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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군 슬픈읍 늙으면 / 이미경

 

 

등장인물

최선한 72세

형사 42세

윤노을 26세

최바다 28세

무대

무대는 신문실과 어느 농촌 낡은 집이다.

신문실은 그저 탁자와 의자면 된다. 신문실에서 이어진 길 끝에 또 다른 무대, 낡은 시골집이 있다. 이 또한 툇마루와 작은 방 정도면 된다.

신문실 탁자에 형사와 최선한이 앉아 있다.

형사 버스에서 내린 게 몇 시쯤이었죠?

최선한 12시 53분이었지.

형사 아주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최선한 우리 동네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댕기니까. 매시간 53분에 다니거든.

형사 그런 동네 오는 손님이 별로 없죠?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누가 우리 동네 와? 거의 텅 빈 버스지. 가끔 장에 갔다 오는 동네 늙은이들이나 싣고 오지.

형사 좋으셨겠어요. 모처럼 젊은 사람이 와서.

최선한 그랬지. 점심 일찍이 먹고 나와 앉아 볕을 쬐는데 멀리서 버스가 오데. 아무도 안 내리겠지 싶으면서도 계속 쳐다봤어. 누군가 내리면 말이라도 섞고 싶었지. 너무 적적했으니까.

형사 그때 길을 오가던 동네 사람들은 없었나요?

최선한 없었어. 날이 추우면 노인들은 밖에 잘 안 댕기니까. 언 데 넘어지기라도 해서 고관절이 나가면 그대로 가잖아. 작년에 감나무집 할매도 넘어져서 마늘 농사는 이제 다 했어. 일어나서 방에 있는 전기도 못 끈다니까.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연세 있으신 분들은 조심하셔야죠. 영감님은 추운데 돌아다니셔도 괜찮으세요?

최선한 나야 팔팔하지. 그래서 더 외롭고. 오래 살면 뭐하나? 외로운 날만 더 느는 건데.

형사 그날 영감님 말고 젊은 사람이 마을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없었나요?

최선한 버스 운전사나 알려나. 나한테 가장 큰 문제가 뭔 줄 아나?

형사 뭔데요?

최선한 아직까지 총기가 너무 좋다는 거야. 둘이 내리더니 공기가 좋다,

형사 잠깐만요, 둘이라고요?

최선한 젊은 청년이랑 젊은 처자랑.

형사 여자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어요? 확실해요?

최선한 내가 방금 뭐라 그랬나? 총기가 너무 좋다니까. 둘이 버스에서 내려 얼마나 조잘대던지. 뭐 기도 안 찬 얘기들을 하길래. 내가 속으로 그랬지. 그리 좋은데 네들은 왜 안 내려와 사노. 이렇게 냄새나는 늙은이들만, 에휴,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입은 안 아프세요? 할 말, 안 할 말 다 하시는데.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여자분 진술에는 청년이 없었는데.

최선한 그럼 온 사람을 안 왔다고 하나?

형사 같이 온 청년 인상착의가 어땠는데요?

최선한 아주 멋쟁이였어. 하얀 목폴라에 곤색 코트를 입고 바지는 체크무늬 같은 걸 입었지, 아마. 신발은 군인들이 신는 거 있잖은가, 그….

형사 워커요?

최선한 그래, 그걸 신고 있었어.

형사 얼굴은요?

최선한 진하게 생겼어. 눈썹이 진하고 눈이 부리부리했지. 매부리코에 입술이 얇고 눈인가 이마인가 얼굴 어디에 점이 있었어.

형사 (노트북에 기록을 하며) 누군가 같이 오긴 했군요. 꼼꼼히 기억하시는 걸 보니. 그런데 왜 혼자 왔다고 했을까?

최선한 누가? 그 처자가 그래?

형사 예.

최선한 위험하게 여자 혼자 여행을 해?

형사 그렇죠, 그렇죠. 저도 그 부분이 미심쩍었어요.

최선한 젊은이들이 민박을 찾길래, 잘 데 없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지.

형사 맞습니다. 여자분도 그렇게 말했어요. 버스에서 내려선 바로 영감님 집으로 갔어요?

최선한 그랬지. 아주 기분이 좋았어. 오랜만에 집에 사람들이 온다니까. 할매가 없으니까 자식놈들 얼굴도 못 본 지가 한참 됐거든. 이 동네 사람들 다 그렇게 살지만, 사실 난 배고픈 건 참아도 사람 그리운 건 못 참겠어. 당췌 외로운 게 적응이 안 돼. 그게 참 무서운 거야. 어떤 할배랑 할매는 외롭다고 자살도 하거든. 몸이 아프면 더 외로우니까 농약도 마시고 수면제도 먹고 휙 가버려.

