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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최보영

 

등장 인물

김정수(75세) 방선자(73세)

당신 옛날 꿈 배우였잖우, 한 번 찍어 볼까요? 
옷부터 입읍시다! 당신, 꼭 … 젊었을 때 같아


때비가 오는 여름날

무대

정수와 선자가 사는 6~7평 정도의 원룸

지난밤 자고 일어난 이불이 원룸의 반 이상 차지하고 깔려 있다. 

무대 전면에 거대한 TV처럼 보이는 프레임이 걸려 있다.

무대 밝아지면

정수, 리모컨을 쥐고 버튼을 누르고 있다.

선자, 커튼을 살짝 걷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사이

정수 아 좀 비켜 봐.

선자 아우, 비가 많이 오네.

정수 자네가 딱 가리고 서 있으니까 리모컨이 안 되잖아.

선자 (몸을 살짝 비튼다) 해 봐요.

정수 (리모컨을 탁탁 치고 다시 버튼을 누른다) 

아,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텔레비 켜진 거 맞아? 

왜 온통 검어?

선자 빨간 불 들어와 있으면 꺼진 거잖우.

정수 빨간 불 없잖아.

번개 번쩍인다.

선자 빤짝하네. 곧 우르르 쾅쾅 하겠네.

정수 소나기라더니.

선자 소나기래요? 

정수 응, 오늘 아침에. 6시 뉴스광장 1부에서.

선자 그럼 정확하겠네. 뉴스광장이 제일 잘 맞어. 

아가씨도 참하고.

정수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테레비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선자, 정수의 옆으로 가 앉는다.

천둥소리 들린다.

선자 이리 줘 봐요.

정수 (리모컨 버튼을 마구 눌러 보며) 봐봐. 안 먹잖아.

선자 이리 줘 보라구요.

정수 자네가 한다고 되겠어? 

(두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TV 가까이에 댄다) 이것 봐.

선자, 정수에게 리모컨을 뺏어 

TV 바로 앞에서 리모컨을 눌러 보지만 안 된다.

선자 전지가 다 된 거 아니우?

정수 그런가?

정수 새 놈 끼워 봐.

선자, 리모컨 전지를 갈아 끼운다.

정수, 관심을 가지고 본다.

정수 아니, 돌려서 끼워야지.

선자 (어리둥절하더니 리모컨을 돌린다) 이렇게요?

정수 아니, 전지를!

선자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 뭘, 어떻게 돌리란 말이야.

정수, 선자에게서 리모컨을 뺏어 전지를 갈아 끼운다.

선자 아, 그렇게?

정수 그래!

선자 왜, 소리를 쳐요. 그런 거 가지고. 

정수, 무시하고 리모컨을 누른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검은 화면이다.

정수 전지 문젠 아닌 거 같은데.

선자 (TV를 유심히 보더니) 이거 켜진 건데?

정수 응?

선자 테레비를 끄면 여기 빨간 불이 들어오고 켜면 여기 빨간 불이 꺼지더라고요. 

근데 여기 지금 빨간 불이 꺼졌잖우?

정수 그럼 왜 암 것도 안 나와?

선자, TV를 탕탕 친다.

선자 (TV 주변을 살펴보더니) 저, 저것이 문제인 거 아닌가?

정수 뭐? 저거 유선방송에서 달아 준 거?

선자 응. 그거 없음 이제 테레비 못 본다고 그랬잖아요. 

저게 고장난 거 아닌가?

정수 그러고 보니까 저기 적힌 글자도 다른 거 같은데.

선자 맞아요, 원래 퍼런 글씨로 '000' 적어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저게… 뭐라고 적힌 거요?

정수 영어고만, 영어.

선자 유선방송에 전화 좀 해 보는 게 어떠우.

정수 전화번호 모르는데.

선자 그때, 저거 달아 주고 간 사람이 명함 준 거 있잖아요.

번개가 번쩍거린다.

선자 꼭 사진이라도 찍는 거 같네.

정수 사진? (웃는다) 그러네.

정수, 서랍을 뒤진다.

정수 명함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

선자 천둥소리가 이제 좀 멀어졌네요.

정수 여기 있다. 이거 맞지?

선자 (명함을 살펴보고) 맞는 거 같아요.

