는 티끌 같은 자극도 아픔이 되는 법이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그 티끌 같은 자극에는 물론, 이토록 그악스럽게 울려대는 휴대폰의 진동도 포함된다.

() 편집장이었다. 편집장은 다짜고짜 내게 일을 떠안겼다. 쉬는 중이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원래 일을 맡았던 치가 삽화 두 장을 펑크 내고 감감무소식이라 했다. 정확히 일주일 뒤에 인쇄를 시작할 거라고, 제본한 원고를 퀵서비스로 보냈으니 읽고 어울릴만한 그림 두 장을 뽑아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괴담이라는 제목의 책한 권이 배달되었다. 대강 훑어보니 몇 편의 단편들을 묶어놓은 미스테리 공포물이었다. 내가 삽화를 그려야 할 부분은 신데렐라악성증후군과 루시드드림, 두 목차에 대한 것이었다. 인물들이 박제된 것처럼 끈적하고 음산하게 그려달라는 편집장의 말이 떠올랐다.

프리랜서라곤 하지만 어떤 일거리도 주어지지 않을 무렵 불특정다수의 출판사에 보낸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을 해 온건 이 편집장뿐이었다. 미스테리, 추리, 공포물을 주류로 취급하는 이 출판사의 책들과 내 그림은 분위기가 맞아떨어졌고 내 삽화가 들어있는 책이 뜻밖에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재판을 거듭할 때마다 출판사장이기도 한 편집장은 내게 술을 샀고 어느 날엔가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에 내 그림들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책 마니아들이 삽화를 스캔하여 리뷰와 함께 올린 거였다. 네티즌들은 내 그림을 자기들 미니홈피며 인터넷카페에 담아갔다. 자연스럽게 삽화 의뢰가 늘어나 지금 사는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러니 맨 처음 일러스트레이너로서 나를 호명해 준 편집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두 장만 그리면 되니까 며칠간 집중해서 완성하면 될 터이다.

편집장이 준 시간은 많지 않다. 나는 터키행진곡을 틀어 놓고 내가 그릴 삽화의 해당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루시드드림이다. 루시드드림이란 마음먹은대로 꾸는 꿈을 말한다. 자기 꿈을 원하는대로 조절하려면 몇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하는 꿈을 꾸기 위해 부단히 연습한다. 훈련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확인하여 꿈속이라면 원하는 장면을 불러내고 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내 꿈에 더 이상은 모퉁이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 모를 악몽도 이제는 그만 꾸고 싶다. 나는 책에 적힌 루시드드림 훈련법을 찬찬히 살펴본다.

1단계. 꿈 구별기. 꿈을 마음대로 조정하려면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꿈 밖에 있는지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꿈 안에 있다는 걸 인식한 후에야 루시드드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꿈을 구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목소리를 내거나 말을 해본다. 녹음기를 빨리 돌리듯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얘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꿈이다. 손을 펼쳐본다. 손가락 끝이 제대로 맺어져 있지 않고 물속에 있는 것처럼 흔들리고 연기처럼 희미하다면 그것은 꿈이다. 시계를 본다. 확인할 때마다 시간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꿈이다. 옆 사람을 확인한다. 성별과 종을 수시로 넘나들며 바뀐다면 그것은 꿈이다. 주변을 둘려본다.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거나 기이한 환경이 연출되고 있진 않은지 살펴보는 것이다. 가령 개구리가 말을 하거나 해와 달이 같이 떠 있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상한 일을 발견할 경우 그것은 꿈이다.

나는 연이어 2단계를 읽는다. 1단계만 습득하면 2단계를 실천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2단계. 꿈 소환기. 꿈속이라는 게 확인됐다면 원하는 장면을 불러낼 차례다.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꿈을 소환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꿈속 배경으로 모퉁이를 상정하고 그 모퉁이를 돌면서 원하는 장면을 생각한다. 모퉁이를 돌아 벗어나는 순간 당신이 원하는 꿈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꿈속에서 문을 상정한 다음 머릿속으로 원하는 장면을 생각한다.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이 원하는 꿈이 펼쳐질 것이다. 위 두 가지 방법에 익숙해지면 모퉁이나 문을 통하지 않고서도 언제 어디서나 생각만으로도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루시드드림 3단계와 도움말을 마저 읽는다. 매일 자기가 꾼 꿈을 기록해 놓는 것, 그래서 자기 꿈의 분위기와 일정한 구조를 알아두는 것이 꿈 구별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당장 내일부터 꿈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내 다짐과는 별개로 루시드드림에 대해 어떤 장면을 그려야 할지는 선뜻 생각나지 않는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페인터를 실행시킨 뒤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사러 식료품가게에 간다.