형사 그 사람들은 왜 왔다고 그러던가요? 인적이 드문 동네에 온 이유가 뭐래요?

최선한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는다데. 카메라도 크고 짐도 많았어. 신기하다고 우리 집도 구석구석 사진을 찍더라고. 형사 양반, 혹 젊은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형사 예.

최선한 설마… 죽었어? 그래서 날 이 먼 곳까지 데려와 물어보는구먼. 자살했나? 아니, 자살을 왜 우리 동네까지 와서 하나? 안 그래도 노인들이 자살을 많이 해서 속이 시끄러운 마당에. 설마? 설마 날 의심하나? 내가 죽였다고 의심하는 거야?

형사 아닙니다. 죽진 않았습니다.

최선한 죽진 않았다니, 그럼 사경이라도 헤매고 있단 말인가?

형사 정말 아무 일도 모르시는 거죠?

최선한 무슨 일 말인가?

형사 그날 영감님 댁에서 잤던 여자분한테 신고가 들어왔어요. 영감님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그래서 영감님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겁니다.

최선한 (어이없는 웃음) 지, 지금 뭐라 그랬나? 내가 뭘 해? 나 참, 기도 안 차서. 말이 돼야 대거리를 하지. 그 처자 어딨어? 젊은 놈이랑 시시덕거리며 별짓을 다 해놓고. 에이, 벼락 맞을 놈들! 아무튼 도시 사람들은 무서워. 젊은 놈들은 더 무섭고. 도시 사는 젊은 놈들이니,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저희도 여자분 신고만 받고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영감님이 정확한 근거를 대시고 알리바이가 성립되면 무죄가 될 수 있어요. 사실, 저도 신고받고 의아했어요. 성폭행을 했다는 게… 물론 정정하시지만… 성폭행 같은 건 솔직히 뭔가 왕성한 사람들의 문제죠. 그러니까 제 말은 욕망의 문제라는 겁니다. 성욕이 왕성해서 억제할 수 없다든지, 조절이 불가능하다든지….

최선한 당췌 무슨 말인지, 이놈의 나라는 왜 이 모양인가? 내가 지은 죄라곤 칠십 평생 먹거리 대주느라 뼈 빠지게 일한 것밖에 없는데. 내가 이래 봬도 70년대 새마을운동 역군이야. 마을에 수리 시설 갖추고 통일벼 심고. 자네 부모들 다 내가 지은 쌀 먹고 살았어. 그래서 나라가 이만큼 사는 거야. 그런데 배부르게 다 처먹고 이제 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형사 맞습니다. 고생 많이 하신 세대죠. 그런데 영감님, 살기 좋아지니까 세상이 달라졌어요. 여자들 입김이 아주 세졌거든요. 성추행, 성폭력에 대한 처벌도 강화되었고. 여자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모멸감을 주면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신고가 엄청 늘었어요. 저희도 죽을 맛입니다. 남자끼리니 하는 말인데요, 사실 여자도 문제죠. 요즘은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니까요. 위고 아래고 죄다 벗고 다니면서 쳐다보면 신고하니. 그렇게 들이대면 어느 남자가 흥분이 안 되겠어요? 피가 몰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원인 제공자는 처벌을 안 받고, 자연현상에 순응한 남자들만 처벌을 받잖아요. 저도 같은 남자로서 신고를 처리하려고 보면, 솔직히 납득이 안 갈 때가 많아요.

최선한 지금 젊은 처자가 내가 그 처자를 쳐다봤다고 신고를 했다는 말인가?

형사 그건 아닙니다. 여자 진술에 의하면 강제로 성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최선한 아이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먼.

형사 할아버진 그런 일이 없으시다는 거죠?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그러실 줄 알았어요. 뭐 기껏해야 우연히 엉덩이나 허벅지에 손을 대셨겠죠.

최선한 아니야! 아니라니까!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당해보는구먼.

형사 저희는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조사를 해야 하거든요. 저희 입장 좀 이해해주시고 협조해주세요. 그날 일을 차근차근 말씀해주실래요. 그 비상한 총기로.

최선한 내 참, 총기를 별 쓸데없는 데 다 쓰는구먼. (눈을 들어 신문실 너머의 툇마루를 바라본다.) 처음엔, 버스에서 내린 젊은 청년이 소피가 급하다고 해서 우리 집 화장실을 쓰라고 했어.

사진기를 들고 있는 윤노을이 툇마루에 걸려있는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다. 윤노을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최선한이 담요를 들고 나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윤노을 (인기척에) 깜짝이야.