정수 (전화를 걸며) 공일공…삼…이…오오…사… 뭐야 … 칠…구…칠

천둥 치는 소리.

정수 아, 여보시오? 거기 유선방송 맞는가? … 

우리집 유선방송 달아 준 총각 아 니야? …

아, 그만 뒀어? 왜? 아…그럼 어떡하나. 

테레비가 안 나오는데. 아 그래? 전화번호? 불러 줘요. 

(선자에게) 얼른 받아 적어.

선자 자, 잠깐만. 종이, 종이.

정수 아, 잠깐만 종이 좀. 아! 빨리 좀 찾아 봐.

선자 종이, 종이가 어디 있더라.

정수 달력에 적으면 되잖아!

선자 그렇지. 근데 왜 소리를 쳐요! 

정수 전화 끊어지잖아, 빨리. 적어. 총각 잠깐만.

선자 연필, 연필이 어디…,

정수 아이 답답해.

선자 (서랍을 뒤진다) 연필이 하나도 없네.

정수 총각, 좀만 기다려봐. 

우리가 펜이랑 멀어진 지가 오래돼서 찾느라고….

선자 아! 루주, 루주로 쓸 테니까 부르라고 해요.

정수 불러! 총각. 루주로 쓴대. 일오칠칠….

선자, 달력에 커다랗게 받아 적는다.

정수 일오칠칠 삼구칠칠? 고맙네!

정수, 전화 끊는다.

정수 그렇게 크게 적으면 어떡해?

선자 잘 보이라고.

정수 날짜가 하나도 안 보이잖아. 달력을 볼 수가 없네!

선자 잘됐네. 어차피 달력 필요도 없잖아요. 

정수, 달력에 적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긴 사이.

선자 안 받아요?

정수 (전화에 집중한다) 테레비는 3번. 

(전화기 버튼을 꾹 누른다)

선자 뭐래요.

정수 아 잠깐만. 고장은 2번.

선자 안 받아요?

정수, 선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선자 뭐라고 하는구만, 안에서.

정수 (수화기를 들고 한참 기다리다) 

뭔 노래만 나와!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고.

선자 그럼 좀만 더 기다려 봐요.

정수 받았다. (사이) 아니네, 노래가 다시 나오네.

선자 끊었다가 다시 해 보는 게 어떠우?

정수 좀만 더 기다려 보고.

사이.

선자 그냥 끊고 다시….

정수 아, 여보시오.

선자 받았어요?

정수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집 테레비가 안 나와서요. 

(사이) 여기가 석관동 103번지 301… 아아 그래요?

선자 왜요.

정수 (선자에게) 딴 집도 다 안 나온대. (사이) 그럼 언제…. 

알겠습니다. 네.

정수, 전화를 끊는다.

선자 이 동네 테레비가 다 그렇대요?

정수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는 바람에 뭐 문제가 생겼대.

선자 그럼 고치러는 언제 온대요?

정수 거기서 노력하고 있으니까 좀 기다리면 나온다고.

선자 오늘 안에는 나온대요?

정수 나야, 모르지.

선자 … 이제 어떡하나. 집에서 가만히 앉아 할 일도 없는데.

정수 그러게. 낮잠이나 잘까.

선자 잠 오지도 않는데. 당신이나 한숨 주무시든지.

선자, 심심한지 손에 쥐고 있는 루주로 입술을 바른다.

선자, 거울을 보며 상념에 빠진다.

정수도 그런 선자를 바라본다.

정수 오랜만에 바르네.

선자 예뻐요?

정수 입술은.

선자 하여간 재미없는 양반. 

(사이) 드라마도 못 보는데 우리가 한 번 찍어 볼까요?

정수 쓸데없는 소리.

선자 왜요, 못하란 법 있수? 당신 옛날 꿈이 배우였잖우.

정수 옛날 얘기지.

선자 애들 다 키우면 해 보겠다고 할 땐 언제구.

정수 너무 늙었어.

선자 왜요, 해 봅시다. 어제 연속극 예고편처럼. 

테레비도 안 나오는데 우리라도 해 봅시다. 

으응? 심심하잖어.

정수 연기도 못 하면서.

선자 허이고, 테레비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연기 못 허는 놈들 수두룩뻑쩍 헙디다. 