801호 총각, 뭐 안 좋은 일 있어? 싹 끊어버렸던 담밸 다시 찾게? 주인아줌마가 또 참견을 해온다. 번번이 이러니 성가시다. 아줌마에게 혀가 씁쓸하고 텁텁해야 작업이 잘되는, 나만의 작업 전 징크스를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나는 예에-하고 애매하게 웃어 보일 뿐이다. 담배 대신이라구 홍차티백만 사가더니, 우리 총각 뭔 일이래? 나는 말없이 돈을 내밀어 계산을 치른다. 담배대신 홍차티백을 사러 올 때가 있었다. 초연이 아직 내 옆에 있었을 때. 초연이 떠날 줄은 까맣게 몰랐던 때. 나는 초연에 의해 내 습관이 변하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좋았다. 그게 초연이 내 삶에 적극 개입하는 증거가 됐으므로, 나는 힘들지 않게 담배를 끊고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도 혀가 쓰고 깔깔하다.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선다. 경비원은 침을 흘리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다.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며 승강기 문 옆에 붙어있는 벽보를 훑는다.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질 않았다.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길 몇 시간째, 터키행진곡이 수록된 소나타 음반도 벌써 네 번이나 돌아가 있었다. 나는 찬바람을 쏘이고 싶어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선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휙 불어온다. 희부연 안개가 품고 있는 습기이다. 안개 속 습기가,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는 짐승의 숨소리 같이 팔에 훅 끼쳐온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 달리고 있다. 나는 고개를 밖으로 빼내어 달리는 사람을 유심히 쳐다본다. 괴한을 조심하라는 벽보가 생각난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뜀박질하는 괴한의 모습이 새벽에 종종 목격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저 밑에 있는 사람은 츄리닝을 입고 조깅 중인 멀쩡한 남자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아파트 뒤편, 안개가 내린 공터를 내려다본다. 괴한은 달리기연습을 하는 게 부끄러워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일까. 무언가 떳떳하지 않기에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달리기와 미술만은 어떤 연습을 하지 않아도 반에서 1등을 하곤 하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르자 괴한에 대한 우월감이 슬며시 생겨난다.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아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금방 졸음이 온다. 창 밖을 둘러 감은 안개처럼 몽롱한 졸음이 전신을 뒤덮는다. 나는 잠깐만 눈을 붙이자는 생각으로 침대에 눕는다.

언제 이런 깊은 잠이 들었단 말인가. 나는 눈을 떠 켜져 있는 내 방의 전등을 바라본다. 창문 밖 자연광에 희석된 탓에 내 방의 불빛은 어렴풋하다.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식은 듯 한기가 돈다. 모든 관절들이 격한 노동을 마친 다음날처럼 통증을 호소한다. 온몸이 뻐근하다. 나는 섣불리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물기가 느껴지는 턱을 더듬는다. 턱을 훔친 나는 물자국이 눈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걸 깨닫는다. 이불마저 무겁게 느껴져 발로 차 걷어낸다. 오늘도 꿈을 꾼 게 분명하다. 안개가 낀 날은 초저녁부터 졸음이 쏟아진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잠자리에 드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온 몸이 쑤셔온다. 그보다 불쾌한 건 꿈이다. 악몽이다. 하지만 깨어나는 찰나 꿈들은 가루로 부수어지고 나는 현실로 복귀한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악령을 불러내는 주문처럼 미묘한 음계들만 귓가에 머문다. 아스라이 지워지는 추억처럼 친근한 냄새처럼 그것은 내 마음을 아리게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 친숙한 그 멜로디를 경계해 마지않는다. 그 음계들을 덥석 움켜쥐어 가슴에 품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기 때문이다. 돌막 아래 심겨있던 씨앗이 폭우 뒤에 무서운 기세로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우듯 부피를 줄이고 있던 불행이 한꺼번에 덮쳐들 것만 같은 불안감이랄까. 불안하지만 불안의 근원을 캐보고 싶은 충동이 더 세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페인터를 실행시킨다. 루시드드림 훈련의 일환인 꿈 기록을 하기 위해서다.

