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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광장 / 정승헌


돌담도 스크럼 짠 유월의 대한문 앞
물대포 날아드는 왜자한 화단 너머
샐비어 붉은 깃발이 자리싸움 한창이다

질끈 두른 머리띠에 징소리가 울린다
응어리진 선소리꾼 목이 쉰 구호마다
신호에 발 묶인 차들 덩달아 소리치고

발 디딘 한 뼘 땅을 탐하려는 트레바리
촛불도 고개 숙인 분향소 흘금대다
저물녘 도시 소음에 귓불이 시려온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꼬리 문 메아리들
흘레바람 비를 몰아 묵은 앙금 씻고 나면
헐벗은 저 꽃밭에도 봄은 그예 오겠지

 

[당선소감] "뿌리를 일깨워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갓난아기 때부터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과 우리나라를 들락날락하는 생활이 11년이 넘었다. 유난히 우리 부모님만 꼭 독립 유공자 후손인 양 한국에 뿌리내리기를 원하는지, 영어도 서툰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집에만 오면 그때마다 부모님은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한국의 뿌리를 유독 강조했다. 특히 교사 출신인 어머니는 남다른 교육열로 다른 친구들처럼 집에서 영어 한마디 더 연습시키기보다는 항상 한국말, 한국 교육의 중요성을 더 일깨워 줬다. 기본 과목은 물론 한국 고전, 현대문학, 논술까지 과외를 받게 하였으니.

어릴 때는 다양한 학업을 병행해서 혼란스러웠지만 오히려 풍부한 문화적 경험이 큰 재산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우리말을 세계화할 수는 없을까? 언젠가는 영국의 소네트처럼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글이 알려졌으면 하는 열망과 감히 내가 그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닌 괴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에서 나의 스승이자 감시자인 아버지와 중심을 잡아 일상생활에서 옆길로 새지 않고 바르게 인도해 주신 교육자인 어머니. 앞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의 젊은 시조시인이 되도록 매진하겠다.

▲1981년 서울 출생
▲아주대 미디어학부 졸업
▲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재직


[심사평] 삶의 장면 뒤로 보이는, 廣場의 새로운 힘

신춘문예는 무엇보다 신(新)의 개진과 가능성을 높이 친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낡은 서정이나 안이한 관념의 세계를 벗어낸 작품이 늘어 반가웠다. 그중 눈에 더 띈 것은 정승헌, 김지선, 후인영, 용창선, 신준희, 조경섭씨의 작품이었다. 김지선씨의 '지리산 만복대' 등은 발랄한 어법과 발상이 신선했고, 후인영씨의 '빈 솥'은 밀도와 심도를 아우르는 감각적 형상화가 빼어났지만, 작품의 편차가 걸렸다. 용창선 씨의 '겨울 수화(手話)'는 절제된 묘사에 비해 참신성이 달렸고, 신준희씨의 '담쟁이 DNA'나 조경섭씨의 '민들레의 몽상'은 현실성을 부각하는 구조화에 신뢰가 갔지만, 압축미 미흡에 따른 이완이 느껴져 내려놓았다.

정승헌씨는 안정적인 시조 문법과 작품의 균질성이 돋보였다. '광장'이라는 현실의 역동적 장소성과 삶의 장면들을 네 수에 고르게 배치하며 우리 사회의 바람을 '꽃피는 광장'으로 승화해 가는 역량도 뛰어나다. '스크럼 짠 유월의 대한문 앞'에서 꿈꾸는 '봄'은 당면한 계절과 상관없이 우리가 모두 바라는 상징적인 봄이겠다. 주문을 덧붙이면,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머물 수 있는 공소성의 우려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젊은 시는 생물학적 젊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직시나 발견의 시선은 피상적 인식을 넘어서 젊은 시조를 개진하는 좋은 힘이다. 정승헌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부디 새로운 시조의 꽃 광장을 열기 바란다.

(심사위원 : 정수자)