정수 나는 감정 이입되는 인물이 없어서 못 해. 

배우는 감정 이입이 필수걸랑. 

그 사람들이 그냥 막 외워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드라마 같이 살아 봤어야 드라마를 찍지.

선자 당신은 그런 말도 못 들어 봤나. 

진짜 인생이 더 드라마라고.

정수 사람 나름이지. 별것도 아닌 걸로 끙끙 앓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야.

선자 거 참. 마누라 한 번 맞춰 주면 안 되나.

정수 차라리 젊은 역할이라면 모를까.

선자 청춘 남녀요?

정수 응.

선자 못할 거 있나! 젊으면 더 좋지. 우리… 옷부터 입읍시다!

정수 응?

선자 이왕 할 거 배우들처럼 멋 좀 내 보자구요. 

정수 뭘 입으라구. 

선자 어디… 골라 드릴게.

선자, 장롱을 연다.

선자 이놈 입을까? 첫째 결혼식 때 입은 거.

정수 양복? 촌스러워. 옛날 거라.

선자 그럼 이건요?

선자, 옷 하나를 꺼내 정수의 몸에 대본다.

정수 이건 넷째가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사온 

거라고 했던 거네.

선자 네. 비싼 옷 받아 놓고 아까워 입지도 못하고. 윗도리는 이걸로. 

(사이) 당신한테 참 잘 어울려. 얼굴도 이쁘네.

정수 (쑥스러워)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무슨! 바지나 골라.

선자 바지는… 요거, 요거 어때. 다섯째가 명절에 사왔던 거.

정수 안 돼. 길어졌어.

선자 무슨 바지가 길어져.

정수 아, 길어졌다니까. 넘의 옷 입은 것마냥 보기 흉해. 못써.

선자, 다시 장롱을 뒤진다.

번개가 친다.

선자 이건요?… 근데 이건 어디서 났지? 처음 보는데?

정수 …막둥이가 사 온 거잖아.

선자 아…. 그놈, 스무 몇 살 땐가, 

지 여자 친구 인사 오기 전날 사 온 건가?

정수 그래, 아빠 사이즈도 몰라서 영 작은 걸 사왔었잖아.

선자 그놈, 아들이란 게 아버지 사이즈도 모르고…. (사이) 이제 맞으려나.

사이. 천둥소리 들린다.

번개 치고 천둥소리 들리는 '사이'가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가까워진다.

정수, 멍하니 있더니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선자.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선자 당신이 옛날엔 풍채가 참 좋았는데. 

이제 그 살이 다 빠져서.

정수 왜, 서운해? 옛날엔 살 빼라고 난리더니.

선자 다 술살이었으니까 그렇죠. … 다시 좀 쪄도 좋으련만.

정수 (바지 지퍼를 잠그며) 자꾸 빠지기만 하고. 

나이가 드니 찌는 게 참 힘들어.

선자 바지 딱 맞구만.

정수 (웃으며) 막둥이가 살 빠질 줄 알고 요걸 사 온 모냥이네.

선자 당신 꼭… 젊었을 때 같아.

정수 포 터트리지 말어. 젊긴 무슨.

선자 포 아니고 진짜라니까요. 옛날 같어. 

그때 당신이 참 커 보였는데.

정수 커 보이긴 뭐가. 나는 원래부터 키가 작았는데.

선자 아냐, 멋져. 정말 배우 같어. 당신 배우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 걸 그랬어. 내가 부득부득 못하게 해서.

정수 잘 됐어. 해서 뭐해. 집안 말아먹지만 않았음 다행이지.

선자 그때 당신 정말 잘났었어.

정수 말은.

선자 그때는 나도 좀 괜찮았지. 안 그랬수? 말해 봐요.

정수 (말 돌린다) 자넨 뭘 입을 거야?

선자 예나 지금이나 칭찬 못 하는 건 안 변하네!

정수 옷이나 골라. (옷장을 뒤진다) 

자네도 마땅한 옷 하나 없지?

정수, 빨간 치마를 고른다.

번개가 친다.

정수 이거 어때? 색이 참 곱네. 

당신 젊었을 때 이거 자주 입었잖아.

선자 이 나이에 야시시하게, 그 색을 어떻게 입어요.