노트를 펼치는 대신 페인터를 실행시키는 건 글자보단 그림이 내가 다루기 쉬운 언어인 까닭이다. 꿈이 다 달아나기 전에 한 조각이라도 잡아둬야 한다. 흰색 털실뭉치가 엉켜있는 듯 희붐한 바탕에 주황색 빛이 겹쳐진다. 사방은 희미하고 눈물얼룩이라도 진 듯 흐릿하다. 사춘기시절 자주 꿨던 것처럼 오로지 나의 무기력함만으로 요약되는 꿈. 헤어날 수 없고 끊어낼 수 없고 솟구칠 수는 더욱 없는 느낌의 꿈이었다. 두 발이 족쇄에 묶인 채 발버둥치지도 못하고 가라앉는 물의 깊은 속인 듯 배경도 사물도 명확치 않은 꿈속에서 나는 단지 하나의 이미지만을 기억해낸다. 연기처럼 희뿌연 하늘에 점점이 뒤섞인 주황색 빛, 그리고 모퉁이. 거기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나. 나는 시계를 보고 손끝을 보고 목소리를 내보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아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해본다.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다. 시침은 제 자리에 있고 손끝은 반듯반듯하다. 목소리는 곧고 모든 사물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돈돼 있다. 의심할 것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꿈이면 어떡하나. 의심할 것 없는 현실 같은 꿈이면 어떡하나.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그린 오늘의 꿈을 본다. 엷은 회색 바탕에 주황빛이 점점이 번져있는, 모퉁이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져 있다. 어제 저녁에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허기가 극심해진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 속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와 곰팡이 핀 식빵, 뜯지 않은 통조림밖에 없다. 가게에서 라면이라도 사 와야겠다. 티셔츠를 입고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는데 무릎이 따갑다. 바지를 잠깐 내려보니 무르팍의 살갗이 500원짜리 동전만큼 벗겨져 있다. 벗겨진 살갗엔 속속들이 마른 피가 배어있다. 이 정도 상처는 따갑긴 하지만 내버려두면 금방 낫는다. 나는 바지춤을 올려 옷을 마저 꿰입고 지갑을 챙겨든다.

식료품가게 밖 평상에선 주인아줌마를 비롯한 중년여자들이 몇 모여앉아 수다를 나누고 있다. 어제도 나타났대. 어이구 어떤 미친놈이 가면을 쓰고 달음박질을 해 싸 그래. 어제 경비아저씨가 미친놈을 쫓아갔는데 뒤에서 누가 따라오니까 더 빨리 뛰더래. 그래서, 잡혔어? 아니 뛰다가 화단에 자빠지긴 했는데 일어나서 막 도망가더래. 경비들, 말이 아저씨지 실은 할아범들이잖아. 그건 그러네. 깔깔깔.

나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안은 텁텁하고 건조하다. 다섯 개 들이 한 세트로 포장돼있는 진라면을 계산대에 놓자 주인아줌마가 들어온다. 계산대라기엔 많이 헐벗고 녹슨 작은 책상이다. 양쪽 귀퉁이에는 금화모양의 초콜릿과 왕사탕이 각각 투명 플라스틱병에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놓인 진라면을 보고 돈을 거스르던 주인아줌마가 말한다. 처자는 통 안 보이네? 입맛 다르다고 신라면 두개 진라면 두개씩 사가더니. 요즘 둘이 무슨 일이 있어 총각? 나는 받아 쥔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지도 않고 손에 쥔 채 등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와 버린다.

 

식사를 하고 나니 이제야 몸에 기운이 돈다.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해동되는 것 같다. 냉장고에서 꺼낸 가래떡처럼 아직도 조금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몸을 의자에 걸쳐놓는다. 작업속도가 더딘 루시드드림보다는 신데렐라악성증후군 삽화부터 그려야겠다. 어떤 장면을 뽑아낼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나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저명한 설화 고고학자가 신데렐라 이야기의 진실을 파헤친다. 부엌데기 신데렐라가 공주로 발돋움하는 동화가 실은 길고 긴 신데렐라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며 그마저도 정신병자가 자신의 병력을 기록한 수기라는 것이다.