최선한 뭘 그렇게 보나?

윤노을 (손가락으로 액자를 가리키며) 이게 할아버지예요?

최선한 (담요를 주며) 덮어. 엄동설한에 춥지도 않은가. 허연 다리를 다 내놓고.

윤노을 고맙습니다. 진짜 미남이셨네요. 흑백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아요.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그런 소릴 하도 들어서 귀찮았어.

윤노을 멋쟁이셨나 보다.

최선한 활짝 폈을 때야. 지금은 저렇게 먼지에 덮였지만. 청년은 화장실에서 아직 안 나왔어?

윤노을 예.

최선한 이 시골에 뭐 볼 게 있다고 왔나? 늙은이들만 사는 곳인데.

윤노을 좋은데요. 할아버지, 근데 이 동네 민박집 있어요?

최선한 민박? 이런 촌 동네 누가 온다고 민박을 해? 잘 데 없으면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돼. 할멈도 없고 방도 하나 비니까.

윤노을 정말요?

이때, 최바다가 나온다.

윤노을 오빠, 할아버지가 오늘 하루 재워주신대.

최바다 처음 뵀는데 신세를 져도 될까?

최선한 신세는 무슨 신세. 시골 할아비네 놀러왔다 생각하면 되지.

윤노을 우와, 나 이런 집 체험해보고 싶었는데. 텔레비전 보면 온돌방에서 몸 녹이고 가마솥에서 밥해먹고. (윤노을이 최선한을 안았다 푼다. 팔짱을 끼며) 진짜 우리 할아버지 같다. 우리 할아버진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는데.

신문실에서 형사가 과거를 진술하고 있는 최선한에게 질문을 한다.

형사 여자분이 먼저 안았다고요? 팔짱도 끼고?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그렇다니까요. 여자들은 지 좋아서 먼저 접촉을 하고는 반응을 해주면 바로 돌변해요. 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벌레 보듯 한다니까요. 참 희한해. (사이) 그래서요?

윤노을 (시골집 조명 밝아지면) 우선 가방을 두고 동네 좀 돌아보고 오자.

최바다 그래.

최선한 금방 어두워지니까 빨리 돌아와.

윤노을 예, 다녀올게요.

최바다와 윤노을이 손을 잡고 나간다. 신문실과 최선한에게 조명이 들어온다.

최선한 젊은 사람들 뒷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좋았어. 잘해주고 싶데. 잘해주면 나중에라도 자주 놀러 올지 모르니까. (나무를 날라다가 가마솥에 불을 때운다.) 혼자 지낼 때는 가스비 아끼려고 싸늘하게 지냈는데, 간만에 군불도 땠지. 온돌방에서 자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무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잘 때진 않는데 그날은 남은 나무를 다 땠어. 놀러 온 손주들 같아서. (쌀을 가마솥에 넣고 나무를 넣는다.) 오랜만에 군불을 때고 앉아있으려니 눈이 맵더라고. 눈물도 나고. 옛날 일들도 떠오르고. 난 늙을 줄 몰랐는데. 문득 내가 낯설데. 서럽고. (사이) 돈이 있으면 집도 사고 땅도 살 수 있잖아. 배고프면 음식도 사고 추우면 전기장판도 사고. 그런데 요놈의 젊음은 돈 주고도 살 수가 없어.

가버리면 당췌 되찾을 길이 없는 거야. 그 젊은 사람들이 깔깔대고 뛰어다니는 게 부럽데. 하긴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영감님이 너무 잘해주셨네요. 그러니 여자가 오해를 한 거예요. 딴 맘 품고 그러는 줄 알고. 요즘 사람들은 잘해주면 일단 의심부터 하거든요. (혀를 찬다.) 손님은 언제 돌아왔어요?

최선한 (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 상을 차려놓고도 한참 후에. 밥상을 보고 좋아했지.

윤노을과 최바다가 밥상에 둘러앉으면 시골집 조명이 환해진다.

윤노을 우와, 맛있겠다. 이걸 할아버지가 다 하신 거예요? 진짜 시골 밥상이다. 사진 찍어도 되죠?

최선한 뭐 찍을 만한 것도 없는데.

윤노을 제가 딱 원하는 샷인데요.

최바다 배고프다. 빨리 찍어.

윤노을 할아버지랑 둘이 앉아봐. (사진을 찍으려 하며) 할아버지 웃으세요. 예, 아주 좋아요. (최바다에게 사진기를 주며) 할아버지랑 나도 찍어줘.

윤노을이 최선한 어깨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팔짱을 끼며 포즈를 취한다. 최선한이 어색하게 웃는다. 최바다가 사진을 찍는다.