정수 뭐 어때. 나도 이거 입었는데.

선자 아, 그래도 그건 싫어요. 비도 오는데 미친년 같어.

천둥소리.

정수 이건?

선자 양장이요? 당신은 청바진데 나도 어울리는 거 고를래. 예쁜 것 좀 골라 봐요.

정수 아직도 예쁜 게 좋나 그래?

선자 당연하지. 여자는 평생 여자라고 못 들어봤수?

정수 평생은 무슨. 남편 있을 때나 여자야. 

나 죽으면 여자 노릇 할 곳이나 있남?

선자 죽긴, 벨 쓸데없는 소릴. 죽을람 죽으라지. 

새로 시집이나 가지 뭐.

정수, 원피스를 꺼낸다.

정수 한 번 입어 봐. 새로 시집가려면.

선자 이거는 저번에 넷째 네가 두고 간 옷이잖아요. 애들 걸. 됐어요.

정수 넷째랑 덩치도 비슷하잖아. 맞는지만 봐봐.

선자 그럼 맞는지만 볼까.

선자, 옷을 갈아입는다.

선자 색은 예쁘네. … 여기 지퍼 좀 올려 줘요.

정수, 지퍼를 올리면 선자, 숨을 훅 들이마신다.

정수 딱이네 딱! 

선자 (한 바퀴 돈다) 어울려요?

정수 징그러.

선자 벗을래요.

정수 됐어. … 예뻐. 젊었을 적 같어.

사이.

선자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손으로 빗는다. 사이) 

화장도 좀 할까?

선자, 앉아서 화장을 한다.

정수, 그 모습을 지켜본다.

정수 자네도 많이 늙었네.

선자 그럼 안 늙어요? 나이만 먹고 얼굴은 그대로면 무섭게? 

(사이) 젖통도 다 처지고… 예뻤는데.

정수 그럼, 동글동글 복숭아처럼 예뻤지.

선자 (화장을 마친다) 다행이우. 당신이 기억해줘서. 

(사이) 알몸 사진이라도 남겨 둘 걸 그랬어.

 


연기 참 잘하시우, 재능이 아깝게 됐구랴 
나 만나 고생했소! 세월 다 가고, 미안하우

정수 사진? 누가 본다고.

선자 (일어나며) 내가 보고, 당신이 보고.

정수 벌써 다 했어? 옛날엔 오래도 걸리더니. 

분칠하고 입술 바르고, 나무 꼬실라서 요요(시늉하며) 속눈썹 올리고.

선자 속눈썹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거 잘못 꼬시르면 어떡하라구.

정수, 서랍에서 리본 달린 머리핀을 꺼내 

선자의 머리에 달아 주려고 한다.

선자 뭐야.

정수 아, 일로 와 봐. 지난번에 샛별이가 두고 간 거.

선자 아, 싫어.

정수 이리 와 보라니까.

선자, 못 이기는 척 머리를 대 준다.

정수, 선자의 머리에 핀을 꼽아 준다.

선자 넘부끄럽게.

선자, 다시 한 번 거울을 본다.

정수 빼지 말어.

선자 누가 뺀다구 그랬나. (사이) 이제 진짜 찍어 볼까요? 

불 한 번 딱 껐다 켜면 시작이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선자, 불을 끈다.

선자 자, 준비…. (불을 켜며) 시, 시작이오!

밝아진 무대 위에는 갈아입은 옷처럼 젊은 정수가 서 있다.

정수 (종이 한 장을 들고 보며 노래한다) 개 한 마리 들어왔네 (음정이 너무 낮다. 기침을 하더니 음정을 다시 잡고 노래한다) 주방 속으로 들어와서 순대 하나 슬쩍 훔쳤네 주방장이 나타나서 국자 자루로 뼈다귀도 못 추리게 때려 죽였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개들이 빨리빨리 친구를 묻어 주었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생각에 잠긴다. 사이)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개들이 빨리빨리 친구를 묻어 주었네 하얀 나무 십자가 밑에 비문까지 이렇게 새겨 주었네 개 한 마리 들어왔네 주방 속으로 들어와서 순대를 슬쩍 훔쳤네 주방장이 나타나 국자 자루로 뼈다귀도 못 추리게 때려 죽였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개들이 빨리빨리 친구를 묻어 주었네… 

정수, 열에 뜬 사람처럼 무대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한다. 