신데렐라는 공주로서의 호화로운 생활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매일 밤 하녀의 삶을 동경하며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신데렐라는 차가운 골방에서 일어나 앞치마를 두른 자신의 모습을 보곤 어리둥절해 한다. 새엄마와 언니들의 비웃음 속에 신데렐라는 자기의 일기장을 펼쳐본다. 그 속엔 언니들을 제치고 왕자의 신부로 발탁되어 공주가 된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신데렐라는 자신이 하녀이며 고된 노동에 절망할 때마다 공주로서의 삶을 꿈꾸며 일기를 썼음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화자인 설화 고고학자에 따르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무한반복된다. 일에 지친 다락방 하녀가 공주를 꿈꾸듯 허무할 만큼 화려한 드레스 룸 안의 공주 역시 하녀의 삶을 그리기 때문이다. 신데렐라는 자신이 쓴 글 속의 하녀와 공주로서 두 가지 삶을 산다. 하녀가 쓴 글 속의 공주신데렐라 역시 지루한 일상이 지겨워 차라리 고통 몰아치는 하녀의 삶을 작문한다. 공주가 쓴 글 속의 하녀신데렐라는 잡다한 집안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공주신데렐라를 만든다. 신데렐라란 이름의 공주와 하녀는 지금도 여전히 자기를 가둔, 벽의 바늘구멍 같은 틈으로 겨우 한쪽 눈을 갖다댄 채 서로의 삶을 훔쳐보고 있으며 하녀에서 공주가 된 동화 속 신데렐라는 억겁의 자기증식 구간 중 찰나를 채집하여 사면의 종이 속에 고정시켜놓은 박제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고고학자는 결론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신데렐라의 정신병력을 신데렐라악성증후군으로 정의한다.

내가 삽화로 옮길 장면은 골방의 하녀신데렐라와 드레스룸의 공주신데렐라가 가운데 난 틈으로 서로를 훔쳐보는 대목이다. 나는 가늘고 얇은 선을 선택하여 화면 한가운데를 포인터로 가로지른다. 위에서 아래로, 포인터의 방향을 따라 가는 펜선이 직각으로 그어진다. 가운데 선을 축으로 서로를 훔쳐보고 있는 두 명의 신데렐라를 스케치한다. 두 명의 신데렐라는 물론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신데렐라 삽화는 구도가 단순하고 이미지가 또렷해서 단숨에 완성할 수 있었다. 색을 보정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해도 된다. 문제는 루시드드림 삽화다. 삽화는 그려지지 않는데 마감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든다. 나는 쉴 사이도 없이 루시드드림 삽화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도는 나가질 않는다. 작업에 진전이 없는 채로 해가 진다.

그려지지 않는 것과 그리지 않는 것은 이상하게 통한다. 그려지지 않는 경우 그리기가 싫고 그리기 싫은 경우 그려질 리가 없으니 이 두 경우는 서로를 완벽하게 내포하고 있는 쌍생아 같은 것이다. 양측의 경우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똑같다.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나는 마음을 도리어 가볍게 먹고 식료품가게에서 몇 가지 재료를 사 가지고 와 요리나 하기 시작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보자면 엄연한 사치이며 만용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려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식료품가게 아줌마는 꽤 오랜만에 내게 달갑지 않은 참견을 해오지 않았다. 경비아저씨의 괴한목격담을 듣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던 나도 얼마간 경비아저씨의 목격담을 듣게 됐다. 가까이서 보니 괴한은 얼굴에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희한한 분장을 해놓고 있었으며 그걸 멀리서 보니 가면처럼 보였다는 거였다.

제일 넓은 후라이팬을 꺼내 올리브기름을 두르고 마늘 몇 쪽과 두껍게 자른 양파를 볶는다. 마늘이 익을 때쯤 휘핑크림을 넉넉히 붓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크림 표면에 구멍들이 생겨나며 우르르 끓어오른다. 나는 반쯤 삶아진 면을 크림소스 속에 넣는다. 면을 넣자 한동안 잠잠해졌던 크림소스가 더 맹렬한 기세로 요동치며 끓어오른다. 이제 가스렌지 불을 끄고 음식을 접시로 옮긴다.