윤노을 한 장 더. (최선한 팔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며) 할아버지 브이. (최선한도 어색하게 웃으며 브이를 한다.)

최바다 (사진을 찍고 윤노을에게 사진기를 주며) 이제 밥 먹어도 되지?

최선한 어서 들어.

윤노을 (사진기를 들여다보며) 주름이 아주 멋지세요. 자연스러운 얼굴 나이테 같아요. 서울 가서 사진전 하게 되면 이 사진 전시해도 될까요?

최선한 늙은이 얼굴 전시해서 뭐에 써. 예쁘고 팽팽한 얼굴도 많은데. (돋보기를 찾아 쓰고) 너무 늙었어.

최바다 (윤노을에게) 식기 전에 빨리 먹어.

최선한 사진이나 거울로 보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가늠이 안 돼. 마음은 늘 똑같으니깐.

윤노을 마음이 중요하죠. (밥을 먹기 시작한다.)

최선한 자네들 이름은 어떻게 되나?

윤노을 윤노을이에요. 오빠는 바다고.

최선한 바다? 노을이랑 바다야? 천생연분이네. 크크크.

윤노을 할아버지 식당 차리셔도 되겠어요.

최선한 손님이 있어야지. 이 동넨 곧 사라질지도 몰라. 여기 살던 노인네들 다 죽으면.

윤노을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하세요?

최선한 진짜야. 얼마 전까지 명절엔 자식들이 내려와 북적북적했는데. 해가 갈수록 그것도 드문드문해서 명절도 조용하지. 늙은이들 죽어야 북적북적하는데. 그게 뭐 좋은 일도 아니고. 좋은 일로 북적북적해야지, 사람 죽은 일로 북적대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사실 그래도 난 그렇게라도 북적대는 게 좋아. 사람이야 늙으면 다 죽는 거고. 살아 있을 땐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 동네에서 장례 치를 때가 난 제일 재미져. 모여서 상여도 만들고 무덤도 파고 같이 술 마시고 밤새 얘기도 하고. 오일이 금방 가지. 오일장 끝나면 다시 이 썰렁한 방에 돌아오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최바다노을아, 우리 오늘 밤늦게까지 말벗 해드리자.

윤노을 그래.

최선한 오늘 나 계 탔네. 많이 들어. 내가 자네들 잘 방에 군불 좀 더 넣고 올게.

윤노을 예. (점퍼를 벗으며) 방이 아주 따뜻해요.

최선한은 윤노을이 점퍼를 벗는 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윤노을은 봉긋한 가슴이 드러나는 터틀넥 티셔츠를 입었다.

최바다 (윤노을의 무릎을 보고 만지며) 너 여기 언제 멍들었어?

윤노을 정말? 아까 사진 찍다 바위에 부딪혀서 그랬나 보다.

최바다 (발을 만져보며) 발이 왜 이리 차? (발을 비벼준다.)

최선한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최바다가 최선한을 쳐다보자 그는 흠칫 놀라며 방을 나간다. 조명은 신문실과 최선한에게만 들어온다.

최선한 (형사에게) 그렇게 방을 나왔지. 그리고,

형사 잠깐만요. 여자분이 몸매가 드러나게 옷을 입었었다고요?

최선한 응. 요즘 젊은 여자애들은 다 펭귄인가 싶데. 요상하게 추위를 안 탄다는 생각이 들었어. 한겨울에 어떻게 그렇게 입고 다니나?

형사 그래서 눈이 자꾸 갔고요?

최선한 난 눈이 안 달렸나? 신기한 게 있으면 저절로 눈이 가지.

형사 그렇죠, 그렇죠. 요즘 시골에서 젊은 여자는 보기 힘드니까. 간만에 보셨으니 신기하셨겠죠. 그래서, 혹시,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어요?

최선한 내가 오리도 아니고, 손주뻘을 품어 뭐하게? 알 부화할 것도 아닌데.

형사 아니, 제 말은 욕정이 생기셨느냐고 여쭙는 거죠. 그건 배고프면 밥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니까.

최선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지 둘이 신나서 할 건 다 했는데….

형사 다 하다뇨?

윤노을과 최바다가 방에서 키스를 하고 있다. 그림자로 보임.

최선한 젊은 애들이 따땃한 방에 붙어 앉아서 뽀뽀를 하고.

형사 여자분 진술엔 영감님이 강제로 입술을 댔다고 되어있어요.

최선한 청년은 뭐하고? 그 청년이 내가 뽀뽀하게 놔뒀대? 아하~ 헤어졌구먼. 충격받아서 미친 게야.