사이. 먼 곳을 바라본다. 

번개가 번쩍하면 무대에 젊은 선자가 나타난다.

정수는 어둠 속에 있는 선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천둥소리.

정수 또 너로구나! (사이) 이리 와, 껴안아 줄께! (사이) 내가 가 버렸으면 좋겠니? (사이) 고고! (사이) 너 매를 맞았구나? (사이) 고고! (사이) 어젯밤엔 어디서 보냈지? 

선자, 정수 옆으로 다가온다.

정수, 선자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선자 뭐하는 거예요, 지금?

선자가 불을 켠다.

선자 그거 안 하기로 했잖아요.

정수 이번이 기회라고. 블라디미르야, 주인공이라고.

선자 주인공이고 뭐고….

정수 평생 꿈이었어. 뭘 걱정하는지 알아. 돈은 내가 어떻게든 벌어다가….

선자 들어 보니까 연극 그거 돈도 못 받고, 떼이는 경우도 허다하다던데, 봉급 제때 주는 학교만 할라구.

정수 일형 엄마, 한 번만….

선자 그거 하면 한 달 내내 학교에도 못 나간다면서요. 제발,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연극 이야기는 그만해요. 응? 

정수 한 달만 하고 다시 학교 가서 일할게. 응?

선자 연극 같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세상이 그렇게 고분고분할 줄 알아요? 한 달 뒤에 학교서 다시 안 받아 주면요? 

정수 연극 같은 소리? 내가 내 새끼들 밥 하나 못 먹일까 봐! 걱정 마. 내가 내 몸을 팔아서라도 네 입에 밥 넣어 줄 테니까!

선자 당신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다예요? 나는?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우리 새끼들 잘 되는 거 보는 건데. 그거 하나 이루는데 그걸 그렇게 막아야겠어요? 아버지가 돼서? 제 일신만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니잖아! 

천둥 번개.아기 우는 소리.

선자 정신 차려요! 

정수 ….

선자 나는 내 자식들 정말 잘 키울 거야. 남부럽지 않게, 선생 아버지 밑에서 떵떵거리게! 

무대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젊은 선자와 젊은 정수가 앉아 있다.

선자 막둥이 잡혔대요.

정수 … 어디서.

선자 수배 전단 보고 누가 신고한 모양이에요. (힘겹게, 울먹이며) 경찰서에 있대요.

정수 …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직원들 다 속이고… 돈도 안 주고 부려 먹었으니 그게 사기가 아니고 뭐야. (사이) 부모도 속이고, 도망쳐서 지 멋에 산 놈 아니야! 세상도 다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선자 막둥이도 잘 해 보겠다고 그런 건데.

사이.

선자 어떻게든 돈 만들어서 고소한 사람들 달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정수 무슨 돈으로, 우리가.

선자 집이라도 내놔요. 응?

정수 ….

선자 제발.

정수 … 순 사기꾼 놈. 나쁜 놈의 새끼. (사이) 불쌍한 놈. 불쌍한 내 새끼.

천둥 번개. 몇 번 반복해서 친다.

긴 사이.

선자 나쁜 놈의 새끼, 불쌍한 놈. 불쌍한 내 새끼.

정수 그만, 그만해.

선자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자가 어디 있어. 어떻게든 살아야지, 왜 죽어! 왜! 

정수 그만 좀 울어. 이미 바다에 다 뿌려 주고 온 자식을 왜 그렇게 다시 꺼내어 눈물 바람이야.

선자 바다에 뿌리긴 누가! 아직 여기 (가슴을 치며) 여기 있는데! 막둥아, 귀하디 귀한 우리 막둥아. 내 아가.

정수 그만, 그만하세. 응?

선자 나는 너에게 바란 게 없는데 왜 너는 도망가 버리니, 아가야. 막둥아.

정수 괜찮아. 괜찮아.

선자 이제 어떻게 살아요,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고 내가 어떻게 살아요.

정수 다 잊힐 거야. 한순간처럼 그냥 잊힐 거야.

선자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어. 드라마에서처럼. 몇 년 뒤, 아니 빨리 늙어 버렸으면 좋겠어. 