크림스파게티다. 주재료가 휘핑크림과 파스타 면인 데다 재료를 차례로 넣어 끓기만을 기다리는 게 조리법의 전부다. 간단하기 때문에 라면, 김치찌개와 더불어 내가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하나이다. 느끼한 맛이라면 손사래 치는 내가 크림스파게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역시 초연의 영향이다. 작업이 잘 풀리거나 잘 안 풀릴 때, 새로운 삽화 의뢰를 받거나 마감을 할 때, 초연은 곧잘 크림스파게티를 만들어주곤 했다. 물론 내가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인스턴트식의 간단한 크림스파게티가 아니라 갖은 재료와 향신료가 가미된 진짜 크림스파게티였다.

초연이 이 집에서 처음 크림스파게티를 만들어 준 때 나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초연이 드디어 내 사적인 고백에도 응해 왔던 까닭이다. 초연과 나는 원래대로라면 짧은 인연만을 나누었을 것이다. 출판사 디자이너가 휴가 간 사이의 잠깐 동안만 초연이 내 삽화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내 삽화를 담당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사적으로는 함께 있어 달라는 고백을 했다. 초연은 나의 공적인 부탁에만 응해왔지만 사적인 고백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일할 때의 초연은 부드러운 말투로 마감을 종용했지만 사적인 모습의 초연은 오히려 강단이 있어서 마감을 꼬박 꼬박 지켜내게 했고 담배를 끊게 했으며 가요 일색이던 내 시디장에 클래식이 유입되게 했다. 터키행진곡이 들어있는 소나타 음반을 틀며 초연은 말했다.

터키행진곡을 들으면 깨어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아. 가만가만 몰아치는 몽환적인 선율이랑 굵고 힘있는 음계들이 번갈아 나오는데 그게 꼭 뫼비우스의 띠 같거든. 환각과 실제를 하나로 묶어 놓은 뫼비우스의 띠. 근데 이거 알아? 터키행진곡은 사실 행진용으로 쓰긴 어렵다는 거. 정박보다 엇박이 많아서 그렇대. 이 곡에 맞춰 행진할 수 있는 건 아마 술에 취해 발이 꼬인 사람들 정도겠지? 하긴 몽환과 현실을 하나로 얽어 놓았으니 그건 당연한 걸지도 몰라.”

초연은 없지만 터키행진곡 CD와 징크스로서의 크림스파게티는 내게 남은 셈이다. 입 안에 차오르는 크림소스 맛에만 신경을 집중해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어쩔 수 없이 고적해진다. 다행히 고소한 크림이 혀에 스며들어 침침한 기분을 눅잦혀준다. 크림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나는 내 앞에서 재잘대던 초연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TV를 켠다.

오늘 밤은 짙은 안개가 끼는 곳이 많겠습니다. 밤길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저녁뉴스의 일기예보를 듣는다. 드디어 삽화를 마무리한 덕분이다. 루시드드림 삽화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것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그림은 마침내 완성됐다. 며칠 전부터 내가 꾼 꿈을 꾸준히 기록한 덕분이다. 희부연 바탕에 주황빛이 점점이 번져있는 것을 배경으로 나는 매일 매일 그 날의 꿈들을 덧붙이고 덧입혔다. 흩어져있는 퍼즐판의 조각들을 올바로 꿰맞출 순 없어도 한데 모으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며칠간 내 꿈의 기록을 통해 그림 속에는 터키행진곡과 거친 숨소리, 몇 명의 사람들, 희미한 달과 깡마른 나무들이 동거하게 되었다. 나는 완성된 삽화 두장을 프린터로 출력해본다. 종이로 인쇄된 것을 봐야 고칠 점을 간파하기가 쉽다. 오늘 밤에 안개가 낀다고 했지. 나는 불현듯 축 처지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뽑혀 나온 그림 두 장을 집어 든다.