형사 혹시 귀엽다고 볼에다가 쪽 한 기억도 없습니까?

최선한 둘이 붙어서 당췌 떨어지질 않았어. 내가 볼 땐 그 여자 미친 게 틀림없어.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왜 하필 날 거기에 갖다 붙인다나?

형사 그럼 영감님은 밖에만 쭉 계셨나요? 방엔 들어가지도 않고?

최선한 어떻게 들어가? 눈치 없이. 산통 깨게. 걔네가 뽀뽀만 한 것도 아닌데.

형사 안 들어가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최선한 그러니까, 그게… (방 밖에 서 있다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차반을 내려놓고 발을 돌렸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고. 문이 살짝 열려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라 호기심에,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까, 잘못했네. 늙은이가 주책이지. 내 나이에 무슨 낙이 있겠나. 그럼 안 되지만. 그냥 좀 뭐랄까 그리움이랄까, 외로움이랄까, 그래서 틈으로 봤어.

형사 뭘 보셨는데요?

최선한 뭘 봤겠나? 그 짓이 뭐 특이할 게 있나, 다 똑같지. 그런데도 왜 그리 눈이 가던지.

윤노을 그만해, 할아버지 들어오셔.

최바다 잠깐만, 똑바로 해봐.

윤노을 하지 말라니까.

최바다 넌 발목이 참 가늘다. 허벅지가 부드러워.

최선한 그 말을 들으니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했어. 모든 향수가 다 밀려왔지.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지는 듯도 하고 젖비린내가 나는 듯도 하고.

최바다 가슴이 탱탱하네. 이건 농구공, 이건 축구공. 하하하.

윤노을 호호호. 장난치지 마.

최선한 그동안 얌전히 조는 줄만 알았던 내 거시기가 꿈틀했지.

최바다 난 네 목덜미가 제일 좋아. 이 말랑말랑한 귓불이랑.

최선한 야릇했어. 내 젊음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파바박 짜릿하고.

최바다 허리가 왜 이렇게 잘룩해. 엉덩이는 왜 이리 토실하고.

최선한 밖에 있어도 하나도 춥지 않았어. 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애들처럼, 바다에서 뛰노는 고등어처럼, 아주 팔팔했지. 내가 다시 남자가 된 느낌이랄까, 모든 피가 샘솟고 동네를 열댓 바퀴 돌아도 힘이 남을 거 같았어.

최바다 하고 싶다.

윤노을 미쳤어. 여기서?

최선한모든 피가 그곳으로 몰리는 것 같았어. 그 있지 않은가? 옛날에 무슨 영화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막 옷이 터지면서 아주 큰 남자로 변하는 거. 내가 그렇게 되는 기분이었어. 하얗게 센 머리도 다시 검어지고 팔다리 근육이 단단해지고 얼굴의 모든 주름살이 다리미가 지나간 듯 곧게 펴졌지. 그리고 나도 아주 예쁜 여자를 품고 있는 착각이 일더라고. 다방에서 돈 내고 입술 빨간 년 허벅지 만질 때랑은 전혀 달랐어. 밤공기도 시원하고 별도 많고 상쾌했지.

형사 영감님, 이 중요한 말을 왜 이제 하세요? 처음부터 여자분이 같이 온 청년이랑 사랑을 하고 영감님은 문틈으로 다 훔쳐봤다고 하면 간단할걸.

최선한 자, 잘못했네. 난 그저 궁금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당췌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것도 죄가 되나?

형사 그렇진 않습니다. 여자분이 그것 때문에 신고한 게 아니니까. 둘 다 영감님이 지켜보는 걸 눈치채진 못했어요?

최선한 그 상황에 뭐가 눈에 들어오겠나.

형사 모른척한 걸 수도 있죠. 둘의 관계를 숨겨야 한다거나… 빙고! 그래서 깊숙한 동네까지 간 건 아닐까요? 아까 그 청년이 아주 멋지다고 그러셨는데, 혹시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거나, 뭐 굉장히 귀티가 난다거나, 그러진 않았나요?

최선한 배우 못지않았지.

형사 아, 그래요? 대화 중에 뭔가 그런 특이한 내용은 없었어요?

최선한 둘이 여기서 살고 싶단 말을 하더군.

최바다 우리 여기서 같이 살까?

윤노을 여기서? 뭐하면서?

최바다 난 농사짓고 넌 사진 찍으면서.

형사 그런 말을 했다고요? 농사짓고 싶다고?