정수 잊게 될 거야. 이건… 맞아, 당신 말대로 누군가 짜 놓은 각본 같은 거야.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게 될 거고… 또… 잊어야만 해.

긴 사이.

정수 울지마.

선자 ….

정수 (갑자기 연기 톤으로) 또 너로구나! (사이) 이리 와, 껴안아 줄게! (사이) 내가 가 버렸으면 좋겠니? (사이) 선자! (사이) 너 매를 맞았구나? (사이) 선자! (사이) 어제 밤엔 어디서 보냈지? 또 우는구나! 이리와, 껴안아 줄게. 

사이.

정수 (기억을 더듬으며) 왜 잠도 못 자게 하는 거야? (톤 바꿔서) 외로워서? (다시 원래 톤으로) 행복하게 된 꿈을 꾸고 있었는데. (톤 바꿔서) 그럼 시간이 잘 지나갔겠구나. 

사이.

선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든다.

선자 시간이 잘 지나가겠지? 그렇죠, 여보?

정수 그럼.

사이.

선자 (갑자기 웃는다, 눈은 아직 눈물을 머금고 있다) 허허 허이고.

정수 웃길 왜 웃어.

선자 허허, 연기 참 잘하시우.

정수 내가 뭘 잘해. 자네가 아주 잘하네. 자네야말로 배우나 해 보지 그랬어.

선자 녹슬지 않았우, 하나도 늙은 거 같지가 않아.

선자 (대사처럼) 김정수 씨, 사랑해. 옛날부터 사랑했어.

정수 참나.

선자 (어색하게) 나 만나 고생했소! 좋은 세월 다 갔지. 미안하우.

정수 그거는 남자 대사고만.

선자 여자 대사면 어떻구 남자 대사면 어때요. 기분만 좋으면 되지 않겠수?

정수 그걸 그렇게 말하나. (자연스럽게) 나 만나 고생 많았네. 좋은 세월 다 가고. 내 미안하네, 평생. 내가 앞으로 잘 함세. 얼마나 남았을지는 모르지마는.

사이.

선자 …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거 재능이 아깝게 됐구랴.

정수 재능은 개뿔이 재능이여.

사이.

정수 이런 거 그만 할랴. 재미없어. 애들 같어.

선자 미안하게 생각허고 있어요.

정수 재미 없대두. 옷 벗어 버려.

선자 비가 그쳤네.

정수 응? 그렇네.

선자 감쪽같아요.

정수 응. 감쪽같이도 그쳤네.

선자 아니, 우리 말이에요.

정수 뭘.

선자 다. 다요. 다 괜찮아져 버렸잖아요. 잊은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것처럼.

정수 ….

선자 각본처럼 말이우… 연기를 하면서 살지는 않았는데…. 

사이.

정수 소나기가 요란하게도 오더니.

선자 꼭 사진 찍는 것 같아 좋더니.

사이.

선자 이렇게 예쁘게 입었는데, 산책이나 할까요?

정수 이렇게 입고 넘사스럽게?

선자 그럼… 영화 구경이나 갈까요?

정수 됐네 이 사람아.

선자 왜, 어디 좀 나가 봅시다.

정수, 곰곰이 생각한다.

정수 … 이렇게 갈 데가 없나.

선자 ….

정수 아들네나 갈까?

선자 누구네요?

정수 누구긴. 사형이나 오형이네 가야지.

두 사람. 다시 자리에 앉는다.

정수, 전화를 건다. 사이.

선자 안 받아요?

정수 으응.

사이.

선자 우리 막둥이 살아 있었으면, 거기에 가는 건데.

정수 …. 

선자 잘살고 있겠지. 우리 기다림서. 아버지 청바지 입은 거 보면 좋아할 텐데.

정수 …오형이네나 해 볼까?

정수, 다섯째에게 전화를 건다. 사이.

선자 안 받으면 그냥 끊….

정수 아! 여보세요? 오형이냐? 그래그래. 잘 지냈냐? … 어 엄마랑 나는 건강하다. 아… 애미가 아파? 어어… 아니, 저녁이나 같이할까 해서 전화했지. 오랜만에 너희 엄마랑 외출하려고 준비했다.

선자 아프다는데 그런 말을 왜 해요.