루시드드림 삽화만 조금 더 보정을 해서 내일 넘겨주면 될 것 같다. 희부연 빛과 주황빛이 뭉그러진 바탕에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진공상태에서처럼 제멋대로 늘어 놓여있다. 꼬부라진 음표들은 꿈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터키행진곡의 음계들이고 사방에 난무하는 고드름은 주인공의 거친 호흡소리이다. 거친 숨소리가 차가운 고드름으로 얼어붙은 것은 주인공이 달리려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이 꿈속에서 나의 무력함을 대변한다. 달리기는커녕 사지가 멋대로 굳어버린 통에 붙박인 듯 멈춰있는 주인공 옆에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녹색 괴물로 바뀌기도 하며 녹색괴물은 주인공과 합성된다. 반인반수. 그림 한쪽엔 공부하는 고양이를 그려 넣고 반대쪽엔 커다란 창문을 집어넣었다. 창 밖으론 해와 달빛이 밝은 가운데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괴상황을 나타냈다. 남는 자리엔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들을 그려 넣어 비현실성을 강조했다.

 

점점 눈이 감긴다. 나는 삽화 속 주인공이 달리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양팔을 교차해 흔들고 발로 땅을 굴러 몸을 앞으로 빼내는 주인공을. 나른하고 몽롱한 가운데서도 내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온 몸에 훈기가 도는 걸 느낀다. 주인공은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사방이 희부옇고 흐릿한 가운데 주황색 빛이 점멸하듯 어룽진다. 익숙한 장면이다. 나는 여기가 꿈속이란 걸 알아챈다. 발이 땅을 구르는 소리 말고는 잠잠한 내 꿈속이 돌연 소란스러워진다. 누군가의 악다구니가 내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가 내 달리기의 보폭을 위축시킨다. 나를 좇는 녹색괴물이다. 나를 비끄러매려는 모든 것을 제치고 끊어내기 위해 나는 더 달린다. “야 거기서. 너 누군데 남의 아파트서 지랄이야.” 악다구니는 더 드세어진다. 나는 더 빨리 달리려다 화단의 낮은 울타리를 잘못 디뎌 넘어진다. 괴물은 내 목덜미를 낚아채어 내 얼굴을 노려본다. 나는 발버둥치지만 괴물들이 세 마리나 달라붙어 있어 탈출이 쉽지 않다. “801호 총각 아냐?” “우리아파트 사람이야?” 머리 한구석에서 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 같다. “8동 수위잖어. 총각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려 괴물을 쳐다본다. “총각이 그 괴한이었어?” 경비원으로 바뀌어있던 괴물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상궂은 부랑배로 변한다. 나는 느슨해진 부랑배들의 결박을 떨치고 재빨리 일어서 뛰기 시작한다. 사방은 뿌연 안개로 둘러싸여 희미하고 그 가운데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겹치고 번진다. 나는 문득 손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괴물은 나대신 여자를 둘러싸고 있다. 익숙한 얼굴, 초연이다. 초연에게 가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온 몸이 가느다란 실로 칭칭 동여매인 것 같다. 나는 다리를 들어보려 용을 쓰지만 움직이질 않는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어 사지가 저리고 땀이 난다. 힘들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나는 모퉁이를 불러낸다. 초연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춤주춤 모퉁이를 돈다.

집에는 터키행진곡이 흐르고 부드러운 크림소스 향이 가득하다. 초연이 스파게티를 접시에 담아 싱긋 웃으며 건네준다. “어제 마감 지키느라 수고했어. 축하하는 뜻에서 해산물 잔뜩 넣은 크림스파게티야.” “네가 마감 재촉해서 죽을 둥 살 둥이었다구. 징크스란 거 알면서 담배도 못 피게 하구.” “대신 홍차 타 줬잖아. 씁쓸하구 텁텁한 맛은 홍차도 똑같은 걸 뭐. 오늘도 사왔어, 홍차티백.” 부엌 선반에는 초연이 사온 홍차 티백과 진라면과 신라면이 두개씩, 그 외 조미료들이 놓여있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단정하게 드러나는 초연의 뒷목에 나는 입을 맞춘다. 오늘의 초연은 까닭 없이 사랑스럽다. “간지러워, 하지마.” “더 간지럽혀야지.” 나는 초연의 목덜미를 살짝 핥는다. 약간 짠 맛이 난다. “간이 딱 맞네.” “크크크 간지럽다니까?” 나는 목을 비틀어 빼내는 초연의 옆얼굴에도 입을 맞춘다. 초연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아름다움이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초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미소 짓는 초연의 얼굴이 조금씩 바래진다. 화사하던 창 밖의 햇살도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져간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초연의 머리가 천천히 휘발되어 흩어지기 시작한다.