최선한 그랬어. 정확히 기억해. 왜냐면 내가 젊었을 때 한번, 딱 한 번 우리 마누라 몰래 바람피운 적이 있었거든. 도시에서 온 여자랑. 그림 그리는 여자였어. 그림 그리러 자주 왔지. 올 때마다 그 여자 있는 집에 드나들었어. 그때 내가 그랬지. 여기서 같이 살면 좋겠다고. 난 농사짓고 당신은 그림 그리면서. 어쩜 남자들이 사랑하고 나서 여자들한테 하는 말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그 시절, 그 여잘 품고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지. 한여름 밤의 꿈 같았어. 그 꿈만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져.

형사 요즘 농사짓고 싶어 하는 청년이 있나요? 여자를 그렇게 꼬시는 청년이.

최선한 (혼잣말하듯) 추억이라는 게 평소엔 어디에 숨어 있는지 신기해. 뭔가 툭 건드려주면 스물스물 죄다 기어 나오거든.

형사 영감님 진술은 그 여자분한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네요?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이렇게 되면 두 분 중 한 분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여자 분은 혼자 여행 중이었다고 했고 이 사진들을 가져왔어요. (봉투에서 사진들을 꺼낸다.) 손님이 찍었다는 사진입니다. 풍경을 제외한 인물 사진, 이건 영감님, 이건 영감님과 그 여자분. 그리고 이건 영감님 집, 여자분 진술대로 사진 어디에도 청년은 없어요.

최선한 (사진을 뒤적이며) 왜 없어? 나랑 청년이랑 찍은 사진도 있어. 그리고 이거. (사진을 들며) 이건 그 청년이 아가씨랑 나를 찍어준 거야.

형사 그렇죠, 그렇죠. (사진을 가져다 보며) 제삼자가 둘을 찍어줬겠죠. 그럼 도대체 여자분은 왜 신고를 했을까요?

최선한 혹 말이야, 나한테 땅이나 집이라도 있을까 봐 그러는 거 아닌가? 노인네 등쳐먹는 도시 년일 수도 있지. 요즘 그런 여자 많다던데.

형사 성폭력으로 신고해서 돈으로 합의를 보려고요?

최선한 그렇지.

형사 그래도, 영감님, 여자분이 이런 신고를 하는 건 대단한 용기예요. 아무리 처벌이 강화됐어도 소문나는 걸 두려워해서 신고를 안 하는 분도 많거든요.

최선한 내 촉이 맞아. 당장 데리고 와. 대면을 시켜. 그날 이야기를 조근조근 따져보게.

형사 그러실래요. (문을 연다.) 박 형사, 최선한 할아버지 신고한 여자 분 들여보내.

윤노을이 들어온다. 그녀는 최선한에게 달려든다. 형사가 막는다.

윤노을 미친놈!

최선한 뭐, 뭐라고?

윤노을 천벌을 받을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수치스러운 처벌을 받아야 돼.

최선한 저, 저 새파랗게 젊은 기집애가 입이 터졌다고 말하는 것 좀 봐라, 넌 네 애비도 없고 할애비도 없냐?

윤노을 우리 아빠한테 말했으면 할아버진 벌써 걸어다니지도 못했을 거예요.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해서 그 찌질한 목숨이 붙어있는 줄 알라고요.

형사 그만하세요. 참으세요. 앉으세요.

최선한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요즘 젊은 애들 무섭다더니. 무섭네, 무서워.

윤노을 먹여주고 재워줘요? 그렇게 꾀고 데려가서, 난 정말 그런 줄로만 알고… (울컥한다.) 그렇게 늙어도 아직 성욕이 남아있나요? 할아버지 손녀가 이러면 어떻겠어요? 그러고도 할 말이 있어요? 어떻게 그 늙은 몸으로 아무 데나….

최선한 뭐라고? 내 몸뚱이가 어때서? 지금 청춘이라고 늙은이한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성욕이 붙어 있느냐고? 난 아직도 팔팔해. 너 같은 기집애 열댓 명도 더 상대할 수 있어.

윤노을 지금 그게 자랑이에요? 어느 여자가 당신같이 늙은 사람을 상대해주는데요? 할아버진 더 이상 남자가 아니에요. 할아버진 남자 모습을 한 껍데기라고요. 욕정만 남아서 침이나 질질 흘리는 변태!

최선한 야! (목이 메서) 너, 너는 안 늙을 줄 알아? 너는 안 시들 줄 알아?

형사 아가씨! 그만하세요. 듣자 듣자 하니 노인분한테 너무하시네.

윤노을 너무하다뇨? 뭐가 너무해요? 형사님도 남자라 남자 편드는 거예요? 저 사람한테 (울컥해서) 당한 것도 억울한데, 너무하다뇨? 제가 지금 제정신으로 이렇게 서 있는 줄 아세요?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데, 너무하다뇨?