정수 그래? 그럴래? (선자에게) 오래.

선자 오래요?

정수 (고개를 끄덕인다) 데리러?

선자 뭐하러 그래. 전철 타고 가면 금방인데.

정수 전철 타고 가면 금방인데 뭐. 걱정 마라. 그래그래. 끊자, 곧 가마. 오야.

정수, 전화 끊는다.

선자 애미가 아프대요? 어디가요?

정수 두통이 좀 있다나 봐.

선자 아프다는데 가도 되나.

정수 가세.

둘 다 일어나지 않는다.긴 사이.

정수 가자구.

두 사람, 자리에서 힘겹게 엉덩이를 뗀다.

그때, TV가 지지직 소리를 내더니 화면이 깨끗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선자 아이고, 금방 고쳐졌네.

정수 빠르네 빨라. (사이) 꺼. 가게.

선자 … 저녁 연속극 봐야 하잖아요.

정수 연속극? 벌써 시간 됐나? (시계를 본다) 아이구, 곧 하겠네.

선자 우리 그냥… 연속극이나 봐요.

정수 …그럴까?

선자 응.

정수 그래. 그게 좋겠네. 

선자, 립스틱을 지우고 머리핀을 뺀다.

느리게 옷을 갈아입는 두 사람.

정수 전화기를 든다. 

무대 어두워진다.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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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신춘문예-희곡 당선소감] "부끄러움을 힘으로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설익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어 부끄럽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고도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부족한 작품에서 장점을 찾아내 읽어 주신 이윤택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사드려야 할 분들이 많습니다. 말보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매번 꼼꼼하게 작품을 읽어 주시는 배삼식 선생님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부끄러움을 힘으로 삼겠습니다. 하일지 선생님, 김사인 선생님, 윤대녕 선생님. 그땐 못 알아들었던 것들, 이제야 하나씩 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원의 박상현 선생님, 김광림 선생님, 김태웅 선생님. 지금의 모자람을 채워 나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덕여대 동기, 선후배들과 연극원 동기, 선후배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항상 내 글을 먼저 읽어 주는 강윤영, 백무늬, 김아로미 언니 고마워요. 노선미, 이현선, 류고은, 노의정도 고맙다, 나랑 놀아 줘서. 내 소식에 제일 기뻐할 언니와 형부, 곧 태어날 조카 사월이, 선영이 종인이도 정말 정말 사랑해.

엄마 아빠, 저를 자랑스러워 하시지만 제게는 두 분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묵묵함이 제게는 가장 강력한 응원이에요.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날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계속 걸어갈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태어나 처음 부산에 가 봅니다. 부산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최보영 / 1988년 전북 고창 출생. 한예종  연극원 극작과 예술전문사 재학.

 

 

 

 

[2014 신춘문예-희곡 심사평] "빼어난 연극 미학과 관객 공감 기대되는 작품"

 

200편 가까운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 후보에 오른 작품만 12편이었다. 그중 시나리오 응모작들은 아직 신춘문예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나리오는 '촬영을 위한 콘티'이기 이전에 문학적 읽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신(Scene)을 나누기 이전에 문장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문체가 있어야 한다.

올해 응모된 희곡은 현실과 개인의 정체성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수작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는 '어느 희곡 작가의 죽음'이 가장 리얼한 진실성을 갖추었고, 부산적이었다. '거미'는 연극 대본 이전에 문학적 상징과 현실성이 뛰어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드라마'를 당선작으로 권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는 작품 제목 그대로 드라마를 알고 쓴 작품이다. 희곡은 연극으로 표현되고, 결국 관객의 입장에 가닿아야 하니까. 공연되었을 때 빼어난 연극 미학과 관객의 공감대를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오늘의 노년세대를 다루면서도 유머와 삶에 대한 낙천성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희곡 작가의 죽음'은 작가가 칠순이신데, 생전에 공연되기를 바란다. '거미' 작가는 계속 쓰기를 기대한다.

올해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작가는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출신인 고연옥 씨였다. 그만큼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은 한국 연극의 믿을 만한 신인작가 등용문이 되고 있다.

당선자는 부산일보 신춘문예 출신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 가길 바라며, 본심에 오른 작가들의 계속적인 글쓰기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윤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