3단계. 꿈 연장기. 원하는 꿈을 꾸고 있는 중에 깨어나지 않기 위해선 꿈을 연장시킬 필요가 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꿈이 사라지는 시기를 판별한다. 시각적인 것, 즉 모양의 디테일이나 색감이 흐려지며 꿈은 사라진다. 꿈이란 결국 감각이다. 꿈의 생생한 감각을 되돌리기 위해 신체의 감각을 생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몸을 움직인다. 양팔을 크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몸의 생생한 감각을 느끼며 다시 문이나 길모퉁이를 불러낸다.

한참 동안 양 팔을 움직이며 문을 불러냈지만 내 눈 앞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뻐근해진 양팔을 내려놓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온 몸이 끈적하게 젖어있다. 몸을 좀 씻어야겠다. 나는 뻣뻣한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간다. 꿈 속에서 얼마나 힘을 줬는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화장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얼굴에는 빨간 줄이, 풀리다 만 실타래처럼 두껍고 난잡하게 뒤엉켜 있다. 거울 앞에 뚜껑 열린 립스틱이 놓여 있다. 나는 이것을 집어 들어 얼굴에 덧바른다. 맙소사. 정말 내가 이랬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믿어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믿기 싫은 건 이제야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이 립스틱은 마지막 날 초연이 두고 간 것이다. 그 날 나는 마지못해 초연을 바래다주고 있었다. 초연을 안 지 2, 2년의 세월만큼 먼지가 쌓이고 때가 곱낀 액자처럼 초연 역시 내게 권태와 일상의 상징이 돼 있던 때였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아름다움이 초연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까마득했으며 그녀가 까닭 없이 사랑스러워지는 일도 전혀 없었다. 초연이 내게 변했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그녀에게 남아있던 친근감마저 상실해갔다. 초연의 자취방이 외진 곳에 있긴 했지만 험한 일을 당한 적은 없던 터라 귀가 길의 배웅도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초연의 집이었다. 별안간 몇 명의 취객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안개 낀 밤,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 말고는 어떤 인기척도 없는 외진 모퉁이였다. 그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왔고 나는 초연의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간 달린 후에야 내 손에 초연의 손이 쥐어져 있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넘어져있는 초연을 취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 뛰었다. 가까운 파출소에 가 상황을 설명하고 순경들과 같이 현장에 가 보았지만 골목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했다. 골목 주변을 샅샅이 돌아봐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순경과 함께 초연의 집에 가 보았지만 거기에도 초연은 없었다. 모퉁이 앞에서 손을 놓은 것은 초연이 아니라, 나였다.

몰랐으면 좋았을 걸. 기억해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거세게 밀려드는 후회 때문에 몸이 저리고 떨려온다. 나는 비틀대다가 책상에 손을 짚는다. 그 바람에 책상에 놓여있던 삽화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루시드드림 삽화 속에 그려진 괴물은 바로 나였다. 초연의 손을 놓치고 혼자 달렸던 나, 초연을 버려둔 채 도망갔던 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루시드드림 삽화를 마구 찢어버린다. 다시 그리는 한이 있어도 이 삽화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보낼 수 없다. 편집장이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다. 찢어도 찢어도 루시드드림 삽화는 내 눈앞에서 더욱 선명하게 복원된다. 서로를 쏘아보는 신데렐라들의 눈빛에는 호기심 대신 독기가 어려 보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이것은 꿈이야, 하고 말해본다. 손끝을 들여다보고 시계를 쳐다본다. 천천히 방안도 한번 휘둘러본다. 이것은 꿈이야, 내 목소리는 정확한 발음으로 울려 퍼지고 손끝은 바르게 아퀴 지어져 있으며 시계는 몇 번을 쳐다봐도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집 안도 잘 정돈되어 있다. 모든 것은 꿈이라고 의심할 바 없이 차분하게 제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다. 꿈이어야 한다. 현실 같은 꿈. 의심할 바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현실 같은 꿈. 나는 루시드드림을 꾸기 위해 모퉁이를 불러낸다. 굽은 길을 따라 돌아서면 초연이 기다리고 있을 모퉁이를, 쉬지 않고 불러낸다.