형사 일단 앉으세요.

최선한이 툭 쓰러지듯 의자에 앉는다. 그는 마음을 쓸어내리기가 힘겹다.

윤노을 (앉으며) 처벌해주세요. 전 합의 볼 마음 전혀 없어요.

형사 합의 볼 마음이 없다고요?

윤노을 예.

형사 이분 진술에 의하면 그날 아가씨랑 온 청년이 있었다는군요.

윤노을 청년이라뇨?

형사 청년이랑 관계하는 걸 영감님이 문틈으로 지켜봤다고 진술하셨어요.

윤노을 뭐, 뭐라고요?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럼 제가 젊은 남자랑….

최선한 넌 분명히 젊은 놈이랑 뒹굴었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윤노을 (헛웃음을 날리고) 지금 제가 젊은 남자랑 재미보고 즐거워서 떠들고 있다는 거예요? 경찰서까지 와서. 할아버진 양심도 없으세요? 나이가 들면 수치심도 없어지나요? 수치심을 못 느껴요? 창피한 걸 못 느끼시느냐고요?

형사 (윤노을을 제지하고 앉히며) 진정하세요! 이 아가씨 정말 못쓰겠네. 영감님은 같이 온 청년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노트북 기록을 찾아내고) 하얀 목폴라에 곤색 코트, 체크무늬 바지를 입음. 워커를 신음. 얼굴은 진하게 생김. 눈썹이 진하고 눈이 부리부리함. 매부리코에 입술이 얇고 눈과 이마 근처에 점이 있음.

윤노을 도대체 그건 누구예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목폴라에 코트에 뭘 신어요? 워커… 눈썹이 진하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자, 잠깐만요,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뜬다.) 어디서 봤는데… (탁자 위의 사진을 뒤적이며) 혹시… (사진을 한 장 찾아 들여다보고 최선한을 쳐다보며) 맞는군요. 당신이군요. 마루에 붙어있던 액자에 있던 당신 젊었을 때 모습.

형사 예? 그게 무슨 말이죠?

윤노을 (형사에게 사진을 주며) 저 할아버지 집 마루에 액자가 걸려있어요. 젊었을 때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데 그 속의 모습이, 보세요, 목폴라에 코트를 입고 체크무늬 바지….

최선한 너랑 같이 온 남자야. 최바다! 내가 정확히 기억해. 왜냐면 옛날 애인도 날 그렇게 불렀으니까. 그 여자가 바다고동을 좋아해서 내가 고동이라 부르고 그 여자가 날 바다라고 불렀어. 그래서 처음에 너희 이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던 거야.

형사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고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영감님.

최선한 나는 거짓말을 한 개도 보탠 게 없어. 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어.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아하, 그 버스 운전사를 불러. 그 사람이 내 말을 입증해줄 테니.

형사 영감님, 혹시 이전에도 최바다라는 청년이 온 적은 없었나요?

최선한 그게 무슨 말인가?

형사 예전에도 젊은 여자와 최바다라는 청년이 찾아온 적이 없었냐고요?

최선한 없었어. 처음이야.

형사 영감님, 가끔 최바다 같은 청년이 되고 싶으세요?

최선한 당치도 않은 소리. 그게 가능한가? 나야 머리도 세고 지릉내도 나고 허연 비듬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청년은 그야말로 피 끓는 청춘이었어.

윤노을 형사님,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어요. 제발 빨리 처벌해주세요.

형사 나가 계세요. 만약 혼자 갔다면 아가씨한테도 책임이 있어요. 남자 혼자 사는 델 왜 따라가요?

윤노을 남자라뇨? 전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잖아요. 제 또래 누가 할아버질 남자라고 생각해요? (눈물이 터진다.) 할아버지가 남자라니? 제가 남자를 따라갔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형사 아니 그럼 할아버지가 여자라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나가 계세요!

윤노을 전, 억울해요. 억울하다고요.

형사는 윤노을을 데리고 나간다.

최선한 나쁜 것! 못된 것! 어찌 늙은 사람을 이렇게 홀대하나? 좋고 재미진 건 젊은 놈이랑 다 해먹고 늙은이는 감옥에 넣으라고? 당췌 이놈의 나라는 왜 이 모양인가?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이 세상은 젊었을 때만 천국이야. 늙은이들은 죽어야 돼. 외로워서 죽고 쓸쓸해서 죽고. (문을 쳐다보며) 에구, 이것아, 너도 금방이다. 당해봐야 이 시린 마음을 알지. 잔인한 것!

형사가 들어와 앉는다. 녹음기를 켠다.

형사 버스 운전사에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최선한 고맙네.

형사 영감님, 검사 앞에서도 아까처럼 그대로 진술하시면 됩니다.

최선한 당연한 거 아닌가? 숨길 게 뭐가 있어? 증인도 불렀는데. 난 감옥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아. 썰렁한 시골 방이나 감옥이나 뭐가 달라? 차라리 감옥에 가면 말동무라도 있을 거 아니야. 혹시 알아? 예쁜 할머니라도 있어 연애라도 할지. 늙으나 젊으나 그런 맘은 똑같으니까. 그래도 누명은 벗겨주게. 맹세코 저 여자애를 건든 적은 없으니까. 같이 온 젊은 남자를 꼭 찾아봐.

형사 영감님.

최선한 왜?

형사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최선한 올해로 십이 년 됐지. 그건 왜 묻나?

형사 그 후로 쭉 혼자 사셨어요?

최선한 그랬지.

형사 많이 외로우셨어요?

최선한 말해 뭐해, 입만 아프지.

형사 정상참작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네요. (사진을 보며) 이럴 수도 있군요. 늙으면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요….

최선한 달래긴 어떻게 달래? 달랜다고 달라져? 늙으면 우울하고 슬퍼질 수밖에.

형사가 최선한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최선한 또한 형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서서히 꺼져가는 조명. 〈막〉

 

 

당선소감] 이십년 전 내 나이였던 엄마에게 상을 바친다

 

이십여년 전 어머니가 가셨다.

그리고 올해, 내가 딱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엄마는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고루 넷을 두셨고 그들을 기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다 몹쓸 병에 걸려 악착같은 생활력이 무색하게 쉬이 가버렸다.

억척어멈처럼 항상 꿋꿋하던 그녀는 위암 말기에도 매일 침대에 앉아 곧 마실을 나갈 사람처럼 머리를 빗었다.

임종 전날도 그녀는 변함없었고 그 덕분에 넷이나 되는 우리 형제 중 아무도 그녀의 임종을 가늠치 못해 그 자릴 지키지도 못했다. 물론 아빠도. 그녀는 그렇게 쓸쓸히 갔다. 그녀의 죽음은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낯설다. 납득이 될 조짐도 전혀 없고. 그저 생각만 하면 구체적인 뭔가가 떠오르기도 전에 눈물부터 나고 본다. 그리고 올해는 더욱 그랬다.

이십여년 전에 내 엄마로 살던 그녀와 동년배가 되고 나니 그녀의 삶이 더욱 새록새록하고 더욱 슬프고 애잔하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같은 나이에 그녀는 삶을 부여잡고 싶은 이유들과 홀로 어렵사리 이별을 했고 지금 난 신춘이라는 꿈같은 신기루에 취해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해준 것도 없이 무심히 보내버리고 만 그녀에게 이십여 년 전의 내 나이였던 나의 엄마에게 이 상을 국화 대신 바친다.

▲1971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졸업
▲한양대 연극영화과 박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형사극으로 짜임있게 외로운 시골마을 표현

 

170편 가까운 응모작을 대하면서 희곡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것에 놀랐다. 그 중 절대다수가 희곡의 문법조차 모른 채 쓰였다는 점에 더 놀랐다. 다행히 당선작 수준의 몇몇 작품을 추려낼 수 있었다. 김원태의 '폭염'은 다문화사회의 환경 안에서 두 출소자의 갱생 의지와 그 좌절을 다루는데 구성이 매우 탄탄했다. 강명구의 '문방사우'는 도박장을 무대로 살아가는 고학력 낙오자들을 그리는데 성격 창조가 뛰어났다. 이선의 '목격자'는 돈 때문에 친구를 뺑소니차 운전자로 허위 고발하는 과정을 쫓는데 역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다. 다만 '폭염'의 경우는 상황의 신빙성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자의식을 드러내었고, '문방사우'는 인물의 성격 설정과 사건의 흐름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며, '목격자'의 경우는 거듭되는 사건의 반전이 상투적이었다.

위의 작품들에 비해 이미경의 '우울군 슬픈읍 늙으면'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노인들만 버려진 채 사는 시골의 우울하고 슬픈 풍경을 수사극 형식으로 짜임새 있게 들춰낸다. 젊은 여인을 성폭행한 노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 치매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와, 성폭행을 수사하는 형사의 태도에서 보이는 여성폄하적 사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교직되면서 극의 차원을 확장한다. 구성, 성격 창조, 언어 등 희곡의 핵심 부문에서 단연 수월하여 당선작으로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