 

 

<당선소감>


써야 할 책임 감사할 책임

 

나는 참 스키를 못 탔다. 남들은 폴을 한번 찍고 휙, 무릎을 굽히면 눈바닥을 잘도 가르는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나는 도무지 나아가질 못했다. 그 뒤 스키장에 가는 것이 몹시 싫어졌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이 입혀준 군장에 맞춰 폴을 쥐고 스키에 올라탄 채 엉덩이를 쑥 내밀고 이상한 자세로 버텼다.

넘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고, 몸을 아래로 내쏟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뭘 한 것도 없는데 쓱, 하고 바닥이 스키날에 쓸리는 소리가 나더니 스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초이자 최후인, 스키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다.

전화를 받을 때도 비슷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나는 두려움을 인식할 사이도 없이 덥석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슥, 스키가 움직였고 가만히 있는 나를 실은 스키가 노를 젓듯 눈바닥을 가르고 있었다.

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스키를 대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나았다. 당선 소식을 통해 넓고 자유로운 설원을 마음껏 누비라는 권고를 들은 것 같다, 자세가 어색하고 비틀거려도 멈추지 말고 내딛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스키장의 눈 쌓인 바닥같은 파지를 그냥 버려두지만은 않겠다. 어설퍼도 나만의 방식으로 타박타박, 백지에 어떤 흔적을 내보려 노력하겠다.

엄마의 응원과 지지가 없었다면 나는 포기했을 것이다. 묵묵히 지켜보며 기대해주는 아버지, 언제나 격려해 주시는 할아버지와 걱정을 해주시는 할머니. 같이 예술의 길을 걸으며 조언을 해주는 동생, 우리 집은 내 뿌리가 심긴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이다. 내가 흔들리려고 할 때마다 들썩이지 않게 나를 잡아주고 영양분과 햇살을 공급해준 가족들에게 무한감사를 표한다.

또 나를 이끌어주시고 베풀어주신 분들이 계시다. 내 문학의 지도를 그려주시는 전영태 선생님, 작가정신의 본을 보여주신 은사 방현석 선생님, 구성을 가르쳐주신 조동선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멘토 박성원 선생님. 시쓰기를 알려주신 김석환 선생님.

내가 이런 조각이나마 된 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그분들 덕이다. 감사해야 할 책임을 무겁게 느낀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무등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내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폴 대신 연필을 쥐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고백하며 이 영광을 돌린다.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심사평>


플롯의 묘미 한껏 되살린 작품

 

소설이 스토리의 힘을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라면, 플롯이란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할 것이다. 부부간의 갈등, 노년의 사랑, 실업, 특별한 재능, 일본의 지진에 이르기까지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은 이야깃거리는 풍성했는데, 그 이야기를 소설로 꾸려내는 능력이 아쉬운 작품들이 많았다.

87편의 응모작 중 결선에 오른 작품은 '','배설','무적여포(無敵呂布)', '모퉁이'등 네 편이었다. ''은 경쾌한 작품이다. 이혼한 아버지와 실업자 아들이 타인의 값싼 동정이 싫어서 다정한 부자간을 연출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더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배설'은 탄탄한 문체가 오랜 습작의 내공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J가 내게 접근한 이유가 라이벌인 A를 위해 정보를 빼내기 위함이었다는 설정이 진부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무적여포(無敵呂布)'는 청년 실업의 난세와 전쟁 게임의 난세를 유쾌하게 접합시킨 재치있는 소설이다. 결말 부분에서 배반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졌더라면 소설의 깊이가 더해졌을 것이다.

'모퉁이'루시드 드림신데렐라 악성증후군이라는 에피소드와 내가 그리고 있는 삽화의 이야기를 섞어내면서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끌어내는 솜씨가 탁월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호흡이 조금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플롯의 묘미를 한껏 살린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삼는다.

심사위원 : 이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